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8/23) 교갱협 제11차 영성수련회 저녁집회

역대하 7:1~3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므로 제사장이 그 전에 능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모든 자손은 불이 내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있는 것을 보고 박석 깐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니라"

 

1. 한국교회 개혁의 원리

최근의 기업경영의 최대의 관심은 변화와 구조조정이란 시대적 과제이다. 무한경쟁시대라는 기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하고 세계무역기구(WTO)라는 세계상권의 적응을 위하여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새로운 구조조정으로 경쟁력을 키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구조조정과 함께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리엔지니어링(Re-engineering)이다. 리엔지니어링이란 기업의 완전한 새로운 경영혁신을 통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것을 의미한다. 구조조정이 ‘무엇을 하느냐(what to do)’를 해결하는 것이라면 리엔지니어링이란 ‘어떻게 하느냐(how to do)’를 해결하는 것이다.

구조조정을 통한 새로운 경영방식은 적은 인원으로도 같은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경영방식은 기업에 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효율적 인력관리와 재정관리 그리고 나아가서 효과적인 복음전파를 위하여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효율적인 목회와 급변하는 시대변화에 복음전파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목회 구조의 개혁이 필수적인 것이다.

위와 같은 구조조정의 원리만으로 교회의 구조를 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구조조정은 성경적 원리에 따라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조조정의 원리를 예수께서 성전을 숙정하신 사건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예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사건은 공관복음서에는 무화과를 저주하신 사건과 병행한다. 성전을 깨끗케 하신 이유는 성전 안에 없어야 할 것이 너무 많이 있었기 때문이며 무화과를 저주하신 이유는 있어야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전을 깨끗케 하신 사건은 성전의 개혁을 의미하며 오늘날의 교회 개혁을 당시의 성전의 개혁에서 유추하려고 한다.

첫째, 예수께서 성전을 숙정하신 것은 성전의 상업주의를 배격하신 것이다. 레위법전에 의하면 제사용의 물건을 팔고 성전세로 바칠 돈을 바꾸게 하였는데 성전 안에서 상업행위가 행해진 것이 문제이다. 처음에는 성전 밖에서 하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성전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생활을 혐오하면서도 배운 것은 애굽의 우상숭배였다.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간 사이에 아론과 백성들은 “우리를 이끌 신을 만들자”라고 한다. 그들을 이끈 신은 하나님이 아닌 모세였다. 이것은 인본주의적 발상이다. 그리고 그들은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들을 이끌 신은 가장 비싼 금이어야 한다는 금본주의적 발상이다. 이러한 인본주의와 금본주의는 오늘날 우리 교회에 자리하고 있는 개혁의 대상이며 상업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둘째, 예수께서 보신 성전은 정교 혼합주의의 산물이었고 이것을 배격하신 것이다. 헤롯 성전은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 다음에 세워진 것으로 헤롯이 유대를 다스리기 위하여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성전을 완공하기 위하여 대제사장들은 헤롯에게 온갖 아양을 떨었고 헤롯의 물질과 정치가 종교와 혼합된 성전이었다. 세상의 물질과 정치가 교회와 야합될 때에 교회는 급속히 타락하게 되는 것이다. 혼합주의는 또 다른 세속주의를 낳는다.

셋째, 예수께서 성전을 숙정하신 것은 유대교의 교권주의에 대항하신 것이다. 당시의 대제사장들은 종교의 최고 지도자로서 세습적이었기 때문에 안일하고 권력만을 행사하고 권리 이상의 비리를 자행하였다.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성전 안에서 장사하도록 허락하였으며 제사법전에 의하여 상한 제물은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게 하였지만 성전 안에서 파는 상한 제물은 제물로 드리게 허락하였다. 하나님의 집을 자기 집처럼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하나님의 법을 자신의 이권으로 해석하는 교권이 남용되는 시대였다. 어느 시대든지 교권의 중요성은 인정되어야 하지만 교권주의가 되면 교회는 타락하였다.

넷째, 예수께서 성전을 숙정하신 또 다른 요인은 성전의 형식주의였다. 성전 주위에서 제물을 팔고 성전 세를 바꾸게 한 것은 나그네들이나 부득이 준비하지 못한 자들을 위한 배려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부득이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준비 없이 성전에 와서 적당히 제물을 사서 바치게 되었다. 이런 형식주의는 제사장들과 장사꾼들이 제도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내용과 정성보다는 제물을 드리고 성전에 왔다는 형식으로 만족하는 제사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이런 내용 없는 형식주의는 지금도 교회 안에 잔재한 개혁의 대상 중의 하나이다.

이런 예수의 개혁 원리는 지금도 교회 개혁의 중요한 원리이며 교회가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논할 때에 구조조정의 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 목회자의 자기 갱신의 원리

목회자의 자기 갱신은 절실한 시대적 요구이다. 목회자로서의 자기 갱신의 모델을 광야에서 지도자의 선출 자격에서 얻으려고 한다. 모세가 아침부터 밤까지 혼자서 출애굽의 백성들을 재판하고 있을 때에 장인 이드로가 모세를 방문하여 “선하지 못하다”고 하면서 백성들 가운데서 지도자를 선출할 것을 제안하였다. 모세는 이드로의 제안을 흔쾌하게 수용하였다. 이드로가 제안하는 대로 모세는 백성들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출18:21) 삼게 하였다. 이들이 모세를 도와 백성들을 치리할 중간 지도자들이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다”는 것은 영성적인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속성과 존재를 아는 것을 의미한다. 초대교회는 신자를 여러 단계로 구분하였다. 신자의 가장 어린 첫 단계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God Fearer)라고 불렀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신앙의 첫 단계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존재를 인정하다는 의미에서 영성적 기준을 상징한다.

“진실하다”는 것은 지도자의 도덕적 성숙을 의미한다. 진실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거짓이 없이 바르고 참됨을 뜻한다. 하나님의 사람의 자격이 진실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거짓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증인들은 법정에서 “진실을 말하고 진실대로 말하며 오직 진실만을 말할 것”을 선서한다. 증인의 본분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증인의 삶이므로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특히 광야교회의 일꾼들은 보고 들은 그대로 판단해야 하며 진실을 호도하거나 부풀려서는 안 된다. 어윈 로처의 말처럼 진실의 바람이 조금만 불어와도 이런 거짓의 집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진실을 요구한 것은 광야교회 지도자의 도덕적 기준을 상징한다.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란 뇌물을 받지 않는 도덕적 완벽한 자를 의미한다. 뇌물은 공무원 또는 중재인이 직무에 관하여 수수하는 불법한 보수를 말한다. 뇌물은 지도자의 판단을 흐리게 할 뿐만 아니라 지도자의 인격을 말살한다. 예나 지금이나 뇌물이란 공직의 파멸을 의미하며 신뢰성의 추락을 의미하였다. 뇌물은 인류의 오랜 관행으로서 뇌물 공여는 부정과 부패의 기준이 되었다.

1997년 12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각료급 회의에서 통과된 국제 상거래상의 외국 공무원에 대한 뇌물제공 방지를 위한 협약으로 ‘국제 상거래에서 외국 공무원에 대한 뇌물제공 방지를 위한 협약’(Convention on Combating Bribery of Foreign Public Officials in International Business Transactions)을 채결하였다. 세계투명성기구(TI)에서는 격년제로 ‘뇌물공여지수’(bribe payers index)를 발표하여 국가별 부패지수를 나타내기도 한다. 광야교회나 현대 사회에서 뇌물이란 인간사에서 그 고리를 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은 광야교회 지도자의 도덕적 기준을 정한 것이다. 광야교회의 지도자의 자격은 영성과 도덕성에 집중되어 있다.

이런 광야교회 지도자의 자격인 영성과 도덕성은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초대교회의 첫 지도자는 일곱 집사였다. 사도들은 일곱 사람을 세워 자신들의 사역의 한 부분이었던 구제하는 일을 분담하였다. 사도들은 회중에게 일곱 사람의 자격을 제시하였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자”라는 자격이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란 말은 영성적인 사람을 의미한다. “칭찬 듣는 자”란 도덕적인 사람을 의미한다. 신약의 초대교회 지도자의 자격도 영성과 도덕성에 집중되어 있다. 광야교회 지도자의 자격은 초대교회에서도 여전히 요청되는 자격이었다.

또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지도자의 자격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이 있다. 광야교회 지도자의 자격은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라고 한다. 이런 자격을 가진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우게 하였다. 성경은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의 자격이 동일함을 가르친다. 개인의 능력의 차이는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영성적, 도덕적 자격은 천부장과 십부장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현대 교회는 목사와 장로와 권사와 집사와 서리 집사의 자격이 각각 다르다. 목사는 그 자격이 더 엄격하고, 서리집사의 자격은 덜 엄격하다. 목사의 영성과 도덕성은 그 기준이 높고, 서리집사의 영성과 도덕성의 기준은 낮아도 관계없다. 현대 교회의 이러한 인간적 자격과 기준은 성경의 그 것과는 거리가 있다. 목사와 평신도의 지적 능력이나 신학 수업 등의 자격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영성적 도덕적 기준은 똑같이 요청되는 성경적 자격이다. 교회 지도자는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스스로가 엄격하게 날을 세우듯 세워나가며 잘 보존해 나가야 할 것이다. 조지 바나는 “미국의 대부분의 교회에는 목사는 있지만 지도자는 없다”고 하였다. 지도자는 이 말의 의미를 귀담아 듣고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목회자의 자기 갱신은 끊임없이 자신의 초기 소명으로 돌아가 부르심의 뜻을 회복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목회자의 자격은 영성과 도덕성이다. 자신의 영성과 도덕성을 회복하고 향상하는데 힘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갱신은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과 도덕성의 회복이야말로 자기 갱신의 방법이다.

 

3. 목회자의 자기 갱신의 내용

자기 갱신의 내용은 여러 해 전 경험한 수도원의 삶을 통하여 풀어보려고 한다.

첫째는 수도사들의 서원을 통하여 목회자의 자기 갱신의 내용을 찾고자 한다. 우선 수도사들은 수도사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서원(Monastic vows)을 한다. 수도사의 세 가지 서약은 가난(poverty), 순결(Chastity) 그리고 순종(Obedience)이다. 수도사들은 자신이 수도사가 될 때에 하나님께 서약한 수도사의 서약을 목숨처럼 지키고 매일 다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 수도사가 될 때에 하는 서원을 평생 매일 아침 기도회마다 반복한다. 이것을 수도사들은 ‘영속적 회심’ (perpetual conversion)이라고 한다. 한 번의 회심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속적 회심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1) 가난 : 가난은 수도사들의 서원이라기보다 삶이다. 수도원에서는 사유재산을 허락하지 않고 필요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한다. 모든 것을 공급하기에 그 이상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가난할 수 있다. 수도사들의 가난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오로지 그분만을 찬양하기 위한 인간의 봉헌에 있다. 물질적인 욕망에서부터 이탈하고 초월할 때에 가난은 닫혀진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나라를 그 마음에 건설한다.

가난은 그리스도인에게 벗어남이며 나눔이다. 그리고 가난은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노력이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가난은 두 가지 모습이다. 하나는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이 모든 것을 아버지께로 돌려드렸다는 것이다.

진정한 가난은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며, 나를 위해 가지지 않고 남을 위해 가지는 것이다. 가난은 포기함으로 얻는 풍요함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가난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심적인 것이다.

목회자들도 현대의 상업주의와 유행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상업주의는 유행을 만들어낸다. 유행이란 현대인이 가장 벗어나기 힘든 병이다. 유행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것은 가장 큰 자유이다. 사막의 수도사인 카를로 카레토는 “마음으로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유행이라 불리는 것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가난의 정신은 자유다”라고 하였다.

아무 것도 내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가난은 시작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믿는 것이 영적 가난이다. 수도사들이 그리스도를 따른 날부터 자신의 것이라고는 없다. 목회자의 삶도 그리스도를 따른 날부터 자신의 것이라고는 없다. 목회자로서의 삶의 시작은 가난의 시작이다.

(2) 순결 : 수도사들은 순결한 삶을 산다. 이들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도사가 되어 평생을 순결을 지키며 산다. 이들의 순결은 영적인 순결뿐만 아니라 육체적 순결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다(마 19:12). 수도사들에게 순결이란 하나님 나라를 위한 또 하나의 은총이다. 순결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육체적 깨끗함을 지킨다는 의미보다는 봉사와 헌신에 진정한 의미를 두고 있다. 깨끗한 삶이란 이들이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절제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이다. 그리스도인의 미덕과 윤리의 표현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사람을 지상의 일로부터 위로 올라가게 하는 날개가 둘이 있으니 단순함과 순결함이라고 한다. 우리의 목적은 반드시 단순해야 하고 감정은 반드시 순결해야 한다. 단순함은 하나님을 좇아 닿게 하고 순결함은 그 분을 찾아내어 기뻐하게 한다고 한다. 우리가 무절제한 욕망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된다면 하는 모든 일이 선행이 될 것이라고 한다. 순결한 마음은 하나님과 세상을 모두 바르게 볼 수 있다.

순결이란 성을 멸시하거나 혐오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사랑을 위하여 인간적인 사랑을 절제하는 것이다. 순결의 삶은 성령 안에서 힘을 얻는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순결의 덕은 동정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봉헌되었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순결의 첫째 조건은 마음이며 이러한 마음이 결정적으로 순결의 덕을 보호한다. 육체는 순결해도 얼마든지 마음이 불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결은 신앙이며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정절이다. 마음을 한 곳에 정한 것이며 세상의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이다. 순결은 도덕이다. 순결은 배우자에 대한 정절이다. 배우자와의 한 번의 약속은 영원한 약속이 되게 하는 것이다. 순결은 책임이다. 순결은 배우자에 대한 책임이다. 부부의 순결이란 두 사람 사이의 최소한의 책임이다. 가장 기본적인 배우자에 대한 사랑이다. 마찬가지로 순결은 하나님께 대한 책임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최소한의 책임이다.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다. 하나님 외의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자세이다.

찰스 스탠리는 ‘깨끗한 영혼으로의 초대’에서 금식의 특별한 목적을 설명한다. 첫째, 하나님은 금식을 통하여 우리를 준비시키신다. 금식은 세상이 우리에게 미칠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을 차단하여 외부의 방해 없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 준다. 둘째, 금식을 통해 우리 자신이 깨끗해진다. 불순물들을 제거함으로 육적인 순결함을 얻을 수 있다. 셋째, 금식을 통해 사단과의 영적인 싸움에 대비할 수 있다. 금식은 순결의 한 방편인 것을 그는 일러주고 있다.

(3) 순종 :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신학사상에서 수도서원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것은 순종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순종이란 인간의 의지, 의향, 생각 등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순결도 몸과 마음을 다 바쳐야 하기에 어렵지만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바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물질에서 초월하여 가난하게 살고, 육체를 올바르게 사용하고 헌신하며, 마음과 뜻을 온전히 봉헌하는 것이다.

수도사들의 순종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수도원을 규율을 위한 수도원장에 대한 순종과 규칙, 공동체, 교회 등에 대한 순종이다. 수도 규칙에는 수도사들은 온전히 겸손한 복종심을 가지고 의견을 제출해야 하며 자기 의견을 거만하게 주장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결정권은 원장에게 달려 있으니 그가 더욱 유익하다고 판단하는 바에 모든 이들은 순종할 것이라고 한다.

순종이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방법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자세가 순종이다.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존경의 표시이다.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희생이다. 순종은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의 덕이며 진리를 추구하는 방편이다. 순종은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치는 봉헌이며 헌신이다. 그리스도인은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를 수 있는 자유를 누린다. 순종하는 만큼 그리스도인은 자유하다.

순종은 가장 확실하다. 순종은 하나님의 확실성을 인정하는 일이다. 순종하는 자에게는 불확실성이나 모호함이 있을 수 없다. 순종은 인간에게 가장 편한 길이다. 순종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자인 하나님께 대한 바른 태도이다. 어쩌면 당연한 것을 인간은 거부하고 산다. 어쩌면 당연한 것을 목회자들은 매일 아침 되새기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둘째는 수도사들의 일과를 통하여 목회자들의 자기 갱신의 내용을 찾고자 한다. 수도사들의 일과, 그들이 말하는 성무일과는 단순하기 그지없다. 매일 반복되는 일과는 그들의 영적 삶을 풍성하게 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하며, 헌신된 자의 자세를 가다듬게 만드는 것이다. 수도사들의 일과는 세 가지이다. 기도와 학습과 노동이다. 이 세 가지는 우리 목회자들에게도 일과가 되어야 하며, 이 일과를 되찾는 것이 자기 갱신의 내용이라고 본다.

(1) 기도 : 수도원은 새벽 종소리로 깬다. 새벽 종소리는 아침 기도를 알리는 소리이다. 새벽을 깨우는 종소리는 잠든 이들의 영혼을 깨우는 소리이다. 아침 기도회는 2시간 동안 진행된다. 아침 기도회 시간을 ‘살무스’라 부른다. 살무스란 시편이란 뜻이다. 아침 기도회는 시편 낭송으로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기도의 내용이다.

아침 기도회는 네 부분으로 나뉘어 첫째 부분은 출애굽기 15장을 낭송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한다. 둘째 부분은 시편 135편을 낭송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송축한다.  셋째 부분은 외경 다니엘서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불풀무에서 구원받은 것을 노래한다. 그리고 넷째 부분은 시편 148편, 149편, 150편을 차례로 낭송하면서 할렐루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수도원에서의 기도는 하루에 일곱 번 계속된다. 아침기도, 제1시 기도, 제3시 기도, 제 6시 기도, 제 9시 기도, 저녁기도, 끝기도로 하루의 기도가 진행된다.

기도는 정말 힘든 일이다. 수도원장 아가토는 이렇게 선포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만큼 중노동은 없다. 인간이 종교생활 중 수행하는 다른 모든 수고에는(아무리 간절하고 충실히 지속하는 것일지라도) 어느 정도 쉼이 있다. 그러나 기도는 마지막 호흡까지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노동이다”.

고통은 기도의 영을 일깨워준다. 기도는 영적 전쟁이다. 기도 시간은 목회자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고난이 심할수록 기도는 영을 활짝 깨어나게 한다. 수도사들의 기도는 청원이 없다. 단지 찬양과 감사로 단순한 기도를 드린다. 창조와 구원을 찬양하는 기도가 가장 힘있는 기도이다.

한국교회는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 다시 40일 특별새벽기도회 등 기도가 살아나는 것은 희망이다. 기도는 희망의 나팔이다. 기도는 시작은 있지만 기도의 마침은 없다. 기도는 마음 없는 말보다 말없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목회자의 기도의 회복은 한국교회의 회복을 촉진할 것이다. 캘빈 밀러는 “기도는 아침을 여는 열쇠이며 저녁을 닫는 빗장입니다”라고 하였다. 기도가 없는 삶은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는다. 목회자의 삶은 기도만이 열고 기도만이 닫는 삶이다.

(2) 학습 : 수도원에서는 기도와 학습을 동시에 강조하며 같은 무게를 두고 있다. 특별히 수도사들은 개인의 독서와 시편의 공부에 전념하라고 권한다. 사순절 기간에는 책을 나누어주어 읽게 하였습니다. 지금도 이들에게 일과의 많은 부분은 독서이다. 식사 시간과 노동 시간을 제외한 시간은 거의 자신의 셀(수도사들의 독방)에서 독서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 수도사들의 독서는 신학과 영성에 관련된 책들에 집중되어 있다.

오래 전 수도원에서는 수도사들이 독서에 전념하고 있는지 감독하게 하였다. 수도규칙에는 형제들이 독서에 전념하고 있는 시간에 한두 사람의 연장자들에게 책임을 맡겨 수도원을 돌아다니게 하여 혹시라도 한가함이나 잡담에 빠져 독서에 힘쓰지 않음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무익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방해가 되는 게으른 형제가 있는지 살피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

교회의 전통에서 말하는 상상력에 의한 기도는 처음부터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와 관련이 있다. 기도와 독서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일 수 있다. 그래서 수도사들은 항상 거룩한 독서를 지향한다. 거룩하지 못한 독서가 영혼을 병들게 하기 때문이다. 상상력의 기도는 성경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항상 거룩한 독서와 함께 하는 것이다. 수도사들의 독서는 성경과 영성적인 책에 제한되어 있다.

교회의 전통에서 말하는 거룩한 독서란 말씀을 묵상하는 단계를 통하여 말씀이 삶이 되게 하는 것이다. 성경 말씀은 거룩하며 읽는 일은 거룩한 독서이다. 성경 말씀을 묵상하는 방법은 네 단계를 거친다. 첫째는 읽기(Lectio)이다. 둘째는 묵상(Meditatio)이다. 셋째는 기도(Oratio)이다. 그리고 넷째는 관상(Contemplatio)이다.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독서는 성경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을 사는 지혜를 주는 신문이 필요하다. 영혼을 맑게 하고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책이 필요하다. 리처드 포스터는 “묵상은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가지고 있을 때 가장 잘할 수 있다”고 한다. 칼 바르트도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신문”이라고 하였다. 세상을 사는 지혜는 반드시 글로 씌어진 책이 아닐 수도 있다. 존 스토트는 하나님은 두 권의 책을 쓰셨는데 하나는 성경이고, 또 하나는 자연의 책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의 독서는 지성의 행위만 아니라 영성과 인격의 행위이어야 한다. 이렇게 될 때에 독서는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는 행위가 된다. 특히 영적 지도자에게 독서는 필수적인 행위이다. 지도자는 독서를 통하여 영성과 인격을 향상시켜야 한다. 하워드 헨드릭스 박사는 “독서가는 리더요 리더는 독서가이다”(Readers are leaders and leaders are readers)라고 하였다. 책을 읽지 않는 리더는 없다. 목회자는 영적 지도자로서 학습의 습관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3) 노동 : 수도원의 하루 일과인 기도와 학습과 노동, 이 세 가지는 엄밀하게 구분하기 힘들만큼 수도사들에게는 하나의 일과이다. 기도와 학습이 별개가 아니듯이 기도와 노동도 별개가 아니다. 학습과 노동도 물론 별개가 아니다. 그들은 매일 짜여진 일과 가운데서 이 세 가지를 통하여 수도사의 영성을 키워가고 있다.

수도사들의 노동의 이유는 잡념을 없이하고 수도에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수도교칙에는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은 정해진 시간에 육체노동을 하고 또 정해진 시간에 성독(聖讀)을 할 것이다”라고 규정한다. 수도사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수련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기도와 노동이다. 노동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만난다. 노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신 강원도 태백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님은 “노동이 곧 기도이다”라고 늘 말씀하셨다. 기도가 아닌 노동은 문자 그대로 노동에 불과하다. 기도인 노동은 노동이 아니라 기도이다.

카를로 카레토의 말처럼 노동자는 자신의 일에 있어서 사제이다. 모든 노동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노동자는 자신의 일을 하나님의 일처럼 해야 한다. 자신의 노동은 하나님의 소명이다. 그러므로 모든 노동자는 소명자이며 사제이다. 하나님의 일처럼 자신의 일을 하고, 하나님을 대하듯이 모든 사람을 대해야 한다.

인간에게 노동은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이다. 노동을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한다. 노동은 그 자체가 신성한 것이다. 노동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신적 명령이다. 노동은 단순한 삶의 수단이 아니라 삶의 의미이기도 하다. 노동은 그 자체가 은총이며 영성의 훈련이다.

성경은 노동을 장려한다. 하나님은 일하셨고 지금도 일하시고 예수님도 일하셨다. 인간이 타락과 더불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은 노동이었다. 성경은 게으른 것을 멸시하였으며 부지런한 것을 칭찬한다. 성경이 말하는 노동은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라 부지런히 감사함으로 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창조의 생리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명령하신다. “엿새 동안은 부지런히 일하고 일곱째 날은 쉬어라”. 이 말은 다양한 의미를 부여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divine mandate)이다.

(1) 근면한 노동을 하라는 명령이다.
(2) 반드시 안식하라는 명령이다.
(3) 부지런히 일한 사람이 안식할 자격이 있다.
(4) 일주일에 하루만 안식해도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할 수 있다.

노동은 그 자체가 은총이다. 노동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이다. 땅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기경한다. 채소를 제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가꾼다. 열매를 따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진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노동은 모든 이들에게 삶이며 기쁨이다. 목회자의 노동은 이미 대가를 받고 있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4. 목회자의 자기 갱신의 훈련

모던시대가 개미사회라면 포스트모던 시대는 거미사회이다. 거미는 거미줄을 친 다음에 항상 가장 중심의 자리를 차지한다. 거미사회는 모든 사람이 자기중심적인 사회이다. 거미사회의 리더십의 형태는 이전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어야 한다. 모두가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기에 한 사람이 모두를 이끌어간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시대에는 남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결같이 말한다. 이것을 ‘셀프 리더십’이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셀프 매니지먼트’도 발달한다. 현대는 ‘셀프’시대이다. 자신을 리드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힘이다. 목회자는 힘이 있어야 자신을 이끌 것이고, 자신을 이끄는 힘이 추종자들을 이끌게 될 것이다. 추종자를 이끌기 전에 자신을 이끌기 위한 자기 갱신의 훈련은 세 가지 힘 즉 영력, 지력 그리고 체력이다.

(1) 영력 : 영력은 미래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기 갱신이며 셀프 리더십이다. 목회자는 누구에게나 영성적 힘이 필요하다. 특히 영성 시대인 21세기에는 목회자의 영성적 힘을 요하고 있다. 교회도 이제는 교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제공해 주느냐 라고 하는 생존의 방식에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이전의 교회와 같이 문만 열면 교인들이 몰려들고 한마디만 하면 새 신자들이 등록하는 시대가 아니라 기존의 교인들도 새로운 고품질의 설교를 원하고 신선한 교회의 프로그램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는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는 설교와 프로그램을 개발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교회의 목회 패러다임의 변화는 결국 영성적으로 회귀하는 운동이다.

(2) 지력 : 지력은 학습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자기 갱신의 방법이다. 성경은 지력을 강조한다. 배우기를 힘쓰라고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적 세상이다. 엄청난 양의 지식이 팽창하고 있다. 정보사회는 물리적 힘이 아니라 정보의 힘, 지식의 힘이 세계를 지배한다. 이제는 물리적 힘이란 정보의 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사회의 변화는 이러한 힘의 변화의 직접적 요인이 되었다. 더구나 근대 이후의 사회는 지식사회이다. 지식은 지도자의 필수 요건이며 힘이다.

(3) 체력 : 목회자는 자기 갱신을 위하여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목회와 공부와 운동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목회는 공부하는 자세로 하고, 공부는 목회하는 자세로 해야 한다. 나아가서 운동도 목회하는 자세로 해야 한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운동이란 여가 활동이 아니라 목회의 한 부분이며 삶이다.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을 위한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체력이 약해지면 영력도 지력도 다 무력하게 된다.

성경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한다.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랑은 구원의 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중에 제일은 믿음이라고 하지 않고 사랑이라고 한다. 이미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사랑이 제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인 것이다. “영력, 지력, 체력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체력이다.” 많은 목회자는 제일은 영력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는 체력이다. 목회자에게 영력은 기본이어야 한다. 그래서 목회자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체력이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교갱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