(1998/11/16) 교갱협 청년목회자세미나 주제특강

비교정치학자의 눈으로 보면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당면한 최대의 장애물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해보았자 별 수 없다." 는 부정적 사고방식이다.

한국의 외환위기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이 나타나고 있다.  자유주의적 설명과 더불어 맑스주의적 설명, 현실주의적 설명 등이 주로 발견되고 있다.  이 설명들은 각기 금융적 요인이나 정치적 요인, 구조적 요인, 국제적 요인 등을 주요 변수로 삼고 있다.  이 요인들을 조합하는 논리 중에는 보다 과학적인 것도 있고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것도 있다.  다양한 설명들은 서로 경쟁적이며 때때로 대립되기도 하기 때문에 부득이 한 설명에 대폭 의존하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도 이러한 설명에 입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뢰할만한 설명을 찾아내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마땅히 무지와 독단의 비극을 피하기 위해 보다 과학적인 설명을 추구해야 한다.

이 논문은 한국외환위기의 뿌리를 1980년대에 강화되어온 한국의 천민자본주의의 위기에서 찾고 있다.  한국의 신중상주의적 산업화는 재벌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적 집중을 초래하였다.  1980년대에 이르러 재벌의 힘이 더욱 강해지고 이들이 지지하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무분별하게 지배하면서 한국 사회의 독과점적 구조는 더욱 강화되었다.  정치적, 상업적 독점의 추구와 이를 위한 독점적 계층화가 시도되었다.  독점이 있는 곳에 불로소득이 나타난다는 것은 오래된 명제이다.  이를 통해 부정부패가 일상화되고 과시적 소비와 사치향락이 만연하며, 이로서 다양한 사회적 악덕과 부정한 사고방식이 범람하게 되었다.  천민자본주의는 매우 심각한 윤리적 타락의 구조적 원인임이 틀림없다.  인간 사회에서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회는 없다.  그러나, 80년대와 90년대의 한국 사회는 유별나게 타락하고 부패한 사회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적 요소는 역으로 외환위기의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예컨대, 무분별한 차입으로 갖가지 사치와 향락을 누렸던 재벌들의 행태가 한국의 외환위기를 발생시킨 가장 큰 요인이라는 점에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이러한 윤리적 측면을 놓고 볼 때 외환위기의 발생은 한국 교회의 행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신앙적 차원에서 본다면, 극히 적은 수의 선지자들을 제외하고, 한국 교회 다수는 이 위기에 대해 심각한 책임을 져야 한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의 죄에 빠졌을 때 모세가 취한 행동을 기준으로 보면 우리의 잘못이 쉽게 드러나고 있다.  외환위기와 관련하여 우리 한국 교회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죄를 범하였다.  첫째, 백성의 죄를 보고도 회개를 촉구하지 않은 죄이다.  둘째, 회개를 촉구하기는 커녕 그들의 죄를 좋게 여겨 이를 추종한 죄이다.  셋째, 백성들의 죄를 중보하기 위해 우리 자신들을 희생의 제물로 드리려 하지 않은 죄이다.  하기야 죄로 눈이 멀어 자신들의 허물조차도 돌아 볼 수 없었으니 어찌 희생의 제물을 드릴 수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환위기에 대한 한국 교회의 인식은 아직도 미몽을 헤매고 있다.  상당수의 교인들은 외환위기에 대해 신앙적으로 무감각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외환위기를 세속의 문제로 간주하는 이원론적 사고방식 때문이다.  혹자는 자신에게는 아직 직접적인 해가 없다고 생각하고 여기에 안주하려 하고 있다.  어떤 자는 과거의 타성에서 벗어나는 사고를 진행하는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마치 서서히 끓고있는 냄비 속에서 삶아지는 개구리와 같이 오랜 부정과 부패에 익숙해 있어서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르고 죽어가고 있는 자들도 있다.  이들은 도리어 죄와 벌에 대한 선지자의 목소리를 교회의 안정을 해치는 자로 간주하고 있다.  마치 바로와 같이 스스로를 강퍅하게 만드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방식 중의 하나는 열광적 몰입이라고 볼 수 있다.  이 태도는 외환위기와 이로 인한 고통을 종교적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올바른 태도이다.  문제는 이들의 신비주의적이고 신성모독적인 독단에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불법적 행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잘 지켜줄 것이며 이를 믿기만 하면 3박자의 축복이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과거보다 더욱 더 산기도와 새벽기도와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이 어려움을 극복케 해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다.  마치 공부를 안해도 열심히 기도만 하면 좋은 학교에 합격시켜 줄 것이라고 주장하는 미신과 흡사하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어보고 우리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분석하는 행위는 불필요하며 귀찮은 것이라고 보는 반지성주의에 젖어 있다.  복음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와 왜곡으로 쉽사리 몰역사적 불신앙의 함정에 빠지고 있다.  이 태도의 주창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이 계시를 주지 아니하였는데도 대중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그릇되게 예언하는 거짓선지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 대세는 아니지만 여기 저기에서 싹트고 있는 복음적 대응을 관찰할 수 있다.  이들은 외환위기를 교회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로 파악하고 있다.  회개와 반성과 개혁, 그리고 미래를 위한 대안이야말로 이들이 자주 쓰는 용어들이다.  사실상 미래의 대안에 있어서 회개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회개를 통해 눈 앞에 가리워졌던 죄의 허물을 벗겨내면 하나님이 주시는 거의 무한한 대안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어떤 특정한 대안에 목을 매달 필요가 없다.  미래는 우리에게 개방되어있다.  더구나 궁극적으로 선지자적 선포에 대해 백성들이 청종할 것이냐는 선지자의 책임이 아니다.  그러므로 더욱 개방적이다.  본 강의도 이러한 복음적 대응책에 입각해 있다.

 

정치경제적 위기의 윤리적 특성

정치경제적 위기일반에 대한 3대 주요설명

1997년에 발생한 한국의 외환위기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설명들이 있다.

첫째는 자유주의적 설명이다.  이들은 외환위기가 국가의 개입으로 인한 시장의 왜곡이 초래한 비극이라고 믿고 있다.  예를 들면, 서울대 경제학부의 김완진 교수는 교수신문에서 외환위기가 삼성자동차의 인가와 관치금융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김영삼씨가 부산지역의 표를 의식하여 삼성자동차를 인가함으로써 한국 경제의 왜곡을 불러일으켰다고 보고 있다.  이들 자유주의자들은 시장 기능의 회복이 해결책이라고 믿고 있다.

둘째는 맑스주의적 설명이다.  경상대 경제학과의 정성진 교수를 비롯한 몇몇 한국의 맑스주의자들은 한국의 외환위기가 국제자본주의의 축적 구조가 발생시키는 필연적 공황의 한 국면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이윤율점감의 법칙이 불러일으키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때문에 투자과잉이 불가피하다.  자본주의가 진행할수록 공황의 가능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공황의 가능성이 증대되고 있다.  한국에서 비교적 먼저 외환위기가 발생한 이유는 한국이 국제자본주의 체계 내에서 비교적 약한 고리이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이들의 설명은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이 강하다.  자유주의는 한국의 외환위기가 재벌의 과다차입 때문이라는 점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이 재벌의 과다차입을 규제하려는 정부의 1995년 시도를 안팎에서 벌떼처럼 공격함으로써 재벌의 의도를 관철시켰던 자신들의 과거를 잊고 있다.  삼성이 시장의 객관적 현실을 무시하고 온갖 방법을 다해 자동차 산업에 진입하려 했을 때 이를 정당화 해준 것도 이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사실이 어떠하든 시장 기능을 추종하기만 하면 결과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반면에 맑스주의자들은 한국이 세계자본주의체계에서 비교적 강한 고리였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국제금융기구(IMF)의 1997년 보고서가 말했듯이 한국은 다른 제3세계 국가들에 비해 제반 경제지표가 상대적으로 건실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한국의 재벌들이 진행한 과잉투자는 국내외로 확산되어있었고 국내적 시장 여건은 과잉투자를 초래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맑스주의적 공황론은 매우 오랫동안 불러온 낡은 합창의 후렴귀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이 어떠하든 간에 자신들의 이론적 틀만을 신봉하려는 태도야말로 허위의식에 입각한 사고체계를 의미하는 이데올로기라는 명칭을 들어 마땅하다.

이들에 비해 세 번째 주류인 현실주의적 설명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필자를 비롯한 현실주의자들은 현재의 세계를 국제적 무정부성 하에서 각 국가 혹은 집단들이 상대적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는 권력의 각축장으로 이해하고 있다.  현재의 국제 체제는 1945년 이후 나타난 미국의 패권이 붕괴되면서 발생한 조정 국면의 체제이다.  달러본위제가 붕괴하면서 나타난 변동환율제와 미국의 쌍둥이 적자, 유러달러 및 저팬달러의 등장, 서구의 복지정책으로 인한 금융자본의 축적, 등이 다양한 위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과거에 어느 정도 국제적으로 용인되었던 제3세계의 금융시장은 막대한 시장개방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처럼 실물경제는 급속히 성장되었으나 금융체제는 극히 허약한 국가들은 이들 국제 금융자본들의 훌륭한 표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외환위기는 이러한 국제적 압력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국력의 문제 때문에 발생했다고 보며, 이 허약성을 촉발한 구조적 요인은 바로 한국의 천민자본주의적 구조이다.

이러한 설명들을 횡단면적으로 분석해 볼 수가 있다.  예컨대, 정치적으로는 김영삼씨가 주도하는 천민연합의 불안정성과 취약한 정치적 리더쉽을 들 수 있다.  금융적 차원에서 보면 홍콩 증시의 대폭락과 일본 투자자들의 대거 이탈, 외환보유고 감소, 이에 수반되는 도덕적 해이 현상과 전도된 선택으로 표현되는 왜곡된 투자 행위 등이 나타났다.  이미 강조한 바와 같이 국제적 측면에서는 미국의 적자와 변동환율제, 복지형 기금의 증대, 유로 및 저팬 달러의 등장, 헷지펀드의 투기화, 수출주도형 발전전략의 유행, 등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 보다 더 직접적인 요인들은 물론 구조적인 것으로서 오랜 국제수지적자의 누적, 단기외채구조로의 악화, 재벌의 과다 차입과 무리한 투자, 부실한 금융기관의 관리 소홀 등이 종합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외환위기의 횡단면적 분석에 있어서 가장 소홀히 다뤄지고 있는 부분은 이 위기의 윤리적 측면이다.  외환위기는 단순히 외환이라는 유동성의 위기만이 아니다.  이는 천민자본주의 체제라는 독특한 형태의 체제가 귀결하는 바를 반영하고 있다.  이 체제는 일정한 윤리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이 윤리적 성격은 바로 외환위기의 성격을 의미한다.  비록 소홀히 다뤄지고 있다고는 하나 사실상 일정한 사회윤리가 그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정신적 기반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소홀히 다뤄서는 안된다.  하물며, 한국의 기독인들에게 이 윤리적 측면의 이해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감당해야할 소명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사적 상황이기 때문이다.

 

정치체제의 윤리적 특성

옛날부터 어떤 종류의 정치체제는 어떤 종류의 특성들을 지니고 있을 것으로 생각해왔다.  예컨대, 민주화와 전쟁의 문제가 그러하다.  1960년대를 풍미했던 근대화론자들은 경제가 발달할수록 민주주의도 발전한다고 생각했다.  제2차세계대전 후의 선진국과 후진국들을 비교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주장이었다.  그러나, 오돈넬 (Quil-lermo O'Donnell) 교수는 이러한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밝힌 바 있다.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거꾸로될 때도 있다.  즉, 고도경제성장기에 자주 발생하는 수입대체산업화의 애로를 타개하는 방안으로 권위주의적 정치체제가 흔히 나타나고 있다.  쉐보르스키 (Adam Przeworski) 교수는 따라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정치체제와 민주화의 정도 사이에 상관관계를 찾기가 힘들다.  단지 일정한 수준의 고도 경제성장을 달성한 국가들에서는 민주주의가 일반화되는 경향을 찾을 수 있다.

전쟁과 정치체제 사이의 관계에 대한 주장만큼 다양하고 재미있는 토론은 드물다.  콥덴(Richard Cobden) 씨는 독재체제는 전쟁을 좋아하고 민주체제는 전쟁을 싫어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레닌(V. I. Lenin)씨는 전쟁, 특히 제국주의적 세계전쟁은 자본주의 체제의 필연적 산물이며 전세계가 사회주의화할 때에만 평화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주장에 대해 니버(Reinhold Niebuhr)교수와 그의 제자격인 왈츠(Kenneth Waltz)교수는 국제체계의 무정부성이라는 특징이 전쟁의 원인임을 밝힌 바 있다.  좋은 체제건 나쁜 체제건 상대가 강하면 감히 덤벼들지 못한다.  상대가 약하면 지배하려 든다.  국제체제에서 윤리적 고려란 생존을 위한 투쟁에 비하면 너무도 취약하다.  그러므로 어떤 정치체제와 전쟁의 경향 사이에는 관계가 없다.

반면에 어떤 정치체제의 경제적 구조는 어떤 윤리적 특징을 보여주게 된다는 점이 오랫동안 강조되어 왔다.  유명한 스미스(Adam Smith)박사는 독점적인 과대이윤을 추구하는 체제에서라면 사치와 향락이 범람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의 국부론을 인용하자면, "보통 낭비하는 풍조는 어떠한 곳에서나 돈을 쓰는 실력에 의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돈이란게 쉽게 획득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쉽게 벌면 쉽게 쓴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사치와 낭비, 계급적 분열이 나타나고 결과적으로 패망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베블렌(Thorstein Veblen)교수는 과시적 소비의 구조적 성격을 지적한 사람으로서 유명하다.  그는 독점적 계층이 성장하는 곳에서는 그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독특한 낭비가 진행되기 마련임을 여러 사례로 보여주고 있다.  "술을 마음껏 마시고 주정을 하거나 병을 얻는 것은 그 술을 진탕 마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우월한 자의 표지로서 명예로운 것이 된다"는 유한계급론의 서술은 1980년대 한국 사회에서 그렇게도 유행해마지 않던 폭탄주 문화를 정확하게 비꼬고 있다.  폭탄주와 매매춘에의 공동 참여는 단순히 퇴폐문화의 일면일 뿐이 아니다.  이는 음습한 소득에 대한 공범의식을 확증하는 의식이다.  이러한 공범적 유대의 강화는 나아가서 새로운 퇴폐문화를 생성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니버(Reinhold Niebuhr)교수는 어떤 종류의 주장이 어떤 종류의 체제와 관련이 있다는 점을 설파한 적이 있다.  그는 자유방임주의라는 사상이 경제적 권력 독점을 위한 이론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경제적 권력이 홀로 되기를 원할 때는 자유방임주의 철학을 사용하여 경제적 자유에 대한 정치적 제약을 저지한다"고 지적하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 그는 이 학설이 존속하는 이유를 사람들의 무지에 돌리고 있다.  이 학설은 사회내의 강한 세력에 의해 현대 산업생활을 지배하는 주류적 사상이 되므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학설은 정치적 무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고통 당하는 사람들은 이 학설의 노력에 의해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의 이유를 모른 채 속아넘어가고 있다.  1980년대 이후로 한국 사회에서 시장의 자유를 부르짖는 신자유주의가 무분별하게 난무한 것은 바로 이 학설을 통해 자신들의 독과점적 전횡을 정당화하려는 독과점적 재벌들의 지원으로 가능하였다.

 

한국사회의 천민자본주의화

필자는 1990년 이래로 한국 사회의 천민자본주의화가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을 누차 지적한 바 있다.  한국 사회를 위하여는 2000년대를 향한 한국의 선택에서, 한국 교회를 위하여는 한국기독교의 역사적 책임에서, 각각 이 위험을 경고하였다.  불행하게도 경고는 무시되었고 공전절후의 호황에 도취되어 천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자들이 각종 정책을 주무르고 있었다.  성실하게 문제를 파악하고 점차 극심해지고 있는 국제적 경쟁을 위해 실력을 축적하기는커녕 "세계화"를 부르짖으면서 빌려온 외화를 물쓰듯 낭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심지어는 '천민자본주의'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차 모를 정도이었다.

천민자본주의(pariah capital-ism)이란 베버(Max Weber)교수가 개발한 개념으로서 저급한 윤리의식 하에서 주로 투기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정치자본주의(political capital-ism)의 한 유형이다.  고대 동방의 유태상인 자본이나 인도의 파시상인 자본처럼 독과점적 상업 행위를 통해 이윤을 축적하려는 자본주의 체제를 의미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에는 정치적 종교적 제도화를 통한 독점구조의 강화가 병행하여 나타나기 마련이다.  물론 독점적인 -그렇다고 사회적 존경을 받지는 못하는- 사회계층이 동시에 등장한다.  불로소득의 과시적 소비가 수반되는 것 또한 당연하다.  이를 자본주의 일반에서 나타나는 부정적 측면으로만 파악한다면 베버 교수의 용례와 차이가 많다.  천민자본주의는 비합리적 경제행위에 대한 경멸적 용어이지만 엄연히 역사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자본주의적 체제의 한 형태이다.

일반적으로 [동아시아 모델]이라고 불리우는 한국의 6~70년대 자본주의는 분명한 산업자본주의였다.  비록 군사독재에 의해 탈색되기는 했으나 민족경제유기체론의 관점에서 체제를 구성한 일종의 공동체적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특징은 발전전략의 정부 주도와 수출대체산업화의 추구, 외자도입과 활용, 후발효과의 극대화, 강력한 노동통제  등이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지역감정의 활용과 국제적인 냉전체제의 존재가 다양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매우 경직적인 권위주의 체제였으나 경제적으로는 유연성과 실용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 시기를 주도한 지배연합은 그러한 의미에서 실용주의적 지배연합이라고 부를 수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실용주의적 지배연합은 천민자본주의적 지배연합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이 실용주의적 지배연합이 1960년대부터 추구한 신중상주의적 국가자본주의의 모순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국가 주도의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성공적일수록 지배연합 내에서 사적 자본의 위치가 강화되어가고 있었다.  80년대 들어서면서 재벌이라고 불리우는 대자본가 계층이 지배연합 내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유하고 신자유주의를 추종하게 되었다.

지배연합 내에서 진행된 사적 자본의 우위는 재벌의 규모 증가, 배타적 소유집중, 국가 능력의 상대적 감소와 같은 구조적 성격으로 나타나고 있다.  1989년을 기준으로 30대 재벌의 총매출액은 106조원이며 이들의 제조업 공장들이 고용하고 있는 인원은 77만명에 이르고 있었다.  이러한 규모의 사회적 비중은 당해년도 정부 예산과 인원이 각각 22조원과 70만명이라는 사실과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들은 또한 47개 금융관련회사와 18개의 주요 언론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정부가 비교적 민주적 통제 하의 공적인 권한을 갖춰가고 있는데 비해 재벌들은 극히 소수 가족의 자의적 통제 하에 놓여있었다.  1990년 3월에 은행감독원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이 30대 기업의 534개 주요 내국법인 중에서 72.2%가 주식시장에 공개되지 아니한 채로 창업자나 창업자의 가족에게 장악되어 있었다.  아담 스미스의 분석 이래로 자의적인 사회적 권력이 비대해질수록 독점적 지대를 추구하는 체제가 심화된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한국형 천민자본주의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재테크라고 불리우는 재벌들의 증권과 토지투기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부터 재벌들은 산업적 생산활동이 아니라 독점지대를 통한 축적에 열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이정우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토지거래로 실현된 자본이득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86년에 12.4%, 1987년에 15.6%, 1988년에 31.9%, 그리고 1989년에는 37.7%였다고 한다.  1980년대 말에 이르러 국민총생산에서 천민자본적 투기행위가 차지하는 비율이 총생산의 3분의 1을 넘어서게 되었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이 투기행위의 주체는 복부인이 아니라 바로 기업 그 자신들이었다.  한국은행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86년에서 1989년 기간에 주요한 25,883개 기업들이 올린 흑자규모 330억 달러의 약 26%가 토지매입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비생산적 비효율적인 투기 행위에의 치중은 재무구조의 과대한 부채 의존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 기업들의 재무구조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자기자본을 침식하는 부채 수준이 일반화되었다.  1998년 30대 그룹의 총자산이 435조원인데 반하여 부채는 357조원이었다.  이 기업들의 평균 부채 비율은 518%였고, 한화, 아남, 해태, 뉴코아 등은 부채비율이 1000%를 넘어서고 있었다.  부채의존적인 해외투자가 세계화의 명분을 업고 경쟁적으로 진행되었다.  1991년부터 1997년 3월까지 재벌의 해외설비투자액은 270조원이었다.  그러나, 이 투자액의 상당 부분은 자기 돈이 아니라 국내외 부채로 구성되어 있었다.  실제로 1994년부터 1996년 2년 사이에 재벌의 해외채권 발행액은 16조 3천억원에 달하고 있었다.  이는 경제적 부가가치보다 매출액과 업계순위 과시를 통한 독점적 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경쟁 때문에 발생하고 있었다.

독점적 이윤의 추구자들은 자신들의 사치와 낭비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 독점적 사회구조를 요구하게 된다.  실제로 한국의 천민자본들은 더욱 독점적 사회구조를 형성하기 위해  혼벌을 강화하고 학벌과 지연의 연줄을 짜대기에 바빴다.  30대 재벌이 정관계의 고위 인사를 사돈으로 맞는 비율이 33.1%, 다른 재벌을 사돈으로 맞는 비율이 25.7%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지연의 공고화도 심각한 수준이어서 제5공화국 상층행정엘리트의 40%, 50대 재벌 소유주의 45%, 주요 언론사 간부급들의 30% 이상이 영남 출신들로 채워졌다.  이러한 연줄의 고리들은 이제 어린아이들까지도 출세는 연줄로 이루어진다고 믿게 만들었다.  많은 조사들은 한국 젊은이들의 다수가 자신의 실력이 아니라 출생이나, 지연으로 사회적 지위가 결정된다고 믿게끔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연줄망으로 독점이윤이 흐르게 되자, 결국은 사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부패의 수렁을 이루게 되었다.

천민자본주의 체제가 과시적 소비와 사치향락의 만연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울 일이 아니다.  천민자본주의적 악덕은 부정부패를 통한 불로소득의 만연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불로소득은 사치 향락과 낭비의 풍조를 불러일으키는데 반드시 성적 타락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이로써 룸살롱 등 매춘업이 성업을 이루었다.  1988년 말 현재 40만 6천여 개소의 향락업소들이 약 4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1990년 현재는 약 120만 명 가량의 젊은 여성들이 향락산업에 종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같은 연령의 여성인구 약 1/5을 차지하는 규모이었다.  이처럼 유흥종사 여성의 수요가 크다보니 공급이 달리기 마련이었다.  이 공급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인신매매와 같은 악질적 범죄가 생겨났다.   1993년 한국여성개발연구원 윤락여성조사에 따르면 강제로 윤락산업에 종사하게 된 사례가 전체의 약 11.8%에 달했다.  윤락 여성 120만을 기준으로 하면 무려 14만 명에 달하는 숫자이었다.

과시성 사치와 해외도박 현상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몇몇 인상적인 사례들이 이 수준을 잘 말해주고 있다.  1996년 한 해에 외산담배 연기로 날아간 돈이 6천억원, 수입양주로 사라진 돈이 1천7백억원이었다. 1996년에는 바닷가재 1억 달러 어치를 포함한 냉동수산물 수입액이 4억4천만달러에 이르고 있었다.  어떤 중소기업 대표는 13일간 유럽을 여행하면서 1만 달러 상당의 다이어몬드 1개를 포함하여 모두 2만 2천달러 어치를 구입하였다.  1997년 1월부터 10월 말까지 해외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하여 도박을 즐긴 사람이 3,014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들이 도박에 날린 돈이 약 7백만 달러에 이르고 있었다.  대전의 모백화점 부회장은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서 약 11개월 동안 355만 달러를 탕진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근대적 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천민연합이 공식적으로 시장합리성을 내세우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강력히 요구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미 니버 교수는 자유방임주의란 어떤 사회 내에서 경제적 권력의 독점을 강화하기 위한 이론의 하나라고 설파한 적이 있다.  19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강력히 주장되는 시장합리적 자유주의는 이러한 지배연합 내의 세력관계를 반영하는 분배규범을 정식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국가개입주의와 권위주의적 통치를 동일시하고 시장의 자유와 민주화를 같은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점차 일반화되었다.  이 때문에 천민연합의 존재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조차도 이 시장만능주의적 주장에 동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더구나 주로 미국의 언론들이 이 이데올로기의 한국적 타당성을 선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쉽사리 헤게모니(hegemo-ny)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천민자본주의 하에서의 신자유주의는 심각한 자가당착에 직면하고 있었다.  첫째, 현존하는 한국 사회의 경제력 집중이 지나치게 심각하므로 한국에서 시장의 자유는 곧 독점의 자유를 의미하는 상황이었다.  둘째, 이미 형성된 천민자본주의적 경제구조 때문에 시장의 자유에 대한 강조는 빈번히 독점적 재분배를 정당화하고 있었다.  셋째, 제반 시장합리적 자유주의 경제정책조차도 독과점적 재벌의 권력에 의해 그 결과가 심각하게 왜곡되어 나타나는 상황이었다.  빈번히 정부의 실패에 대한 강조는 시장의 실패에 대한 무분별한 호감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모순들을 호도하기 위해 신자유주의자들은 거의 언제나 현실의 과학적 분석보다는 서구 사회를 모델로 삼는 미래의 유토피아를 강조하고 있었다.

[동아시아 모델]의 연속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과거의 유아기적 상황에서 벗어나 보다 효율적이고 정의로운 체제 수립을 위한 분별력 있는 정부의 시장 개입을 인정했어야 했다.  시장의 자유가 아니라 이 분별력 있는 개입을 가능하게 하는 국가구조의 합리화가 1990년대를 맞는 한국 사회의 처방이었다.  그러나, 1992년에 진행된 일련의 정치과정을 보면 합리화보다는 자유화를 강조하는 집단이 국가권력을 장악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한국의 외환위기는 [동아시아 모델]의 실패가 아니라 [동아시아 모델에의 실패], 혹은, 시장만능주의에로의 무분별한 몰입 때문이었다.

독점적 소득을 추구하는 투기와 불로소득의 과시적 탕진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돌려받지 못하는 사회의 다른 계층들에게는 극심한 고통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성실하게 축적해 보았자 급속히 증가하는 전셋값을 마련할 수가 없어서 세상을 비관하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하였다.  사랑하는 아내를, 귀여운 딸을 인신매매범들에게 빼앗기고 생업을 포기한 채로 그들을 찾아 전국을 헤메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이러한 현상은 전두환씨와 노태우씨가 주도하는 군사독재 시절에 특히 심했다.  이 사실은 어떤 독점적 계급은 독점적 이윤을 확대하기 위해 더욱 더 독점을 강화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스미스 박사의 주장이 극히 정당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교회의 세속화

한국 사회가 이처럼 썩어들어가고 있을 때 한국 교회는 무엇을 하였던가?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 내에 있는 존재로서 사회의 도덕에 일정한 책임을 지고 있다.  이것은 종교가 한 사회에서 차지하는 사회적 분업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이다.  그러나, 부패한 사회에 대해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해야 할 한국 교회는 불행하게도 도리어 사회를 추종함으로써 세속화의 길을 걸었었다.  1980년대 이후로 한국 교회의 다수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보다 사제주의와 물량주의와 반지성주의에 몰입해 있었다.  교회성장이라는 새로운 우상을 섬기고 있었다.

사제주의는 사제를 구별된 계급으로 간주하는 태도로서 현대에 이르러서는 카톨릭조차도 잘 강조하지 않는 입장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교회를 사제주의적 위계로 재편하려고 시도하였다.  많은 목사들이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거나, 목사의 잘못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므로 평신도가 문제를 삼아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  "기름부은 받은 주의 종"이라는 식의 용어를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주장들은 개혁주의와 정반대되는 이단 사상임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들에서 거리낌없이 설교되고 있었다.  이러한 주장들은 분명히 신학교에서 시작한 것들이 아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박정희 정권의 권위주의가 교회에 침투한 결과이었다.

개혁주의는 모든 크리스챤이 다 영적 계급이며 그들 가운데는 직무상의 차별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신조 위에 서있다.  이 때문에 루터(Martin Luther) 목사는 성직자들을 영적 계급이라고 부르고 평신도들을 세속적 계급이라고 구별하는 것은 "전혀 조작적인 것이며 순전한 거짓과 위선이다"라고 주의를 환기시킨 바 있다.  칼빈(John Calvin)목사도 스스로를 거룩하고 구별된 직위에 있는 것처럼 간주하는 자들에게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개자의 직위를 강조함으로써 본질보다 더 우세해지려고 시도하는 [매개의 변증법]이라는 경향을 한국 교회는 효과적으로 대적하지 못하였다.  유해무 교수가 요약하는 바처럼 이 성직자 우위의 직분관은 교회 부패와 무력화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를 추종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성공제일주의이다.  박정희씨의 성장제일주의는 한국 사회 내에 적극적 사고방식을 심었지만 역으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심각한 흐름을 만들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어떤 성공도 그 자체로서 정당화하지 않는다.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이어야 한다.  그러나, 적지않은 기독교인들, 특히 목회자들은 하나님보다는 교회 성장을 섬기기로 작정하였다.  교회 성장이라는 결과가 과정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강변하기 시작하였다.  한국 사회에서 보편화되기 시작한 성공제일주의에 자신도 모르게 몰입되고 있었던 것이다.

성공 자체를 목표로 삼는 한 거대한 물질에 대한 숭배는 피할 수 없다.  보다 큰 교회, 보다 많은 교인, 보다 많은 재산은 하나님의 축복의 증표로 여기게끔 교육되었다.  교회당을 건축하면 교육관을 건축하고 싶어한다.  교육관이 건축되면 이제는 목 좋은 땅에 기도원을 짓고 싶어한다.  그 다음에는 교회 묘지를 구입하고, 그 다음에는 다시 새로운 교회당을 건축한다.  인애와 공평과 정직으로 자신을 채우지 않는 교회는 언제나 공허하여 새로운 물질적 사업으로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맑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자신의 영혼을 팔아먹은 자본가들이 끊임없는 확장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자본주의의 물신성(fetishism)과 다를 바가 없다.

세종대의 황호찬 교수는 한국의 재벌과 교회를 대비하는 매우 흥미있는 도표를 제공한 적이 있다.  이 도표에 따르면 재무구조에 있어서 양측은 차입경영과 고정자산의 과대투자라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발전모형에 있어서 양측은 외형중심에 문어발식 경영 혹은 교인의 수평적 이동이라는 현상을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다.  효율성에 있어서 양측은 중복투자로 인한 비효율성을 심각하게 나타내고 있으며, 중소단위의 자립도에서 양측은 심각한 의존성을 나타내고 있다.  기본 행태에 있어서의 유사성은 더욱 놀랄 만하다.  한국의 재벌들은 자신이 버는 것을 모아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방대한 차입을 통해 투자를 진행하고 이 사업이 부도나면 그 책임을 국민에게 떠맡기고 있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인간의 의지로 방대한 차입을 통해 건축부터 하고 이로 야기된 부채는 하나님에게 갚아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행태가 교회가 해야할 복음적 사업의 선후를 전도시키고 있다.  경상비와 건축비의 지속적인 과다로 인해 선교비와 구제비가 거의 항상 위축되어있다.  광주대 노치준 교수가 오랫동안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 교회의 지출은 교역자 급여, 운영비, 건축비, 관리비, 교육비, 선교비, 예비비, 구제비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총재정 대 구제비의 비율이 너무 낮게 나타나고 있다.  1994년 7월에 문화체육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국내 10여 개 주요 종교의 총재정 대 사회봉사비 비율이 대순진리회, 원불교, 천주교, 불교, 개신교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개신교가 꼴찌이다.

한국 교회의 위기 속에서 관찰되는 반지성주의의 범람도 특기할 만하다.  서울대의 윤이흠 교수가 정의한 바에 따르면, 반지성주의란 고등종교로서의 윤리성 상실과 기복 및 신비경험에 대한 지나친 강조 때문에 발생하는 지성적 태도에 대한 반감이라고 할 수 있다.  반지성주의란 본질적으로 마약과 같다.  부패하고 타락한 현실을 바로 인식하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도적인 몰입과 신비에 대한 강조가 필요하다.  사회 내에서 도태되는 다수의 하층민들은 마약이라는 물질로 이러한 필요를 충족하려 한다.  반면에 교회는 교회 나름대로 이러한 경향에 쉽게 빠질 수 있는 여지를 가지고 있다.  초월적 하나님에 대한 강조를 곧잘 윤리적 무관심으로 전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는 현세적 이익을 정당화하려는 성경의 자의적 해석에 근거한다.  숙명여대의 이만열 교수가 예로 드는 "3박자 축복"의 강조가 그러한 경우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축복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개인적 체험을 일반화하고 이를 통해 물질적 육체적 소망을 정당화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무시하고 대중적 기호를 충족시키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면 올바른 신앙이라 할 수 없다.  더구나 복음의 이해를 위해 극히 필요한 지성적 태도조차도 세속적인 것으로 낙인찍고 신비적 체험과 편협한 논리만을 신봉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면 그 폐해는 심각하게 된다.  복음의 본질적 이해로부터 개인들을 차단시키고 교회를 점차 세속적 이익단체로 전락시키게 된다.  [매개의 변증법]이 더욱 기승을 부리게 만듦으로서 자칫 이단들이 범람하는 원인이 된다.  심지어 반사회적 행동들을 정당화하려는 논리적 기제로 작용하기도 한다.

 

역사적 소명 수행을 위한 전략

바른 회개가 있으면 미래의 대안들을 다양하게 열려있다.  마치 엘리사의 사환의 눈이 열리고 천지에 가득한 불병거를 보게 되듯이 우리의 눈을 덮고 있는 미신과 오류와 편견을 닦아내면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볼 수 있다.  그러나 회개를 전제로 하고서도 갖추어야 할 몇가지 필수적인 요소를 강조할 수 있다.  그 첫째는 당연히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을 갖는 것이다.  한국의 교회는 역사적으로 보아 미국의 근본주의적 전통에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감이 크다.  이 때문에 "아는 것" 자체를 적대시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아는 것"을 강조할 경우에 "믿는 것"이 쇠퇴할 지 모른다는 우려가 배후에 깔려있다.  이러한 우려는 부질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항상 필요하며 성경이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바이다.  물론 "바로 아는 지식"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상으로 이 지식은 하나님의 각별한 섭리 하에서 건실히 지켜져 왔다.  문제는 한국 교회가 개혁주의의 신앙고백조차도 따르지 않는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에 있다.  그러므로, 바른 지식에 대한 정교한 신학적 토론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잘 알려져 있는 개혁주의적 교양을 심는데 주력해야 한다.

한국 교회의 개혁을 위한 보다 적극적 노력이 필요하다.  교회는 기독교인의 시작이며 끝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썩게 놓아두고 올바른 신앙이 성장할 수 없다.  우선은 각종 부정적인 요소를 회개하고 청산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목사를 구별된 자로 간주하는 각종 교회정치의 권위주의를 청산해야 한다.  마땅히 교회의 사치와 낭비, 각종 범죄행위, 세금포탈, 뇌물 및 촌지수수 등 각종 비윤리적 행위도 회개하고 청산해야 한다.  교권을 앞세워 복음을 죽이려 들거나 금품이나 향응으로 교권을 장악하려는 행위도 마땅히 청산되어야 한다.  마치 목사만이 가르침과 축복의 권한이 있는 것처럼 강조하는 각종 왜곡도 하루빨리 청산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의 일각에서 시도되고 있는 개혁적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이를 장려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한국 교회는 마땅히 목사와 장로의 안식년제 및 신임투표를 실시하는 몇몇 모범적 교회를 본받아야 한다.  선교와 구제와 운영에 대한 예산을 3-3-3제로 분할하고 이를 실천하려 애쓰는 교회들은 현재와 같은 처지에서 매우 실질적이고 기림을 받아 마땅하다.  십일조를 건축비로 돌리지 않고 목사의 사례와 구제에만 쓰는 교회들은 성경적 원칙에 충실한 교회들로서 주님 앞에 설 때 칭찬을 받게 될 것이다.  신약의 시대에서 십일조를 유별나게 강조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그보다도 구약적 원칙으로 십일조를 거둬들이면서 막상 십일조의 사용은 세속적으로 결정하는 현재의 교회 재정이 올바른 것일 리가 없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현실적이고 집단적 노력의 필요성이다.  바로 이 점이 10여 년 전에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을 시작한 손봉호 교수와 그의 동지들이 가진 복음적 비전이었다.  모범적인 기독인의 삶을 보여주고 격려하고 지원하는 일을 개인만으로는 할 수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정치체제는 민주적 체제이다.  이 체제는 다수의 시민들이 원하는 바대로 체제의 성격을 결정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체제가 천민자본주의적 체제로 타락하였다면 바로 그 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시민들 각자가 근본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위해 우리가 지불하였던 세금을 정당하게 쓰고, 공공건물들을 책임있게 사용하며, 공공언론을 사용하여 사회 전체에 각성을 촉구할 수 있다.  이러한 권한은 사회와 교회의 개혁을 원하는 시민들이 집단화할수록 더욱 가능해진다.

한국의 기독인들은 이러한 점에서 "기독시민"의 이중적 책임을 지고 있다.  하나는 하늘나라 시민으로서의 책임이다.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이라는 민주 정체의 시민으로서의 책임이다.  이러한 체제 하에서 맡은 바 책임을 수행하려면 시민적 참여의 수준을 높이는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참여를 위해 일정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역사의 방관자에서 역사의 주인으로 위상이 변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설사 그 비용으로 얻는 바가 없더라도 불평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명령이며 "빚진 자"로서 마땅히 해야할 의무이기 때문이다.

윤리와 종교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윤리와 기독교의 관계는 오늘의 이야기를 줄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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