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8/24) 교갱협 제9차 영성수련회 여성사역자특강

I. 들어가는 말 : 문제제기

여성교육이 금지되었던 은둔의 나라 한국에 개신교 선교사가 들어와 최초의 여성을 위한 학교를 세운지도 118년이 지났다. 그 결과, 현재에 이르러서는 여성들도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가지게 되면서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점점 눈에 띄게 많아지고 있고 그 영향력, 즉 리더십의 역할 범위 또한 점점 넓어지고 있다. 이에 반해, 보수주의적인 장로교회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한국교회 내에서의 여성의 리더십 위치는 아직 베일에 가리워져 애매하고 모호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한국사회 문화와 세계관에 깊이 뿌리 박힌 가부장적 위치와 역할개념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조 500년간 유교가 한국사회에 깊은 영향을 주면서 한국인의 세계관 속에는 남존여비, 남성우월, 남아선호, 여자팔자 등의 가부장적인 여성 비하적 문화개념이 자연스럽게 침투되었고<이광순, "Korean Women's Understanding of Mission: The Role of Women in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Ph.D. dissertation, Fuller Theological Seminary. 1985), 44; 김지철, "여성지도력을 위한 성경해석학적 고찰" 교역과 여성안수 오성춘, 임창복, 황화자, 김중은 편집, 장로회신학대학 다원화목회연구원 1992, 80; 이수영, "여성안수 반대론의 논거에 대한 반론적 고찰" 교역과 여성안수 오성춘, 임창복, 황화자, 김중은 편집, 서울: 장로회신학대학 다원화목회연구원 1992, 98.>, 이것이 한국 교회의 보수적인 신학과 맞물리면서 큰 어려움 없이 교회 사역 속에 자리 잡았다고 보여진다. 또한 이러한 시각은 성서해석적인 관점에서 여성은 창조 때부터 보조자로 역할 규정이 되었다고 보는 보조주의(Complementarians) 학파<Women Studies in the Bible을 토론함에 있어 크게 네 학파로 나뉘어진다. 극보수주의자(Traditional-ists)와 극좌파여성주의자들(Radical Feminists)의 중간에 서있는 Complementarians(보조주의자) 학파는 J. Piper, W. Grudem, R. Ortlund. Jr.로 대표된다. 이에 대해, David S. Scholer, S. Grenz, G. Bilezikian, Mary J. Evans 등은 여성이 동등한 위치로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최고의 리더십 역할에도 차별없이 참여하여 동역하도록 위임받았다고 믿는다 해서 Full Participationists(동역주의자)들로 지칭된다.>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신학자들의 가르침을 통해 장로교회가 많은 한국 풍토에서 더욱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한국교회 사역 속에 자리잡은 가부장적 개념은 특별한 숙고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선교현장에 이양되어 선교에 있어서 한국 여성의 위치와 역할 규정에 말없는 대모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필자의 1998년도 필드 리서치에 따르면, 120명의 한국 선교사 부인들 중 74명이 자신들은 선교사라기보다는 남편의 보조자라고 답했다(더욱이 이들 중 21명은 "단지 아내"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이러한 보조적 지위 개념은 선교사역에 있어서 자신들의 역할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박혜원, "The Status and Roles of Korean Missionary Wives in Cross-cultural Mission" Ph.D. dissertation, Fuller Theological Seminary, 2000, 182~199).>. 필자가 1996년 휘튼대학에서 열렸던 한국선교사대회<1996년 7월 10일 미국 일리노이주 휘튼대학에서 전세계 선교지로부터 남편선교사, 부인선교사, 남녀독신선교사 등 전체 약 800명의 선교사가 모여서 3박4일간의 선교사대회를 하며 현안들을 상의했다.>에서 여성분과 웍샵에 참석했을 때, 남미에서 10년 이상 사역한 한 활동적인 부인 선교사의 고민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의 사역을 어디까지 도와야 하는 것인지, 자신의 위치와 역할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인지, 한국적인 개념에서는 벌써 넘어 오른 그녀의 사역자(지도자)로서의 위치에 대해 혹시 하나님 앞에서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하며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이에 청중들인 한국 선교사 부인들은 대부분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데...’ 하면서 여성 리더십으로서의 사역을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부인 선교사에게 충고하는 현장을 경험했었다. 이에 필자는 우리의 여성 리더십에 관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사회문화적인 전통으로서의 유교의 가르침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에 있는가를 묻게 되었고 장내는 숙연해졌던 일이 있었다.

이와 같이 지난 5천년 동안의 모진 훈련을 통과함으로써 세계적으로 그 잠재력을 인정받고 있는 한국여인들이 목회와 선교현장에서 성령이 주신 은사를 따라 리더십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근거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우리의 유교문화에서 배운 대로 머뭇거리거나 눌려 있어 주어진 은사를 맘껏 발휘할 수 없다면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매우 큰 손실이다. 따라서, 여성리더십의 성서적 근거 고찰은 한국교회와 선교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이슈가 아닐 수 없다. 1930년대 김춘배 목사가 기독신보 977호에 여성의 동등성을 주장하는 논문을 썼다가 큰 물의를 빚고 장로교단에서 정죄 받아<김인수, "여성과 여성안수의 이해에 대한 교회사적 고찰" 교역과 여성안수 오성춘, 임창복, 황화자, 김중은 편 장로회신학대학 다원화목회연구 원 1992, 36.> 파면 당한 이래, 한국 장로교 총회에서는 성경적 여성연구를 자유주의신학 물결 유입의 신호탄으로 인식하여 확실하게 정죄하고 쐐기를 박았다<Ibid. 36~37.>. 이에 한국교회가 큰 영향을 받아 기피하거나 최소화해 온 경향이 있어서, 사실상 여성 리더십에 관해 깊이 있는 성경지식 연구와 배울 기회가 많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에 소개된 여성신학의 강조점이 성 차별로부터의 “해방”이나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의 차원에서 부각되고 이해되어 지면서<김중은, "구약의 관점에서 본 여성안수 문제" 교역과 여성안수 오성춘, 임창복, 황화자, 김중은 편 장로회신학대학 다원화목회연구원 1992, 47.> 한국교회에서는 성경적인 여성연구에 대한 경계적인 자세를 갖게 되어 교회 내에서 여성에 관한 성경연구나 가르침이 활발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여성 리더십에 관한 성경적인 관점에서의 전문적인 연구가 다른 영역에 비해 소홀해 진 경향이 나타났고, 거의 대부분의 신학교에서도 여성 리더십과 여성 리더십 개발의 전문적인 과정을 개설하지 않고 있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필자가 지난 20년여 동안 선교현장의 여성 리더십의 필요를 경험하면서, 여성 리더십 분야에서 선교 신학적 탐구를 하며 발견한 사실은 비판적 상황화(critical contextualization)<Paul G. Hiebert, Anthropological Insights for Missionarie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85, 186~192.> 작업을 위한 기초인 성경적인 근거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하며 특히 한국적인 상황에서 본 여성 리더십의 성경 신학적 고찰이 먼저 요구된다는 점 이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이 보시는 대로 여성 자신을 볼 수 있도록 도우며, 이미 주신 성령의 은사를 따라 자기를 최선을 다해 개발하도록 하여 즐거움으로 보람 되게 사역에 동참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즉, 여성 리더십의 성경적 근거를 밝히는 작업을 통해 그들로 하여금 앞에 놓여진 목회와 선교사역에 자신에게 있는 은사들을 효과적으로 개발하고 더 나아가 그 은사들을 자유롭게 발휘하여 남성들 만으로서는 도저히 다 이룰 수 없는 엄청난 지상 최대의 사명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리라 생각된다. 이런 작은 연구 노력을 통해 한국 교역자들과 선교사들의 여성사역에 관한 가부장적인 패러다임으로 부터의 변화(paradigm shift)의 물꼬를 트는 일이 본 작업의 목표 중 하나이다.

따라서, 본 소고에서는 여성의 리더십<이 글에서 리더십이란 성경적이고 영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앞에 나서서 군림하는 세상적인 군주의 의미가 아닌, 추종자에게 꿈을 심어주고 비전을 제시하며 감동을 주어 참된 가치관과 목적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열매를 맺는 삶을 살도록 돕는 인도자, 다시 말해, 성숙한 인격 안에서 의와 사랑으로 친히 본을 보이며 섬기는 가운데 영감을 불어넣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개인의 변화와 사회의 변혁을 창출해 나갈 수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참된 일군과 그가 미치는 통솔과 영도 전 과정의 선한 영향력을 의미한다.> 역할에 관한 성경신학적인 정리를 해봄으로써 전통 문화 안에 내재된 한국인 세계관에 비판적 상황화 작업을 위한 성경적 근거를 마련하는 기초 작업을 시도해 보려 한다. 여성 리더십은 동등한 지위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남녀의 동등함과 함께 살펴볼 것이다. 따라서 여성의 동등함과 여성 리더십에 대해 하나님께서 창조 섭리에서 보여주신 근거를 살피고,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보여주신 근거들, 성령의 강림과 은사를 통해 보여주신 근거, 그리고 사도바울의 새 창조 신학과 그의 사역에서 보여준 근거 등을 통해 그 성경적인 기초를 논의해 보고, 지난 이천 년 동안 교회와 선교에서의 여성 리더십 역할을 제한하는 데 중심근거로 사용되었던 난해구절인 고전 14:34,35과 딤전2:11,12의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여성 리더십의 성경적인 바른 이해를 고찰해 보기로 하겠다.

 

II. 성경에 나타난 여성 리더십 근거 연구

1. 창세기 1~2장에서의 여성 리더십 근거

정말 보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창조 시부터 여성은 종속적으로 창조되어 여성 리더십 근거를 일절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창조에 관한 두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P 기사(Priestly version)라 불리우는 1장과, J기사(Yahwist 혹은 J source)라 불리우는 2장이다<구약학자들은 일반적으로 P기사가 J기사보다 약간 먼저 쓰여 진 것임에 의견을 같이 한다. (John H. Otwell, And Sarah Laughed: The Status of Women in the Old Testament. Philadelphia, PA: Westminster Press, 1977, 16).>. 보조주의 학자들은 동역주의 학자들과는 달리, 이 두 기사를 ‘동등한 위치로 창조된 여성’이란 관점에서 일치되지 않는 것으로 이해했다<동역주의자들은 창세기 1장이나 2장 모두 남녀 인간의 동등성을 말씀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보조주의자들은 창세기 1장은 인간의 동등성(equaulity of personhood)을 말해 주지만, 창세기 2장은 창조 때부터 여성에게 규정된 보조적 위치와 역할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한다(Raymond C. Ortlund, Jr. "Male-Female Equality and Male Headship: Genesis 1~3." Recovering Biblical Manhood and Womanhood: A Response to Evangelical feminism. John Piper and Wayne Grudem, eds. Waco, TX: Word Books, 1991, 99~102).>.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여성과 남성에 대한 본의를 이해하기 위해, 창세기 1장과 2장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창세기1:26~28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남성과 여성 사이에 아무런 차별 내용을 볼 수 없다. 오히려 빌리지키안(G. Bilezikian)이 말했듯이, 남성과 여성은 창조주의 형상(인격)의 다양한 부분들을 서로 다르게 반영하고 있다<G. Bilezikian, Beyond Sex Roles: A Guide for the Study of Female Roles in the Bible.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85) 26.>는 점에서 피차 동등하게 창조된 중요한 존재들이다. 이 점은 보조주의 학자들도 동의하므로 논쟁의 여지가 없다. 김은수 교수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의미 속에 이미 남녀 동등의 전향적 인간관이 함축되어 있어서 하나님과 대면적 관계인 남자와 여자는 조금의 차등도 없다고 설명한다<김은수, "생태적 위기와 선교적 과제" 한국기독교신학논총 Vol.30. 2003, 537.>. 즉,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드러나기 위해서는 남성과 여성의 참여(full participation) 가 필수적이다. 하나님의 인격에는 남성성과 함께 여성성이 포함되어 있기에 남성과 여성이 주신 은사를 드러내고 피차에 조화를 이룰 때 하나님의 형상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남성과 여성을 포함하는 의미인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후의 문화명령을 “그들”에게 주사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정복, 다스리라는 공동사명을 주셨다. 이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남성과 여성의 리더십이 공동으로 요청된다. 해밀턴(David Hamilton)은 이를 “세계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공동의 지도력이다”라고 표현하면서, 여자가 남자와 나란히 서기 전에는 하나님이 남자에게 지구를 “다스릴” 권한을 주지 않으셨음에 우리를 주목시킨다<Loren Cunningham and David Hamilton, Why Not Women? A Biblical Study of Women in Missions, Ministry, and Leadership(Seattle, WA: Youth With a Mission Pub. 2000), 현문신 옮김 (서울:예수전도단 2003) 132. 김세윤교수는 하나님의 형상의 성경신학적 의미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대신하여 통치하도록 한 것에 있다고 하면서, 남녀 모두에게 똑같이 부왕 노릇을 하도록 한 점에서 남녀 동등성이 신학적으로 천명되었다고 보았다 (김세윤, "성경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나" 목회와 신학 2004.5, 57)>. 땅을 "가꾸고, 돌보아"<김은수, op.cit. 543> 복되게 하는 공동사명을 남녀(그들)에게 동시에 위임하신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서부터 남성에게와 같이 여성 리더십을 인정하셨음을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창세기 2:18~24은 보조주의자와 동역주의자들 간에 심한 대립을 보이는 내용이어서 좀 더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현재까지 많은 보조주의 신학자들은 이 구절들 속에 나타난 다음의 4가지 중요점 들로 인해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지 못함을 역설해 왔다: 1) 후창조; 2) 남자로부터 창조; 3) 돕는 자로 창조; 4) 남자에 의해 이름 지어짐이다. 정말 그러한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는 어떠한지 보조주의 학자들과 동역주의 학자들의 논의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한 부분씩 자세히 연구해 볼 필요가 있겠다.

1) 후창조(created after man)

보조주의자들은 여성이 남성보다 늦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종속적이라 주장한다. 이에 대해, 동역주의자 중에 대표적인 학자인 제왯(Paul King Jewett)은 만일 창조의 순서로 우열을 가린다면 창조의 순서는 사실상 점점 갈수록 상향되고 있는 원리(principle of ascending order)가 있지 않은가 라고 반문하면서 그렇게 해석하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한다<Fuller 신학대학원 교수였던 Paul King Jewett 은 그의 기념비적인 책 MAN as Male and Female에서  "the last creature has dominion over the others" 라고 하면서 "principle of the ascending order of creation in Genesis 1" 을 주장했다 (Paul K. Jewett, MAN as Male and Female: A Study in Sexual Relationships from a Theological Point of View.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1975, 120~128).>. 이에 보조주의자들은 딤전 2:13(“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과 연관해서 여성의 불평등성을 주장하는데, 이에 대한 요한 칼빈의 주석을 보면 “이는 여성의 불평등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다” 라고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John Calvin, Calvin's Commentaries on Genesis. Vol.1. trans.from Latin and compared with French edition by John King.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1948), 70.>. 그렇다면 오히려, 후에 창조된 여성이 더 발전된 형태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므로 후창조설의 미약한 근거를 보게 한다.

2) 남자로부터 창조(created from man)

보조주의자들은 남자의 갈비뼈로부터 여자를 만드셨기에 여성은 종속적 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그렌즈는 오히려 모든 창조물들 중에 오직 그녀만이 아담에게 꼭 맞는 동질성을 가진 친구(a fit companion)로 만드신 것이었다고 설명한다<Stanley Grenz with Denise M. Kjesbo, Women in the Church: A Biblical Theology of Women in Ministry. (Downers Grove, IL: Inter Varsity Press 1995), 162.>. 사실상, 여자를 만드는 일에 있어 남자가 한 일은 오직 잠만 잤을 뿐, 일절 구경조차도 못했으므로 여자의 생명은 하나님께로만 귀속된 것이라고 한 트리블(Phyllis Trible)교수의 주장은<Phyllis Trible, "Depatriarchalizing in Biblical Interpretation." Journal of the American Academy of Religion 31, 1973, 37.> 일리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도 여성의 종속성과 불평등성의 근거로 주장되기에는 미흡하다.

3) 돕는 자로 창조(created for man)

오틀런드(Raymond C. Ortlund, Jr.)와 나이트(George W. Knight III)는 “돕는 자(helper)” 라는 단어가 바로 “여성의 보조적 역할”을 명백히 드러내어 주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George W. Knight III, The New Testament Teaching on the Role Relationship of Men and Women. (Grand Rapids, MI: Baker Books, 1976), 710; Raymond C. Ortlund, Jr, 1991, 104.>. 현 시대적인 언어 이해에 있어서, “돕는자” 라는 뜻이 어떤 면에서는 종속적인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은 동의한다. 그러나, 문제는 창세기 2:18 본문에서 “돕는 배필”이란 원어인 히브리 단어 “ezer knegdo"를 연구해 보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돕는자” 혹은 “도움”이란 뜻의 “ezer“”는 구약 전체에 19번 나타나는데, 그 중 3번의 예외(인간의 도움 : 큰 수의 군대가 어려움에 봉착한 약한 군대를 원조함의 의미)를 제외하고, 나머지 16번은 모두 연약한 인간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묘사할 때 쓰였다<Clarence J. Vos, Women in Old Testament Worship. Delft:: Verenigde Drukkerijen Judels & Brinkman. n.d., 16; 참조: 시121:1,2, 출18:4, 삼상7:12, 신33:7,26,29, 시33:20 등.>. 그렇다면 여성에게 “돕는자 (ezer)” 라는 단어가 쓰임으로써 남성과 동등하지 못하며 종속적임을 증명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하나님은 당신에게 쓰이는 이와 같이 큰 단어를 여성을 지칭함에 써 주심으로써 여성을 존귀한 존재로 인정하셨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여성은 하나님이 인간을 돕듯이 연약한 남성을 “돕는자(리더십)”<한 여성신학자는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helper= maid 라는 개념 이해를 깨고 히브리어 ezer의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의사가 환자를 돕는데 그러면 의사의 지위가 종속적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 또한 성경적 리더십 개념 중 중요한 것은 하나님 자신이 보여 주셨듯이 "돕는 리더십" 이다.>로 창조하셨다고 이해함이 더 옳다. 그러므로, 보조주의학자들이 종속성의 근거로 삼는 이 단어의 바른 이해는 우리에게 여성의 지위 동등은 물론 여성 리더십의 근거까지 찾을 수 있도록 해준다<예수님의 말씀하신 리더십의 중요한 자질은 섬기는 리더십이다(막10:42~45 참조). 섬기는 리더십 개념에는 전문가적인 도움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이 단어 하나만 볼 때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냐의 질문이 아니라 남성이 여성과 견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정도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뒤따라 나오는 히브리어 형용사 knegdo 를 붙이심으로 그 의미의 수평적인 균형을 잡아 주셨음을 알 수 있다.

즉, 원어 knegdo 의 정확한 의미는 meet for(KJV번역), suitable for(NIV번역), fit for(RSV번역) 등의 힘과 지위에서의 동등함(equality both in force and rank)<knegdo는 70인역에서 kata와 homoios로 번역되었고 그 의미들에서 위와 같은 해석이 나왔다, H.G. Liddell and Scott The Intermediate Greek-English Lexicon. 7th edition. London: Oxford Univ.Press 1968,1224)>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단어 연구 결과에서 보여 지듯이 ezer knegdo 어느 한 부분에도 여성 지위의 비하 개념이나 종속성이나 여성 리더십을 막는 개념은 찾아볼 수 없다.

4) 남자에 의해 이름 지어짐(named by man)

일반적으로 아담에 의해 이름 지어진 창조물들은(창2:19,20a) 그의 통치 아래 놓여진다는 것으로 이해해 왔다. 이런 관점에서 2:23에 “여자라 칭하리라” 했기 때문에 여성은 남성의 통치 아래 있다고 보조주의자들은 주장한다<Ortlund, Jr, 1991, 102>. 이에 관해 동역주의자들은 창2:23은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전체를 묶어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이성 짝을 주신 하나님 앞에 놀라운 기쁨을 표현하는 아담의 시("the man's poem")로 해석하는 것이 전체 문맥 이해에 합당하다는 것에 필자는 동의한다<이 시는 영문학에서도 한 남성 아담이 동물들과만 함께 지내다가 드디어 동질 인간 여성으로서의 짝을 얻은 기쁨과 환희를 표현하는 최고의 아름다운 시로 꼽힌다.>. 실제로, 원어를 살펴보면 이 말씀은 “이름 지워진(named)"이 아닌 “불리워진(shall be called woman)"이다. 트리블에 의하면 히브리어 문법 구조상 이름을 짓는다는 표현을 하기 위해서는 창3:20("Adam named his wife Eve")의 경우와 같이, 실제 이름이 반드시 뒤따라 와야 하며, 게다가 "woman(히:i'shshah)”은 일반명사이며 이름이 아니므로 아담이 여성을 이름 지어준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Walter Liefeld, "Response to Susan Foh, 'The Head of the Woman is the Man'." Women in Ministry: four Views.. Bonnidell Clouse and Robert G. Clouse, eds. (Downers Grove, IL: Inter Varsity Press. 1989), 114; Phyllis Trible, God and the Rhetoric of Sexuality: Overtures to Biblical Theology. (Philadelphia, PA: Fortress Press, 1978), 100.>. 사실상, 하와의 이름이 아담에 의해 지어진 것은 타락 직후인 창3:20에서 임을 확인할 수 있다<Mary J. Evans, Woman in the Bible: An Overview of all the Crucial Passages on Women's Roles. (Downers Grove, IL: Inter Varsity Press, 1984), 14.>.

이상과 같이 창조기사를 통해서 여성의 평등함과 리더십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살펴보았다.  간단히 요약하여 본다면, 하나님은 남성의 갈빗대를 사용하여 여성을 빚으시기 전부터 “돕는 배필(ezer knegdo)” (평등한 짝궁 으로서 돕는 리더십)로 지으실 것임을 칭하심으로 남자와 동등한 지위와 하나님이 돕듯이 돕는 여성 리더십 역량을 구상하셨고, 그들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함께 복을 주시며 함께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공동 리더십의 사명을 부여하심으로 남성과 여성의 지위와 리더십에 하등의 차별을 두지 않으셨음이 분명함을 보게 되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신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여성에 관한 관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2.  복음서에 나타난 여성 리더십 근거

헐리(James Hurley)를 비롯한 보조주의 학자들도 인정했듯이, 예수는 당시 문화의 여성 비하적 여성관에 대해서는 독립적이고 혁명적인 입장을 취했다<James B. Hurley, Man and Woman in Biblical Perspective.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1981), 92.>. 당시의 랍비들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복음서 중 어느 한 부분에서도 예수께서 여성 차별(gender discrimination) 의 발언이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예수는 복음서 전체를 통해 분명하고도 지속적으로 여성의 하나님과 사람 앞에 동등함을 인정했다<David M. Scholer "Women" Dictionary of Jesus and the Gospels. J.B. Green and S. McKnight, eds. (Downers Grove,IL: Inter Varsity Press 1992), 881; Stanley Grenz, op. cit., 78.>. 당대의 랍비들은 여성들이 성적인 존재라 하여 여성과 눈 맞추는 것도 꺼렸었던 데 비해 예수는 여성들과 자유로운 만남과 대화와 교제와 접촉까지 허용하심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여성의 인간적 심오성(dignity)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성적인 수준을 넘어 형이상학적인 친밀한 남녀 관계의 모델을 보여주심으로 그 분이 살던 시대의 남성들의 여성들에 대한 성적 비하에 대해 명백히 도전하였다<Stanley Grenz, Ibid., 74; David M. Scholer, Ibid.>. 예수는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 대해 성차별 없이 긍휼의 마음을 보여 주면서 치유했다. 더욱이, 레위기 18장에 규정된 깨끗지 못한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자신의 옷을 만짐을 허용하면서까지 깨끗이 고쳐주었다(마9:18~26). 또한 랍비들은 그 가르침에 있어 여성을 언급하기를 회피한 것에 비해, 예수는 그의 수많은 비유들과 가르침 속에 거침없이 여성과 여성들의 일상 이야기들을 한번도 부정적인 내용 없이 모두 긍정적인 언급을 했을 뿐 아니라, 큰 믿음의 모델로 여성을 내세우기도 했고(가나안 여인 마15:21~28; 과부의 헌금 막12:21~44), 잃은 동전을 찾은 여인의 비유에서는 한 영혼 구원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는데 여성을 스스럼없이 사용했다 (눅15:8~10). 이혼에 관한 가르침에서는 결혼의 헌신과 충성이 남녀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상호성의 원리를 설파했고(막10:12), 18년 동안 귀신들렸던 여인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그동안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깜짝 놀랄 표현, “아브라함의 딸”이라 명명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눅13:11~17). 이상과 같이 예수는 여성의 인간으로서의 동등함은 물론 여성으로서의 높은 가치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여성을 대하고 말씀한 것을 볼 수 있다. 다음은 예수가 보여준 여성 리더십에 대한 구체적 근거를 찾아보기로 한다.

예수가 보여준 여성 리더십의 근거는 다음의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예수는 여성들에게도 말씀과 신학을 가르쳤고, 여자들도 예수를 따라 다니며 섬기는 것을 허락했으며, 자신의 머리에 기름 부은 여성을 칭찬함으로 인정해 주었고, 부활의 첫 소식 전하는 사명을 부활 후 처음으로 만난 “여성” 에게 위임했다는 점이다.

1) 여인들에게 말씀과 신학을 가르침

예수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여성들은 조선시대의 여인들처럼 교육을 받을 권한이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마리아가 남자 제자들 틈에 끼어 ‘예수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배웠던 사실은 마르다 뿐 아니라, 당대 사회에서 문제로 삼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를 항변하며 자기를 돕도록 명하라고 요청하는 마르다 에게 예수께서 답하신 말씀은 혁명적이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10:42) 즉, 여성들도 하나님의 법을 남성들과 똑같이 배울 수 있고 그 일은 “좋은 편”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로서 빼앗기지 아니할 것임을 확인해 준 것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는 여성들과 신학적 논쟁을 해주시면서 중요한 신학적 교훈을 가르쳤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선 마르다와의 만남 에서는 ’부활신학‘(요11:21~27)을,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는 ‘예배신학’(요4:7~12)을 자세히 강론해 줌으로서 현재의 우리들까지도 그녀들을 통해 기독교의 핵심에서 뺄 수 없는 중요한 신학의 부분들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부활신학은 바울의 설명을 빌리면,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다 (고전15:14~ 18); 파이퍼(John Piper)는 선교의 궁극적 목적은 열방으로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 드리게 함이라고 했다(Worship is the ultimate goal in missions: 시67:3~4), (John Piper, Let the Nations Be Glad: The Supremacy of God in Missions. Grand Rapids, MI: Baker Books, 2002, 11) 이렇듯 예배신학은 선교신학의 중심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이방종교에서는 중요한 계시를 아무에게나 발설하면 불경죄에 걸린다고 하여 여성에게는 물론 남성에게조차도 함부로 계시 발설을 하지 않고 숨김을 미덕으로 생각했다고 하는 이야기에 비춰볼 때, 예수의 이러한 여성에게 자유로이 신학적 계시와 가르침을 주신 일은 대단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2) 여인들의 예수 따름과 동행을 허락함

신약에서 예수의 제자됨을 말할 때, 그를 따르던 자들과 그를 섬기고 봉사하던 자들로 이해하는데, 여성들 또한 한 그룹이 예수를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남자 제자들과 함께 따르면서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와 제자들을 섬겼다(눅8:1~3; 막15:40~41).  저명한 신약학자 숄러(David M. Scholer)의 단어 연구에 따르면, 신약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의미는 바로 예수의 제자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예수를 따른다는 의미의 동사인 akolutheo 는 4 복음서에 75번 나온다. (David S. Scholer, op.cit., 882).>. 또한 섬기고 봉사하는(diakonein)일은 이웃을 사랑하는 적극적인 예수의 진정한 제자로서의 표적이라고 하겠다(요13:34,35). 이런 점에서 여성들도 사실상 예수를 따르며 섬기면서 제자의 여로를 걸었다고 볼 수 있고, 예수는 당대의 문화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이러한 사실을 허락함으로 갈릴리 처음 사역부터 죽음과 부활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까지 여성 따르는 자들과 함께 있었다. 이 여성들은 사도들과 함께 예수와 오랜 시간 동안 삶을 나누며 가까이서 예수를 경험한 여성 제자 리더십들이라 볼 수 있다<김세윤박사는 예수의 제자 "열둘" 속에 여자를 넣지 않은 이유를 당시 유대교적, 문화적 상황에 대한 양보라고 말한다 (김세윤, "성경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나" 목회와 신학 (179) 2004.5. p.63.)>.

3) 자신에게 기름 부은 여인을 칭찬함

한 여인이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이틀 전에 귀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에게 부었을 때, 예수는 그녀의 기름 부은 행위를 자신의 장사와 연관시켜 중요한 의미로서 해석을 하면서 극도의 감격적인 찬사를 보냈다. 특히 그녀가 예수의 머리에<비슷한 기사가 복음서에 네 번 나오는 데, 두 번은 "예수의 머리에"(마26:6~13; 막14:3~9), 두 번은 "예수의 발에"(눅7:46,요12:1~8) 향유를 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향유를 부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두 기사의 경우, 제자들의 분노와는 대조적으로, 예수는 이에 대해 “저가 내게 좋은 일을(beautiful thing to me)” 하였다 하면서 칭찬했고, 그에 더하여, 이 여인을 책망하는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 명령함으로 복음 전파와 이 여인의 행한 일의 가치를 함께 두었다<여인이 예수의 "머리에"향유를 부었다고 기록 된 말씀들에는(마26:6~13; 막14:3~9) 번번이 다음의 극찬이 따라 나오는 사실에 주목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하셨다.>. 구약에서 기름 붓는 자는 선지자들이었고 리더십이었던 사실과 연관시켜 생각해 볼 수 있는 일이다. 특히 예수의 설명대로 예수의 몸에 기름 붓는 일을 힘을 다해 감당한 이 여인은 예수의 장사됨 이후에 만왕의 왕으로 만주의 주로 부활하실 예수의 영광의 길을 예비하는 일을 한 것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하다고 보여진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온전히 헌신한 한 여성을 통해 장사될 예수에게 기름 붓는 일을 하게 하셨고 예수는 이를 기쁨으로 칭찬함으로 인정하며 이 사실을 숨기지 말고 복음과 함께 말하여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기념하라” 함으로 여인의 자신의 장사를 위한 기름부음을 사적인 수준이 아닌 공적인 리더십 수준으로 확실히 인정했다.

4) 여인에게 첫 번째로 부활 소식을 전할 것을 부탁함

예수의 부활의 기쁜 소식의 첫 전달자는 여성이었 다. 기독교의 진리 중에 부활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며(고전15:17), 진리 선포가 리더십 역할 중 핵심적이라 할 수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와 부활한 새벽에 남자 제자들은 자리를 떠나고, 여자들만 그 자리를 지켰다. 4복음서 모두 그녀들만이 예수님의 부활 후 첫 모습을 만났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만일 예수가 이 여인들이 부활 소식을 선포함에 있어 여성이기 때문에 적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면 가서 제자들을 불러오라고 했을 텐데, 예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직접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부탁했다 (요20:16~18). 당시 유대 전통으로는 여성에 의해 전해진 소식은 가치가 없었음에도 예수는 그 자리에 있던 여성에게 자연스럽게 부활 소식 선포를 부탁했고, 이를 믿지 않은 남자 제자들을 나무라는 것(눅 24:10~11)으로 부활 소식 전달에 대한 여성 위임자들에 대한 신뢰감을 확인해 주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성들에게도 말씀과 신학을 조금의 차별도 없이 가르친 예수,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까지 줄 곧 예수를 따라 다니며 섬기도록 허락되었던 여성 제자들, 예수의 장사를 기름 부음으로 준비한 여성에 대한 극한 찬사와 그 이야기를 복음과 함께 전하여 그녀를 기념하라 주문함으로 공적으로 인정한 예수, 부활의 첫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도록 예수로부터 부탁 받은 여성들, 모두는 예수와 연관되어 여성 리더십의 성경적 근거를 가질 수 있도록 돕는 증거들이다. 다음에는 삼위 하나님이신 성령과의 관계 속에서의 여성 동등과 여성 리더십의 근거를 살펴보자.

 

3.  성령강림에 나타난 여성 리더십 근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난 자들은 사랑과 정의로 특징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부름 받았고 고통 받는 열방을 인도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뜻 가운데 가장 행복하고 인간답고 아름다운 삶을 영원토록 누리며 기쁨으로 예배하도록 부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 리더십이란 이런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선한 영향력을 끼쳐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통솔과 영도를 해 나가는 모든 과정을 의미한다고 정의<임경철, "Introduction to Leadership" 강의안 (International Theological Seminary, LA, 2001), 15.>할 수 있다. 성경에서 보여지고 교회역사와 선교역사에서 나타났듯이 영적인 생명을 살리는 사역은 성령 안에서만 가능하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이 임하고 온 땅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순교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아가게 된다(행1:8). 이 원리는 남녀 모두에게 진리이다. 남자라고 해서 성령의 부음 없이 권세와 능력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성령을 남녀 모두에게 동일하게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때가 차매 그 약속대로 남녀 모두에게 동일하게 부어주심으로 성취하셨다<베드로는 성령강림의 현상에 놀라는 자들에게 설명하면서 요엘서의 예언이 성취된 것임을 상기시켰다(행2:16~21). Tucker와 Liefeld는 이 구절을 교회 안의 하나님의 은해의 현존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기초적인 약속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고, 사도행전과 초대교회에 나타난 많은 남녀들의 사역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의 진리 즉 요엘2:28~29의 성취의 증거들 이라고 했다. (Ruth Tucker and Walter Liefeld, Daughters of the church: Women and Ministry from New Testament Times to the Present. Grand Rapids, MI: Zondervan Publishing, 1992, 64).>.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both men and women)에게 부어줄 것이며” 라는 요엘 2:28-29의 약속은 예수가 승천 직전에 한 번 더 예언 확인(행1:8)함을 거쳐서, 사도행전 2장의 성령강림으로 성취되어 모인 “각 사람” 에게 성령이 부어져 충만함을 받았다(행2:1~4). 오순절에 한 곳에 모였던 사람들은 사도행전 1장 12~15절에 나타나 있듯이 약 120명쯤 되었고, 그들 중에는 예수의 열한 제자들도 있었고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 도 있었다. 여자들 중에는 예수에 의해 치유 받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라다니며 섬겼던 막달라 마리아를 포함하여 예수의 십자가 앞과 장사 지낸바 된 무덤 앞 그리고 열린 무덤 앞 즉 부활의 현장에 함께 했던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눅24:10) 그리고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막15:47, 막16:1) 등도 함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 “각”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셨다고 했으니 약속되었던 대로 남종들 뿐 아니라 여종들 에게도 성령이 임하신 것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남녀 모두에게 권능이 임하시고 은사가 부어 진다고 약속되어 있다(고전12:4~11). 남녀 모두에게 부어지는 이 성령의 주시는 은사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와 교사 등의 지도자의 사역을 할 수 있게 한다(엡4:11,12). 이 말씀에서 남종과 여종에게 임한 성령이 여성에게는 차별하여 리더십에 관계된 은사들을 제한했다는 힌트는 찾을 수 없다. 성령을 동일하게 부어주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남녀 차별 없이 은사를 부어주심으로 리더십의 사역을 그 뜻대로 자유롭게 맡기심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숄러는 “성령 강림을 통해, 우리는 교회의 생활과 사역에서 남성들과 여성들이 평등한 참여를 할 수 있다는 합리성을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David M. Scholer, "Galatians 3:28 and the Ministry of women in the Church" Theology, News and Notes 45(2), 19.>. 그러면 이 성령이 임한 후 세워진 초대 교회역사 속에서 특히 바울의 신학과 사역에 나타난 여성 리더십의 근거를 찾아보는 일은 도움이 될 것이다.

 

4.  바울의 신학과 사역에 나타난 여성리더십 근거

바울은 타락 이후 깨어졌던 창조 시의 아름다운 질서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회복되었다는 새 창조 신학을 주창했다(고후5:17).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 영원한 새 생명을 얻고 새 세계가 펼쳐졌다는 것은 훨씬 깊고 넓고 큰 변화를 선포한다. 이 새 창조에서는 갈라디아서 3:28 말씀처럼 “유대인이나 헬라인” “종이나 자유자”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관계 변화가 함께 선포된다. 동역주의자들은 이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 그리스도의 새 창조 안에서, 앞에 열거한 선민, 계급, 성차의 모든 관계들 안에서 영적이거나 사회적인 모든 장벽이 무너지고 자유 함으로 하나됨을 기뻐한다. 그러나 보조주의자들은 이 말씀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한다. 보조주의자들의 주장은 그리스도가 옴으로 여성들의 영적인 해방은 시켜 주었지만, 여성의 사회적인 해방까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James B. Hurley, op.cit., 126. 보조주의자들이 만일 그들이 이 말씀으로 성차가 해결되었다고 해석한다면 그들은 창조 때 즉 타락 이전에 이미 여성의 보조적 지위가 결정되었다고 했던 주장이 논리적 근거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이 말씀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못하고 영적인 측면에만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면밀한 고찰이 필요하다.

숄러는 갈라디아서 전체를 요약하면서, 바울은 교회 안의 할례 받은 유대인과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 사이의 다름으로 인한 심각한 분리 현상을 신학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으로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강조하는 데에 초점을 두었고, 종과 여성의 문제는 같은 맥락에서 따라온 부수적인 표현이나,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평등함과 하나 됨의 바울 신학적 이해의 근본적인 표현이라고 했다. 이는 새 창조 신학의 수평적인 관계들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David M. Scholer, op.cit., 20~22.>는 것이다.  또한 존경받는 세계적인 신학자인 브루스(F.F. Bruce)는 이 말씀과 연관하여 다음과 같은 도전적인 질문을 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의 여성의 사회적 위치 회복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는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만일 이방인이 교회 안에서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영적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또한 종과 노예들이 시민권을 가지고 시민으로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왜 여자는 남자와 같이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까?”<Frederick Fyvie Bruce, The Epistle to the Galatians: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Howard Marshall and W. Ward Gasque, eds. (Grand Rapids,MI: William B. Eerdmans, 1982), 192.> 라고 질문했다. 여기서 말하는 여성의 자유는 앞의 예를 볼 때 사회적인 의미의 자유와 리더십 역할을 포함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같은 이해선상에서 제왯은 갈3:28을 인간성의 대헌장(Magna Carta of Humanity)이라고 불렀고, 그렌즈는 기독교인 동등성의 챠터(charter of Christian equality) 라고 했다<Paul K. Jewett, op.cit., 142; S. Grenz, op.cit.,101.>. 이렇듯, 동역주의자들은 갈3:28을 사도바울 전체신학의 대표적이고 주어체적(summative and normative text)인 구절로 세우고 인정한다. 이에 반해 보조주의자들은 바울신학의 여성사역에 관한 주체적인 구절을 앞으로 연구할 딤전2:11~12(고전14:34~35을 포함하여)로 보고 모든 신학적 해석을 이 구절들의 창문을 통해 조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David M. Scholer, op.cit., 20.>. 그런데, 이 구절들은 학자들 가운데서 난제구절로 알려져 있어서 여기에서 이 두 구절들의 진정한 의미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논의의 전개 흐름에 따라 먼저 바울의 여성 동역자 들에 관해 살펴본 후 두 난제구절을 연구하도록 하겠다.

바울의 사역을 말할 때 많은 여성 사역자들과의 긴밀한 동역관계를 뺄 수 없다. 바울은 로마서16장에서 29명의 주의 일군들에게 문안했는데 그 중 10명이 여성들인 것을 보면 당시의 여성차별적인 문화적 배경에 비춰 볼 때 대단한 퍼센트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일군들이었음에 틀림없다. 특히 마리아(16:6), 드리배나, 드리보사, 버시(16:12)에게는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polla ekopiasen en kurio) 라는 표현을 썼는데, 바울이 이 표현을 헬라어로 쓸 때는 자신의 사도적 사역을 표현할 때(고전4:12; 15:10; 갈4:11; 빌2:16; 골2:29; 행20:35)와 사역자들이나 지도자들 혹은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들에게 사용했다(고전16:15~16; 살전5:12; 딤전 5:17). 즉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위해 특별한 수고를 했을 때” 그들을 존경하도록 부탁하며 사용한 언어이다<David M. Scholer, "Paul's Women Coworkers in Ministry" Theology, News and Notes. 42(1), 20; 원어를 연구하지 않고 한국전통적인 문화 안에서 무심코 읽으면, 여성들이니까 부엌에서 많이 수고한 것으로 이해하기가 쉽다.>. 그 외에도 6명의 다른 여성 리더십들이 바울의 사역에 연관되어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빌4:2~3에 유오디아와 순두게, 그리고 나머지는 집교회 리더들로 그 이름이 명명되어 있다 : 루디아 (행16:), 클로에(고전1:11), 님바(골4:15), 맙비아(빌레몬2)>. 다시 말하지만, 롬16:3에 브리스길라에게 사용된 동역자(coworker: sunergos)란 단어는 디모데(롬16:21), 디도(고후8:23), 에바브로디도(빌2;25), 빌레몬(몬1), 누가(몬24) 그리고 아볼로와 자신을 하나님의 동역자(고전3:9)라고 할 때 쓴 동일한 단어임을 보면 사도 바울의 마음에 여성 동역자(리더십)에 대한 차별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볼 수 있다. 뵈뵈의 경우, 겐그레아 교회의 “집사(diakonos)”<학자들은 1세기 당시에는 집사의 여성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집사인 뵈뵈에게 남성형 명사인 diakonos 를 사용한 것으로 설명한다(David M. Scholer, op.cit., 21); 신약에서 diakonoi 는 종들과 사역자들을 지칭할 때 쓰였는데: 그리스도(롬15:8); 아볼로(고전3:5); 에바브라(골1:7); 디모데(고전1:7); 그리고 바울자신(고전3:5;엡3:7; 골1:23,25)이다(Ibid.).>이며, 여러 사람과 바울의 “보호자(benefactor(NASB), great help(NIV), helper(RSV): prostatis)”<바울이 이 단어를 쓸 때 교회 안에서 리더십과의 연관을 지어 사용했다(롬12:8; 1Thess. 5:12); Helen B. Montgomery는 이 단어를 "overseer" 로 해석했다. (Ibid.)>라고 하면서 합당한 예절로 그녀를 영접하고 요구하는 것을 다 도와주도록 당부하고 있다. 학자들 간에 많은 논쟁이 있기는 하나, 유니아는 여성으로서 사도들 중에 유명히 여김을 받은(outstanding among apostles 롬16:7) 여성 사도로 알려져 있다<이에 대해서는 Bernadette Brooten이 쓴 글 "Junia... Outstanding Among the Apostles(Rom.16:7)" in Women Priests: A Catholic Commentary on the Vatican Declaration. Leonard Swidler and Arlene Swidler, eds. (New York: Paulist, 1977) 141~147을 참조하라.>. 이와 같이 바울이 이름을 거명한 교회의 남자 동역자들의 수는 54명이었고 그들은 모두 교회의 지도력을 행사한 자들이었다. 이에 비해 바울이 이름을 거명한 여자 동역자 들의 수는 13명이고 이들 역시 지도자의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성차별적 문화 배경을 비추어 볼 때 바울의 동역자들 중에 20퍼센트가 여성인 점은 바울의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에 대한 생각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새창조 신학과 연관되어 그의 주제구절은 갈3:28 이라 할 수 있다. 타락으로 인해 죄가 들어오면서 평등과 사랑의 존귀한 관계들이 모두 깨어지고 무질서와 혼란과 잔인함과 학대로 떨어졌으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종교적, 사회적, 성적인 차별이 모두 걷어지고 사랑 안에서 평등과 존중의 관계로 회복되어 성령의 부으시는 은사를 따라 자유롭게 인류사회의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하여 봉사할 수 있다고 증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두 난제구절(고전14:34,35, 딤전2:11,12)과 여성 리더십 연구

사실상, 지난 수세기 동안 이 두 말씀들은 그 짧은 길이(short text)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여성의 가르치는 사역과 다스리는 여성 리더십의 역할에 대해 발목을 붙들고 논란을 일으키게 된 주요 원인이 되었고, 현재에 이르러서 까지도 전 기독교회와 교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Carroll D. Osburn "The Interpretation of ICor.14:34~35" Essays on Women in Earliest Christianity. Vol.1. Carroll D. Osburn, ed. (Joplin, MO: College Press, 1995) 219.>. 실제로, 한국어 번역(말함)과 영어번역(speaking)으로 읽게 될 때에 여성의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침을 전면적으로 금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기에 십상인 점도 한 몫을 했다고 보여진다<실제로, 장신대의 교수였던 신약신학자 김지철박사(op.cit., 84)나, 조직신학자 이수영박사(op.cit., 98~102)가 교역과 여성안수에 기고한 글들을 읽어 보면, 이 두 난제 구절들에 대해 문자적으로는 그 금지사항을 거의 인정하는 입장에서 전체적인 배경을 들어 여성 리더십의 타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그 문자적인 내용에 있어서까지 그 구절들이 왜 여성 리더십의 근거를 말살할 수 없는지 밝히는 연구를 시도했다.>. 그러기에 바울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이었으며 성경 전체적인 맥락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당시의 사회 문화적인 배경을 살펴보고 원문의 의미를 자세히 연구해 보자.

1) 고전14:34,35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 찌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일반적으로 이 구절은 한 문장만 떼어서 대명제처럼 주장되는 경향이 있다. 즉,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 하라”이다. 그 한 문장만 한국어로 얼핏 보면 여성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잠잠 하라”는 원어 단어는 헬라어로 sigao 이며 그 단어의 일반적인 뜻은 “절대적인 침묵”을 의미한다<같은 단어 (sigao)가 28절과 30절에 쓰였다. 즉, 방언통역이 없을 때와 다른 이가 예언할 때 질서를 지키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 시간동안 절대적 침묵을 지키라는 의미로 쓰였다.>. 그 다음에 두 번에 걸쳐 나오는 여자의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lallein 인데 그것은 현재형 부정사(present infinitive)로서 계속되거나, 반복되는 행동을 뜻한다. 일반적인 영어성경 번역에서 이 “말하는 것”을 “to speak" 으로 사용함으로 공식적으로 말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오해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보여 진다. 그러나, 사실, lallein이란 원어를 깊이 연구한 오스번(Carroll D. Osburn)과 브루스, 그리고 스탕달(Krister Stendahl) 같은 학자들은 이 단어를  “여기저기에서 무질서하게 웅성웅성 말하는 것” 혹은 “억누를 수 없는 충동적 질문들”로 전체 예배를 방해하는 무질서한 의사소통 등을 의미 한다고 보았다<Carroll D. Osburn, op.cit., 234; F.F. Bruce, 1 and 2 Corinthians.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1971), 175; Krister Stendahl, The Bible and the role of Women. (Philadelphia, PA: Fortress Press, 1966), 30. 참고로, 만일 어떤 이들이 여기서 말하는 여자의 교회에서 "말하는 것"을 영어로 speaking이라 해서 말씀 선포 등으로 이해한다면 원어와는 동떨어진 해석임을 밝힌다.>. 35절과 연결시켜 읽으면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여자들이<당시의 유대교에서는 여자들의 예배참여를 금지했던 것과 비교하여, 그리스도인 예배에는 여자들이 자유롭게 참여할 뿐 아니라, 머리에 무언가를 쓰고 하기만 하면 공중기도와 회중 앞에 예언(말씀선포)까지도 허용되었다(고전11:5). 그런데, 이러한 자유를 누리는 대부분의 여자들이 사회적으로 교육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 예배에서 사용되는 어려운 단어들의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워 예배 시에 수시로 질문이 생겼고(숄러는 이를 "popping up") 그들은 무질서하게 서로 묻고 대답하는 가운데 예배의 질서를 깨뜨리는 우를 범했던 것 같다.> 예배 시에 질문이 생기더라도 침묵했다가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어 보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 예배 전체의 질서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Fuller 신학교에서 고린도전서를 전문적으로 강의하는 숄러가 주장한 대로 고린도전서 14장 전체의 주제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예배의 질서” 이며, 이 질서를 세우도록<고전 14장 전체의 주제를 파악하도록 도와주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고전 14:3,4,5,12,26);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고전 14:33); "모든 것을... 질서대로 하라(고전14:40)> 하기 위해 방언통역과 예언의 순차와 (무식한 계층의) 여자들의 침묵을 요구한 점을 알 수 있다. 만일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여자들은 교회에서 공적으로 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면 당시에 여자들의 공중기도와 예언(말씀선포)을 하기는 하되 머리에 무엇을 쓰고서 해야만 한다고 한 고전11장5절과는 상치된다<필자와의 개인인터뷰에서 세계적인 신약학자 김세윤박사는 이 점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며 주장했다 (1998년 훌러신학교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근거는 고전 14:36에 나오는 “너희에게만”(you the only)의 헬라어 “monus” 는 함께 나오는 부사형 접사 "h"(what!) 와 같이 모두 2인칭 남성형이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한국인들이 가진 성경 중 대부분에는 고전 14:34~36까지가 한 문단인 것처럼 고전14:37 앞에 문단 나누기 표시인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음으로써, 마치 36절의 의미가 여성들에게 공적으로 말하는 것을 강력하게 금지하는 것처럼 오해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었다. 하지만, 36절 헬라어 원문에 나타난 성은 남성이므로 오히려 33절과 연관지어 남성들에게 질서를 지켜 말할 것을 명령하는 내용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여자들의 교회에서의 침묵에 대한 명령과 36절은 별개임이 확인되었다. 다시 말해, 36절은 33절에 연장된 예언하는 자들이 서로서로 존중하여 피차간에 질서 있게 하라는 말로 이해함이 옳다. 그러므로, 고전14:34의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은 모든 여성의 교회에서 사적 공적 말하는 것(speaking)을 금지하는 모든 상황에 적용 되어야 하는 일반적 명령(universal command)이 아니고, 고린도 교회 공중예배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방언통역과 예언의 순차와 더불어 무식한 여자들의 예배시 침묵(질문이 생기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할 것)을 요구한 특수상황에서 적용되는 세부 적용명령 (specific application)으로 봄이 타당하다<W. Liefeld, op.cit., 150; Osburn, op.cit., 236 참조.>.

2) 딤후2:11,12

보조주의자들은 이 말씀이 교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을 규정짓는 가장 분명하고 강력한 텍스트가 된다고 하면서, 여성의 말씀 선포 사역에 대한 성경연구는 모두 이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be viewed through the lens)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George W. Knight, III, op.cit., 29; Hurley op.cit., 195~233.>. 이에 반해 동역주의자들은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통해서 여성들의 바른 가르침과 권위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교회 안에까지 침투했던 이단사설의 영향을 받아 잘못된 가르침과 권위를 부리는 여성을 제한한 내용으로 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가르침에 있어서 성별의 문제가 아닌 거짓과 미혹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동역주의자들이 이렇게 제시하는 근거는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로, 이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디모데전서가 쓰여진 배경과 목적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4차 전도여행 중 자신은 마게도냐로 가면서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를 돌보도록 지시했는데 당시에 에베소교회에는 영지주의를 비롯한 이단사설이 횡행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David J. Hamilton, op.cit., 272~274.>. 특히 당시 근동지방의 이방종교를 따른 이단들의 여신숭배는 여성들을 신들과의 중재자(중보)로서 우월한 위치에 놓았고 여성이 남성의 근원이라 믿으며 여성들이 특수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믿으면서 많은 예식이 종교매춘과 연결되어 있었다. 특히 영지주의에서는 여성의 뛰어남을(preeminence of women) 강조하며 여성들로 하여금 지나친 권위를 사용하도록 했다는 것이다<Catherine Clark Kroeger, "1 Timothy 2:12-A Classicist's View" Women, Authority & the Bible, Alvera Mickelsen ed. (Downer Grove, IL: Inter Varsity Press, 1986) 226~229.>.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딤전 2:8-15을 묶어서 그러한 거짓 가르침과 거짓 권위를 허락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로, 주요 단어연구이다. 11절과 12절에 나오는 “일절 종용함으로: hesuxia” 는 획일적 침묵(total silence)이 아닌 예의바른 매너(gentle manner) 혹은 정상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바른 질서(proper order)등으로 이해해야 옳다고 주장한다<Thomas C. Geer, Jr, "Admonitions to Women in 1 Tim.2:8~15" Essays on Women in Earliest Christianity.Vol.1 Carroll D. Osburn, ed. (Joplin, MO: College Press, 1995), 292; David M. Scholer, "Women in Ministry, Session Seven: 1 Timothy 2:8~15" The Covenant Companion 72(22); "in quietness"(종용히) 라는 헬라어는 살후3:12에도 나오는데 "settle down" 이란 뜻으로 침묵-"verbal silence"가 아닌 "규모있고 안정적인" 마음가짐이나 태도를 의미한다. 그러나, 영어성경에는 quietness(조용함) 등으로 번역되어 고전14:34(잠잠하라)와 연계하여 "말없이 조용하라"는 의미로 오해를 사게 만든 요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2절의 “가르치다(didasko)”는 이단에서 행해지는 잘못된 가르침(erroneous teaching)을 금한 것이며<해밀턴은 11절에서부터 15절 초반까지 여성이 "단수"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바울은 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던 한 여성을 주목하여 그녀를 다루면서, 그녀는 종용히 배워야 하며 교회에서 거짓교훈을 가르치거나 악한 권위를 행사하면 안 된다고 명령하는 것이라 했다. 즉, 이 구절은 가르치는 사역에 있어 성별에 관한 제한이 아니라 미혹에 관한 제한임을 강조했다(David J. Hamilton, op.cit., 284~287).>, “주관하는 것(authentein)”은 이단 선생들이 행사하던 부정적인 권위 사용을 금한 것으로 이해하는데<authentein "to have authority"은 신약 전체에서 이곳 한번만 쓰이는 희귀한 헬라어이다. 이것은 바울의 적극적인 권위 사용에 쓰이는 일반적인 단어가 아닌 부정적인 단어이며 횡령, 강탈(usurpation)의 의미를 가진 권위의 오도 혹은 악용(abuse of authority)을 의미한다. 즉, 이단에서 행해지는 여제사장들의 횡포적 권위를 말한다(딤전4:3; 5:11~15; 딤후3:6~7). (David M. Scholer, ibid.)>, 이는 해밀턴이 지적한 대로 12절에서 주목할 점은 교회를 어지럽히던 당시의 “한 여성(a woman)”을 지목하여 그녀의 이단적 가르침과 부정적인 주관함을 허락하지 않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리가 있어 보인다. 셋째로, 바울의 여성 동역자들을 보면 바울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 바르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위에 언급 한대로 많은 여성 동역자들이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을 활발하게 감당했지만, 그 중 브리스길라와 유니게와 로이스는 더욱 분명한 예로 볼 수 있다. 브리스길라는 바울이 자신의 동역자로 소개하고 있는(롬16:3) 대표적인 영적인 선생(spiritual teacher) 중 한 사람이다. 그녀가 남편인 아굴라와 함께 성경학자 아볼로를 "데려다가" 주의 도를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풀어 "가르쳐서"<이것은 딤후2:2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anthropos: 남녀 모두를 포함하는 인간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한 것의 순종이며 실재라고 볼 수 있다. 이 말씀에서 바울은 주의 제자를 재생산하는 지상최대의 명령을 실천함에 있어 남녀의 차별을 두지 않음을 밝히기 위해 남자를 의미하는 단어 aner 대신 남녀를 모두 포함하는 anthropos를 썼다(David J. Hamilton, op.cit. 293~294.> 후에 아볼로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유력하게 증거하여 아볼로가 사도로 세워지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행18;24~28). 만일 바울이 딤전 2:12에서 의도 한 것이 여자의 가르침과 남자를 주관함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 절대적이고 우주적인 진리라면 그는 마땅히 이 두 가지를 다 범한 죄인 브리스길라를 공적으로 엄하게 치리 했어야만 한다. 그러나, 바울이 임종할 때까지 한번도 브리스길라에 대해 부정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방인의 모든 교회가 저들에게 감사한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존경과 깊고 넓은 감사함을 표현 했다(롬16:4). 더불어, 디모데를 어려서부터 “주관하여” 성경으로 “가르치고” “거짓 없는 믿음”을 본을 보여 가르친 어머니 유니게와 로이스도 바울에 의해 크게 칭찬 받았다(딤후 1:5; 3:14,15). 그러므로, 이 말씀도 여성들이 가정과 교회 안에서 가르칠 수 없다는 우주적인 진리(universal command)로 이해하기 보다는 에베소교회의 특수한 이단적 배경 속에서의 상황적인 적용(contextual application)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와 같이 두 난제구절을 살펴본 바 그것들은 우주적인 진리를 말하기 보다는 문화적인 배경에 근거하는 특수한 상황에의 적용진리임을 발견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여성의 봉사에 있어서 그 위치와 역할에 제한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사도바울도 그의 사역에 있어 많은 여성 동역자 들을 포함시키고 활발하게 동역한 것을 통해 이 말씀들이 여성 리더십의 우주적 금지를 위해 쓰여 진 것이 아님을 증거해 준다.

 

IV.  나가는 말 : 요약 그리고 비판적 상황화된 결론과 목회와 선교에 있어 여성 리더십 개발에 대한 제언

우리는 이상과 같이 여성 리더십의 성경적 근거를 연구하기 위해 여성의 동등함과 리더십 근거를 창조기사와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서를 중심으로 논의해 보았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창조기사에서 하나님은 여성을 갈빗대로부터 빚으시기 전부터 “돕는 배필”로 칭하심으로 여성의 동등함과 여성 리더십 역량을 구상하셨고, 그들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문화명령이라는 공동 사명을 부여하심으로 남성과 여성의 리더십의 조화를 통해 이루도록 공동으로 복을 주셨다.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온 하나님이신 예수는 당시 문화의 여성 비하적 여성관에 대해 당시의 랍비들과는 달리 독립적이고 혁명적인 입장을 취했다.  예수는 복음서 전체를 통해 분명하고도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동등한 여성의 지위와 리더십을 인정했다. 성차별(gender discrimination) 하신 발언이나 모습은 단 한번도 찾아볼 수 없다. 말씀과 신학을 여성들에게도 자유롭게 가르친 예수, 여성들이 자신을 따라 다니며 섬기도록 허락한 예수, 머리에 기름 부음으로 자신의 장사를 준비한 여성에 대한 극한 찬사, 부활의 첫 소식 전하도록 예수로부터 위임 받은 이 여성들을 통해 여성을 제자로 인정한 리더십의 성경적 근거를 볼 수 있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의 새 창조 신학과 연관되어 그의 주제구절은 갈3:28이라 할 수 있다. 타락으로 인해 죄가 들어오면서 평등과 사랑의 존귀한 관계들이 모두 깨어져 무질서와 학대로 떨어졌으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의 죽음과 부활로 종교적, 사회적, 성적인 차별이 모두 걷어지고 회복되어 성령의 부으시는 은사를 따라 인류사회의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하여 리더십으로서 자유롭게 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두 난제구절들은 우주적인 진리를 말하기 보다는 문화적인 배경에 근거하는 특수한 상황에의 적용 진리임을 발견했다. 이 구절을 말한 사도바울 자신도 그의 사역에 있어 많은 여성 리더십을 인정하고 활발하게 동역한 것을 통해 결과적으로 여성 리더십의 근거를 확인해 주었다.

이상의 근거들을 따라 볼 때, 성경이 말하는 여성의 지위는 남성의 그것과 동등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여성의 봉사와 사역에 있어서 그 위치와 역할에 제한이 없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혼인유무, 유대인이나 이방인, 자유자나 노예, 강한 자나 약한 자 등에 차별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준비된 자, 순종 하는 자, 성령의 은사가 계발되어진 자, 성숙한 인격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돌보고 섬기는 자, 헌신된 자, 깨끗한 자, 주의 일하시는 곳에 있는 유용한 자 등을 쓰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들도 남자들과 똑같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사랑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한국교회 사역과 선교사역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한국 여성 교역자나 여성 선교사의 지위는 하나님 앞과 교회 공동체 앞에서 남성 교역자나 남성 선교사의 지위와 차별 없이 동등하며 성령에 의해 부어진 은사를 따라 봉사함에 있어서 그 어떤 제한도 둘 수 없다. 흔히 여성 행동지침으로 말하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닌, 유교 경전에 내려오는 여성교육을 위한 문구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우리의 세포 속에 녹아있던 유교 교리를 근거한 행동지침에서 탈피해 나와 성경의 원리를 선택함이 마땅하다. 오직 성령이 주신 달란트를 따라 그 은사가 개발되고 준비된 만큼 성령의 사용하심에 전폭적으로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선교를 이루는 사역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리더십에 관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선택권과 지명권이 남자나 여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게 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주권에 의해 주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상의 결론에 미루어 필자는 한국교회와 선교를 위해 두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 한국 문화에 내재되어 있는 여성 비하적 여성관의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의 가부장적 여성 역할에 대한 개념은 이상의 성경적 근거에 비추어 볼 때 과감히 수정되고 개혁되어야 한다. 특히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여성의 동등함을 인정하는 것과 하나님의 교회와 선교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그 은사를 공유한 여성의 리더십을 인정하는 부분에서 그렇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삼분의 이 이상 차지하고 있는 여성 성도들의 인간으로서의 동등한 존귀함을 마땅히 인정하고 회복시켜야 한다.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 된 여성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들을 남성들과 똑같이 인정하고 개발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도와주며 개발된 은사들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와 장을 나누며 격려해야 한다. 둘째로, 그렇게 되기 위해 한국 교회들과 신학교들 그리고 선교사 훈련센터 등에서 이 같은 성경적 근거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가르쳐 져야 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 한다. 이는 어린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여성에서 남성에 이르기 까지 평신도에서 목회자에게 이르기까지 모두 확인해야 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사랑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알고 그 분과 같이 행할 때 우리 모두는 샬롬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한국의 교회와 선교가 살기 위해서는 전체의 과반수 이상 삼분의 이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다시금 살아나도록 도와야 한다. 그들이 건강한 마음으로 맡겨진 사명을 즐겁게 감당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 또한 여성사역자와 선교사 각 사람이 하나님이 보시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함께 동역하는 남자들에 의해 합당한 인정을 받으므로 샬롬의 관계 속에 건강해 질 때, 사역 현장에서 남녀의 팀웍이 건강해져서 건강한 나무가 자연스레 건강한 열매를 맺고 재생산하듯이 풍성한 열매가 대를 이어가며 맺어져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한국의 여성 교역자와 선교사들이 건강한 관계 속에서 남성 교역자와 선교사들과 신명나는 조화를 이루어 온 세상에 복된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며 온 땅을 다스리는 일에 시너지 효과를 가져와서 교회와 세계 열방들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하루 빨리 이뤄지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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