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8/23) 교갱협 제10차 영성수련회 10주년 기념포럼

교갱협(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은 1996년 3월 7일 창립되어 올해로 창립 10주년을 앞에 두고 있다. 창립 당시 한국교회 안에는 많은 개혁이 요구되고 있었다. 교회가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는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 속에 동화되어 점점 교회의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다. 합동 교단 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총회장 선거를 둘러싸고 금권 타락선거와 관련된 잡음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실례일 뿐 여러 가지 측면에서 개혁과 갱신이 요청되고 있었다. 교회의 본래의 사명, 복음전파, 대 사회적 책임, 바른 신앙의 계승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도 새로운 전환점이 요구되고 있었다.

 

I. 교갱협 창립 그 시대적 배경 ― 새로운 변화를 요구받은 한국교회

1992년부터 한국교회는 외형적으로 성장이 둔화되기 시작하여 적지 않은 교인들이 교회에서 이탈하고 있었고, 새로운 신자들이 교회로 영입되는 현상은 현저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원인 분석을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지만 복음전파를 위한 노력이 현저하게 줄었고 이와 함께 교회성장의 둔화가 너무도 분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신도시 건설로 인해 교인들의 이동이 어느 때보다 강하게 나타났고, 유초등부, 중고등부는 물론 대학생들과 젊은 청년들의 교회 이탈 현상에 두드러졌다.

이 시대만큼 교회의 대 사회적 책임이 강하게 요구되기 시작한 적도 드물 것이다. 1980년대 물량적인 성장이 교회의 대 사회적 책임의 구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교회 건축, 기도원 확보, 묘지 확보, 교육관 확보 등 교회의 확충에 거의 투자가 되어 사회적 책임구현을 충실하게 감당하지 못했다. 집단이기주의 현상이 교회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교회에 대해 비판적인 젊은이들만 아니라 기성의 젊은이들 가운데서도 교회를 이탈하는 이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1980년대부터 무섭게 몰아친 종교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은 1990년대 접어들어서도 계속 교회에 깊숙이 침투 교회의 신앙과 전통을 흔들고 있었다. 화합과 일치라는 개념으로 종교 간의 화해가 일간지에서 하나의 이상적인 현상인 것처럼 보도되기 시작했다. 자연히 기독교의 유일성이 점차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신학계 안에서 진보와 보수 간의 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1994년 탁명환 소장이 살해된 후 한국교회 안에 이단들이 기성교회에 깊숙이 침투하기 시작했고, 그 세력들이 놀랍게 확대되어 나갔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교회의 세속화가 어느 때보다 강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물량주의적 도전, 성적 타락의 도전, 가정의 붕괴, 자녀들의 탈선이 이제는 불신세계의 일이 아니라 교회와 기독교인들 안에 서서히 중요한 문제로 부상하고 있었다. 총회장 선출을 둘러싼 금권 타락 선거를 비롯한 교권의 타락, 교회의 외형적인 성장 둔화, 대 사회적 책임 구현에서 대한 사회로부터의 강력한 요구 증대, 신학적 변천과 탈교리주의 현상 앞에 교회는 새로운 방향 정립이 요구되고 있었다.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1996년 3월 7일 한국교회 갱신을 위해 교갱협이 창립된 것이다. 여기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다 본 교단의 목회자들이었다. 따라서 교갱협이라고 했을 때 그 의미와 목적과 활동의 범위는 일단 본 교단에 국한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II. 지난 10년간의 교갱협의 활동, 그 역사적 의의

1959년 통합과 합동이 분립된 이후 북장로교선교회, 남장로교 선교회, 호주 장로교 선교회를 비롯한 선교회와 세상적으로 학력을 갖춘 목회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통합측에 합류하여 합동교단 안에는 인재 부족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 사실이다. 이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극복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우리 교단은 지도자 부재로 어려움을 겪어 왔다. 이것은 우리 교단 안에서 제기된 문제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당장 총체적인 위기가 다가오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개혁과 갱신의 요구받고 있는 시대적 사명을 도외시 한다면 무언가 역사와 교회 앞에 그 책임을 피하는 것이라는 일종의 위기의식이 의식 있는 목회자들 가운데 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교갱협이 창립된 것이다.

교갱협의 창립은 비록 10년의 역사지만 본 교단에 새로운 분위기를 형성해주었고, 다음 몇 가지 측면에서 한국교회, 특히 본 교단 안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교갱협은 합동측에 대한 이미지 갱신을 가져다 주었다.

교갱협이라는 이미지가 옥한흠 목사의 이미지를 업고 참신한 이미지로 다가왔고, 엘리트 군단이라는 인식을 갖게 하였으며, 지금까지의 합동교단의 이미지와의 차별화를 분명히 심어주었다. 지속적인 교회성장 가운데 교단 안에 참신한 이미지를 심고 있는 이들이 여기에 대거 합류하고, 더구나 칼 세미나를 이수한 이들 상당수가 동질감을 갖고 교갱협에 합류하여 창립 처음부터 합동교단 안에 하나의 뚜렷한 세력을 형성하여 나갔다. 본 교단 안에 존재할 수 있는 극단적인 보수나 진보 양 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적인 노선에서 교회 갱신을 추구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분명하다. 이 같은 점들이 합동측 이미지를 쇄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둘째, 교단 안에 새로운 리더십 구축의 발판을 제공해 주었다.

어느 때보다 본 교단 안에  새로운 리더십 구축이 요구되는 시대적 상황에서 그 토양을 제공해주었다는 사실이다. 교갱협이 우리 교단 안에 리더십에 직접 참여하여 그 세력을 주도하는 일은 없었지만 교단 정치 갱신에 적지 않은 자극을 주었다. 특히 총회장과 임원단의 제비뽑기 제도 정착까지는 교갱협의 역할이 컸으며, 그 외 한장협 창립과 활동에 견인차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타 교단과의 연대를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우리 교단 안에 교갱협을 통해 이미지 갱신과 새로운 리더십 구축하는 데는 옥한흠 대표회장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을 아무도 무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10년을 돌이켤 볼 때 교갱협 창립과 발전에 옥한흠 목사님이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지만 또한 교갱협은 옥한흠 목사님을 한 단계 성숙한 지도자로 만들어 주는 보이지 않은 배후의 힘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아마도 옥한흠 목사님의 세대교체는 물론 본인의 철학과 결단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교갱협이나 한장협의 활동 과정에서 이 사회와 국가가 교회에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정확히 읽을 수 있는 눈을 갖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종의 시대적 소명의식을 가졌다는 의미이다. 주관적인 평가인지 모르지만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옥한흠 목사님만 아니라 교갱협에 참여하는 지도자들 심령 가운데도 그 같은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되거나 될 것으로 보인다.

셋째, 교단의 도덕적 갱신에 기여한 점이다.

본래 사회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  한국교회 안에 진행되고 있던 세속화의 도전 속에 본 교단 역시 힘을 잃고 동화되기 시작했다. 금권 선거, 물량주의, 성적 타락은 사회의 지탄이 되기 시작했다. 교갱협은 이 같은 위기적 상황에서 본 교단 안에 도덕적 갱신의 자극제가 되었다. 그것은 교갱협 멤버들이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에서 초월했기 때문에 그 문제가 한국교회와 우리 교단 안에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심각성의 인식은 늘 역사 속에서 개혁과 갱신의 출발이었다.

넷째, 예배 갱신이다.

교회의 침체는 예배의 침체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난 10년간의 교갱협 수련회 명칭이 “영성수련회”였고, 그 영성 수련회 가운데 예배 갱신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이것은 예배 갱신의 중요성을 교갱협이 깊이 인식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정한 예배 갱신 없이는 교회 갱신이 없다. 합동교단의 예배가 통합측보다 더 역동적이고 덜 예전적이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이 말은 긍정과 부정을 포함하고 있지만 성령의 역사에 민감한 예배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성경적인 갱신이라고 본다. 그것은 종교개혁 자체가 예전에서 신학의 갱신을 통한 예배의 갱신을 추구하는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합동 교단이 변화하는 시대적 흐름에 늘 둔감했던 것이 사실이고 따라서 변화하는 세상에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증거 하는 일에 늦은 반응을 보여 왔다. 그러나 요즘은 상당히 역동적인 예배를 추구하는 교회들이 합동 교단에 적지 않다. 이와 같은 움직임에 교갱협은 중요한 몫을 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현장에 있는 목회자들이 가장 고민하는 것이 예배 갱신이고, 그 예배의 갱신을 위한 모델들을 영성세미나를 통해 접하거나 동료들을 통해 접하면서 끊임없이 예배 갱신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다섯째, 교회 지도자 양성이다.

교갱협은 지난 10년 동안 우리 교단의 많은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크게 공헌했다. 교갱협이 지도자 양성 기관을 갖고 특별히 교육시켜 육성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평가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목회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하나의 NGO라고 할 때 그곳에 참여하는 이들의 이미지는 곧 그 단체의 이미지와 직결되는 것이다. 우리 교단 안에 대표적인 좋은 이미지를 가진 지도자들이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만으로 교단 안에 새로운 리더십으로 작용하고, 그것은 젊은 목회자들에게 참여 욕구를 불러일으키며, 자연히 앞선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멘토 역할을 함으로써 새로운 지도자 양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옥한흠 목사님의 활동과 사역과 깊이 연계되어 진행되었다고 보고 싶다. 그가 계속해서 심혈을 기울여 온 칼 세미나에 참여하는 이들 가운데 합동 교단 출신들이 가장 많다는 사실, 교단의 지도자 양성의 필요성을 깊이 느끼고 그와 같은 뜻을 공유한 교갱협 멤버들, 제2, 제3의 새로운 모델들의 등장, 새로운 풍토 조성과 제자훈련의 교회정착으로 인한 교회갱신 토양구축과 교회 성장, 이 모두가 새 시대에 맞는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 양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동질감을 갖는 일종의 호모지니어스 그룹이 교단 안에 형성된 것이다.

여섯째, 교회 일치운동에서의 기여이다.

1996년 3월 교갱협 창립은 2년 후 1998년 11월 한목협 창립의 동인이 되었다.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목회자들의 자발적인 순수 NGO가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가지고 연합단체를 결성한 것은 처음 있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한목협의 창립은 한국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 교갱협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합동교단이 한국교회 안에 중요한 리더십을 구축하는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성경단독번역반대, 교단장협의회의 창립 주도, 한기총과 NCC 연합 움직임의 모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교갱협은 한국교회 일치와 화해 운동에 중요한 몫을 감당한 셈이다.

 

Ⅲ. 교갱협의 한국교회사적 평가

합동교단은 한국에서 개신교 교단 중에서 가장 큰 교단이다. 가장 큰 교단인 합동교단의 갱신은 한국교회 갱신의 밑거름이 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위에서 열거한 것처럼 분명 교갱협은 지난 10년 동안 본 교단 안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교갱협이 지난 10년 동안 합동교단의 이미지를 쇄신해주었고, 대 사회적 책임 촉구를 통해 가장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는 교단으로 전환시켜주었으며, 예배갱신을 통해 역동적인 예배를 지향하도록 자극을 주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지난 10년 동안 교갱협이 교단 정치 개혁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고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자극과 도전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제비뽑기를 했다고 해서 교단 정치 개혁을 완성하거나 이룬 것으로 평가할 수 없다. 금권 정치는 어느 정도 시정되었는지 몰라도 제비뽑기 방식이 과연 훌륭한 교단 지도자를 선출하는 바람직한 방법인가를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여전히 새로운 금권 방식이 등장하고 그 앞에서 힘을 잃어가는 경우도 많다. 교회 개혁과 갱신은 단순한 제도 개혁 그 이상이여 한다는 것이다. 바라는 것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통한 인간 성품의 변화를 통한 개혁이 우선되어야 할 시대적 사명이라는 깊은 인식이 요구된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같은 강력한 회개의 역사가 이 땅에 다시 임하기를 사모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맺는 말

지난 10년 동안 교갱협이 합동교단 안에 새로운 리더십을 구축하고 정치 토양을 개선하였으며, 목회자들의 도덕적 향상과 미래지향적인 책임의식을 고취시켜 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무엇보다도 합동 측에 대한 이미지를 완전히 바꾸어 주는 역할을 감당했다. 교회의 대 사회적 책임을 끊임없이 촉구하여 후배 목회자들과 교인들에게 나라와 민족과 사회를 향한 책임의식을 고취시켜 주었다.

그러나 앞으로 10년 동안 교갱협은 제도적인 개혁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이를 위해 우리 교단 안에 견인차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참된 교회 갱신을 위해서는 영적갱신과 제도적 갱신이 병행되어져야 하고 둘 중 우선순위를 둔다면 영적각성이 사회적 갱신에 우선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세계교회사에서도 그렇듯이 지난 한국교회사를 돌이켜 볼 때 한국교회 안에 부흥운동을 통한 참된 인간의 영적각성이 일어날 때 사회와 문화는 변화되었다. 교갱협에 대한 기왕의 참신한 이미지가 참된 교회와 교단의 영적각성의 리더십 구축이 첨가되어 우리 교단과 한국교회의 갱신의 주역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부흥이 일어나고 나서 개인의 영적각성이 사회각성과 사회개혁으로 이어져 교회가 사회와 민족을 이끄는 구심점 역할을 감당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난 후 교회는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며 사회를 밝고 맑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교갱협 10년을 맞아 그동안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우리 모두 그 놀라운 역사를 위해 우리는 다시 한 번 무릎을 꿇고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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