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8/20) 교갱협 제7차 영성수련회 저녁집회

에스겔 33장 1~6절

사람은 누구나 고민이 있는 줄로 압니다. 교역자들에게도 고민이 다 있습니다. 얼마나 그 고민이 크냐, 작으냐의 차이만 있지 누구에게나 다 고민이 있습니다. 저는 많은 고민 속에서 자라난 사람인데 이렇게 목회를 삼십 오륙 년을 하다 보니 옛날에 하던 고민은 다 사라졌는데 아주 큰 고민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건 바로 제 평생의 소원, 평생의 꿈은 이 나라 백성을 모두다 예수 믿게 하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다가 주 앞에 가겠다고 어려서부터 생각하고 살아 왔는데 나이가 벌써 예순 두 살이나 되었으니 앞으로 몇 년 안 남았다는 생각에 저는 아주 심각하게 고민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 한번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언제 제가 이 땅하고 이 나라를 뒤집어 엎습니까?” 하고 아주 심각하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산부터 사백만 명을 예수 믿게 하고, 그 다음에 전국적으로 그 역사를 확대하고, 북한을 예수 믿게 하고 땅 끝까지 복음 전하다가 주님 맞이해야 되겠는데, 이 평생의 소원 이 꿈! 너무 시간이 없습니다. 너무 시간이 없기 때문에 저는 고민이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민에는 크게 두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신령한 고민, 또 하나는 세상 고민입니다. 고린도후서 7장 10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 두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고민도 역시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고민이라고 하는 것은 대게 욕심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욕심이 클수록 고민도 많아집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고민을 가진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세상적인 욕심을 버려야 해결이 됩니다. 욕심을 가지고 있으면 시험도 많고 문제도 많으며 골치가 아픕니다. 그래서 세상 욕심을 회개해야 하고 버려야 합니다.

교역자가 세상 고민이 많으면 큰 문제입니다. 교역자가 매일 같이 먹고 사는 걱정하고, 돈 걱정하고, 매일 같이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어서 고민하고, 가족의 문제가 있어서 고민하고, 주의 종은 되었지만 정욕을 이기지 못해서 고민한다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우리 교역자들에게는 오로지 신령한 고민만 있어야 될 줄 믿습니다. 세상 고민은 정리가 빨리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고, 이 세상 것은 완전히 초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지만 살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고민만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은 지가 얼마인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고민되어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해주세요”라고 고민한다면 이런 것은 정말 아름다운 고민이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런 고민은 해야 될 줄 믿습니다.

또한 교회가 부흥되지 않아서 하는 고민, 그로 인해서 기도하며 금식하며 몸부림치는 고민! 이런 고민은 해야 합니다. 이런 고민은 축복이 됩니다. 교회가 부흥되기 위해 어떤 역사가 이루어져야 하느냐 하면 우리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불신자였지만, 우리 교회에 나옴으로 성령으로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또는 쭉정이 신자들도 우리 교회만 나오면 알곡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많은 전도의 열매를 맺는 헌신자가 많이 나올 때 부흥되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저는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을 다 신자라고 보지 않습니다. 불신자가 많습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불신자가 많습니다. 미국의 CRC 교단이라고 하면 아주 보수적이고 엄격한 교단입니다. 제 사위가 목사로 있기 때문에 사위를 통하여 이야기를 들으니 그 미국 사람들에게 한국식으로 전도설교를 하고 결신을 시켰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사람은 일어서라고 결신을 시켰더니 한 20명 가까이 일어났는데 그 교회 집사들이 일어섰다고 합니다. 전도해서 온 사람들이 일어선 것이 아니라 그 교회 집사들이 일어섰답니다.

그러자 담임목사와 장로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 분들이 이 교회에 나온 지 얼마나 되었는데 이제야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겠다고 일어서니 자존심 상하는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사실입니다. 집사는 되었지만, 교회 봉사는 잘하지만, 신자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영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한국 교회는 어떠하리라 생각하십니까? 제 눈에는 장로님들 중에도 불신자가 많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닙니다. 그 속에 예수님이 없습니다. 여러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한국교회가 이해할 수 없는 상식 이하의 짓을 하는 그런 사람들이 왜 많은 줄 아십니까? 왜 그런 일이 교회 안에 일어나고 총회 안에 일어납니까? 불신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 생활은 익숙하지만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부흥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이냐? 불신자가 나가면 신자가 되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특징이 있는데 회개의 눈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쭉정이라도, 다른 곳에서 깡패였고 못된 짓 하던 사람이라도 우리 교회만 나오면 알곡의 신자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지근한 성도들도 전도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교회는 그냥 부흥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렇게 부흥되었으면 좋겠는데 도무지 부흥이 안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골치 아픈 문제들만 생기고 정말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고민은 모든 교역자들의 고민이라고 생각됩니다.

 

1. 하나님의 종임을 기억하라

이 고민의 해결을 위해서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모두 다 구원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완수하실 때까지 쉬지 않으시고 이 일을 계속 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하노라” 안식일에도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구원하시는 일이 완수 될 때까지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은 안식일도 없습니다. 안식일에 더 많이 해야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에베소서 1장 3절부터 보게 되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1장 4절에서 6절까지 보면 창세전에 택함을 받는 복을 받았으며, 7절에서 10절까지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모든 죄를 대속함을 받는 복을 받았고, 13에서 14절을 보면 성령이 함께 하여 주는 복을 받았는데 이 복을 가리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해주시고, 예수님이 십자가 지셔서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시고, 성령이 역사하셔서 예수 믿고 변화되게 하시고 성화시켜서 천국까지 데리고 가는 시작부터 끝까지 완성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아주 계획적으로 행하시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완전하십니다. 그래서 실패와 조금의 부족함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 계획은 완전하게 이루어 질 줄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는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백성은 모두 다 구원하실 것입니다.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은 반드시 성공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 하나님의 종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예를 든다면 이스라엘 민족을 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보면, 그것도 완전히 하나님이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모세를 불러서 도구로 그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역자는 하나님의 도구로 뽑힌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믿어지십니까? 얼마나 영광입니까?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위해서 도구로 써 주신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릅니다. 택하는 것도 하나님이 하셨고, 독생자를 보내사 죄를 대속해 주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셨고,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예수 믿게 하시고 신앙생활 하다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까지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도구로 쓰임을 받아서 그 영광스러운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은 보통 축복이 아닙니다.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계획하신 그 일은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 일에 쓰임 받을 때에 충성하는 대로 그 일에 상을 받게 될 줄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교역자들은 하나님의 종이 되었음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충성해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2. 은혜 가운데 해야 한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해야 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자신이 목사가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주 강권적인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우리가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이 강권적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불신자가 신자가 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초신자가 나왔는데, 그 사람이 어느 날 인가 눈물 흘려 회개하게 되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쭉정이 신자가 알곡 신자가 되는 것도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제가 한 번은 포항에 있는 통합 측의 큰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했는데, 전날 저녁과 새벽 설교를 하고 낮 공부 시간인데 부목사님께서 늦게 오신 어느 분하고 감사헌금 봉투를 달라고 하시는지 자꾸만 무슨 말씀을 나누고 계셔서 제가 방해를 좀 받았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서 담임목사님하고 잠시 이야기하는데 말씀하시기를, 우리 교회의 큰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장로님 한 분이 얼마나 못되었는지 자기 멋대로 예수 믿는 사람이었답니다. 십일조 생활은 물론 안하고, 장로 노릇도 제대로 안하고, 얼마나 힘들게 하시든지 그 장로님 한 분 때문에 다른 장로님들 체면도 말이 아니며, 장로도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교인들에게도 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낮 성경공부 시간에 삼백만 원인가를 감사헌금으로 드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삼백만 원이 다 들어가지 않아서 봉투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 감사헌금 봉투에 뭐라고 썼느냐 하면은 “이제까지 떼어먹은 것, 다 바치겠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사람이 변한 것입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깨달은 것인데 교회에 그 교회를 부흥될 수 없도록 꽉 막고 있는 마귀와 같은 그 사람이 죽든지, 나가든지, 변하든지, 역사가 일어나 보십시오. 완전히 교회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얼마나 은혜롭고 교회가 좋아지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의 교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생명 걸고 기도 하셔야 합니다. 저 사람을 변화시켜 주시든지, 옮겨 주시든지 생명 걸고 기도하세요. 문제가 해결되면 교회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이렇게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지 축복인지 모릅니다. 많은 전도의 열매를 맺는 헌신자로 인하여 주일날 새신자들이 들어와서 부흥되는 것, 이것 또한 보통 은혜가 아닙니다. 제가 목회를 해보니 교회 부흥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이든 해 보아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99.9% 교회가 부흥되는 것은 성령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교역자의 모든 고민을 해결하는 길이 뭐냐 하면, 은혜 충만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 은혜가 충만하면 모든 것이 다 풀어집니다. 문제가 풀어지고 안 되던 것들이 되는 참 신기한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지 은혜로 해야 하고, 무엇을 하든지 은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목회는 열매가 있으며 기쁨이 있습니다. 특히 설교가 은혜로워야 합니다. 여러분은 설교를 잘 하기 위해서 애씁니다. 그런데 설교의 생명은 은혜가 되어야지, 은혜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설교를 해줘도 하나도 안 받아들입니다. 은혜가 없는 설교는 아무런 쓸데가 없습니다. 설교하면서, 전하면서, 들으면서, 은혜 받아야 합니다. 은혜만 되면 성공입니다.

제가 중국 장춘에 중국 사람들 이만 명이 모이는 곳에 가서 집회를 인도했었습니다. 통역을 세우니 설교가 제대로 안 되었습니다. 그래도 늘 하던 설교 간단히 한다고 원고도 없이 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다 우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우는지 모르게 노상 우는 것이었습니다. 집회를 한 시간 마치고 쉬는 시간에 중국의 많은 목사님도 오시고, 공산당 간부도 오셔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제가 알았는데 통역하시던 그분이 한국에서 태어나고 중국에서 자란 의사인데, 이분이 저의 설교를 통역하시다가 성령의 불을 받은 것입니다. 이 분이 말로만 듣던 성령의 불을 받아서 저보다도 더 큰 감동 속에서 통역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별로 감동 속에서 말하지도 않았는데, 이 분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계속 울면서 통역을 했던 것입니다.

교역자는 무엇보다도 설교를 잘해야 합니다. 기도도 잘하는 기도를 해야 하겠지만, 은혜가 되어야 합니다. 찬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양을 잘 하려고만 하지 말고, 찬양하면서 자신이 은혜 받고, 모든 성도들이 은혜 받으면 그게 바로 성공입니다. 심방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하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심방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을 연구해야 합니다. 얼굴을 보아도 은혜가 되어야 하고, 목사님의 삶을 보고 말만 들어도 은혜로워야 합니다. 그 사람 자신이 은혜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교역자를 볼 때 “우리 목사님은 은혜 충만하고, 보기만 해도 은혜가 된다”라는 말이 나오게 되면 그 교회는 부흥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교역자가 은혜 충만한 교역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 해결책은 성령 충만 밖에 없습니다. 은혜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은혜롭다고 할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가 하면 은혜 받은 만큼 깨달음이 오고 깨달은 만큼 변화가 옵니다. 그리고 변화된 만큼 능력이 생깁니다. 그래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는 은혜 가운데 해야 합니다. 은혜로운 교회가 되려면 먼저 교역자가 은혜 충만해야 합니다. 은혜 충만한 교역자가 교회를 은혜 충만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교역자가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은혜 받은 자가 은혜 받게 하고 은혜 받은 만큼 은혜 받게 합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목회의 모든 고민을 해결하려고 할 때 막연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은혜 충만하면 해결됩니다. 내가 은혜가 충만하게 되면 저절로 문제들이 풀리기 시작합니다.

 

3.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 번째로 목회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너무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으십니다. 무책임한 사람, 불성실한 사람, 불충하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양떼를 맡겼다가는 우리의 양들이 다 죽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그 귀한 양을 맡기지 않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맡기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흥의 원리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많은 사람을 맡겨 주시면 큰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적게 맡기시면 적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커지고 작아지는 것은 내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많이 보내주시고, 많이 맡겨주시면 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원리를 알기 때문에 주일날 설교 준비하고 설교할 때 제가 그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양들이 많은데, 이 말씀을 가지고 내가 전할 때 저들의 영혼이 어떻게 은혜를 받고 영적으로 윤택하게 해줄 수 있는 말씀인가를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제가 준비한 것을 보면, 어떤 때에는 너무 부족해서 어떻게 기도를 하느냐 하면 은혜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니 성령께서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바람 부는 날, 태풍 부는 날에도 교인들이 몇 천 명씩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예배를 준비하는 성도들을 보게 됩니다. 한 오천 석쯤 되면 큽니다. 그런데 사람의 눈이라는 것이 간사해서 많이 모인 것을 보다가 보게 되면 왜 그렇게 적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옛날에는 적어 보이지 않았는데 눈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사합니다.

성도들을 볼 때 어떻게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이 행하지 않으시면 절대 그 자리에 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려면 첫째로 그릇이 깨끗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에 우리가 잘 아는 말씀으로 큰 집에는 큰 그릇, 작은 집에는 작은 그릇, 나무그릇, 질그릇 등 여러 가지 그릇이 있는데 자기를 깨끗이 하면 귀히 쓰이는 그릇이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그릇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 교역자들이 첫째로 힘써야 하는 것은 깨끗한 마음 깨끗한 몸,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첫째로 알아야 합니다. 마귀는 어떻게든 우리의 몸과 마음을 더럽히려고 애를 씁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하나님은 몸과 마음이 더러운 사람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평신도보다 교역자들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얼마나 힘을 쓰고 있는지 모릅니다. 음란의 영이 얼마나 역사하는지 모릅니다. 목회자 사모님들은 우리 목사님들이 여자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유혹을 받는지 아셔야 합니다. 그런 사실들을 아시고 남편을 위하여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지켜줘야 합니다. 옆에만 있어줘도 지켜주는 것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하여 거룩한 종이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TV를 보다가도 마음을 더럽히고, 컴퓨터에 들어가면 인터넷에서도 얼마나 많은 유혹이 있는 줄 모릅니다. 악령은 더러운 영이기 때문에 마음이 더러워지면 마귀가 찾아옵니다. 성령은 거룩한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룩한 몸과 거룩한 마음을 품으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자이시기 때문에 거룩한 자를 기뻐하시고 거룩한 자를 축복하시고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고 거룩한 자를 높이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목회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성공하는데 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나와함께 하시고 성령이 도와주시기를 바라신다면, 성령이 기뻐하는 내 마음의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목회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가 하면 얼마나 하겠습니까? 그러나 타다가 남은 부지깽이와 같은 나라도 성령이 나를 붙잡아 쓰신다고 하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역자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 위해서 가장 씨름해야 할 것은 어떻게 내가 거룩한 삶을 유지할 것인가를 생명과 같이 여겨야 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5절에 항상 우리가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오직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느니라”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기도 생활을 통해서 우리가 거룩하게 살 수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려고 한다면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을 기뻐하시고 믿음의 사람을 높이 들어 쓰십니다. 믿음과 행위는 정비례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의 믿음을 보려면, 행실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또 믿음과 꿈이 정비례합니다. 그 사람의 믿음을 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위한 꿈, 하나님을 위한 서원, 주님을 위해서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그릇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믿음과 충성이 정비례합니다. 또 믿음과 헌신 ,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정비례합니다.

세 번째로는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크게 들어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순종하고 사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에게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원수나라이며 망해야할 나라인데, 또 그 나라에 가서 맞아죽기 쉬운데 그런 나라에 가서 말씀을 전하는 것은 정말 싫을 것입니다. 요나의 마음속에는 니느웨 백성들이 구원받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는데 왜 그런 나라에 가서 말씀을 전하다가 맞아죽습니까? 왜 고생합니까?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른 곳으로 도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가라 하면 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사람을 쓰십니다. 이사야서 20장에 보면 장차 애굽과 구스가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서 망하게 되고 살아남은 사람은 포로로 잡혀가는데, 벗은 몸으로 벗은 발로 볼기까지 다 드러난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끌려가게 될 것을 이사야에게 예언을 시키는데, 3년 동안을 이사야에게 그때 될 일을 먼저 이사야가 옷을 벗고 볼기까지 다 나온 상태로 이사야를 그렇게 살게 했습니다. 그런 이샤야를 보고 너희들이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도록 말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면 그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인간으로서의 수치를 아는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해야 한다고 하면 할 수가 이느냐는 것입니다. 왜 이샤야가 위대한 지를 알았습니다. 이사야는 그대로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서 33장에 보면 파수꾼의 사명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위기가 왔을 때 나팔을 불어서 어려운 위기를 극복하게 해야 하는 것이 파수꾼의 사명입니다. 나팔을 불지 아니함으로 죽게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죄를 파수꾼의 손에서 찾겠다고 하셨습니다. 또 7절부터는 악인에게 경고하지 않아서 그 악인이 죽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 피를 네 손에서 찾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악한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외치다가는 맞아죽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안 전하면 그 사람은 죄악 중에 망하지만 전하지 아니한 종에게는 그 피 값을 하나님이 찾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죽을 각오를 하고 하나님을 외쳐야 되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같은 경우도 보면 올바르게, 자꾸 예언을 하면서 죽을 고비를 얼마나 많이 넘기게 됩니까? 그러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우리가 죽을 각오와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충성하고 순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못합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포기를 못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정비례합니다. “순종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함께 하시고, 축복하신다”

부끄럽지만 저의 간증을 하겠습니다. 저는 소원이 뭐냐 하면, 평생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만 하면서 사는 것이 제 평생의 소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를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을 원치 않고 가라 하시는 곳에 가서 하나님의 뜻대로만 순종하다가 가는 것이 내 소원입니다. 미국 가는 것도, 서울 가는 것도 아니며, 더 큰 교회 가는 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소원인데, 저는 그 소원을 가지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수영로교회 개척할 때에도 내 기도 제목은 “나는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이 소원이니깐 말씀해 주세요.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부산인지, 서울로 가야 하는지” 그걸 놓고 기도했습니다.

수영로교회를 개척할 때에는 결정을 한 주일 남겨놓고도 무조건 순종하겠으니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셔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 제목을 가지고 결사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이 지나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목요일부터 눈을 감고 기도만 하면 수천 명이 앉아있는 환상이 보였습니다. 그것도 아주 아름다운 천연 칼라의 색깔들로 보여졌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양떼들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느냐” 하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저는 환상을 잘 보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보여주셔서 기도의 응답인 줄로 알고, 그때 수영로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얼마나 축복해 주시든지 생각하면 생각하는 대로, 그림을 그리면 그리는 대로, 말을 하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이 축복하시는데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이 앞서 행사시면서 나를 끌고 가는 것처럼 축복하셨습니다.

그렇게 되니 목회가 너무너무 즐거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니까 너무너무 행복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걱정스러운 일이 생겨도 걱정도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십 칠팔 년을 목회하다가 보니 교인들도 다 압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것을 압니다. 순종의 사람이 되세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세요.

네 번째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려면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높이 들어서 쓰십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다 귀한 하나님의 종이지만은 제가 볼 때는 엘리사가 더 귀하게 쓰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엘리사에게서는 엘리야에게 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6장에 보면 도단에 있는 엘리사를 잡기 위해서 아람 군대가 쳐들어 왔을 때, 소경이 되게 하고 그들을 다 포로로 붙잡아 와서 사마리아 성 한가운데다가 다 붙잡아놓고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왕이 그들을 다 쳐 죽이고 싶은 마음에 “이들을 칠까요? 말까요?” 물었습니다. 엘리사가 뭐라고 합니까? 치지 말라고 합니다. 죽이지 않고 오히려 대접하게 합니다. 그 후로는 그들이 쳐들어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해보니 하나님은 너무나도 자비가 많으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내가 보기에는 꼭 죽어야 되는 나쁜 인간인데 하나님은 그 영혼도 사랑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런 원수라도 그들을 사랑하고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를 사랑하시고, 그런 자들에게 양떼들을 맡기십니다. 양들 중에는 건강한 양도 있고, 병든 양도 있습니다. 사나운 양도, 온순한 양도 있습니다. 그런 병들고 사나운 양들도 사랑해 주고 돌볼 수 있는 목자에게 맡기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내 마음에 꼭 드는 사람, 좋은 사람만 우리 교회에 왔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교회가 커지기는 힘듭니다.

여러분들은 제법 교인수가 많은 큰 교회 목회자들을 부러워하시겠지만, 그 교인들 중에는 별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걸 다 수용하고, 참고, 받아주고, 그들이 변화될 때까지 기다려주다 보니 교회가 커지는 것입니다. 목사하고 부딪힐 때마다 나가게 되면 교회는 절대로 성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만큼 충성하고, 사랑하는 만큼 열매가 나타나고,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쓰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4. 기도로 해결해야 한다

네 번째로는 교역자의 고민은 기도로 해결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모든 고민은 기도로 해결해야지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저 역시 고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기도로 함으로 해결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너무도 살기 어려울 정도로 집안이 형편이 어려워 살기가 막막했습니다. 그로 인해 낙심되어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죽을 생각을 자꾸만 하게 되는데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자살할 수는 없고, 그러다 보니 어떻게 하면 실수해서 죽을 수 있을지를 고민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끝에 금식기도 하다 죽을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죽기 위해서 금식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너무너무 사는 것이 괴로워서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금식기도를 시작하고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가 되었는데, 배는 고파서 죽겠는데 죽지는 않고 가만히 생각하니 예수님도 모세도 사십 일을 금식해도 죽지 않았습니다. 방학은 삼십 일인데, 세상에서 죄짓고 고생하는 것이 싫어서 죽고 싶었는데 사십 일을 배가 고파서 죽을 것을 생각하니 지옥의 고생이 따로 없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흘째 되는 날 오늘을 넘기지 말고 오늘을 끝으로 꼭 죽을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해서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서 그렇게 전심으로 외칠 때 갑자기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너는 죽었느니라. 나를 위해서 살아 줄 수 없겠니? 나를 위해서 살아 줄 수 없겠니? 나를 위해서 살아 줄 수 없겠니?”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순간에, ‘나는 죽어 버리면 되는 줄 알았는데 주님이 나를 필요로 하시는구나!’ 주님이 나를 쓰시려고 원하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이 애원하듯이 나에게 말씀하실 때 죽고 싶던 그 마음은 없어지고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하시는걸 알았을 때는 세상의 먹고사는 모든 일들을 초월하게 되었습니다. 죽고 싶은 결정적인 고민을 결국 그렇게 기도로 해결하게 된 것입니다.

또 전도사 생활을 할 때 한번은 너무나도 심령이 고갈되어서 답답함을 느낄 때, 불광동 뒷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아무리 기도를 해도 목이 아프고, 피곤하고, 배만 고프고, 하루 종일 기도를 해도 기도가 안 되었습니다. 하루를 공치게 된 것이 너무도 억울해서 본전이라도 찾으려고 그 날 방에 철야까지 하게 되었는데, 더 피곤하기만 하고 괴롭기만 했습니다. 그 다음날도 억울해서 또 하루 종일 기도했지만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 같이 내 심령은 사막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음날은 아예 낭떠러지 옆으로 가서 죽을 각오로 기도하다가 생수의 강과 같은 불덩어리를 받을 각오로 몸부림을 치다 죽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이상하게 하늘의 별도, 달도 안 보이는 흐린 날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밤 열두 시쯤 지나서 소나기가 쏟아지는데 얼마나 비가 많이 오던지 하늘에서 물을 들이부어대는 것처럼 내렸습니다. 달라는 불은 안 주시고 물벼락만 받고 온몸이 젖으니 얼마나 화가 납니까? 그래서 정말 마지막으로 기도하고 매달릴 시간이 되었습니다. 정말 몸부림치다가 떨어질 시간이 된 것입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주여!” 하고 외치는 그 순간에 불이 임하는데, 저는 성령의 체험을 여러 번 했지만 그렇게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가운데서 불이 임하는데 기도하다가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할렐루야” 정신이 없었습니다. 기도하다가 보니 날이 밝고 비가 그쳤습니다. 제가 그때의 체험을 하고 난 후에는 제 자신이 저를 보아도 뭔가 달라졌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능력이 나타나는데 그때 이후부터 저의 목회가 달라졌음을 느낄 정도로 확실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우리 목회자들이 일생에 한번 이상은 적어도 이런 체험을 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목회의 진정한 고민을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또 한 번은 강도사 고시를 치르기 위해서 얼마 안 남겨두고 있을 때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목사님들과 총회적인 모습들 속에서 목사님들이 돈이며 권력들 때문에 타락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 자신이 도무지 목사가 될 자신이 없었습니다. 저렇게 훌륭한 목사님도 저렇게 끝나버리는데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어떻게 목사가 되어서 일할 수 있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청계산 기도원에 공부도 미뤄두고 금식기도를 하러 올라갔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목사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내 소원은 주를 위해 사는 것인데, 목사가 안 되도 전도하면 되지 않습니까? 제가 목사를 꼭 해야 하는지 아버지 말씀 좀 해주세요!” 금식하면서 월요일, 화요일을 지나 목요일이 되었습니다. 청계산 맨 위 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비가 와서 우산 받치고 하다가 며칠 동안 비가 온다고 금식하면서 우산 쓰며 기도하는 내 모습이 조금 한심하게 느껴져서 우산을 옆에 던져두고 비를 맞아가며 기도하게 되었는데, 그때 하나님이 저에게 말씀하시는데 저보고 목사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내려와서 강도사 고시를 쳤습니다. 그 때는 떨어지는 은사도 있었는데 기적적으로 턱걸이로 합격을 했습니다.

평생 목회를 하면서도 확신이 있었던 것은 주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대로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민을 다른 곳으로 풀려고 하면 안 됩니다. 처음 개척을 할 때 아주 고약한 집사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힘들게 하던지 그 문제를 놓고서도 철야를 하면서 하나님께 떼를 썼습니다. “아버지, 오늘밤에 나를 불러 가시든지 그 집사를 불러 가시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십시오. 내가 다른 교회로 가든지 그 집사가 다른 교회로 가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 주시라고 밤이 새도록 마지막 기도를 드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악에 바쳐서 기도를 했습니다. 목사가 목숨 바쳐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안 들어주실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새벽이 되어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문제다!“ 제가 문제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셨습니다. ‘나는 훌륭한 목사인데... 그 인간이 못되었지!‘ 상상도 못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틀림없는 말씀을 하셨는데 정신이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나는 내가 무슨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는 목사였습니다. 그래서 울면서 회개했습니다. ”나는 내가 무슨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는 문제 있는 목사입니다. 아버지, 나를 용서해 주세요!“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 후 인자한 음성으로 내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를 붙잡고 일하고 있지, 그 집사를 붙잡고 일하는 것이 아니란다. 너를 붙잡고 일하기 때문에 이 교회가 부흥되고 안 되고 하는 것도 너의 문제이지, 그 집사는 아무런 상관이 없단다. 그 집사는 너에게 맡긴 양일뿐이지 그 집사 때문에 교회가 되고 안 되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에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 다음부터는 교인들이 어떠한 말썽이 있어도 어떤 사람이 있어도 걱정 안 합니다. 왜요? 다른 사람이 아닌 내 걱정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달라진 것은 교인들 문제만 신경 쓰고 한방 치는 설교를 했었지만 그 후부터는 그런 설교도 하지 않습니다. 교회 부흥은 나에게 달렸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제일 사랑스러운 성도들에게 마음을 쏟고 그들을 중심으로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좋은 성도들을 향해서 은혜로운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생각으로 설교하기 시작해서 제 설교의 가시가 없어졌습니다.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제일 좋은 성도, 그냥 쳐다만 봐도 좋고 내 목회의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성도를 중심으로 설교했습니다. 목사에게 기쁨이 있어야 교회에 기쁨이 있습니다. 목사에게 행복이 있어야 교회가 행복합니다. 우리 목회자는 통로입니다. 은혜와 기쁨의 통로입니다. 바로 그 통로 역할을 하는 내가 문제인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저는 그때 그 음성을 듣고 나서 교인들에 대한 걱정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들에게 은혜를 끼쳐서 일꾼 되게 할 것인가만을 고민하게 된 것입니다.

 

5. 사랑으로 풀어야 한다

마지막 교역자의 다섯 번째 고민은 사랑으로 풀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 교역자가 마음속에 사랑이 있다고 하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교역자에게 사랑이 있으면 그 교회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잃어버리면 그 교회는 소망 없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 교역자는 죽든지 떠나야 합니다. 사랑 없는 교역자는 더 이상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얼마나 이 교회를 사랑하고 이 양떼들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문자답 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을 잃어버리면 생명을 잃어버린 것으로 성령이 그를 쓰지 않습니다. 악령에게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은혜 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랑이 넘치는 생명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목사 자신이 사랑이 넘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민도 사랑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저는 솔직히 교회의, 노회의 정치권들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너무 노골적으로 정치하고 못된 짓 하는 사람들을 아주 싫어하고, 미워하고, 말은 안 하지만 속으로는 악담을 합니다. ’너 그렇게만 살아 봐라. 교회가 되나 봐라. 네 인생이 어떻게 되나 봐라‘ 하고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이 나에게 책망하셨습니다. ”너는 왜 그들에 대해서 판단하고 정죄만 하느냐? 그들을 위해서 울어줄 수 없겠니? 그들을 안아주고 기도해줄 수 없겠니? 그들을 축복해 줄 수 없겠니?“ 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저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저는 제가 의롭고 정당하다고 보았습니다. 정치하고 못된 짓 하는 사람들도 부족하지만 예수 믿는 분이라면, 그 분도 천국 가서 우리와 영원히 살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분 하나하나를 영원히 천국에서 함께 살 사람으로 봅니다. 영원히 함께 살 보통 관계가 아닌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전에는 판단하고 정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너무나도 자비하신 분입니다. 그렇게 못된 짓을 해도 하나님은 너그러우신 분이십니다. 저도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난 후부터는 회개하고, 그분들을 위해 의도적으로라도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데 그 전에는 나를 굉장히 싫어하던 사람이, 왜? 내가 정죄하고 있기 때문에 그쪽도 나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그분들이 나를 얼마나 사랑해 주는지, 크고 작은 문제를 의논하려 하고 찾아오고, 하는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목회할 때 고민 많고, 문제가 많은데 사랑으로 풀어야 합니다. 성령은 사랑의 영입니다. 성령 충만한 한 마디로 사랑 있는 교회입니다. 사랑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왜입니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은 생명을 잃어버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교회는 아무 열매 없는 죽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사랑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애를 써야 합니다.

사랑 충만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교역자가 사랑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게 되면 그것이 얼굴에도 나타나게 됩니다. 얼굴만 봐도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상처가 있을 때, 마음속에 분노가 있을 때 얼굴에 나타나서 그 교역자를 싫어하게 됩니다. 교역자는 교인들이 싫어하면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나를 싫어하지 않고 좋아하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굴에 나타나서 내 얼굴만 봐도 사랑을 느끼면 누구나 다 좋아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상대편도 나를 좋아하게 됩니다. 이 원리를 모르면 이기적이게 됩니다. 자기 밖에 모르고 내가 생각하는 것을 겉으로 나타내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대로 다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마음에 상처와 분노가 있는 분들은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용서하는 마음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때, 내 얼굴이 바뀌고 교회가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설교할 때 사랑이 담긴 설교를 해야 합니다. 사랑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 한 분이 이상하게 삐딱하게 나가서 속을 썩이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주일날 나만 보면 안으려고 하고, 그것도 괜찮은데 어떤 때에는 안고 울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말씀하시기를 목사인 내가 변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는데 이젠 사랑한답니다. 사실은 저도 변했습니다. 그 분을 사랑하기 위해서 항상 기도했습니다. 그 분이 미운 짓을 하면 저도 인간인지라 미웠으니까, 하지만 저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때까지 기도했습니다. 좋은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가 간단해도, 미운 사람은 너무 미워서 기도를 길게 하곤 했습니다. 하나님 마음처럼 그 사람을 사랑하도록 죽도록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람이 내 얼굴을 보고 사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감동시키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만큼 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비판 잘하고 똑똑한 목사님들 교회는 어쩌면 그렇게 비판 잘 하고 똑똑한 교인들이 몰려오는지 모릅니다. 강단에서 아주 똑똑하게 설교 잘하는 목사님들을 보면 저는 걱정합니다. ‘저분 닮은 교인들이 모여 있으면 얼마나 고생할까?’ 교인들은 자기 좋아하는 사람 따라가게 되어 있는데, 어쩜 그렇게들 교인들이 목사를 닮아 가는지 모릅니다. 은혜를 받으면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이나 비판이 너그러워집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문제 있음을 고백하고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은혜롭지 않은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는 잃어버리고 교회와 사회에 대해서 어쩜 그렇게 기가 막히게 들춰내는지 모릅니다. 교인들이 닮습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에는 교인들도 얼마 모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는 은혜로우면 다 해결되니까 다른 것은 잘해도 잘 못하는 척 합니다. 그래서 회의도 대충합니다. 교회가 회의 잘하면 뭐합니까? 아무렇게나 합니다. 제직회도, 당회도 격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날 닮은 사람들만 모여서 회의에 관심이 없습니다.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너무 문제만 보고 허물만 보면서 해결하겠다고 들춰내면 더 악화되기만 합니다. 예를 들어서 건강하기를 원한다면 병에 대해서 자꾸만 연구하지 마세요. 암에는 뭐가 있고, 어쩌고저쩌고 하다가 보면, 자기도 모르게 암에 걸리게 됩니다. 병에 대한 연구를 하지 말고 건강한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저렇게 건강하게 오래 사는지, 건강에 대한 연구를 자꾸만 하게 되면 건강하게 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회를 밝은 세상 만드는 길은 골치 아픈 이야기보다도 건강한 좋은 뉴스를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할 때나 말할 때도, 문제되는 것들만을 들어서 이야기하고 판단한다면, 오히려 문제에 휩싸이게 됩니다. 교회는 비판하고 판단하기보다는 오히려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될 때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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