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8/20) 교갱협 제7차 영성수련회 주제특강

마태복음 16장 13~24절

인생이나 목회나 다 반복입니다. 오늘 지는 해가 내일 아침이면 다시 동녘에서 떠오릅니다. 오늘 아침과 같은 식탁에서 아침밥을 먹고 같은 예배당으로 출근합니다. 같은 성경말씀에 근거해서 어제와 같은 활동을 반복합니다. 해가 지면 같은 집으로 퇴근해서 어제와 같은 잠자리에 듭니다. 확실히 인생도 목회도 반복입니다. 단지 각기 인간의 차이가 있다면 그 반복이 무엇을 위한 누구를 향한 무엇에 기인한 무슨 반복이냐? 이 차이밖에 없을 것입니다.

1827년에 영국의 윌리암 페리가 북극등정에 나섰다가 실패한 이래 세계 여러나라의 탐험대들이 북극등정 도전에 나섰습니다. 약 10여 년 전에 한국탐험대가 북극등정에 성공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윌리암 팰이 실패한 이후에 163년 동안에 65개 팀이 도전했다가 17개 팀만이 성공한 직후의 성공이었습니다. 따라서 한국탐험대의 성공은 세계에서 18번째의 성공이었고 나라별로는 북극등정에 성공한 11번째 나라가 됩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위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한국 탐험대의 대장이었던 최종렬씨는 그 북극등정에 성공한 역사적인 순간 자신의 감회를 이렇게 피력했던 적이 있습니다.

“91년 5월 7일 새벽 1시 정각 내가 지구촌 제1의 극지인 북극점에 서는 순간 허무감, 그리고 허탈감 뿐이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무엇을 얻기 위해 그 숫한 어려움을 겪으며 목숨까지 내던질 각오로 지구의 꼭지점을 향해 3년이란 긴 세월을 허비했던가?”

걸어서 북극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체력을 초월하는 훈련이 반복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성공을 위해서 최종렬씨가 밤낮으로 얼마나 숱한 훈련을 되풀이했겠습니까? 그리고 그 훈련은 이제 그 분이 살아오는 순간에 그 분의 인생에 순기능적으로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이 분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이 계획했던 바가 성공하는 그 순간 흥분이나 감격보다 허무감과 허탈감에 치를 떨었다고 하는 그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인생의 무대도 목회의 무대도 반드시 막이 내릴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무대를 내려와야 합니다. 무대를 내려오는 것은 끝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은 우리가 개별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우리의 판단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인간의 박수 갈채에 의해서 판가름되지 않습니다. 내가 일평생 최선을 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마지막 순간 허탈감과 허무감에 치를 떨 수도 있고 오히려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긍지를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차이는 오직 하나 내가 내 인생의 무대에 있을 때 내 목회의 무대 위에 있을 때 내가 무엇을 누구를 위해 반복을 했었느냐로 판가름 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시기,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있었던 일을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본래 헤르몬산 기슭 해발 345m 지점의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분봉왕이었던 헤롯 빌립이 그곳에 대도시를 건설합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의 칭호인 가이사를,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이름인 필립을 붙여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명명했습니다.

2000년 전 당시 로마제국 내에는 로마황제의 이름이나 칭호가 붙어있는 도시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무 도시에나 로마황제의 칭호나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두 가지 전제 조건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일정 규모의 이상이어야만 했습니다. 아무렇게나 조그만 규모의 도시를 일구어놓고 로마황제의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로마황제에 대한 불경이 될 것입니다. 두번째는, 그 도시의 한가운데 혹은 그 도시의 가장 중요한 지점에 황제를 위한 황제의 신전이 반드시 자리잡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당시 로마황제는 지상의 신이었습니다. 인간의 경배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가이사랴 빌립보가 가이사르라고 하는 로마황제의 칭호가 붙어있다고 하는 것은 이 두 가지 전제조건이 충족된 도시임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웅장한 황제의 신전에 인간을 압도하는 황제의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를 지나면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얘들아, 세상사람들이 나를 가리켜서 누구라고들 하고 있니?”

당시 로마제국이 추구하고 자랑하던 것은 세가지로 대변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의 힘이었습니다. 정치적인 힘, 경제적인 힘, 군사적인 힘 그것이 로마제국의 최고의 자랑거리였습니다. 두 번째는 그들의 학문과 지식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엄청난 석재와 화려한 대리석으로 대도시를 일구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학문과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 대도시마다 엄청난 규모의 도서관을 짓고 일반가정에도 의례 서재를 구비하곤 했습니다. 세번째는 인간의 미,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기 위해서 아름다운 몸매를 지닌 여인의 나상과 우람한 근육을 지닌 남자의 나상을 도시 곳곳마다 즐비하게 세워두곤 했습니다. 우리가 글이나 영화를 통해서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 웅장한 황제의 도시 앞에 나사렛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 분의 입고 있는 옷, 행색, 몰골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분을 추종하고 있는 비천한 갈릴리 어부들의 모습을 연상한다면 그 황제의 도시 속에서 주님을 비롯한 제자들의 모습은 걸인들의 일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웅장한 황제의 신전 문지기보다 예수님의 몰골이 더 초라했을 것입니다. 그 초라한 모습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니?”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 하고 또 더러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한사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얼핏 주님에 대한 칭송의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대화가 황량한 벌판이 아니라 웅장한 황제의 도시를 배경으로 주고받은 대화임을 감안한다면 전혀 칭찬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바로 당신과 같은 몰골이라면 저 황제의 신전에서 인간의 경배를 받는 신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당신과 같은 몰골이라면 세상사람들은 당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을 거쳐갔던 선지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주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에게 있어서 나는 누구냐?” 이것은 한적한 바닷가에서 던져진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웅장한 황제의 도시에서 빈민의 옷을 걸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그 질문에 대해서 베드로가 답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고백이 벳세바 벌판이 아니라 황제의 도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드려졌음을 생각한다면 이 고백의 의미를 우리는 바르게 알게 됩니다.

경제적인 힘, 정치적인 힘, 군사적인 힘으로 인간의 지식을 고양시켜주고 인간의 아름다움을 누리게 해주는 로마의 황제가 메시야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거지같은 모습이라 할 지라도 나사렛 예수 당신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로마 황궁의 금빛 보좌 위에 앉아있는 로마 황제, 신전에서 인간의 경배를 받고 있는 로마의 황제가 하나님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은과 금은 없지만 나사렛 예수, 당신이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드려졌던 가이사랴 빌립보의 전경을 우리의 머리 속에 다시 그려본다면 이 고백의 더 깊은 의미를 우리는 더 곱씹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힘, 인간의 지식, 인간의 아름다움, 그 자체를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 당신의 삶, 그것을 목적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더 주석을 더해서 설명한다고 하면 이 세상을 압도하는 황제의 논리가 아니라 내가 비록 황제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 산다 할지라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의 영원한 논리를 따라 살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맘모니즘, 성공지상제일주의, 물신주의, 배금주의로 대변되는 황제의 논리를 배격하고 나사렛 예수, 당신이 우리 앞에서 보여주셨던 그 삶의 길을 따라가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이 고백이 황제의 도시에서 드려졌던 고백임을 감안하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향해서 인간이 드릴 수 있는 고백중에 가장 위대한 고백이었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하신이는 네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그렇지 않습니까? 온 세상이 눈에 보이는 황제의 논리판인데 그 눈에 보이는 황제의 논리를 뛰어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논리를 따르겠다고 고백하는 것, 그 가치를 아는 것은 위로부터 아버지께서 은혜를 주시지 아니하시고는 결단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베드로를 향해서 세가지를 천명하셨습니다. 첫째로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My church!. 그러면 교회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게 됩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란 황제의 논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면서 영원한 논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 그 교회가 크기에 상관없이 진정한 주님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 세상으로부터 교회가 부패했다고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면 그 이유는 한 가지 일 것입니다. 교회를 이루는 사람들이 영원한 논리가 아니라 황제의 논리에 빠져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께서 두 번째로 천명하셨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생각해보십시오. 영원한 논리를 지향하고 믿고 따르는 자들 가운데에 영원하신 주님께서 좌정하고 계실 터인데 어찌 음부의 권세가, 사탄의 권세가, 사망의 권세가 틈탈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적지 아니한 교회들이 분란과 다툼 속에 빠져있다면 그 또한 교회 스스로 황제의 논리 속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황제의 논리는 반드시 처절한 경쟁을 불러일으키기에 그 끝에는 반드시 다툼과 반목과 질시가 뒤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 번째 이렇게 엄명하셨습니다.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메면 하늘에서도 메일 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즉 응답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영원한 논리를 지향하는 사람들 가운데에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응답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수없이 많은 예배당이 이 땅에 존재하고 있고 전 국민의 4분의 1이 그리스도 인임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사회를 향해서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면, 오히려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면 그 역시 영원한 논리가 아니라 황제의 논리를 숭상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황제의 논리는 반드시 허망함, 폐허로 끝이 납니다. 황제의 논리의 본질은 물거품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을 배경으로 이 시대, 우리의 교회를 진단해 보십시다.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입니까? 지나간 몇 년 동안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있는 한인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저는 일면식도 없는 분들이었지만 아마 책을 통해서 저를 알게 되신 분들이 편지를 보낸 듯 합니다. 그 편지의 내용들은 주로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대한 가슴아픈 사연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제가 몇 통만 참고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먼저 한국에서 받은 편지입니다.

「궁금한 것이 있어 필을 들었습니다. 저희 교회는 교인수는 얼마 되지 않으며 헌금은 대부분은 목사님의 개인적인 선교사업에 충당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담임목사님께서는 다이너스티 승용차를 타셨는데 이번에 체어맨으로 바꾸신다고 합니다. 물론 교회의 헌금 관리는 목사님께서 직접 관여하고 계십니다. 목사님께서는 매달 약 20여 회의 부흥집회를 나가시지만 교회에서 받는 봉급에 대해서만 십일조를 내십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교인에게는 늘 온전한 십일조를 강조하십니다. 이로 인해 얼마나 많은 교우들이 시험을 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제 주위에는 정말 어렵게 목회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목사님이 체어맨을 타는 교회에 십일조를 받쳐야 하는지요 아니면 어려운 교회로 보내도 되는 것인지요.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당연히 이 교회를 떠나야겠지만 아직까지도 확신이 서지 않아 스스로 자위하면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받은 편지입니다.

"저는 한국에서 정치학 박사로 강의를 하다가 96년에 영국으로 유럽정치와 관련하여 유학을 왔습니다. 저는 늦어도 내년 봄 이전에는 학위 논문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제 영국을 10개월 정도 있으면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만, 영국에 오신 목회자들 대부분은 목사님일지는 모르지만 목회자가 아닌 분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을 외람되이 밝혀드리고자 함입니다. 그 분들은 대부분 선교나 목회를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거의 영국에 영주권을 받으려고 온 분들로 대부분 목회를 빙자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어느 곳에서도 더 이상 목회를 할 수 없는 분들이 마지막으로 택한 곳이 영국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영주권을 얻어 자녀들을 박사 내지는 일류 대학에 가게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혹시 목사님께서 잘 아시는 분들께는 누가 될 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곳에서 유학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한국영화 “할렐루야”의 주인공과 같은 분들이 대부분이라는 데에 깊은 좌절과 절망이 있습니다. 그 분들 중에는 몇 번씩 추방을 당해 영어 이름으로 Park 대신 Bark으로, Kim대신에 Gim으로 다시 바꾸어서 불법으로 영국에 입국한 분들도 많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 분들 자녀들의 이름도 고개를 갸우뚱 할 정도로 이상한 철자를 쓰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곳의 젊은 영혼들은 다 파리한 영혼으로 매말라가고 있음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다니고 있는 교회도 참 안타깝고 답답하고 탄식할 일이 많습니다. 지난 4년간 건축헌금으로 적금해둔 돈을 얼마 전 사적인 용도로 쓰시겠다고 목사님이 말씀해서 재직회에서 말렸습니다. 그 때 그분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적어보겠습니다. 물론 저희들이 목사님을 청빙한 것이 아니라 이 교회는 그 분이 개척한 교회임을 밝혀드립니다.

1.목사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 돈을 얼마든지 언제든지 쓸 수 있다. 갚을 수도 있지만 못갚을 수도 있다. 2.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고 예수님 다음에는 목사다. 교회보다 목사님이 더 중요하다. 3.IMF때 건축헌금 적립금을 한국으로 보내어 높은 환율로 팔았다가 환율이 떨어질 때 영국으로 역송금했더라면 큰 이익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재직들이 교회는 비즈니스처럼 하면 안된다면서 반대했다. 그 때 반드시 그랬어야만 했다.

교인들 대부분은 이미 떠났습니다만 그들 중 2년 반이나 섬기던 이곳 교회 목사님께 전화 한번 하는 분이 없습니다. 대학의 서너 가정도 교회를 떠났고 이제 저도 부득불 이 교회를 떠나야 될 듯합니다. 6명의 재직들은 아예 재직회에 참석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헌금과 재정관리는 모두 목사님이 손수 집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 누가 십일조를 받쳤고 누가 내지 않았다는 것이 그 분의 주요 관심사입니다. 그리고 늘 그 달의 생활비에 초점을 맞추어 받지 못할 상황이면 모든 행사를 취소합니다. 헌금기도 중에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교역자의 잘못을 다른 교역자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금기사항으로 여겨집니다만 한번 이곳의 안타까운 영적 현실을 헤아려주십사 하고 이런 편지를 드림을 널리 양해해주시고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미국에서 온 편지입니다.

"교회를 일요일의 의례행사로 가는 미국사람은 제쳐놓고라도 얼마나 많은 한인교포 신자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에 목말라 신음하고 있습니까? 수십년씩 목사로 재임하면서 교회를 개인의 기업으로 만들고 있는 뉴욕의 교회들, 목사와 장로파로 나뉘어 툭하면 법정소송까지 마다하지 않는 L.A의 교회들, 총 교민 2만5천여 명에 교회가 새끼에 새끼를 쳐서 수백 개가 되어있는 밴쿠버시. 신도수 30여 명이 있는 교회의 목사가 대궐같은 교회를 사 놓고는 목사님이 신도의 직장을 일일이 방문하면서 헌금을 요구하고 있는 라스베가스의 교회, 돈을 벌어 부자가 되었지만 마음이 부자가 되지 못하며 큰 집에 영화관 같은 대형 TV에 각종 사치로 허전함을 채우는 교민들, 모두들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목말라 하는 손마른 병자들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나라 일간지에서는 교회의 문제점이나 어두운 점들, 바람직하지 못한 점들을 정면으로 기사화하는 것을 거의 금기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교회는 온상 속에 있습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발행되는 남가주 한국일보에 정숙희 기자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 역시 착실한 크리스챤이고 교회 집사입니다. 그 분이 지난 6년 동안 일간지인 한국일보에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는 칼럼을 썼었습니다. 그래서 남가주에 있는 많은 교회들과 교인들로 하여금 새로이 자신을 성찰해보게 하고 또 많은 것을 깨닫는 데에 도움을 주었었습니다. 그 정기자가 작년에 6년 동안의 칼럼을 마감하고 8월달 마지막 칼럼을 썼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이 분은 다시 독자들의 성원 때문에 지금도 칼럼을 재기하고 있습니다. 8월 마지막 칼럼을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제목은 “K 목사님께”입니다. K 목사님은 어떤 특정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 칼럼을 읽는 독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앞으로 자주 뵙기 힘들 것 같습니다. 지난달로 만 6년 1개월 동안 맡았던 종교면에서 손을 놓게 되었습니다. 아주 오랜 동안이었던 것 같은데 6년이라고 쓰고 보니 잠깐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6년은 우리 가족의 표현을 빌자면 시험에 들어있던 기간이었습니다. 한인교회 곳곳을 뛰어다니면서 좋은 미담, 훌륭한 성직자들도 많이 만났지만 그보다는 교회와 크리스챤의 나쁜 모습을 너무 많이 보게 되었기 때문이죠. 그 불합리성을 지적하는 칼럼을 쓰면서부터 개인적으로 감당하기 힘들만큼 많은 반향에 부딪히기도 했습니다. 시원하다. 용기가 좋다. 어려움이 많지 않느냐는 격려도 많았고 좀 지나치지 않느냐는 비난도 있었습니다. 그처럼 회자되었던 이유는 그동안 종교계의 부패상에 관해 언론이 침묵해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끊임없는 갈등과 분열, 이것이 한인교회의 역사라고 한다면 목사님 제가 너무 심한가요? 제가 보기에 교회와 교인들은 끊임없이 다투고 있습니다. 제 책상에는 수많은 교인들이 목사를 장로를, 혹은 교회를 비방하며 보내온 투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또 험담으로 가득한 전화를 받은 것은 얼마인지요.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알게된 것은 교회의 문제는 주도권싸움에서 시작되어 돈싸움으로 끝난다는 사실입니다. 목사와 장로, 원로와 후임목사간의 주도권 싸움이 종국에는 누가 교회 건물을 차지하느냐로 법정까지 가니까요.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한 교회의 분쟁을 예로 들어 보일까요? 어느 쪽이 잘못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양쪽 다 상대를 결사적으로 증오하며 쫓아내려 한다는 사실이 분명하지요. 분열된 목사측과 장로측이 예배 중 헌금 주머니를 쟁탈하기 위해 육탄전을 벌이다가 몇 사람이 다치고 깁스까지 했습니다. 싸움이 절정에 달했던 3주 동안은 주일예배마다 싸움이 일어나 경찰이 출동했고 양쪽이 모두 안전을 위해 시큐리티가드를 대동하고 예배에 임했습니다. 결국 한쪽이 교회 자물쇠를 모두 바꾸고 주차장을 봉쇄한 후 입구에서 일일이 얼굴을 확인하고 자기 편만을 교회로 들여보내 예배를 가졌으며 다른 쪽은 인근 주차장에 탠트를 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목사님, 이것이 교회입니까? 이것이 정말 예배입니까? 이 사람들이 성도들 맞습니까? 바로 이것이 한인 크리스챤들의 실상입니다. 너무나도 잘못된 교회관과 그릇된 예배관, 비툴어진 목회자관에 기복신앙을 토대로 한 성장주의와 성전건축에 대한 집념에 빠져 한국교회는 부패할 대로 부패한 것입니다. 목사님 말씀대로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앞으로 한국교회가 어떻게 되겠는가하고 묻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 개인의 생각으로 교회는 자정능력을 상실했다고 봅니다. 현 교권주의 제도하에서 신학교를 나와 목사안수를 받은 사람들이 교회를 운영하는 한 같은 일은 되풀이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반복되기 때문이겠지요. 자기 목에 칼을 들이대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요즘은 유행처럼 교회개혁과 갱신을 부르짖는데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개혁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그동안 목회 성공은 양적 성장이라는 등식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 목사를 거의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 성공의 척도는 더 크게 더 멋있게 예배당을 건축하는 일이라고 목회자뿐 아니라 성도들 모두가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는 것을, 목회는 기업이 아니라는 것을, 다같이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한가지 희망은 평신도들입니다. 평신도가 깨어나면 달라질 것입니다. 교회의 주체인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파수꾼이 된다면 교회는 다시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칼럼과 무관한 사람들입니까? 이 칼럼은 미국에서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국내와는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대한민국 도처에 예배당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으로부터 받는 가장 많은 질문이 있습니다. 다닐 교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수없이 교회는 많은데 자신의 몸을 맡길 교회는 없다고 사람들이 탄식합니다. 분명히 많은 문제가 있음이 확실합니다. 만약 이 칼럼 앞에서 우리 역시 목회자로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면 그 해결책은 무엇이겠습니까?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먼저 부인하라구요. 우리는 자기 부인이라는 말을 흔히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기 부인의 내용이 무엇일 것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성찰해보지 않습니다. 오늘 이 본문의 컨텍스트를 우리가 생각해본다면 자기 부인의 의미를 보다 명료하게 알게 됩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받으신 주님께서 비로소 예루살렘에 가셔서 당신이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서 고난을 당하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주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간청했습니다. 간청했다는 헬라어 에피티마오는 간절히 바랬다는 것이 아니라 꾸짖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방금 베드로는 당신은 메시야요 성자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던 간에 그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우악스럽게 붙잡고 예수님을 꾸짖었습니다. 그런 소리는 하지 말라구요. 그 때 주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헬라어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면 “너의 생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속한 것이로다.”

사탄은 머리에 뿔을 달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생각이 아닌 인간에게 속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자가 있다면 그가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생각과 인간에게 속한 생각은 오늘의 용어로 바꾸면 무슨 말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 속한 생각이란 영원한 논리를 추구하는 자요 인간에게 속한 생각을 따르는 자는 황제의 논리에 빠져있는 자인 것입니다. 황제의 논리로 볼 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손에 못박혀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을 붙잡고 꾸짖었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주께서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면 먼저 너 자신을 부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자기 부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첫째는 황제의 논리를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황제의 논리가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 황제의 논리를 부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은총을 입었지만 그러나 영원한 논리를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할 만큼 황제의 논리를 부인할 수 있는 용기와 실천력을 아직까지는 지니고 있지 못했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목회자가 황제의 논리에 빠져있는 한 결코 주님의 손과 발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진리이십니다. 주님은 황제의 논리와 함께 자리하지 않습니다. 내가 황제의 논리를 배격하고 영원한 진리에 사로잡혀 있을 때만 우리는 진리의 손과 발이 될 수 있습니다.

작년 8월 마지막주일 예배를 영국 런던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드렸습니다. 그곳은 영국 성공회의 대표적인 예배당입니다. 서울운동장 축구장 만한 큰 넓이의 홀, 그러나 사람 한 명 없는 그 텅빈 홀을 가로질러서 제단 앞에 200여 명의 노인들이 앉아있는 예배석에 앉았을 때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복음이 이런 것이었던가? 10시에 웨스트민스터 사원 예배를 드리고 나오니까 11시가 되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바로 건너편에 Methodist Central Hall이 보였습니다. 엄청난 규모로 지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영국성공회에서 뛰쳐나온 감리교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 웨스트민스터사원 정면에 웅장한 건물을 지었음을 알게됩니다. 그 예배당으로 들어가서 11시 예배에 참여를 했습니다. 그 큰 예배당 속에 70여 명의 교인들이 예배시간 내내 졸고 있었습니다. 그 예배당 계단을 내려오면서도 가슴이 저렸습니다. 존 웨슬레가 목숨을 걸고 부르짖었던 그 복음이 과연 이런 것을 위함이었던가? 저는 아니었다고 믿습니다. 유럽에는 가는 곳마다 대형 성당들과 예배당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배당들마다 다 비화가 있습니다. 옆 도시의 대주교가 첨탑높이 몇 십 미터의 성당을 지었습니다. 그러면 이 도시의 대주교인 나는 그 첨탑보다 1미터 더 높은 성당을 지어야 합니다. 내 동창생 누구는 어떤 얼마만한 넓이의 성당을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보다 더 크게 지어야 합니다. 유럽의 교회가 황제의 논리에 빠져있는 동안 교인들을 다 잃었습니다. 영원한 논리를 추구하도록 사람들은 훈련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황제의 논리에 빠져있는 한 가시적으로 엄청난 업적을 이룰 수는 있지만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진실할 수 없습니다. 황제의 논리가 목표가 되어있다고 하는 그 자체가 이미 진리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자기부인이라고 하는 것은 넓은 문을 부인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이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은 했으면서도 주님께서 수난 당하실 것을 예고하시자마자 주님을 우악스럽게 붙잡고 꾸짖었던 이유는, 그 당시 유대인들 모두가 이 땅에 오실 메시야는 로마 제국을 물리치고 그들에게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독립과 번영을 가져다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모든 목회자가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인 것은 아닙니다. 서울에 있는 모 교회가 멋진 곳에 기도원을 지었습니다. 그 기도원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그 기도원 속에 대형 목욕탕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름이나 겨울에 교인들이 가서 영성훈련을 가진 뒤에 목욕탕에 가서 땀을 뺀다는 것, 이것 참 기분좋은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웬만한 산 속에 대형목욕탕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 교회도 목욕탕을 지으려고 했던 계획이 관계당국에 의해서 수락되지 않았습니다. 그 교회가 관계당국에 목욕탕을 지으려고 하는 사유서를 다시 제출을 했습니다. 교회는 세례라는 예식을 행하는데 세례를 행하기 위해서는 목욕탕이 있어야 합니다.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위해서 목욕탕을 지으려고 하는 거니까 허락해주십시오 해서 관계당국에서 허락이 났습니다. 그래서 좋은 목욕탕이 들어서고 그 목욕탕은 그 교회와 교인들의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 교회는 침례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침례교라 할지라도 침례를 줄 때 강단 옆 조그만 탕 하나 있으면 됩니다. 산 속에 대형 목욕탕을 지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교회는 장로교입니다. 장로교는 세례를 줄 때에 물 세방울만 있으면 됩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께서 교인들에게 각자 삶의 현장에서 진리를 따라 정직하게 살라고 설교하실 수 있겠는가? 아니 하실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 설교를 교인들이 믿겠는가? 그 설교를 통해서 성령께서 역사하시겠는가? 제가 해외에 살면서 서울에서는 알지 못했던 여러 사실을 알았습니다마는 그 중에 하나가 많은 한인들의 집에 대한항공 담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대한항공 담요는 대한항공 재산입니다. 그것은 호텔에 있는 칫솔처럼 1회용품이 아닙니다. 쓴 뒤에 반드시 두고 내려와야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인가정에 대한항공 담요가 있습니다.

이유는 두가지라고 합니다. 첫째는 아이들 키우는데 그 담요가 더 없이 좋고, 두 번째는 여행을 할 때 그 담요가 얇고 두께가 얼마되지 않아서 좋다는 것입니다. 유럽에서는 주로 자동차를 타고 여행하지 않습니까? 여행을 하다보면 호텔을 잡지 못하면 자동차 안에서 잠을 자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때 좋다는 겁니다. 제가 한국에 와서 다시 확인했습니다마는 한국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대한항공담요가 굉장히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경우는 제외하십시다. 믿는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다. 만약 여러분들 가운데에서도 대한항공 담요를 가져오신 분이 계신다면 그 대한항공 담요를 승무원의 허락을 받고 가져오셨습니까? 아무도 모르게 살짝 가져오셨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순간 그것이 도적질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서는 자신이 도적질했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삽니다. 여러분, 아무도 보지 않는 데에서 대한항공 재산인 담요를 가져오는 자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신실하게 살 수 있습니까? 저는 거짓말이라고 봅니다.

제가 독일 스튜트가르트에 갔을 때 청년들과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에 대한항공 담요 이야기를 했습니다. 수련회가 끝나는 마지막날 청년들 몇몇이 나와서 자신이 깨달은 바를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한 청년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저는 어젯밤에 한 잠도 자지 못했습니다. 꼬박 밤을 새운 셈이지요. 왜냐하면 저희 집에 대한항공 담요가 두 장이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청년들 집에 가면 의례 대한항공 담요가 있기에 저도 가져온 것이지요. 문제는 저는 신학도라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계획한 공부를 끝내면 저는 한국으로 돌아가 신학자나 목회자로 평생 살아갈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단지 많이 한다고 해서 타인의 것을 도적질하고서도 자신이 도둑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이러고서도 하나님과의 약속에 충실하며 스스로 의로운 양 살아온 제 자신이 부끄럽고 한심스러워 한잠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 신학도의 모습은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모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절대 영원하신 논리 위에 서기보다는 시류에 편승해서 세상사람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아오면서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구호만 외치고 있는 저 자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넓은 문을 가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참됨은 다수결에 의해 결판나지 않습니다.

 

세 번째로, 오늘의 본문 속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자기부인은 자기 관대함의 부인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주님을 향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 말씀을 하실 때에 주님을 비판하고 꾸짖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주님을 비판하는 그 비판의 10%만 자기를 향하게 했던들, 자기에게 엄격했던들 주님으로부터 사탄이라 매도당하는 수치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순서 중에 영국 왕을 위해서 기도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만약에 우리가 흔히 하듯이 정치 지도자를 위한 기도시간이었다면 당연히 지금 현재 영국을 이끌고 있는 토니 블레어 수상을 위해서 기도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국 왕은 정치적인 리더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교회 예배시간에 영국 왕을 위한 기도시간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수장령 때문입니다. 1534년에 헨리 8세는 자신의 이혼과 재혼을 반대하는 로마 카톨릭과 결별하고 영국 국교회를 탄생시킵니다. 그리고 그 스스로 수장령, 영국교회의 머리가 되었습니다. 헨리 8세가 죽고 난 뒤에 왕위를 계승한 그의 딸 레위 1세는 카톨릭 신부였습니다. 그는 국교의 신자들을 무자비하게 죽였습니다. 그래서 글라디 레위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글라디 레위가 죽고 난 뒤에 이복여동생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를 계승합니다. 그는 개신교도였습니다. 그는 언니에 의해서 폐지되었던 수장령을 다시 회복시켰습니다. 1559년에 수장령이 재제정된 이후에 지금까지도 그 수장령은 유효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영국의 왕이 영국교회의 유일한 최고의 통치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국왕실이 다이애나와 찰스 황태자의 사건은 제외하더라도 지나간 500년 동안 얼마나 부도덕하게 살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과연 그 왕이 성결한 주님의 교회의 유일한 최고의 통치자가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 있는 성공회 교회들도 이것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서울에 있는 성공회는 이것을 하지 않는 것으로 제가 확인을 했습니다. 할 수 없겠지요.

여러분, 제가 지금 드리는 이야기를 오해 없이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누구의 공적을 폄하하거나 누구를 의미없이 비판하기 위해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자신을 성찰하는데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한국 정치가 유신시절, 암흑기를 맞이했을 때에 민주화를 위해서 투쟁했습니다. 그 때에 한국 성공회 역시 많은 활약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묻고 싶습니다. 그 성공회의 지도자들은 영국에서 유학하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영국 국교회 예배 시 영국의 왕을 위해서 기도했던 분들입니다. 수장령이 있기 때문에 영국 왕을 위한 기도시간이 없이는 영국 내에서 국교회의 예배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분들이 정치적인 잘못에 대해서는 그처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과연 영국 왕이 자신들의 수장이 될 수 있는지 교회의 수장이 될 수 있는지 한국 성공회 지도자들이 비판했다는 이야기를 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얼마나 이율배반입니까? 그처럼 자기에게 관대한, 타인을 향한 비판으로 사회의 가시적인 부분을 개혁시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을 고치지는 못합니다.

CNN의 간판언론인인 레리 킹이 자신의 언론생활 30주년을 기념하는 인터뷰를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늘 인터뷰하는 사람이 인터뷰를 당한 것입니다. 그 때 기자가 레리 킹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언론이 생활하는 동안에 정말 꼭 인터뷰를 해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누구인가? 그랬더니 레리 킹이 로마카톨릭 교황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런가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온 세계의 민주와 인권에 대해서는 간섭을 하면서 자기 스스로는 왕관을 쓰고 전근대에 살고 있는 그 사람을 꼭 인터뷰 해보고 싶다.” 믿지 않는 레리 킹에게 비친 교황의 모습입니다.

한국 정치가 암울할 때 한국 카톨릭 역시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해서 많은 투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 중에 누구도 과연 인간이 왕관을 쓰고서 하나님의 자리에 대신해서 앉아있을 수 있는지 비판하셨다는 이야기를 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독일의 한스 킹 신부가 교황의 무오류성에 대해서 비판하고 가차없이 파문을 당할 때에도 한국의 그 어떤 신부님도 한스 킹 신부님을 변호해주었다는 이야기를 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자기 관대함입니까?

여러분,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개신교가 지향하는 가장 큰 것이 만인 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목사인 우리는 각계 교회에서 교황으로 군림하고 있지 않습니까? 교인 누구의 비판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스위스에 있는 3년 동안에 신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목회자들로부터도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주로 이런 내용입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임전도사로 혹은 부목사로 사역을 하고 있는데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가 신학교에서 배운 데로 행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담임목사님께서 말씀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께 꼭 이렇게 답장을 써드리곤 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찾아보십시오. 언제 어느 시대 어디에서 모든 교회와 신자가 바로 서있었던 적이 있었습니까? 성경은 한번도 없음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성경은 오히려 거꾸로입니다. 항상 절대 다수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께 등져있었고 소수만 깨어있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그리고 깨어있는 소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셨다는 것,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젊은 목회자인 당신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려 하기에 앞서서 당신 스스로가 먼저 깨어있는 소수일 수 있도록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평생토록 볼품없이 산다 할 지라고 당신을 통해서 이 시대를 바꾸실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잊지 마십시다. 성경은 언제나 절대다수가 부패해 있었음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신다는 그 절대적인 메시지를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자기부인이란 눈에 보이는 것을 부인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꾸짖고 주님을 붙잡고 불경한 행동을 했던 것 역시 베드로는 보이지 않는 영원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터어키를 다녀오신 분이 계신 줄 압니다. 안가보신 분이 계시면 언제 해외여행을 하실 기회가 있으면 꼭 터어키를 가보시길 권합니다. 터어키에는 신구약의 수없이 많은 인물과 유적이 남아있는 땅입니다. 사도바울과 요한사도가 그처럼 목숨을 걸고 선교했던 그 모든 현장이 그 땅에 있습니다. 동로마 수도가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로 옮겨가면서 그 땅은 그리스도교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교회는 그곳에 수없이 많은 예배당들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남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철저하게 폐허입니다. 흔적들만 있고 돌덩이들만 있습니다. 그 터어키를 쭉 돌다보면 우리는 분명한 한가지의 메시지를 얻게 됩니다.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것을 세우려고 하는 인간, 그러나 끊임없이 그것을 허무시는 하나님.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건물이 있어야 합니다. 이왕이면 아름다운 건물을 짓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종착역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결코 우리의 절대적인 목표일 수 없다는 것, 그것을 뛰어넘지 아니하면 우리는 황제의 논리에 자기도 모르게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의 원천입니다. 그 갈릴리에서 흘러나오는 요단강물을 통해서 유대인들은 생명을 부지합니다. 2000년 전 로마사람들은 갈릴리 호수를 갈릴리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디베랴’라고 불렀습니다. 주전 25년 경에 그곳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티바가 갈릴리 서쪽 해안에 대도시를 짓고 당시 로마황제인 티베리우스를 붙여서 ‘디베리야’라고 명명했습니다. 그 이후에 그곳에 사는 지배자들은 갈릴리호수를 디베랴호수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태인들에게는 여전히 갈릴리바다였습니다. 디베랴가 로마황제의 이름으로 불리워졌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도시 속에 역시 로마의 황제의 신전이 있는 웅장한 신전이 있는 도시였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에 의해서 기록된 성경은 모두 갈릴리를 갈릴리라고 기록하면서도 유태인이 갈릴리를 디베랴라고 기록한 곳이 성경에 딱 두 번 나타납니다. 두 번 다 요한사도가 썼습니다. 처음은 요한복음 6장에 나타납니다. 오병이어의 역사입니다. 주께서 오병이어의 역사를 일으키셨던 그 장소가 디베랴 바닷가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요한사도가 유독 그 사실을 기록하면서 갈릴리를 디베랴라고 기록했겠습니까? 오병이어가 끝나자마자 민중들은 그 즉석에서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는 이 정도의 신통력이면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주기에 충분한 분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그들의 요청을 뿌리치시고 산으로 기도하러 갔습니다. 그것이 디베랴 바닷가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의미를 이제 이해하게 됩니다. 황제의 논리에 빠져있는 민중들, 그들에 반해서 영원한 논리를 추구하고 영원을 주시길 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비해 보여주기 위해 요한 사도는 디베랴라고 기록을 했습니다.

두 번째는 요한복음 21장에 나타납니다. 요한복음21장은 4복음서의 마지막장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다시 찾아가시어서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에게 세 번을 되풀이해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물음에 베드로가 세 번 사랑한다는 고백을 드립니다. 우리는 그 본문의 많은 의미들을 알고 있습니다. 아가페로 물으시는 주님, 그러나 그 뜻을 알지 못해서 필레오로 대답하고 결국 필레오의 수준으로 내려가주시는 주님을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또한 주님을 세 번 부인했기에 주님을 향해서 세 번 고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1장에는 그 일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일어났다고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관점에서 우리는 더 깊은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얘들아, 황제의 논리가 판을 치는 이 디베랴 세상 속에서 너희들은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 황제의 논리가 아니라 영원의 논리를 반복할 수 있겠느냐?” 베드로가 세 번을 반복했습니다.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주여! 이 디베랴 세상에서 황제의 논리가 아니라 영원의 논리를 따르겠나이다.” 그는 세 번을 되풀이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입으로 고백했을 뿐이었지만 이 이후 베드로는 자신의 삶으로 주는 그리스도 되심을 반복했고 그 반복적인 삶의 기록이 사도행전으로 우리에게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젊은 목회자가 쓴 마지막 구절을 읽고 끝을 맺겠습니다.

"이것 한가지는 확실한 것 같습니다. 위대한 비전과 대단한 목회철학을 말하는 것보다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신뢰할 수 있는 인격적 목회자를 후배들은 갈망하고 있다는 것, 그들을 위해서 목사님의 지나온 삶은 저에게 큰 도전과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끝까지 저희들에게 실망을 주지 마세요. Please!"

저는 이 마지막 글을 젊은 목회자의 글로 보지 않았습니다. 저를 향한 주님의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재철아, 끝까지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라.’

여러분, 변화와 변질은 틀립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영원한 논리 속에서 변화되어가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변질되어서는 안됩니다. 위대했던 우리의 신앙 선배님들 가운데에 얼마나 많은 분들이 우리를 실망시켰습니까? 또 지금 이 시간에도 실망시키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자신에 대해서 엄격하지 아니한다면 여러분 또한 타인을 실망시키는 변질된 목회자가 될 수 있습니다. 황제의 논리가 온 대한민국을 뒤덮고 있는 오늘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묻고 있습니다.

“황제의 논리가 판을 치는 이 디베랴 세상 속에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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