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8/21) 교갱협 제17차 영성수련회 주제특강

1. 들어가는 말 - 어느 중2 남학생의 하루

아침 7시가 되면 일어나라는 엄마와 전쟁을 한다. 마음 같아서는 벌떡 일어나고 싶어도 어제도 새벽 2시 넘어서 잠을 잔지라 도무지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8시가 다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일어나 밥을 먹는둥 마는둥 하고 학교로 간다.

8시 30분까지 등교. 1교시 수업 시간까지 30분 정도 여유가 있다. 그래도 친구들과 수다를 좀 떨려고 하면 옆 친구들이 무언가 열심히 쓰고 있다. 아뿔싸! 숙제가 있었지. 열심히 친구들 숙제를 베끼고 있는데, 또 옆 친구 하나가 오늘 미술 준비물을 안 가져왔다고 허둥댄다. 생각해 보니 나도 안 가져왔다. ‘이거 준비물 안 가져오면 수행평가 점수 감점인데’ 라는 생각이 들어 급하게 준비물 사러 나가려는 친구에게 내 것도 사오라고 부탁을 한다. 이렇게 허둥대는 사이에 숙제를 다 베끼지도 못한 채 선생님을 맞는다.

1교시 영어 시간, 학원에서 다 배운 내용이라 내용은 다 이해가 되지만 자꾸만 졸리고 딴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영어 시간에 딴 생각 하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 실제 시험을 보면 자꾸 몇 개씩 틀리게 된다. 학교 영어 선생님이 강조하는 것을 놓치기 때문이다. 그래도 노력은 하고 있지만 집중이 잘 안 되고 자꾸만 졸게 되어서 고민이 많다.

2교시 수학 시간, 수학도 학원에서 이미 다 배운 내용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 선생님은 쉽게 풀 수 있는 요령이 있음에도 그런 이야기는 안 하고 자꾸만 무슨 그림을 그리고 뭘 만들면서 어렵게 설명을 한다. 선생님은 원리를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내게는 그 이야기가 잘 들어오지 않는다. 학원 선생님이 이미 가르쳐준 문제 푸는 요령을 이미 터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실제 시험에서는 복잡한 응용문제의 경우 문제 풀이 요령이 바로 적용이 되지 않고 어떤 경우는 문제 자체를 이해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 고민이 된다.

3교시 사회 시간, 사회선생님은 시사적인 문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수업을 자주 한다. 토론 수업 자체는 재미있고 신이 난다. 그런데 토론을 많이 하다 보니 교과서 진도를 충실히 나가지 않는 것 같아 약간의 불안함은 있다. 그리고 사회 선생님은 친구들이랑 조를 짜서 탐구보고서 과제를 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그 과정은 재미있지만 친구들이 다 학원에 걸려있기 때문에 함께 시간 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4교시 국어 시간, 사실 국어가 제일 어렵다. 학원에서도 국어 문제 풀이는 많이 하지만 영어나 수학처럼 잘 대응이 되지는 않는다. 특히 우리 국어 선생님은 책 읽기를 강조하고 수업 시간에는 글쓰기도 많이 하는데, 사실 책 읽을 시간이 거의 없다. 학교에서 숙제를 내줘도 홈피에 나오는 책 요약을 참고해서 대충 써 낸다. 그리고 글쓰기는 늘 어렵다.

점심시간, 난장판 같은 교실에서 아이들과 장난치며 밥 먹는 시간, 반찬이 맛있지 않아도 그래도 이 시간 때문에 산다. 식사 후에는 친구들과 장난치거나 운동장에 나가 공을 차기도 한다. 하지만 가끔 수행평가에 들어가는 숙제 못한 것이 있으면 이 시간도 날아간다.

5교시 미술 시간, 그래도 미술 시간은 재미있다. 다만 이것도 수행평가에 반영되기 때문에 그림에 소질이 없는 나로서는 여간 고역이 아니다. 최근에는 미완성 미술 작품을 집에 가져가면 다른 사람이 대신 해 주는 부작용들이 생겨 미술 시간 내에 다 끝내야 가기 때문에 시간 부족 때문에도 많이 힘들다.

6교시 과학 시간, 과학도 결코 만만치가 않다. 물론 학원에서도 배우고 열심히 외우기는 하지만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 누가 좀 명쾌하게 설명을 해 주면 좋겠다.

이렇게 힘겨운 하루 공부를 다 마치고 종례까지 하고 나면 대략 3시 30분. 가끔 친구들이랑 공을 차다가 갈 때도 있지만 보통은 그냥 집에 간다. 집에 가서 우유 한 잔 마시고 잠시 만화책 뒤적이다가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학원 숙제 해야지!’ 하는 생각이 번쩍 떠오른다. 학원에는 매일 외워가야 하는 영어 단어가 30개이고, 풀어가야 할 수학 문제가 문제집 4페이지 정도 된다. 또 학원에서는 단어를 틀리면 틀린 개수대로 맞는다. 학교와는 달리 학원 선생님이 때리면 속으로만 불평하지 뭐라고 하는 아이가 없다. 학원 들어갈 때 이미 부모님이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학원 숙제를 제대로 끝내지도 못한 상태에서 급히 저녁을 먹고 학원 버스를 탄다. 학원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진행되는 종합반이다. 물론 이 시간은 평소 시간이고, 시험기간 3주 전부터는 10시 수업 이후 밤 12시 혹은 1시까지 자습을 시킨다. 그리고 주말에도 대부분 특강을 진행하기 때문에 토요일이나 일요일도 제대로 쉬지도 못한다.

이렇게 학원 마치고 집에 오면 10시 30분 정도, 컴퓨터를 켜서 메일 확인이나 게임 좀 하려고 하면 친구들로부터 문자나 메신저가 온다. 대부분 내일 학교 가져갈 숙제나 준비물을 묻는 질문이다. 물론 나도 잘 모르기 때문에 또 다른 친구에게 물어본다. 대부분 숙제는 학교 가서 할 생각으로 미루지만 수행평가에 중요하게 반영되기 때문에 미물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그래서 이런 숙제 좀 하다 보면 12시를 넘기는 것은 기본이고 어떤 때는 1시나 2시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조금의 쉴 틈도 없이 살지만 성적이 더 이상 오르지 않는다. 도대체 나보다 공부 더 잘하는 친구들은 얼마나 열심히 하길래 그 성적을 유지하는지 모르겠다. 지금 시간도 이렇게 힘든데, 엄마는 겨울방학부터 특목고 준비 학원에 다니라고 한다. 중3 선배들을 보면 특목고 준비 학원들은 보통 밤 1시까지 수업을 한다. 도무지 자신이 없다. 지금도 힘들어 죽겠는데 어떻게 그 생활을 할 수 있을지 벌써 걱정이 된다.

 

2.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가?

1) 학교와 학원의 이중 공부에 지친 아이들

앞의 중2 남학생의 사례는 대도시 중산층 지역 보통 아이들의 삶이다. 즉 아이들은 평균적으로 학교에서 6시간의 공부를 하고 학원에서 3시간 정도의 공부를 한다. 물론 이 시간은 숙제를 하거나 개인이 예복습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수업을 듣는 시간을 말한다. 이 시간들을 포함하면 하루 10시간, 주당 50시간이 훌쩍 넘어간다. 이러한 공부량은 세계 최고의 시간이다. 어른들에게 하루 8시간 주당 40시간 노동량을 제한하고 있는 현 노동법에서 볼 때 우리 아이들은 엄청난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2) 남들보다 조금 더 앞서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하는 교육

이렇게 학교와 학원으로 오가며 많은 공부를 하더라도 각각의 공부가 의미가 있다면 괜찮다. 그런데 문제는 학교와 학원의 공부 둘 다 명문대 입학을 위한 한 줄 서기 경쟁에서 좀 더 앞서기 위한 문제풀이 중심의 반복 암기 학습이라는데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학교든 학원이든 입시 시험에서 좀 더 많은 점수를 받기 위한 교육을 하다보니 교육적으로는 정말 질이 낮은 교육, 엄청난 투입에 비해 교육적 효과가 낮은 고비용 저효율의 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 글은 미국에 조기유학을 떠난 학생이 한국 교육에 대해 쓴 글이다.

시험보고 나면 다 잊어버리는 교육.
배우고 나면 뭘 배웠는지도 모르는 교육.
누구나 같은 곳을 향해 달려가며 모두가 좌절하는 교육.
정답 찍는 요령만 숙달하는 교육.
하기 싫은 것도 억지로 해야 하는 교육.
스스로 판단하고 해결할 능력을 못 키우는 교육.
십 수 년을 배워도 변변한 생활영어 하나 구사 못하는 교육.

3) 어정쩡한 학교, 입시에 전념하는 학원

흔히 공교육의 질의 문제를 걱정하고, 또 어떤 사람은 학교가 학원보다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 말이 공무원 조직으로서의 교사집단이 갖는 무사안일과 경쟁력 약화를 지적할 때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이고 학교가 수용해야 될 부분이 많다.

하지만 학교의 경쟁력을 학원과 비교하여 문제풀이식 입시 대비를 얼마나 잘 해주느냐에 놓고 이야기한다면 문제의 본질을 잘 못 짚은 것이고 학교로서는 억울한 부분이다. 사실 우리 교육이 갖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 중 하나는 학교 교육이 추구하는 교육목표와 입시 현실과의 괴리다. 학교 교육은 국어의 경우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를 잘 하는 것을, 수학은 삶 가운데 이루어지는 수리적 원리 이해, 사회는 민주시민 육성을 목표로 삼고 있지만 실제 입시는 수능이든 내신이든 객관화된 문제를 잘 푸는 학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학교에서 열심히 하려는 교사들은 교육과 교과가 추구하는 목표와 객관화된 시험 문제 풀이 교육 사이에서 늘 고심을 한다. 물론 이 두 가지가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지만 단기간에 남들보다 앞선 결과를 내야하는 우리 입시 구조 속에서 도대체 어디에 방점을 두고 가르쳐야할지 몰라 고민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손쉬운 문제풀이 식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학원의 목표는 너무 분명하다. 다른 고민 없이 입시를 대비한 문제풀이 교육에만 올인하고, 아니 이를 위해 목숨을 건다. 심지어 학원의 번창을 위해 현행 제도의 약간의 허점만 보이면 그 부분을 파고들어 입시 경쟁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여 더 많은 사교육을 끌어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분에 있어서 학교가 학원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학교가 갖는 어정쩡함과 학원이 가지는 문제풀이식 입시 교육에의 올인은 이 두 가지 교육을 동시에 받고 있는 아이들의 삶 가운데 그대로 투영된다. 그래서 아이들도 학교와 학원 사이의 이 미묘한 갈등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 현실적으로 점수를 올려주는데 학원의 공부가 도움이 되지만 학교의 교육을 무시할 수 없는(한편으로 내신 점수 때문에 무시할 수 없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교사들 가운데 학원이 근접할 수 없는 교과의 본질에 근거한 배움의 기쁨을 주는 부분에서 무시할 수 없음을 느끼기도 한다) 현실 가운데서 자기도 어찌해야할지 모르는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4) 학생들의 다양성과 소질과 적성에 대한 배려가 없는 학교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엄청난 공부의 짐을 지고 있지만 그나마 이러한 짐이 개별 아이들의 성장과 진로에 도움이 된다면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상위권에 있는 아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은 상위권 아이들의 들러리 역할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 교사들은 중1 성적을 보면 그 아이가 어느 수준을 대학을 갈지 대략 판단을 한다. 그리고 그 판단은 90% 정도 정확하다. 중1에서 고3에 이르기까지 개별 아이들마다 많은 변화가 있지만 성적은 거의 변화가 없다. 중1 시험은 암기와 문제 풀이중심의 입시 시험에 대한 아이의 적응을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중위권과 하위권 아이들에 대한 대책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중위권과 하위권 학생들 가운데는 공부하는 방법을 잘 모르거나 늦게 철이 들어 나중에 상위권으로 진학하는 아이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공부에 특별한 은사나 흥미도 없으면서 특별히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부를 붙들고 있다. 물론 이 아이들도 상위권이나 다를 바 없는 - 어떤 경우에는 더 많은 - 사교육을 받고 있다.

중고등학교 상황에서 학생들의 다양성과 소질을 배려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음,미,체 관련 특목고다. 하지만 이들은 보통 성적 중심의 입시의 길보다 더 많은 사교육비를 투자해야하기 때문에 가난한 아이들이 근접할 수 없는 길이다.

그리고 입시 공부가 아닌 또 다른 인생의 길을 준비하는 전문계고(이전의 실업고) 역시 또 다른 자신의 소질을 키우고 입시와는 다른 통로로 진로를 준비하는 길이라기보다는 대학입시의 또 다른 유리한 한 통로로 작용하거나 아니면 낙인집단으로서의 의미를 갖기 때문에 다양한 진로 선택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재정적인 여력이 있는 집의 경우 대부분 조기유학의 길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재정적 여력이 없는 집의 경우 시간과 돈만 낭비하고 있다. 

 

3. 왜 변하지 않는가?

앞에서 제시된 우리 아이들의 삶을 보다 보면 우리 교육이 지난 30년 동안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니 변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의 경제적 부의 증가와 자녀 수 감소와 함께 아이들이 감당해야 할 입시와 경쟁의 부담은 더 증가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그럴까? 그 원인을 한 마디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다음 몇 가지 요소를 생각해볼 수 있다.

1) 교육을 ‘선발과 배제’로 보는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의 교육관

‘선발과 배제’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의 교육을 관통하는 교육적 전제다. 즉 교육이란 학생들에게 정해진 교육과정을 제공한 후 그 결과를 평가하여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더 나은 혜택을 주고, 그 결과에 미치지 못하는 학생에게는 혜택에서 ‘배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교육을 선발과 배제의 기제로 사용하려다 보니 누구도 그 기준에 대해 불평할 수 없을 정도로 공정해야 하고, 이를 위해 만든 것이 객관화된  점수로 한 줄 세우기가 가능한 시험 선발 방식이다. 이러한 시험 방식은 다시 학교 교육의 내용을 그 시험을 준비하는 것으로 바꾸어 버렸고, 이렇게 정형화된 시험의 틀은 사교육이 붙기 매우 유익한 구조가 되어 사교육 번창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선발과 배제’의 교육관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유교문화권에 속한 일본, 중국, 대만, 북한에서 약간의 정도의 있지만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중국이나 북한의 경우 오랫동안 사회주의를 실시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고, 일본의 경우 경제, 기술 등 다른 사회의 많은 부분에 있어서는 미국과 대등할 정도로 발전을 했지만 입시와 경쟁 문제 해결은 거의 포기하고 있는 실정임을 생각할 때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 전통에 있는 서구의 교육을 보면 ‘발견과 발굴’을 교육의 본질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교육이란 학생들에게 일정한 교육과정을 제공하고, 학생들이 그 교육과정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에 따라 각 학생에게 맞는 더 심화된 혹은 더 기본적인 교육과정을 제시하고, 그러한 교육과정의 수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학생의 특징이나 특기를 잘 관찰하여 격려 혹은 보충해 주고 그 과정을 면밀하게 기록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이나 사회는 그 학생에 대한 교사의 상세한 기록과 결과물에 근거해서 자신의 대학이나 전공 사회에 맞는 학생을 ‘발견’하고 ‘발굴’하는 것이다. 물론 이 나라 교육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우리나라가 겪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입시 경쟁과 공교육의 왜곡, 사교육의 번창과 같은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2) 양극화의 고착화와 가진 자들의 ‘사다리 걷어치우기’

“개천에서 용 난다” 한 때 한국 교육의 역동성을 표현해 주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 말은 지금 중고등학생을 둔 부모 세대에게까지만 적용되는 말이었고, 지금 교육에는 거의 적용이 되지 않는다. 이 말이 적용이 될 상황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의 전통적 신분제도가 완전히 무너지고, 모든 국민이 가난한 상황에서 경제가 계속 발전을 하던 상황에서 누구든 공부만 열심히 하면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던 그런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개천 출신의 용들이 점차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전국 각 지역에 흩어져있던 개천은 점점 사라지고 이제는 서울 중심의 큰 강이 형성되어 있어서, 이 강에서 놀지 않으면 용이 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더군다나 이미 이 강에 들어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개천 출신들이 이 큰물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벽을 계속 쌓고 있다. 이 벽은 일단은 더 정교한 사교육비 형태로 표현이 되지만, 갈수록 입시명문 혹은 귀족학교 등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로 표현된다. 어떤 의미에서 영어를 강조하거나 영어 특기 대학입시를 늘리는 것도 이러한 노력의 한 방편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기여입학과 같은 제도를 만들기를 원한다. 이러한 가진 자들의 ‘사다리 걷어치우기’ 행동은 가진 자들의 사회적 책임 의식의 부재라는 전반적인 사회 현상의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는 형식적인 평등이나 절차적인 공정성에 더 이상 집착하지 말고, 결과의 평등을 약간이라도 보전해줄 수 있는 방안 마련에 나서야 한다. 왜 미국과 같은 사회가 일면 역차별 같은 소수자 할당제(affirmative action)를 적극 운영하고 있는지, 이 소수자 할당제에 담긴 기독교 정신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3) 대학, 학교, 언론, 학원 등 입시를 둘러싼 기득권의 저항

고교 내신이든 국가 차원의 시험이든 대학별 고사든 관계없이 객관적 점수에 의한 한 줄 세우기와 이에 근거한 선발과 배제의 방식은 초중고 교육과 대학입학제도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사교육을 번창시키는 구조이지만 대학과 초중고등학교에는 매우 편한 구조이다.

대학은 자신의 대학과 전공에 맞는 학생을 선발하려는 매우 어려운 작업을 할 필요가 없이 엑셀 프로그램을 돌려 일정한 점수에서 끊으면 되고, 대학 교육의 질을 높이려는 노력이 없어도 이미 정해진 서열에 따라 학생들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미 상위권 지위를 확보한 대학들은 총점 1점이라도 더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해 고교 교육이 어떻게 황폐화되고, 학생과 학부모가 어떤 고통을 당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 대학이, 특별히 이미 상위권이라는 기득권을 확보한 대학이 전체 한국 교육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총점 우수 학생보다는 다양한 특기를 가진 학생들을 선발하려는 노력을 한다면 우리 교육은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고교의 경우 현재 입시 위주의 문제풀이 중심의 교육에 대해 불평을 하지만 사실은 이 체계가 주는 안정성에 깊이 안주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만약 대학이 총점이 아닌 고교가 학생 개개인에 대한 상세한 누가기록과 특기와 적성의 기록에 근거해 선발하겠다고 했을 때 고교는 여러 변명과 핑계를 대고 이를 거부할 것이다. 교과의 본질에 맞는 창의적인 수업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하고 자신이 가르친 내용과 학생이 배운 내용이 다 공개되며, 학생 개개인의 특기와 적성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해야 하는 힘든 과정보다는 획일적 평가에 안주할 수 있는 현재의 구조가 더 편하기 때문이다.

대학과 학교 외에도 학원이 현 체계의 변화에 저항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이고, 언론도 겉으로는 드러나는 논조와는 달리 교육 과련 엄청난 장사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현 질서의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교육이 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동시에 늘 또 다른 논리로 발목을 잡는 것이 우리 언론의 현 주소이기도 하다.

 

4. 기독 학부모와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삼중의 싸움

이러한 한국 교육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최근 공교육체계를 벗어나 홈스쿨이나 기독교 대안학교를 선택하는 학부모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교육이라고 하면 학교를 떠올리고 학교를 떠나면 큰 일 날 것 같은 두려움 속에 있었는데 이러한 두려움들을 상대화하고 교육의 주체가 부모라는 성경적 관점에 근거해서 신앙을 최우선시하고 믿음의 원리에 근거해 자녀를 키워보겠다는 이러한 모험은 매우 소중한 시도들이다.

하지만 이 때 주의할 것은 단지 공교육 체계를 벗어나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되고 우리 교육과 사회가 지향하는 지나친 경쟁과 남보다 더 앞서야 한다는 가치체계를 벗어나기 위한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을 경우 홈스쿨이나 기독교 대안학교는 공교육에 다니는 아이들보다 좀 더 특별한 방법으로 앞서겠다는 교육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이러한 가치의 싸움은 부모와 대안학교가 감당해야할 매우 어려운 영적 싸움이다.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학부모들은 자녀를 공교육 체계에 보내게 된다. 우리 학교체계가 갖고 있는 문제를 다 알지만 대다수의 학부모들에게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것 이상의 대안을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고, 또 일부의 사람들은 자녀를 믿음으로 키워야 하지만 동시에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일반 학교에 보낸다. 이 경우는 삼중의 싸움이 요청된다.

하나는 현 교육 체계 가운데 있지만 자녀에게 말씀과 기도의 경건 훈련, 믿음으로 살아가는 훈련을 최우선시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실제로 아이를 학교에 보내기 시작하면 하교가 상당한 시간을 흡수해 버리고, 그리고 방과 후에 몇 가지 예체능 사교육만 시킨다 하더라도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그 무엇보다 말씀과 기도의 경건 훈련과 하나님과 부모에게 순종하는 품성의 훈련을 절대적으로 중시하고 여기에 우선적인 시간 투자를 하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학교체제 속에서 신앙 교육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공교육 체계가 요구하는 경쟁 위주의 남보다 앞서기 위한 가치로부터, 사교육과 이웃집 엄마들이 조성하는 과도한 불안감으로부터 나와 자녀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과도한 불안감의 공포는 사실 이 시대를 지배하는 거대한 악한 영의 세력이다. 이러한 악한 영의 세력으로부터 나와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는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나와 내 아이의 인생의 주인은 누구인가?’ ‘사람의 행복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하나님은 내 아이에게 그에 맞는 뜻과 은사를 주셨고, 정한 때에 그것을 발현하게 하는 분인가?’ 그리고 그 해답을 하나님 앞에서 구하는 작업이 있어야 나의 불신앙과 불안을 자제시키는 평정심 가운데서 아이를 교육할 수 있다.

셋째, 경쟁과 불안에 입각한 선행교육을 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우리 자녀가 최소한 그 학년이 요구하는 교육과정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다음 학년으로 진학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아이에게 주어진 은사와 재능을 발견하고 키워주려는 노력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지혜와 분별력이 요구된다. 하나님과 아이에 대한 깊은 신뢰 가운데서 아이에게 믿음의 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아이의 지적 호기심을 일깨워주고 배우는 기쁨을 알게 하고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길러주어야 하기 때문에 많은 주의와 노력이 요구된다. 그냥 돈으로 사교육에 맡겨버림으로 해결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과 믿음이 요구된다.

 

5. 교회가 기독교 대안 학교를 세우고자 할 때 몇 가지 고려할 사항

1) 공교육을 포기하는 것이 옳은가?

- 공교육은 기본적으로 가난한 아이를 포함한 모든 국민에게 일정한 수준 이상의 교육을 평등하게 제공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공교육의 역할은 계속해서 유지되어야 한다.
- 하지만 우리 사회 내에서 건전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일정 이상의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이 공교육을 빠져나가기 시작하면 공교육은 그만큼 더 약화되고 나중에는 슬럼화가 된다.
- 기독교 대안 학교가 아주 소수일 경우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겠지만, 지금처럼 기독교 대안 학교 설립이 한국 교회의 대세가 될 경우 결국 한국 공교육을 약화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 동시에 이러한 현상은 한국 공교육에 대한 기독교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역할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 그러므로 기독교 대안 학교는 이러한 공교육의 약화와 공교육에 대한 기독교적 영향력 약화를 뛰어넘는 더 큰 교육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있을 때 시작해야 한다.

2) 중산층 이상의 가정을 위한 학교, 과연 기독교적인가? 혹은 교육적인가?

- 미국 사립학교 혹은 기독교학교들을 가보면 흑인을 찾아볼 수 없다. 가난한 아이들의 접근이 원천적으로 봉쇄되는 학교라면 그 학교의 공식 교육과정이 아무리 기독교적 가치를 담고 있다 하더라도 잠재적 교육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비기독교적인 가치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필요하다.

3) 공교육이 가진 자산을 다 포기한다고 할 때, 그 이상의 자산을 가지고 있는가?

- 공교육이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과 훈련된 교사 자원을 가지고 있다. 다만 관료적 학교 구조와 입시 중심의 교육 틀 가운데서 이 부분들이 제대로 교육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지만 공교육은 교육의 질이 일정 수준 이하로 내려가지 않을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가지고 있는 셈이다.
- 반면 기독교 대안학교의 경우(일반 대안학교도 마찬가지다) 공교육이 가진 교육과정과 교사자격증의 틀을 뛰어넘어 자율적으로 교육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공교육보다 훨씬 뛰어난 교육이 이루어질 수도 있는 반면, 공교육보다 더 질 낮은 교육이 이루어질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다.

4) 공교육이 가진 문제점을 극복할 비전과 역량을 갖추고 있는가?

- 공교육이 가진 문제점의 상당 부분은 공교육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갈수록 심화되는 승자독식의 양극화 체제, 대학서열주의와 학벌체제 등 우리 사회의 모순이 그대로 투영된 측면이 크다.
- 그런데 기독교 대안 학교도 한국 사회 가운데서 한국의 학부모들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이 모순의 틀을 벗어나기가 쉽지가 쉽지 않다.
- 기독교 대안 학교가 성공해서 이 시대 공교육이 나아가야 할 제대로 된 교육의 방향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이러한 한국 사회와 교육이 가진 문제점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아울러 이를 극복하기 위한 비전과 역량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 기독교 대안 학교도 이러한 문제에 포획될 수밖에 없다.

5) 기존 기독교 대안학교들의 상황에 대해 충분히 파악하고 있는가?

- 많은 기독교 대안 학교들이 나름대로 이상을 가지고 출발했지만 그 이상을 제대로 실현하고 있는 학교는 거의 없다. 그것은 그들이 특별한 잘못을 해서라기보다는 한국사회와 교육, 그리고 한국 교회의 토양이 제대로 된 기독교 대안 학교를 해 내기 그만큼 척박한 토양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새로운 기독교 대안 학교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시작한 기독교 대안학교들이 어떤 문제에 걸려 넘어져있고,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냉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6) 신앙 교육 성공의 연장선인가? 신앙 교육 실패의 대안인가?

- 한국 교회가 신앙 전승에 실패하고 있다는 것은 기독교 대안 학교 운동과 관련하여 매우 부정적인 자산이다.
- 가정이 가정에서의 자녀교육을 포기하고 학교와 학원에 아이들을 맡기는 것처럼, 신앙교육과 인성교육도 기독교 대안 학교에 돈을 주고 맡기려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
- 교회가 기독교 대안 학교를 설립하기 이전에 가정에서 자녀를 신앙으로 양육하는 운동을 먼저 해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한 분명한 헌신과 성과 없이 기독교 대안 학교를 시작해서는 안 된다.

 

6. 교회가 할 수 있는 입시 사교육 대응 방안

1) 기독 학부모 교실
2) 주일에는 교회로
3) 수능 기도회, 바꾸기
4) 대안 입시 설명회 중

 

정병오 대표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윤리교육을 전공한 후 1988년 서울 청운중학교에서 천방지축 남자 중학생들을 만나 처음 교직생활을 시작했다. 현재는 기독교사들의 연합모임인 좋은교사운동의 대표이자 입시사교육바로세우기기독교운동의 공동대표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선생님은 너를 응원해!’ ‘시대를 뒤서 가는 사람’, ‘하나님 앞에서 공부하는 아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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