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8/19) 교갱협 제7차 영성수련회 개회예배

에베소서 6장 10~17절

몇 해 전에 선배 목사님 교회에서 사경회가 있었습니다. 사경회 다음주간에 제가 그 선배 목사님을 만났는데 집회 중에 난처했던 경험을 얘기해 주었습니다. 첫날 밤에 강사가 오셨는데 아주 말씀이 좋았답니다. 그 다음날도 집회가 아주 잘 진행이 되었답니다. 그런데 집회 중반에 들어서서 저녁집회를 하는데 그 목사님 설교제목이 '말씀대로 살자'였다고 합니다. 설교 도중에 이 목사님께서 신명기 22장 5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가나안땅으로 들어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남자는 여자옷을 입지 말고 여자는 남자옷을 입지 말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분이 설교를 하면서 그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성경을 여러번 읽었지만 그 말씀을 이전에는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다고.

그런데 몇 해 전에 그 말씀을 발견한 다음, 명백하게 하나님께서 남자가 여자옷을, 여자가 남자옷을 입지 말라고 하는데 남자가 여자옷을 입지는 않지만 여자가 남자옷인 바지를 입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말씀대로 하기로 결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 교회에서 말씀대로 살자고 해서 모든 여성도들은 바지를 다 없애고, 교회 올때는 물론이거니와 평소 생활에서도 바지를 입지 않도록, 자기가 집회를 온 교회에서도 그 말씀을 가지고 바지 안입는 운동을 해야 한다고 고함을 질러댔다는 겁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뒤에 앉아서 강사 목을 잡아당길 수도 없고, 그것 말고는 다른 문제는 없었기 때문에 마음을 조마조마 하면서 그날 집회를 마쳤답니다. 그리고 나서 강사에게 "신명기 22장 5절 말씀이 그렇게 해석하고 적용해서 되는 말씀이 아니지 않느냐?" 그랬더니 그 분왈 "아니, 목사님은 성경에 이렇게 분명하게 써 놓았는데 이걸 어떻게 해석한단 말입니까?"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안더랍니다. 그래서 집회를 계속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다가, 다른 문제는 없었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강사가 다시 언급하지 않기로 하고 집회를 마쳤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에 전교인 앞에 바지 입어도 괜찮다고 했답니다.

그 한 일년 전쯤에 제가 뉴저지를 여행하다가 거기에서 만난 집사님 생각도 났었습니다. 그 교회는 미국 침례교였습니다. 미국인 교회였습니다. 거기에 출석하는 한 한국 집사님이 제가 뉴저지를 방문했을 때 자기 교회가 너무 성경적이고 좋은 교회라며, 자기 교회는 여성도들이 바지 안 입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일년쯤 후에 지방도시에서 크게 목회하는 분이라고 기억이 납니다만, 신학대학원도 인정받는 곳을 나오신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분입니다. 우리가 물론 늘 성경을 붙들고 씨름하지만 성경을 잘못 해석할 수도 있고, 또 그걸 적용할 때 잘못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견 목회자가 남의 교회까지 다니면서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혼미케 하는 일은 참 심각한 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마지막 주제로 다루고 있는 내용입니다.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 중에서 14절로 17절 내용은, 사도 바울이 사탄이 어떤 방식으로 성도를 공격하고 교회를 공격하는가를 염두에 두고 사탄의 공격 전략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 대응전략을 잘 마련해서 사탄과 싸워야 한다는 그런 말씀을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 17절에 언급되고 있는 구원의 투구 문제를 잠시 생각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본문입니다만,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나가면 언제나 쉽게 볼 수 있는 로마군인의 무장을 가지고 이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허리띠를 띠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 로마군인의 무장 중에서 구원의 투구를 써야 한다는 말씀은, 투구를 쓰지 않은 군인이 갖는 위험이 무엇입니까? 화살이 날아오고 적의 무기가 날아오는 상황에서 만약에 뇌를 다치면 아무리 검술이 뛰어난 군인이라고 해도 그 사람은 더 이상 쓸모없는 군인이 되고 맙니다. 투구를 쓰지않고 전쟁에 나갔다가 뇌를 상해서 명령과 명령을 전달받는 체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군인, 쓸모없는 군인, 사탄이 바로 이런 식의 공격을 우리를 위해서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탄이 우리의 명령자이신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커뮤니케이션을 공격한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그 말씀을 바로 듣지 못하고, 하나님은 동쪽으로 하시는데 우리는 서쪽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이런 명령체계의 혼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의사소통의 혼선이 일어나는 이런 공격을 사탄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난 다음에 나는 말씀대로 한다고 하는데 그게 바지 추방운동이다. 이건 참 기가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건 좀 정도가 지나친 것이어서 좀 예외적으로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사소하게, 크게 작게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우리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런 글을 읽으셨을 겁니다. 어느 교회가 피아노를 들여오기 위해서 제직회에서 논의를 했는데, 피아노를 왼쪽에 놓을 것인가 오늘쪽에 놓을 것인가 토론을 하다가 논쟁이 붙었다는 겁니다. 왼쪽에 놓자는 사람이 많아서 뜨겁게 논쟁이 붙는 것을 진화하기 위해서 서둘러서 다수결에 따라서 왼쪽에 놓기로 결정을 했던 모양인데, 얼마 후에 그 교회가 쪼개지면서 오른쪽에 놓자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갈라져 나가서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 정도까지는 우리가 흔히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하고 경험도 하는 일입니다. 마음에 안 맞아서 한 집에서 물고 뜯고 싸우는 것보다 모양이 좀 좋겠다 하며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만, 이 사람들이 갈라져 나가서 세운 교회 이름이 뭐였다고 합니까? 그 교회 이름이 '오른쪽교회'랍니다. 미국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여러분, 이런 것들이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누구라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다고 성경을 읽고, 해석을 시도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 고심하는데, 우리가 받은 그 인도함이 명령하시는 분과 명령받은 우리 사이에 이렇게 큰 간격이 생기는 일이 수도 없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영성수련회 주제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교회'인데 이 손과 발이 아무리 튼튼하면 뭐하겠습니까? 이 손과 발이 아무리 날렵하면 뭐하겠습니까? 이 손과 발에 금띠를 둘러놓으면 뭐하겠습니까? 머리이신 그 분이 명령하는 그 말씀을 좇아서 가지 못하면, 이 손과 발은 이미 여기 달려있다고 해도 머리이신 그 분으로부터 오는 명령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하면, 이 손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손이 아니고, 그 발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발이 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고민이기 때문에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모였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그러하고, 자신이 친히 설립한 이 교회를 두고 그가 아마 자신의 경험과 성령의 계시를 통해서 사탄이 어떤 방식으로 공격을 하는가를 깊이 묵상하고 이런 말씀으로 그 교회를 가르치고 오는 교회들을 가르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분별하지 못하게 만들고,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에 붙어있되 힘없는 손이 되게 만들고, 쓰임받지 못하는 그런 도구가 되게 만들기 위해서 지금도 전력투구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문제를 염두에 두고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전략이 무엇입니까? 구원의 투구를 쓰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구원의 투구를 쓰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성경에서 익히 발견하는대로 구원, 구속이 항상 세 가지 시제로 등장합니다. 과거 시제, 현재 혹은 현재진행형 시제, 그리고 미래시제로 '구속'이라는 단어가 나타납니다. 우리의 구원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과거완료형으로 얘기할 때, 그건 우리의 신분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죽어도 우리가 천국가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고 앞으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이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는 내용은 성화를 포함해서 구원, 구속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 17절에서 구원의 투구를 쓰라, 전신갑주를 입으라. 그렇게 해서 사탄의 전술 앞에서 넉넉하게 사탄을 격파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말씀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이미 데살로니가전서 5장 8절에서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서신 중에 가장 먼저 쓰인 것으로 일반적으로 알고있습니다만,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는 데에,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전략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쓴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교회 건축입니까? 여러분이 목표로 설정해놓은 몇 명 돌파입니까? 뭐, 저도 개척하고 금년 연말이면 4년이 됩니다만, 내일 모레 사이에 땅을 사려고 씨름중에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한가지 소망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어야 하는가 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쓴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은 성경에서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는대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그리스도를 닯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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