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8/23) 교갱협 제11차 영성수련회 주제특강

서론

최근 통계청은 종교 인구를 포함한 대한민국 인구 및 주택 센서스를 발표했다. 이 통계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가톨릭은 295.1만 명에서 861.6만 명으로 219.5만명이 증가 74%이상 성장했고, 불교도 3.9% 성장한 반면 기독교 인구는 876만 명에서 862만 명으로 144,000명이 감소 마이너스 1.6% 성장했다. 최근 통계청의 기독교 인구 감소 통계 발표는 사실 새로운 소식은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교계 안에서 회자되어 온 이야기다. 1988년까지 급성장을 계속하던 한국교회가 그 후 1992년까지 완만한 성장을 하거나 혹은 정체하더니 1992년부터 본격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한국교회의 쇠퇴는 이미 오래 전에 예견했던 바였다. 1987년 한국교회가 한창 성장을 거듭하고 있을 때 Christianity Today는 한국교회를 직접 방문 확인하고 발표한 글에서 앞으로 한국교회 성장이 한국교회를 부패시킬 것이라는 논조의 글을 실은 바 있다. 이미 지금부터 20년 전 한국교회 쇠퇴를 예견한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 인구가 144,000명이 감소했다는 최근 통계청 발표는 그동안 우려했던 한국교회의 쇠퇴가 종교인구 조사를 통해 현실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감신의 이원규 교수는 “개신교 과연 희망이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한 기독교 언론은 “깊은 밤을 맞은 한국기독교”라는 말로 아쉬움을 표현했다.

전체 기독교 인구 800만 명 중에서 144,000명은 별로 큰 수치는 아닐 수 있다. 2%도 되지 않아 한국교회가 정신을 차린다면 다시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할 수 있다. 그러나 해방 후 계속해서 성장하던 기독교 교세가 처음으로 줄어들었다는 사실과 줄어든 숫자 144,000명이라는 의미가 지니는 상징성 때문에 더욱 우려하는 것이다. 본래 144,000명은 요한 계시록에서 천상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서 선택 받은 1만 2천 명씩 전체 12지파 총 합계가 144,000명이다. 앞으로 한국교회가 서구와 같은 침체의 길을 걸을 것이냐 아니면 다시 세계교회 성장을 견인하는 역할을 감당할 것이냐 하는 귀로 서있다고 본다.

그동안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하던 한국교회가 왜 이와 같은 침체의 시대를 맞게 되었는지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한국교회사를 통해 성장과 쇠퇴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를 고찰하고 한국교회가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가를 조명하려고 한다.

 

I. 초기 한국교회 성장 요인

주지하듯이 1884년 9월 20일 알렌이 입국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국선교는 선교 25주년을 맞는 1909년 세계가 주목하는 선교지가 되었다. 한국선교는 불과 사반세기 만에 세계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놀라운 성장을 이룩했다. 실제로 교세는 해마다 기록을 갱신하며 급성장을 계속했다. 어떻게 복음이 전해지고 이와 같은 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는지 초기 한국교회사를 통해 고찰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의 원인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통해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점에서 선교사들과 이들의 활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초기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은 선교사들과 밀접히 연관되었다. 선교사들의 우수성, 그들이 사용했던 선교정책,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한국교회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 선교사들의 우수성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식민사관의 극복 일환으로 민족사관이 등장 교회사 연구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한국교회사를 민족교회사관으로 접근하는 시도가 나타났다. 1960년대 민족교회사관이 등장하면서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과 그들의 활동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교회사학계 일각에서 강하게 나타났다. 일부 민족운동에 기여한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비판을 받아왔다. 필자는 이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우수한 선교사들이었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였던 브라운(Arthur J. Brown)은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신학적으로 매우 건전했고, 여타 다른 나라에 파송된 선교사들에 비해 매우 우수했다고 평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신학적으로 감리교의 경우 웨슬리안 복음주의 노선에, 장로교 선교사들의 경우 개혁파 복음주의 노선에 서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를 막론하고 비교적 신학적으로 건전했다. 이들 선교사들은 한국교회를 이와 같은 입장에서 세워 나갔다.

사실 우수성에 있어서는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을 따라갈 자들이 드물다. 언더우드는 뉴브룬스 위크 신학교를 졸업하고 뉴욕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입국했으며, 아펜젤러는 필립샤프가 졸업한 하워드마샬대학을 졸업하고 감리교 최고의 신학교 드루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입국했으며, 곽안련 선교사는 시카고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학력도 우수했지만 선교사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 덕목들을 골고루 갖추었다. 이들의 심장은 복음의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거의 모든 선교사들이 순회전도를 자신의 생명으로 여기고 처음부터 일관되게 실천에 옮겼다. 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려는 구령의 열정이 이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 초기 선교사들 대부분은 조선에 입국하기 전 부흥운동을 경험하였다. 언더우드는 한국에 입국하기 전 미국에서 부흥회를 인도한 경험이 있고 펜윅는 나이아가라 컨퍼런스에서 은혜받고 선교사가 되었다. 게일은 무디의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을, 시카고에 위치한 맥코믹신학교 출신 마포삼열 이길함 방위량 편하설 같은 선교사들은 무디 부흥의 영향을 받고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다. 부흥을 경험한 이들이 부흥을 사모하는 것처럼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선교 현장에서 부흥을 사모하며 기도했다. 부흥을 사모하는 분위기가 처음부터 강하게 일어난 것도 우연히 아니다. 은혜를 받은 이들이 영혼을 사랑하고 구령의 열정에 불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신들이 부흥을 경험했고 한국교회가 부흥을 경험했다는 사실이 이들에게는 대단한 자부심이었다.

 

2. 선교정책의 탁월성

아무리 탁월한 선교사들이라 하더라고 제도적인 뒷받침이 없이는 사역의 한계에 직면하게 마련이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한국의 실정에 맞는 우수한 선교정책을 펼쳤고 이것은 한국교회 성장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선교정책은 한 마디로 직접선교와 간접선교의 균형을 이룬 정책이었다. 천주교가 직접선교를 수행해 온 것에 반해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직접선교와 간접선교의 균형을 통해 왕실과 민중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았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왕실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졌던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썼던 첫 번째 선교정책은 의료 및 교육선교였다. 1884년 6월  입국한 일본주재 미국선교사 매케이가 고종으로부터 받아낸 공식적인 선교가 의료 및 교육선교였다. 의료 선교는 한국선교의 선봉장이었다. 한국에 파송된 최초의 선교사 알렌이 공관의 자격으로 입국했고 민영익을 치료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훗날 광혜원을 설립하였다. 광혜원은 한국선교의 거점이 되었고, 서양 의술을 통해 민중과 왕실의 마음을 동시에 사로잡았다.

의료 선교와 더불어 한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교육이었다.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스크랜톤 여사, 베어드를 비롯한 초기 선교사들은 한국에 학교를 설립하였다. 언더우드가 설립한 경신학교,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 스크랜톤 여사가 설립한 이화학당, 베어드가 설립한 숭실학교는 근대 서양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이들 학교를 통해 너무도 우수한 한국인들이 배출되어 훗날 민족 지도자들이 되었다. 이화학당은 여성교육의 새로운 장을 열어 여권신장, 남녀평등사상을 정착시키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들 학교에서 교육받은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남녀 학생들을 모아놓고 교육시키면서 근대 기독교 교육이 재생산되었다.

두 번째 선교정책은 성경번역과 문서선교이다. 한국의 성경번역은 한국기독교 발전의 중심축이었다. 중국에서 번역된 존 로스 역 예수셩교젼서, 일본 이수정이 번역한 이수정 역은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 이미 복음의 확장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세상의 어느 나라도 언더우드가 입국할 때 이수정 역 성경을 가지고 입국한 것처럼 공식적으로 선교사로 입국하면서 그 나라 성경을 손에 들고 입국한 경우는 없다. 한국은 그런 면에서 남다른 나라이다. 로즈 역이나 이수정 역은 복음전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번역의 우수성에 있어서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1887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성경번역위원회를 결성하여 본격적으로 성경번역을 착수하였다. 1895년 사도행전을 비롯한 성경이 시험번역되었고, 1900년에 신약이 완간되어 한국과 일본 요코하마에서 출판되었다. 이 성경은 번역이 다듬어져 1906년 신약성경 공인역이 완성되었다. 구약 번역은 1910년에 완성되어 1911년에 구약전서가 출간되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을 통해 놀라운 성장을 이룩하기 바로 직전 신약성경이 완간된 것이다. 따라서 신약성경 완간은 시의적절했다. 한국교회는 신약성경을 통해 구원의 복음을 접하게 되었고, 복음의 확장에 중요한 몫을 했다. 기독교 서적들이 번역되거나 저술되어 출간되기 시작했다. 천로역정이 한국어로 번역되었고, 구운몽 춘향전 같은 국내 고전들이 영역되어 외국에 소개되어 선교는 한국교회의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1890년 예수셩교셔회가 발족되어 수많은 서적들이 출간되기 시작했다. 이 같은 문서출판은 한국교회의 성장을 촉진하는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권서인들이나 성서부인들이 전해준 성경을 직접 읽고 주님을 만난 경우, 길선주처럼 천로역정을 통해 주님을 만난 경우가 참으로 많았다.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세 번째 선교정책은 연합활동과 선교지 분할정책이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처음부터 연합정신을 실천에 옮겼다. 이미 한국에 파송되기 전 본국에서 연합운동에 참여하면서 연합의 중요성을 인식한 이들이었기 때문에 선교지에 와서도 연합운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협력은 곧 장로교와 감리교의 협력을 의미했고, 장로교 안에서 북장로교, 남장로교, 카나다와 호주 장로교는 독자적으로 사역하지 않고 장로교 공의회를 조직하여 서로 협력하며 선교했다. 감리교의 경우도 남감리교와 미 감리교가 한국에서 사역하면서 신학교육과 여타 사역에서 협력하며 선교했다.

선교지 분할은 연합활동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장로교 공의회는 서로의 중복을 피하면서 효율적으로 선교하기 위해 선교지 분할을 실천에 옮겼다. 1890년 한국에 파송된 헨리 데이비스가 부산으로 내려갔던 것도, 1892년 한국에 입국한 레이놀즈와 전킨 테이테 등이 전라도로 내려갔던 것도, 1893년 마포삼열과 스왈른 그래함 리가 평양으로 올라간 것도 마찬가지이다. 카나다 선교회가 함경도를 선교의 거점으로 삼았던 것도 같은 일환이다. 이와 같은 선교지 분할은 장로교와 감리교 사이에서도 준수되어 감리교의 경우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를 거점으로 선교활동을 집중하였다. 이 같은 선교지 분할은 전국을 하나의 선교 권 안에 두어 총체적으로 선교를 하도록 자극을 주었다. 비록 선교지 분할이 가져다 준 부정적인 영향이 없지 않았지만 한국교회의 놀라운 복음전파는 선교지 분할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초기 한국교회 성장을 가져다 선교정책은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사경회운동이다. 한국에 파송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20대 중반의 젊은 선교사들이라 이들은 젊음과 패가가 충만했지만 선교 경험이 부족하였다. 때문에 경험 있는 선교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1890년 선교 경험이 풍부한 존 리빙스톤 네비우스 선교사를 초빙하여 2주간의 세미나를 가졌다. 네비우스는 자신의 선교 사역 경험을 바탕으로 선교의 실패와 성공 경험담을 전해주었다. 선교사들이 여기에 근거하여 채택한 것이 네비우스 선교정책이다. 지금까지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자립 자치 자전으로 알려졌으나 1929년 곽안련 선교사가 시카고 대학 박사학위 논문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정책>에서 지적한 것처럼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근간은 성경공부에 있었다. 성경공부를 신실하게 실시하다보니 자립 자치 자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네비우스 원리를 보면 성경공부가 모든 사역의 중심이 되도록 명문화하고 있다.

 

3. 시대적 요청과 새로운 종교에 대한 열망

이 시대 기독교는 국민의 열망에 부응하는 종교였다. 불교도 유교도 샤머니즘도 민중들로부터 멀어가고 민중들이 무언가 새로운 종교를 갈망하고 있을 때 기독교가 한국에 전해졌다. 마치 갈라디아 4장 4절에 때가 차매 여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신 것처럼 19세기 말 전통적인 종교가 민중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무언가 새로운 종교를 갈망하고 있을 때 이 땅에 복음이 전해진 것이다. 한마디로 19세기 말 기독교가 한국에 전해질 당시 한국은 종교적 공백기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가장 적합한 때에 복음을 전해준 것이다.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 주님은 수천 년 동안 카이로스 때를 기다리신 것이다. 카이로스와 크로노스의 흐름을 정확히 이해하고 계신 주님께서 종교적 공백기, 무언가 새로운 종교를 갈망하고 있을 그 때 훌륭한 선교사들을 보내주셔서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 것이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개입하신 것이다.

 

II.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한 서북지역

초기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한 지역은 서북지역이었다. 한국교회사의 모든 기록과 연구 기록들은 서북지역이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의주, 소래, 평양, 선천은 그 중에서도 중심지였다. 이 중에서도 특히 평양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 복음이 놀랍게 전해진 곳이다. 1903년 <신학월보>는 서울과 평양을 이렇게 비교하면서 기술했다.

서울교회나 평양교회나 하나님을 섬기고 닑는 성경도 하나요 가는 곳도 한 곳이요 가는 길도 한 길이요 밋음과 바람이 다 갓거널 엇지하야 평양교우들은 열심히 힘쓰고 서울교우들은 잠자는 모양이니 성경의 갈아대 천국은 힘쓰는 자가 엇는다 하섯스니 이 글 보시는 교우들은 평양교우들이 열심히 힘써 하나님 섬기는 정성을 알니로다.(신학월보 1903년 10월, 427-428.)

평양과 서울의 신앙의 열기는 확실히 달랐다. 대체 왜 서북 지역 특히 평양이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하게 되었는가? 그 이유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교회 성장과 쇠퇴의 원인을 분석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일찍이 복음이 전해지고, 선교사들의 희생이 가득했던 곳이 서북지역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먼저 복음이 전해진 곳이 이 지역이다. 의주의 경우는 존 로스와 협력했던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백홍준의 고향이다. 이들이 성경번역에 참여하고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면서 이들 지역에는 일찍이 복음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들에 의해 의주, 소래에 복음의 씨가 일찍이 뿌려졌고, 평양의 경우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마포삼열을 비롯한 초기 선교사들의 관심이 끊이지 않았다. 로스 성경이 전해지고 선교사들의 발걸음이 제일 먼저 닿았던 이들 서북지역이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했다.

서북지역은 또한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의 희생이 가장 많았던 곳이다. 청일전쟁이 발발했던 곳,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의 피가 가장 많이 뿌려진 곳이다. 평양은 1866년 토마스가 순교했고, 1894년에는 이곳에서 활동하던 제임스 홀이 순교적 죽음을 맞았으며, 1895년 매켄지가 소래에서 순교했고, 의주 출신 백홍준이 봉천에서 순교했다. 1894년 전쟁의 와중에서도 선교사들은 헌신적으로 민중을 섬기며 그들의 보호자 역할을 감당했다. 이들의 희생과 헌신과 섬김을 목도하면서 민중은 기독교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청일전쟁은 단순히 청나라 근대와 일본 군대의 전투라는 도식을 넘어 전쟁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죄 없이 총칼에 맞아 비참하게 죽어갔다. 전쟁 기간 한국인들의 희생은 계속되었다. 당시 평양을 방문했던 이사벨라 비숍이 증언한 대로 평양 근처에는 수 십리 길이 피비린내로 진동하였다. 전쟁으로 너무도 많은 한국인들이 생명을 잃었고, 집을 잃었다.

둘째, 서북지역의 놀라운 성장은 성경중심의 선교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강하게 실천에 옮겨진 지역이 서북지역이었다. 사경회 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도 서북지역이다. 평양에서 열리는 사경회에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심지어 목포와 중국에서까지 평양에서 열리는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 달려왔다.

 

서울과 평양의 차이

서울과 평양은 사경회 열기에 있어서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사경회는 보통 1주에서 1달간 열렸으며 일반적으로 2주일간 열렸다. 사경회 기간에는 오전에는 성경을 공부하고 정오에는 기도하고 오후에는 전도를 나가고 저녁에는 전도집회가 열렸다. 믿는 자들이 함께 모여 은혜를 사모하는 사경회는 한국교회 성장과 부흥의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 역시 사경회 기간에 일어났다.

사경회가 가장 활발했던 서북지역에 부흥이 먼저 일어난 것은 당연하다. 1903년부터 1909년까지 한반도 전역에 놀랍게 일기 시작한 부흥은 처음 서북지역에서 시작되었다.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기도회 기간에 발흥한 원산부흥도 북부지역이었고, 1907년 1월 2일부터 15일까지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안남도 겨울남자 도사경회 기간에 발흥한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난 곳도 서북지역이다.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을 견인한 평양과 개성도 서북지역이었다. 서북 지역은 선교 초부터 영적 각성운동을 견인했다. 사경회가 활발하고 부흥을 제일 먼저 경험한 서북지역 교회가 놀라운 성장을 경험한 것은 당연하다. 서북지역 교세의 신장은 다음 지역 별 성장도표를 비교하면 더욱 확실하다.

<1900년 북장로교 교세 비교>

지역 평앙 서울 대구 부산
입교인 2,230 1,430 4 26 3,690
등록교인 10.055 3,318 40 156 13,569

서북지역이 부흥을 견인하였지만 이들 지역의 교회만 부흥을 경험한 것은 아니다.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으로 전국의 모든 교회가 부흥을 경험했다. 1907년 1월 6월까지 전국의 교회가 부흥을 경험했고, 부흥을 경험한 곳마다 놀라운 성장을 이룬 한국교회 성장이 전국적인 현상이 되었다. 특별히 대구지역, 공주, 목포 지역의 성장이 서북지역 못지않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부흥을 경험하면서 서북지역 외에 대구, 공주, 목포지역 교회 성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남한 교회 성장을 주도했다. 

위에서 고찰한대로 서북지역 교회가 급성장을 이룩한 데는 분명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하지만 서북지역의 성장의 가장 큰 요인은 교회가 필요한 지역에 과감하게 교회를 분립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거점 도시에 한 교회를 세우고 영어로 Central Church라고 불렀다. 평양지역에 세워진 장대현교회의 경우도 평양 센트럴 처치였다. 그래서 한국자료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영어 자료만 가지고 평양중앙교회라고 번역한 경우가 많았다. 거점 도시에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를 명명할 때 이 이름을 사용하였다. 평양장대현교회가 세워진 것은 1893년 6월이었다. 이 교회는 청일전쟁 이후 놀랍게 성장하면서 1903년에 남문외교회를 분립시켰고, 1905년 12월에 사창골교회를 그리고 1906년 1월 26일에 장대현교회를 분립시켰다. 장대현교회는 계속해서 교회를 분립시켰고, 장대현교회에서 분립한 교회도 성장을 거듭하면서 다른 교회를 분립시켰다. 이렇게 해서 장대현교회가 분립시킨 교회만 22교회가 넘었다. 장대현교회가 분립시켰지만 여전히 교회 규모는 줄어들지 않고 다시 채워졌고, 교회가 지역 마다 세워져 평양전역에 복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처음 실시한 한국교회 분립이 평양 지역 교회 성장의 중요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이 방법은 오늘날에도 몇몇 지역에서 시행되어 대 성공을 거두었다. 필자가 방문한 강릉 지역은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III.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최초의 교회 쇠퇴, 역사적 분석(1930년대)

교회사에 나타난 성장과 쇠퇴의 원인을 살펴보기 위해서 1930년대 분석은 더 없이 중요하다. 필자의 주관적 관점인지 몰라도 1920년대 초엽까지 장로교와 감리교가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했다. 그러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감리교가 역사의 뒤안길로 쳐지고 성결교가 그 자리를 대신 장로교와 더불어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성결교가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하는 교단으로 발전했고, 장로교는 지속적인 성장을 이룩했으며, 반면 감리교는 왜 쇠퇴하였는가?

 

1. 교회 성장 감퇴의 대표적 사례: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한국감리교회

먼저 우리는 1920년대까지 한국감리교가 부흥운동의 주역으로 한국교회 선교와 성장을 견인하다 그 후 쇠퇴의 길을 접어들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885년 미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입국하면서 시작된 감리교 선교는 장로교와 더불어 한국선교를 주도했고, 1896년 리드가 입국하여 남감리교 선교가 한국에서 시작되었다. 미 감리교와 남 감리교는 장로교와 달리 서로 각기 교단을 형성하여 한국교회 안에 정착했다. 서로 협력과 선의의 경쟁을 통해 감리교는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할 만큼 계속해서 성장했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을 주도한 하디도 남감리교 선교사였고,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에 있던 노블선교사와 평양남산현교회도 미 감리교였고, 그리고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을 견인한 리드, 갬블, 스톡스 모두 남 감리교 선교사였다. 엄밀한 의미에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장로교 장대현교회에서 발흥했지만 감리교 역시 부흥을 공유했고, 평양대부흥운동 원류가 되는 1903년 원산부흥운동을 견인한 것도 남감리교 선교사들이었다. 실제로 1901년부터 1910년까지 감리교는 한국교회 부흥을 주도한 중심세력이었다. 다음 통계가 보여주듯이 남북감리교는 이 기간 동안 참으로 놀랍게 성장했다.

<대부흥운동 기간 북감리교 성장>

연도 1907 1908 1909
교인수 33,319 37,030 38,390

그러나 감리교는 1910년대에 접어들어 쇠퇴하기 시작하다 1920년대 접어들어서는 더욱 쇠퇴에 빠지기 시작했다.

<1910년대 감리교 교세 변화>

연도 1903 1904 1905 1906 1907 1908 1909 1910
입교/학습 964 1003 1208 2921 4998 6081 7697 9809

한국교회 부흥을 견인한 감리교회가 192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왜 감퇴하기 시작했는가? 이것은 이 시대 한국교회사 이해를 위해서만 아니라 한국교회 성장과 쇠퇴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한 사람으로써 전체 교회사를 연구하면서 발견한 몇 가지 답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감리교의 교단적 방향이 사회 복음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감리교는 장로교보다도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균형을 이루며 선교했다. 아펜젤러가 복음전도와 배재학당을 통한 사회적 책임의 균형을 이루었고, 스크랜톤은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늘 현장에서 몸소 실천에 옮겼다. 복음전도와 함께 학교와 의료선교는 감리교 선교의 중요한 골격이었다. 1910년대까지도 이것은 변치 않는 감리교의 방향이었다.

그러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감리교는 사회적 책임에 더 강조를 두었고, 그것은 복음전도를 소홀하게 만들 정도로 교단적인 차원에서 사회 문제에 일 순위를 두었다. 단순히 사회적 책임을 넘어 교회의 일차적인 사역이 사회구원이라는 서구의 사회복음과 유사한 성향을 띠면서 그쪽 방향으로 흘러갔다. 선교사들이 그동안 강조해오던 순회전도나 복음전도 부흥회는 장로교에 비해 매우 약해졌다. 반면 전국주일학교 조직, 국제기관들과 연계성, 한국교회 기관들이 감리교 지도자들이 주도하기 시작했다.

둘째, 신학적 변천이다. 1920년대에 접어들어 감리교는 초기 웨슬리 복음주의 전통에서 멀어졌다. 사회복음이 교단의 흐름으로 대두되고, 성경비평학이 받아들여졌다. 이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이들은 선교사들이 아니라 한국 감리교 지도자들이었다.

예일대학 신학부와 밴더빌드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양주삼은 협성신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성경의 비평학을 조용히 받아들였고, 1930년 남감리교와 미 감리교가 연합하여 한국감리교단을 조직하면서 초대 총리사에 올라 교단을 진보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 이 때문에 윤치호는 감리교의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정경옥은 미국 게렛 신학교에서 프랭클린 롤 교수로부터 서구 자유주의 신학을 배우고 돌아와 협성신학교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공개적으로 가르쳤다. 유형기 역시 외국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감리교 교단의 문서책임을 맡고 신생사라는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아빙돈 단권주석을 비롯한 수많은 진보적인 서적들을 간행하여 감리교의 신학적 진보주의를 더욱 확대시켜 나갔다. 이용도의 신비주의 부흥은 이전의 말씀 중심, 사경회 중심의 부흥회와 달리 전형적인 부흥사 중심의 부흥운동을 전개하여 나갔다. 기성의 요한계시록 대신 아가서가 부흥회 텍스트로 등장했고, 말씀 중심보다 기도 중심으로, 성경의 권위보다 주관적 체험이 신앙의 기준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신흥우는 예루살렘 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와서는 교파를 초월하여 현대주의 사상에 기초한 적극신앙단을 조직하여 기왕의 감리교의 진보주의 성향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이처럼 양주삼은 감리교 교단을 진보적인 방향으로 이끌었고, 정경옥은 협성신학교를 그런 방향으로 주도했으며, 이용도는 신비주의 부흥운동을 통해 감리교 전통에서 벗어났으며, 유형기는 1934년 감리교 선교 50주년을 맞아 출간한 아빙돈 단권주석과 같은 진보서적의 출간을 이 일을 부추겼다. 신흥우는 적극신앙단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진보적인 흐름을 전국적인 현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감리교가 신학적 변천을 맞으면서 그 동안의 감리교와 장로교의 협력은 1930년대에 접어들어 위협받기 시작했다. 1934년 한국선교 50주년이라는 역사적 행사를 함께하지 못했고, 오히려 1934년 한국선교 50주년을 맞아 한국장로교는 복음주의연합공의회에서 탈퇴하였다.

이와 함께 감리교 성장은 심각한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이 같은 우려는 감리교 안에서도 강하게 대두되었다. 이용도의 부흥운동이 감리교 성장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오히려 감리교 안에서 정죄를 받았다. 이용도로 말미암하 신비주의 부흥운동이 등장하여 한국교회 안에 주관적 직접계시 현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이용도는 한국교회 주류 교단으로부터 정죄를 받고 예수교회를 설립했으며, 여기에 참여한 이들에 의해 이단들의 활동이 왕성해졌고 결국 한국교회의 최대 이단계보를 형성하고 말았다. 이용도 자신이 이단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한국교회의 적지 않은 이들이 이단에 넘어가도록 브리지 역할을 하고 말았다.

신학이 변천했을 때 교회가 위협을 받고 교회 성장이 둔화된다는 사실을 그대로 증명해 주었다. 신학적 변천을 맞은 영국의 감리교, 독일의 교회, 미국의 장로교와 감리교가 계속해서 쇠퇴의 길에 접어든 것은 신학과 교회 성장이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늘날 감리교는 처음 시작될 때 웨슬리의 전통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 결과 영국과 미국에서 감리교는 엄청난 쇠퇴를 하고 있고 영국의 감리교는 성공회에 흡수될 운명에 처해 있다. 미국의 감리교도 급속히 쇠퇴하고 있다. 신학적인 변천을 맞게 될 때 교회의 쇠퇴가 이어진다는 사실을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신학적 변천이 교회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사례는 감리교만 아니라 다른 교파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영국의 장로교는 구체적인 사례이다. 스코틀랜드, 영국, 웨일즈의 장로교는 이제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망가졌다. 그 옛날의 화려했던 부흥의 역사가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이들 지역의 교회를 돌아보는 이들에게는 과연 이들 교회가 세계 선교를 주도했던 나라였는가 하는 의심을 자아낸다. 오늘날 스코틀랜드에서 100명이 모이는 교회는 대단한 교회다. 신학적 변천과 깊이 맞물려 있다.

아일랜드 얼스터 지역의 장로교는 예외였다. 아호힐과 켈스를 방문했을 때 이들 장로교회는 한국과 다를 바 없을 만큼 역동적이었다. 주일예배, 저녁예배, 수요예배, 성경공부가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교인들도 열심히 교회에 참석했다. 켈스의 경우 전체 도시 인구가 1600명가량인데 그 중에 400명이 모이는 장로교회가 3개나 있었다. 전체 인구 4분의 3이 교회에 출석한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아일랜드 교회가 성장하고 있는가를 물어보자 켈스 장로교 담임 목사 컬크는 지금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그대로 준수되고, 성경의 무오성이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성경공부가 체계적으로 시행되고 있고 공예배가 그대로 지켜지고 있다고 말했다. 스코틀랜드 모 교회와의 관계를 묻자 스코틀랜드 교회가 “너무 자유주의로 흐르고 말았다”(too liberal)고 잘라 말한다. Kelly가 <왜 보수주의 교회가 성장하는가>에서 말한 것처럼 신학적 입장과 교회성장은 모종의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 학적 변천을 맞은 교단들이나 교회들이 외부적인 도전이 왔을 때 쉽게 무너져 내렸다. 장로교와 감리교의 교세 차가 심화되면서 1930년대 중엽에 이르러 양 교단의 교세 차는 훨씬 더 벌어지기 시작했다. 다음 도표가 이를 그대로 보여준다.

<장로교 감리교 교세 비교>

  1930 1931 1932 1933 1934 1935 1936
감리교 22,685 23,448 24,278 24,615 24,451 24,793 25,597
장로교 194,678 208,912 258,216 281,918 298,430 323,974 341,700
장감대비 11.65% 11.22% 9.40% 8.76% 8.45% 7.65% 7.49%

 

2. 성결교: 주류 교단으로 부상한 성결교

1907년 동양선교회라는 이름으로 처음 시작된 성결교가 1930년에 접어들어 주류 교단으로 편입되었다. 시작은 참으로 미미했으나 끝은 창대케 된 대표적인 교파가 되었다. 1925년 성결교는 26개 교회 10개 기도소 37명의 전도인에 2000명의 교세를 가진 교단이었다.(2권 418) 이때까지도 성결교는 교세가 참으로 작았다. 1928년에는 63교회, 43기도소 장년 3726명과 주일학생 4357명으로 교세가 급증했고, 1932년에는 한 해 동안에 50개 교회가 새로 설립되었고 2000명이 세례받았으며 1만 5천명의 새 신자가 증가했고, 주일학생이 3천명이 증가했다. 1933년 4월 11일부터 16일간 경성성서학원에서 열린 총회 때 성결교는 200교회 2만 성도로 급증했다.

장로교나 감리교처럼 외국 선교회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은 것도 아니고 외국선교사들이 대거 입국한 것도 아닌데도 어떻게 성결교가 놀랍게 성장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성결교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견줄 수는 없지만 강력한 부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물론 중생, 신유, 재림, 성결 4중 복음에 대한 철저한 실천이 가장 중요한 부흥 요인 중에 하나였지만 근본적인 요인은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전국적으로 성결교가 경험한 놀라운 부흥이었다. 부흥을 경험한 성결교는 복음전파와 부흥회를 강조했고, 1930년대에 접어들어 정남수를 비롯한 부흥사들이 이 일을 주도했다. 1932-34년 사이에 일어난 놀라운 성결교 부흥운동은 성결교회 성장의 주된 요인이었다.

 

3. 계속적인 장로교 성장

연도 세례교인 총수 학습교인 총수 전체 교인 전체 출석교인
1918 68,506 22,206 149,526 131,912
1919 69,047 18,663 160,909 110,136
1920 69,025 20,083 144,062 122,156
1921 72,138 26,526 152,915 152,053
1922 75,866 29,709 179,158 156,392
1923 94,564 30,896 187,271 161,299
1924 83,325 29,149 193,850 154,380
1925 89,879 29,589 191,887 157,674
1926 91,266 27,323 193,623 155,399
1927 94,728 25,928 161,060 147,056
1928 87,983 25,640 177,416 150,308
1929 90,544 25,079 186,994 143,734
1930 91,270 28,271 194,678 157,501
1931 94,728 30,751 208,912 183,274
1932 104,578 36,055 258,216 185,232
1933 103,530 39,325 281,918 218,231
1934 108,392 38,752 298,430 240,707
1935 115,379 41,239 323,974 274,356
1936 119,955 42,972 341,700 288,338

1918년부터 1936년까지 장로교 통계가 보여주듯이 한국장로교는 꾸준하게 성장을 계속했다. 이와 같은 지속적인 성장 요인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감리교와 장로교의 현격한 교세 차이의 이유와 성결교의 급성장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근거를 제공할 것이다.

첫째, 한국장로교는 1907년 부흥을 경험한 선교사들이 계속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며 이끌어왔다. 부흥을 경험한 선교사들이 각 지역에서 교회를 맡아 선교활동을 주도했다. 예를 들어 마포삼열의 경우 평양의 장대현교회와 서문외 교회를 맡으며 계속 영향을 미쳤고, 1922년까지 평양신학교 교장으로 신학교 운영과 방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주도한 스왈른, 블레어, 번하이젤, 헌트가 각 선교구와 교회 공동목회를 통해 영향력을 계속 미쳐왔다. 스왈른은 남문외교회를, 번하이젤은 산정현교회를, 블레어는 사창골교회를, 마펫은 서문외 교회 안에 중요한 리더쉽을 발휘하여 처음 가졌던 그 정신을 계속 계승하도록 영향력을 미쳤다. 이것은 다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둘째, 한국장로교는 부흥운동을 계속해서 경험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이후에도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 그리고 1920년 김익두 부흥운동이 그것이다.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전국적으로 진행된 성결교부흥운동에도 장로교가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비록 부흥운동을 지속적으로 경험하지 못했어도 사경회운동이 계속되면서 장로교인들은 전국적으로 영적인 영향권 아래 있었다. 1920년대 진흥운동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신학적인 입장을 견지해왔기 때문이다. 1930년대 접어들어 김재준 채필근 송창근을 통해 신학적 도전을 받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장로교 목회자들은 선교사들이 전해준 개혁파 복음주의 신학적 입장을 견지했고 마펫이나 기타 선교사들도 신학적 변천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해왔다. 박형룡 박사가 귀국하여 신학적 보수성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감리교의 경우 선교사들에서 한국인 지도자들로 리더십이 바뀌면서 신학적으로 복음주의에서 진보주의 방향으로 변천을 맞았으나 장로교의 경우는 그 같은 변화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총회 안에 있는 보수적인 기류에다 선교사 1세들이 아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평양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이 비교적 건전했던 것도 변천을 막는데 중요한 몫을 했다.

다만 1930년대에 접어들어 한국 장로교 안에서는 기성의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균형이 서서히 깨지고 복음전도에 집중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복음의 대 사회적 책임이 약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같은 현상은 언더우드에 비해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강조가 적었던 마포삼열이 이끌었던 평양신학교, 평양이 한국장로교회를 주도한 데다 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박형룡 박사를 비롯한 보수적인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사회적 책임 구현보다 더욱 더 복음전도, 신학적 보수성을 강조하는 방향에서 교회를 이끌어 갔기 때문이다. 또한 일제의 침략 하에 있는 열악한 사회적 현실, 농어촌교회의 어려움으로 사회적 책임을 구현하기 힘든 여건이 조성된 것도 한 몫을 감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교회 특히 한국장로교회가 사회적 현실을 완전히 도외시한 것은 아니다. 농촌문제를 비롯하여 사회적 문제를 끌어안으려는 진지한 노력들이 있었음을 주목한다. 다만 감리교에 비해 사회문제에 둔감했다는 점에서, 복음전도에 일차적인 생명을 걸었다는 점에서 과거 보여주었던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균형이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넷째, 한국장로교는 1938년 신사참배를 결정하기 전까지 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했다. 하지만 그 후 한국장로교 역시 정통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1935년부터 45년까지 한국교회는 신사참배의 도전으로 형극의 길을 걸아야 했다.

 

IV.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성장 진단 (1945~1992)

필자의 주관적인 관점인지 몰라도 1945년부터 1992년까지 한국교회사는 교회성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크게 3시기로 대별할 수 있다. 첫째는 1945년부터 1960년까지 대립과 분열의 시기, 둘째는 1960년부터 1988년까지 급성장의 시기, 그리고 셋째는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정체기로 대별할 수 있다.

 

1. 대립과 분열의 시대 (1945~1960)

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새로운 환경에 직면했다. 이 시대 교회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

첫째는 해방과 더불어 찾아온 남북의 대립이다. 남북의 대립, 신학적 대립,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대립, 신사참배 청산을 두고 벌어진 대립, WCC와 NAE의 대립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교회 성장을 주도하던 이북 지역은 소련 공산당의 진군, 김일성 공산정권의 등장으로 또 다시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이 기간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신학적 대립은 마치 현대주의 대 근본주의 논쟁을 연상시킬 만큼 첨예하였다.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대립은 단순히 남북의 대립이라는 차원을 넘어 북한에서이든 남한에서이든 첨예하게 진행되었고 어떤 형태로든 교회가 이 문제에 깊이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에서는 조선기독교 연맹이 북한의 교회 말살 정책에 창구 역할을 감당했고 북한의 교계 지도자들 가운데 일부는 이 일에 전투적으로 앞장섰다. 결국 북한의 교회는 외형적으로 역사에 사라졌다. 수많은 이들이 자유를 찾아 남으로 넘어왔다.

둘째는 6.25 전쟁이다. 전쟁으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남하했다. 이들은 남한 교회의 지도력을 강화시켜주었고, 남한 교회 발전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셋째는 교회 분열이다. 해방 후 남한의 교회는 교파를 막론하고 분열의 분열을 거듭했다. 장로교의 경우 1952년, 1953년, 1959년 3차례 대분열을 경험하면서 4조각으로 나뉘고 말았다. 감리교와 성결교 침례교도 분열했다. 이 시대 교회의 분열은 신학적인 요인이 작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한국교회에 너무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말았다.

넷째는 과거 청산의 문제다. 친일청산과 신사참배 청산은 한국교회가 직면한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친일청산은 친일에 앞장섰던 이들이 교단을 장악하고 주도하면서 친일청산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사참배 문제가 청산된 것이 아니었다. 1946년 남부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다루어졌고 1954년 신사참배 문제가 총회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졌지만 실제로 신사참배 청산에 한국교회 모두가 동참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이 두 가지 문제는 한국교회의 숙제로 남겨졌고, 이 때문에 과거사 잘못에 대한 정확한 지적이 이후 약화되고 말았다. 친일 세력들은 친일 문제를 죄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고 상황윤리로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신사참배 문제 역시 어쩔 수 없는 문제로 여겼다.

다섯째, 교회에서 치리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해방 전까지 엄격하게 시행되어 오던 권징문제가 해방 후 시들기 시작했고, 타 지역 교회로 이명하는 이들에게 이명증서를 철저하게 발급하던 현상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교회 권징과 이명증서의 불이행이 교회의 영적 질서를 한층 혼잡하게 만들어 교회 치리를 어렵게 만들었고, 자연히 교권이 쇠퇴해지기 시작했다.

여섯째, 이승만 대통령의 등장 이후 교회 지도자들이 정치 일선에 뛰어든 일이다. 정교분리 현상이 깨지고 정교일치 현상이 등장하면서 교회의 세속화가 더욱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일곱째, 사회적 종교적 혼란을 틈타 이단들이 대거 등장한 일이다. 문선명의 통일교, 박태선의 천부교, 나운몽의 용문산 기도원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들 이단들이 하나의 교단을 형성하여 한국교회 안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기성교회 지도자들이 후원자 역할을 감당한 셈이 되었다. 과거 이용도 목사의 예수교회가 그렇고, 수표감리교가 나운몽을 장로로 임직한 것과 김치선의 창동교회가 박태선을 장로로 임직한 것이 그 대표적 사례들이다.

전쟁과 신학적 문제, 신사참배와 과거 청산 문제, 대립과 갈등으로 특징되는 이 시대 사회는 새로운 리더십을 요구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시대 한국교회를 대변하는 두 사람의 리더십의 차이는 이 시대를 조명하는 매우 중요한 케이스 스터디가 될 것이다. 한 사람은 남대문교회를 담임하면서 한국교회 최고의 설교자로 알려진 김치선 목사와 영락교회를 설립하여 새로운 리더십을 발휘하던 한경직 목사를 들 수 있다. 김치선 목사는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달라스 신학교를 졸업한 최고의 학력을 가진 목회자였다. 게다가 일본에서 목회를 하면서 국제적인 감각까지 겸비한 지도자였다. 박형룡 박사와의 관계나 선교회와의 관계에서 그는 뛰어난 실력과 갖춘 인물이었다. 남대문교회를 담임하면서 사람들이 그 교회로 몰려들어 감당하기 힘든 상황도 한 때 있었다. 그는 당시 교회의 일차적인 사명이 민족복음화라고 생각하고 삼백만구령운동과 복음전도에 전념했다.

반면 한경직 목사는 피난민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는 등 복음과 빵을 동시에 제공하였다. 1949년 처음 내한하여 복음전도와 구제활동을 동시에 수행하던 밥 피얼스는 처음 김치선과 손을 잡고 부흥과 구제활동을 펴다 김치선 목사가 복음전파에만 집중하고 사회문제에 별 관심이 없자 복음전파와 사회적 책임 모두에 깊은 관심을 가진 한경직과 손을 잡기 시작했다. 한경직은 복음과 빵을 동시에 제공하는 전형적인 모델이 되었다. 피란민들에게 양식과 숙소와 입을 것을 제공하며 남한 사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고, 고아원을 운영했으며, 학교를 설립하여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다. 한경직 목사는 한국사회에 아름다운 교회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결국 영락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고 김치선은 남대문교회를 나와 창동교회를 설립했지만 영락교회와 비교할 수 없는 미미한 교세였다. 한경직 목사는 교회가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를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김치선은 대한신학교를 설립한 반면 한경직은 대광고등학교 영락중학교 고등학교 고아원  인천 제1교회, 주천교회, 영등포대방교회, 인천송도교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를 개척하였다. 르네 모노드(Rene`Monod)가 <한국부흥운동>(The Korean Revival)을 기술하면서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한국교회 부흥운동을 서술할 만큼 영락교회는 외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을 수 있는 눈은 단순히 신학적 지식만 가지고는 안 된다. 변하지 않는 복음을 변하는 세대에 가장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인가를 읽을 수 있는 역사적 안목을 갖춰야 한다. 김치선은 복음전도가 교회가 해야 할 유일한 사명이라고 여겼고, 사회적 문제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1930년대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유학하면서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분리주의적 사고가 그의 사고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반면 한경직은 사회적 책임과 문제를 교회가 동시에 감당해야 한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영락교회와 한경직이 한국교회에 중요한 리더십을 발휘하기 시작한 가장 주된 요인이었다. 김치선의 리더십은 한국교회 보수주의 교단의 향방을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한국교회 최대 성장기 (1960~1988)

1960년부터 1988년까지 한국교회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이후 제 2의 성장기를 맞았다. 이 기간 한국교회는 1973년 빌리그래함 서울전도대회, 1974년 엑스폴로 74, 1977년 민족복음화대성회, 1980년 세계복음화 대성회 같은 대중전도운동을 통해 놀라운 성장을 구가했다. 1984년 한국선교 100주년을 맞는 그 때 한국교회는 세계가 주목하는 위치로 부상했고, 빌리 그래함은 자신의 생애 처음으로 100만이 넘는 인파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기적을 경험했다. 이 시대 한국사회는 전환기를 맞았다. 1960년 4.19혁명에 이어 1961년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73년 3선 개헌,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같은 굴직한 사건을 만났고, 1988년 올림픽이라는 세계적인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정치적으로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등장하여 1979년 서거할 때까지 20년 동안 탄압과 압박을 받아야 했고, 다시 12. 12사태가 발생하여 전두환 대통령이 등장하고 이어 노태우 대통령이 등장하여 군사정권의 연장에 놓이게 되었다. 교회는 인권 문제를 두고 견해차를 보였다. 진보주의 노선의 교회는 인권문제에 민감했고 반면 보수적인 교단의 교회는 인권 문제를 묵인하는 현상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군사정권 하에서 한국은 경제적인 면에서 놀라운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는 역시 노동력 착취 현상과 농촌문제였다. 수출 증산 정책으로 노동력이 부족했고, 수많은 시골 젊은이들이 돈 벌러 도회지로 몰려들었다. 시골교회 출신 젊은이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도시교회는 급성장을 계속했다. 도시 교회는 계속해서 성장했고 시골교회는 급격한 하락 시대를 맞았다. 시골교회 목회자들이 도시로 대거 임지를 옮긴 것도 이 때다.

산업화는 도시 집중화 현상을 초래했다. 자연히 도시 인구 집중화를 분산시키기 위한 신도시 개발이 불가피했다. 강남을 시작으로 개발이 시작되면서 과천, 분당, 일산이라는 신도시가 형성되어 이주하는 교인들이 늘어나면서 도시교회는 줄어들고 신도시에 새로 성장하는 교회들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목회 환경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성장을 촉진시킨 요인들

이런 시대적 상황에 교회가 놀라운 성장을 이룩한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1973년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였다. 1973년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가 서울 여의도에서 열렸다.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를 시작으로 그 이듬해  CCC 김준곤 목사님이 중심이 된 엑스폴로 74가 열렸고, 이어 1977년과 1980년에도 그 같은 전도집회가 계속되었다. 한국교회에 이 같은 놀라운 전도집회가 열리면서 한국교회는 제 2의 전성기를 맞기 시작했다. 자연히 대학 안에 초교파 선교단체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이 때 활동하던 젊은이들이 한국교회 지도자들로 부상했다.

둘째, 활발한 선교활동이다. 복음을 접한 이들이 해외 선교를 지망했고, 적지 않은 이들이 실제로 해외로 나갔다. 교회는 해외 선교를 한국교회 성장을 주신 목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초교파 선교단체를 통해 은혜를 받은 이들이 해외선교를 지망하여 선교의 인적자원이 풍부한 것도 해외 선교를 진작시킨 중요한 요인이었다.

셋째, 이 시대 대형교회들이 등장하였다. 영락교회와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등장한 후 한국교회 안에는 수많은 대형교회들이 이 시대 등장하기 시작했다. 곽선희 목사님의 소망교회, 김삼환 목사님의 명성교회, 옥한흠 목사님의 사랑의교회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대형교회는 한국교회 안에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였다. 대형교회를 지향하는 목회관과 목회철학을 자연스럽게 이식시켜 많은 젊은 목회자들이 대형교회를 꿈꾸기 시작했다. 큰 교회가 은혜로운 교회라는 도식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은혜로운 교회로 인식되기 위해서라도 대형교회를 속히 만들어 가야 했다.

넷째, 한국교회 안에 새로운 성장의 모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성령운동과 구역조직을 통해, 소망교회는 설교를 통해, 명성교회는 새벽기도를 통해, 사랑의교회는 제자훈련을 통해 성장의 모델을 보여주었다.

이 시대에 한국교회에 나타난 몇 가지 두드러진 현상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교회 건축 붐이다.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교회 건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새로 건축되었다. 교회가 새로 크게 건축되면 그만큼 교회 성장은 가속화되었다. 이런 현상이 계속되다 보니 작은 교회도 교회 성장의 돌파구로 교회 건축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경우들이 생겨났다. 무리해서 그 일을 추진하여 교회를 크게 완성하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인식되고 목회 영웅담으로 마저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 재정의 절대적인 면이 교회 건축에 쏟아 부어졌다. 심지어 몇 년도 되지 않아 교회를 다시 건축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둘째, 교회가 기도원을 건립하고 묘지를 구입하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1950년대 용문산 기도원, 1960년대 삼각산 기도원, 1970년대 오산리 순복음기도원, 한얼산기도원, 대한수도원으로 상징되는 기도원운동이 한국교회 안에 활발하게 일어났다. 성령운동이 일기 시작하면서 은혜를 받으려는 이들이 기도원에 몰려들어 몇몇 기도원은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 때문에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교회들은 자체 기도원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오산리 순복음금식기도원처럼 기도원 옆에 묘지를 구입하는 현상도 등장하다 보니 교회 재정의 상당 부분을 여기에 투입하게 되었다.

교회성장이 교회 부를 가져왔지만 교회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본래의 나눔의 실천 사명을 잃어버리고 교회가 그 부를 축적하는 현상이 등장했다. 목회자는 그 부를 누리기 시작했고, 자연히 교회가 복음전파와 대 사회적 책임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개 교회주의로 흐르기 시작했다. 만약 이 시대 교회가 기독교 학교를 세우거나 유치원을 세우거나 대학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투자했다면 오늘날 교회는 사회와 민족으로부터 외면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셋째, 계속되는 교회 분열이다. 특히 1959년 통합과 합동의 분열 이후 합동교단은 한국교회 분열을 주도하였다. 1979년 소위 비주류의 분열, 1980년 합동신학교의 분열 이후 또 다시 비주류는 사분오열되고 말았다. 끝없이 계속되는 교회 분열은 한국교회 안에 너무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한국교회 안에 연합정신을 송두리째 앗아갔고, 개교회주의를 강하게 정착시켜주었다.

넷째, 무자격 목회자의 양산이다. 교회가 급성장함에 따라 목회자 수급이 뒤 따라야 하는데도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했다. 개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교회 안에 신학교를 운영하는 현상마저 등장했다. 한국교회 안에 수많은 무인가 신학교들이 등장하여 사회문제화되기 시작했다. 총신이라는 이름의 수많은 신학교들이 역사에 등장한 것도 이 시대 일이다. 1982년 총신에 제가 입학 할 때 어느 학생이 방배동 총신에서 1년을 다니다 왔다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을 들었다. 택시를 타고 총신에 가자고 했더니 택시 기사가 방배동 총신에 내려주어 그곳 입학시험을 치르고 수업을 하다 사당동에 자신이 본래 가려던 총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시험을 쳐서 총신대학 신대원에 진학했다는 이야기였다.

수많은 무인가 신학교는 충실한 커리큘럼에 따른 신학교육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교수진도 부진한 가운데 속성으로 목회자를 양성했다. 총신에 입학시험을 쳤다 떨어진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1년 만에 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둔갑하여 편목으로 총신에 입학한 경우도 있었다. 제가 섬기던 어느 교회의 주일학교 부장이었던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은 미국 이민을 간 다음 목사가 되었다. 속성으로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이다. 무자격 목사들이 양산되면서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해 교회는 사회로부터 외면되기 시작했다. 신학교 수준의 저하는 곧 목회자들에 대한 평단 저하로 이어져 젊은이들이 교회로부터 등지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었다.

다섯째, 천주교와 기독교의 차별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목회자 수준, 계속된 분열, 대 사회적 책임의 상실, 지나친 물량주의 현상이 기독교를 상징하는 동안 캐톨릭은 강력한 이미지를 한국 사회에 심어주었다. 군사정권 하에 민주주의 의식이 강력한 이슈로 등장하고 있는 때에 김수환 추기경은 정부에 대해 할 이야기를 제 때에 잘했다. 반면 기독교 지도자들은 3선 개헌이 있을 때나 전두환 군사정권이 등장했을 때도 이를 지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정교 분리라고 하면서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철저하게 금지해온 교회가 정부를 지지한다는 어용적인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특히 보수적인 교단이라고 하는 교회가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말았다. 천주교는 이 시대 선명하게 기독교와 차별화되기 시작했다. 이런 차별화가 훗날 천주교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고 천주교 성장의 동력으로 작용한 것이다.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선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어용 기독교는 당대에서는 정권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지 모르지만 콘스탄틴 대제가 보여주는 것처럼 교회의 세속화를 앞당겨 다음 세대 교회 성장의 쇠퇴를 가져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3. 한국교회의 정체기 (1988~1992)

88 올림픽은 한국을 세계의 반열에 당당하게 올려놓았다. 컴퓨터, 자동차, 전자제품이 외국에 수출되기 시작했고, 해외 이민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확실히 88 올림픽은 한국의 위상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주었다. 한국 교인들 가운데 이 같은 놀라운 경제성장이 기독교 성장 때문이라고 인식하는 경향마저 있었다. 한국교회가 놀랍게 성장한 요인이 세계선교를 위해서라고 말하기도 했다. 전 세계에 선교사들이 파송되어 해외 선교는 한국교회의 최대의 과제로 부상했다. 교회마다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 하나의 두드러진 경향이 되었다. 외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민간외교 역할을 감당하고 외국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들을 신앙으로 엮는 경제성장의 간접적인 기여자가 되었다.

이런 놀라운 경제성장과 해외 선교열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 한국교회는 정체기를 맞았다. 왜 이 시대 한국교회가 정체기를 맞았는지 몇 가지 그 가능성을 찾으려고 한다.

첫째, 한국교회의 물량주의와 세속화 현상이다.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간과하고 이기적인 개교회주의, 물량주의로 나아가는 현상을 보면서 1970년대 젊은이들이 교회로 몰려들던 현상과 달리 젊은이들이 교회를 등지기 시작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보여주는 용기를 기독교 지도자들에게서 찾을 수 없었던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둘째, 지나친 경쟁이다. 강남 개발을 시작으로 등장한 신도시는 목회 환경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충현교회가 강남으로 이전했고, 충신교회나 창신교회 같은 수많은 교회들이 강남으로 이전했다. 교회의 지각 변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 시대 이주한 교회나 신도시에 개척을 시작한 교회는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성장하는 교회로 떠오르기 위해서 불신자의 전도에 초점을 두기보다 이주하는 성도들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기 시작했다. 불신자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일에 몰두하기보다 타 교회와 다르다는 차별화를 강조하며 자기 교회 자랑에 초점을 두며 교회를 이끌었다. 때문에 일정한 거리를 두거나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설립하던 현상은 더 이상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한 건물에 두 개의 교회가 있는 곳도, 길거리를 두고 3개 4개의 교회가 청계천 책방처럼 밀집된 곳도 생겨났다. 교회의 에너지를 불신자 전도에 쏟아야 될 교회가 이제는 타 교회와 경쟁하며 자기 교회를 자랑하는 데 정렬을 쏟기 시작했다. 대형교회화 현상, 교회의 물량주의 현상이 발생한 결과들이었다. 한국교회가 전체 한국교회를 생각하는 공동체의식, 유기적 교회의식이 사라져 버렸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자신의 자식들이 다 화목하고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하듯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 땅의 교회들은 다 주님의 아름다운 교회로 세워져 가야 할 것이다.

셋째,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빛과 소금의 기능을 상실했다. 기독교인들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기준은 확실히 다르다. 더욱 더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요구되는 기준은 더 높고 크다. 그런데도 1980년대 접어들어 한국교회는 세상에 동화되고 세속화되었다. 직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모습은 불신자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넷째, 신학적 변천이다. 한국교회는 1970년대와 80년대를 지나면서 신학적 자유주의화 현상이 강하게 나타났다. 감신, 연신, 한신으로 대변되던 토착화신학과 자유주의 현상이 장신으로 확대되면서 한국교회의 주류는 복음주의 노선인데 신학교는 자유주의가 점령하고 말았다. 종교다원주의와 토착화 신학 민중신학이 한국교회 안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주관적인 판단인지 몰라도 기독교 방송도 본래의 선교 방송의 기능을 포기하고 일반 방송국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종교다원주의 현상이 옹호를 받고 천주교와 불교가 연합찬양대를 구성하는 것이 예찬되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신학교 정문에 4월 초 팔일에 석가탄생을 예찬하는 일들이 미덕으로 여겨지고, 종교 다원주의를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신학으로 인식되는 이상한 현상이 등장했다. 기독교 유일성과 기독교만 구원의 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독선과 잘못된 신앙의 아집으로 평가되는 일들이 생겨났다.

이 시대를 한 마디로 집약하면 교회가 놀라운 성장을 구가했는데도 대 사회적 책임을 게을리 하면서 사회와 민중들로부터 외면당하였고, 결국 교회는 정체 시대를 맞고 말았다. 이어 찾아온 것은 교회의 침체기다.

 

V. 한국교회의 침체기 (1992~현재)

1988년부터 1992년까지 4년간 정체기를 지난 한국교회는 그 후 침체기를 맞았다. 1992년부터 한국교회는 급속하게 침체되기 시작했다. 어느 시대 교회가 침체기를 맞았는가는 다음 몇 가지를 살펴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첫째, 외형적인 교세의 하락이다. 비록 통계상으로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실제 목회 현장에서 상당수의 교회가 수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주보에 통계를 밝히던 교회가 이때부터 출석 통계를 주보에 내지 않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제일 먼저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청년부와 대학부, 그 다음이 중고등부, 그리고 이어 주일학교 학생들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외형적인 교세의 하락은 그 시대 교회가 성장하고 있는지 쇠퇴하고 있는지를 평가하는 바로미터다.

둘째, 교회의 질적 하락이다. 적극적인 성경공부 참여, 교회 행사 참여, 기도회 참여, 주일저녁과 수요예배 금요 기도회와 새벽기도회 참여 열기, 그리고 교인의 헌신도는 질적 수준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들이다. 이 점에서 볼 때도 한국교회는 분명 쇠퇴의 길에 접어들었다.

셋째, 신학교 지원자 수의 감소이다. 1992년 이후 신학교 지원자 수가 급격하게 감소되었다. 심지어 무인가 신학교까지 학생들로 넘쳐나던 시대는 지나고 교단 신학교가 아니면 학생들을 채우기 힘든 현상이 도래했다. 통합과 합동의 경우는 예외라고 하지만 지난 5년간은 총신도 영향을 받고 있다.

넷째, 신학으로 유학하는 학생들이 급감하고 있다. 신학으로 유학하는 학생들이 1980년대는 참으로 넘쳐나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트리니티, 풀러, 칼빈, 리폼드, 서든 침례교 신학교를 비롯한 유수한 신학교는 한국 학생들이 없으면 학교 경영이 어렵다는 이야기가 들릴 정도였다. 그러나 1990년대 중엽에 접어들면서 이들 학교에 신학생이 급감했다. 1994년 칼빈신학교, 트리니티 신학교를 방문했을 때 유학생 수가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선교사 파송 수자이다. 199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선교사 파송은 줄어들지 않고 늘어나고 있다. 해외 선교운동이 한국교회를 버티는 버팀목이다. 그러나 이것도 얼마 가지 않아 줄어들 조짐을 보이고 있다. 각 신학교에 선교사를 지망하는 선교 후보생들이 현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선교 열이 시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총신의 선교열을 대변하는 것이 낙도 선교회다. 전국적인 네트웍을 가질 만큼 대단한 낙도선교회가 이제는 유명무실한 서클로 전락해 가고 있다. 선교사 수자가 계속해서 늘어간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만 앞으로도 계속 선교열이 지속될 것이라는 보장을 하기 힘들다.

오늘날 한국교회 현주소는 밝지 않다. 외형적으로 교세가 하락하고 질적으로도 둔화되고 있고 신학생들의 지원이 현격하게 줄어들고 신학으로 유학하는 학생들이 눈에 띠게 감소하고 있다. 다만 선교사 파송이 줄어들지 않고 계속되고 있어 다행이지만 앞으로 이것마저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 올지 모른다. 분명 한국교회는 침체기를 맞고 있다.

1992년 이후 왜 이와 같은 한국교회 쇠퇴 현상이 등장했는가? 물론 하나님만이 정확한 답을 아실 것이다. 하지만 교회사적으로 볼 때도 문제는 분명하다.

첫째, 한국교회는 내부적인 도전과 외부적인 도전을 적절하게 막아 내지 못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 비추어 볼 때 교회는 이단이라는 내부적인 도전과 박해라는 외부적인 도전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박해를 통해 교회를 말살하려던 사탄은 이단을 통해 교회를 말살하려는 정책을 구사하였다. 초대교회는 이 두 가지를 잘 막아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단이라는 내부적인 도전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1992년 10월 28일 재림론이 역사에 등장하였다. 이 재림론은 1980년대 중반부터 일기 시작하다 1992년 10월 28일에 정점으로 이루었다. 이장림으로 거점으로 한 이 사건은 온통 한국사회를 뒤흔든 사건이었고, 수많은 가정이 파괴되었고, 흔들리는 교인들이 이로 인해 교회로부터 등을 돌렸다.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이단과 정상적인 교회와를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이 없었다. 때문에 극단적인 재림론자들의 모습이 기독교의 모습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한국교회가 1992년부터 침체를 달리기 시작한 가장 주된 요인이 10월 28일 재림론으로 인한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확산이었다. 한국교회를 공격하려는 사탄의 전술에 한국교회가 그대로 말려들고 말았다. 놀라운 사실은 기성교회 목회자들 가운데 너무도 많은 수자가 이 재림론을 자신들의 종말론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정작 이장림은 이를 믿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한국교회는 외부로부터의 도전도 막아내지 못했다. 오늘날 사탄은 박해라는 물리적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세속화라는 전혀 박해라고 느끼지 못하는 현대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교회를 공격하였다. 교회 지도자들이 쉽게 이 도전에 말려들었고, 무릎을 꿇었다. 주일 오후 예배 시간을 저녁에서 오후 2시 혹은 3시로 옮겼다. 교회 근처에 살던 교인들이 신도시에 분양 받아 멀리 이사 가는 현상들이 일반적으로 나타나 이들이 집으로 갔다 저녁에 다시 와서 저녁 예배를 드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판단하여 배려한 처사였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한국교회의 전통과 배치되는 모습이었다. 전통적으로 한국교회는 주일에 3번 예배를 드렸다. 주일 오전에는 성경공부를 했고, 오후에는 설교 중심의 보통 오늘날의 주일오전예배를 드렸고, 저녁에는 부흥집회 형식으로 드렸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당시에도 주일 3번 예배를 드리던 것이 오늘날에는 주일 오전과 저녁 예배 둘로 정착이 되었다. 열심 있는 교인들을 영적으로 재무장시키는 역할을 주일 저녁예배가 해왔던 것인데 주일 저녁예배가 오후예배로 바뀌어 지면서 성경공부 형식의 예배 혹은 일종의 교제 형식으로 바뀌면서 교인들을 영적으로 훈련시킬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심지어 주일저녁예배를 오후예배로 바꾸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주일저녁예배를 가정예배로 대신하는 경향마저 나타났다. 공교롭게도 한국교회가 이단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던 1992년 전후 주일저녁예배를 오후예배로 바꾸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정착하고 말았다. 교회는 끝없이 현실과 타협하는 일에 앞장섰다. 수요예배를 오전과 저녁으로 나누어 편의에 따른 예배가 진행되면서 기도회 중심의 수요예배가 힘을 잃어갔다. 교회 안에 남녀 전도회가 순수한 기도와 전도를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일종의 친목단체처럼 되어 버렸다.

둘째, 목회자들의 안주다.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서 목회자들의 열심이 식어지기 시작했다. 새벽기도, 주일 오전 오후 수요예배를 전담하며 설교하던 열심들이 시들어지면서 새벽기도를 부교역자들에게 맡기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담임 목사가 교회에서 멀리 이사 가는 목회자들도 생겨났다. 교인들에게는 여전히 헌신과 열심을 강요하면서도 정작 교역자들은 실제로 그렇지 못한 경우가 생겨났다. 목회자들이 목양에 전념하다 어느 정도 안정되면서 교회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영적생명력이 급격하게 시들어지고 교회가 하나의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교인 중에는 안수집사 장로 같은 임직을 하나의 서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교회의 충성을 본래의 주님에 대한 신앙, 십자가의 사랑에 근거한 희생에서 출발한 헌신이어야 하는데 임직을 이용하는 충성을 유도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셋째, 한국교회 전체의 유익보다 자기가 섬기는 교회의 유익을 최우선 하는 경향이다. 흔히 성공한 목회자들이 일반적으로 후배들이나 새로 개척하는 교회 목회자들에게 교회가 성장하려면 “교회 자랑, 목사 자랑”을 교인들에게 강하게 심어주어야 한다는 조언을 주저하지 않고 하기 시작했고 적지 않은 개척교회 목회자들이 그 방법을 그대로 실천했다. 그 결과 몇몇 교회는 성장했지만 적지 않은 교회들은 그 반열에서 낙오자가 되었다. 전체 하나님의 교회가 한 몸이라는 본래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관이 여지없이 붕괴되고 말았다. 외형적으로 성공한 목회자들이 우상시되는 추세가 생겨났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세를 확장시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마치 적자생존의 원칙이 교회 개척과 성장에 그대로 도입되었다. 한 건물에 2개 교회가 이제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이웃교회가 한 형제가 아니라 경쟁의 대상이 되었고 내 교회가 성장하기 위해 망해야 할 대상 더 나아가 내 교회 성장을 가로 막는 원수가 되었다. 교회 성장에 눈이 어두워지면서 개교회 이기주의가 절정에 달하기 시작했다. 교회 경쟁의식이 심화되었다. 성공의 무대 뒤에 희생된 수많은 목회자들이 점점 대열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한국교회 안에 패배주의가 무섭게 확산되었다. “내 교회는 이정도 밖에,” “나는 이 정도 밖에”라는 패배주의가 목회자들을 사로잡았고, 그런 목회자들 밑에서 교인들은 자신의 일생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교회 수평 이동이 대거 시작되었다.

넷째, 1960년 이후 놀랍게 성장한 한국교회가 대 사회적인 책임을 충실하게 감당하지 못한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1960년부터 1988년까지 성장의 시기나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정체기에 한국교회가 뿌린 결실을 그대로 거두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늘 전체 한국교회의 유익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교회가 힘들더라도 전체 한국교회와 이웃교회의 유익이 무엇인가를 우선한다면 실패처럼 보이지만 결국 합력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기독교 출판사 역시 얼마나 많은 이윤을 창출하느냐 보다 이 책이 한국교회에 어떤 유익을 끼칠 수 있느냐를 고려해서 출판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하늘 문이 열린다> 등 10월 28일 재림론이나 이장림의 책을 유통하는 출판사나 서점들이 만약 책임의식을 가지고 처신했다면 그 영향력을 훨씬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퍼시 콜레의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 한권이 한국에 얼마나 팔렸는지 모른다. 결국 그 책의 내용이 허위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이미 한국교회는 피해는 입은 후였다. 그것을 누가 보상할 수 있었는가?

그러나 이 시대 한국교회가 침체를 달리고 있었지만 한국교회 안에 성장의 모델을 보여준 일련의 움직임이 있었다. 바로 그것이 제자훈련을 접목한 교회들이었다. 제자훈련을 목회 현장에 접목시켜 실천에 옮긴 교회들이 놀랍게 성장을 거듭했다. 제자훈련을 접목한 교회가 성장하는 교회라는 도식은 비판의 여지가 있지만 성장하는 교회 중의 상당수가 제자훈련을 접목한 교회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침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교회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다. 제자훈련을 실천에 옮기는 교회들이 성장하는 이유는 헌신된 신자들을 만들기도 하지만 대 사회적 책임을 충실하게 감당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그렇게 세상에서 살도록 촉구하고 교회적인 차원에서도 그 같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제자훈련을 시키면서 대 사회적 책임을 충실하게 모델로 보여주지 않는 교회는 이웃과 사회로부터 큰 신뢰를 받는데 한계가 있다. 일부러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해 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은 잘못되었지만 주님의 명령으로 알고 그대로 실천에 옮긴다면 반드시 교회가 성장할 것이다.

 

VI. 한국교회 침체를 막을 수 있는 몇 가지 대안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교회사 속에서 성장과 쇠퇴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이 글의 목적은 성장의 시대 성장요인들과 쇠퇴의 시대 그 원인을 분석하여 도출한 역사적 교훈을 통해 현 침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대안을 찾는데 있다. 지금까지 부분적으로 언급한 것들 가운데 중복된 느낌이 들지만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1. 사회적, 민족적 책임 회복: 한국교회 전체의 유익을 먼저 생각

지금까지 자본주의에 물든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해왔다.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못한 한국의 상황에서 사회로부터 자본주의를 통해 축척된 자본이 다시 사회로 환원되는 현상이 참으로 적었다. 자본주의 이기주의 현상과 개인 구원관에 기초한 기독교 개인주의 신앙이 한국교회 안에 개인 이기주의 신앙, 개교회 중심주의 신앙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말았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기독교 구원관이 전체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몸된 교회라는 공동체 성 인식과 병행되지 않을 때 자본주의 체제 하에 살고 있는 신앙인들은 이기주의 사고에 깊이 물들어 버릴 위험이 있다. 자본주의라는 경쟁사회와 개인구원관에 근거한 신앙 이기주의가 합쳐질 때 그 정도는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불신자들보다 몇 배 강해질 수 있다.

우리는 내 교회가 지역교회라는 사실과 더불어 전체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몸을 이루고 있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지체라는 인식을 늘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내 교회의 유익을 생각해야 하지만 늘 그것이 전체 유익과 공동체 정신을 흐리게 만드는 것이라면 피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 교회가 취약한 것 몇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지나친 경쟁을 자제해야 한다. 흔히 교회를 알릴 때 전도지에 혹은 신문 간지 교회 광고에 “oo교회는 다릅니다.”라는 문구를 넣어 자신의 교회를 알리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교회는 다르다는 광고는 이미 기성신자들을 겨냥한 광고다. 이런 광고는 신도시에 사람들이 대거 입주할 때 입주하는 교인들을 자신의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광고이다. 흔히 대부분의 성장하는 교회는 수평이동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교회가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전도해야 하는데도 신자들을 자신의 교회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영혼구원이 목회자의 생명이고 이 일에 주님께서 맡기신 가장 귀한 사명이라고 입으로는 말을 하면서도 실제로 목회현장에서는 반대되는 일을 주저하지 않고 시행하는 이중적인 모습이 많다. “전도지에 예수 믿고 구원을 받으십시오.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가까운 교회에 나가십시오.”라고 전통적으로 한국교회가 해오던 전도지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주변에서 찾아 볼 수 없다. 혹 만약 멀리 떨어진 지방 도시에 있는 사람이 서울 지역에 있는 자신의 교회가 만든 전도지를 받아도 서울에 있는 그 교회에 꼭 와야 한다는 식의 전도를 지금 우리가 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내 교회 성장을 위한 전도가 아닌 한국교회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전도로 방법으로 바꾸어야 한다. 모든 에너지를 불신자 전도에 맞추어야할 교회가 주변의 이웃 교회를 경쟁의 대상으로 삼으며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다.

둘째, 사회와 교인들을 의식하는 아량이 필요하다. 사회가 교회에 기대하는 도덕지수, 윤리 지수는 참으로 높다. 또한 교인에게 거는 기대와 목회자에게 거는 기대는 다르다. 교인들과 일반인들에게 거는 기대 역시 다르다. 신앙인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사회에 보여주는 기준이 높아야 하는데도 오늘날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솔직하게 목회자들 가운데 성적 죄를 짓는 경우보다 불교의 스님들 가운데 그런 죄를 짓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그런데도 매스컴에서 스님들의 스캔들은 뉴스거리로 삼지 않고 목회자의 스캔들은 특종 감으로 삼는다. 그것은 우리가 불평할 것이 아니라 사회가 목회자들에게 거는 도덕적 높이가 그만큼 높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목회자들의 행동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목회자들이 사용하는 차량도 주목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목회자가 차량을 선택하는 경우도 교인 중에서나 일반 사회인들이 시험에 들지 않는 범위에서 선택해야 할 것이다.

셋째, 동료 교역자들에 대한 배려이다. 부교역자들이 담임목사를 잘 도와 섬겨야 하는데도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이점에서 신학교 교수로서 할 말이 없다. 5만원 10만원 때문에 사역지를 옮기는 전도사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안타깝다. 계산적으로 교회를 섬기는 경향이 참으로 두드러진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신학교수가 책임이 있다. 참으로 이점에서 부끄럽고 죄송하게 생각하며 더욱 더 책임의식을 느낀다. 이점에서는 참으로 부끄럽게 여긴다. 하지만 담임 목회자들이 부 교역자들의 처우에 대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부 교역자들의 급료는 사회에서 받는 수준과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 정상적으로 목사 안수를 받으려면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원 3년을 마쳐야 하고 강도사 고시를 거쳐 그 다음해 목사 안수를 받는다. 정확히 9년의 세월이 걸린다. 이 9년의 세월은 전문의가 되는 것보다 힘든 과정이다. 하지만 부교역자들의 급료는 일반 사회에서 그 정도로 노력하여 갖는 직장에 비해 턱 없이 낮다. 부교역자들은 더욱 더 담임 목사의 목회 철학을 이해하고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고 담임 목회자는 부 교역자 처우에 더 많은 신경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한국교회는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로 발전할 것이다.

넷째, 교회의 사유화 현상과 세습 문제이다. 한국교회가 오늘날 성장하는 과정에서 목회자의 헌신이 남달랐다. 외국의 경우와 비교할 때 특별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어느 교회를 막론하고 교회가 성장한 이면에는 그 교회 목회자가 아마도 가장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런 교회 일수록 목회자의 의견은 교회 방향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그 의견이 존중되어 왔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공적인 교회가 사유화되어 가는 이상한 현상이 서서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목회자의 자녀 가운데 목회를 지망하는 퍼센티지는 참으로 높아 수많은 목회자 자녀들이 신학교를 마치고 목회자가 되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고 축복할 일이다. 목회자 자녀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교회 담임으로 세우는 현상이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교회에 유행처럼 나타났다.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회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회했고, 최근 빌리 그래함도 자신이 운영하는 단체를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목회 대물림 현상이 한 두 교회가 아니라 상당수의 교회가 하고 있는 일반화 현상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훌륭한 목회를 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교회가 많다. 그러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회 대물림을 하는 경우 일반 사회에서 교회를 보는 시각이 곱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기왕의 교회가 대 사회적 책임, 물량주의 현상, 도덕적 하향으로 비판을 받는 데다 목회자 대물림 현상마저 나타나자 교회에 대한 비판이 더욱 심해졌다. 앞으로 한국교회에 이와 같은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으로 예견하는 이들이 많다. 참으로 걱정이다. 이 문제는 한국교회가 풀어야 할 숙제 가운데 하나다.

좋은 모델을 세워가는 교회가 필요하다. 최근 사랑의 교회가 사회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게 된 그 출발은 오정현 목사를 후임으로 정하고 실천에 옮긴 일이다. 얼마 전까지도 사랑의교회는 여러 인정받는 대형교회 가운데 하나 정도로 인식되다 아름다운 세대교체 이후에는 가장 대표적인 대형교회, 바람직한 대형교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사랑의교회의 브랜드 가치는 여타 교회들이 여간해서는 따라 갈 수 없을 만큼 지난 몇 년간 급상승했다. 최근 젊은이들이 사랑의교회에 모여들고 있는 가장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정상적인 세대교체로 인한 아름다운 교회 이미지다. 사회가 무엇을 교회에 요구하는가를 선명하게 보여준 사례이다.

 

2. 나눔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최근 릭 워렌이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 설교를 하면서 “한국교회는 지난 120년간 세계 어느 교회보다 큰 축복을 받았는데 그 축복을 가지고 무엇을 했느냐?”며 한국교회 자성을 촉구한 일이 있다. 사실 한국교회 모두가 그런 비판을 받아야 할 교회는 아니다. 그 같은 비판에서 예외적인 교회들이 최근 많이 등장하고 있음에 감사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참으로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 놀라운 경제적인 축복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웃사랑을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그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몇 가지 실천 사항을 제시한다.

첫째, 사회를 향해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 10년 전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었을 때 그 현장에 달려가 고난을 함께 했던 광염교회(조현삼 목사)는 지난 10년 간 줄기차게 재난의 현장에 달려갔다. 재난의 현장에서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어려움을 나누는 일을 실천에 옮겼다. 이제는 재난의 현장에 교회가 달려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고, 여러 교회들이 그 뒤를 있고 있다. 한국교회 안에 새로운 흐름을 형성한 것이다. 선한 일들이 신문 지상에 여러 차례 보도되었고, 주님이 영광을 받으셨다. 교회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쇄신하는데 너무도 큰 몫을 감당했고, 합동교단이 대 사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교단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교회 전체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준 것이다.

둘째, 나눔의 실천은 교회 안에서부터 먼저 실천에 옮겨져야 한다. 형제들과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웃과 사랑을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한국교회는 먼저 교회 안에서 나눔을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이다. 교회 안에서 나눔의 실천은 가난한 교우 자녀들에게 학비를 지원하는 일, 생계가 어려운 가정에 경제적인 지원을 해주는 일도 그 일환일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도시 교회가 농촌교회를 지원하는 일이다. 농촌교회가 어려움을 만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농촌이 죽어가면서 농촌교회가 죽어가고 있다. 농촌교회는 도시교회에 임지를 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잠지 임지가 없는 사람들이 거쳐 가는 사역지로 전락했다. 의식 있는 사람들이 농촌에서 사역하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힘들다. 농촌교회 목회자들이 사역하기 힘든 이유 가운데 하나가 자녀 교육 문제다. 농촌에서 마음 놓고 사역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사실 도시 교회가 급성장한 것은 시골 교회가 젊은이들을 신앙으로 훈련시켜 도시교회로 파송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도시교회는 시골교회에 그 빚을 갚지 못하고 경제적인 축복을 공유하지 못했다. 단순히 몇 푼 도와주는 차원이 아니라 시골교회를 담임하는 목회자들이 소신껏 주의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그들을 격려하고 진심으로 인정해주는 풍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해외 선교는 대단히 높이 평가하면서도 정작 선교지라고 할 수 있는 농촌교회 목회를 등한시하는 것은 한국교회 전체를 위해 바람직한 현상이 결코 아니다. 시골교회 목회를 선교지로 인식하고 지원하는 풍토가 마련되어야 하고, 유능한 젊은이들 가운데 시골교회 역시 주님의 거룩한 교회로 인식하고 달려가는 용기도 필요하다. 미국 2차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교회가 없는 시골로 달려가 교회를 설립한 것은 좋은 역사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교회 안에서 나눔을 실천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중대형교회가 개척교회를 지원하는 일이다. 1990년대 이후 교회를 개척하는 현상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만큼 교회 개척이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근래 그런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개척에 대한 열정도, 개척할 경제적인 여건도, 개척에 대한 비전도 찾아보기 힘들다. 앞으로 개척 기피 현상은 더욱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중대형교회는 주님이 주신 축복을 구체적으로 나누어야 하고, 그 나눌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장래성 있는 길은 교회 개척을 지원하는 일이다. 단순한 개척이 아니라 교회가 제대로 세워져 갈 수 있도록 지속적인 지원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려 지기 시작한 것은 큰 교회가 교회 분립을 성실하게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다. 1894년 청일전쟁 때만 해도 평양은 소돔과 고모라의 도성이었다. 이곳을 가기를 사람들이 꺼려했다. 그러던 곳이 불과 15년 만에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려졌다. 평양대부흥운동이라는 놀라운 부흥이 그런 역사를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 원동력은 교회 안에서 실천에 옮긴 거룩한 나눔이었다. 1893년 6월에 설립된 장대현교회는 청일전쟁 이후 성장의 성장을 거듭하자 1903년 남문외교회를 분립시켰고, 1905년 12월에는 사창골교회를 분립시켰으며, 1906년 1월 26일에는 산정현교회를 분립시켰다. 산정현교회 영어 이름은 Central Church였다. 이 교회는 22개 교회를 분립시켜 평양 지역 전체에 복음이 닿지 않는 곳이 없도록 만들었다. 정확히 구획을 정해 맡아야 할 지역을 각 교회가 맡아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평양 전역에는 아름다운 종소리가 닿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다.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는 용기 있는 거룩한 나눔이 있어야 한다.

셋째, 주안에서 서로 존중하고 격려하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가장 민주적이고 평등을 구현해야 할 교회 안에 이상하게도 서열화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천주교의 하이어라키식 구도가 기독교 안에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노회 안에서 교회 규모는 곧 서열을 의미하고, 교회 안에서 서리집사 안수집사 장로 임직은 곧 서열로 인식되고 있다. 유기적인 공동체에서 영적 권위는 참으로 중요하다. 이 영적 권위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 아닌 직임 자체가 서열로 인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총회장, 노회장, 시찰장, 당회장이라는 도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목회자와 평신도의 차이, 담임목사와 부목사의 차이가 세상 조직에서 통하는 서열로 인식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만인 제사장의 원리로 기초한 기독교 안에 점차 천주교의 제도의 역기능 현상과 유사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3. 연합의 실천

한국교회는 선교 시작부터 연합을 실천해 왔다. 4개의 장로교 선교회가 장로교 공의회를 조직하여 연합선교를 구현했고, 2개의 감리교 선교회와 4개의 장로교 선교회가 함께 연합하여 민족복음화를 구현해 나갔다. 물론 이 시대는 복음주의라는 정체성을 공유했기 때문에 연합활동이 가능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자의식을 가지고 연합활동을 실천에 옮겼다.  한국교회는 민족복음화를 위해, 다시 한국교회가 침체의 국면을 극복하고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해 연합을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이다.

첫째, 교파와 교단을 초월한 연합 실천이 요구된다. 한국처럼 다양한 교파가 동시에 입국하여 선교를 시작한 나라도 드물다. 다양한 교파가 입국하여 선교를 시작한 한국은 서로의 장점을 배울 수 있는 좋은 선교의 장이었다. 장로교의 교리와 민주정치, 감리교의 전도열정, 구세군의 사회활동, 침례교의 회중정치, 성결교의 4중 복음은 한국기독교 안에 다양성과 통일성 두 가지 모두를 일깨워 주었다.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들이 다양하다는 사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유기적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서로의 강점을 존중하고 서로를 우리의 지체로 인식한다면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연합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서로의 특징을 포기하라는 의미와는 다른 이야기다.

둘째, 한국교회는 기관을 초월 하여 협력을 구축해야 한다. NCC와 한기총은 서로 색깔이 다르다. 서로 다른 색깔의 기구가 서로 협력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서로를 존중하면서 한국교회 전체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힘을 모은다면 훨씬 더 능률적이고 효율적인 사역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기구가 서로 견제하고 서로 비판한다면 교회 안에서는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외부에서 볼 때는 기독교인들 끼리 싸우는 것으로 인식할 것이다.

셋째, 지역을 초월하여 한국사회와 민족 전체의 유익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한국사회 병폐가운데 하나가 지역감정이다. 이 지역감정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은 아니고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지역감정이 신앙의 공동체 안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최근 정치적 안정을 위해 지역감정을 이용했다는 평가도 내려지고 있다. 사람이기 때문에 지역적인 영향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다. 초대교회 안에 알렉산드리아 신학, 소아시아 신학, 라틴 신학이 형성된 것이 보여주듯 신앙의 공동체 역시 지역의 한계를 넘어서기는 힘들다. 그럴지라도 교회는 지역을 넘어 전체 민족과 한국사회의 유익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지역감정이 교단분열로 이어진 경우가 한국에는 다분하게 나타났다. 남한 안에서도 경기, 충청, 호남, 영남, 강원, 서울에 따라 지역감정이 너무 강해 일반 선거는 물론 교단 선거를 비롯하여 교회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역을 넘어서야 한다. 이것을 넘어서지 않으면 통일도 요원하다. 작은 땅도 감당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통일되어 남북한의 벽을 넘어설 수 있겠는가? 지역의 벽을 넘어설 때 통일은 시작된다.

넷째, 한국교회 전체의 연합을 위해서는 선교 단체들도 벽을 넘어서야 한다. 1990년대 이후 한국교회가 침체를 달렸던 이유 가운데 하나도 선교단체들이 연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분열은 곧 선교 단체들의 분열로 이어졌다. 수많은 선교단체들이 1990년대부터 분열을 맞기 시작했다. 분열 이후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정작 쏟아야 할 에너지를 서로 비판하고 경쟁하는데 쏟고 말았다. 분열의 영 사탄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춤을 추었을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가장 연합 정신에 민감한 젊은이들도 분열정신에 물들고 말았다. 선교 단체 중에 분열되지 않은 단체가 없을 정도로 선교 단체들이 분열했다. 이 상처는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한국교회가 새롭게 발전하고 성장하기 위해 선교단체들의 연합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선교단체들과 기성교회와의 연합정신 실천도 필요하다. 선교단체는 기성교회를 비판했고, 기성교회는 선교단체들을 진정한 형제들로 인식해 오지 못했다. 선교 단체는 교회관이 약하다는 비판에 귀를 기울여 교회를 세우는 선교단체가 되어야 할 것이고 기성교회는 선교단체가 마음 놓고 젊은이들을 신앙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교인들은 교회에서 목회자들로부터 참된 연합을 배우지 못했다. 때문에 현대 교회 안에는 서로 협력하고 존중하는 풍토가 정착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적지 않은 교회에 부서 이기주의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지도자들로부터 연합과 협력정신을 충실하게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연합, 교단의 연합, 교파를 초월한 연합은 교회 안에서 부서 간, 교역자 간, 교인들 간, 당회원 간에 연합을 실천하도록 자극을 줄 것이다. 사람은 배운 대로 실천한다.

 

4. 부흥의 필연성

오늘날 한국교회가 대 사회적 책임, 민족적 책임을 구현하고 나눔과 연합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지만 이것은 현실적으로 실천에 옮기려는 인간적인 힘만으로는 할 수 없다. 위에서 지적한 문제점들이 한국교회의 문제라는 사실을 저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다. 위로부터 내리우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 때문에 성령의 임재, 성령의 기름부으심의 역사가 수반된 부흥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부흥은 교회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부흥은 사도행전과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해 부흥을 의미한다. 사도행전과 교회사 보여주듯 교회와 개인 모두 부흥을 경험하면 달라진다. 부흥이 임하는 곳마다 다음 몇 가지 두드러진 현상이 나타났다.

첫째, 개인각성이 사회와 민족각성으로 이어졌다. 한국교회 안에 개인의 각성이 사회와 민족의 각성으로 이어지는 일이 많았다. 개인의 각성이 사회와 민족의 각성으로 이어졌기 때문이 교회는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자연히 부흥은 교회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주었다. 평양대부흥운동은 소돔과 고모라 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바꾸어 주었다. 부흥이 임하면 이 땅의 존재하는 모든 교회가 각성한다. 잠자는 교회들이 깨어 일어나고 잠자는 영혼들이 각성한다.

둘째, 교회가 성장하고 선교열이 강하게 일어난다. 부흥이 임하면 교회가 성장하고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게 되고 선교열이 강하게 일어난다.

셋째, 부흥은 나눔과 희생과 헌신을 실천하게 만들어 준다. 한국교회가 지난 120년간 놀랍게 성장한 것은 끊임없이 부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특히 놀라운 부흥이 임하게 되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더욱 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날 때 시골의 한 젊은이가 보여준 희생과 헌신은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자립과 자전을 실천했다. 대구의 어느 담임목회를 하는 사람이 총회에서 그를 선교사로 내정하자 교회를 사임하고 선교사가 되었다.

넷째, 연합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부흥이 일어난 곳마다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거룩한 목적을 위해 연합하는 현상이 강하게 나타났다. 성령께서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시는 역사가 나타나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위해, 사회적 책임 구현을 위해 서로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5. 역사적 기독교 신앙의 계승

로이드 존스가 지적한 것처럼 천주교, 유니테리안을 비롯한 이단들, 심지어 성공회 가운데서는 부흥이 존재하지 않았다. 참된 부흥이 역사 속에 일어난 교회마다 종교개혁자들이 준수해온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신앙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삼았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칭의론이 존중된 곳에 부흥이 일어났다.

미국에서 가장 큰 기독교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복음주의 공동체는 다양한 배경과 교파 사람들이 참여하지만 마틴 마티가 지적한 것처럼 그 전체를 묶어 줄 수 있는 하나의 끈은 성경의 무오성이다. 성경의 권위는 지난 기독교 2천년의 교회 역사를 묶어주는 하나의 끈이었다.

근대교회사 보여주듯 유럽의 기독교가 계몽주의와 성경비평학의 도전 속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영국과 미국의 기독교가 찰스 다윈의 진화론, 독일의 고등비평, 산업화로 인한 세속화의 도전을 받으면서 영적 생명력을 상실해 가기 시작했다. 자유주의화된 기독교가 오래지 않아 교회 침체로 이어진 역사를 교회사가 그대로 증명해준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감리교의 변천은 이를 단적으로 입증해 준다. 1980년대 이후 한국교회의 침체는 민중신학, 토착화의 발흥, 종교다원주의, 포스트 모던니즘의 발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 한국교회 침체를 맞아 이단들의 활동이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다. 사도바울, 이레니우스, 어거스틴, 루터및 칼빈이 보여주듯 성경은 물론 초대교회 시대, 종교개혁시대, 근대와 현대 시대를 막론하고 공교회는 이단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했고, 그런 시대일수록 교회의 영적 생명력은 더해갔다. 한국교회는 지난 120년 동안 시대를 달리하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공산주의, 토착화와 세속화라는 거대한 도전을 받아오다 1990년대 이후에는 10월 28일 재림론, 류광수 다락방, 박윤식 대성교회(현 평강제일교회)로 대변되는 이단들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맺는 말

지금 한국교회는 중요한 전환점에 도달했다. 144,000명이 감소했다는 단순 통계로 지금의 교회쇠퇴 상황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이것은 한국교회를 향한 분명한 사인이다. 앞으로 계속 성장하느냐 아니면 서구교회처럼 시들어 가느냐 하는 귀로에 처했다. 교회가 쇠퇴하는 길에서 성장하는 교회로 다시 회복되어야 할 시대적 사명 앞에 서 있다. 그러나 더 시급한 과제는 한국교회가 다시 사회와 민족을 선도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로 세워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한국교회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받고 있다. 교회는 복음전파와 대 사회적 책임의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안된다.

최근 릭워렌 컨퍼런스를 KBS 9시 뉴스에 대대적으로 보도해주었다. 이것은 아마도 지난 30년간 처음으로 한국교회가 사회 언론으로부터 집중적인 조명을 받은 특별한 경우일 것이다. 어떻게 기독교에 대해 그토록 비판적이고 인색한 국영 방송이 긍정적으로 보도해주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보도 거리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교회 잔치로 끝났던 집회와 달리 교역자 평신도 6000여 명이 장기 기증을 했다는 사실이 주목을 받은 주된 이유다. 아마도 한국 종교 단체 중 어느 단체가 그렇게 많이 장기 기증을 약속한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사회의 아픔,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는 진정한 나눔을 몸소 보여준 것으로 일반 언론이 평가한 것이다. 교회가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한국교회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계승하면서 대 사회적 민족적 책임을 충실하게 구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미국 Gorden-Conwell Theological Seminary 교수 David Wells가 지적한 것처럼 이제 복음주의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Orthodoxy에서 Ortho-praxis로 옮겨가고 있다. 이 말은 Orthodoxy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Ortho-praxis가 없는 Orthodoxy는 생명력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교회 본연 본질을 회복해 가야 할 것이다. 교회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이고, 이를 앞서 시행하며 본을 보여주어야 할 공동체이다. 목회자는 이 일에 있어서 선두적인 역할을 해야 할 사명을 부여 받았다. 교회가 지향해야 할 목표는 단순한 교세확장이 아니라 복음전도와 대 사회적 책임 구현을 통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교회를 세우신 본래의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 어디가 교회를 키우는데 좋은가 보다 어디에 교회가 필요한가 하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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