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8/19) 교갱협 제7차 영성수련회 저녁집회

사도행전 20장 17~24절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을 정해놓고 아시아에 들어온 날부터 지금까지 심혈을 기울여서 복음을 전하는데 대해서 얘기하다가 “내가 지금 심령의 매임을 받아서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런지는 알수 없지만 성령이 내게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각 도성에서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기 위해서는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습니다” 하는 아주 비장한 각오를 기록하는 장면입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 아주 기초적인 얘기이고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얘기이지만, 이렇게 우리가 특별히 모임을 갖게 된 이 시간에 나와 사명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우연히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다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가리켜서 '사명적 존재'라고 말합니다. '사명'이란 말은 한문으로 보면 심부름할 사(使)에 목숨 명(命)자입니다. 심부름하는 목숨,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는 목숨입니다. 이것을 자각하고 느끼고 아는 것을 사명감이라고 말합니다.

유명한 철학자였던 카알 힐티가 말하기를 “언제 사람이 가장 행복하고 보람되고 만족하고 의미를 느낄 수 있느냐? 자기 사명이 무엇인 것을 깨닫는 바로 그날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살고 무슨 일을 해도 사명감을 가지고 한 것과 사명감 없이 한 것은 질적인 면에서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 앉아계신 여러분 모두가 다 사명을 가지고 오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사명감을 느끼지 못하는 분이 계시다면 이 저녁에 사명감을 발견하게 되시는 복된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향하여 하신 말씀이 “네가 장로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은사를 다시 불일 듯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저녁이 우리의 사명을 다시 불일듯 하게 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명이 뭡니까? 하나님의 심부름인데, 나라에서 큰 심부름을 맡아서 하는 사람을 '대사'라고 합니다. 제가 어릴 때 백묵도 날라다 주고, 칠판지우개도 털어다 주고, 많은 심부름을 하는 애가 있었는데 작은 심부름이라 해서 '소사'라고 했습니다. 특별한 심부름하는 사람을 '특사'라고 합니다. 몰래 심부름하는 사람을 '밀사'라고 합니다. 하늘 심부름하는 사람을 '천사'라고 합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기 때문에 '사자', '심부름하는 자'라고 합니다. 누구나 다 심부름을 합니다.

그런데 심부름에는 크고 작은 심부름이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하기는 꼭 같습니다. 우리가 시계를 다 차고 다닙니다만, 시계에는 부속품이 많이 있습니다. 바늘 같은 것은 크게 눈에 띄는 부속품입니다. 뒤에 보면 조그만 부속품 같은 것, 눈에 보일까 말까 하는 조그만 것, 손으로 집을 수 없어서 특수한 기구로 집어야 되고, 눈에 잘 보이지 않으니까 확대경으로 봐야 하는 조그만 부속품이 있는데, 이 부속품이 말하기를 "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으니 있으나마나지" 하고 빠져버렸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시계가 돌아갈 수 있습니까? 정확한 시간을 맞출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큰 부속품이나 조그만 부속품이나 중요하기는 똑 같습니다.

저는 때때로 마음에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교회 사회에서 큰 교회 맡아서 일하는 분과 작은 교회 맡아서 일하는 분을 차별을 둡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큰 종이라고 하는 것을 듣는데 큰 교회 하면 큰 종이고, 작은 교회 하면 작은 종입니까? 제가 잘못 들은 것이길 바랍니다만, 이건 바른 표현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 보면 대선지, 소선지가 있었는데 다른 것은 없습니다. 많이 쓴 사람은 대선지고 적게 쓴 사람은 소선지인데, 그 사람이 커서 대선지가 아니고 작아서 소선지가 아니라 책의 분량에 따라서 구별한 겁니다. 하나님 앞에는 큰 사람, 작은 사람, 중요한 사람이 없고 똑같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마 이 중에는 시골에서 조그만 교회를 하시면서 어렵게 지내는 분이 있으실 겁니다. '혹, 나 같은 거야 알아주실까? 대교회의 목사님이야 하나님이 알아주시겠지만 나 같은 것 알아주실까?'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 계십니까? 이것처럼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 자녀 가운데 어떤 자녀가 '나는 아버지가 안 알아주겠지' 하고 혹 그렇게 생각하는 자녀가 있다고 하면 그 부모가 '그렇다. 나는 너를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럽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보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기대와 소원이 얼마나 크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고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중요한 사람이 있고 덜 중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비행장 같은 곳에 가면 VIP Room이라고 있습니다. 귀빈이나 돈 많은 사람들, 권력 있는 사람들은 그 방에 들어가지만, 보통사람들은 그 방에 못 들어갑니다. 귀빈실이 있다면 천빈실이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차별을 둡니다.

요새는 많이 달라졌습니다만, 제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같은 자녀라도 귀한 자녀가 있고 좀 덜 귀한 자녀가 있었습니다. 제 가정 얘기를 해서 미안합니다만, 제 아버님이 18세에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저를 낳고 2년 후에 제 누이동생을 낳았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3살이고 제 누이동생이 1살이고 우리 아버님이 23살이실 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중에 우리 아버님 사진을 보고 아버님 얼굴을 알았습니다. 그것도 피난 나오면서 못 가지고 나왔습니다만, 아버님 얼굴 본 기억도 없고 '아버지'라고 불러본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개인적으로 보면 '하나님 아버지', 그럴 때는 다른 사람이 '아버지' 하는 것과는 느낌이 다릅니다. 어릴 때 가장 부러웠던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 두세 명이 모여서 나를 보면서 수근수근 하면 나를 아버지가 없다고 업신여기고 흉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열등의식을 가질 정도였습니다.

우리 할아버님은 아들 둘에 딸 하나가 계셨는데, 우리 아버님이 맏아들이시고 삼촌이 계셨는데 일제시대 당시 평양사범학교를 다니셨습니다. 일제시대 때 사범학교 출신이라면 상당히 머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일제시대에 식민지 백성은 키우지 않아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머리가 좋은 사람은 다 사범학교에 보냈습니다. 그 사범학교에서 우리 삼촌이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글씨도 잘쓰고, 음악도 잘하고 그랬는데 학교를 졸업하고 함경도 북청에 가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다가 만주에서 내려온 열병에 걸려서 한주일 동안 열이 40도 이상 넘어서 앓다가 26살에 딸만 둘을 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린 제 생각에 '우리 박씨는 20대에 가는구나. 나도 20대에 갈 것인데 나는 뭐하지?'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보니까 그래도 하나님 일 하는 게 남을 것 같아서 전 어릴 때부터 기회만 주어지면 '목사가 되어야지'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예배당에 나가서 설교를 듣는데 어린 것이 목사님의 설교를 몇 마디나 알아듣겠어요? 하지만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가운데 내게 와 닿는 것이 있으면 적어서 '나도 이 다음에 목사가 되면 이 말씀을 참고해야지' 하고는 피난 나오면서 가져오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30이 넘을 때까지 잘 때 그냥 자본 적이 없습니다. 책 보던 것 다 정리하고 옷도 차근차근 개놓고 잤습니다. 제가 27살에 목사가 되었는데 목사일 할 때도 꼭 그렇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20대에 갈 수가 있는데 내가 가게 되면 교인들이 찾아와서 보고 그 목사 널어놓고 갔다는 말 듣기 싫어서 다 자기 전에 정돈하고 잤는데, 이제는 우리 아버님보다 갑절 이상 살았으니까는 그렇게 안 합니다만 그랬습니다.

제가 어릴 때 우리 가정에 할아버지가 계셨고, 할아버지의 어머니이신 노할머니가 계셨고, 우리 할머니, 어머니 계셨고, 우리 삼촌 어머니와 내 누이동생 있고, 사촌누이동생 둘, 나 이렇게 아홉 식구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홉 식구 중에 남자라고는 우리 할아버지하고 나 둘밖에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연세가 높으셨고 나밖에 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안에서는 우리 집안을 대표할 만한 사람이 나다 해서 얼마나 저를 위해주셨는지 모릅니다.

제 누이동생이 있었습니다마는 사촌누이동생 둘에 셋이 있었는데, 내가 누워있을 때 누이동생들이 내 머리맡으로 지나가는걸 할머니가 보시면 난리가 났습니다. 어떻게 오빠 머리맡으로 지나가느냐 발 밑으로 지나가라는 겁니다. 시골집이 다 그렇듯이 지붕이 높고 창호지문이 있어서 추우면 한기가 방안으로 다 들어오는데, 사발에 물을 떠놓고 자면 얼음이 얼고는 했습니다. 이북이니까 더 추웠습니다. 저는 할머니 하고 같은 방에서 잤는데 밤에 오줌이 누고 싶으면 옛날에는 변소간이 밖에 있으니까 요강에다 누고 했지 않습니까. 제가 오줌이 마려워서 깨서 요강에다가 오줌을 누려고 하면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시면서 “너는 여자들 쓰는 요강에 누지 말고 이리와” 하시면서 밥사발을 대줍니다. 저는 밥사발에 오줌을 누고 자랐습니다.

이유는 하나, 아들이고 귀하다. 대를 이을 사람이다. 같은 가정에서도 같은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귀한 자녀가 있고 덜 귀한 자녀가 있었는데, 아들은 귀하고 딸들은 덜 귀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자녀를 낳을 때 아들을 낳으면 산모들이 얼마나 의기양양했는지 모릅니다. 시부모  보기 떳떳하고, 남편 보기 자랑스럽고, 우리 한국식으로 미역국을 먹을 때도 가슴을 딱 내밀고 먹고, 누가 와서 물어보면 아주 의기양양하게 아들 낳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고생을 해서 애를 낳아도 딸을 낳으면 상황이 아주 다릅니다. 시부모 볼 면목이 없습니다. 자기 책임은 아니지만 남편에게 할 일을 못한 것 같아 미역국도 마지못해 먹었습니다. 누가 와서 물어도 마지못해 “몹쓸 것 하나 낳았어요” 이랬습니다.

들은 얘기입니다만, 최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 당시에 가정을 이루어서 첫아이를 딸을 낳았어요. 아무래도 목사님이라 다르죠.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딸을 주셨지만 다음에는 아들을 꼭 주실 줄 믿습니다’ 하고 기도를 했어요. 두 번째를 낳았는데 또 딸을 낳았어요. ‘두 번째 준 것 감사하지마는 세 번째에 틀림없이 아들 주실 줄 믿습니다’ 했는데 세 번째 또 딸을 낳았어요. 그 다음에 또 네 번째 낳았는데 딸을 낳았어요. 하여간 아들 한번 낳아보자 하고 낳았는데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도 또 딸을 낳았어요. 마지막으로 낳자 하고 아들일 줄 알았는데 또 딸을 낳았어요. 딸이 일곱이면 도리가 없지요. 목사 집안이 어려워서 양말 하나도 제대로 못 신기는데도 감기하나 안 걸리고 무럭무럭 잘들 자라났습니다.

그러다가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이 다 피난을 가는데 이 댁이 어떻게 우물쭈물 하다가 피난을 못가게 되었습니다. 목사 생활이 뻔하지 않습니까? 교인들이 헌금해서 먹고 사는데 교인들이 다 피난 갔으니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형제이상으로 가깝게 지내는 김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점심이나 같이 하자고 해서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목사님, 제가 하나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이 말씀을 드리는 동기는 목사님을 조금이라도 돕고 싶은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들어보시고 기분이 나쁘거나 마음에 안 드시거나 하면 없던 걸로 하면 됩니다. 다름이 아니고 목사님, 이 전쟁통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식구가 아홉이어서 식사가 어려울 터인데 저희는 단 둘이니까 그런 어려움은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저녁에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말이 나왔는데, 사람이 낳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께로부터 선물을 받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데려다가 키우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인데, 우리 나이는 이제 낳기는 틀린 것 같아서 데려다 키울 수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어떤 집에서 데려올 것인가 이왕이면 배경을 잘 아는 집에서 데려오자. 이왕이면 목사님하고 형제 이상으로 가깝고 더군다나 그 집에 딸이 일곱인데 하나둘 줘도 자리가 안 날 판이고, 더구나 그 댁이 지금 식생활로 어려운데 하나쯤 입을 덜어주면 그만큼 보탬이 되는 것 아니냐. 도와도 드릴 겸 우리가 정성으로 키우자고 얘기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조금이라도 목사님 도와드리려는 동기인데 어떠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목사님은 아침 먹으면 점심 걱정, 점심 다음엔 저녁 걱정을 하고 있는데 입하나 덜어준다고 하니까 반가운 말이거든요. 그래서 고맙다고 하고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자기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어서 사모님하고 의논해서 다시 얘기나누자고 하고는 헤어졌습니다.

집에 가니까 몹쓸 것들은 이미 다 잠자고 있는데 사모님이 말씀하시기를 “오늘 장로님 만나서 좋은 얘기 나누셨어요?” 하니까 이 목사님이 모든 얘기를 다 전했답니다. 그랬더니 사모님이 그러면 당신 생각에는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까? 남자들은 좀 즉흥적으로 단순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맏딸 보내지 뭐!" 사모님 말씀이 "다른 사람이야 쓸 것, 몹쓸 것 말이 많지만 우리 집안에서는 맏딸 하면 딸 일곱 중에 대표 아닙니까? 어떻게 대표를 남을 줄 수 있습니까?" 생각해 보니까 그것도 맞는 말이예요. 그러면 둘째를 주자고 하니까 "당신, 우리 애들 사정 모르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애들인데 그래도 둘째가 막대기 들고 셋째는 여기, 넷째는 여기 하면서 질서를 잡아서 이만큼이지, 우리 집안에 둘째 없어지면 남아날 것이 없습니다. 당신이 알아서 하세요." 그러면 셋째 주자고 하니까 그 사모님 왈 "정말 당신은 내 사정을 모르십니다" 하면서 "내가 벌써부터 허리가 약하잖아요. 무거운 것을 들기를 합니까? 힘든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그래도 천만다행이 요 셋째가 어릴 때부터 바지런해서 물 길어다 준다, 불 때준다, 밥도 해준다, 청소도 해준다, 빨래해준다, 이렇게 집안살림을 그 애가 다 맡아하는데 우리 집안에 셋째 없으면 집안살림을 누가 합니까? 당신이 다 알아서 하세요." 그러면 넷째 주자고 하니 "당신 넷째 성적표 봤어요? 그 애는 모든 과목이 몽땅 다 수인데 공부 잘하고 똑똑한 애를 우리가 데리고 있어야지 왜 남을 줍니까?" 그럼 다섯째 주자고 하니까 사모님 하시는 말씀이 "그 애는 주고도 욕 먹어요. 그 애는 어릴 때부터 알레르기가 있어서 참 바람만 조금 나면 콜록콜록 기침을 하는데 그래도 제 부모 밑에서 자라니까 그만하지 장로님 댁에 보내보세요. 찬바람만 나서 콜록콜록 기침하면 장로님이 쓰지 못할 병신새끼 하나 줬다고 욕할 텐데 주고 욕 먹을 것을 뭐 때문에 줍니까?" 여섯째는 잊어버렸고 막내 일곱째는 사모님이 말씀하시길 "다른 애는 몰라도 그 애만은 안돼요. 딸 일곱 중에 나 닮은 놈은 그 놈밖에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딸 일곱이면 많은 숫자구요. 한 둘쯤 없어져도 밖에서 보면 자리하나 나지 않는 것 같지요. 그러나 부모가 볼 때는 하나하나가 소중합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하나님이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명입니다. 내가 맡은 심부름, 내가 꼭 해야만 하는 심부름, 내가 아니면 못할 심부름, 손가락이 다섯이지만 엄지가 할 일이 있고 새끼가 할 일이 따로 있지, 엄지가 할 일을 새끼가 못합니다. 다 기능이 다르고 사명이 다릅니다. 이걸 아셔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심부름을 보냈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사명을 영어로는 'Calling' 이라고 합니다. 또는 'Vocation'라고 하는데 누가 부릅니까? 하나님이 누구를 부릅니까?

이사야 6장에 보면 아시는 것과 같이 청년 이사야가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 예배할 때 하나님의 거룩하신 모습을 보고 "오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게 되었으니 나는 망하게 되었다. 자기의 어떤 더러운 죄를 회개하는 순간 스랍 중에 하나가 숯불을 가지고 내려와 입술을 지지면서 네 죄가 사함을 얻었느니라"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 때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우리가 누구를 보낼꼬?" 하나님의 “Calling"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소명'이라는 말을 썼습니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부르시면 우리가 어떻게 합니까? 응답해야 합니다.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아마 이 자리에 나오신 교역자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고 이런 응답을 가지고 나오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를 하나님의 심부름을 시키시기 위해서 부르시고 우리는 응답하는 것을 영어로 말할 때 'Response'라고 합니다. 이렇게 응답하면 어떡합니까? 하나님이 이 응답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이걸 영어로 "Ability"라고 하는데 ”Response"와 “Ability”라는 말을 붙여보세요. 'Responsibility'라는 말이 되죠? 책임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명감 있는 사람에게는 책임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공합니까? 책임의식이 강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공하지 못합니까? 책임의식이 희박한 사람,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 절대로 성공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사명적인 존재이며 책임적인 존재입니다. 짐승과 인간의 다른 점이 뭡니까? 짐승은 책임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본능대로 살며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질 줄 모릅니다.

우리 집에 키우는 개가 옆집 개하고 간통을 해가지고 간통죄로 감옥에 갔다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없어요. 그러나 사람은 책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가정을 이룬 다음에 남편은 아내를 책임지고 아내는 남편을 책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 외에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 여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간통죄로 감옥에 가야 합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임을 느끼지 않고 되는대로 그저 사는 사람을 짐승처럼 구체적으로 개처럼 산다고 합니다. 사람은 책임을 집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범할 수도 있고 안범할 수도 있고 이것을 행할 수도 있고 행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죄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됩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죄를 짓고도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회피하면 인간 구실을 못하는 겁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일이지만 죄를 지으면 불안이 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다 만드시고, 선악과를 만드시고 하나님이 만드신 아담과 하와에게 "이걸 다 따먹고 영생하라" 하시면서 "저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따먹지 마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가시고 아담도 어디 갔는데 하와 혼자 있는 곳에 뱀마귀가 찾아왔습니다. 이 뱀마귀가 얼마나 영리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지혜로운지 모릅니다. 보통 우리의 지능지수는 150쯤 되면 수재급입니다. 여러분, 혹시 마귀의 I.Q가 얼마인지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단위가 다릅니다. 마귀 I.Q는 1000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귀와 머리싸움에서는 절대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 뱀마귀가 하와한테 찾아와서 충동을 합니다. “너 이거 다 먹지 말라고 하더냐?” 하와가 말하기를 “다 먹어도 되는데 저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과일은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면서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하노라 한다.” 우리가 얼른 생각할 때는 비슷한 말인 것 같지만 그러나 자세히 보게 되면 완전히 다른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먹지 마라고 하셨는데 여자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고 말을 보탰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을 보탭니까? 불만있는 사람의 말입니다.

여러분, 목회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어떤 집사님이 와서 “목사님, 우리 장로님이 이러고, 권사님이 이러고, 집사님이 이러고 ...” 목사님은 "아, 그렇습니까?" 하고 듣기만 하는데 한동안 목회를 하다 보면 대개 짐작이 갑니다. 자기 말이지 남의 말이 아닙니다. 불만있는 사람은 자꾸 남을 갖다대면서 말을 보탭니다. 하와가 하나님께 대한 불만이 있었기 때문에 말을 보탰습니다. 또 하나님은 정녕 죽으리라 그랬는데 이 여자는 뭐라고 합니까? '죽을까 하노라 한다.' 이 말은 죽을 수도 있고 안 죽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불신임입니다. 분명히 들으세요. 불만과 불신임은 시험입니다. "아니다. 너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까 봐" 그 말을 들으니 어떻습니까? 여자가 보니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함직 한데 안 먹고는 못 견디게 되었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인데,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는데, 안 지어야 마땅하고 죄를 지으면 책임을 지어야 하는데, 목에서 침이 나와서 안 먹고는 못 견디게 생겼습니다.

미안합니다만 용서하시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만일에 마귀가 선악과를 미리 따 가지고 “야, 이년. 입벌려 이것 안 먹으면 죽여버린다” 했으면 이 여자가 먹을까요? 혀를 깨물고도 안 먹습니다. 죄는 자기가 짓지 남이 짓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우리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한국사람은 아니다. 왜냐하면 한국사람 같으면 선악과 안 따먹고 뱀을 잡아먹었을 거라는 겁니다. 그거 먹고 편안했습니까? 죽을 생각을 하니 기가 막혀요.

어떤 분이 이 얘기를 전개했는데 하와가 죽을 생각을 하니까 기가 막혀서 아담이 여자보다는 순진하잖아요. "여보, 나 사랑하지? 정말 사랑하지? 아니 지구상에 당신밖에 여자가 더있어? 그럼 내가 뭐 부탁하면 다 할 수 있지?" 남자들은 허풍이 좀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랬더니 하와가 선악과를 내놓으며 먹으라고 합니다. 아담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이게 무슨 일이요?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이요?" 그랬더니 하와가 발끈 일어나서 "여봇, 당신 내가 먹으라고 하면 다 한다고 했지? 나는 이미 먹었고 곧 죽게 될 것인데 나 죽은 다음에 어떤 여자하고 또 결혼할려고 그래?" 코너에 몰아넣으니 장부일언 중천금이라 남자가 한번 말했으니 먹을 수 밖에요.

그래서 먹는 순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먹는 날에는 죽는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쨍 하고 울려서 남자의 목에 턱 걸렸다고 합니다. 남자들 목에 있는 것을 영어로 'Adams apple'이라고 합니다. 아담의 사과입니다. 아담은 먹다가 양심이 캥겨서 목에 걸렸는데 여자는 몽땅 삼켰습니다. 가책도 안 받고 삼켰어요. 죄의 값은 사망인데 죽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해 입힌 옷이 가죽옷이었습니다. 이건 성경적으로 죄지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려면 적어도 가죽옷은 입어야 됩니다.

가죽 만들려면 짐승을 잡아야 합니다. 짐승을 잡으려면 피를 흘려야 합니다. 짐승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 "보라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어린양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그러기에 그 어린양의 이름을 속죄양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아무리 무서운 죄, 아무리 큰 죄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십자가 밑에 나아와 "내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도움말씀만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놀라운 기적만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름다운 생활의 본만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도 아닙니다.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책임지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기 위해 십자가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큰 죄라도 "내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사해주십니다.

인간은 책임적인 존재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내 운명의 책임자입니다. 나는 내 가정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는 내 직장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는 내 교회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는 내 나라에 책음을 져야 합니다. 우리 국민 하나하나가, 각자가 자기의 책임을 바로 감당한다고 할 것이면, 나라가 완전히 변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나라 정치하는 꼴이 말이 아닙니다만 여러분, 가만히 보세요. 한마디로 말하면 책임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이러고서는 나라가 제대로 될 수 없습니다.

어떤 못난 사람은 자기 모든 형편을 부모한테 책임을 떠넘깁니다. 나는 조상 잘못 만나서 이 모양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없습니다. 내 운명은 내가 책임져야지 누구한테 책임을 돌립니까? 여러분, 목사님들, 교회 책임을 누가 가져야 됩니까? 장로가 집니까? 집사가 집니까? 누가 져야 합니까? 목사가 져야 합니다.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입니다. 책임지지 아니한 목회자치고 목회 제대로 한 사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전적으로 살든 죽든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책임적인 존재입니다. 누가 책임을 집니까? 주인이 책임을 집니다. 손님이 책임지는 법이 없습니다.

영국 속담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주인 한 사람의 눈이 손님 한 사람의 눈보다 밝다." 그러면 주인의 시력은 1.2고 손님의 시력은 0.2입니까? 아닙니다. 똑같은데 책임을 진 사람이 보는 것하고, 책임을 지지 않은 사람이 보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옛글에도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나라 사랑하는 것이 뭐냐? 임금은 임금 구실을 바로 하고, 신하는 신하의 구실을 바로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의 책임을 바로 하고, 아들은 아들 노롯을 바로 하면 이게 애국이지 딴 게 없습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이 목사를 위시해서 각자의 책임을 바로 감당한다고 할 것이면, 그 교회는 완전히 변화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각자의 책임을 바로 감당한다고 할 것이면 대한민국이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책임져야 합니다.

 

그리고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입니다. 성공하는 사람 보세요. 승리하는 사람 보세요. 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입니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이런 긍정적인 사고를 가질 수 있나요?

빌립보서 4장 13절 말씀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주님이 내게 능력 주실 때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하는 이 사고, 이게 바로 기독교 정신이고 기독교인의 사고입니다. 모먼 빈센트 필 박사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만사는 마음가짐에 달렸다." 그 분이 적극적인 사고의 사람을 강조했습니다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만사가 마음가짐에 달려있습니다. 사회과학인 심리학에서 자기 암시, 내 마음에 암시를 주는데 '된다. 된다. 할 수 있다'고 하면 되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암시가 '안 된다. 못한다. 끝났다. 망했다' 하면 그대로 된다고 합니다. 사회과학인 심리학에서도 자기 암시를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이 말씀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 더구나 지도자된 우리들은 범사에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생동력있게 살아가는 게 뭡니까? 적극적입니다. 믿음대로 됩니다. 환경이 다른 것 아닙니다. 조건이 다른 것 아닙니다. 똑같은데 문제는 내 마음의 자세가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도전과 응전의 역학 관계다"라는 겁니다. 똑같은 환경조건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대로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영도해서 약속의 땅을 향해 나가는데, 도중에 약속의 땅을 미리 알아보기 위해서 열두 지파 중에 한사람씩 뽑아서 소위 밀사로 40일 동안의 기한을 주면서 "너희가 먼저 가서 그 땅이 어떤 곳인지 살펴보아라. 그리고 올 때는 샘플을 하나씩 가지고 나와라." 그래서 몰래 들여보냈는데 이 사람들이 가서 40일 동안 다 돌아보고 올 때 여러분 아시는 대로 포도를 두 사람이 떼메고 나오고 석류를 따 가지고 나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가보지 못한 사람들은 호기심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기대를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데 열두 사람 중에 대다수인 열 사람이 "그 땅에 가보았더니 보시는 대로 이렇게 좋은 과일이 열립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러나 그 땅은 좋기는 하지만 들어갈 수 있는 땅은 아닙니다. 거기 가보았더니 성곽이 높고 견고합니다. 거기 사는 여러 족속이 있는데 특별히 아낙자손 같은 경우는 거인입니다. 아마 그들이 우리를 보면 메뚜기로 볼 겁니다. 안됩니다. 못합니다."

자,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큰 기대를 가지고 듣고 있던 관중들이 어떻겠습니까? '아니, 저 사람들이 못 들어간다면 못 들어가는 거지. 그러면 들어도 못 갈 거면 우릴 무엇 하러 여기까지 데리고 왔느냐?' 모세를 원망합니다. '저가 사기꾼이다.' 어떤 사람은 지도자를 다시 뽑아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제 가지도 못하고 오지도 못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으냐?' 하고 털썩 주저앉아서 대성통곡을 합니다.

이런 혼란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미처 보고하지 않았던 두 사람이 있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너무 너무 속이 상하고 안타까워서 옷을 찢으면서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조금 전에 말한 분이 그저 본대로 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분명히 들으세요. 그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입니다. 허락한 땅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면 반드시 지키시지 안 지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읍시다. 주저하지 말고 겁내지 말고 앞을 향하여 나아갑시다."

이것 보세요. 똑같은 기간 안에 똑같은 곳에 가보았는데 어쩌면 그 보고내용이 하늘과 땅의 차이로 완전히 다릅니까? 믿음대로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높은 성곽만 보았고 키 큰 아낙자손만 보았지, 하나님의 약속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있는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보세요. 역사를 통해 아시지만 안 된다고 못한다고 하는 사람을 위시해서 여러 사람의 생각이 옳을 테지 하고 그 사람 따라간 사람은 한사람도 그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힘든 건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따라간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한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범사에 적극적이 되시기 바랍니다. 역사를 위해 공헌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적극적인 사람입니다. 이건 시험해 보면 압니다. 조금 전에 말씀한 열두 사람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의 이름 외에 다른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니 이렇게 천 명이나 되는 목사님 가운데 한 명도 몰라요? 누구 아는 분 없어요?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나도 몰라요. 알 필요도 없어요. 역사를 위해서 아무것도 공헌한 것이 없습니다. 역사를 위해서 이바지하길 원합니까? 적극적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믿음으로 앞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 본받아 우리 앞에 어떤 난관이 봉착한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겁내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가끔 미국에 가서 세미나도 인도할 경우가 있는데, 거기 가서 사역하시는 교포 목사님들을 자주 만나면 목사님들 가운데도 두 가지입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부류입니다. "목사님, 나를 어떻게 하나님께서 미국에 보내셨는지 모르겠어요. 미국이 얼마나 좋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에 보내주셔서 여기서 잘 활동하면서 일하면 일하는 만큼 벌어서 먹고 기회는 얼마든지 있는 나라인데, 여기 와서 이렇게 사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또 이민 생활이 편한 건 아니지만 피곤하다가도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 듣고 예배하고 새 용기를 얻어 가지고 나가는 것을 보게되면 뭐 많이 모이지는 못하지만 얼마나 보람되고 의미를 느끼는지 모릅니다. 나는 참 행복해요" 하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똑같은 환경 속에서 일하시는데 어떤 목사님은 아주 달라요. "목사님, 나는 지금 한국에 갈 기회가 없어서 못 가지, 그저 기회만 있으면 가려고 합니다. 목사님, 이 미국이라는데가 여행이나 할 곳이지 살 곳은 못됩니다. 교인들도 양 새끼가 아니라 다 이리 새끼입니다." 상황이 다른 것 아닙니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느냐 하는게 중요합니다.

애리조나주에 세계적인 관광지 중에 그랜드캐넌이라고 있습니다. 지각의 변동으로 땅이 뚝 꺼져서 별천지가 이루어져서 한 450내지 500킬로미터가 되는데, 그걸 다 볼려면 경비행기나 헬리콥터를 타야 됩니다. 그게 언덕에서 보면 수백 미터 뚝 떨어져서 별천지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보는 사람마다 입이 벌려지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세 사람이 꼭 같은데 가서 구경을 합니다. 한 사람은 목사, 한 사람은 유명한 그림 그리는 화가, 또 한 사람은 소 치는 카우보이가 갔습니다. 목사님은 "아, 하나님의 솜씨, 놀랍구나!" 하면서 봤어요. 바로 옆에 서있던 화가는 "아, 이거야말로 한 폭의 훌륭한 그림이군!" 하더랍니다. 바로 옆에 서있던 카우보이는 "여기서 소 놓치면 못 잡겠다." 이렇듯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여러분 어떤 환경, 어떤 조건, 어떤 처지에 임하든지 믿음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적극적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일본사람이 한국에 와서 잘못한 게 많이 있습니다마는 치명적인 것은 한국인들에게 소극적인 사고, 부정적인 사고를 자꾸 집어넣었습니다. 그걸 하는 기관은 조선총독부 안에 조선 역사를 편찬해내는 기관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의식 중에 무의식 중에 우리 한국 민족에게 자꾸 소극적인 사고를 집어넣었습니다. 한국사람은 더럽다. 한국사람은 무능하다. 한국사람은 게으르다. 한국사람은 자기들끼리 싸움 잘한다. 항상 못하는 것만 자꾸 집어넣고 부정적으로 또 민족을 자꾸 갈라놓았습니다. 

여러분, 지금 영남과 호남에 감정이 안 좋은 게 있는데 그거 일본사람이 그랬습니다. 영남에 가서는 "호남 사람이 한을 품고 있다." 호남에 가서는 "영남사람들이 호남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줄 아느냐?" 이렇게 이간을 붙였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놀아나는데 이거 아셔야 됩니다. 우리끼리 그럴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그리고 심지어 아이들까지 망하라고 엄마들이 자기 아이를 보고 "망할 자식, 망할 자식" 그리고는 "빌어먹을 자식, 빌어먹을 자식" 그랬습니다. 다 그랬습니다. 어떤 분이 그러데요. 그렇게 망할 자식, 빌어먹을 자식 해도 망하지 않는 이유는 아이가 코를 풀 때 "흥해라, 흥해라" 그랬다는 겁니다. 말 한마디를 해도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해야지 부정적으로 하지 마세요.

 

한 걸음더 나아가서 사명 따라 사는 사람은 확신이 있습니다.

특별히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있어서 확신이 필요합니다. 목회자는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특권이면서도 짐이 됩니다. 옛날 선지자들은 그저 들리면 하고 안 들리면 안 하잖아요.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안 들리면 가만히 있으면 되었고, 들리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하고 말하면 되었습니다. 근데 요새 우리는 들리든 안들리든 나가서 말해야 됩니다. 이게 고민 아닙니까? 기도해도 안 들리고 성경을 읽어도 안 들리는 분, 분명히 들어야 됩니다. 에스겔서 3장 7절에 보면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파수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내 백성을 깨우치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들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하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분이 대언자입니다. 메신저, 사도 바울은 우리를 보고 '그리스도의 대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그리스도의 대사라는 신분을 아십니까? 대사의 긍지를 가지고 계십니까? 대사의 신분에 합당하게 살려고 힘쓰십니까? 너절하게 살지 마세요. 하나님의 종들이 너절하게 살면 안됩니다. 돈 앞에 굴하고, 권력 앞에 굴하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세상사람들이 볼 때 돈 없는 사람이고, 지식 없는 사람이고, 권력 없는 사람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사자입니다. 대사입니다. 대사답게 살아야 합니다. 사모님들, 대사부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확신입니다. 똑같은 말을 해도 확신있게 하는 말과 확신없이 하는 말이 다릅니다. 제가 들은 얘기입니다만, 부산에서 어느 목회하는 목사님이 3년 동안 목회를 했는데 교회가 자기 생각대로 되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한번은 젊은 집사님하고 점심을 잡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그 집사님한테 말했답니다. "집사님, 내가 이 교회에 온지 3년이 되었는데 생각대로 잘 되지를 않고 있습니다. 목사로서의 고민이 있네요. 혹시 집사님이 교인으로서 목사에게 충고할 말이 있으면 해주시면 좋겠어요." 그랬더니 "아, 목사님은 참하시고 얌전하시고 성실하시고 얼마나 교인들이 좋아하는데요." "그런 말씀 말고 나한테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세요" "그런 말을 하면 섭섭해하지 않겠어요?" "섭섭해하면 내가 왜 말하겠어요." "그럼 제가 한 마디만 할께요. 목사님은 다 좋으신데 메시지가 좀 약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듣다가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겠고 졸리고 그래서 나오다가 말기도 하고 합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내 설교가 약하다는데 할 말이 없지요. 내가 사실 3년 전에 여기 와서 3년 동안 서울에 있는 아무 큰 교회 목사님 설교집을 갖다가 첫 글자부터 마지막까지 그대로 읽었는데 설교 약하다면 내가 할 말이 없지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어떤 목사님은 그 설교 가지고 큰 교회를 은혜롭게 잘 인도해 나가는데, 나는 왜 꼭 같은 설교를 그대로 읽었는데 설교가 약하다고 합니까? 확신, 이 말은 남의 설교를 참조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것으로 만들어서 확신을 가지고 하라는 겁니다. 확신이 있으면 열의가 생깁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얼마나 열심히 전했습니까? 매 맞고도 전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나와도 전하고, 위협을 당해도 전하고 하니까 사람들이 그를 보고 미쳤다고 했습니다. '미쳤다'는 말은 헬라어로 '엔디오스'라고 하는데 신들렸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나온 말이 열정, 열의입니다. 성공하는 사람을 보면 열정이 있습니다.

소공동에 가면 대를 이어가면서 하는 양복점이 죽 늘어서 있습니다. 한 사람이 양복 한벌을 하려고 그곳에 가서 한 가게에 들어갔는데 그 가게 주인이 돌아보니 그 집 물건을 할 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서 건성으로 대했습니다. 마침 괜찮은 양복지가 있어서 물어보아도 "나는 안 입어봐서 모르겠는데요"라고 하면서 손님을 무시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 가게를 나오는데 잘가라는 인사도 없습니다. 씁쓸하게 나와서 돌아서 다른 양복점이 있어서 들어갔는데 주인이 기다리고 있다가 "선생님, 어서오세요. 뭐 좀 도와드릴까요?" 해서 돌아보니 조금전 가게에서 본 옷감이 있어서 "이건 어떤 옷감입니까?" 하니 "역시 보는 눈이 대단하십니다. 이게 우리 양복지 업계로 말하면 환상의 옷감입니다. 이태리와 기술 제휴를 해가지고 이 옷감 만드느라고 그렇게 애쓰다가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마침 어제 도착했습니다." 이렇게 옷감 하나를 팔아도 확신있고 열의가 있어야지 살고 싶으면 사고 말고 싶으면 말고 하면 누가 삽니까?

주의 복음을 전하는데도 확신과 열의가 있어야 합니다. 리처드 박스터 목사는 "네 가슴이 뜨겁기 전에 다른 사람의 가슴이 뜨겁기를 기대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내 마음속의 확신, 열의가 있어야 이 열의와 확신이 사람의 마음에 전달이 되고 그 심령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설교를 준비함에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주께로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마치기 위해서는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했습니다. 생명을 내놓았습니다. 세상에 무섭다 무섭다 해도 목숨 내놓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옛날 에스더 같은 사람도 자기 동족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12월 13일 하만에 의해서 목이 잘릴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이 사실을 알고 모르디게가 간청했더니 처음에는 냉대하고 "나도 입장이 곤란합니다. 한달 동안 나도 부름을 못받았습니다. 부름을 받지 않고 들어가서 왕이 금홀을 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으면 나는 왕의 암살자로 인정받아서 당장에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지는데요." 그러자 모르디게가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너 왕후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너 혼자 면할 줄 생각지 마라 우리 민족은 다른 손을 통해서도 건짐을 받을거야. 그러나 너와 네 집은 망할 줄 알아라." 이 말에 충격받은 에스더가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내가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들어갔더니 결국 그 민족이 살게 되었습니다.

에스더서를 읽어보면 거기 하나님이라는 글자가 한 자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경에 들어갔습니까? 글자는 없지만 하나님의 역사가 눈에 똑똑히 보입니다. 생명 내놓는 것은 무섭습니다. 하나님도 손을 듭니다. 하나님도 돕습니다.

저희 교회에 부산 서면에서 오신 교인이 한 분 계시는데, 한번은 사모님이 저를 만나서 "목사님, 제가 서면에서 신앙생활을 7년 했고요. 갈보리교회에 와서 지금 3년째 되었는데, 10년씩 믿는다고 하면서 교역자를 한번도 대접을 못해서 참 언제나 마음에 부담이 되고 그러는데, 목사님 시간이 되시는데로 같이 일하시는 목사님들이랑 저녁 초대를 좀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초대를 받아서 그 댁에 갔습니다. 아직도 눈에 선한 게 긴 상에다가 음식을 가득 차려놓고 상을 둘러서 우리가 앉았는데, 그 아주머니가 너무 기쁘고 흥분이 되서 앉았다 섰다 앉았다 섰다 하면서 "너무 꿈같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하면서 하는 말이 "부산 서면에 있을 때 자기 남편의 성격이 워낙 나빠서 밥 먹다가 화가 나면 밥상을 던져버리기를 일주일에 두 번씩 했었는데 지금은 예수믿고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남자분은 남자 깡패 두목이고 여자분은 여자 깡패 두목이었습니다. 그 말 듣고 보니까 부인은 그럴 것 같은데,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란 것은 내가 생각했던 깡패 두목 스타일이 있는데 이 분은 키가 조그맣고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그래요. 그래서 그 분과 대화를 하면서 "깡패 두목 하면 이렇게 생겼겠다 하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을 뵈니 너무 다릅니다. 미안하지만 깡패 두목 하려면 싸움을 잘해야 할 것 아닙니까? 저보다 힘도 없게 생겼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저 사람이 쓸데없는 말을 해가지고 목사님한테 대답을 할 수도 없고 안할 수도 없고 난처하네" 해서 "지나간 얘기 재미있게 하자는데 상관 있습니까?" 했더니 "목사님, 싸움은 힘으로 하는게 아닙니다." 난 얼른 알아들었습니다. '아, 기술이구나' "무슨 기술입니까?" "목사님, 기술도 아닙니다." 기술도 아니면 뭔가 더 궁금해져서 물었더니 "목사님, 목숨 걸면 됩니다. 나보다 등치 큰 놈, 힘있는 놈 만나면 좋다. 내 이 놈하고 싸우다가 죽는다. 죽을 각오하고 딱 붙으면 저쪽에서 느낍니다. 아하, 이놈은 목숨 건 놈이구나. 내가 목숨 거는 순간에 내 앞에 와서 무릎을 딱 꿇면서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부흥회에 10시간 참여한 것 보다 은혜를 더 많이 받았어요. '바로 이거다. 하다 못해 깡패를 해도 목숨을 거는구나.'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는 다 사명자 아닙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나선 자 아닙니까? 이왕에 나선 바에는 한번 가는 목숨, 주를 위해 바치자는 겁니다. 목숨 걸면 무서울 게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나처럼 되기를 바라는 건 아닙니다만, 전에 전두환씨하고 좀 뒤틀려가지고 구치소에 한달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한 평짜리 독방에서 한 달 동안 있다 나오니까 인생 밑바닥까지 내려가고 인생 대학원 졸업했거든요. 그 다음 목회하는데 그 전에 목회하는 것 하고 완전히 다릅니다. 무서운 게 없습니다. 얼마나 편안한지... 그렇다고 여러분, 들어갔다 오라는 말이 아닙니다. 한 번 고비 넘기면 큰 축복입니다. 이왕 나선 바엔 목숨을 겁시다. 내가 이 사명 다하기 위해서는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합니다. 최선을 다합니다.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큰 것으로 맡기노라" 칭찬과 상급 다 받는 사명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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