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8/24) 교갱협 제11차 영성수련회 주제특강

마태복음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미전도 종족  - 조선

조선 우리 민족은 4339년 동안 시간은 있었으나 역사는 없었고, 사람은 있었으나 삶이 없었던 민족이었습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 은자의 강산이었던 이 땅에, 하늘의 택하심을 입은 백성이 있었기에 이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퍼지게 된 것입니다.

* 어떤 미전도 종족이 복음화되기 위해서는 그 종족에 대한 정보와 그리스도인들의 반응이 있어야 한다. 조선의 복음화는 조선에 대한 정보와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들의 반응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중국선교를 통해서 알게 된 조선민족을 향한 반응

1807년 모리슨 선교사 - 극동아시아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 광동지역선교.
1832년 귀츨라프 선교사 - 모리슨 선교사의 극동아시아 정보로 인해 중국선교를 하면서 한국에 도착하여 주기도문을 번역.
1840년 아편전쟁, 1842년 난징조약 이후 중국의 선교의 문이 열리기 시작.
* 1866년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 런던 선교회 파송으로 중국사역 중, 우리 민족을 알게 되어 (1865년 9월 13일 - 한국 방문)

 

최초의 순교자 토마스 선교사와 윌리엄슨 선교사 열전

대원군이 집정하여 쇄국정책을 펴고 있는 동안,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한 끝에 이 땅에서 처형된 영국 선교사가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사에서 ‘첫 순교’의 영광된 자리를 차지하게 된 토마스 선교사가 그 분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영국 하노버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런던선교회 파송으로 중국 상해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의 선교사의 길은 처음부터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그의 아내 캐럴라인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망한데다가, 런던 선교회의 상해 주재 책임자인 무어헤드와의 불화가 겹치게 되었습니다.

토마스는 런던 선교회에 사표를 제출하고 해관에서 근무하면서 선교사역을 계속하였지만, 선교회의 반응은 경멸과 적의 그리고 불신뿐이었습니다. 그러다 그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윌리엄슨 선교사를 만나게 되면서 지푸에서 윌리엄슨 선교사의 일을 도우며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한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지푸에서 만나게 되면서였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한국어를 배우면서 바로 한국선교여행을 계획하였습니다.

드디어 1865년 9월 13일 그는 한국에 도착하였습니다. 2개월 반 동안 한국 해안가에 머물면서 가지고 간 중국 성경을 나누어주고, 복음을 전하는 등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벌였습니다. 그 후 서울을 향해 떠났지만, 태풍으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만주를 거쳐 북경에서 사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오직 조선에 가있었습니다. 그의 한국말과 조선에 대한 지식이 알려지면서, 프랑스 함대가 그를 통역관으로 쓰려고 하였습니다. 당시 프랑스 함대는 조선에서 프랑스 신부에 대한 학살을 구실로 조선에 들어가려는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함대는 인도차이나 방면의 긴급사태에 투입되면서 토마스의 한국행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제너럴셔먼호가 한국을 향해 떠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에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통역관으로 이 배에 편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토마스 선교사가 꿈에 그리던 조선땅에 도착하였습니다. 1866년 8월 16일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평양에 가까워지면서, 제너럴셔먼호와 한국 측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이런 긴장 속에 제너럴셔먼호의 발포사건과 이현익의 억류사건이 일어나자 조선군의 반감을 사면서 사태는 어려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긴장의 분위기 속에서 며칠 더 버틴 제너럴셔먼호가 모래톱에 좌초되면서 조선의 화공이 전개되었고, 배에 머무르고 있던 토마스 일행은 뭍에 내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분격한 군민들에 의해 결박되고, 타살되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1866년 9월 2일 토마스 선교사는 27세의 나이로 아직도 수많은 교회가 그의 죽음 위에 세워졌던 평양의 대동강 가에서 피를 흘렸습니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도 복음의 말씀을 이 땅에 전하려 하였습니다. 이때 토마스에게서 한문 성경을 받았던 한 사람이 뒷날 선교사 마펫을 찾았고,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순교는 헛되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너럴셔먼호가 미국 상선이었기 때문에 , 미국은 이 배의 행방을 추적하면서 조선을 설득하여, 결국 1882년 한미 수호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각 미국 교단의 선교사 파견으로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초석이 된다.”는 터툴리언의 말대로 한국을 위해 최초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는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로스(Ross) 선교사 열전 - 서상륜, 서경조 형제와의 만남

- 토마스 순교의 소식을 듣고 -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회는 1862년부터 중국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특별히 윌리엄슨 선교사를 중심으로  산동반도 지역을 선교하고 있었습니다. 윌리엄슨 선교사는 1866년 토마스 선교사를 조선으로 파송하였다가 그가 대동강 가에서 순교하자, 순교의 아픔 속에서도 결코 조선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872년 윌리엄슨 선교사를 돕기 위해 멕킨타이어 선교사와 이어서 로스 선교사가 입국하였습니다. 윌리엄슨 선교사는 그들에게 조선에 대한 정보를 주고, 토마스 선교사의 조선 사랑과 순교의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로스 선교사는 토마스 선교사가 조선 선교를 위해 대동강에서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남다른 감정으로 조선민족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1874년 10월 9일, 당시 청나라와 조선의 국경이자 양국사이에 합법적인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고려문을 방문하였습니다. 로스는 거기에서 한국 상인들을 만나 한문성경을 팔며 전도하려 하였지만, 조선 사람들이 영국에서 온 상품에만 관심을 가지고 복음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자, 처음에는 실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로스가 여관에 머물러 있는 동안, 50대 남자 상인이 찾아와 로스는 그에게서 한국 정세와 한국인의 발음법 등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만난 한국 사람이 바로, 한국교회 최초로 세례를 받은 백홍준의 아버지였습니다.

로스 선교사는 1876년 3월 강화도 조약에 의한 한국 문호개방 소식에 자극을 받아, 4월말에 다시 고려문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는 어학교사를 얻고자 여러 차례 시도한 끝에 의주 상인 이응찬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로스의 가슴은 온통 조선민족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조선어를 빨리 배우고 싶은 마음과 한글로 성경을 번역하려고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계획을 하나님께서는 이루어 주셨습니다. 1877년에 이응찬의 도움으로 한국 선교사를 위한 한국어 교재인 코리안 프라이머(Corean Primer)를 발간하고 이듬해에는 이응찬과 한두 명의 한국인의 도움으로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을 변역할 수 있었습니다.

로스 선교사는 만주에서 조선족을 위해 사역을 하면서 잊을 수 없는 날이 있었습니다. 1879년 1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4명의 한국인이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 날은 한국 개신교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한국 개신교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로스 선교사는 이때의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4명의 한국인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비록 현재 한국이 서구의 나라들과 어떠한 접촉도 철저하게 격리시키고 있지만, 그 쇄국은 곧 무너질 것이고 또한 한국인들은 중국인보다 천성적으로 꾸밈이 없는 민족이고 보다 종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면 곧 바로 급속하게 퍼져나갈 것으로 기대합니다. 기독교의 본질과 교리를 탐구하는 4명의 수세자와 11명의 다른 사람들이 있고, 현재 동일한 수의 사람들이 한국 민족을 위해 성경과 기독교문학을 준비하는 우리의 문서사업을 위해서 7~8일이 걸리는 우리 선교본부까지 기꺼이 올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러므로 바로 여기에 기독교회를 향해 열려있는 새 민족, 새 나라, 새 언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로스 선교사님이 얼마나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과 조선 민족을 사랑하고 있었는가를 알게 됩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복음화 시키기 위해 성경번역을 하였으며 조선인을 전도하여 우리 민족의 장래를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로스 선교사가 이응찬과 성경번역을 하고 이응찬이 귀국한 후에, 하나님은 또 하나의 조선 사람을 통해 조선 선교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서상륜이라는 사람입니다. 서상륜은 홍삼 장사차, 동생 서경조와 함께 만주에 왔습니다. 만주에서 서상륜은 열병에 걸려 거의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친구의 도움으로 선교사님에게 소개되었습니다. 의사로 오셨던 헌터 선교사의 치료로, 그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생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선교사님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고, 서상륜은 로스 선교사와 함께 일하면서 누가복음을 번역하였습니다. 그 당시 책을 파는 사람을 매서인이라고 하였는데, 매서인을 통해 번역된 성경이 조선에 반포되었습니다. 그들은 마을 마을마다 성경을 짊어지고 들어가 복음의 씨를 뿌렸습니다.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도 매서인으로 성경을 듣고 조선에 들어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고, 특별히 자기의 고향인 황해도 소래에서 복음을 전한 결과, 수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선교사님이 1885년 4월 5일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최초의 교회는 선교사님들이 들어오시기 2년 전에, 황해도 소래에 최초의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 이유는 로스 선교사의 만주선교로 인해, 서상륜 서경조 형제가 먼저 예수를 믿고 성경을 번역하여 자기 고향에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로스 선교사는 또한 만주에 한인촌이 형성되자, 거기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4개의 마을에서 75명의 남자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이듬해에 다시 한인촌을 방문하여 25명에게 추가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1884년 말에는 압록강 연안 계곡에 있는 한인촌에 수세자가 100명이 넘었고 남자 세례 요청자가 600명이나 있었으며, “매일 가정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수천 가정들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1880년대 초에 만주와 한반도에 여러 신앙 공동체들이 설립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모두 로스 선교사의 조선 사랑으로 나타난 열매들이었습니다.

조선 선교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가 헛되지 않음은, 토마스 선교사의 조선 사랑이 로스 선교사에게 전이되었기 때문이었고, 로스 선교사의 조선 사랑으로 이 땅에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황해도 소래에 최초의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로스는 조선선교를 준비한 선교사입니다. 쇄국정치로 우리나라에 들어올 수는 없었지만, 중국 땅에서 조선 선교를 위해 열정적으로 수고한 결과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간절한 기도로 한국은 복음의 문이 열렸고, 그가 뿌린 씨앗을 토대로 한국의 복음화는 꽃을 피우게 된 것입니다. 아멘.

 

▶ 로스와 멕킨타이어 그리고 일본에서 사역하고 계시는 선교사님들이 우리 민족에 대한 정보를 고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 내용은 수세자들이 일어나고 그들을 통해 성경번역 사역까지 준비하고 있으므로, 쇄국정치가 끝나고 복음을 마음 것, 전할 수 있는 환경을 달라는 선교편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 기도에 함께 동참하는 귀한 그리스도인들의 중보의 기도로 조선은 1882년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한영, 한독, 한불, 한러 조약까지 체결하여 굳게 닫혔던 쇄국정치는 끝이 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일본선교를 통해서 알게 된 조선민족
1854년 - 평화조약
1858년 - 미일 수호조약
1859년부터 일본 개신교 선교의 시작
1880년 - 이수정, 김옥균 등 일본유학 재일 유학생 크리스찬 공동체 탄생

 

▶ 중국과 일본에서 사역하고 있던 선교사들의 편지

1) George Knox 일본 선교사의 편지 (1883년)

“조선 사람들은 서양학문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번 두 조선 학생이 세례를 받았고 그밖에도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내년 4월에는 선교사가 조선 땅에 상륙해야만 합니다. 이 선교지를 열기 위하여 우리 교회가 세 사람만 택하여 보낼 뜻은 없습니까? 만일 우리 교회에서 할 수 없다면 다른 교회에서라도 이 부름에 응답을 해야만 합니다. 그 자원자를 찾아 주십시오.”

2) 길버트 리이드 중국 선교사 편지 (1884년 4월 14일)

“... 한성과 또 여러 항구에는 벌써 외국인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개 중에는 좋지 않은 행실을 하는 사람이 있어 서양문명이나 서양 사람들의 명예에 큰 손해를 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어서 빨리 참신하고 헌신적이며 현명하게 움직이는 기독교 신자들의 참여로 제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장사꾼이 먼저 들어가고 전도가 그 뒤를 따라서야 되겠습니까? 전도를 계획한다면, 지금부터 곧 시작해야만 합니다. 확고한 방침을 가지고 또 하나님의 섭리대로 실행해야 할 것입니다.”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World Christian) 들의 반응

“모든 어려운 장벽들이 있었을 때 세계를 품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 장벽을 제거해 나가게 된다. 그들을 통해 조선에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된다.”

1. F. F. Ellinwood 목사

여호수아와 갈렙 설교 : “우리가 박해를 두려워하며 눈치를 보고 기다려야 합니까? 크리스천에게 박해는 축복이 아닙니까?”

2. 가우처 목사와 멕클레이 선교사

1882년 우리나라는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미국은 조선과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몇 사람에게 미국을 견학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줍니다. 그때 민비의 사촌인 민영익씨를 대표로 7명의 견미단이 구성되어 미국을 견학하게 됩니다. 그들이 미국을 견학하고 다닐 때, 기차 안에서 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갓을 쓰고 한복을 입은 동양의 이방인을 신기한 듯 쳐다보며 지나가지만,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남 다른 관심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어떤 민족일까? 이 민족은 복음을 받았을까? 이 민족에 선교사님들이 들어가셨을까?”

감사하게도 그 기차에 주님의 관심을 가지고 우리 민족을 바라보는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가우처 목사와 게일이라는 청년이었습니다. 가우처 목사는 민영익이 이끄는 견미단을 통해서 우리 민족에게 문호가 개방되었으며 선교사도 들어가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즉각적으로 유산을 털어 선교부에 헌금을 합니다. 그 헌금의 내용은 꼭 조선민족을 선교하는데 써달라는 목적헌금이었습니다.

그러나 선교부의 반응이 미온적이자, 그는 일본에 계신 멕클레이 선교사에게 편지를 써서 부탁을 합니다. “조선의 문이 열렸으니 조선을 직접 방문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멕클레이 선교사는 개화사상을 가지고 있는 김옥균이라는 사람을 만나 1884년 고종황제를 찾아와 한국을 위해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소식을 미국에 알리면서 조선을 위해 선교사를 모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부름에 많은 젊은이들의 선교사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한국에 오게 되는 것입니다. 게일이라는 청년은 그 기차 안에서 조선에 대한 정보를 듣고 조선에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후에 우리 민족에게 와서 멋진 선교사의 삶을 사셨습니다.

3. 프레데릭 마퀸드 :  유산 5천 달러 1884년 2월 기부

4. 그 외 이름 없는 기증자들 :  앞 다투어 헌금 - 조선 선교의 틀이 짜여져 갔다.

9살 된 캘리포니아 소녀 Fowler의 9불의 헌금은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을 향한 최초의 결단 - 존 헤론의 선교사 열전

고종황제의 윤허에 의해 의사와 언어교사가 한국에 들어올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오자 조선을 향한 선교사의 반응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 중 제일 먼저 선교사로 반응한 젊은이는 의사였던 존 헤론(John W. Heron)이었습니다. 그는 1858년 6월 15일생 영국에서 출생해서 14세 때 영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는 조선에 의사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정보를 듣고 “의약품과 의료기기 얼마를 준비할 수만 있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떠나겠습니다. 조선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선교사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며 조선을 향한 마음을 불태웠습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 민족에게 찾아오기까지 많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그의 모교인 테네시 종합의과대학에서는, 개교 이래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존 헤론을 교수로 내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더 조선 선교사로 오는데 장벽이 되었습니다. 그가 교수와 의사로 본국에서 지낸다면 그의 앞길은 든든히 보장된 길이었습니다. 의미도 있고 보람도 있고 명예와 부가 보장된 그 길을 뒤로하고,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병이 득실거리는 낯선 이국땅에 찾아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열방을 품은 주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조선 선교사로 파송되어 제일 먼저 도착하는 선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우리나라에 갑신정변이 일어나면서 그는 즉시 선교부의 편지를 받고 일본에서 더욱 더 조선말을 배우며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나중에 파송을 받고 왔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1885년 4월 5일 입국하게 되면서 그는 바로 뒷배로 조선땅에 입국하게 됩니다(1885년 6월 21일).

 

최초 조선 선교사의 영예 -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 열전 (1885년 4월 5일)

▷ Underwood

언더우드 선교사님이 신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1883년 신학교 연맹 모임에서 조선 민족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지금 조선은 천삼백만 민족이 복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채, 가난과 질병과 학대 속에서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그 나라가 드디어 작년에 문호를 열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 중에 누군가가 조선 민족을 위해 선교사로 갈 것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알버트 목사님의 호소력 있는 메시지는 많은 신학생들에게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언더우드는 그 당시 인도 선교사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선교에 대한 강한 도전을 받았으나, 조선으로 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인도로 선교사로 가기 위해 인도말을 자유롭게 구사할 정도로 잘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알버트 목사님의 조선 선교의 권유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언더우드는 개인적으로 친구들에게도 권유해 보기도 했지만 그들은 다 국내에서만 사역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왜들 이럴까? 헌신을 맹세한 사람들이 왜들 다 미온적이고 부정적일까? 복음의 처녀지, 주님이 기다리시는 그 땅으로 갈 선교사가 이렇게도 없다는 말인가?’

그때 돌연히 강력한 반문의 소리가 그의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너는 왜 못 가느냐?”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나 자신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주님의 부르심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렇다 왜 나는 못 가는가?’ 그는 단 한 번도 복음을 못 들어본 미전도 종족인 조선민족에게 선교의 우선순위가 있다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 한 번의 희생을 치르기로 하였습니다. 그동안 인도를 위해 인도말을 배우고 준비해 놓은 것들을, 모두 조선 선교를 위해 포기하기로 한 것입니다. 어려운 결단을 하고 조선을 선교지로 정하고 나서 교회와 선교부에 조선 선교사로 가기로 요청을 하였지만, 두 번씩이나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조선 선교를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기도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장로교 본부회의에서 조선 선교사로 임명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미전도 종족인 우리 민족을 가슴에 품고 설레는 마음으로 장도의 길에 올랐습니다. 한 달 여 걸리는 긴 항해 끝에, 일본을 거쳐 1885년 4월 2일 부산 앞 바다에 잠시 정박하여 조선땅과 조선민족을 처음으로 바라보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후 부산을 떠나 삼일 후인 4월 5일에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날을 한국교회는 최초로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날로 정하였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17년 한국 기독교사의 멋진 장을 연 최초의 선교사가 되는 영예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시작으로 교회개척 사역을 하였고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시작으로 하는 교육사업을 통해서 한국의 젊은이들을 깨워나갔습니다. 그가 우리나라를 위해 이룬 업적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언더우드 같은 귀한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였고, 그 결과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살 수 있는 축복의 삶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 Appenzeller

아펜젤러 선교사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신학교연맹 모임에서 만나 아주 가깝게 지내면서 세계 선교의 꿈을 키워왔습니다. 그는 어느 날 미전도 종족인 조선민족에게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정보를 접하고, 자기의 삶을 조선민족을 위해 드리기로 결심하고 준비하다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던 것입니다. 도착하는 날,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여! 우리는 부활의 아침에 이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권세와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죽어가는 이 민족에게 빛을 비추소서.”

아펜젤러는 그의 기도대로 우리 민족을 위해 헌신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초창기 조선 선교의 장을 열면서, 교회사역과 학교사역을 통해 수많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는 자기를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든지 달려가서 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날도 아펜젤러 선교사는 집회를 위해 배를 타고 목포로 가고 있었습니다. 항해 도중 풍랑을 만나게 되는데, 타고 있던 배가 파선하게 됩니다. 그 때 조선 소녀 하나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본 아펜젤러 선교사는 즉시로 물에 뛰어내려 그 소녀를 구해줍니다. 그가 소녀를 건지고 힘이 빠져 지친 상태로 겨우 배에 매달려 있을 때, 다시 큰 파도가 덮치면서 파도에 휩쓸리어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40세의 짧은 생. 마지막까지 조선 소녀 한 생명을 건지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우리 민족을 사랑했던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20대 후반과 30대의 황금기를 조선을 위해 바치고 가셨습니다. 그가 세운 교회는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인 정동교회이고, 그가 세운 학교는 긴 역사를 자랑하여 수많은 인제를 배출한 배제 중고등학교입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순교하였지만 그가 하고 있었던 선교 사역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딸 엘리스는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 아이였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라면서, 조선을 이해하고 자기가 조선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을 알았습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온 엘리스는 이 땅의 여성교육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아버지의 뒤를 이었습니다. 이화여대 학장을 지내면서, 지금 신촌의 이화여대 학교부지와 건물을 세우는데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이대 최초 한국인 학장인 김활란 여사에게 학장직을 넘겨주기까지 수많은 여성 지도자를 배출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아들 헨리 다지는 14세 때 아버지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하나님까지 원망하며 방황하는 시절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철이 들어 하나님의 마음과 아버지의 조선 사랑하는 가슴을 깨닫고 조선 선교사로 파송받아, 아버지가 세운 배재 중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자신의 삶을 우리 민족을 위해 드리게 됩니다. 그는 6. 25 전쟁 때 우리 민족을 위해 세계 많은 국가와 교회에게 우리 민족의 안타까운 실정을 전해 주면서, 춥고 배고픈 이 민족에게 수많은 구호물품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헨리 다지 아펜젤러 선교사는 아버지가 못 다한 그 사역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그가 병들어 미국으로 치료차 가면서 “내가 죽으면 절대로 미국에 묻지 말고 조선땅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하였습니다. 그는 간절히 조선에 묻히기를 원했는데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의 소식을 접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좋은 일하러 가신 우리 아버지를 죽일 수 있느냐고? 하나님까지 원망하며 지낸 사춘기 시절이 있었기에 더욱 더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또한 조선에 머물며 선교사역을 하면서 존 헤론의 죽음으로 얻게 된 땅,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선교사님들이 묻힐 때마다 오게 되면서, 사랑하는 자기 아버지 아펜젤러 선교사를 생각하였습니다. 다른 선교사님은 무덤이라도 있는데 자기 아버지는 목포 앞바다에서 실종되어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무덤도 없는 것을 마음 아파하고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죽으면 자기를 꼭 한국땅에 묻어줄 것을 부탁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유언 중에 이런 유언이 있습니다. “나를 한국 땅에 묻어 주고,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조선 사람을 사랑하였는지, 조선 사람으로 알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지금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그의 무덤 바로 옆에는 아펜젤러 선교사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그의 맞은편에는 1950년 이대 강단에서 설교하다 순교한 그의 누님, 엘리스가 묻혀있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님 가족의 숭고한 희생의 삶은 우리 민족에게 큰 빛이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생명을 얻게 된 것은 이런 선교사님들의 희생의 삶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아멘.

 

미션 스테이션 (Mission Station) - 평양

▷ William James Hall Family 선교사 열전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와 로제타 선교사님의 한국 사랑이야기를 통해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로제타 선교사는 한국에 여자 의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정보를 듣고, 조선에 선교사로 가기 위하여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병원실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고,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는 로제타의 미모와 성품과 성실성에 반해 한평생 함께 사역하기를 원하여 프로포즈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로제타는 그 프로포즈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윌리엄 선교사는 이미 중국 선교사로 가기로 내정되어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로제타도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를 좋아하고 있었지만,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선에 오기 위하여 윌리엄의 프로포즈를 거절하고 한국에 처녀의 몸으로 혼자 들어옵니다.

윌리엄은 로제타가 조선을 향해 떠난 후, 어쩔 줄을 몰라 하다 결국 선교부에 찾아가 “저 선교지를 바꿔 주시면 안되나요?” 우여곡절 끝에 결국 윌리엄은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1891년 12월 한국 땅에 오게 됩니다. 그들은 벙커 선교사의 주례로 1892년 6월 21일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 결혼식이 한국 최초의 서양식 결혼식이 되었습니다.

닥터 홀 선교사는 평양선교를 위해 개척 책임자로 임명되어 평양선교를 시작하게 됩니다. 첫 아들 셔우드 홀이 태어난 그 다음해 매켄지 목사와 함께 평양으로 들어갔습니다. 현, 서울 광성고등학교의 모교인 광성학당을 시작하면서 교육사역과 병원사역을 하면서 평양에 있는 조선인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해 7월에 일어난 청일전쟁으로 평양은 전쟁터가 되었고, 닥터 홀 선교사님은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을 치료하다가 자신이 병에 감염되게 되었습니다.

일본군 패잔병과 함께 서울에 도착한 홀은 로제타와 아들 셔우드 홀의 손을 붙잡고 마지막 기도와 유언을 하고 끝내 숨을 거두게 됩니다. 한국에 온지 2년 만에 그는 한국땅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양화진 존 해론의 묘 옆에 묻혀있습니다. 홀이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로제타 선교사는 수많은 위로의 편지를 받게 되는데, 그 중 홀의 여동생이 보낸 편지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내 사랑하는 오빠가 발진디푸스의 열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는 믿겨지지가 않았습니다. 아마 어떤 실수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언니의 편지를 받고 우리의 희망을 사라졌어요. 언니는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고, 나는 사랑하는 오빠를 잃었어요. 우리는 모두 어머님을 제외하고 매우 건강하답니다. 어머니는 윌리엄 제임스 오빠의 죽음을 매우 힘들게 받아들이고 계셔요. 언니는 집으로 오려고 생각하고 있는지요? 우리는 사랑하는 어린 셔우드 홀을 보기를 원하고 있답니다.”

로제타는 어린 아들 셔우드를 대리고 임신 말기에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낳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귀여운 딸 에디스가 태어나게 되었고, 얼마 후 윌리엄 제임스 홀의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제임스 홀의 모습을 닮은 셔우드 홀과 딸 에디스를 본 모든 교우들은 눈물로 그들을 반겼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로제타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네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이 이루지 못한 조선 사랑을 네가 이루어라.” 로제타는 아들과 딸을 데리고 다시 조선으로 왔습니다. 조선에 오자 얼마 되지 않아 사랑하는 딸이 또 한국의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그 딸을 남편 묘 옆에 묻으면서 다시 한 번 결심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내 아들 셔우드 홀과 한국에서 오랫동안 사역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로제타 선교사는 남편과 딸을 잃었지만, 어린 셔우드를 키우면서 조선사랑을 실천해 나갔습니다. 그는 평양에 홀 기념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또한 여자환자를 위한 광혜원을 개원하였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병원을 개원하여 맹인소녀들에게 점자를 교육하면서 한국 최초의 맹인학교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후에 맹인학교를 확충하여 농아교육도 시작하였습니다.

박점동이라는 한국 여자분을 유학시켜 한국 최초의 여의사를 만들었으며, 지금 서울 동대문 옆 이화여대부속병원이 로제타가 세운 병원이며, 서울에 경성여자 의학 전문학교를 설립하게 되는데 그 병원이 지금의 고려 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이 되었습니다. 또한 인천에 간호대학과 인천의 기독병원이 모두 로제타가 세운 병원입니다.

43년간의 한국 사역을 통해 하나님은 큰일을 이루셨습니다. 미국은 그의 사역을 인정하였고, 로제타 선교사는 미국이 뽑은 200대 여인의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면서, 양화진 땅 남편과 딸이 묻혀있는 곳에 함께 안장되었습니다.

아들 셔우드 홀도 부모님의 조선 사랑을 이어갔습니다. 16세가 되면서는 선교사님의 연립주택을 지어주면서 아르바이트를 하였고,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내면서 누구보다도 정들었던 박에스더라는 최초의 한국 여의사가 결핵으로 숨지게 되자, 큰 쇼크를 받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가 된 셔우드 홀은 결혼하여 부인 메리안과 다시 한국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는 한국 최초로 결핵협회를 창설하였고,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실을 만들어 판매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조선 사랑을 이어가던 셔우드 홀에게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일본과 미국의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정부는 셔우드 홀을 헌병대에 연행하고 재판에서 징역 3년과 5000엔 벌금형을 내렸습니다. 셔우드 홀은 가재도구와 집을 팔아 끝까지 한국에 남아있기를 원했으나, 결국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셔우드 홀 부부는 선교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쫓겨난 셔우드 홀 부부는 인도로 건너가 마지막 힘을 다해 선교에 힘을 쏟았습니다.

은퇴하여 캐나다에서 쉬고 있던 어느 날, 그는 한국에서 온 편지를 받았습니다. 결핵협회와 아버지가 세운 광성고등학교에서 보내 온 초청장이었습니다. 91세의 나이로 사랑하는 한국땅을 밟은 셔우드 홀 부부의 감회는 남달랐습니다. 그는 양화진에 묻혀있는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의 묘를 방문하고, 광성고등학교 예배시간에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유언을 남깁니다. “I’m still love Korea. 저는 여전히 한국을 사랑합니다. 제가 죽거든 나를 절대로 미국이나 캐나다 땅에 묻지 마시고, 내가 태어나서 자랐던 사랑하는 이 나라, 또한 내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누이동생이 잠들어 있는 한국땅에 묻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9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그의 부인과 함께 아버지인 윌리엄 제임스 홀과 어머니인 로제타, 동생 에디스와 함께 양화진 땅에 묻혀있습니다.

"선교는 사랑입니다.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Ruby Kendrick)

 

결론

미전도 종족이 하나님께 돌아오려면, 먼저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반응이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먼저 믿었던 그리스도인들의 반응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총체적 선교 (Wholistic Mission) 반응

1) 기도의 반응
2) 물질의 반응
3) 선교사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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