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차] 소명자는 낙심하지 않는다
상태바
[6차] 소명자는 낙심하지 않는다
  • 옥한흠 목사
  • 승인 2001.08.20 09: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1/08/20) 교갱협 제6차 영성수련회 저녁집회

고린도후서 4장 16~18절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null)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보면 우리가 흔히 성직이라고 부르는 목사, 또는 선교사, 전도사의 이 성직에 대해서 화려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유일한 지배자이시고 또 교회의 유일한 권위가 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게 교회에 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성직이라고 하는 인간의 봉사를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교회에 명백하게 선포하게 하셨다고 칼빈은 말합니다. 마치 노동자가 일을 하기 위해서 연장을 사용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역자들을 그의 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역자는 하나님의 손에 쓰임받는 사자요,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이며,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한 계시를 해석할 수 있는 권위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성직을 맡은 종들이 누구보다도 가장 존경할 만한 일을 하고 있는 자로 존경받기를 원하고 모든 사람이 그 권위에 복종하기를 원하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누구든지 조직이 필요없다, 교회 안에 성직이 필요없다고 한다든지 성직을 무시한다든지 성직을 멸시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회를 파괴하는 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육신의 생명을 위해서는 태양의 열과 빛이 필요하고 음식이 필요한 것처럼 지상의 교회가 제 역할과 제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사도적 직분, 목회적 직분의 이 성직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굉장히 화려한 묘사입니다. 이런 종교개혁자들의 진지한 신학적인 설명을 배경으로 해서 우리 모두가 성직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칼빈의 말을 하나 더 인용하면 "누구든지 성직자가 되려면 비밀한 소명을 가진 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비밀한 소명이라는 말을 여러분 마음 속에 잘 담아두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 사람을 놓고 하나님에게서 비밀한 소명을 받았는지를 증명해줄 자격이 없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깨끗하지 못한 양심을 가지고 소명이 없는데도 소명이 있는 척 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 목사가 되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의 사악한 생각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소명을 받지 못했는데도 소명을 받은 것처럼 하는 그 사악한 마음이 사람들에게는 발각이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그 사람을 교회의 목회자로 받았을 때에는 소명자처럼 일을 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지상에 있는 교회의 약점입니다. 이 말 속에는 상당히 우리를 긴장하게 하는 내면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비밀한 소명과 공적인 소명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비밀한 소명없이 공적인 소명을 가지고 목사일을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는 부름을 받은 일이 없는 사람이지만 교회에서는 인정을 받고 사역자로 일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 우리는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깊이 성찰하고 주님의 음성을 다시 듣는 귀한 시간이 되어야 되겠습니다.

소명은 원래 값없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전인격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구원을 받은 은혜에 감격하면 성직자가 아니라도 자신의 생을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꼭 목회자만 소명을 받았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모든 평신도가 소명받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주신 하나님 앞에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 생각할 때 '오, 주여! 저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하는 진지한 고백이 마음 속에서부 터 누구든지 나옵니다. 이것이 소명받은 자의 반응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은 소명을 의미한다는 신학적인 명제는 어디까지나 옳은 것입니다.

윌리암 틴데일이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면 물긷는 것과, 설거지하는 것과, 구두를 고치는 것과,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 이 모두가 다 하나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꼭 성직자만 소명자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성경적이 아닙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그가 부름받은 독특한 직분, 다시 말하면 독특한 사역 때문에 평신도의 소명과 구별되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벤처기업을 하는 집사를 불러서 하나님께서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장사하는 집사를 불러서 기도하는 것과 말씀전하는 일에 전념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학강단에서 가르치는 교수에게 주님이 성도를 온전케 하라, 봉사의 일을 하게 하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라고 하는 엄숙한 명령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집안에서 자녀를 양육하는 주부를 향해서 주님께서 너는 내 오른손에 붙잡힌 일곱별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성직을 맡은 목회자에 있어서 이 직분의 독특성 때문에 우리의 소명은 평신도의 소명과 구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사와 전도사와 선교사를 믿는다고 다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아무나 할 수 있겠다고 덤벼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교회 안에서 남달리 불러세우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비밀한 소명을 받은 자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밀한 소명이 나에게 있는가? 하는 것은 수시로 우리가 물어야 될 중요한 질문입니다. 만약에 이런 신성한 부르심이 없는 사람이 목회를 한다면 어떤 사람의 표현대로 그것은 광대짓에 지나지 아니할 것입니다.

부끄럽지만 저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저는 한국 나이로 23세 때에 하나님의 소명을 받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1960년 봄이었는데 그렇게도 안하겠다고 도망가던 내가, 그렇게도 하기 싫어서 그저 어디든지 피할 수만 있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피하고 싶다고 하는 그 일념을 가지고 2년, 3년 씨름하다가 드디어 하나님의 강권적인 손에 꺾여서 20평도 안 되는 작은 시골교회 마루바닥에 홀로 엎드려 하루종일 일어나지를 않고 갈등하면서 하나님 앞에 항복하던 그 순간을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별난 신앙생활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중학교 때 되니까 벌써 사람들이 누구나 다 저를 보고 너는 목사감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내면에 '목사가 되어야 되겠다. 피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고, 제 뒤의 어머니는 제가 목사가 되기를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싫었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시골교회의 젊은 목사를 장로 부부가 끌어다가 방에 세워놓고 린치를 가해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나오는 꼴을 보면서 내가 목사가 되겠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세상에 할 짓이 없어서 저런 목사를 하나?' 성미를 같다 주면 그저 끼니 거르지 않고 먹고, 성미가 없으면 굶는다는 소리도 못하고 앉아있어야 되는 몰골, 도대체 보기 싫은 몰골입니다. '남자가 되어서 식구를 거느린 처지에 나가서 무슨 일을 한들 저런 꼴을 하고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한 겁니다. 그러니까 죽어도 하기 싫은 것입니다. 어떤 변명이라도 할 수 있다면 저는 이 길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허락치를 않으셨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하나님 앞에 완전히 강제로 차출당한 사람답게 이제 다른 길을 감히 돌아보지를 못하고 40년을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이런 식으로 목사로서의 길을 시작했기 때문에 항상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소명 콤플렉스라고 할까요?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끌려와서 차출당한 전투병처럼 할 수 없어서 내가 이 일을 하고 있지 않는가? 이것이 진정한 소명인가? 하는 약간의 콤플렉스가 오랫동안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성경을 조금 보는 눈이 열리면서 저 자신이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신구약을 통틀어서 주님 앞에 쓰임받은 종들을 보니까 거의 절대적으로 나요 하고 손들고 좋아서 한 사람이 별로 없더라고요. 다 도망다니다가 끌려오고 안하겠다고 버티다가 결국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더군요. 그래서 제 자신이 위로를 받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소명을 분명히 받는 그 순간만은 그렇게도 피하려고 하던 하나님이 몰아넣으신다고 하는 절박한 위기의식을 제가 느낀 것입니다. 그 순간은 하나님과 나만이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마 비밀한 소명을 제가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철저한 항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장한 결단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자랑할 순간도 아니며, 흥분할 순간도 아니었습니다.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헨리 나우웬의 말이 저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하나의 순간이었습니다.

헨리 나우웬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소명을 받을 때 우리의 상황은 주로 어떤 상황이냐? 하나님은 모든 바지랑대를 다 치워버린다. 대화할 친구도 없고, 받을 전화도 없고, 참석할 모임도 없고, 감상할 책도 없고, 오로지 벌거벗고 취약하고 죄악되고 가난하고 상한 심령만 끌어안고 있는 처절한 모습만이 남는다."고 했습니다. 바지랑대는 옛날에 긴 빨래줄을 받쳐놓던 장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그 순간에는 바지랑대를 다 치워버려 내가 기댈 언덕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죄악된 모습, 처절한 모습, 약하고 힘없는 모습, 가난한 모습, 상처받은 모습인 보잘 것 없는 존재 하나만 하나님 앞에 남는 순간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를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그 분의 말 가운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소명을 깨닫는다는 것은 갑작스러운 천둥소리와 같이 올 수도 있고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과 같이 올 수도 있지만, 어떤 방식이든 간에 그것은 초자연적으로 오는 것이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특성을 갖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소명에 대해서 자신있게 말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많은 경우 시행착오를 포함한 한동안의 탐색을 통해서만 분명한 소명의식을 얻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가끔 내가 소명을 받은 것인가? 시행착오를 거듭할 때가 있습니다. 비밀한 소명을 받고 신학교를 들어왔나? 정말 하나님이 나를 불러서 목사안수를 받았나? 한참 탐색을 통해서 내가 분명히 소명받은 것이 틀림없구나 하는 어떤 결론으로 도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40년 동안 한눈 팔지 않고 달려왔지만 제가 확실히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스스로 자신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이 불렀으면 부르신 분명한 징후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부르신 자에게는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목회자로 불렀으면 목회자로 일할 수 있는 은사를 주시는 것이 보여야 되고 하나님이 나를 설교자로 세웠으면 설교할 수 있는 은사와 능력을 주신 것이 분명히 뭔가 나타나야 되지 않습니까? 분명히 하나님이 나를 불렀으면 불렀다는 증거가 내 눈에 좀 보여야 그래도 내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 사역에 몸을 실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을 확인하기까지는 마음이 왔다갔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한동안은 탐색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드디어 제가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고 그 다음에 몇 년을 지나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하나하나 확인할 때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이 사실이구나. 이제 나는 방황하지 않아도 되겠다.' 그리고는 내 마음에 감격이 찾아온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나 같은 것을 부르셨을까? 바울이 말한 것처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죄가 없는 것처럼, 충성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충성된 자처럼, 완전하지 못하고 실수도 많이 하는데도 완전한 자처럼 하나님이 대접하시면서 이렇게 사용하시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이 사실임을 저 자신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남자 교역자 중에 한 분이 있습니다. 그 형제가 처음 우리 교회 부교역자로 들어올 때는 그런 것을 다 쓰게 합니다. 그런데 이 형제의 글이 재미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시골 농촌교회 마룻바닥에 앉아서 오랫동안 장래 문제를 놓고 기도하면서 자기 혼자의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중에 음성이 들리기를 '나는 너를 위해 죽었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하냐?' 너무나 생생한 음성이어서 도무지 그 음성이 마음에서 지워지지를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떠나지 않았습니다. 자기 소원은 의사가 되는 것인데 이 음성은 자꾸 자기를 목사가 되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갈등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결단을 하고 '하나님이 부르시면 목사가 되어야지' 하고는 총신대학에 입학을 했습니다.

막상 입학을 하고 나서 보니 그 갈등이 없어져야 되는데 의사가 되고 싶은 자기 내면의 욕심, 그 다음에 신학대학에 왔다고 하는 두 상황에 끼어서 많은 갈등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총신대학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는 남은 기간을 열심히 준비해서 서울대학 의과대학에 입학을 했습니다. 의대를 들어가서 공부를 하는데 여전히 갈등이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위해 죽었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하냐?' 그 음성이 마음에서 살아날 때마다 내가 의사가 되는 것이 주님의 음성이 아닌 것 같고 목사가 되라는 것이 음성 같았습니다. 그래서 휴학계를 내고 군대에 갔습니다. 군복무를 하면서 많은 진통을 통해서 드디어 하나님의 소명에 무릎을 꿇기로 작정했습니다. 제대하면서 다시 총신대학에 시험을 쳐서 들어갔고 지금은 우리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 형제가 끝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지나간 일 중에 후회되는 것이 하나 있다면, 하나님이 부르셨을 때 한 길로 줄곧 가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회한으로 남고 부끄럽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동안의 어떤 방황을 통해서 하나님이 정말 나를 불렀는가를 탐색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분명한 소명의식 없이 그저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해서 어쩌다가 신학교 들어가고 어쩌다가 목사가 된 사람보다는, 오히려 이렇게 방황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분명하게 확인하는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이 더 기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의 부름을 받고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누구의 부름을 받고 목사가 된 것입니까? 비밀한 소명을 갖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여러분만이 아는 소명 말입니다. 여러분만이 아는 내면의 하나님의 음성을 갖고 있습니까? "다른 모든 길은 다 막혀버렸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이 길로만 가라고 열어주셔서 거역할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고 하나님이 밀어넣으시는 대로 나는 이 길로 들어왔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분명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래서 이제부터는 철저하게 나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십자가를 지고 주님만을 따라가는 것만이 나의 남은 일생의 소원이라고 자신의 마음에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까? 심지어 내가 목회를 하다가 실패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길 아니고는 내가 갈 길이 없고, 이 일 아니고는 내가 생명걸고 할 일이 없다고 분명히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있을만큼 마음에 분명한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놀라운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특별히 부르신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목회 상황이 점점 더 열악해지는 것 같습니다. 비밀한 소명을 가지고 생명걸고 죽으면 죽으리라고 매달려도 될까 말까 한, 굉장히 어려운 목회의 현장을 경험합니다.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가 부흥이 좀 되고, 그 다음에 자기 이름이 소문이 나고, 그 다음에 교회에서 대접 잘 받고 그것이 너무 좋아서 감사합니다. 그런 좁은 웅덩이 속에서 모든 것을 보면 간단합니다. 자기 교회만 잘되면 천하가 잘 되는 것 같으니까요.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우리는 지역교회 하나만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국교회 모든 사역자는 한국교회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며, 또 우리가 한국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전우주적인 교회의 앞날과 운명을 등에 업고 일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나혼자 잘된다고 뻐기고 목에 힘주는 사람은 소인 중에 소인입니다. 우리는 크게, 넓게 봐야 합니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를 한 번 봅시다. 여러분, 분명히 말씀드리면 굉장히 어렵습니다. 평신도도 물론이거니와 특별히 목회자에게는 너무너무 어려운 상황이 점점 눈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저는 오스 기니스의 말을 여러분에게 인용하고 싶습니다. "오늘날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 이래 최초로 세계화된 문화의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이 용어를 잘 기억하십시오. 최초로 세계화된 문화. 이 세계화된 문화는 너무나 강력해서 이만한 힘을 가진 반 기독교적인 세력은 지금까지 역사상 없었다고 합니다. 너무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에 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과거에 기독교 세력을 해를 끼치던 힘이 있었지 않습니까? 스탈린이 있었고, 모택동이 있었고, 김일성이 있었고, 과거의 많은 기독교의 적대세력들이 교회를 해를 끼친 것보다도 더 강력한 힘으로 오늘날 교회를 해치고 있는 것이 바로 세계화된 문화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정이나 예상이 아닙니다. 이미 확인된 사실입니다.

가장 쉬운 예로 인터넷을 봅시다. 세계화된 문화입니다. 이것이 지금 얼마만큼 우리 기독교의 목을 조이며 들어오고 있는지 아십니까? 도덕적으로, 가치관으로, 세계관으로, 예술적으로 얼마나 교회를 포위하면서 교회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지 아십니까?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해서 예루살렘성 밖에 토성을 쌓아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잠을 자지 못하고 드디어 항복할 수밖에 없도록 점점 조여오듯이, 오늘날 세계화된 문화 중에서 인터넷이 얼마나 많은 교회의 젊은이들을 사지로 끌고가고 있는지, 지성인들로 하여금 신앙에서 돌아서게 만드는지, 여러분 아십니까? 이 힘을 아십니까? 이 힘을 한번 느껴보셨습니까?

저에게 어느 목사님이 전화를 해서 "목사님, 사랑의교회 목사라고 해서 가만 계시면 안됩니다. 목사님, 일어나셔야 됩니다. 목사님 인터넷에 들어가 보셨습니까? 특별히 음란채팅하는데 들어가 보셨습니까? 목사님 교회 순장도 있습니다. 정신차리세요!" 참 기가 막히더라구요. 그 분은 인터넷 중에서 특별히 음란채팅을 하는데 특별히 가슴에 끌리는 어떤 것이 있답니다.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우리 청소년들 다 망한다. 가정이 다 붕괴된다. 그러니 이걸 어떻게 막아야 되겠는데 막으려면 도대체 이 세상이 얼마나 요지경인가를 내가 실제로 경험하지 않고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서 그 목사님이 그곳에 들어갔답니다. 목사라는 신분을 숨기고 남자로서 어떤 여자하고 채팅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이 은근히 신앙적으로 유도를 했더니 좀 친해졌다 싶으니까 사랑의교회 순장도 끌어든 것입니다. 그 순장의 말인즉슨, 집에서 너무너무 따분해서 한 번 들어와 봤더니 굉장히 재미있고 이제는 끊을 수 없는 자리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위험한 벼랑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도시의 어느 교회 주부 두 명은 이 채팅에 들어가서 헤매다가 가출해서 벌써 두달 동안 소식이 없답니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이 세계화된 세계를 지구촌으로 묶고,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고 혈통의 장벽을 뛰어넘고, 심지어 종교와 모든 사상의 장벽을 뛰어넘고 무서운 힘으로 사람들을 옭아매서, 마치 그물이 물고기들을 싸서 끌고가듯이 끌어가는 이 무서운 세계화된 문화의 힘을 여러분, 아십니까? 이 힘을 알면 우리는 아마 잠을 자지 못할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의 목회현장이 무서운 상황에 빠져있는가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미국의 통계를 보았더니 목회자 3분의 1 정도가 그동안 자신이 천직으로 알았던 이 목사직을 그만두고 다른 직업을 선택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탈진해 버리고 못 견디는 것입니다. 이제는 소명의식조차 뿌리채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천 명 가운데서 40%가 3개월 안에 다른 직업을 구하겠다고 하는 대답을 했답니다. 아무리 일을 해도 열매도 안보이고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도무지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천 명 중에 이천 명입니다. 그리고 지금 목회 현장에서 뛰고 있는 미국 목사 300,000명 가운데서 20%에 해당하는 목회자들이 정기적으로 정신적인 질환 때문에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내면이 붕괴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목회자 자신이 소명까지 흔들리게 되면 심리학에서 흔히 말하는 페르소나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페르소나는 '가면'이라는 뜻입니다. 소명이 흔들리니까 교인들 앞에 자기의 실체가 탄로나지 않도록 가면을 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 가면을 쓰고 엉뚱한 것을 가지고 이리 뛰고 저리 뛴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소명의식이 위기를 맡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은 교회의 부흥하고 연관이 된다고 봅니다. 아무리 힘을 쓰고 애를 써도 부흥이 안되고, 사람을 키워놓으면 옆에 있는 유명한 목사 교회에 다 빼앗겨 버리고, 10년이 갔는데도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차이가 없는 목회 현장을 보면서 자신이 과연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은 것이 사실인가 하는 의심을 갖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의 형편은 성령이 기뻐하는 상황이 아니라고 봅니다. 경쟁이 너무 심합니다. 이렇게 살벌한 경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목회현장을 하나님은 절대 기뻐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어떤 구실을 가지고도 이것은 설명할 수 없고 합리화할 수 없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지금도 일만 교회를 세우자, 개척하자, 신학생을 더 많이 받아서 더 많이 배출하자. 그래서 믿음이 좋은 사람을 만나면 "당신, 목사 되어야겠소!"라고 말을 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렇게 포화상태가 되고 신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갈 곳이 없고, 무임목사가 여기저기 수두룩한 이런 판국에서 교회 하나 시작하면 피비린내 나는 경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 상황, 이것은 성령께서 절대로 기뻐하지 않는다고 저는 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 현실은 피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 출혈을 하는 것입니다. 선의의 경쟁이 아니라 악의의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면 우리 모두가 지쳐버립니다. 그리고는 모두가 자기의 소명에 대해서 의심을 갖게 됩니다. 교회가 부흥이 잘 안되면 우리 모두가 흔들리게 됩니다.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부흥이 안되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잘못된 부흥관에 우리가 끌려다니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양적인 성장은 교회 부흥에 있어서 필수요건입니다. 한 사람이 늘어도 교회가 조금씩조금씩 자라는 것이 정상입니다. 건강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안되는 상황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남달리 많이 기도하고 남달리 많은 땀을 흘리면서 양떼를 돌보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앉아서 참 능력있는 설교를 하고 싶어서 진땀을 흘리고 하지만 이상하게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봅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만약에 여기에 계시는 800명이 다 목회를 하는데 전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제일 작은 교회가 오천 명이고 만 명 이상의 목회를 다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얘기입니까? 그것은 현실에 없는 공상입니다. 그럼으로 몇만 명 모인다, 몇십만 명 모인다 하는 것을 목회의 모델이나 되는 것처럼, 혹은 목회의 성공케이스나 되는 것처럼 쳐다보고 신기루 좇듯이 좇아가는 것은, 잘못된 부흥관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이 이 잘못된 부흥관에 중독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목회가 초라할 수밖에 없죠. 백명을 모아놓고도 사람들이 눈에 안들어 오지요.

여러분, 꼭 기억하세요. 진정한 소명자는 부흥 콤플렉스에 희생당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진정한 소명자는 사람수가 많고 적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진정 고백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소명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에 대해서 고백할 수 없다면 여러분의 소명을 다시 한 번 점검하셔야 합니다. 왜 제가 이 말을 하는지 압니까? 성경을 보세요. 성경을 보면 목회의 생명이나 성공이 수적인 부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단서는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목회라고 할 때는 서신서에서 봐야지, 사도행전을 가지고 자꾸 얘기하면 안됩니다. 사도행전은 성도의 말씀이며 교회가 처음 시작할 때 불길 같이 일어나던 어떤 한 시기를 얘기하는 것이지, 그것이 목회 전체를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목회는 서신서로 넘어가서 연구를 해야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서신서에 가서 구절구절 자세히 훑어보세요. 목회의 잘하고 못하는 것을 교회의 숫자 아니면 양적인 성장을 가지고 평가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까? 바울이 그런 언질을 한군데나 준 곳이 있습니까? 심지어 밧모섬에 나타나신 재림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잘못한 것을 책망하실 때에, 부흥이 안된 것과 숫자가 적은 것을 책망하신 교회가 한 군데라도 있는지 살펴보세요. 없습니다. 정말 없습니다. 교회 성장에 있어서 양적인 성장은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고 기도해야 될 제목입니다만, 그 양적인 성장이 우리 목회의 성공이냐 실패냐 하는 것을 가름하는 잣대는 아닙니다. 심지어 우리가 소명자냐 아니냐를 평가하는 기준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분명합니다.

오스 기니스의 말을 다시 인용합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청중이 있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청중이 있느냐가 아니고 어떤 청중을 가지고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결정적인 소명에 귀를 기울이면서 한 생을 산 사람들은 다른 모든 청중을 다 밀어냅니다. 그리고 단 한분의 청중, 유일한 청중 앞에서 살아남는 인생입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소명에 귀 기울이면서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은 한 분의 청중, 유일한 청중 앞에서 살아남는다고 했습니다. 그 유일한 청중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나를 불러주신 주님입니다. 그 분 앞에서 내가 누구냐를 물으면서 항상 나 자신을 점검하고 채찍질하는 사람이지 눈앞에 보이는 숫자가 얼마냐를 가지고 자기를 점검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소명자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지만 숫자의 노예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는 잘못되어 있습니다. 제가 몇 주전에 일본의 홋가이도에 다녀왔습니다. 마침 그곳에 갔을 때 일본 의사 한분이 자기 별장을 쓰도록 빌려주셔서 한 열흘을 지내다가 왔습니다. 거기에 프라노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주일이 되어서 제가 프라노의 소망교회를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다무라 목사님께서 제가 거기에 와있는 것을 아시고 설교를 부탁하셨습니다. 일본교회가 어떤지 여러분도 잘 아시지요? 저는 지난 10년 동안 일본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도 수백 명의, 아니 수천 명의 일본 목회자들과 상대를 하면서 일본교회가 무엇인지 조금 압니다. 또 일본 목회자들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기고 있는가를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일본 목회자는 한국 목회자와는 달리 그들은 순교적인 정신을 가지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는 너무나 소중한 동역자라는 사실도 한 십년 되니까 서서히 알게 되었습니다. 프라노 메노라이트교회에 제가 출석을 했습니다. 교회당은 조그만한 건물이었습니다. 갔더니 목사님은 일흔이 조금 넘으신 분인데 미국 유학까지 다녀오신 분이십니다. 그분 나이에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다고 하면 엘리트죠. 예배 시간을 기다리는데 강대상도 없어요. 의자로 둘러앉아서 예배를 드립니다. 몇 명이나 올까 궁금해서 통역하시는 선교사 사모하고 앉아서 기다렸습니다. 목사부부가 들어와서 앉았습니다. 조금 있다가 부인 두명이 들어오고, 또 조금 있으니까 한 여든은 되어보이는 미국 부인이 들어왔습니다. 그분은 '앤'이라는 은퇴한 선교사의 부인이었습니다. 그렇게 이리저리 앉았는데 전부 11명인가 되었습니다. 남자가 두명이고 나머지는 여자였습니다. 옆에 피아노가 있는데 아무도 피아노를 칠 사람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마침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서 보내셨는지 한 50대의 손님이 와서 앉았는데 자기가 피아노를 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둘러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 분위기가 되니까 한 분, 한 분의 얼굴이 얼마나 눈에 크게 들어오는지 모릅니다. 너무너무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 교회 바로 50m 정도 옆에는 큰 일본 절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한 인구 이만 오천 명의 작은 도시지만 교회라는 것은 딱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어디 있는지도 모릅니다. 성당이 하나 있고요. 그런데 역사가 꽤 있다고 하는 이 교회에 기껏 주일 예배에 모인 사람이 11명입니다. 그것도 저와 손님까지 다 포함해서. 저는 참 감개무량했습니다. 마치 23년 전 제가 처음 개척했을 때 12명이 둘러앉아서 첫예배를 드리던 그 때를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너무 소중하게 느껴지는 제 마음을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젊은 여자가 아이 둘을 데리고 왔는데, 설교를 한참하고 있는데 옆의 작은 방에서 애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떠들고 엄마한테 매달리고 그럽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저의 얘기를 좀 듣더니 설교 반도 안되었는데 벌써 아이 하나를 안고는 졸기 시작합니다. 11명 모인 데서 한 명이 조니까 그 폼이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조는 그 모습도 얼마나 귀여워 보이는지 제 눈에 천사같이 보이는 겁니다. 너무너무 소중하게 보이고 귀하게 보이는 겁니다. '이 몇 명 안되는 성도를 위해서 저 다무라 목사님이 20년의 인생을 바치면서 헌신해 왔구나.' 그리고 나중에 안 일입니다만, 그 옆에 있는 미국 선교사 부인은 자기 남편이 여기서 40년 선교하다가 몇 년 전에 죽었고, 자기는 미국에 갔다가 오고 싶어서 한 번 방문하러 왔노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소명자는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내 명성을 사방에 떨치게 하고 나로 하여금 마치 목회의 성공자가 된 것처럼 띄울 수 있는 그런 굉장한 교회에 나를 보내셨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메노라이트교회의 설교를 마쳤는데 설교비도 없었습니다. 줘도 안 받겠지만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점심도 안 주더라고요. 목사님께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면서 허리가 꺾어지게 인사를 하십니다. 그런데 나오면서 제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요. 보통 설교하러 가면 나중에 헌금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봉투를 주면 받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아무것도 안주고 내가 여기에 와서 나와 몇 명 빼고 8명이라고 하는 평신도를 놓고 말씀을 전하고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제 마음에 큰 기쁨이 되는지요. 나중에 통역한 분이 저에게 말하기를 큰 교회 사역하면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다가 몇 명 안되는 사람들이기에 적당히 간단하게 설교를 할 줄 알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너무 너무 진지하게 설교를 하는 것을 보고 자기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저는 큰 교회 담임목사입니다. 사만 명이 넘는 성도들을 지도해야 하는 막중한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이번에 프라노에 있는 교회에 가서 저 자신이 누구인가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한 사람에게 미칠 수 있는 소명자의 양심이 아직도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하나를 위해서 생명 걸 수 있습니다. 한 영혼을 위해서 죽으라면 죽을 수 있다는 내 양심의 소리가 있다는 것을 저는 알았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소명자는 숫자에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한 생명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진지한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에게 이와 같은 마음이 있는가를 살펴보십시오. 한국교회를 갱신시키기 위해서는 누가 참 소명자인가를 가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비밀한 소명을 가진 지도자들이 한국교회를 짊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기가 막힌 것은, 정말 기가 막힌 것은 '어떻게 저런 분이 목사가 되었을까?' 하고 은근히 자문하고 은근히 반복해서 또 한번 물어보지 아니하면 안될 정도의 동역자들이 주변에 생각보다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너무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글을 읽고 제가 충격을 받았는데, 고등종교가 타락할 때가 되면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성직자가 급증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다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비교종교학을 연구해서 그런지 좀더 데이터가 분명하더군요. 고등종교 하면 불교, 회교,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이 종교의 역사에서 종교가 부패하기 시작하면 공히 나타나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이 성직자의 급증이라는 것입니다. 신학교에 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목사 되는 사람이 많고 중이 되는 사람이 많아집니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자기부인을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고등종교는 자기부인이 있는 종교입니다. 도를 닦고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 어떤 종교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산속에 들어가서 벽만 쳐다보고 앉아있는 그런 고행을 합니다. 무서운 자기 고행을 통해서라도 영원한 진리를 발견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고등종교의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부인이 되지 아니하면 종교로서의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는 겁니다. 자기부인을 하는 종교는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매력도 없습니다.

기독교도 자기부인을 통해서만이 기독교다운 종교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사도바울의 말씀을 통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부인을 포기하기 시작하면 그만큼 배가 불렀다는 겁니다. 그만큼 세속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 눈에 비치는 성직이 좋은 직업으로 비치는 것입니다. 출세할 수 있는 직업으로 비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택하는 겁니다. 로마제국이 왜 패망했는가? 기번이라는 역사가가 로마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로마가 패망한 일곱가지 원인 중에 하나가 성직자의 급증이라고 했습니다. 똑똑한 사람들 대부분이 다 수도원으로 달려가니 그 나라가 될 리가 없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남의 이야기로 들립니까? 오늘 한국 상황을 여러분이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 모두가 진정 자기부인의 길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굶는 것도 좋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모욕당하는 것도 좋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형제 친지들로부터 깔아뭉개는 듯한 무시를 당해도 좋습니다. 자녀들이 나중에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해서 탈선하는 일이 있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니 나는 이 길밖에 갈 길이 없고, 나는 이 길을 통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길 원합니다" 하는 자기부인의 소명을 우리가 분명히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그래서 우리의 모습이 그렇게 비친다고 한다면, 오늘 신학교를 찾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을까요? 어딘가 모르게 우리는 잘못된 길을 벌써 들어서고 있지 않나 하고 불안을 느끼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자신의 소명을 다시 한번 깊이 돌이켜보고 하나님 앞에서 비밀한 가운데서 자기 소명을 다시 한 번 살펴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소명자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설교 제목입니다. 여러분의 목회 현장에 어려움이 많을 겁니다. 십자가도 많을 것입니다. 내면의 갈등이 오랫동안 지속되어서 마음의 기쁨을 다 빼앗겨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불투명한 장래에 대한 불안을 은근히 가슴에 숨기고 사역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부부간에 사역 때문에 갈등을 계속 이어가면서 고통하는 형제자매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이기지 못해서 점점 많은 유혹 앞에서 흔들리고 있는 여러분을 발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밀한 소명을 받았습니까? 한 가지 분명한 대답이 있습니다. 비밀한 소명, 확실한 소명을 받은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미국교회의 목회자들처럼 나는 다른 직업을 얻겠다, 3개월 이내에 떠나겠다는 것은 처음부터 소명이 잘못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은 가야 됩니다. 직업을 바꾸어야 됩니다. 남을 속이고 그 자리에 앉아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첫째로, 우리가 맡은 직분의 영광 때문에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사 우리에게 맡기신 직분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장 8절과 9절을 봅시다.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이 직분을 맡기신 분이 영광 중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우리에게 이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영광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직분은 사람을 죄와 죽음에서 자유케 하는 직분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입니까? 죽이는 율법의 직분도 영광이 있는데, 죄로부터 사람을 살리는 이 직분이 얼마나 영광이 있습니까?

우리는 눈만 뜨면 영적인 문제를 다룹니다. 영적인 문제 위의 문제를 다룹니다. 이것만큼 영광스러운 직책이 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는 말입니다. 결혼식에서, 병원에서, 중환자실에서, 무덤에서,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던집니다. 여기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권세를 가진 사람은 바로 우리 사역자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서 우왕좌왕하면서 마음에 공허감을 안고 진정한 삶의 의미와 진정한 진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하게 소신있게 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은 우리 사역자들입니다. 얼마나 이것이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죄책감을 안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통하는 사람을 붙들고 하나님의 용서를 전하면서 그로 하여금 그 죄책감에서 자유케 하는 이 직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평생의 면허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직분을 갖고 사역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여러분의 설교를 통해서 어떤 사람이 어떤 은혜를 받는지 우리는 다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께서 무언가 하고 계신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어떤 사람의 인생의 방향이 바뀌는 것을 우리는 가끔 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직분입니까?

둘째로, 우리 직분에 주어진 능력 때문입니다. 우리 직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을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 직분에는 능력이 따라옵니다. 시시하게 보여도 하나님께서 기가 막힌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놀라운 능력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고 교회를 맡기시고 목사가 되라, 전도사가 되라, 선교사가 되라 하시면서 이렇게 우리에게 직분을 주실 때 우리의 모습은 질그릇입니다. 그러나 굉장한 능력이 함께 수반된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됩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울산에서 보낸 어느 목회자의 편지입니다. 저는 이 분을 잘 모릅니다. 생전 처음 저한테 편지를 보냈습니다. 자기가 지금 시무하고 있는 교회는 자기가 처음 부임했을 때 상황이 너무너무 절망적이었다고 합니다. 처음으로 목회를 하려고 목회 초년생으로 그 교회에 부임을 했는데, 10가지 너무나 기가 막힌 조건을 가진 교회였다고 합니다. 사분오열된 교회, 교인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은 교회, 법정시비가 있었던 교회, 너무나 싸워서 이웃사람들에게 똥물세례까지 받았던 교회, 빚이 3억 이상 있었던 교회, 주변에 교회는 하나도 없고 무당과 유명한 보살만 100여 개가 있는 동네, 모든 선배 목사님들이 포기하자고 했던 교회, 노회에서조차 처분하려고 했던 교회, 교회를 오랫동안 방치해 놓은 결과 교회에 불이 나서 교회 건물도 제대로 없고 폐물창고처럼 온갖 범죄의 온상이 되어 마리화나나 본드흡연의 중심장소가 되어버린 무법지대의 온상, 게다가 주변이웃들이 관할 구청에 진정을 내서 철거권고를 받고 있었던 교회, 울산토박이가 가장 많은 오래된 지역, 이렇게 숨이 콱 막히는 열가지 조건을 골고루 갖춘 기가 막힌 교회로 6년 전에 부임을 했답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무슨 선한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6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하면, 첫째로 주님의 역사가 여러 차례 일어난 교회, 무당이 회개하고 돌아오고, 치유역사가 일어나고, 둘째는 빚을 다 갚고 2층 건물까지 증축하고, 셋째는 주변 이웃들에게 칭찬받는 교회가 되었고, 넷째는 무당들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다섯째는 교회의 이미지가 많이 갱신되고 그래서 지금은 재적 200명이 되는 교회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이 소문을 듣고 조금 큰 교회에서 여러 번 자기를 오라고 초빙을 했습니다만, 그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그 교회에 남아서 평생을 헌신하기로 했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렇게 목사님께 글을 드리는 이유는, 이렇게나마 교회가 성장하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근본적이고 직접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제자훈련이었습니다. 이 교회에 오기 전에 저는 제자훈련 세미나를 거쳤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에 와서 제자훈련을 계속했습니다. 영광제일교회가 지닌 가장 큰 문제점은 평신도 지도자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훈련을 통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니까 교회가 달라지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실망하지 마시고 힘들어도 절대 중단하지 마시고, 목사님 하시는 일을 계속하시라고 이 글을 드립니다"라고 했습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아십니까? 나는 아무리 볼품없는 질그릇이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는 이상 우리는 낙심할 수가 없습니다. 내 힘으로 한다면 낙심을 천번이라도 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이 나와 함께하는 이상 왜 내가 낙심해야 합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 가운데 있는 것처럼 들어쓰십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다귀를 일으키듯이 우리를 통하여 주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소명자는 절대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역을 통해 지금도 한 영혼이 구원받는 능력을 체험합니다. 깨어질 직전의 가정이 치유받는 능력을 체험합니다. 사회를 위기에서 건지는 능력을 체험합니다.

가끔 이 능력이 정말 나에게 있느냐, 없느냐로 고심할 때도 없지않아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 꼭 같습니다. 안되는 일은 안되더군요. 아무리 애를 써도 안되더라고요. 며칠 전입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 한분이 무턱대고 저한테 와서 "목사님, 왜 내 침실에서 도청합니까?" 하고 달려들더라고요. 생전 처음 보는 집사입니다. 집사님이 하도 많으니까 제가 얼굴을 모르지요. 40대 초반의 아주 아름답게 생긴 분이었습니다. 말을 하는 것을 들으니까 교육 수준도 상당한 여자입니다. 벌써 그 집사에 대해서는 소문을 듣고 있었거든요. 다락방에 가서도 문제를 일으키고 이웃에게도 문제를 일으키고 부교역자도 못살게 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 여자라고 생각을 하고는 감정이 안 좋아졌습니다. '어떻게 하나, 고분고분하고 예예, 제가 언제 도청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하고 돌려보낼까? 아니면 호통을 쳐놓을까? 어떻게 할까?' 하고 갈등을 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이 나에게 능력을 주셔서 이런 정신분열 환자를 기도 한번 해주면 깨끗이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지금까지 사랑의교회 목회 23년 동안 한건도 이 일에서 성공한 일이 없습니다.

비슷한 케이스를 여러번 겪었거든요. 대학부 지도할 때의 제자도 미국 유학 10년을 하고 나서 정신이 약간 이상해져서 나를 사탄으로 생각을 하고 공격을 하는 일을 제가 오랫동안 당했습니다. 너무너무 불쌍한 겁니다. 얼마나 그 자매를 위해서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저도 어떻게 해서 고치는 역사가 일어나면 좋겠는데, 하나님께서 도무지 이런 은혜를 안주시더라고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안 되는 것은 뻔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옥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또는 제자훈련을 통해서 지금까지 놀라운 일을 행하셨지만 단 하나, 정신분열증 환자, 정신쇠약증 환자는 별 볼일이 없어요. 그래서 왜 도청하느냐고 달려드는 여자를 어떻게 합니까? 다시는 찾아오지 못하도록 공포감을 좀 심어줘야 되겠다 생각하고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그랬더니 사무실에 있는 직원들이 다 뛰어나오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어디서 함부로 목사가 도청했다고 떠드느냐?" 내 평생 처음으로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그랬더니 움츠러들어서 슬그머니 나가더라고요. 그러더니 마당에서 제 사무실을 향해서 손가락질을 하면서 "설교는 그럴 듯하게 하면서 네가 목사냐! 다음부터 설교하지 마라! 설교하지 마라!" 하면서 가더라고요.

점점 이런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이런 사람을 볼 때마다 "주님, 이런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좀 주시옵소서. 왜 병원으로만 자꾸 보내야 합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치유할 수 있게 하옵소서" 하는 불쌍히 여기는 안타까운 마음이 가슴 속에 치밀어올라도 안되는 것은 안되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우리가 좌절하지요. 그렇지만 여러분, 우리에게는 그것보다 더 큰 능력, 영혼을 죄로부터 구원시키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자로 세우는 이 일에 말씀을 들고 사역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능력이 있는 이상 우리는 절대로 낙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끝으로, 우리의 직분이 보장받는 미래 때문에 낙망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4장 16절 17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은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에게는 해피엔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확실한 미래가 있습니다.

C.S. 루이스가 좋은 말을 했습니다. 역사를 읽으면 현세를 위해 가장 훌륭한 일을 한 기독교인들은 다음 세상에 대해서 가장 많이 생각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제국을 개종시킨 사도들이 그랬고, 중세기의 암흑시대를 밝힌 위대한 개혁자들이 그랬고, 노예무역을 폐지한 윌리암 윌버포스와 같은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이 모두가 다 그 생각이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 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력해지는 이유가 무엇이냐? 천국에 대해서 생각이 멈추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 앞에 있는 미래를 보십시다. 어차피 인생은 미완성 작품입니다. 니버가 말한 것처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가운데서 우리 한평생에 완성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소망을 통해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미래의 소원이 없으면 우리는 구원자체가 의심을 받을 정도로 어떤 때는 심각하게 좌절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 소망이 있기 때문에 미래가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해피앤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소명은 어떤 의미에서 직분보다도 선행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직분보다도 더 오래 지속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목사직을 은퇴했다고 해서 우리의 소명이 은퇴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소명은 이 세상 다할 때까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이 우리를 찾아오면 사람들의 눈에는 우리의 모든 소명이 끝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우리의 소명은 인생의 절정기를 맡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작은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그릇 준 것까지도 잊지 아니하시는 주님이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절정 바로 그것이 무엇입니까?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가 함께 누리는 마지막 순간이 있는 것입니다. 그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절 20절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별 볼일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작은 소자 하나를 위해서 내가 정성을 쏟았다면, 그 소자가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때에 마지막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그 시간에 나의 면류관이요, 나의 자랑이요, 나의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있습니다. 그 날이 옵니다. 그래서 내 스스로 부족해서 일을 다 못하고 갈 수도 있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남 보기에는 실패자로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사역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이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큰 일을 한 사람처럼 칭찬하시고 축복하시기를 믿기를 바랍니다. 이 영광이, 마지막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번 세미나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 다시 한 번 비밀한 소명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역 현장이 아무리 힘들고 한국교회 전체적인 상황이 우리를 답답하게 만들어도 결코 낙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합시다. 우리 직분이 갖고 있는 영광 때문에, 우리 직분에게 있는 능력 때문에, 우리 직분 앞에 기다려지는 미래 때문에, 우리는 낙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꼭 믿고 우리 다같이 힘을 합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 전진하고 또 충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