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08/19) 교갱협 제8차 영성수련회 교역자특강

1. 예수를 바라봅니다

행복의 채널 예수 그리스도

중등부가 수련회를 간 곳엘 갔다가 눈길에 막혀 하룻밤을 산속에서 지내고 돌아왔습니다. 나를 그곳에 부르셔서 당신 앞에 앉게 하신 하나님의 디자인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날 그런 자리에서 만나길 원하셨나 봅니다. 텅빈 예배당 앞에서 홀로 앉은 내게 주님은 위로였고 은혜였습니다. 우리 중등부 아이들이 좋아서 어쩔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내 모습과 우리 교회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니 속초 등지에서 열 여섯교회 스물 여섯분의 목사님들과 사모님이 왔더군요. 우리 교회 탐방을 온겁니다. 건물을 보러 온것은 아니겠지요. 아마 새벽에 출발해서 왔을 겁니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 이 먼 길을 왔을까? 오랫만에 연속 5시간 정도 강의를  했습니다. 만약 다른 날 왔다면 아마 목회를 주로 얘기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산속에서 나를 만나주셨던 하나님은 행복의 채널 예수 그리스도를 목사님들에게 전하길 원하셨습니다. 첫 시간 난 목사님들을 향해 힘차게 전했습니다.

“목사가 행복해야 교회가 행복해 집니다. 목사의 얼굴은 전도지입니다. 그 행복의 채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사역과 사람과 문제 속에 파묻힐 수 있습니다. 하나를 끝내고 나면 또 하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문제를 풀고 나면 또 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계속 쫓기다 보면 어느 순간 탈진합니다. 사역과 사람과 문제는 우리를 탈진시킵니다. 로뎀나무 아래를 찾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생깁니다.

여러 목사님들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혹 지금 그렇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앞으로 언제쯤이면 이 사역과 사람과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언제쯤이면 끝이 보일까 하는 심정으로 천국을 사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가운데서 행복을 맛볼 수는 없습니다. 목사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찾아 가세요. 예수께로 나아가세요. 목사에게 우선은 예수입니다. 사역이 아닙니다. 예수입니다. 사람에게 달려갈게 아니라 예수님에게로 달려가야 합니다. 문제 속으로 파고 들어가지 마십시오. 예수님 품을 파고 드십시오. 예수, 그분이 여러분에게 필요합니다. 목회만 있고 예수는 없는 목장이 되면 공허해집니다. 목사에게 예수가 필요합니다. 문제가 생겼습니까? 예수님이 보고 싶어하신다는 사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목사를 찾고 있습니다. 언제쯤이면 내게로 올까 손꼽아 기다리십니다. 이제 예수님께로 가십시오. 문제를 향해 가지 말고 예수님을 향해 가십시오. 문제를 여러분이 풀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아가십시오. 그러나 많은 경우, 너무 많은 경우 우리는 오히려 그 문제를 키웠잖아요. 예수! 께 나아가십시오.

행복의 채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역과 사람과 문제가 여전히 우리에게 있다 해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터널을 지나고 있어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아픔과 슬픔을 당하고 있어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감옥 속에서 바울이 맛보았던 그 행복입니다. 수 많은 우리 선배들이 순교의 현장에서 맛보았던 그 행복입니다. 아픈 가슴으로 밤을 지새워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예수께로 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행복의 채널입니다. 목사에게 예수가 필요합니다. 사역과 사람과 문제는 있는데 예수는 없는 목회현장이 되어선 안됩니다. 가야 합니다. 가십시오. 예수께로 가십시오. 다른 것이 다 없다 해도 예수는 있어야 합니다. 목사는 행복해야 합니다. 항상 행복해야 합니다. 범사에 행복해야 합니다. 그 행복의 채널이 예수입니다.

목사님들에게 행복의 채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나도 행복해졌습니다. 행복의 채널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내게로 오는 행복이었습니다. 가슴 전체가 예수로 채워졌습니다. 떠나면서 한 분이 내 손을 잡고 고백하더군요. “오늘 너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난 목사님의 행복목회가 좋은 환경과 상황과 사람들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행복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아픔 중에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날 밤 난 예수 안에서 단잠을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평안으로 맞는 아침”이란 글을 홈페이지에 올렸습니다.

“아침이 있다는 것은 날마다 새로운 일입니다. 오늘도 내게 아침을 맞을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잠겨있습니다. 언젠가 몸이 몹시 아팠던 날이 있습니다. 밤새 앓으면서 아침을 기다렸습니다. 참 밤이 길더군요. 아침이 된다고 아픈 몸이 금방 낫는 것은 아닌데도 아침이 기다려 지더군요. 그런데 그 아침을 이렇게 날마다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요? 아침 햇살처럼 따뜻한 주님의 은혜가 베란다를 통해 내게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 아사 왕으로 인해 하나님이 유다나라에 주셨던 그 평안입니다.”

 

고난이 아니라 고난 당하신 예수를 생각하라

고난을 당하고 있는 친구 얘길 듣다가 목이 메었습니다. 너무 힘들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친구와 이야길 나누면서 고난이 갈림길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난을 통해 길이 갈라집니다. 고난의 때에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그 다음 인생이 달라집니다. 고난 앞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두 길 중 한 길을 택합니다. 고난을 당할 때 자포자기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실망하고 낙심하여 다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고난 중에 다시 일어나 그 고난을 발판으로 힘차게 전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두사람의 차이는 고난을 당하는 방식의 차이입니다. 다행히 친구는 후자 쪽이었습니다.

고난을 당해 본 분은 아시지요?  참 많이 힘듭니다. 돌아보면 우리도 고난을 당할 때 그저 아파서 울었고 힘들어 신음소리를 토해냈지요. 고난을 통해 가슴 아프게란 말의 의미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고난 그 자체가 즐거운 사람은 없습니다. 고난은 아픔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이 고난을 다 피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면서 피할 수 없는 것이 고난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 고난을 어떻게 당할 것이냐 입니다. 고난은 당하는 방식에 따라 그 다음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하기 쉬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을 계속 생각하는 일입니다. 일부러 하려고 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계속 생각이 되어집니다. 앉으나 서나 당하고 있는 고난 생각이기 쉽습니다. 틈만 나면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을 생각합니다. 힘이 있어야 고난을 이기지요. 고난은 생각하고 생각해도 힘이 되질 않습니다.

그렇다고 길이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 그 자체도 그렇고 그 고난을 내게 가져다 준 환경이나 사람도 그렇습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점점 억울해집니다. 화가 납니다. 낙심이 됩니다. 고난을 깊이 생각하면 그것이 걱정이 되고 염려가 됩니다. 처음엔 당하고 있는 고난을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 일로 인해 파생될 일까지 가져다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 걱정과 염려가 커지면 그것이 두려움이 되어 자신을 누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고난으로 인해 큰 손해를 입습니다. 혹 지금 고난을 이렇게 당하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그렇다면 서둘러야 합니다. 더 이상 그 고난이 커지고 깊어지기 전에 이 글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깨달은 진리를 전해드립니다. 고난을 당할 때는 당하고 있는 고난을 생각하지 말고 고난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세요. 이것이 우리가 고난으로부터 벗어나는 최선의 길입니다. 최고의 길입니다. 고난이 우리 안에서 걱정과 염려로 발전되고 두려움으로 자라지 못하도록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십니까? 고난이 아니라 고난 당하신 예수를 생각하라!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생각하지 말고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 예수를 생각하라!

사순절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사십일을 우리는 이렇게 부릅니다. 고난 당하신 예수님을 특별히 묵상하는 기간입니다. 혹 지금 고난중이십니까? 당하고 있는 고난을 묵상중입니까? 아니면 고난 당하신 예수님을 묵상중이십니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주님에게 한 번 여쭈어 보세요. 주님, 얼마나 아프셨어요? 주님, 얼마나 괴로우셨어요? 주님, 얼마나 외로우셨어요? 내가 당하고 있는 고난을 생각하면 그 고난이 점점 커집니다. 실제 고난이 커지기도 하고 내 생각 속에서 눈덩이처럼 커지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습니다. 결국 그것에 눌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 당하신 예수님을 묵상하면 그 고난은 점점 작아집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이것이 고난이 아닌 고난 당하신 예수님을 묵상하는 자가 누리는 행복입니다.

난 요즘 개인적으로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묵상하는 중에 큰 위로와 은혜를 받습니다. 그 중에 특별히 마음으로 다가오는 은혜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내가 누리는 이 자유, 이 평화, 이 회복을 위해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셨다는 사실.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이 나를 낫게 하시기 위해 그 무서운 채찍을 맞으셨다는 사실에 큰 위로를 받습니다. 중간 중간에 쇠갈고리가 달린 채찍을 맞으시며 살이 찢기신 예수님을 묵상합니다. 그 예수님의 고난이 날 낫게 했다는 사실을 묵상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놀라운 은혜가 임합니다.

 

2. 사람을 사랑합니다.

아버지 마음

아버지 마음, 이것은 내 목회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내가 성도들을 대할 때 내 안에 있길 소망하는 마음입니다. 어른의 마음, 선생의 마음, 선지자의 마음, 개혁자의 마음, 경영자의 마음, 보스의 마음 등 여러 마음이 있습니다. 어떤 마음을 품고 목회를 하느냐는 중요한 것 같습니다.

개혁자의 마음을 품고 목회를 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개혁의 대상이 됩니다. 선생의 마음을 품고 목회를 하면 모든 사람이 다 가르침의 대상입니다. 경영자의 마음을 품고 목회를 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평가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목회를 하면 모든 사람이 다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잘 볼 수 있는 사건이 성경에 있습니다. 우리가 탕자의 비유라고 부르는 그 비유에 아버지의 마음이 나옵니다.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하고는 가서 다 탕진하고 돌아오는 그 아들을 품에 안는 아버지에게서 난 아버지 마음의 원형을 봅니다. 그래요. 그게 아버지 마음입니다. 난 목회를 하면서 이 아버지 마음을 품고 목회를 하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품으면 그 품에 들어오지 못할 성도가 없습니다. 자식은 어떤 경우도 다 품 안에 머뭅니다. 때로 잘못하고, 때로 고집을 부리고, 때로 꾀를 부리고, 때로 성을 내도 다 품안에 머뭅니다. 때론 아버지가 아들을 책망함 같이 성도들을 책망할 때도 있습니다. 나도 훈계를 하거나 책망을 할 때 눈물이 쏙 빠지도록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마음을 품고 책망을 하면 그 성도는 여전이 품 안에 머뭅니다. 성도가 품 안에 있으면 목회입니다.

사람의 속은 좁습니다. 누굴 붙잡고 ‘벤댕이 속알딱지’ 얘길 해보세요. 다 자기 두고 하는 소린 줄 알고 얼굴이 벌개집니다. 그래요.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속이 넓어야 얼마나 넓겠어요. 어떤 사람은 넓은 속을 타고나고 어떤 사람은 좁은 속을 타고난 게 아닙니다. 다 인간은 좁은 속을 타고 났습니다. 그러나 소망은 아무리 좁은 속이라 해도 그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부음 바 되면 그 속은 더이상 좁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을 그 속에 다 담을 수 있는 속 넓은 사람이 됩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받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만 받으면 목회가 됩니다. 목사에 품 안에 들어오면 모든 성도는 다 그 안에서 녹는 겁니다.

난 사십대 중반입니다. 나보다 어린 청년들이 자식 같이 보인다는거야 여러분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겠지요. 그런데 나보다 열살이 더 많은 아니 스물살이 더 많은 분도 내겐 아들같이 딸 같이 느껴집니다. 가끔은 이런 얘길 합니다. 난 올해 오십이 넘은 아들도 있고 딸도 있다는 얘길합니다. 우리 집 애들을 대할 때 느껴지는 마음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때로는 심통을 부리고 있는 것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뻐요. 그러다 보니 성도들과 부딪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게 밉고 큰 문제처럼 느껴져야 거기에 상응하는 대응을 하지요. 응, 심통이 좀 났구만, 영적 사춘기라 그런거야 하고는 지나갑니다. 그러나 보스 마음을 품고 있으면 이것이 도전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면 붙는거지요. 재판장의 마으을 품고 있으면 정죄하지요. 경영자 마음을 품고 있으면 실적이나 능력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마음을 품고 있으면 사랑으로 품게 됩니다.

늘 아버지 마음이 내 안에 머무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 마음은 이동성인가 봅니다. 가끔은 내 안에도 아버지 마음 대신에 다른 마음이 머물 때도 있습니다. 그런 때는 내 마음이 무겁습니다. 편치 않습니다. 이 때 처리한 일은 다시 되돌려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품고 있으면 사람에 대해 실망합니다. 피로감을 느낍니다. 목회가 힘들게 느껴집니다. 다시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일을 되돌리고 나면 그제서야 행복해집니다. 난 삶이 혹 고단하게 느껴지거나 사람에 대해 실망하고 있다면 지금 내 안에 어떤 마음이 머물고 있는지 점검해 봅니다.

내 마음의 소원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품은 목회자로 이 땅에서 머물다 아버지께 가고 싶습니다.

 

합쳐서 100점

난 평소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사실만 주목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안 좋게 된 것은 죄 때문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성경을 보는데 새롭게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기 이전에도 사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못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건 아담이 혼자 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 둘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혼자 일 때는 좋지 못했는데 둘이 되니 심히 좋아졌습니다. 혼자는 낙제점이었는데 둘이 합치니 만점이 된 겁니다.

난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감동했습니다. ‘아, 사람은 처음 지음을 받을 때부터 혼자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존재가 아니었구나. 온전한 사람이 아니구나. 혼자 백점을 맞을 수는 없구나. 둘이 합쳐 백점을 맞는 거구나.’ 이 사실이 전해지면서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이 얼마 기쁜 소식인가. 그렇다면 한 번 살만한 세상 아닌가. 우리가 대인관계에서 그렇게 힘들어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하나님께 좋은 점수를 둘이 함께, 셋이 함께 합쳐서 받으면 되는 것 아닌가.’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그렇게 성경이 하나됨을 많이 강조한 이유도 알 것 같았습니다. 그래요. 사람은 누구나 혼자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둘이 합치면 그에게서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드러납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합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를 온전이라고 바꾸어 표현해도 될까요? 그렇다면 ‘나’는 온전할 수 없으나 ‘우리’는 온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가정, 좋은 교회가 되는 비결도 이 안에 있습니다. 우리 각각이 100점이 되려고 하거나 100점이 되라고 하면 좋은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좋은 교회는 합해서 100점이 되려고 하는 교회입니다. 이 얼마나 쉬운 일입니까? 둘이 합해 100, 천 이 합해 100, 이건 너무 쉬운 일 아닌가요?

내가 보는 많은 사람들 점수가 95점인데, 거기다 내 5만 보태도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아집니다. 우리가 아무리 점수를 짜게 준다 해도 우리가 50점은 넘지요? 둘이 합하면 금새 100이 됩니다. 셋이 합해 100이 되는 것은 더욱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나타나는 현상이나 결과는 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100을 이루는 것이 더욱 어려워집니다. 그것은 우리가 합해서 100을 이루려고 하기보다 각각 100을 이루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모인 사람들끼리 모자라는 부분을 내가 채워 100을 만들려고 하기보다 너는 30이 모자란다, 너는 15가 모자란다, 45나 모자라는 네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느냐고 힐난합니다. 이렇게 되면 힘듭니다. 좋은 공동체가 되질 못합니다.

내가 만난 대다수의 사람들 점수는 훌륭합니다. 90점, 95점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러나 지금껏 95점 이상인 사람은 만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혼자 맞을 수 있는 한계 점수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홀로 95점을 맞은 사람에게 조금 더 노력해 100점을 맞으라고 하면 안됩니다. 그 5는 내 몫입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 100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합해서 100을 이루도록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우린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스스로 100점을 맞을 수 없는 존재임을 일찍 깨달았습니다. 상대의 100에서 모자라는 점수는 내 몫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로 우리는 만나는 이가 70점인걸 발견하면 신납니다. '우와, 내가 30점만 보태도 우리 100이되네.' 내가 점수가 60, 혹은 70이 되어도 우린 실망하지 않습니다. 나를 만날 사람들이 그 부족한 점수를 채워 100이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홀로 100 점을 맞으려는 할 수도 될 수도 없는 일을 위해 뛰지 맙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러주신 복된 길이 있습니다. 합쳐서 100을 이루는 겁니다. 둘이면 둘이 함께 100을, 셋이면 셋이 함께 100을…. 이 생각을 하니 나와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귀한지요. 우리 교역자들 열 다섯이 함께 100을…. 그런 관점에서 우리 교역자들은 환상적인 팀입니다. 우리 교회와 한국교회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힘이 있는 것은 바로 서로에게 100이 되라고 하지 않고 나를 더해 100을 만들려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우리팀들이 가는 곳에서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는 것은 누구를 만나든 100에서 모자라는 부분은 내가 채워주겠다는 자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시절을 보낼 때는 만나는 사람마다 100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의 점수가 95로 나와도 우리는 나머지 5를 채워 100이 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 5를 지적하고 그 5를 비판했습니다. 그 모자라는 몫이 내 몫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걸 내가 채워 100을 만들 생각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비밀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홀로 100이 될 수 없는 존재임을 다시 한 번 고백합니다. 홀로 100이되는 것은 죄가 하나도 없는 아담도 안된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 둘이서 만점을 맞았습니다. 세상 시험은 혼자서 100점을 맞으라고 하는데 하나님은 합해서 100점을 맞으라니 이 얼마나 은혜입니까? 사람이 많으면 많을 수록 더욱 신나는 일 아닙니까? 한 학급 학생들이 합해서 100점을 맞아야 한다면 이건 복음 아닙니까? 세상에는 이런 특혜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특혜를 베풀어 주시니…. 아, 행복하여라. 우리 합쳐서 100점 맞으며 삽시다.

 

3. 물질을 사용합니다

잔고 백 만 원의 역동성

지난 주에 어느 교회 전교인 수련회에서 2시간 동안 특강을 했습니다. 특강을 부탁할 때 강의 내용을 우리 교회가 하고 있는 일을 있는 그대로 얘기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랫만에 우리 교회가 하고 있는 일을 한 번 정리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일상이고 보편적인 일들이 감동과 충격으로 전달되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 특강을 하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재정집행 원칙 중 하나인 ‘잔고 백만 원을 유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사용한다’는 것,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주신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실 이 원칙을 처음 얘길 할 때만해도 우리는 잔고 백 만 원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습니다. 잔고를 백 만 원 이상 남기려고 해도 남길 수 없는 그런 상황에 우리는 이걸 선포했습니다. 그 후로 하나님께서는 계속 우리에게 놀랍게 부어 주셨고 채워주셨습니다. 참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잔고 백 만 원을 유지했습니다. 일 년 예산이 몇 천 만 원이던 때도, 또 예산이 십 삼 억인 지금도 우리는 잔고 백 만 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유지되는 대는 공동의회 결의가 힘이 되기도 했습니다. 구제비와 전도비와 장학금은 예산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사용한다. 이게 공동의회 결의사항입니다.

잔고 백 만 원 유지를 위해서는 행복한 고민을 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을 차곡차곡 가져다 쌓으면 안해도 될 고민을 우리는 하고 삽니다. 지난 몇 달간은 이런 고민 없이 지냈습니다. 캄보디아 광염대학을 건축하는데 계속 돈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돈을 주시면 쓸 곳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지출된 대지 추가 구입비 천 만 원까지 합쳐서 약 팔 천 만 원 정도가 지원된 것 같습니다.

캄보디아 단기선교를 위해 사 천 여 만원을 지원하고 나니 이제 큰 돈이 들어갈 일들이 거의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번 주에 영동전도를 다녀오면 우리는 잔고 백만 원을 유지하기 위해 또 일을 벌려야 합니다. 그대로 있으면 잔고 백만 원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이번 주간 계속하는 행복한 고민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해외에는 몽골와 인도를, 국내에는 영동을 마음에 품게 하시네요. 몽골은 중앙아시아로 나가는 복음의 전초지기가 될 수 있는 곳 같습니다. ‘가스펠 허브’를 생각해 봅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몽골을 찾아 봅니다. 인도를 찾아 봅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어떤 일을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는지 설레이는 마음입니다. 아직 몽골이나 인도에 있는 선교사님에게서 요청을 받은 것도 없습니다. 인도나 몽골에 있는 선교사님들과 통화 한 번 한 적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계속 마음 안에 몽골을, 인도를 품게 하시네요. 주변에 수소문을 하면서 우리 편에서 적극적으로 현지에서 신실하게 사역하는 우리의 파트너가 될 선교사님을 찾아봅니다. 혹 여러분 중에도 인도나 몽골에서 사역하시며 ‘가스펠 허브’의 꿈을 꾸고 계신 신실한 선교사님을 알고 계시면 일러 주세요. 서정희 집사님을 통해 정원일 선교사님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서 또 어떤 분을 통해 귀한 분과의 만남을 계획하셨는지 기대됩니다.

복음화율 4%(속초), 8%(강릉)라는 말에 충격을 받은 후에 우리는 영동지역은 계속 품고 있습니다. 영동지역 전도를 위한 파트너는 정해졌습니다. 강릉에 김창수 목사님, 속초에 강성오 목사님을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셨습니다. 고 최완규 강도사님의 남겨진 가족을 돕는 일을 하는 중에 하나님이 연결해 주신 분들입니다. 이번 주에 떠날 영동전도를 통해 이 땅에 남은 복음의 불모지 영동을 향한 우리의 몫이 손에 잡힐 것 같습니다. 영동에 복음의 거점을 마련하는 거룩한 작업입니다. 영동 땅에 있는 교회 안에 ‘영동광염교회’의 씨를 심으려고 합니다. 이번에 영동전도를 통해 후반기에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넣어 주신 몽골과 인도 그리고 영동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성도들과 함께 발견하길 소망합니다.

 

파이프교회

우리 교회 별명이 감자탕교회입니다. 난 또 하나의 교회 별명을 기대합니다. 누군가 우리 교회 별명을 파이프교회라고 불러주면 많이 행복할 것 같습니다. 내 마음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내 마음엔 파이프 인생, 파이프 교회가 늘 머물고 있습니다. 언젠가 설교를 마치고 났더니 성도님 한 분이 그러더군요. 목사님, 제 소원이 파이프 인생입니다. 아, 나와 같은 소원을 갖고 있는 분이 또 있구나!

파이프, 이 쪽과 저 쪽을 연결하는 도구입니다. 수원지와 집을 연결하는 것도 파이프입니다. 내 안에 파이프가 들어온 건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성경을 통해 깨달은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파이프를 통해 흐릅니다. 하나님은 온갖 좋은 것을 파이프를 통해 흘려 보내시는 분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내게 소원이 생겼습니다. 난 이 파이프가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는 그런 파이프가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온갖 좋은 것을 세상에 흘려 보내주는 파이프가 되고 싶습니다.

깨닫고 말씀을 보니 파이프 중에 파이프가 예수 그리스도시더군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세상을 연결하는 파이프입니다. 그 파이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는 흐릅니다. 그 파이프를 타고 하나님의 복이 흐르고 있습니다. 천하 만민이 다 예수 파이프를 통해 흘러 내리는 생수를 먹고 살아납니다. 예수 파이프를 통해 값없이 흘려 보내 주신 은혜로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그 파이프를 통해 하나님의 온갖 좋은 것이 다 내게로 오는 비밀도 깨달았습니다. 힘과 용기도, 위로와 격려도 난 예수 파이프를 통해 받습니다. 그 파이프 끝이 항상 나를 향하도록 하는 것이 내 삶의 주된 관심사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풍성한 삶은 그냥 보장 받게 됩니다.

이 비밀을 깨닫고 말씀을 묵상하다 교회가 바로 파이프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말씀을 묵상하는 데 이게 깨달아졌습니다. 교회는 파이프다! 난 소리쳐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온갖 좋은 것들을 교회 파이프를 통해 세상으로 흘려 보내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곳 마다 살아나는 역사의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파이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그 좋은 것들을 교회 파이프를 통해 흘려 보내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이 교회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난 이 귀한 사실을 깨닫고 서울광염교회 담임목사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파이프라는 사실은 내게 큰 은혜와 도전입니다. 날마다 교회 파이프를 통해 하나님이 흘려 주시는 은혜를 받아 먹고 삽니다. 교회 파이프를 통해 회복을 맛봅니다. 교회 파이프를 통해 하나님이 흘려 보내주시는 행복을 누립니다. 교회가 너무 좋습니다. 파이프 교회만 생각하면 기쁨입니다. 즐거움입니다. 내게 교회만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겁날 것이 없습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또 하나 난 파이프 교회의 사명을 압니다. 그것은 흘려 보내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교회를 통해 계속해서 하나님의 온갖 좋은 것들이 흘러가길 원하십니다. 그 하나님 마음이 내게 전해졌습니다. 난 서울광염교회 담임목사를 하면서 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계속 흘려 보내는 일을 합니다. 금년 여름에도 참 많이 흘려 보냈습니다. 국내외로 흘려보냈습니다. 우리는 매년 여름이면 파이프의 은혜를 만끽합니다. 7월과 8월 두달 어간에 늘 지출이 많습니다. 해외 단기선교와 국내전도, 그리고 교육기관의 여름수련회까지 몰려 있기 때문입니다. 참 많이 흘러갑니다. 금년에도 이 일에 1억여 원이 흘러갔습니다. 그런데도 파이프는 여전히 차 있습니다. 틀면 나옵니다. 그 파이프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파이프의 특징은 여기서 막으면 위에서도 막힙니다. 여기서 열면 위에서도 열립니다. 완전 자동입니다. 이 파이프의 비밀을 알고 목회를 하니 행복합니다.

창고에서 꺼내 주었다면 꺼내 준 만큼 빈 자리가 남습니다. 하지만 흘려 보내는 파이프 안은 늘 채워져 있습니다. 위에서 계속 흘려 보내주기 때문입니다.  파이프 교회는 풍성합니다. 흘려 보낸 만큼 또 위로부터 흘러 오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비밀을 알기 때문에 지금도 계속 흘려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흘려 보내라는 곳으로. 교회는 파이프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복을 주시기 위해 가설한 파이프입니다. 창고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잔고 100만 원을 남기고 다 흘려 보내는 이유도 바로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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