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8/24) 교갱협 제15차 영성수련회 여성사역자특강

한국교회는 정기 예배, 기도회 및 개인기도, 성경 공부 및 묵상, 경배와 찬양, 가정 예배 및 기도, 수련회 혹은 사경회, 기도원 방문, 전도훈련 등 열심히 여러 가지 영적 훈련들을 실시해 왔습니다. 그 가운데 거듭남과 회심, 구원의 확신, 십자가에 대한 강조, 거룩한 삶, 하나님의 음성 듣기와 행하심을 아는 일에 강조점을 두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에 이르러 성도들은 영적 목마름, 갈증을 해소하는 일에 모자람을 느끼게 되었고, 그 결과 새로운 대안들을 찾고 있습니다. 문제는 어디서 보완점을 찾는가 입니다. 우리가 우리 밖에 모르는데 자꾸 우리 안에서 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적절한 해답을 못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아니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도움을 입어야 하는데, 한국교회의 경직성과 배타성 때문에 다른 전통들의 이론과 실제 훈련들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트리니티신학교 학장이었던 Divid K Gillett는 개신교는 여러 가지 전통에서 하나로 자신을 보지 않고, 자신들보다 더 나은 기독교 전통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독점적, 독보적 자리를 차지하려 들고, 다른 전통들은 좀 모자라거나 잘못된 것들로 보기 때문에 공격적, 비타협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지적했는데 귀담아들어야 합니다(Trust and Obey: Explorations in Evangelical Spirituality).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하신 다른 전통들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서로 배워야 서로를 풍성케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어느 한 사람도, 어느 한 전통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에 완전한 성취를 이룰 수 없었고, 또 어쩔 수 없이 제한된 영적 훈련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요즘 가톨릭의 수도원 운동에서 행하는 여러 훈련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경계와 의심은 호기심만큼 많습니다. 많은 개혁주의 목회자들은 수도원 운동을 몹쓸 금욕주의 운동으로 비난하지만 칼빈의 ‘기독교강요’에서는 어거스틴이 만든 고대 수도원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며 성직자들을 훈련하는 기관, 배출지, 모판이라고 합니다. 또한 수도사들의 경건과 기도, 성스러운 생활, 훈련의 탁월함을 인정하며 가장 훌륭한 사람을 만나는 곳이 수도원이라고 합니다. 수도사들이 재산을 버리고, 세상 근심과 염려를 버리며 명상에 잠김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합니다(4.13). 수도원 운동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개혁하여 고대의 모범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른 전통들을 소개하기 보다는 다른 전통들로부터 배울 때에 기준점이요 시금석이 될 성경의 영성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모든 영적 삶의 목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특성을 가진 사람, 즉 그리스도를 닮고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경건한 지성, 생각, 성품, 감정, 정서, 의지를 가지고 행하는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안전하게 되었지만 온전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벧후 3:18)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골 1:28)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마치 좋은 나무가 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듯이 좋은 사람이 되는 일에도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는 일입니다. ‘힘써’ 여러 과정의 경건 훈련을 거치지 않고서 온전한 사람이 되는 쉬운 길은 없습니다(딤전 4:7~8, 벧후 1:4~7).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과 다를 바가 없는 내면과 삶을 가지는 이유는 훈련의 필요성을 소홀히 하고 대가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근의 고기는 그 4분의 1의 소금으로 절일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세상의 소금”(마 5:13)이라면 그 효과를 이 사회에서 발휘할 것입니다. 소금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바닷물은 염전에서 바람과 햇볕, 제조자의 손과 더불어 오랜 시간을 상호 작용한 후에 소금으로 변화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참된 영성을 개발하기 위하여 다양한 활동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일에 개별적으로 할 수 있는 훈련들에 초점을 둡니다.

 

1. 사랑의 영성

인간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이 인생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하는가, 무엇을 남기는가를 보면 알게 됩니다. 미국 남북전쟁 중 불런 전투에서 전사한 북군 소령 설리번 발루(Sullivan Ballou)는 전투를 앞두고 고향의 아내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무사히 돌아가지 못하거든, 사랑하는 사라,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했는지 잊지 마시오. 전쟁터에서 마지막 호흡이 내 몸을 떠날 때 당신의 이름을 속삭이리라는 것도.” 대구 지하철 화재로 인한 참사 때에도 마지막 순간에 이처럼 사랑의 말들을 가족들에게 남기고 세상을 떠난 가슴 아픈 사건들을 우린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잡히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한 마지막 날 밤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예수님의 평소의 지론이었습니다. 율법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가를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2:37~40).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에(요일 4:8) 신학 지식보다도, 신비한 능력보다도, 모든 것을 주는 헌신보다도, 어떤 성공과 성취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성경에서 사랑에 대해 가장 장엄하고 시적인 말씀은 고린도전서 13장으로 우리가 ‘사랑장’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말씀을 시작하기 전 제목을 붙이는데 “제일 좋은 길”(12:31)이라고 명명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생의 최고의 길, 가장 탁월한 길이 사랑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큰 은사와 신비한 능력을 행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I am nothing),” 아무리 모든 것을 베풀고 순교의 제물로 나를 헌신하는 큰일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I gain nothing)”고 말씀합니다(13:1~3). 즉 사랑하지 못하는 나란 사람은 존재 가치가 없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계산은 인간의 계산과 다릅니다. 사람은 얼마나 높이 올라갔나, 얼마나 많이 아나, 얼마나 큰일을 하나로 점수를 매기지만 하나님은 다른 셈을 하고 계십니다. 인간 편에서 볼 때 거의 정상에 도달했다고 믿어지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실 때는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따라 우리의 신앙을 생각해야지 자기 마음대로 신앙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에 무능한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을 따라 한 일만이 영원히 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질문은 “오늘 내가 주님을 사랑하며 살았는가? 내게 주어진 이웃과 동료들을 사랑하며 살았는가?”여야 합니다.

“오래 참고 온유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고전 13:4~7) 사랑의 행위들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하여 가지신 사랑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분이 사랑이시기에 사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 사랑, 즉 아가페는 남녀간의 에로스나 친구간의 필레오가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하시는 사랑이요 그의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고 눈물 흘리며 깨어져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정답을 안다고 다 그대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듯이, 이런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생각해도 몸이, 감정이 말을 듣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이 사랑의 묘사들을 다시 읽고 그분이 내게 베푼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큰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하셨던 방식대로 다른 사람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통해 배운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면 그들도 그분의 사랑을 알고 사랑으로 응답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한 그리스도인이 매일 아침마다 무릎을 꿇고 일년 동안 고린도전서 13장을 경건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그 일을 끝냈을 때 그는 시작할 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당신도 이런 변화를 원하신다면 선택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2. 묵상하는 영성

일이 많아 분주하게 사는 사람의 내면세계는 평안을 잃고 영적 고갈을 경험하기 쉽습니다. 부엌에서 열심히 일하던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가 일도 도와주지 않고 주님과 함께 있는 것에 열 받아서 분을 쏟아 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마음 상태를 진단하시고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를 말씀하십니다(눅 10:38~42).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일하는 자는 한 가지, 즉 그분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빌 카퍼(Bill Capper)는 700명의 직원들을 거느리고 년 매출액이 4000억이 넘는 도매업과  슈퍼마켓 체인을 경영하는 영국 사업가인데 ‘이 좋은 편’을 택한 유익함을 들려줍니다.

“예수님은 내가 의존할 수 있는 친구이며 성경은 인생을 위한 확실한 가이드라는 것이 나의 체험이었다. 지금 내가 대표 이사로 있는 한 주식회사에 대한 예를 들어 보면, 오래 전 그 회사를 세우는 일에 대해 주주들의 강한 반대에 직면해야 했다. 그 일은 우리 가계의 비즈니스의 장래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다음 날 그 문제를 다루는 회의를 열기 위해 나는 한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나의 마음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나는 평소 습관대로 일찍 일어나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예수님께서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를 말씀 한 마디로 잠잠케 하시는 대목을 읽었다. 그는 자연을 지배하시는 주님이셨고 나 역시도 그의 창조의 한 부분임을 깨달았다. 오늘 파란이 일어날 위험이 있는 회의 가운데 내가 있을 때 주님은 내게 비슷한 고요를 주실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날을 보내면서 나는 침묵 중에 계속 기도했고 주님은 그렇게 응답하셨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날 저녁 주님에게 내가 드린 기도였다.”

성경은 비즈니스 세계에 많은 것을 말합니다. 상거래, 인사 관리, 임금 지불, 돈에 대한 태도 등 여러 문제들을 다룹니다. 가장 최근의 경영 기법들이 산들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최신 원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성경을 펼치고서 하나님께 나아가 잠잠히 그분을 기다리며 홀로 있을 때 오늘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분명치 않을지라도 차츰 알아들을 수 있는 때가 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는 우리의 영성에 중요한 요소입니다. 예수님은 골방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홀로 대면하는 곳, 어느 누구에게 어떤 일에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곳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십일 동안 광야에서 홀로 금식 기도하시고(막 1:13), ‘한적한 곳’을 찾는 습관을 가지시며(막 1:35, 6:31, 46),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따로 떨어져 홀로 기도하는 자리를 만드셨습니다(마 26:38~42). 당신에게도 한적한 곳이 있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대하는 다섯 가지의 방법은 듣기, 읽기, 연구, 묵상, 암송이 있습니다. 공부를 중요시하는 세상에서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하나를 알아도 인격화하고 생활화하기 위해 씨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일은 묵상입니다. 묵상은 되새김질과 같은 말입니다. 성경을 처음 대할 때 눈과 귀로 들어와서 이해하게 되지만 거기서 한 단계 더 나가야 합니다. 보통 사람의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는 40cm 정도라고 합니다. 이 40cm에 달하는 머리에서 마음까지의 이전 과정이 묵상이고 이것 없이는 인격과 삶의 변화없이 지식만 쌓게 됩니다. 음식을 먹으면 힘이 생기듯이 묵상이 영혼에 주는 힘은 놀랍습니다. 이 힘을 경험한 사람은 날마다 성경을 대하는 일을 무거운 짐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성경을 대하면서 주야로 하라고 주신 명령은 묵상이었습니다(수 1:8; 시 1:2). 영혼은 끊임없이 묵상을 통해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묵상없는 영혼은 파리합니다. 묵상을 습관화해야 제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주야로 할 수는 없기에 일정 시간을 따로 떼서 훈련을 해가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묵상을 해야 하나요? 오늘날 묵상이 강조되면서 여러 가지 효과적인 방안들이 소개되고 있지만 사실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치 않습니다. 만약 필요했다면 성경이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되새김질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읽은 대목에서 마음에 와 닿는 한 구절, 한 말씀, 한 이야기, 한 사건에 머물러 거기에 마음을 두고 오래 계시면 됩니다. 묵상은 이론으로 배우기보다 경험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문제는 시간을 낼 수 있느냐 인데, 우리는 참으로 중요한 일에는 언제나 시간을 낸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을 다루는 목적은 적용,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수도원 운동의 아버지인 안토니에게 성경 전체를 암송하고 금식하며 사는 여인이 찾아 왔습니다. “제가 무엇을 더 해야 하나요?”라고 묻자 안토니는 ”당신에게 경멸과 존경이, 잃은 것과 얻은 것이, 나그네와 당신 부모님이, 가난이 풍부와 같습니까? 당신은 금식도 성경도 배운 것이 아닙니다. 당신 스스로 자신을 속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많이 알고 공부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과 겸손을 가졌는가를 돌아보며 늘 회개해야 합니다.

 

3. 기도하는 영성

이방인 선교의 문을 여는 일에 쓰임받는 사람은 직업이 로마 군대 백부장인 고넬료입니다.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 자신의 수입으로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행 10:1~3). 그는 제 구시(오후 3시) 기도 시간에 천사를 만나 베드로를 초대하게 됩니다. 베드로 또한 제 육시(정오) 기도시간에 천사를 만나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고넬료에게 가게 됩니다(행 10:9~23). 이 시대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 삼중 기도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때에 예루살렘 교인들이 기도한 시간은 오전 9시(행 2:15),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은 오후 3시 기도시간(행 3:1)에 일어났습니다. 이 습관은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행한 습관으로(단 6:10) 600년이 흐른 후 전 유대인들, 초대교회까지 지키는 관습이 되었습니다. 다니엘과 고넬료처럼 항상 기도하는 사람은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합니다. 전자는 총리였고 후자는 지금의 연대장 급에 해당하는 직장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기도를 기뻐하시고 인정하셨습니다. 초대교회가 채택한 이 훈련이 지금은 잊혀졌습니다. 당신이 기도하는 시간과 그 다음 시간 사이는 어느 정도 떨어져 있습니까? 만약 이 두 사람처럼 기도한다면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공장들이 많은 지역의 교회에서 매일 낮, 같은 시간에 교회를 찾아오는 노동자가 있었다. 목사님은 이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여 하루는 숨어서 관찰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교회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작업모를 벗고 제단 앞으로 걸어갔다. 거기서 잠시 멈추어 서서 머리를 숙이고 조용히 짧게 중얼거렸다. “주님! 저 짐이예요.” 그리고는 말없이 다시 모자를 쓰고 돌아갔다. 얼마 뒤에 근처 한 공장에서 큰 사고가 터졌고 짐도 더 이상 교회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고로 다친 교인이 있어서 하루는 목사님이 병원으로 심방을 갔었다. 노동자로 붐비는 늘 소란스러운 병원이 이상하게도 오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느꼈다. 수간호사는 환한 얼굴로 그 이유가 저기 입원한 저 환자 때문이라고 고개 짓을 했다. 아니 그는 매일 교회에 기도하기 위해 찾아오던 그 사람이 아닌가! 목사님은 궁금하기도 하여 그의 침상으로 다가가서 그 비결을 물었다. 그는 머뭇거리더니 말하기를 매일 낮에 예수님이 자기 침대로 찾아와서 이렇게 말씀하고 가신다고 했다. “짐! 나야.”

위의 예처럼 일하는 중에 우리는 잠시 기도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로 생각하는 것은 틀렸다고 지적하신 예수님은 대신 짧은 ‘주기도문’을 주셨습니다(마 6:7~13). 어거스틴은 짧게 한 마디를 올리는 기도를 ‘화살기도’라 불렀고, 같은 시대에 이집트 수도원에서는 “하나님이여 나를 속히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 70:1)라는 짧은 구절을 하루 동안 자주 사용하여 일하는 중에도 기도하도록 가르쳤습니다. 6세기 경 시리아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를 반복하여 기도하는 ‘예수기도’를 발전시켰습니다. 이 모두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수단들이었습니다(살전 5:17; 눅 18:1). 마음이 문제이지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원이었던 느헤미야는 업무 중 왕과 대화하면서도 잠시 하나님께 묵도합니다(느 2:4). 짧은 기도만이 모두는 아닙니다. 그전에 느헤미야는 수일간을 집중하여 금식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느 1:4). 기도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뛰어나게 거룩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4. 반성하는 영성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침과 저녁 매일 두 차례 제사를 드리도록 요구하셨습니다(출 29:38~46).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매일 만나고 말씀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전에 흠없는 어린 양을 먼저 번제로 드리기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침에 결심하고도 돌아서서 결심과는 다른 짓을 하고, 저녁에 결심하고도 밤늦게 다음 날 아침에 후회할 짓을 하게 될 것을 아신 것입니다. 매일 두 차례 회개해야 할 만큼 인간의 죄악된 본성은, 우리 안에 죄를 짓고 싶은 소욕은 질기고 뿌리 깊습니다. 하루 동안 죄 많은 세상에서 살다보면 온갖 쓰레기들이 우리 심령 안에 들어옵니다. 쓰레기를 비우는 일이 언제나 필요합니다. 4세기 이집트 사막에 살았던 한 수도사는 외출 후에 집에 돌아와서는 항상 곧바로 방에 돌아가지 않고 집 주변을 세 번 돌고 들어갔습니다. 밖에서 묻은 온 때, 내면에 남아있는 쓰레기를 털어내고 들어갔던 것입니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자신에게 물어야 할 세 가지 질문
‘첫째, 내가 하여야 할 일을 다했는가?
둘째, 오늘 한 일 중에 후회하는 일은 없는가?
셋째, 다시 그 일을 한다면 어떻게 새롭게 할 것인가?’

밖에서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우리를 더럽히는 것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예수님은 인간 내면의 악한 생각들, 즉 음란, 도적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흘기는 눈, 훼방, 교만, 광패가 인간을 더럽힌다고 진단하셨습니다(막 7:14~23). 예수님은 겉은 깨끗한 척하면서도 속에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한 바리새인들을 관통해 보시고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 23:25~26). 우리는 악한 생각들이 자신을 유린하고 더럽히도록 무력하게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시대 사람들이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7) 한탄하며 홍수로 심판하여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 없애고 말았습니다. 악한 생각에 젖어 사는 자들은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었습니다. 악한 생각들과 싸우지 않는 자의 내면은 순결할 수 없습니다. 악한 생각들은 기도의 자리를 떠나게 하며 기도를 방해합니다. 그 생각들은 악한 행위로 귀결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유혹들을 방어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악한 생각들과 싸워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내가 지금 바른 생각을 하는지 나를 관찰해야 합니다. 수도사 안토니는 제자들에게 내면의 죄를 예방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가르쳤습니다.

“우리 각자는 서로에게 말하듯이, 우리의 행동과 우리 영혼의 충동들을 기록합시다. 그 일을 남들이 아는 것에 부끄러움을 가질 것이 분명한 것처럼, 그렇게 기록할 때 우리는 죄로부터 절제할 것이고 우리 마음 안에 깨끗하지 못한 생각들을 두지 않게 될 것입니다. 누가 자신이 죄를 짓는 동안 남이 그것을 보기를 원하겠습니까? 기록이 있는 이상 누가 죄를 짓고 난 후에 거짓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육적인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마치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을 쓴다면, 쓴 것으로 부끄러움을 느껴서 우리는 좀 더 쉽게 자신을 시시한 생각들로부터 지킬 것입니다. 이러한 기록이 동료 수도사들의 눈을 대신하게 합시다. 그래서 마치 보여주는 것처럼 쓰면서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고 우리는 결코 악한 생각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만들어간다면, 우리는 육체를 복종시키게 될 것이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적의 기만을 짓밟게 될 것입니다.”(‘안토니의 생애’, 55)

이 방법은 안토니가 혼자 사는 은둔자들에게 권한 것으로 생각과 행동 일기를 쓰라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은 안토니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던 획기적인 제안입니다. 안토니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요구했습니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유혹들, 악한 생각들이 준동하는 마음을 조사하라고 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은 주 앞에 자신의 죄악을 던지는 것, 그의 마지막 숨이 거두어지는 때까지 유혹을 예상하는 것이다”고 조언했습니다. 안토니를 따른 사막의 수도사들은 이런 훈련을 더 정교하게 발전시켰습니다. 그들은 악한 생각들을 마귀가 일으키는 로기스모이(logismoi)라고 지칭하는데 이것들은 마음속에 들어와서 연속적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수도사의 기도를 방해하고 하나님에게 두어야 할 관심을 주의산만하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이 로기스모이에 동의하는 것은 마귀에게 협력하며 자신을 넘겨주는 행위였습니다. 4세기 말에 이르러 에바그리우스와 카시안은 로기스모이를 여덟 가지로 분석하는데, 탐식, 간음, 돈사랑, 분노, 우울, 권태, 헛된 영광, 교만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가 그 기준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생각마저도 훈련과 반성 품목에 넣어야 합니다. 인간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이 한탄하시기 전에 내가 먼저 보고 고쳐야 합니다. 인간 내면의 숨은 악이 질기고, 심히 부패한 인간 마음(렘 17:9)이 뿌리 깊은 만큼 싸움도 길고 어렵습니다. 마음의 순결은 세상과 정욕을 버리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붙잡는 용맹스런 정진 노력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힘을 결코 과신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 없이는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애써 노력하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유혹을 물리칠 수 없는 무능함을 체험합니다.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스스로의 노력과 그 노력으로도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호소하고 받아야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영혼은 이런 싸움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내면의 욕망을 없애달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싸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떠 이길 수 있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훈련한 만큼 이익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그 놀라운 축복을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5. 성령에 민감한 영성

그리스도인의 몸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고전 3:16, 6:19). 영적인 삶은 나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주하시는 성령과 둘이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다(갈 5:16). 그렇게 성령의 인도 아래 따라 살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성령의 열매란 용어는 단수로서 열매는 하나이나 9가지 요소가 그 안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성령을 은사와 능력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삶의 모든 일과 관련되어 주님을 성품을 닮아 거룩한 삶을 살도록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 또한 성령의 인도, 지도를 따라 협력해야 합니다. 성령을 무시하거나, 관계를 소홀히 하여 성령을 근심케 하거나(엡 4:30)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합니다(살전 5:19). 특히 하나님을 본받지 못하고 음행, 탐욕, 도둑질 같은 도덕 윤리적 죄들을 범하고, 대인관계에서의 분노, 더러운 말, 외설적인 말, 희롱, 훼방 등은 성령을 슬프게 만드는 것들임을 알아야 합니다(엡 4:25~5:7). 우리의 삶에서도 이런 종류의 죄 짓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고 그로인해 성령을 근심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사막 교부들 중의 한 사람인 롱기누스는 제자들에게 “영혼에게서 정욕이 흘러나오지 않으면 영혼은 자신이 성령을 잉태했음을 안다. 정욕을 버리고 성령을 받아라”고 조언했습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는 명령은 우리에게 익숙한 말씀입니다. 그 다음 19절 이하에서 성령충만의 결과는 기쁨과 감사, 화답의 교제, 경배와 찬양, 그리고 가정과 직장에서 관계들 안에서 피차 복종 등으로 나타납니다. 직장에서 권위들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고, 일하는 것도 주께 하듯 하며, 상전들도 ‘이와 같이’ 하급자를 다루는 일은 성령충만의 결과입니다(5:21, 6:5~9). 이 유명한 명령이 나오기 전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4:30)는 명령이 먼저 나온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죄에 민감한 그분을 슬프게 하지 않도록 나 또한 성령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충만에로, 기름부으심으로, 그리하여 사람 살만한 행복한 세상으로 가는 하나님의 길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다음과 같은 특별한 종류의 삶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2~47)

성령님으로 인해 인류의 역사에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공동체가 탄생했습니다. 예배와 기도, 기쁨과 찬양, 교육과 교제, 소유의 나눔, 기적들까지 행하며 날마다 성장하는 공동체를 본 시민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특징은 예수님이 지상 사역 중에서 제자들과 하셨던 일들인데 이제 성령님이 행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사모하고 임재를 구해야 할 분입니다.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분들은 새로운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한다고 합니다. 설교자들은 강해설교로 강단이 깨워져야 한다, 가정 사역자들은 가정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 기도하는 자들은 기도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그 일들을 감당하는 인간이 달라지지 않는 이상 어떤 설교를 하고, 어떤 새로운 대안을 갖다 대어도 새로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시대는 새로운 인간의 출현을 기다립니다. 1세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새 인간, 예수 그리스도로 새롭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모습을 재현했습니다. 우리는 인간 안에 하나님을 보는 위대한 환상을, 새로운 목표를 품어야 합니다. 이 목표를 이룬다면 오늘날에도 주께서 그들을 통해서 과거에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서 행하셨던 일들을 행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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