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8/23) 교갱협 제11차 영성수련회 선택특강

들어가는 말

본인이 현재 성덕중앙교회의 담임으로 부임한 1994년 7월 당시의 교회 분위기는 대단히 어수선하였다. ‘사고’로 제법 심한 분쟁을 거쳐 담임목사가 사임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장년 350여 명, 중고등부 이하 학생 150여 명이 출석하고 있었는데, 아파트 단지 내 상가 3층(150여 평)에 위치하고 있었다. 1994년은 1977년도에 강북구 수유리에서 창립한 성덕중앙교회가 노원구의 개발과 함께 동 상가에 입주한 지 6년 째 되는 해였다. 신도시의 특성상 갑자기 불어나는 새 교우의 숫자에 비해 교역자 수가 턱 없이 적었고(담임목사에 심방여전도사 두 명, 파트타임 남전도사 한 명), 따라서 양육이나 교제, 그리고 봉사 등에 거의 대책이 없었던 형편이었다. 주로 전도와 새 교우 중심의 단조롭고 편향적인 목회였으나 신도시의 부흥과 함께 교회는 들뜬 분위기에서 부흥을 맛보고 있었다. 그러나 담임목사와 장로들, 그리고 장로와 장로들 간의 분쟁으로 교회는 갑자기 큰 상처를 입고 몸살을 앓고 있었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교회 활성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서서히 치료하고 생기를 불어넣기에는 교회의 상처가 심각한 상태였다. 청년들은 거의 사라져버렸고, 중고등부 예배조차 따로 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새벽기도회는 열 댓 명, 수요 예배는 70여 명, 주일 밤 예배는 90여 명 정도 출석하고 있었다. 숫자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서로간의 신뢰가 깨어지고, 방향을 잃고, 비전도 목적도 없는, ‘생기를 잃은’교회의 참담한 분위기였다.

교회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본인이 선택한 첫째 작업은 ‘예배의 갱신’이었다. ‘예배를 바꾸면 교회가 바뀐다’는 확신을 갖고 예배를 갱신하기 시작했다. 물론 예배의 갱신은 오직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러나 본인이 본고에서 다루려는 것은 예배를 갱신하시는 성령님의 거룩한 일에 종으로 사용 받은 본인과 본 교회의 신나는 경험을 ‘간증’하려는 것이다.

우선 본인은 예배를 갱신하는 일에 다음 몇 가지 ‘방향’을 정했다. 첫째 똑같은 예배를 반복하지 않는다. 즉 주일 오전 예배와 밤 예배, 그리고 수요 예배를 각각 개성 있게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주일 오전은 성인 중심으로 드리는 ‘영광의 예배’, 주일 밤은 온 가족이 함께 드리는 세대통합예배인 ‘행복한 예배’, 그리고 수요일 밤은 교리나 시리즈 강의로 구성되는 ‘진리의 예배’가 그것이었다. 둘째 축제의 예배를 지향한다. 엄숙주의를 탈피하겠다는 뜻이었다. 셋째 현실에 뿌리를 내리는 예배를 지향한다. 현대의 문화와 예술을 예배에 적극 적용하고, 또한 현실의 문제를 진단하고 치료하고 예방하는 설교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넷째 합심 통성 기도 없는 예배는 드리지 않겠다. 기도를 무엇보다 중요한 예배로 삼겠다는 것이었고, 교우들로 하여금 매 예배 때마다 자신과 교회와 조국과 세계를 품고 열렬하게 기도하게 함으로써 실제 모두 그 기도의 내용 같은 인생들이 되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다섯째 세대 통합 예배를 만들겠다. 세대 차이는 옛날 사사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신앙계승에 실패한 주요 원인이었다(삿2:10). 우리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점점 ‘다음 세대’들이 교회를 찾지 않고, 또 ‘세대 통합’을 고려하지 않은 시스템으로 매 주일 이산가족이 되어야 하는 한국교회는 머지않아 옛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그 뼈아픈 고백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매 주일 밤 예배를 ‘세대 통합’예배로 만들기로 했다.

본 교회는 이상 다섯 가지 원칙을 방향 삼아 본인의 부임 후 즉시(6개월에서 9개월 안에 모든 예배를 새롭게 했다.) 예배 갱신을 시도했고 교회는 신속하게 상처에서 회복되고 활성화 되었다. 예배 갱신은 교회의 부흥에 결정적 역할을 했는데, 교인수가 두 배 넘게 성장한 것도 큰 열매였지만, 그것보다도 교회의 사역이 균형 잡히게 되었고, 세대 간의 거리가 한결 가까워져서 시골교회 같은 가족적 분위기를 갖게 되었다.

교회의 성장은 어린아이가 자라는 것과 똑 같다. 계속 건강하게 잘 자라야 하지만 때때로 사고와 질병 등에 위협을 받는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사고 질병 없이 자랄 수 있는 교회는 세상에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계속 활성화 되어야 한다. 양질의 말씀으로 양육할 뿐 아니라, 사고와 질병을 예방하고, 또 치료하며 계속 성령의 생기를 불어 넣어야 한다. 예배 갱신은 그러한 교회 활성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본다. 본인은 이제 다음의 차례대로 예배 갱신에 대한 성경적 원리를 살펴 본 다음 현재 12년 째 ‘온 가족 잔치’로 신나게 드리고 있는 주일 밤의 ‘세대 통합 예배’(행복한 예배)를 소개하려고 한다.

 

1. 한국교회 예배의 전통 : 세 가지 특징

허도화는 그의 책, ‘한국교회예배사’(서울: 한국강해설교학교출판부 2003)에서 한국교회 예배의 특징을 다음 세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 매우 단순한 형태를 갖는다. 이것은 선교 초기에 한국어가 서툰 선교사들이 예배를 인도해야 했고, 또 네비어스 정책에 따라 한국의 평신도들이 직접 예배를 인도해야 했던 상황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지금 중국의 조선족 가정교회들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100여 년이 지난 지금 되돌아보면 그런 단순한 예배 형태는 원래 우리 한국인의 민족성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초기 자료에 보면 한국인 목사들이 배출되면서 예전을 강화하려던 선교사들의 시도가 한국교회에 의해 번번히 거부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금의 예배도 초기 예배 형태에서 예전적 요소가 크게 발전하지 않은 것을 보면 확실히 우리는 단순한 것을 더 좋아한다는 확신이 든다.

둘째, 피선교지 예배의 특징인 구도자 지향성을 갖는다. 이것도 예배가 단순해야 했던 한 원인을 제공한다. 초기의 예배는 좀 더 빨리 좀 더 많은 회심자를 얻기 위한 전도설교 중심의 예배였다. 실용적인 미국교회의 예배보다도 훨씬 더 실용성을 띈다고 볼 수 있다. 오늘 날 한국 교회의 예배 형태는 구도자 지향적이었던 초대 교회의 예배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셋째, 성경 사경회와 새벽기도회의 영향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부흥회 형태를 갖는다. 이것 역시 앞의 두 가지 특징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그래서 긴 설교와 열정적인 기도, 그리고 은사 체험 등이 중심을 이룬 부흥회 형태의 예배가 현재 한국 교회 예배의 또 한 기초를 이루게 된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교회 법규나 예식서, 혹은 기도문 등을 사용하지 않고 자유롭게 예배를 진행 해왔다. 그것은 그나마 최소한의 예전이라도 회복하려고 했던 미국교회와도 크게 다른 점이었다. 이러한 세 가지 특징은 지금도 여전히 한국 교회가 비예전적인 예배 형태를 고집하며 단순하고 실용적인 예배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정리해 본다면 한국 교회의 예배 전통은 매우 비예전적이며 구도자지향적이고 부흥회 스타일의 자유스러운 예배였었다. 그리고 그것은 당대의 필요에 따른 예배 형태였고 또 우리 민족성에도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초대교회의 예배당 형태도 매우 한국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점점 일정한 모양의 서구형 예배당으로 자리 잡았고, 예배 형식도 ‘시대성’과 ‘토착성’ 그리고 ‘자유함’을 잃고 ‘고정화’ 되었다. 그러므로 예배 형태를 현대화 하자는 것은, 물론 지금보다 훨씬 더 성례전이나 상징들을 회복해야 하지만, 초대 교회의 그러한 ‘역동성’을 되살리자는 말도 되는 것이다.

 

2. 예배 문화의 현대화는 필연적이다.

우리 보수 교단들이 예배 갱신의 문제를 좀 더 적극적이고 시의 적절하게 풀어나가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예배 갱신의 문제를 ‘문화적’으로 보지 못하고 ‘교리적’으로, ‘무겁게’ 접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배 갱신에 대한 논의들이 자못 살벌하거나 너무 심각해져 오히려 교회에 해를 주는 경우가 많다.  예배 갱신은 교회가 가장 공을 들여 그리고 가장 신나게 할 수 있는 작업인데도 말이다.

 

2.1 전통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전통적’ 혹은 ‘현대적’ 이란 말 등은 이미 그 자체가 ‘문화적’이다. ‘전통적’ 문화는 오래 되었으면서도 천천히 변해 가는 것이고, ‘현대적’ 문화라는 것은 ‘전통적’인 것보다 지금에 훨씬 더 가깝고 훨씬 더 빨리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전통은 보존할 것과 버리고 개혁해야 할 것을 동시에 갖고 있다 ‘전통에는 언제나 규범적인 것과 반규범적인 것, 구조적인 것과 방향적인 것을 구체화하고 있다. 모든 교육자의 임무는 전통 속에 담겨 있는 값진 통찰들을 걸러내어 그것들이 계속 발전하게 할 뿐 아니라, 같은 전통 속에 있는 오류와 환상을 폭로하고 거부하는 것이다.’(알버트 월터스, ‘창조 타락 구속’ 양성만. 서울: IVP, 105쪽).

그리고 사실 오늘 날 보수 교단에서 예배 형태를 두고 일어나는 갈등은 모두 ‘문화적’인 문제이다. 이미 한국의 교회 대부분이 ‘현대적’ 예배를 드리고 있다. 문화적으로는 이미 거의 모든 교회가 ‘현대적’이다. 단지 예배 순서 정도가 50년 이상 되었다고 전통적 예배라고 할 수 없다. 건물의 디자인과 건축부터, 그 안의 시설과 각종 시스템 등이 모두 현대적이다. 무엇보다도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들이 현대적이다. 현대인의 언어를 사용하고, 현대의 상징과 이미지에 익숙하고, 현대의 옷을 입고, 현대의 악기와 현대의 음악에 길들여진 사람들이다. 현대적 건물에서 현대의 언어와 감성으로 현대인이 드리는 현대의 예배가 문화적으로 전통적일 수 있을까?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통문화’의 예배를 강요하는 것은 아파트 문화에 젖은 요즘 사람들에게 청학동의 문화를 강요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문화를 교회의 담을 기준으로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나누는 영지주의적 이원론은 대단히 위험한 사상이지만 여전히 ‘보수’ 교단 내에 강력한 영향력으로 남아있다. 교회의 담을 경계로 ‘하나님의 것’과 ‘세상 것’을 나누는 이분법은 거짓말쟁이 사단이 만들어 사람들에게 주입한 사상이다. 그것은 다음 몇 가지 진리를 가리는 것이다. 첫째 온 세상의 문화는 다 하나님의 것이다. 문화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대리자인 사람에게 맡기신 ‘창조의 발전’이다. 비록 죄로 큰 훼방을 받았지만 인간에게 주신 문화명령은 취소된 적이 없다. 세상의 어떤 문화가 심하게 뒤틀리고 오염되어 있어서 보기에 끔찍하더라도 그것을 통째로 사단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스스로 경건하다고 하는 많은 교인들이 칼 한번 뽑아보지도 않은 채 수 많은 문화의 영역들을 사단에게 넘겨주고 교회 담 안으로 도망 와 버렸다. ‘기독교의 주류는 - 일종의 경건주의에 빠졌다. - 그리스도인들이 주로 경건주의적 활동에만 주력함에 따라 철학, 과학, 예술, 경제, 정치 등 인간 삶의 대부분의 영역들은 너무나도 쉽게 세상으로 넘어가고 말았다.’(한스 로크마커, ‘예술과 기독교’ 김헌수. 서울: IVP, 2002, 25쪽). 둘째 어떤 문화건 죄로 오염되지 않는 것은 없다. 교회, 가정, 학교, 국가 등 모든 제도 문화 예술이 다 하나님의 것이면서 동시에 다 죄로 오염되어 있다. 셋째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되지 못할 문화는 없다. 모든 문화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치료되고 회복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회복 못할 문화는 없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문화건 아주 버릴 것도 없고, 전혀 고칠 것이 없을 정도로 거룩한 것도 없다. 넷째 예배는 세상 만물과 모든 문화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예배는 만물이 하나님의 것임과, 만물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될 수 있음을 선포하고 경축하는 것이다. 예배는 그리스도께서 사탄에게서 빼앗아 온 성도들이 하나님을 예배 하듯,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모든 문화와 예술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할 일은 성경이 계시하신 예배의 본질을 굳게 지키면서 동시에 각 시대, 각 장소, 각 문화 속에서 그 본질이 가장 잘 담기고, 가장 잘 드러나도록 예배의 방법을 계속 반성, 조정, 갱신 시켜 나가는 것이다. Ibid., 108쪽, ‘한 사회 제도가 주어진 시간과 장소에서 어떤 형태를  띠는 지는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 제도를 위한 규범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2.2 현대화는 세속화인가?

예배의 형태를 현대화한다는 것은 곧 세속화를 의미하는가? 나는 교회를 중심으로 현대화와 세속화를 이렇게 구별하고 싶다. 즉, 현대화는 교회가 주권 적으로 세상의 문화를 정복하는 것이고, 세속화는 교회가 피동적으로 세상의 문화에 정복당하는 것이다. 현대화는 교회의 본질적인 것들이 세상 문화로 옷 입는 것이고, 세속화는 세상의 본질적인 것들이 교회의 문화로 옷 입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현대화에 성공한다는 말은 교회가 세상 문화를 충분히 평가하고 심판하고 변화시키고 새롭게 만드는 일에 성공한다는 뜻이다. 또 그것은 교회가 세대차이를 극복하고 ‘지금', ‘여기'의 문화를 매개로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자가 그리고 예배자와 예배자가, 그리고 교회와 세상이 서로 ‘의사소통' 하는 데 성공한다는 말도 된다. 교회의 현대화는 그 말씀이 ‘지금', ‘여기'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들려지는 '복음'이 되기 위해 ‘성육화'(문화화) 하는 한 과정이다. 모든 상징들과 ‘표현방식'은 그렇게 ‘시대성'과 ‘공간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끊임없이 현대화해야 한다. 그렇게 현대화하지 않으면 교회는 세속화된다. 교회의 담장을 기준으로 안과 밖을 나누고, 성과 속을 구분 짓는 행위는 로마 교회가 헬라 철학에서 차입했던 ‘차원의 혼동’에 불과하다. 그것은 물리적 차원으로 신학적 윤리적 차원을 대치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영접하며 찬양하며 기대하는 예배를 통해서 당대의 문화를 평가, 검증하고, 그 방향을 지시해주는 최종, 최고의 권위를 가지며, 또한 땅 위에 임한 천국의 군대로서 세상 문화를 그렇게 정복한다.

 

2.3 형식(양식樣式style)은 변해야 한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다. 어떤 문화예술의 ‘양식’은 어떤 세계관을 담아내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세계관의 내용과 주장을 가장 적절하게 담아낼 수 있는 ‘양식’이어야 한다. 한스 로크마커는 상게서(63쪽부터 6쪽)에서 과거에 있었던 ‘형식적 법칙’(decorum)을 소개한다. ‘형식적 법칙’은 그 주제와 그 상황에 대해서는 그 형식, 유형, 표현을 택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너무 쉽게 유행을 따름으로써 ‘형식의 한계’를 무시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특정한 양식을 고수하면서 엘리트인 척하는 태도를 비난하면서 쉬운 찬송가를 지어 교회에 큰 유익을 끼친 18세기의 아이작 왓츠(Isaac Watts)를 ‘멋진 예’로 든다.  예배의 형식이 현저히 예술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예배의 예식은 ‘예배의 예식’다워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이 예배 양식의 전통이 보수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오늘 날의 예배 양식은 반드시 21세기의 것이어야 하고, 또 한국적이어야 하고, 그리고 성경적 세계관(예배관)을 담아내는 것이어야 한다. 프란시스 쉐퍼는 상게서(66~67쪽)에서 ‘변화는 생명과 죽음 사이의 한 가지 다른 점이다’라고 말하면서 기독교예술에 있어 꼭 강조되어야 할 것 세가지를 다음과 같이 꼽고 있다: 첫째 21세기 예술이어야 한다. 둘째 국가마다의 특색이 살아 있어야 한다. 셋째 기독교적 세계관을 담아내야 한다.

어떤 이들은 구약 성전제사에 반드시 지켜야 할 절차가 있었던 것처럼 신약은 신약 나름대로 지켜야 할 새 절차를 규정해 주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약 성전 제사의 형식과 신약 교회 예배의 형식은 그 성질이 다르다. 구약 성전제사의 형식과 절차는 그것 자체가 예배의 본질이었다. 따라서 반드시 제사는 그 형식과 절차대로만 드려야 했다. 그것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방식,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로만 성취된다는 것을 상징하고 예고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 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형식은 이미 본질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신약의 예배는 구약 제사의 모든 절차와 형식들이 이젠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을 선포한다. 더 이상 그런 것을 의지해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하고 그 행복을 경축하는 것이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9:9,10).’ 그래서 어떤 이들은 신약 예배의 절차와 형식에‘도구적’이란 표현을 쓴다. 교회가 시대의 필요에 따라 다양하게 취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어떤 ‘본질'이나 ‘내용'을 어떤 특정한 ‘형식'의 목에 잡아 맬 때, ‘의식주의자'가 된다. 그리고 이때의 ‘의식'들은 ‘내용'이나 ‘본질'들을 압도하고 변질시킨다. 개혁교회는 처음부터 그런 ‘의식주의자'들로부터의 결별을 선언하면서 태어났다. ‘개혁은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란 우리의 구호는 분명 본질의 개혁이 아니라 본질을 왜곡 시키거나, 당 시대의 문화로 본질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는 ‘형식들'(문화 예술이나 상징들)의 지속적인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혁교회는 ‘형식'의 계속적인 갱신을 통해서 자꾸만 왜곡되고 가려지려는 ‘본질'을 분명히 드러내고 또 그것을 확장, 강화시켜 나간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까지 교회 예배는 시간에 따라, 공간에 따라 그렇게 다양하게 변화되어 왔다. 이렇게 교회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세상의 모든 문화를 주권적으로 평가하고, 수용하거나 버리거나 갱신해 나간다. 특별히 교회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서로 의논하면서 계속적인 예배갱신을 통해 세상 문화를 평가하고 영향을 주고 개혁해 나간다. 그러므로 예배는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거룩한 문화 모델’인 셈이다. 이것은 교회가 해야 하고 또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신나는' 싸움인 것이다(창1:28). 그러나 오늘날 예배갱신은 편견과 고정관념이라는 장애물 때문에 심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3. 예배 상징의 현대화는 필연적이다.

3.1 상징으로 드리는 예배

예배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다. 성찬식만 상징이 아니고 예배의 순서와 그 표현들이 다 상징이다. 예배자는 상징을 통해 하나님께 나가고 하나님께서는 상징을 통해 예배자들을 만나신다. 예배는 상징을 만들고 강화시키며 증거하고 상징은 예배를 풍성하게 한다. 천주교가 상징을 지나치게 남용하며 말씀 없이 사용하다가 우상 숭배에 빠졌다면 개신교는 상징을 지나치게 경계하다가 상징의 빈곤에 빠졌다.

어떤 순서로 드릴 것인가? 그리고 그 순서들을 어떤 형식으로 표현할 것인가? 왜 그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연구하는가? 그것은 예배의 순서와 표현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대에 따라 계속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기들의 몸과 마음, 그리고 ‘지 정 의’를 자기들이 공감할 수 있는 ‘시대적’ 상징들 안에 온전히 담아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개신교의 예배는 너무 단순화 되어 있고 상징의 빈곤으로 인해 깊이가 없다고 보여진다. 교통 표지판 같은 단순한 지시와 언어적 요소만 가득하고, 지역 교회의 정체성과 시대적 가치와 비전과 문화를 충분히 담아내는 세련되고 비언어적인 상징들이 적다. 예배자들은 언어나 표지의 지시적 특징 보다, 상징의 여유와 깊이에 좀 더 친숙해져야 한다. 그래야 예배자들이 예배의 의미의 깊이를 잃고 터무니없이 단순해지고 어리석어지는 습관을 극복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천주교가 그랬던 것처럼 성례와 예전 중심의 ‘무거운’ 예배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말씀과 언어 중심의 현재 개혁교회의 예배가 시대에 공감할 수 있는 ‘가벼운’ 상징들을 좀 더 많이 계발해서 보다 깊고 풍성한 예식에 예배를 담아내 보자는 것이다. 상징으로서의 예배 예식이 왜 당대의 문화로 적절하게 갱신되어야 하는지를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태극기의 변신을 예로 들어보겠다.

 

3.2 태극기의 변신은 무죄

태극기, 애국가, 아리랑, 무궁화, 고추장, 김치, 한복, 태권도, 철조망(38도선), 한국어 등은 한국의 대표적인 상징들이다. 그 상징들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 정체성, 사상, 희망 등을 담아낸다. 그것들은 오랜 세월 동안 자연스럽게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져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이면 누구나 그 상징들이 담아내는 의미들에 공감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그런 상징들에 의해 하나로 통합되며 나름의 질서를 유지한다. 그것이 상징이 갖는 가치이고 위력이다. 그런데 상징 자체는 문화적인 것이기 때문에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하기도 하고 폐기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회든 줄기차게 건강하고 아름답고 풍성한 상징을 만들기에 공을 들여야 한다.

1919년 3월 1일에 우리 선조들이 흔들어 대던 피눈물 묻은 태극기는 2002년 월드컵에서 치마와 팬티로 변신했다. 그리고 그렇게 ‘방자하게' 변신한 태극기는 31절의 태극기와는 전혀 다른 정서와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물론 이번 월드컵 때에도 고정관념에 대못이 박혔던 일부 어른들은 나라의 권위가 이제 땅에 쳐 박혔다며 혀를 찼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의 상징이 철없는 세대에 의해 불경스럽게 취급된 것이 아니라, 이젠 나라 없는 설움도, 전쟁도, 가난도 모르고 자란 새로운 세대의 낙천성과 유희성과 자신감을 담아내기 위해 태극기는 그렇게 변신해야만 했었던 것이다. 만약 태극기가 이렇게 변신하지 못하고 장롱 속에서 폼만 잡고 앉아 있었다면, 이번에 태극기는 조국에서 일어난 월드컵의 기적을 품을 만한 국가의 상징으로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태극기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시대를 담아내기 위해 변신을 하든지 아니면 뒷전으로 밀리든지, 폐기되어야 한다. 그것이 모든 상징의 운명이다. 빨강 색도 우리에겐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공산주의를 담아내는 아주 위험하고 기분 나쁜 색깔이었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은 빨강 색을 ‘하나됨’의 색으로 바꿔 다양한 예술로 표해 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세계를 경악하게 했다. 우리의 ‘빨강색’은 드디어 변신에 성공한 것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 국민 대다수는 빨강색을 보면서 옛 세대와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읽는다. 이처럼 상징들은 그 시대의 가치와 정신을 더 풍성히 담아내기 위해서 발 빠르게 그 시대의 문화로 옷 입으며 단호하게 변신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극기의 변신은 무죄다.

 

3.3 말씀으로 거듭나는 상징들

어떤 이들은 크리스마스, 부활절, 새벽기도, 철야기도, 기도원, 사도신경 외우기, 심지어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 그리고 십자가까지 다 교회에서 퇴출 시켜야 한다고 힘을 주어 말한다. 이런 주장에는 심각하게 중독된 이원론주의의 고름이 묻어난다.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를 들어보면 다음 세 가지 중 하나다. 첫째는 그 기원이 이교도적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그렇게 하라고 성경이 말씀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천주교에서 잘못 사용한 것들이라는 것이다. 그것 참,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들은 대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혼자 다 이겨 놓은 전쟁터에서 우리는 다만 챙기기만 하면 되는 전리품들인데 그것들을 오히려 원수가 슬쩍 놓고 간 ‘트로이의 목마’로 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주께서 섭섭해 하신다. 우리 교회가 할 일은 그것들을 주의 이름으로 취하고 말씀으로 깨끗이 해서 주를 위해 새롭게 사용하는 것이다. 그 기원이 어떻고 누가 사용했었던지 간에 말이다. 주께서 취하시면 주의 것이다. 아니, 원래 주의 것이었던 것을 다시 찾으신 것이다. 우리 자신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전리품이 아닌가? 태초에 계셨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제 성육하신 말씀은 타락했던 만물을 다시 새롭게 창조하신다.

십자가는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저주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는 신약에서 이미 성육하신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불리고 있다(빌3:18; 골2:5). 사람들을 미혹시켰던 옛 우상이 이젠 그리스도의 구원과 하나님의 사랑을 담는 최고의 상징이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십자가를 숭배한 것은 말씀이 없었기 때문이고, 천주교에서 십자가를 숭배한 것은 말씀을 왜곡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천주교의 수많은 상징들은 곧 우상이 되었다. 그것은 종교적 상징이 갖고 있는 위험성 중 하나이다. 그러나 상징에 대한 우상 숭배의 위험성은 말씀으로 극복된다. 딤전4:5 말씀이 없는 종교적 상징들은 우상 숭배로 가기 쉽다. 그러나 말씀의 조명을 받고 지배를 받는 상징은 그런 길을 가지 않는다. 이집트의 스핑크스 신전과 솔로몬의 예루살렘 성전의 차이가 무엇인가? 모양인가? 제사의 형식과 절차인가? 아니다. 그 신전들을 참과 거짓으로 나누고 참 예배와 우상 숭배로 나누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집트의 우상숭배와 신전제사에 익숙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과감히 ‘신전제사’를 제정해 주신다. 그러나 그 신전과 제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혀 새롭게 된 것들이었다. 계시는 피조물들의 ‘구조’가 아니라 그 왜곡된 ‘방향’을 새롭게 해준다. ‘방향간의 전쟁은 창조의 실체 위에 있는 영적인 특별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상적 창조계의 구체적인 모든 실체 안에서 그리고 그 모든 실체에 대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알버트 월터스, 상게서, 98쪽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갑자기 흙으로 된 사람이 쇠로 된 사람으로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인생의 가치관과 소망과 방향이 바뀐다. 말씀은 그렇게 세상 문화와 상징들을 사로잡아 종으로 삼는다. 그리고 말씀의 종이 된 상징은 자기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여, 한 두 마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풍부한 진리와 메시지들을 담아낸다. 그리고 그런 상징들은 푹 고아 낸 곰국처럼, 음미하면 음미할수록 계속 더 기막힌 맛을 우려낸다. 그러므로 교회는 말씀의 지도 아래, 말씀을 그 시대의 문화로 옷을 입혀 성도들 가운데 머물게 함으로 성도들로 하여금 아들의 영광을 보게 하며,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와 진리 가운데 살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요1:14).

 

4. 예배 분위기의 현대화는 필연적이다.

4.1 엄숙주의

물론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예배 개혁은 놀라운 성취를 거두었다. 무엇보다도 예배 중에 말씀이 회복된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천주교의 태산 같은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서로 좌충우돌하다가 말씀 예전과 성례 예전이 균형 잡힌 초대교회의 예배로 돌아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지나치게 상징주의적이고 예전주의적이었던 천주교에 대한 반동으로 지나치게 비예전적이고, 말씀에 치우친 주지주의적인 예배로 기울어 버렸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아쉬운 점은 종교개혁이 예배 ‘분위기’의 갱신에는 손도 못 댔다는 것이다. 천 년 넘게 성당 안에서 키워져 온 로마 교회의 ‘엄숙주의’는 베드로 성당보다 더 컸고 교황보다도 더 높은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원래 사람들은 어느 시대와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곧 경건으로 통하는 외길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엄숙주의자들은 예배 시간에 가능하면 몸짓을 줄이고, 감정을 억누르며, 느낌의 표현을 억제하는 것을 경건의 표준으로 삼는다. ‘예배 분위기는 엄숙해야 한다’는 이 보편적이고 오래 된 ‘고정관념’은 종교개혁자들이 극복했어야 할 가장 크고 낡은 전통이었다. 웨스트민스터고백서의 예배 모범을 비롯하여 청교도들의 예배 지침에는 예배를 ‘엄숙하게’ 드리려는 노력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어떤 사람들은 분위기를 하찮게 생각한다. 그래서 예배의 분위기를 위해 음악을 바꾸고 인테리어를 하는 등의 일들을 인위적이고 쓸데없는 짓으로 본다. 심지어 그것들을 ‘세상 것’을 교회 안에 들여온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말까지 한다(인테리어 예술은 소중한 문화 창조의 열매이다.). 마치 그런 시도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을 방해라도 하는 것처럼 비난한다. 그러나 예배를 엄숙하게 해야 한다는 것도 바로 분위기를 말하는 것이다.

 

4.2 가족 밥상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가? 예배의 본질에 대한 여러 학설들을 여기서 다시 소개하지 않겠다. 그러나 예배 예식의 정점인 성찬예식을 중심으로 한번 예배의 정의를 내려 보려고 한다. 예배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거룩한 자녀들이 함께 감사와 기쁨으로 그리스도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배는 ‘감사와 기쁨을 예식으로 갖춰 밥을 먹는 것’이다. 밥상의 분위기가 어때야 하겠는가? 장엄하고 엄숙하고 심각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의 밥상에는 물론 슬픔이 있다. 자신의 부족과 죄에 대한 애통이다.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를 드리지 않는 세상에 대한 탄식이다. 아직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있는 생명들에 대한 슬픔이다. 그리스도의 밥상에서 우리가 나누는 슬픔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멸시하고 외면하는 모든 불신과 악에 대한 슬픔이다. 그래서 예배엔 침묵과 엄숙함과 슬픔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슬픔은 기쁨의 그릇에 담긴 슬픔이다. 그 슬픔은 기쁨에 눌린다. 그리스도의 밥상에서 성도들은 모든 죄로부터의 용서와, 서로 사랑으로 하나되어 세상을 이길 힘과, 아직 세상에 있는 생명들을 구원할 새로운 의지와, 부활과 재림하심과 내세의 소망 등을 채움 받는 기쁨으로 감격하고 감사하고 행복해한다. 예배는 그래서 기쁨의 잔치이다. 초대교회의 모임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2:46,47), ‘큰 기쁨으로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었다(눅24:52,53).

그러므로 예배 분위기는 그 기쁨을 가장 잘 느끼고 또한 가장 잘 표현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엄숙한 분위기는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엄숙함은 부활보다는 죽음에 더 잘 어울린다. 부활이 주제인 곳에서의 분위기는 엄숙함 보다는 밝고 경쾌하고 역동적이어야 한다. 물론 엄숙하면 기쁨을 모른다는 말은 아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도 믿음으로 주님의 영광을 보며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뜨거운 기쁨이 샘솟듯 함을 느낄 수 있다. 엄숙함이 몸에 익은 사람들은 그래야 하나님께로 집중할 수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엄숙함도 기쁨의 그릇에 담아야 한다. 아무래도 엄숙한 분위기는 심각해지기는 쉬어도 기뻐하기에는 장애가 된다. 가족 밥상의 분위기는 기뻐야 한다. 그리고 엄숙함을 좋아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엄숙해야만 경건한 것’이라고 믿는 엄숙주의는 하루빨리 교회를 떠나야 한다.

 

4.3 너무 어른인 체 하는 사람들

너무 흔한 예를 또 한 번 들어야겠다. 다윗이 법궤 앞에서 노래하며 춤을 추었을 때 일이다(삼하6:12~23). 자기를 멸시하는 아내에게 다윗이 하는 대답을 들어보자.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라 -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예배 분위기에 대해 이 사건만큼 명쾌한 답을 주는 본문도 없다. 유명한 말로 ‘꼬람 데오’ Coram Deo라는 말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라틴 말이다. 다윗이 이해하고 있는 ‘꼬람 데오’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그 말이 그에게는 ‘아버지를 즐거워하는 어린 아이가 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예배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너무 어른인 채 하려고 한다. 하나님의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이 너무 어른스럽다. 마음으로 어린 아이가 되면 됐지 뭘 그러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소리 하지 말자. 다윗이 마음으로 춤을 춘 것이 아니다. 머리로만 기뻐한 것이 아니다. 그랬더라면 미갈에게 그런 모욕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몸으로 춤을 추었다. 베옷이 벗겨져 하체가 드러날 정도로 격렬하게 춤을 추었다. 겨우? 법궤를 모시면서도 다윗이 그렇게 기뻐했다면 오늘 그 법궤의 실재이신 그리스도의 영이 임재 하시는 예배에서야 얼마나 더 그러해야 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다윗의 그 춤과 노래는 예배가 아니었다고 그런다. 정말 모르는 소리다. 그 때 그는 여섯 걸음마다 제사를 드렸다(삼하6:12~19).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예배 시간에’ 할 수 없다는 것은 내 아버지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내 아들의 할아버지 앞에서는 할 수 없다는 말과도 같다. 다윗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이라도 예배 때 할 수 있을 만큼 거룩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러면 예배는 ‘하나님 뒤에서’ 하는 것이란 말인가?

아버지 팔순 잔치 상에서 그 아들 딸 자녀들이 어른인 채하고 체면을 지키고 앉아 있다면 그것이 그 아버지께 예의가 되겠는가? 그러므로 예배 분위기는 ‘어린 아이들이 아버지를 즐거워하여 뛰노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예배 시간에 모두 ‘다윗의 춤’을 춰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그 다윗의 춤’을 예배의식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어쨌든 아무리 생각해봐도 엄숙주의는 아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꼼짝 않고 앉아 너무 어른인 채 하는 예배 분위기를 보면 참으로 난처하고 민망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면 누가 감히 그렇게 어른인 채 하겠는가? 예배 분위기는 어른들의 엄숙함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의 순전함과 겸손함, 그리고 즐거움이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어야 한다.

 

4.4 두렵고 떨림으로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레10:1,2). 흔히 엄숙주의자들이 예배의 분위기를 생각할 때마다 떠 올리는 광경이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가! 그래서 엄숙주의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함이란 곧 두렵고 떨린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당연히 예배의 분위기는 엄숙, 장엄해야 하고 그 순서 하나하나가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러워야 한다. 몸가짐 하나, 표정 하나, 말 하는 것 하나 실수가 있으면 안 된다. 설교자가 유머를 하거나 광고 시간에 우스갯소리를 하면 안 된다. 아기들의 우는 소리나 아이들이 찡얼거리는 소리가 나서도 안 된다. 같은 찬송을 두 번 반복해도 안 되고, 숨소리를 죽여 가며 비장하게 드려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경건한 예배가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엄숙주의자들이 늘 연상하는 그 끔찍한 장면은 예배자의 태도나 절차에 대해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죄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말씀이다. 그래서 구약의 백성들은 신약을 받을 때까지 반드시 그 장소에서, 반드시 그 제물을, 반드시 그 방법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드디어 새 언약을 받았다. 새 언약이 무엇인가?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가는 생명의 길이 이젠 활짝 열렸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여신 새롭고 산 길이다.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이 아직 안 보이던 때에는 제물과 절차에 의지해 예배를 드렸으나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그 모든 것은 개혁되었기 때문이다(히9:9,10). 그러므로 우린 더 이상 ‘흠 없는 동물’을 구하려고 애 쓰지 않는다. 절차와 순서를 제대로 못 지킬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할 까봐 하나님이 조치해 놓으셨던 방책들이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 예배자들이 두려워하고 떨어야 할 단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을 마음껏 즐거워하지 못하는 예배가 되면 어쩌나, 그런 인생이 되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불법 체류자로 늘 두렵고 떨림으로 살던 외국인 근로자가 우리나라 시민권을 얻었다고 상상해보라. 그 자유가 주는 터질 듯한 기쁨이 그의 얼굴과 가슴과 온 삶을 지배할 것이다. 우리의 예배가 그런 것이다. 구약의 제사는 그런 구원과 기쁨의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예식과 절차에 묶어 나타내야 했다. 그러니 엄숙 장엄할 수밖에. 그러나 신약의 예배는 드디어 찢어진 휘장 가운데로 ‘새롭고 산 길’이 나타났다는 것을 기쁨 가득한 자유로운 예배를 통해 나타내야 한다.

 

4.5 예배는 오직 드리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 드리기만 하는 것일까? 물론 '드리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예배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예배의 의미를 좁게 이해한 것이 아닐까?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기도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도하고, 예배자끼리 서로 나누기도 하고, 그리고 불신자들에게 증거하기도 한다. 쉽게 성찬식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성찬식은 예배 예식의 정점이다. 성찬예식의 중요한 목적은 네 가지이다. 하나님의 구원 은혜를 감사 찬양하고, 그 회복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 누리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된 은사들을 서로 나누고, 또한 불신자들에게  '주님의 죽으심'을 '세상 끝 날까지' 증거 하는 것이다(고전11:23~26; 눅22:14~20). 이렇게 예배는 단지 예배자가 하나님께 찬미를 드리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예배는 찬미의 기능과, 구원에의 참여, 연합과 교제, 그리고 세상 문화와 영혼들에 대한 복음선포라는 '선교적 기능'을 갖는다. 실제로 많은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의 예배를 '보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온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에게  '와 보라'고 외쳐야 한다면 교회에서 저들에게 보여줄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영광스런 예배인 것이다. 그러기에 불신자들을 하나님의 예배에 초청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일 것이다. 이렇게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예배에 처음 참석한 불신자도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4.6 예배는 정성으로 드린다?

개혁교회의 예배는 정성이 아니라 믿음으로 드린다. 아직 예배를 정성으로 드리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예배는 정성으로 드리지 않는다. 오직 믿음으로 드릴 뿐이다. 정성으로 신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정성에 감동되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감동시킬 만한 인간의 정성은 그 어디에도 없다. 교회의 예배가 필요로 하는 정성은 곧 믿음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예배가 이교도들의 예배와 다른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된다.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만 얻는 것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인한 믿음으로만 드릴 수 있다. 인간은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도 오염된 그릇에 불과하다(칼빈, ‘기독교강요’3부14장). 그 속에 어떤 보물을 담아도 더러운 냄새가 난다. 예배자의 입에 아무리 아름다운 찬송을 담아도, 예배자의 입에 아무리 열정적인 기도를 담아도, 예배자의 입에 아무리 뜨거운 설교를 담아도 예배자를 통해 나오는 그 모든 것에는 악한 냄새가 베여있다. 인간은 너무나 악하기 때문에 설교하다가도 죄를 짓고 기도하다가도 죄를 짓는다. 그릇 자체가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배자가 아무리 목욕을 하고 정성을 다 해서 하나님께 나가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엔 그 모든 것이 추하고 역겨울 뿐이다. 하나님께서 예배자들에게서 찾으시는 것은 저들의 양심에 발린 어린 양의 피다. 하나님은 예배자들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기뻐하신다. 예배를 드릴 때 ‘안 정성’으로 드리라는 말이 아니다.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면 누가 일부러 ‘안 정성’으로 예배하려 하겠는가? 그러나 정성과 믿음은 다르다. 예배는 믿음으로 드린다. 그리고 이런 입장은 예배신학과 예배갱신의 문제에 있어서 마치 배의 키처럼 예배 갱신의 방향을 결정하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으로 예배의 현관을 들어간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5. 예배 음악의 현대화는 필연적이다.

5.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천주교의 ‘종교개혁’을 가져 온 회의였다. 그 회의가 1963년에 발표한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은 종교개혁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우리 개신교회를 부끄럽게 하고도 남는다. 물론 그 회의는 옛날 종교개혁의 대상이었던 천주교의 기본 교리들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더 강화되었고 여전히 개혁의 대상이다. 그러나 동 시대와의 적응성을 추구한 예전의 갱신에 있어서는 ‘충격적’이란 말로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특별히 내 눈에 띈 몇 가지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설교)의 중요성을 대단히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천주교의 예배와 신학을 상당히 바꾸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둘째 그레고리안 성가 등 전통에 대한 깊은 애착을 나타내면서도 교회 밖을 향하여 예식이나 음악의 문을 활짝 열었다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매우 확고한 의지를 담아, ‘전례에 신자들의 소리가 울릴 수 있도록 종교적 대중 가곡을 장려하고, 교회가 속한 민족 지역 나름대로의 고유한 전통 음악을 사용하여 신자들이 자기감정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필요한 성질을 갖춘 건전한 예술의 모든 형태에 찬동하며 또한 그것을 전례에 도입할 것을 허용한다’고 못 박고 있다. 셋째 거의 우상처럼 집착해 있던 ‘라틴어’에 대한 아집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바티칸 공의회는 라틴어에 대한 강한 미련을 보이면서도 각 교회가 처한 모국어를 쓰도록 허락하고 있다. 넷째 매스 미디어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신경이라 할 수 있는 매스 미디어를 선교와 교육의 가장 좋은 수단으로 삼겠다는 것이며, 동시에 타락한 매스 미디어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청소년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이 정도면 정말 놀라운 변화가 아닌가? 바티칸공의회는 교회가 시대에 적응하여 예전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은 임무이며 동시에 권한이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개신교의 어떤 사람들은 이미 선배들이 떠났던 곳이고, 또 이제 뒤 늦게 깨어난 천주교가 막 떠나려는 그 곳을 서둘러 다시 찾아 돌아가고 있다. 그것도 ‘경건한 열심’으로 말이다. 음악을 두고 어떤 장르나 시대를 기준으로 ‘거룩한’ 음악과 ‘세속적인’ 음악을 나눈다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짓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시대의 서구 음악이나, 특별한 장르의 음악만 받으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원론적일 뿐 아니라 무속적이고 이교도적이다. 물론 누가 봐도 매우 왜곡되고 악으로 오염된 음악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 놀라 ‘교회 밖’의 모든 음악을 덜렁 사단에게 내어주면 안 된다.

 

5.2 예술의 기능

예술은 세 가지 기능을 한다. 자극과 증폭과 표현이다. 예술은 우선 사람의 직관과 감정, 그리고 상상력을 자극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앰프와 같은 증폭기의 역할을 한다. 조그만 소리가 엄청나게 커지는 증폭기처럼 사람의 직관 등은 예술을 통해 어마어마하게 증폭된다. 그리고 또 예술은 그렇게 증폭된 직관과 감정과 상상력, 그리고 영감과 느낌, 깨달음 등을 강렬하게 표현해낸다. 그냥 말만으로도 생존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그러나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감정은 말로 다 담아낼 수 없다. 언어의 표현 그 너머에 있는, 그래서 언어로는 도저히 길어낼 수 없는 그 깊은 곳에 있는 느낌과 감정들을 상상력을 가동하여 가능한 한 충분히 표현해 내는 기술을 예술이라고 한다. 미술, 음악, 시, 춤, 그리고 연극 등이 그것이다. 예술은 고차원의 상징이기 때문에 언어보다는 그 그릇이 훨씬 더 넓고 깊고 크다. 예술은 그래서 우리의 직관이나 감정에 작용을 하고 상상력을 사용한다. 그래서 참된 예술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세계를 들여다보게 하는 창문도 되었다가, 자기를 비춰 보는 거울도 되고,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거리에 있는 것들을 당겨 볼 수 있는 망원경도 되었다가, 너무 작아 보이지 않는 것들을 커다랗게 볼 수 있는 현미경이 되어 주기도 한다. 그렇게 하면서 예술은 우리의 직관과 감정과 상상력을 자극하여 풍성하게 하기도 하고, 그것들이 찾아낸 보물들을 담아 퍼내기도 한다. 이런 예술과 함께 하면서 사람이 어찌 기뻐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노래와 음악은 사람으로 하여금 심각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기뻐하라고 주신 것이다. 예배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진지함이지 엄숙함이 아니다. 음악이나 춤, 연극 등 예술들의 종류나 그 기능들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경축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의 충만에 이를 수 없다. 스스로 점치는 것을 좋아한다고 밝히는 뉴에이저 김융희는 그의 책, ‘예술, 세계와의 주술적 소통’(서울: 책세상, 2005, 5쇄)에서 예술이 원래 인간 삶의 전 영역과 관계되어 있는 총체적인 것이며, 낯선 영역, 초월적인 영역에 대한 느낌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는데 점점 그러한 ‘초월’과 ‘영성’의 문제가 제도화된 종교의 전유물이 되어 버렸다고 탄식한다. 그러면서 예술이야말로 인간 속에 잠들어 있는 영성을 깨우고 그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매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망을 피력하고 있다.  김융희의 견해가 이미지 숭배와 주문 명상을 통한 ‘자연 에너지’와의 합일(해탈)로 발전해버리는 안타까움이 있지만 예술의 기능을 인간의 삶 전체(종교와 영성을 포함하여)에 관계 시키고, 또한 언어와 이성, 의식 너머에 있는 직관과 상상의 세계에 위치시키는 것은 매우 옳은 것이라고 본다.

 

5.3 자기를 즐겁게 하라

예배자가 음악으로 자기를 즐겁게 하면 되는가? 어떤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찬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를 즐겁게 하는 죄를 짓는다고 비난한다. 그것은 세속화된 광신자들이 예배를 오락으로 만드는 것이라며 분노한다. 찬양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인데 육신을 즐겁게 한다고 욕을 한다. 내가 정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엄숙주의자들이 찬송을 하는 것이다. 왜 찬양을 하면서 감정을 절제하려고 애를 쓰느냐는 말이다. 우습지 않은가? 그것은 밥을 먹으면서 배부르지 않겠다고 하는 말과 같고 술을 마시면서 취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음악을 하는 목적은 우선 자기를 즐겁게 하려는 것이다. 축 늘어져 반응하지 못하는 자기의 감정과 직관과 상상력에 강력한 자극을 주어 벌떡 일어나 펄펄 뛰고 날게 하려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예배자들로 하여금 공교한 연주와 기쁨의 노래를 하게 하신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부족과 연약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의 말처럼 우리는 음악과 예술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3부 20장 31,32절에서 기도와 찬송의 관계를 말하는데, 음악의 위력과 유익을 인정하면서도 가사에 대한 집중력을 떨어트리는 곡조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이것은 예배의 ‘명료성’에 대한 그의 집착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찬양에 대한 칼빈의 소극적 태도는 쯔빙글리와 루터의 중간에 위치한다. 음악의 자극으로 비로소 우리는 직관의 창문이 활짝 열리고, 감정의 샘이 힘 있게 터지고, 상상력의 세계가 역동적으로 펼쳐진다. 음악의 자극으로 그렇게 깊어지고 넓어지고 높아지고 뜨거워진 우리의 기쁨 그릇에 우리의 감사와 소망과 예배를 담아 드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그런 예배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자의 감정이 충분히 깨어 함께 예배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예배자는 음악으로 자기를 즐겁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걱정할 것 없다. 그 찬양은 당연히 하나님을 향한다. 엄숙주의자들은 걱정이 너무 많다. 그래서 자극적인 음악으로 뜨거워진 예배자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릴 까봐 전전긍긍한다. 예배자들이 열렬해졌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이 뜨거워졌다는 것인데 엄숙주의자들은 그것을 끝까지 의심한다. 실제로 분위기가 가라앉았을 때보다 열정적일 때 훨씬 더 집중력이 강하다.

그러므로 감정에 자극을 주지 않으려는 사람은 음악을 할 필요가 없다. 감정에 자극을 주지 않고, 또 노래와 춤을 통해 그것을 표현하지 않으려면 그냥 언어로만 해도 충분히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종교개혁 당시 아예 모든 음악을 거부했던 쯔빙글리처럼 말이다. 그리고 가끔 음악이나 아무 예술의 도움 없이 단지 머리만으로도 항상 열광적인 감정이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못한다. 시력이 약한 사람이 안경을 필요로 하듯이 우리의 직관과 감정, 그리고 상상력은 음악과 예술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런 수단들이 있으면 훨씬 더 풍성한 영감과, 감격과, 기쁨으로 예배할 수 있다. 감정과 몸짓을 멸시하는 것은 이교적인 사상이다. 세상에 이런 종교들은 많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감정과 의지, 그리고 몸까지도 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았음을 선포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자들이 노래하고 연주하고 춤을 추는 이유는 우선 자기를 즐겁게 하기 위함이다. 이 말은 예배의 목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기능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즐거움에 예배자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소망을 담는다.

 

5.4 악기를 쓰는 이유

‘예배 음악에 찬송은 하되 악기는 안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왜 찬송을 하면서 악기를 사용하지 말라고 할까? 악기 없이 찬송하라는 것은 반찬 없이 밥 먹으라는 말과 같다. 악기는 음악을 더 즐겁고 아름답게 하기 위한 도구다.(대상15:16). 그러므로 악기 없이 음악을 하라는 것은 손바닥으로 탁구 치라는 것과 같다. 예배 시간에 악기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두 종류다. 하나는 전혀 사용하지 말라는 사람들이다. 이유는 역시 엄숙주의 때문이다. 악기가 엄숙한 분위기를 깬다는 것이다. 그런데 엄숙주의와 같은 길을 가면서 거기에 또 다른 이유를 더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구약 교회가 악기를 사용한 이유는 구약교회가 어렸기 때문이었고 신약 교회는 성숙한 교회이기 때문에 유치하게 박수나 춤이나 악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면 된다고 주장한다. 엄숙주의를 숭배하기 때문에 악기를 못 쓰겠다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신약교회가 구약 교회보다 어른이기 때문에 더 이상 악기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 된다. 주님의 교회 안에 있던, 그리고 앞으로도 더 풍성히 있을 모든 악기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 당했단 말인가?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신령과 진정’이란 말씀이 교회의 모든 예술을 다 삼켜 버렸단 말인가? 교회가 옛 언약 아래서도 그렇게 풍성한 악기를 누릴 수 있었다면 새 언약 아래서는 그 보다 훨씬 더 충분히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비록 초대교회의 어려운 상황과 그 뒤로 이어진 교회의 이원론과 엄숙주의 때문에 오랜 세월을 음악과 악기들이 핍박을 당해왔지만 이제 말씀을 회복한 종교개혁은 음악과 함께 악기도 해방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이나 이후나 지구가 그대로인 것처럼 사람의 본성도 바뀌지 않았다. 음악이나 악기는 성전제사 때문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의 본성 때문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전의 제사는 끝이 났으나 음악은 계속된다. 그러므로 신약 교회는 구약 교회보다 훨씬 더 공교하고 강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위해 훨씬 더 다양한 악기들을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전 제사에 악기들을 동원하실 때 그것들의 족보와 과거 때문에 고민하지 않으셨다. 그런 것 같고 고민하면 하나님이 아니시다.

 

5.5 공명(共鳴)

예술은 공명의 기술이다. 공명(共鳴)은 ‘발음체가 외부로부터의 음파에 자극되어 그와 동일한 진동수의 소리를 내는 것, 또는 그러한 현상’을 말한다. 이 공명 기술은 요즘 안 쓰이는 곳이 없다. 의학에서도, 건축에서도, 그리고 심지어 무기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공명이 아닌 것은 예술이 아니다. 전자악기들과 현대음악으로 찬양하는 것을 보며 사탄의 음악이라고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의 음악이 아니다. 단지 자기가 그 음악에 공명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자기와 공명하지 않는다고 음악 탓을 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가 현대음악과 전자악기에 조예가 없을 뿐이다. 그런 음악이 자기에게 소음과 불협화음으로 들린다고 남들에게도 다 그럴 줄로 생각하면 안 된다. 현대의 젊은 세대가 자기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예배에 사용하는 것은 세속화 되는 것이 아니라 공명하는 것이다. 공명하지 않는 찬양은 공허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어느 특정한 민족의 음악이나, 일정한 선율과 리듬만을 받으신다고 여기는 것은 지극히 이교도적이다. 그러므로 각 인종은 인종대로 각 세대는 세대대로 자신들이 공명할 수 있는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표현양식과 메시지를 신중하게 구분해야한다. 나는 경건한 양식이나 불경건한 표현양식과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싶다. - 물론 표현양식이 예술작품의 내용이나 주제와 전혀 무관하다고 순진하게 생각하거나 오해해서는 안 된다. 표현양식 자체는 어떤 세계관이나 메시지에 대한 상징체계나 도구로 발달된다.’(프란시스 쉐퍼, 상게서 67쪽).

 

6. 온 가족이 함께 드리는 ‘세대 통합 예배’ (행복한 예배)

주일 밤에 드리는 ‘행복한 예배’의 중요한 특징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온 가족이 함께 드린다. 둘째 현대 음악과 춤과 악기를 동원하여 노래한다. 셋째 설교를 위한 연극을 공연한다. 넷째 개인을 위한 세례를 베푼다(일 주일에 3명 이하).

행복한 예배는 모두 일어서서 ‘사도신경’을 고백함으로 시작한다. 요즘 ‘사도신경’에 곡을 붙여 마치 전투를 앞둔 군대가 군가를 부르듯 ‘사도신경’을 부르게 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서로를 위한 축복 통성기도로 들어간다. 기도가 끝나면 함께 하나님을 향해 감사 박수를 치면서 앉는다. 그리고 세례자의 간증이 시작되면서 세례식을 진행한다. 간증과 세례, 공포, 축복기도, 그리고 개인의 성찬식, 온 교우들의 축복 송 및 축하의 순서로 진행된다. 매 때마다 놀라운 감동과 경축이 있다. 이제 현대악기로 무장한 찬양단(연주, 춤, 노래)의 찬양이 시작된다. 전자악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 파워가 엄청나다. 15분여 찬양이 끝나면 곧 예배를 위한 통성기도와 대표기도로 이어진다. 그 동안 악기 위주로 구성되었던 무대가 연극을 위한 무대로 바뀐다(무대가 이중으로 되어 있고 바퀴가 달려 있다). 그리고 대표기도가 끝나면서 연극이 시작된다. 설교를 위한 단막극이다. 그 동안 우린 이 연극과 설교를 통해 생활 속의 다양한 주제들(10여 년간)과,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강해했다(2년 걸렸다). 그리고 요즘은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연극으로 공연하고 있다. 즐겁지 않을 수가 없다. 연극이 끝나면 설교가 이어지고, 설교가 끝나면 몇 가지 제목을 놓고 통성으로 기도한다. 그리고 약간의 축하순서 후에 축도로 예배를 마친다. 대략 70분에서 80분 걸린다(세례자의 간증 수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매 주일 밤 이렇게 '행복한 예배'를 끝내고 나면 잔치를 치른 기분이다. 마음에 예배의 감흥이 강물처럼 남아 출렁거린다. 온 가족이 매 주일에 한 번씩 이런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큰 행복이 아닌가?

 

나가는 말

예배의 갱신은 교회를 활성화 하는 데 결정적이고 최우선적이다. 다음 몇 가지 예배갱신의 원칙들을 다시 요약 정리해보면서 글을 마치려고 한다. 첫째 예배 형식은 예배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이 때 ‘드러낸다’는 말은 ‘예배답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한 ‘의사소통이 된다’는 뜻이다. 둘째 예배 형식은 21세기(현대)의 것이어야 한다. 현대의 언어와 상징, 그리고 문화 예술을 통해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무분별하게 ‘유행’을 따르는 것은 금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교회 밖의 문화를 무서워하면 안 된다. 셋째 예배 형식은 한국적이어야 한다. 예배자들이 가장 잘 공명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예배의 본질’을 가능한 한 거부감 없이 전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넷째 예배는 말씀과 찬양과 모든 예식을 통해 모든 문화가 원래 하나님의 것이고, 모든 문화가 죄로 오염되었으나, 모든 문화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될 수 있다는 복음을 최우선적으로 선포하고 드러내야 한다. 예배는 물론, 그리스도인의 일터와 전쟁터가 교회 안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자연과 세상 모든 문화 영역을 다 포함한다는 것을 선언해야 한다. 다섯째 가능한 한 모든 문화와 예술을 동원하여 예배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충만에 이르러야 한다. 이원론에 빠져 교회의 담 안에 갇힌 채 ‘하나님의 것’과 ‘세상 것’을 나누는 자세로서는 결코 천국의 충만을 이룰 수 없다.

‘예배가 바뀌면 교회가 바뀐다.’ 본인이 부족한 목회를 통해 누리고 있는 소중한 열매다. 교회를 활성화 시키는 가장 중요하고, 또 교회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이 예배를 갱신하는 것이다. ‘모든 교회의 예배가 만물을 새롭게 하고 회복하시는 주의 구원이 영광중에 경축되는 산 예배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도서목록>
김준수 ‘디지털기독교강요’ (서울: 규장 2000)
Bard Thompson, ‘Liturgy of the Western Church’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25)
김석한 ‘개혁주의 예배의 이론과 실제’ (서울: 영문 2002)
랄프 마틴 ‘초대교회 예배’ 오창윤역 (서울: 은성 1993)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편 ‘복음주의예배학’ (서울: 요단 2001)
돈 E 샐리어스 ‘예배와 영성’ 이필은역 (서울: 은성 2002)
허도화 ‘한국교회예배사’ (서울: 한국강해설교학교출판부 2003)
김순환 ‘21세기 예배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3)
알버트 월터스 ‘창조 타락 구속’ 양성만 (서울: IVP 1992)
한스 로크마커스 ‘예술과 기독교’ 김헌수 (서울: IVP 2002)
프랜시스 쉐퍼 ‘예술과 성경’ 김진선
신국원 ‘변혁과 살롬의 대중문화론’ (서울: IVP 2004)
‘포스트모더니즘’ (서울: IVP 1999)
최유준 ‘예술 음악과 대중음악, 그 허구적 이분법을 넘어서’ (서울: 책세상 2004)
김융희 ‘예술, 세계와의 주술적 소통’ (서울: 책세상 2005 5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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