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08/24) 교갱협 제4차 영성수련회 선택특강

사도행전 2장 17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에 두려움이 큽니다. 그러나 제가 한 일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겠습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청년목회의 시작은 열등의식을 깨는 것이다

저는 청년사역을 올해로 11년째 해오고 있습니다. 홍정길 목사님 말씀에 의하면 어떤 일을 10년 하면 전문가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맞는다면 저는 이제 전문가가 된 것 같습니다.

청년들을 계속 목회하다 보니까 이제는 어느 정도 그들 가운데 있는 생각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가지고 있는 문제가 뭘까?  문제의 핵심이 뭘까? 하는 것을 찾아보았더니 그것은 열등감이었습니다. 제가 접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거의다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의 주안점을 이 열등의식을 깨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것을 목회의 출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삼일교회는 처음에 부임했을 때 한 80명 정도 모였는데 지금 이천명 정도 모입니다. 그 중에 80%가 20대 청년들입니다. 그리고 99% 이상이 대학 이상의 학력자들입니다. 그리고 초창기에 서울대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2~3년 전에 조사한 결과로는 우리교회 22%가 서울대 출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고시에 합격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투입하려고 합니다.

쿠데타를 일으키는 사람들에게 배운 것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쿠데타를 하고 제일 먼저 병력을 보내 대학을 장악하고, 그 다음에 방송국을 장악하고, 그 다음에 국회를 장악합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권력의 원천이 거기에서 나온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뒤집어서 교회도 참된 일꾼들을 보내서 장악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대학교수를 많이 배출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절대 야당이 아닌 여당이 되라고 합니다.

또 하나가 훌륭한 공무원입니다. 공무원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일을 하기만 하면 얼마나 큰일을 할 수 있는지, 그래서 우리의 모델은 다니엘입니다. 그래서 고시에 많이 붙게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1년 사이에도 고시에 붙는 사람들이 상당수 됩니다. 많이 붙을 때는 15명 정도 됩니다. 단일교회 치고는 최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도해주고, 격려해주고, 안되면 질책과 핍박도 하면서 붙게 만들어 놓습니다.

또 하나는 언론기관입니다. 언론기관은 고시보다는 쉬운 것 같습니다. 아니면 출판계통으로도 많이 보냅니다. 청년들을 그런 식으로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처음 원점으로 돌아가서 이렇게 전체적인 분위기가 대학이상의 학력자들이 많이 있고, 거기에다 고시합격자들도 많고 소위 말하는 엘리트라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소수의 1% 정도 되는 고졸 출신들이 열등의식에 사로잡힙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저는 백번 이해됩니다. 또 일부 소수의 삼류대학에 다니는 사람들도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것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명문대학, 소위 서울대학에 다니는 사람들도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기는 좋지 못한 과를 나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일 좋은 학과를 다니는 사람들도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수석을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국에서 수석한 사람들도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유는 한국에서 수석하면 뭐하냐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저 정도면 학력에는 절대 콤플렉스가 없을 것이다. 저 정도 살고 있으면 절대 물질에는 콤플렉스가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러나 내부에 들어가 보면 엄청난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비교의식 때문입니다. 사람은 비교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끝이 없습니다. 소설 ‘동의보감’에 보면 내의원이 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내의원이 되고 나면 그 안에 엄청난 갈등이 있습니다. 어느 위치에 오르더라도 비교의식이 있기 때문에 항상 열등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작품(창조의식)과 상품(비교의식)

문제는 뿌리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높은데 가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열등의식은 마귀가 심어준 것입니다. 열등의식이 없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독특하게 지으셨다는 창조의식을 가진 사람은 열등의식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높고 낮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관의 문제입니다. 태도와 시각의 문제인데 이것을 바꿔놓으니까 젊은이들이 뒤집어졌습니다.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꿔 놓으니까 자신의 귀중함을 깨닫고 헌신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교회에 처음 등록하면 마귀가 주는 비교의식과 하나님의 주는 창조의식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의 유추를 이야기합니다. 상품이라는 개념과 작품이라는 개념입니다. 상품은 속성상 비교하게 되어있습니다. 상품은 구매할 때 항상 두 가지를 따집니다. 그것은 가격과 품질입니다. 쇼핑을 가면 처음에 품질을 비교합니다. 화장품을 산다면 가격이 동일할 때 품질이 좋은 것을 선택합니다. 거꾸로 만약 ‘아이오페’라는 상품이 있는데 상점별로 가격이 다르다면 물어보나마나 싼 곳에 가서 살 것입니다. 이렇게 상품은 항상 비교하게 되어있습니다.

반면에 작품은 속성상 절대로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8세기 최대의 풍속화가는 김홍도입니다. 김홍도의 풍속화 장면을 보면 서민적으로 진솔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반면 신윤복은 귀족적입니다. 신윤복의 화첩을 보면 양반이 기생들과 노는 장면들을 그려놓았습니다. 신윤복의 그림의 장점은 그 그림 안에 해학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여자가 시냇가에서 목욕하는데 바위 뒤에서 사내아이 둘이 훔쳐보는 것입니다. 그 그림을 보면 웃음이 나옵니다. 이렇게 해학이 숨겨져 있습니다.

김홍도의 작품이 뛰어납니까? 신윤복이 뛰어납니까? 각자의 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상품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작품으로 만들었습니다. 상품시 하지 마십시오. 독특한 존재로 나를 만들었습니다.

 

나만의 독특함을 개발하라

제가 처음 신학을 시작할 때 증권회사에 다니다가 큰마음을 먹고 담임목사님, 장로님들께 말씀드렸더니 장로님들이 하나같이 반대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경건의 모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중에서도 친한 장로님 한 분에게 말씀드렸더니 그분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제 걸음걸이가 교만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키가 커서 건들건들 걸어서 그런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담임목사님께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했더니 목사님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목소리가 그게 뭐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거룩한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거룩한 목소리가 싫었습니다. 젊은이들은 생소리를 더욱 더 좋아합니다. 강대상에서의 목소리와 평소의 목소리가 똑같아야 진실하게 봅니다. 다른 세대입니다. 저는 저입니다. 저에게 주신 독특한 은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흉내를 내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의 것을 열심히 베껴야 아류 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것을 갖자고 생각했습니다.

그전에 한 번 들었는데 곽선희 목사님은 목회자와 성도가 거리가 멀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가까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교회 농구장에서 반바지입고, 함께 농구합니다. 저희 교회에 처음 오시는 많은 분들은 저에게 와서 담임목사를 찾고 저라고 하면 믿지 않습니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정답은 없고 독특함이 있을 뿐입니다.

작년에 많이 강의를 다녔습니다.100일 정도를 밖에서 잤습니다. 다니다 보면 많은 성도들이 선물을 주시는데 큰 글 성경을 많이 주셨습니다. 제가 작은 성경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고 상처를 받는 것 같습니다. 물론 연세가 들어서 시력이 나빠지면 큰 글 성경을 봐야지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경건의 크기를 성경의 크기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방이 크다고 공부를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질이 중요합니다. 각자가 다른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자에게 편한 대로 자기에게 맞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걸작품이다

에베소서는 교회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2장 10절에 보면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저는 이 구절에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특별히 “포이에마” 라는 단어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영어의 파생어 중 하나가 Poem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詩)라는 것입니다. 성도 한사람 한사람을 하나님의 시로 만들 줄 아는 것이 목회입니다. 시는 각각 달라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서정시, 어떤 사람은 서사시, 동시 등 시는 모두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모두 카피하고 있습니다. 표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만의 시를 써야합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성도 한사람 한사람은 모두 걸작품입니다.  이런 시각을 바꾸는데 6개월이 걸리기도 하고 1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제 주위에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은사를 받았는데도 마귀가 준 비교의식 때문에 불행한 한 친구가 있습니다. 이 집은 부자였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장로, 권사였습니다. 믿음의 가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자매는 공부를 잘했습니다. 키도 컸습니다. 거기다가 얼굴도 예뻤습니다.  상당한 미인입니다. 다 갖췄습니다. 대학도 좋은 대학 나왔습니다. 졸업 후 곧장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리고는 7~8년 걸리는 박사학위를 6년 반만에 했습니다. 서울의 모대학에 교수로 부임했습니다. 어떤 잡지에는 21세기를 이끌어갈 100대 여성에 포함된 사람입니다.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연히 길에서 만났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제 방에서 차를 마시는데 30분 동안 말도 안 하더니 갑자기 제 손을 잡고 막 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놀라고 긴장을 하고 있는데 이유는 남편이 자신을 때린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분노했습니다. 여자를 때린다니...  그런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서 위로하고 기도하고 돌려보냈습니다.

2~3주 지났는데 정말 우연히 그 남편을 만났습니다. 남편은 저와 같은 교회에서 자란 3년 선배였습니다. 따로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미리 선수를 치고 "가정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조용한 곳으로 가자고 하더니 차를 마시면서 30여 분 말이 없더니 갑자기 제 손을 막 잡고 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결혼하고 나서 부부싸움을 많이 한답니다. 그런데 싸우면서 아내가 남편에게 삿대질하면서 하는 말이 "너 도대체 대학 들어갈 때 학력고사성적이 몇 점이야?"라고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그 부인이 학력고사에서 20점을 더 받았거든요. 남자는 자존심으로 사는 것인데, 남자의 고압선인 자존심을 건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어쨌든 위로하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면서 혼자 생각을 했습니다. 참 가슴이 아프더군요. 그녀는 하나님께 받은 모든 은사를 다 받았습니다. 이런 여자가 어디 있습니까? 대학교수라면 중산층 이상의 존경받는 직업인데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마귀가 던져준 비교의식 때문입니다. 그 비교의식에 질질 끌려다니면서 전혀 행복하지 않고 문제투성이의 가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데 아무리 많이 가져도 비교하면 무너집니다. 악한 마귀가 역사하면 업적과 능력을 비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면 꿈과 환상에 인생을 겁니다.

 

목회의 자원은 꿈이다

어떤 교회를 가보면 목사님들이 꼭 묻고 싶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결국 알고 싶은 것이 두 가지인데 대체 교인이 몇 명 출석하는가? 그리고 일년에 헌금이 얼마나 들어오는지? 그것을 그렇게 궁금해 하십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우리교회보다 한 명이라도 더 많이 모이는 교회는 제 느낌인지는 모르지만, 그 목사님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데 우리 교회보다 적게 모이면 의기소침해 지시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다 다른 것이지요.  서울시내 사람 많은 데서 많이 모이는 거나, 농어촌지역 얼마 되지도 않는 가구에서 몇 십명 모이는 거나, 하나님 앞에서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저는 어렵게 목회하지 않습니다.  숙명여대에서 예배 드리니까 숙명여대 학생들이 많이 옵니다.  젊은이들은 자기 발로 많이 옵니다.  많은 어장에서 많이 낚는 거나 낙도 몇 명 되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는 거나 하나님 보실 때는 동일한 것입니다.  뒤집어서 저보고 농어촌 목회하라고 하면 제가 어떻게 합니까?  교회 다 망칠 겁니다.  장년목회도 맨날 싸우다가 쫓겨날 것입니다.  목회는 다른 겁니다.  충성하고 헌신하는 모습이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박세리가 부럽지 않습니다.  맥과이어가 홈런을 70개를 넘게 쳐도 부럽지 않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꿈과 환상을 붙들고 헌신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붙들고 시작해야 할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할 때 꿈을 주시는 것이며, 그것이 목회의 자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적 상황에서의 교회부흥을 위한 대안

삼일교회에 처음 부임할 때 “도대체 왜 한국교회가 부흥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을 스스로 물어보았습니다.  신학교 1학년 때 한국교회가 줄어든다는 흉흉한 소문을 돌았습니다.  목회를 시작하는 마당에 상당히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분석했습니다.  한 10가지 이유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분석에 대해서 철저하게 살기 위해서 대안을 찾았습니다.  결국 축약하니까 세가지로 축약되었습니다. 첫째는 초신자, 둘째는 청년, 세째는 남자를 살려야겠다는 것입니다.  한국적인 상황에서 이 세가지가 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1) 초신자

릭 워렌이 “새들백교회 이야기”를 출간하기 전에 저널에 발표한 몇 가지 글을 읽었습니다.  “나는 새들백교회를 개척할 때 수족관에 있는 고기를 옮기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사역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도자 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믿는 사람이 수평이동하는 목회가 아니라 불신자를 살리는 목회를 하겠다는 것이 제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여러가지 실험을 했습니다.  멀티미디어, 드라마, 무용, ... 다해봤는데 불신자는 복음을 들었을 때에만 영접합니다.  여러번 실험한 결과입니다.  정말로 복음을 들었을 때만 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처음으로 경험했을 때가 신대원이었습니다.  신대원 1학년 때 모교인 연세대에서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모태신앙이었습니다.  모태신앙의 특징은 아무것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해신앙” 이라고도 하지요.  제가 3~4일 동안 거의 100명에게 전도했는데 한 명도 영접을 못시켰습니다.  100% 실패했습니다.  제가 얼마나 낙심이 되었는지 아십니까?  실패의 이유 첫째는, 한 40명 정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버렸고, 둘째는 저를 외판원인 줄 알고 안 산다고 하고 가버리고, 셋째로 몇 사람은 처음에는 얘기를 듣다가 5분을 못듣고 가버립니다.  너무 낙심이 되어 대강당 앞 벤치에 앉아 있으니까 눈물이 다 났습니다.  목회를 하겠다고 이 길로 왔는데 시작부터 메시지가 먹히지도 않고 전도도 안되고 이제 나는 분명히 깡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항상 성경책 맨 뒤에 사영리를 들고 다니는데 그것을 펴봤습니다.  사영리를 통해 은혜를 받고 눈물이 났습니다.  ‘이 진리가 왜 나를 통해서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걸까?’  그러면서 눈을 들었는데 제 앞에 어떤 총각이 앉아서 따분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가가서 시간 있냐고 물어보고 바로 직전의 사영리를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은 형제님을 사랑하십니다.....  그 형제는 그날 회심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날 8명 중에 4명이 회심했습니다.

돌아와서 분석해보니까 답은 복음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전도방식이 “우리교회는 강남에 있는 좋은 교회다.  예쁜 여자 많다... ” 라고 했기 때문에 안 믿은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했고, 죄인됨을 증거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어야만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교회에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왜 청년이 삼일교회로 모이느냐고 물어보지만 젊은이들의 고백은 예배 때문에 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복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있어야 모이는 것입니다.

일전에 숙명여대 대강당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3월 첫 주에 한 번은 넓은 강당에서 화려하게 하려고 멀티미디어를 사용했는데, 한 주가 끝난 다음 인터넷에 아이들이 글을 올렸습니다.  그 애들 표현에 의하면 "오늘은 예배를 날렸다",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자" 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고 왜 딴짓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도전하고 싶습니다. 소위 말하는 열린예배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는 이렇게 확신합니다.  그들은 전도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책상에 앉아서 설교하는 것보다 화면을 보여주면 더 잘될 것이라고 가정한 것입니다.  책상에 앉아서는 그럴듯한 것입니다.  가정을 가지고 이론화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대규모 교회에서 하니까 진리인 줄 알고 다 따라하는 것입니다.  주일학교 재정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 엄청난 재정을 다 쏟아붓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잘해도 세상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홍대 앞에 한 번 가 보십시오.  기가 막히게 합니다.  그런 문화에 접한 애들이 교회에서 하는 것에 만족할 것 같습니까?  물론 청년들 집회는 그렇게 하면 모이긴 모입니다.  서울에는 1만 명의 “꾼”들이 있습니다.  어느 곳이든 찬양집회를 하면 몰려 다니는 “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현장에서 제주도, 통영, 강원도 두메에 가서 날마다 불신자들을 접하면서 해보니까 최고의 효율이 사영리를 통해서 복음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만이 영혼을 살릴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교회부흥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설교를 잘하면 부흥합니다.  설교를 잘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인생을 집어 던지면서 말씀을 연구하고 기도하고 양떼를 사랑하고 피를 토하듯이 말씀을 증거하면 교회가 왜 안 살겠습니까?  나머지가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그것을 붙들자는 것입니다.  말씀에 생명을 걸고 설교를 좀 잘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만 있으면 모든 교회들이 살아나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설교준비를 충실히 하지 않는 것은 범죄입니다.  많은 성도를 앉혀놓고 왜 준비없이 올라갑니까?  생명을 걸고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안에 터져 나오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으면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변화되지 않는다고 믿으면 어떻게 목사를 합니까?  분명히 변화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은 교회든 큰 교회든 초신자들에 대해서 꿈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한달 동안 예배를 한번도 드리지 않은 사람들을 불신자라고 정의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도합니다.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한 달 동안 예배를 안 드릴 수가 없습니다.

 

(2) 청년

청년은 왜 살려야 합니까?  제일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청년사역에 집중하는 이유는 유권자 중  2~30대가 57%입니다.  이것을 잡아야 합니다.  소위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는 젊은이가 많이 모이는 교회가 아니라, 그 교회가 사실은 정상적인 교회입니다.  10대부터 39세 이하의 인구가 70%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39세 이하의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기를 놓치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청년들을 살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주일학교 부흥은 시간 문제입니다.  저희 교회는 가장 많이 부흥하는 곳이 영/유아부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애들을 낳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교회 주일학교가 안되는 이유는 청년이 없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청/장년부라고 해서 결혼한지 3~4년 미만의 모임에 가면 어른들 숫자만큼 아이를 낳습니다.  청년들을 잃어버리니까 애들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청년이 늙으면 장년이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신혼부부들 결혼한 지 3~4년 된 부서에 가보면 참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어른들 숫자와 똑같은 숫자가 아이들 숫자입니다.  장년은 청년이 나이가 들면 장년이 되기에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이제 5년만 지나보십시오. 다 장악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목회의 출발은 청년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청년에게 대한 배려가 없으면 범죄입니다.  왜냐하면 미래에 대한 포기이기 때문입니다.  사들의 시대에 왜 암흑기가 왔습니까?  기성세대가 성장세대의 믿음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가르쳐야 됩니다.  철저하게 양육하면 변화될 수 있다는 겁니다.

 

(3) 남성

남성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남녀비율에 대해서 신경을 써야 합니다.  저의 모교회는 거의가 여자였습니다.  제가 전도사가 되려고 할 때 가장 갈등이 되었던 것은 “낮에 양복을 입은 남자 한명과 따라 다니는 여자 네다섯명” 이게 누구입니까?  목사입니다.  그것이 미래의 나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하니까 너무 싫었습니다.  저런 초라한 모습이 내 모습인가?  그렇게는 목회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철저하게 남자들을 키우는 목회를 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남성이 55%입니다.  저희 교회에서 찬양을 부를 때도 여자들 목소리보다 남자들 목소리가 더 큽니다.  그럴 때마다 희열을 느낍니다.  남성들을 살려야 합니다.  제가 지방에 어떤 교회에 갔더니 교회 전체를 찍은 큰 사진이 벽에 붙어있었습니다. 사진에 2,000명 정도 찍혔는데 제가 신앙양심을 가지고 세어보았습니다.  그 중에 남자는 약 51명이었습니다.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굉장히 문제있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교회들이 그렇습니다.  저는 이것을 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분석했습니다.  왜 교회에 여자들만 가득한가?  그러고 보니까 교회문화가 여자들에게 맞는 것 같았습니다.  오리고 썰고 붙이고 기름팔고 하니까 남자들보다는 여자들한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경을 안쓰면 여자가 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하나 우리나라에서 설교를 잘하시는 대표적인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어보았습니다.  들으면서 특이한 것이 유머나 예화가 모두 여자들이 들으면 웃을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여자분들이 들으면 감명받을 수 있는 그런 예화였습니다.  남성들에게 들리지 않는 설교이고 관계없는 설교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예화를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사잡지에서, 직장에 심방을 가서 나눈 얘기에서 그리고 매주 타임지를 읽고 그 안에서 우리 남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니까 남성들이 열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제까지 일하다 고민하고 온 문제를 교회에 오니까 해석을 해준다는 것입니다.  삶의 갈등의 문제를 풀어주더라는 것입니다.  남성들이 열광을 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또하나, 낮모임은 거의 갖지 않습니다.  대개의 집회하면 낮모임을 갖습니다.  평일날 낮에 나올 수 있는 남자는 어떤 남자입니까?  백수건달들이나 수업 빠진 학생들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평일 낮에는 집회를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부흥회가 아니라 교회를 망치는 거라고 봅니다.  대부분의 남자는 일주일에 한번 주일 낮에 교육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허구헌날 모입니다.  구역장모임, 순장모임, 무슨 모임, 무슨 모임 …  그러니까 많이 나오는 사람은 일주일에 다섯 번도 나오고 여섯 번도 나옵니다.  이번에 옷로비사건도 보세요.  허구헌날 교회에 간 아줌마들 아닙니까?  밤낮 교회에 가지 않습니까?  그러니 여자들의 믿음은 듣는만큼 자라고 남자는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목회의 중심이 여전도회에 많이 가있습니다.  그리고는 남자가 없다고 한탄합니다.

저는 이것을 산산조각을 내버렸습니다.  그리고 모든 집회를 새벽에 집중시켰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나오지 않으면 체질을 개선하든지, 교회를 바꾸든지 하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더 악착같이 나오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새벽기도를 보면 남자가 여자보다 새벽기도 하기가 쉽습니다.  새벽기도 끝나고 난 다음에 마지막까지 남아서 기도하는 것은 거의 남자들입니다.  여자들은 아침에 바쁩니다.  그래서 남자들의 믿음이 무럭무럭 자랍니다.

지난번에 우리 교회 교역자들과 같이 청장년부를 모아두고 신혼부부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중에 여자가 남자보다 더 믿음이 좋은 가정이 어디일까 지적해 보라니까 한가정도 없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교역자들의 시각으로 볼 때 신혼부부는 100% 남자들의 믿음이 더 좋습니다.  남자가 신앙이 더 좋으니까 가정에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저희는 가정생활 세미나가 필요없습니다.

저는 남성중심의 목회를 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약간은 해병대 분위기입니다.  살벌한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여성들이 더 열광합니다.  우리교회는 물이 좋은 교회라고 소문이 났습니다.  남성들이 실력있지, 멋있지, 믿음좋지 ... 정말 물좋은 곳입니다.

저는 초신자를 살리는 교회, 청년을 살리는 교회, 남자를 살리는 교회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한 5년이 지났습니다.  실제로 꿈대로 되었습니다.  지금 성도들이 내리는 평가는 바람직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꿈을 위해 대가를 치루라

꿈이 중요합니다.  꿈이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꿈이 있어야 하고 원리가 있어야 합니다.  목회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고 가치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꿈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이루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목회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꿈을 그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꿈을 이루었을 때 바람직한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최근에 여러 곳을 다녔지만 꿈 이야기를 하는 곳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꿈을 성취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왜냐하면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가 지난해 가을, 남가주 사랑의교회와 로고스교회에서 집회를 했습니다.  이 두 교회 중에 한 교회인데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침식사를 할 때 였습니다.  그중에 한 집사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10년 동안 새벽기도를 한번도 빠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기도제목은 복권에 당첨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0년째 되는 날 하나님이 나타나셨답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시기를 “네가 10년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도해서 내가 감명을 받았다.  그런데 기도제목이 그게 뭐냐?  너무 유치하다.  기도는 유치한데 내가 들어줄지 안들어 줄지 참 부담스럽다.  내가 생각해보겠다.  그런데 부탁이 있는데 복권 좀 사면서 기도할 수 없니?”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내용은 농담 같은데 분위기는 진지했습니다.

하여튼 집회를 마치고 나서 방에서 생각하는데 한참 묵상하는데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우리도 허구헌날 꿈을 이야기하고 부흥을 이야기하는데 무슨 대가를 치릅니까?  그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일주일에도 몇 명 정도 지방에서 학생들이 저를 찾아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얼굴이 상기되어서 모슬렘이 자기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중국이 부른다는 것입니다.  너무 뜨겁게 외쳐서 제가 말도 못합니다.  그러면 제가 묻습니다.  “너 토플성적이 몇 점이냐?” 그러면 그렇게 뜨겁던 애들이 고개를 팍 숙입니다.  그리고는 “지금부터 열심히 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슬렘이 부른다고 하고 터어키를 보라는 둥 해서 “너 아랍어 얼마나 하냐?” 하면 또 고개를 팍 숙입니다.  또 중국이 자기를 부른다고 해서 “중국어 얼마나 하냐?” 했더니 중국어는 북경에가서 배우겠답니다.  저에게 죽도록 맞고 갑니다.  선교사가 꿈이라면 어학은 기본입니다.  그 기본적인 대가도 치르지 아니하고 밤낮 꿈만 얘기합니다.

전도사님들도 많이 옵니다.  많이 와서 설교 잘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책을 몇 권이나 읽느냐?” 그러면 책은 전혀 안읽고 기도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할 때 내용은 전혀 없고 소리만 질러 대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당신은 설교준비를 안하고도 설교를 잘한다고 자랑을 했답니다.  사택에서 교회에 오는 사이에 설교준비를 다한다고 말해서 그 다음에 당회에서 결정을 내렸는데 사택을 멀리 이사 보냈다고 합니다.

이런 농담이 나올 정도로 우리가 준비를 안해서야 되겠습니까?  아니 설교를 잘하려면 독서를 해야지요.  밤낮 직통계시 받습니까?  교인들은 괴롭습니다.  암만 못 읽어도 일주일에 3권을 읽어야 합니다.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저는 꿈을 위해서 네가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 초신자에 대한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어떤 교단의 교회들 대부분을 보면 너무 경건하기 때문에 부흥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 경건하고 수준이 높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에 보면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머리염색은 기본이고, 그것은 아예 경건한 애들입니다.  포니테일 묶고 다니고, 폭탄 맞은 머리 등등 헤어스타일이 대단합니다.  청바지 찢어 입고 난장판입니다.  그런데 그 애들을 쫓아내야 합니까?  품어야 합니까?  그 아이들을 품어야 합니다.  교회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용납이라고 생각합니다.  품어줘야 변화가 됩니다.

시험이 쉽습니까?  훈련이 쉽습니까?  시험은 채점하고, 커트라인만 정해주면 됩니다.  하루면 끝납니다.  그런데 훈련은 책임을 져주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을 60점 이상 만들려면 쉽지 않을 것입니다.  훈련은 될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시험 보는 곳이 아니라 훈련하는 곳입니다.  용납해야 합니다. 품어줘야 합니다.  좀 껄렁껄렁한 녀석들이 와도 안아줄 줄 알아야 되는 겁니다.  지금같이 목사님들이 앉아 있는 이런 분위기가 저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저희 교회는 시끌시끌합니다.  불신자들이 30% 정도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교회에 나온 사람이 어떻게 조용할 수 있습니까?  한 시간이 지나면 기지개를 켜고, 지겨워 하고, 괴로워 합니다.  그러다가 변화되는 것 아닙니까?  경건한 것이 뭐가 그렇게 좋습니까?  불신자들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중간에 나가는 사람, 핸드폰 울리는 사람, 별사람이 다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품고 가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6개월, 1년 되면 다 변합니다.  저는 그게 목회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전의 교회에서 리더들을 데리고 등산을 간 적이 있는데 등산을 다 마치고 나서 도선사 구경을 하라고 했습니다.  돌아와서 느낀 바를 말하라고 했더니 애들이 도대체 절은 이해할 수가 없고 어색하다는 것입니다.

첫째, 대웅전으로 들어가는지 옆문으로 들어가는지, 둘째, 부처에게 먼저 절하는지 스님에게 먼저 하는지, 그리고 화장실은 어디에 있는지, 향냄새가 너무 나니까 머리가 아프고 어색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이들한테 말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바로 너희들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화장실이 어딘지, 어떻게 하는지, 분위기도 어색하고, 순서도 모르고”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을 편안하게 품을 수 있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끔 저는 전도집회에서 정장을 입지 않습니다.  저는 교인들이 편안하게 된다면 양복도 벗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작년 전도집회 때는 티셔츠를 입고 했는데 처음 온 애들은 그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들을 얻기 위해서는 사도바울처럼 그들과 같이 변신을 해야 합니다.  무성의하자는 것이 아니라 뛰어들자는 것입니다.

최근에 어린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꼬꼬마 텔레토비입니다.  영국 BBC에서 만든 것입니다.  심리학자 8명이 포함되어 기획된 것입니다.  거기에는 4명의 인형이 나옵니다.  보라돌이, 뚜비, 나나, 뽀입니다.  그것을 보고 있으면 너무 단순합니다.  대사도 없습니다.  서로 손잡고 빙빙 돕니다.  뭐든지 몇 번씩 돕니다.  계속 돕니다.  그리고 너무 심심하면 한마디 하는데 “아이, 좋아” 그러고 계속 도는 겁니다.  다 끝나고 난 다음에 “나나, 안녕” 하고 쏙 들어갑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왜 열광을 하느냐?  어린아이 사고속도에 맞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반복적인 사고를 한답니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동일한 게임을 반복해도 재미있어 합니다.  텔레토비 모습은 어린아이가 기저귀를 하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상한데 그 모습을 보고 어린아이들은 인간답다고 느낀답니다.  자기하고 비슷하니까 말입니다.

TV를 보거나 대화할 때 직업에 따라 언어가 굳어져 있습니다.  변호사는 법률용어에 굳어져 있고, 의사는 의학용어에 굳어져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장벽입니다.  변호사나 의사들이 쉬운 말을 해주기를 바라듯이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막스 루카도가 이야기식 설교를 하는데 wordplay입니다.  말장난입니다.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시장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설교”입니다.  한국에서 중요한 것은 언어가 바뀌어야 합니다.  제가 쓰는 책이나 설교 테이프를 보면 아주 강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사용해야 젊은이들에게 들린다는 것입니다.  언어는 10년마다 한번씩 업그레이드 해줘야 합니다.  언어를 바꾸기 위해서는 언어에 탁월한 사람한테 배워야 합니다.  또 하나는 최근에 나오는 소설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터넷에 들어가서 젊은이들의 용어를 읽어보세요.  쉽지는 않지만 한 두가지라도 노력해 보십시오.  성의만 보여줘도 애들은 좋아합니다.  우리는 초신자들에 대해서 이렇게 낮춰줘야 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 중에 한분이 계신데 척 스미스 목사님입니다.  미국에서는 아직도 척 스미스 목사님이 가장 감화를 주고 영향을 주는 분입니다.  지금부터 25~30년 전의 신세대 목사였습니다.  당시 70년대 초에 미국에 히피족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은 맨발로 다녔습니다.  밤낮 기타 치고, 맥주 마시고, 마약하고, 이들에게 복음을 증거했던 신세대 목사님이 척 스미스 목사님이십니다.  이 목사님이 하신 일은 복음을 증거하니까 많은 청년들이 교회로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지도자들이 걱정이 되어서 회의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맨발족이기에 카페트가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쫓아내야 됩니까?  받아줘야 됩니까?  그때 이 갈보리 채플에서 내린 결정은 맨발로 들어오도록 하고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언어와 자기들의 문화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그래서 커피하우스 무브먼트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가스펠송이 생겼습니다.  “작은 불꽃하나가” 라는 노래가 최초의 가스펠송이었습니다.  그것은 원래 가스펠송이 아니라 마리화나 피는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그들이 변화되어 찬양단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마라나타 싱어즈입니다.  그들 중에 비디오 테잎을 하나 봤는데 그 찬양의 3절입니다.  “친구여 당신께 전하고 싶은 말이 있소 …” 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머리 허연 사람이 우는 것입니다.  친구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구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영광은, 교회가 지지 않는 비결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들고 나가야 합니다.

 

(2) 기도의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저는 기도를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서 했습니다.  전에 있던 교회에서 갑자기 교회를 옮기게 되었고 그래서 삼일교회로 와서 보니까 교인이 80명 정도 되고, 한60명 정도가 할아버지 할머니였습니다.  낙심이 되었습니다.  이전 교회에서는 리더들만 100명이었고, 신세대 목회자고 젊은이목회를 한다고 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노인들이 모인 교회에 오게 되었는가?  그래서 원망이 나왔습니다.  ‘하나님, 제가 대학생들을 사역한다고 했는데 어쩌다가 이런 교회를 보냈습니까?’  정말 눈물이 많이 났습니다.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 교회는 문제 있는 교회인데, 1년 있다가 쫓겨날 거야, 아니 6개월, 혹자는 2년이라고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기도 밖에는 살길이 없었습니다.  앉아서 매일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새벽기도 끝나면 그냥 12시까지 앉아서 기도하다 자다 그랬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시간이 지나고 하나님께서 기도의 능력을 많이 주셨던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전도집회를 했을 때 교인이 100명 정도였습니다.  전도집회 목표가 15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20~30년을 한번도 전도하지 않고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영락기도원으로 올라가서 기도를 하려고 문을 나서는데 갑자기 제 마음 가운데 어떤 부흥사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눈물로 강대상을 다 적시면 부흥이 일어난다” 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교회로 내려와서 기도하기로 하고 주님께 강대상을 다 눈물로 적실 테니까 부흥을 꼭 주시라고 의기양양하게 기도를 하면서 교회를 왔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 보니 강대상이 엄청나게 커서 엄두가 안났습니다.  그래서 수정제의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회복시켜주신 이성을 가지고 다시 기도하는데 저 가운데 있는 의자 하나만은 눈물로 다 적시겠다고 기도를 했습니다.

오후 2시부터는 반은 서러워서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제가 제일 아픈 것은 이별의 아픔이었습니다.  이전교회에서 가르쳤던 교회의 청년들이 그렇게 보고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윤리상 만나서는 안되니까 차를 몰고 그 골목을 돌다가 멀리서 보고 울면서 돌아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주님, 너무 보고 싶습니다.  이 고독을 어떻게 합니까?  이 그리움을 갚아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하는데, 우리 교회 부목사님 사택이 본당 옆에 있는데 저의 기도를 듣고는 같이 와서 기도했습니다.  좀 있다 보니까 사무원이 월요일인데 우연히 나와서 같이 기도했습니다.  저녁쯤 되니까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입니다.  제 기억에 9시였는데 굉장히 많이 모였던 것 같습니다.  정확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60~70명 정도 되는 숫자가 월요일 저녁에 모여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혼자 엎드려서 기도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아주신 것입니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 보니까 어떤 사람은 버스를 잘못 타서 교회 온 사람, 집에 앉아있는데 교회로 가야 하겠다고 마음을 주신 분 등 모두 다 모였습니다.  하여튼 그 기도회가 끝나고 난 다음에 우리 교인들 마음 가운데 이제 되었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결국 그 주에 210명이 모였습니다.  기도로 난관들을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기도를 믿습니다.  우리교회는 간사들이 많이 있는데 유행어는 “눈물로 방석 적셔봤어?”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안되면 기도로 뚫어버리는 것입니다.  무서운 애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이런 기도의 대가를 치를 때 교회는 반드시 서게 됩니다.

 

(3) 독서의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신앙에 지성의 부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젊은이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복음과 열심과 지성이 있어야 합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의 설교에 보면 불붙는 논리가 기독교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는 지극히 이성적입니다.

제가 책을 읽게 된 동기는 대학에 다닐 때 김동길 교수님 때문입니다.  서양문화사 시간이었습니다.  그 교수님이 역설적으로 말했습니다.  “오늘날 나를 만든 은인이 한 분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다.”  그 분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서 책을 읽었다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계몽사상에 대해서 200권을 읽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 출감이 되어서 강의를 하다 보니까 이제는 이전의 김동길이 아니라 새로운 김동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분이 도전을 줍니다.  “이 자리에 앉아있는 많은 학생들 가운데 졸업할 때 책을 200~300권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한 시대를 움직이는 사람이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속으로만 다짐을 하고 살짝 앉아버렸습니다.  그게 1학년 2학기 때였는데 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해서 저는 읽는 책을 100% 구입해서 516권을 읽었습니다.  일주일에 두권씩 책을 읽게 되면 시험 때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년이면 100권을 읽습니다.  3년반 동안에 350권을 읽어야 되는데 3년반동안에 번호를 매기니516권을 읽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기초적인 일을 쌓았다고 생각합니다.

신학교 1학년에 당시에 신학서적 200만원 어치를 사서 1년에 다 읽었습니다.  그랬더니 신학이 뭔지 보였습니다.  ‘아 이거구나’, 그리고 그때 느낀 것은 ‘신학은 서로서로 베끼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다 못해 코메디언도 장수하는 코메디언은 책 읽는 사람입니다.  서세원, 전유성이나 SBS에 서점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한번 오면 책을 100~200만원 어치씩 사간다고 합니다.  독서하는 사람입니다.  엄청난 독서가입니다.

저는 요즘에도 한달에 50권 정도를 정말로 읽습니다.  계속 읽다보면 소화할 수 있습니다.  충분히 책을 읽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세상에 대한 것을 파악하지 않으면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젊은이사역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특별히 생명을 걸고 독서하시기 바랍니다.

 

(4) 열심의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저의 할아버지는 신사참배에 반대한 순교자입니다.  할아버지도 열심이셨고, 아버지도 열심이셨습니다.  집안에 열심에 대한 피가 흐르는 것 같습니다.

저가 대학교 1학년 때 80년대 초반이고, 전두환 정권하에 있었기에 굉장히 분위기가 안좋고, 데모가 많았습니다.  중간고사도 보지 않고 기말에 시험과목이 딱 한가지였습니다.  국어과목이었는데 김동인의 감자를 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안타깝게도 감자에 대해 읽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엉뚱한 것을 공부했습니다.  완전히 좌절했습니다.  ‘주님은 감당할 시험만을 주신다고 하시는데 가끔은 감당못할 시험도 주시는구나’ 그래서 피할 길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지혜를 주시더라구요.  그리고 시험지 3장을 더 달라고 해서 제가 가지고 있는 감자에 대한 모든 지식을 다 적었습니다.  감자의 유통경로, 감자를 싸게 파는 시장은 경동시장, 세 번째 가게 어디가 싸다, 감자로 조리하는 법, 감자찔 때 속까지 잘찌게 하는 법, 그리고 고구마를 가지고 맛탕을 만드는걸 감자로 맛탕을 만든다고 착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감자로 맛탕을 만드는 법, 맛있는 감자의 모양새 세 개를 그려놓고 색칠까지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크게 써놓았습니다.  좋은 성적 주시면 감자탕 한번 해드리지요. 딱 해놓았습니다.

한 3~4일이 지나니까 학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의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마다 핍박을 받으리로다’ 는 말을 새기고는 학교에 갔습니다.  연세대는 종합대학이어서 국어과 교수님이 꽤 많이 계십니다.  들어갔더니 한 삼십분 정도의 국어과 선생님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제가 들어가니까 그 삼십분의 국어교수님들이 다 기립박수를 칩니다.  “너 때문에 3박 4일 동안 즐거웠다.” 라고 합니다.  선생님께 갔더니만 하도 여러 선생님이 보니까 찢어진다고 제 시험지를 코팅을 해놓았습니다.  앉았더니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걸 국어시험 답안지라고 썼는가?” 그러면서 “너는 아는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열심이 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렇게 세장이나 빡빡하게 썼느냐?  이건 국어시험 답안지는 아닌데 너의 열심을 보고 성적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B학점을 주셨습니다.  제가 다닐 때 4.0만점에 A. B. C. D 밖에 없었습니다.  교수님 방을 나오면서 마음 가운데 일말의 교만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이 “B”학점을 받았는데 도대체 점수를 못받는 사람은 뭘까? 뭐든지 열심히만 하면 “B”학점까지는 되는 것입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뛰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하면 됩니다.

곽선희 목사님 세미나 때 이야기가 인상적입니다.  목사님들마다 월요일날 피곤하다고 새벽기도 안나오는데 그러면 어떤 평신도가 새벽기도 나오겠느냐고 말했습니다.  11시에 퇴근해서 어떻게 새벽기도를 나오느냐고, 그게 논리가 되는냐고, 저는 어제 원주에서 집회했습니다.  집에 들어가니까 새벽 4시였습니다.  잠깐 자다가 딱 깨어서 새벽기도를 인도했습니다.  저는 생명걸고 새벽기도를 합니다.  그 열심에 교인들이 변하는 것입니다.  체력과 열심이 있으면 변하는 것입니다.

저는 경륜도 없고, 능력도 없고 남는 것은 체력과 열심 아닙니까?  그걸로 밀어부치니까 되더라구요.  마찬가지입니다.  제일 보기 싫은 것은 월요일 온천에 가서 목욕하는 목사님들을 보는 것입니다.  목사님들의 열심을 성도들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의식이 반은 평신도입니다.  열심있는 목사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다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다 성육신하는 거룩한 주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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