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8/23) 교갱협 제16차 영성수련회 선택특강

머리말

필자는 84년부터 개척교회 교육전도사로 사역하기 시작해 8년 동안 교육 전도사로 사역한 후, 91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현재까지 교회 현장에서 사역을 진행하고 있다. 부목사로 사역한 시간이 길지 않고 군선교 현장에서 담임목사로, 현재는 울산남교회의 담임목사로 4년째 사역을 하고 있다. 교육전도사로부터 사역현장에 약 27년 몸담고 있으면서 ‘부교역자’라는 말의 성경적 근거도 알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개념을 접하게 되었다.

경험적으로 확인하게 된 부교역자에 대한 개념은
첫째, 잠시 사역하다가 나갈 사람
둘째, 위계질서가 분명하게 세워져 있는 조직원
셋째, 담임목사를 위해 존재하는 기능적 사역자
넷째, 아주 심한 경우 ‘목사가 아닌(부 = no) 존재’

이러한 개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전제된 상황들은 부교역자들은 담임목사의 생각에 전적으로 따라야 하고 반대 의견을 제시할 수 없으며, 담임목사의 문제를 대신 져야 하기도 하고, 방패가 되어야 하며 공은 담임목사에게 돌리고 과는 자신이 짊어져야 하며, 담임 자리를 찾아나가지 못하면 무능한 자로 인식되고, 자기 발전을 위한 공부와 체계적인 기회들을 제공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이 재정을 감당해도 기회를 얻기가 어려우며, 사역을 위한 지원이 부족할 뿐 아니라 생활을 위한 경제적 여건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으며, 담임 목사에게 찍히면 앞으로의 진로에도 문제가 생긴다는 강박이 있고, 빨리 담임 목사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사역을 하고 있으며, 24시간 대기 상태에서 담임목사의 지시에 따라가야 하는 것 등이었다.

어느 교회의 당회에서 새 가족과 관련된 일을 논의하다가 담임목사가 “담당 목사하고 의논해 보시는게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자 “아니 부목사하고 의논을 하란 말입니까?” 하고 반문을 했다. 어느 교회에서 담당 교구 목사가 장기 환자를 5번 정도 심방을 하고 난 후 퇴원하였는데, 퇴원하면서 목사님이 한 번도 심방 안와서 서운하다고 말을 했다. 함께 심방을 했던 사람들이 “아니 교구목사님이 여러 번 심방하셨는데 왜 그렇게 말을 하느냐”고 하자, 부목사가 열 번 오면 뭐하냐고 하면서 “담임목사님이 오셔야 심방이지” 하고 말했다. 많은 성도들이 어차피 부목사는 교회를 떠날 사람들이기 때문에 깊이 정주거나 마음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낯설지 않다.

상황이 그러할지라도 부교역자들이 사명감에 충만하고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사역에 임하면서 보람과 긍지를 느낄 수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정작 부교역자들이 힘들고 어렵지만 담임 목사와의 관계에서 기쁨이 있고 만족스러운 상황에 있음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경우들이 흔치 않았다. 부교역자가 설교를 잘하면 이내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어 ‘적당히’ 해야 하는 경우들이 많았고, 친구 목사가 사역하는 교회는 아예 고개를 들지 말고 원고를 읽어야 한다는 ‘내부 규정’이 있었다고도 한다.

담임 목사에게만 관심을 두고 그들만을 인정해 주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역자들은 담임목사가 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생각한다. 그래서 어느 한 부서에서 사역하는 것을 마치 인턴이나 레지던트처럼 담임목회사역을 위해 거쳐 가는 중간 과정으로 여기면서, 담임 목사 자리가 생기면 언제라도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담임 목사만 존경받고, 담임 목사만 소신있게 사역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한국 목회의 목회 풍토에서는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김만형, “한국 교회 부교역자의 지도력을 생각한다”, 교회와 세계선교 2003년 봄호(서울 : 총신대학교 교회선교 연구소), p. 184)

한 박사 학위 논문에서 부목사 제도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지를 물었는데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는 반응이 과반수를 넘었으며, 부교역자의 위상에 대한 성도들의 인식도 그다지 높게 인식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사역 현장에서 가장 많이 느끼는 갈등이 담임 목사와의 관계였고 그 다음은 적절하게 인정되지 못하는 위상이었다.(김형태, 동역의 관점에서 본 부교역자론(서울 : 쿰란 출판사, 2010), p. 153, 167, 182)

얼마 전 동기 모임에서 한 사모님이 일반 목회 경험이 짧은 우리에게 “절대 부목사하고 속 깊은 얘기 하지 마세요. 절대 부목사는 그냥 부목사이고 떠날 사람이니 사무적으로만 대하세요. 상처만 받고, 떠나면서 꼭 이상한 관계가 되고 그래요” 라고 말했다. 나의 담임 목회 경험이 짧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이것이 정말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란 말인가!

최근 지구촌교회가 새로운 동역의 패러다임을 제시하기 위해 새로운 사역을 시도했다. 전임 목사가 은퇴하고 새로운 담임목사를 세우고, 은퇴한 목사는 교회의 운영과 행정과 관여하지 않고 후임 목사를 도와 멘토링을 해주고 설교 사역을 협력하는 형태이다. 이동원 목사와 지구촌 교회는 이러한 시도를 ‘새로운 생각’에 대한 시도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시도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 앞서 먼저 짚어야 하는 것은, 전통적이고 정형화 되어 있는 동역의 모델에 대해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근저에 깔려 있다는 사실이다. 조금은 비약적일지 모르지만 끊임없는 원로목사와 후임목사와의 갈등, 담임목사와 부교역자와의 갈등, 부교역자간의 갈등들이 우리의 사역현장에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대변해 준다 하겠다.

필자는 부교역자 시절, ‘내가 담임목사가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교육전도사로서 부교역자로, 부목사로서 부교역자로 사역하면서 여러 가지 고민과 갈등을 경험하였고 나름대로 성경적 기준과 원리를 찾아보려고 애썼다. 그러한 고민과 갈등을 안고 성경적 원리에 대해 고민하면서 군선교 현장에서는 군종병들을 부교역자 대신으로 생각하며 동역자로 함께 하려고 애썼고, 담임 목사가 되어서는 여러 명의 부교역자와 동역을 하면서 나름대로의 기준과 원리를 가지고 동역자로 함께 사역하려고 애쓰고 있다.

물론 필자의 경우 직접 경험은 1000명 미만의 중소형 교회가 대부분이고 대형교회는 간접 경험에 불과해 한국교회 전체를 아우르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부교역자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고 적절한 사역의 모형들을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유익하리라 생각하며, 부족한 글을 통해 여러 동역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몸말

1. 교회와 사역자, 교역자와 부교역자

교회의 사역자들에 대한 이해에 있어 교회의 정체성을 먼저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역은 교회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하여야 하고, 그러한 원리에 충실할 때 교역자들의 역할과 그 사역의 상호관계도 바르게 정립될 수 있다.

1) 교회의 정체성과 직분

가. 문자적 정의

교회라는 말은 구약에서는 ‘백성’, ‘회중’의 의미였고 신약에서는 ‘부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이 의미들의 바탕은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전제 한다. 따라서 교회는 자의적 결정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나. 존재적 정의

가) 그리스도의 몸

교회는 지체인 성도들로 이루어진 몸인 공동체이다. 지체들이라는 말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각각의 은사를 따라 주어진 직임과 직분이 다르며 각각 그 직임과 직분을 감당하면서 기쁨과 감사로 몸을 잘 세워가는 유기적 공동체이다(고전 12:27, 엡 1:22-23, 4:11-12, 골 1:24).

나) 성전

교회는 성령을 모시고 성전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각각의 성전들이 모여 더 큰 성전들로 지어져가고 있다. 몸이 성장하듯이 거룩함을 끊임없이 이루어감으로서 성전으로 지어져가는 것이 교회이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도구로 세우신 것이 ‘목사’와 ‘교사’이다. 이는 교회는 ‘교육’ 즉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가르침’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가르쳐질 때에 성도들이 온전케 되어 봉사의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양육되는 과정에서는 불완전함이 그대로 노출되는 곳이 교회이다. 그러므로 불완전함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옳지 않으며, 그 불완전함이 말씀을 통한 성숙으로 얼마나 보완되고 진보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엡 2:20-22, 4:11-13).

 

2) 사역자와 목사의 정체성

교회의 존재 목적은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가서, 제자 삼는 것’이다(마 28:18-20). 제자 삼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양육하여 세례를 베풀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이 그 본질이다. 이러한 교회의 본질을 유지하고 성도들을 양육하는 본질적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교역자들이다. 교역자들은 제자 삼는 사역의 중심에 있고, 제자가 된 성도들은 제자로서 감당해야 하는 사역들을 교회를 포함한 삶의 현장에서 수행하게 된다.

교회에서 수행되는 모든 사역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성전으로 세워가는 것이다. 성도들이 온전케 되어 봉사의 일을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를 위해 교회 안에 다양한 은사를 따라 사역자들을 세우시고 ‘함께 일하게 하심으로’ 몸 된 교회를 세워가신다. 모든 성도들이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소유된 백성으로서 함께 지체가 되어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다(고전 12:1-30, 엡 4:11-13, 벧전 2:9). 이렇게 제자들로서 온전케 되어가는 성도들이 각양 은사를 따라 사역을 하게 함에 있어, 전적으로 성도들을 양육하는 사역에 헌신된 교역자들이 제대로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이에 교회는 그들을 특별히 세워 사역에 전무할 수 있도록 세워주어야 한다. 이는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자에 대한 성경적 원리로서, 그 사역의 권위가 분명하게 세워지고 인정되어야 하며, 모든 성도들이 그에 순종함으로 양육 받아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마 10:10, 롬 15:27, 고전 9:9-14, 갈 6:6-9, 딤전 5:17-18). 하지만 이것이 성직으로서의 존재적 거룩을 인정하는 것이나, 절대적 권위를 지닌 존재임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목자와 양의 관계를 전제로 한 사역 즉 ‘목회’에 대한 개념이 수평적이기 보다는 수직적인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평신도와는 구별되는 ‘성직자’와 ‘절대적 권위’의 개념을 도입하여 ‘다스리고’, ‘감독하고’, ‘지도하고’, ‘먹이고’ 등의 개념이 더 강하게 자리하게 되었다.

 

3) 교역자와 부교역자의 정체성

‘교역자’라는 용어는 “교회의 종교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 목사, 전도사 등이 있다”라고 정의하고 있다.(국립 국어원 표준 국어대사전, http://stdweb2.korean.go.kr) 부교역자라는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교회 현장에는 이 용어가 자연스럽게 통용되고 있다. 교역자와 부교역자가 언제, 어떻게, 무엇을 근거로 나뉘어지게 되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사역하는 사람을 교역자라고 한다면 부교역자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이 쉽지 않다.

교회에서 말씀 사역을 감당하는 전문 사역자를 통칭할 때는 세밀한 구분없이 ‘교역자’라고 하지만, 교역자 그룹을 나눌 때에는 부교역자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 때 부교역자라는 말은 ‘담임목사가 아닌 교역자’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실제로 역사 가운데 부목사를 대표로 하는 부교역자가 등장한 것은 교회의 규모가 커져 담임 목사가 혼자 교회를 목회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공식적으로는 1952년 37차 총회에서 거론되었다.(김종석, 목회 행정을 위한 교회 정치(서울 : 쿰란출판사, 1997), p.100, “경북 노회장 명신홍 씨가 헌의한 부목사 제도 실시에 관한 것은 좌기 내용에 의하며 결정 후 각 노회에 수의함이 가하오며” - 총회 회의록 163쪽) 이후 본격적으로 부목사 제도가 도입되었고, 부목사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헌법에 담게 되었다.

헌법에 규정된 부교역자의 존재적 의미는 ‘보조자(assistant)’이다. 위임받은 담임 목사를 돕는 보조자로서, 담임 목사의 의중에 따라 담임 목사를 위해 교회의 사역을 감당하는 사역자인 것이다. 같은 목사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몸 된 교회를 세워가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지만, 담임 목사의 사역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더 나아가 부목사의 임기가 1년 마다 갱신되며 그 결정권을 담임 목사가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목사와 부목사의 관계를 정립하게 된 것은 목사에 대한 규정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아래와 같이 헌법에서는 담임 목사와 부목사를 구분하여 사역과 직무를 표시하지 않고 ‘목사’로 통칭하여 그 직무를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목사 되는 자에게 각각 다른 은혜를 주사 상당한 사역을 하게 하시니 교회는 저희 재능대로 목사나 교사나 그 밖의 다른 직무를 맡길 수 있다(엡 4:11)

1. 목사가 지교회를 관리할 때는 양무리 된 교인을 위하여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으로 교훈하고 강도하며, 찬송하는 일과 성례를 거행할 것이요, 하나님을 대리하여 축복하고 어린이와 청년을 교육하며 고시하고 교우를 심방하며 궁핍한 자와 병자와 환난 당한 자를 위로하고 장로와 합력하여 치리권을 행사한다.
2. 목사가 종교상 도리와 본분을 교훈하는 직무를 받을 때는 목자같이 돌아보며 구원하기 위하여 각 사람의 마음 가운데 성경의 씨를 뿌리고 결실되도록 힘쓴다.
3. 선교사로 외국에 선교할 때에는 성례를 거행하며 교회를 설립하고 조직할 권한이 있다.
4. 목사가 기독교 신문이나 서적에 관한 사무를 시무하는 경우에는 교회에 덕의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데 유익하도록 힘써야 한다.
5. 기독교 교육 지도자로 목사나 노회가 지교회나 교회에 관계되는 기독교 교육 기관에서 청빙을 받으면 교육하는 일로 시무할 수 있다.
6. 강도사가 위에 2, 4, 5항의 직무를 당할 때 노회의 고시를 받고 지교회 목사가 될 자격까지 충분한 줄로 인정하면서 목사로 임직할 수 있다.(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헌법(서울 :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출판부, 2008), p. 156)

하지만 목사의 칭호 부분을 보면, 위임 목사와 임시 목사를 구분할 뿐 아니라 부목사를 별도로 구분하여 3조의 목사의 직무가 모든 목사가 추제적으로 수행하는 고유의 직무가 아니라 ‘담임 목사(위임 목사와 담임하는 임시 목사)’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확인하고 있다. 또한 담임 목사로 청빙하는 것은 교인 2/3의 찬성이 있어야 하지만, 부목사의 경우는 당회의 결의로 청빙하고 시무 연장은 당회장이 노회에 청원함으로 당회장의 권한에 귀속된다.

제 4조 3. 부목사. 부목사는 위임 목사를 보좌하는 임시 목사니 당회의 결의로 청빙하되 계속 시무하게 하려면 매년 당회장이 노회에 청원하여 승낙을 받는다.(ibid., p. 157)

부(副) 목사란 버금가는 자리 또는 그 다음 자리를 의미한다. 부목사라 할 때 명칭상으로는 위임목사와 버금가는 목사 또는 그 다음 자리의 목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목사가 사임하면 부목사도 사임하여야 한다. 이것은 부목사라는 명칭과 모순된다. 부목사는 당연히 당회장 유고시 그 직무를 대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부목사는 사역하던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될 수 없다는 규정까지 만들어 놓았다. 또한 보좌한다는 말도 매우 애매한 규정이다. 보좌란 도와서 일을 처리하는 것을 뜻하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돕느냐 하는 규범이 없다. 임무규정에은 부목사와 원목사에게 꼭같이 해당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목사는 담임목사를 보좌한다고 규정했다. 그러기에 담임 목사는 부목사를 부하 또는 비서로 또는 훈련시키는 제자로 착각하고 있다.(허일찬, “담임 목사와 부목사 무엇이 문제인가”, 월간 목회 1992년 2월호(서울 : 월간 목회), p. 90)

이런 상황 속에서 부교역자들은 자신이 담임 목사가 될 것을 지향할 수밖에 없고, 현재 부교역자로서의 기간을 담임 목사가 되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하고 언제든지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좋은 교회를 향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구조적 한계에서 담임 목사와 교회 성도들이 부교역자들의 상황을 보게 되고 자연스럽게 상호 신뢰가 어려워지고 담임 목사 중심으로 상황이 전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말로는 부목사로 번역되었지만 실상은 ‘Associate Pastor’, 즉 담임 목사를 협력하는 목사이다. 담임 목사나 부목사는 똑같은 목사요 임무도 같다. 그러기에 종속관계나 상하관계가 아니라 동료관계이며 평등관계이다. 서로를 보완해 가면서 목회를 하는 관계가 곧 담임 목사와 부목사의 관계이다.(ibid., p. 91)

하지만 유교적 세계관에 의해 모든 직제들을 ‘종적 서열화’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교역자와 평신도 간, 평신도 그룹의 직분자 간, 교역자와 교역자 간에도 종적 서열화의 개념이 유입되었다. 이러한 ‘종적 서열화’는 ‘협력, 동역’ 보다는 ‘지시, 명령, 순종’의 개념을 더욱 강하게 담고 있다. 성경적 원리에 따르자면 모든 교역자들은 상호관계를 통해 몸 된 교회를 세워가는 협력자이자 동역자임을 분명하게 인식하여야 한다.

 

2. 동역에 대한 이해

1) 동역의 개념

동역(쉬네르고스, συνεργος)은 ‘함께 일하다’는 의미의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 신약에 5번(막 16:20, 막 8:28, 고전 16:16, 고후 6:1, 약 2:22), 동사의 형태로서는 신약에 13번(롬 16:3,9, 고전 3:9, 고후 1:24, 고후 8:23, 빌 2:25, 4:3, 4:11, 살전 3:2, 몬 1:1, 1:24, 요삼 1:8)등장한다. 이 용례들을 종합해 보면 일하는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같은 목표를 향해 각각이 지닌 힘을 모으거나 한쪽에 자신의 힘을 보태어 일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미를 영적으로 풀어 설명하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같은 자리에서 동등한 입장에서 함께 일하다”로 표현할 수 있다.

 

2) 동역의 실제

동역에 있어 중요한 원리는 ‘같은 목표를 향하지만 각각 다른 은사들이 함께 사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함께 복음을 위해 사역하지만 심는 자와 물주는 자가 각각 독립적인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다.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여야 하고, 심는 자와 물주는 자는 ‘하나’이고 ‘자기가 일한 대로’ 상을 받는 것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러나 모든 사역자는 ‘하나님의 동역자들(고전 3:9)’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위한,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과 함께 하는 동역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비록 바울이 ‘나의 동역자’라는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근본 원리는 자신을 비롯한 모든 사역자들이 ‘그리스도의 예수의 종’ 됨을 함께 고백하는 것이다. 따라서 동역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인식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교회 사역의 현장에서 ‘동역’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된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사역의 현장은 ‘동역’이라는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요소들이 혼재해 있다. 여러 가지 요소들이 많이 존재하지만 가장 중요하게는 부교역자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충분한 비전이 공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 청빙을 한 후 목회철학과 비전이 맞지 않음으로 인해 많은 갈등들이 일어나게 된다.

 

3) 동역의 성경적 예

성경에는 역사 가운데 여러 동역의 상황들이 나타나 있다. 비록 담임 목사와 부목사와의 관계와 다른 측면들이 있긴 하지만 성경에 나타난 동역의 예를 통해서 함께 몸 된 교회를 세워가는 동역자들로서 어떻게 동역해야 하는 지 그 원리를 살피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가. 아브라함과 늙은 종

창세기 24장에는 아브라함과 그의 종 엘리에셀이 등장한다. 당시 종은 소유믈에 불과한 존재였지만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에게 집안의 모든 것을 맡겼고, 가장 중요한 이삭의 아내 즉 며느리를 맞는 과정에서 자신을 대리하여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보낸다. 창세기 24장 1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늙었고, 그 종도 늙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주인과 종의 관계를 넘어 오랜 세월동안 인생을 함께 살아 온 관계임을 보여준다.

나. 모세와 아론

아론은 모세의 형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택하심과 세우심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모세의 지도력에 순종함으로 동역하였다. 물론 시내산에서 금 송아지를 만든 사건은 돌이킬 수 없는 허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이후 아론은 모세의 지도력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 예배하게 인도하는 사역을 잘 감당하다가 죽는다. 실제로 아론이 조금이라도 모세와의 관계가 불편하게 만들었다면 모세에게는 가장 어려운 장애물을 지니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론은 자신에게 주어진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며 모세의 지도력에 잘 순종하였다.

다. 모세와 직분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생활을 시작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이끄는데 역부족이었다.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조언을 따라 함께 동역하는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의 직분자들을 세웠다(출 18장, 신 1:13-18). 이들은 각각 주어진 조직에 대한 권한이 위임되어 최고 지도자 모세와 동역하는 사역자들이었다.

라. 여호수아와 갈렙

모세와 함께 20세 이상 된 사람으로 애굽을 탈출한 사람들 중에 살아남은 두 사람이 여호수아와 갈렙이다. 두 사람 다 지파의 어른이었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사람으로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런데 모세에 의해 여호수아가 선택되었고 가나안 정복이 시작되어 기업이 분배되는 과정에서 갈렙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산지를 자원하여 자신이 맡아줌으로 여호수아의 지도력을 확고하게 세워준다.

마. 다윗과 요나단

요나단은 현실적으로 차기 대권주자였고 다윗은 하나님에 의해 기름부틈을 받은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정적의 관계라 할 수 있었지만, 두 사람은 어느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동역의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 사도와 일곱 집사

예루살렘 교회에 폭발적인 부흥이 이루어지면서 돌보아야 하는 과부들의 숫자도 많아졌다. 사도들이 공궤하는 일에만 매달렸지만 효과적으로 돌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사도들은 자신들이 본질적 사역(말씀 사역과 기도)에 집중하도록 교회 사역에 동역하는 사람 하게 된다(행 6:1-7). 당시 일곱 집사는 사도들과 협력하여 자신들에게 주어진 영역에 사역함으로 교회를 돌보고 성도들을 세워가는 동역자들이었다.

사. 바나바와 바울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고,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서 성도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었고 바울의 회심을 인정할 수 없어 두려워하는 예루살렘 교회에 바울을 소개한 사람이다(행 9:26,27). 또한 안디옥에 이방인들의 교회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 교회의 파송을 받은 후 다소에 있던 바울을 데리고 와 함께 동역하였다(행 11:19-26). 1차 선교 여행 이후 마가의 이탈 문제로 대립을 하여 바울과 결별하게 되었다. 바나바는 준비된 사람을 동역자로 세우고 자신이 2인자가 되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복음을 위해 헌신할 줄 알았던 사역자이다. 비록 바울은 바나바와 헤어졌으나 바나바와의 동역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갈 2:1,6,13)은 바나바가 바울을 얼마나 귀하게 여겨 세웠는지 그 중심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바울과 디모데

바울과 디모데는 단순한 사역자간의 관계를 뛰어 넘는다. 디모데가 바울을 통해 흔련받아 사역자가 되었지만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로 여기고 있음을 고백한다(고전 4:17, 빌 2:22, 딤전 1:2,18, 딤후 1:2, 2:1). 그러면서 디모데를 사역자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자 형제, 그리고 사역자로서 ‘동역자’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롬 16:21, 고전 16:10, 고후 1:1, 골 1:1, 살전 3:2).

자. 바울과 아굴라 브리스길라

바울과 동역했던 평신도 사역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는 천막을 만드는 일을 했던 사람이었다. 바울이 천막을 제조하는 일을 하였기 때문에 동업자로서 사역에 필요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고(행 18:1-3), 바울과 힘께 고린도, 에베소 등 아시아 지역에서의 사역에도 동역하였고, 로마에도 함께 간 것으로 보인다(행 18:18,19, 고전 16:19, 롬 16:3).

차. 바울과 아볼로

아볼로는 세례요한의 제자로서 성경에 정통한 웅변가였다. 열심이 있었으나 에수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다가 에베소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 자세히 배우게 되었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 복음의 유력한 변증가가 되었다(행 18:24-28). 성령을 모르는 제자들로 언급된 사람들이 아볼로의 제자들로 보이며 고린도에서 큰 사역의 진보를 지니게 되었다(고전 1:12). 고린도 교회의 분쟁에서 아볼로는 바울과 게바와 같은 수준에서 성도들의 인정을 받는 사역자였음을 알 수 있다(고전 1:12, 3:4-6, 22, 4:6). 바울은 아볼로의 사역적 영향력과 그 열매를 인정하여 자신을 뿌리는 자로, 아볼로를 물주는 이로 비유하였다. 교회를 세움에 있어 각각의 은사를 따라 동역함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 할 수 있다(고전 3:4-9).

타. 바울과 누가

누가는 바울의 사역에 있어 가장 중요한 동역자라 할 수 있다. 누가는 의료 선교사의 개념보다는 선교사인 바울의 주치의겸 동역자로서 바울의 사역이 효과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보조하는 사역자였다. 하지만 단순한 보조자로서의 존재로 끝난 것이 아니라, 바울과 함께 선교 사역에 동역함으로 복음서를 기록하는 사역의 열매도 맺게 되었다. 바울과 누가의 관계는 자신의 은사를 따라 같은 목표를 향해 독립된 사역을 감당하여 동역하는 좋은 모델이 된다. 바울은 특별히 옥중서신에 누가를 동역자로 밝히고 있는데, 누가의 역할에 대해 깊이 확인한 듯 보인다. 누가를 ‘동역자’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골 4:14, 딤후 4:11, 몬 1:24).

파. 바울과 마가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로서 바울과 함께 1차 선교 여행에 참여하였으나 중도에 이탈하고 말았다. 2차 선교 여행에서 바나바와 바울이 크게 다투고 갈라서게 되는데 원인 제공자였다. 비록 불미스러운 일로 갈라 서 다른 사역을 감당했으나, 훗날 바울은 마가를 통해 사역에 큰 위로와 힘을 얻고 귀하게 동역하는 사역자임을 분명하게 언급하게 되었다(골 4:10, 딤후 4:11, 몬 1:24, 벧전 5:13). 약점과 허물이 있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얼마든지 귀한 사역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며, 서로를 향해 약점을 품고 충분한 시간을 주며 품는 것이 동역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끝말

몸 된 교회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역자들로서 아름다운 동역을 이루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성경적 동역의 원리를 따라 담임 목사와 부교역자와 교회의 관점에서 부교역자에 대한 사역의 기준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담임목사

1) 목회 철학과 비전을 공유

부교역자를 선발할 때에 상호간의 목회 철학과 비전에 대해 공유하는 시간을 가지고, 적어도 부교역자가 담임 목사의 목회 철학과 비전을 이해하고 공유하기를 원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객관적인 사역에 대한 정보를 주고 받는 것이나, 도달해야 하는 목표에 대한 토론 정도를 원활한 의사소통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가슴으로 대화할 수 있고, 마음을 나눌 수 있어야만 진정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권성수 목사는 “흉금을 털어놓고 아픈 체험을 나눌 때에 교역자들은 주님과 동행하면서 전개하는 생명사역의 위기와 감격을 동시에 맛보는 ‘팀 사역자들’이 되는 것 같았다. 생명 사역의 위기가 오히려 팀 사역의 집합체가 되는 것을 발견했다”면서, 마음과 마음이 소통하는 교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권성수, “팀 사역의 누수를 막아라”, 목회와 신학 2010년 6월호(서울 : 두란노 출판사), p. 19)

한 원로목사의 회고에 의하면 젊어서는 형제 자매와 같은 관계를 유지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대했다고 하는데, 진정한 의사소통을 위해 중요한 원리가 될 수 있을 듯하다.(박석규, “부교역자의 훈련과 교육”, 월간 목회 1995년 7월호(서울 : 월간 목회), p.204)

담임목사와 부교역자간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시간은 100명 ~ 500명 규모의 교회는 회의를 통해서가 약 63%, 개인적 만남을 통해서가 23.9%이고, 1000명 이상 규모의 교회는 회의를 통해서가 100% 라는 통계는 얼마나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또한 의사소통이 잘 안되는 이유로 담임 목사의 소통의식 부재가 약 47%, 교회 내 소통 구조의 문제가 22.7%, 사역으로 인한 부족한 시간이 19.7% 로 나타나 담임 목사의 의지의 부족이 가장 중요한 비율이지만 동시에 사역과 구조까지 겹쳐 교회 사역의 현실은 의사소통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보여준다.(“당신은 어떻게 소통하고 계십니까”, 목회와 신학 2010년 6월호(서울 : 두란노 출판사), pp. 46-47)

목회 철학과 비전을 공유하고 진정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때 참된 ‘팀 사역’이 가능해 지는데, 새 교역자를 세울 때 전체 교역자들이 함께하는 면담을 통해 결정하는 것도 팀 사역의 한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유기성, “창의적 참여로 이어지는 담임 목사와 부교역자의 소통”, 목회와 신학 2010년 6월호(서울 : 두란노 출판사), p. 39) 이것은 담임 목사의 노력이 있어야 하며, 규칙적으로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2) 동역자 의식

동역자 의식을 지님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가 ‘종적 서열의식’을 내려놓는 것이다. 함께 교회를 세워가는 교역자로 인정하고 인격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역하여야 한다. 부교역자들이 지닌 전문성을 인정하고 은사를 따라 상호 보완적 관계에서 교회를 세워가야 한다. 보다 세분화된 사역의 전문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인정하고 세우는 동역자 의식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담임 목사가 명확하게 마음의 정리를 하여야만 가능하다. 부교역자를 단순히 목회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함께 일하는 동역자요 한 몸의 지체로 인정하여야 한다. 이러한 관계가 형성되는 데에는 담임 목사와 부교역자간의 영적 교통과 인격적 친밀함이 매우 중요하다. 사무적.사역적 관계를 넘어 함께 교제하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갖는 것이 좋다. 가능하다면 평생 동역하다가 함께 은퇴하는 동역자가 있으면 좋을 듯하다.

또한 동역자 의식에 중요한 부분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기다려 주는 것이다. 누가 사역해도 완전할 수 없는데, 시간과 함께 경험과 함께, 실패와 함께 성장하고 성숙하는 기본적인 원리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부교역자가 충분히 성장하고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하다.(옥한흠, “팀 사역, 한 영혼이라도 놓치지 마라”, 디사이플 2010년 6월호(서울 : 국제제자훈련원), p. 6)

 

3) 충분한 권한의 위임

교역자 그룹 전체를 팀으로 이해하고 사역 전체의 큰 그림을 위한 퍼즐처럼 각자의 사역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충분한 권한을 위임하여야 한다. 필자의 경우도 그러하지만 뭔가 부족하고 미숙한 부분들이 보이게 될 때 충분히 기다려주고 기회를 주어야 한다. 비전은 담임 목사에게서 나오지만 그것을 사역에 구현시키는 사역자(Missionary)는 부교역자임을 인식한다면 충분한 의사소통을 통한 비전공유를 바탕으로 사역에 대한 권한을 위임하고 신뢰함으로 맡겨 주어야 한다.(허원구, “부교역자와 비전을 공유하고 팀 사역을 하라”, 디사이플 2010년 6월호(서울 : 국제제자훈련원), p. 13)

 

4) 경제적 지원

교역자들의 사례 체계를 보면 담임 목사와 부교역자의 사례가 지나치게 큰 차이를 보인다. 물론 근속 년수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지만, 담임 목사에게 지나치게 집중되는 현상이 있다. 기본적으로 부교역자들이 마음껏 사역에 임할 수 있도록 경제적 필요를 공급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부교역자이기 때문에 어려움을 감수할 수 있겠으나, 그것은 끊임없이 담임 목사를 지향하며 임시 사역자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5) 자기 발전의 기회 부여

잘 준비된 좋은 사역자와 함께 하고 싶은 생각은 모든 담임 목사들이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동역하고 있는 부교역자를 훌륭한 사역자로 준비되도록 지원하는 일에는 미온적이다. 물론 공부를 하는 과정에 교회 사역에 집중하기 어려운 난점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 그리고 주님의 교회 전체를 세워간다는 대승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능하다면 충분한 생활을 보장해 주면서 전문 사역자와 장기간 사역을 지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2. 부교역자

1) 하나님께서 최고 지도자로 세우신 섭리를 인정

교역자 그룹이 동역자의 그룹이라고 해도 교회를 세우기 위한 분명한 질서가 존재한다. 하나님께서 담임 목사를 최고 지도자로 세우셨고 함께 동역하게 하셨음을 인정하고 협력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세례요한은 위대한 선지자로 인정받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을 예비하는 자임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바나바도 존경받는 위대한 지도자였지만 바울을 세우기 위해 협력하는 사명을 잘 감당했다. 지금의 교회 구조 가운데서도 섭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자신의 위치를 잘 이해하고 겸손함으로 협력하여야 한다. 담임목사와 충분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먼저 담임 목사에게 다가가고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최고 지도자로서의 외로움을 잘 살펴서 함께 스트레스를 풀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동지가 될 수 있도록 충분한 기도와 동역을 이루어 가라.

 

2) 하나님의 부르심과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사역에 대한 정체성 확인

부교역자로서의 사역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히 행함으로 주어진 사역을 통해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충성된 사역자여야 한다.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한 사역의 본질은 ‘목사로서 사역’하는 것이다. 부단히 영성을 개발하기 위해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이루며, 인격을 함양하여 말씀을 전하고, 성도를 돌보고 양육하는 사역을 감당하여야 한다. 실제로 중견 목회자들이 느끼는 부교역자들에 대한 인식은 첫째 목적의식이 분명한 교역자들이 많지 않고, 둘째 가치관이 너무 세속적인 교역자들이 너무 많고, 셋째 진정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역하는 교역자들이 드물고, 넷째 시무하는 마지막날까지 목회도 성경도 신학도 일반 학문도 또 기타 여러 면에서 끊임없이 배워가며 사역해야 하는데, 정치 컴퓨터 친교와 오락에 더 심취해 있어 점점 퇴보하는 교역자들이 적지 않으며, 다섯째 교역자는 하나님과 자신 외에는 감독자가 없다는 마음을 갖고 자기 스스로 감시자와 감독자가 되어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일에 소홀함이 없어야 하는데, 그런 교역자가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이다.(김충렬, “목회철학에 맞는 부교역자를 선발하라”, 교회 성장 2009년 9월호(서울 : 교회성장 연구소), p. 95) 이는 같은 목사로서 사역하고 있는 모든 사역자들이 함께 공감하며 되짚어 봐야 하는 지적이다.

동시에 함께 사역하는 부교역자들과의 관계도 명확하게 ‘목사로서 동역’하여야 한다. 교회 내 종적 서열화는 부교역자들 사이에서도 나타나며 서로를 경쟁자로 생각하는 풍토도 존재한다. 충분히 마음이 통하는 상대들이고 동병상련의 마음일 수 있지만 충분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3) 전문 사역자로서 자기 계발을 지속

부교역자는 배우는 자세로 임하여야 하고 자신의 은사를 따라 전문성 있는 사역을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학교를 다니며 학위 과정을 공부하는 것만 아니라 전문적 사역을 위한 다양한 분야의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결과적으로 몸 된 교회를 잘 세워가기 위해 동역하는 유능한 2인자로서 자리매김을 해야 한다. 요셉과 다니엘과 같은 2인자로, 모세의 종자였던 여호수아와 바울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디모데, 교회를 맡길 수 있었던 디도, 아볼로처럼 잘 준비된 2인자가 될 수 있어야 한다.

 

4) 담임 목사가 되었을 때 동역을 위한 준비

부교역자 시절에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잘 정리해서 담임 목사가 되었을 때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교역자 시절에 가졌던 문제의식을 담임 목사가 된 이후에 답습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충분한 준비를 통해 동역을 이룰 수 있도록 준비하여야 한다.

 

3. 교회(당회)

1) 부교역자를 교역자로 인식

교회가 일정 규모가 되면 담임 목사 혼자서는 모든 사역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여러 사역자들과 함께 동역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부교역자를 보조하는 사람으로 인식하지 말고 교회를 위해 사역하는 동일한 교역자로 인식하고 그 위상과 지위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더 나아가 담임 목사님과 함께 평생 교역자로 모시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충분한 생활이 가능하도록 마음을 다해 지원하고 전문화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 사역적 권위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2) 부교역자의 사역에 동역

담임 목사가 관심 갖는 사역에는 동역하는 풍토가 조성되어 있지만 부교역자가 전담하는 사역에는 교회적 관심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동역의 구조 속에서 부교역자가 맡아서 진행하는 사역에 교회적인 동의와 협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당회도 부교역자도 동일한 목사요 사역자로서 인정하고 세우며 전문화된 영역에서 함께 동역하는 자세를 견지하여야 한다.

 

3) 부교역자 양성

미래의 장군을 맡는 요람 육군 사관학교에서는 사관생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장군으로서 양성하기 위해 필요한 지성, 감성 그리고 야성을 개발시킨다고 한다. 심지어 장군의 품위 유지에 필요한 에티켓과 승마와 골프까지 가르친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는 장차 장군으로서 필요한 역량과 조건을 완비시키려는 목적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모 재벌 그룹은 한 사람의 인재를 모시기 위해 자가용 비행기까지 띄운다고 한다. 이는 사람을 중요시 하는 현대 사회의 변화를 말해주고 있다.(이권희, “부교역자의 자아발견과 자기발견”, 목회와 신학 2004년 11월호(서울 : 두란노 출판사), p. 156) 교회는 현재 함께 교회를 세우도록 동역하고 있는 사역자들을 지금 당장 사용하기 좋은 도구로 생각하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와 한국교회를 위해 훌륭한 교역자로 설 수 있도록 양성하는 것을 귀한 사명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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