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8/21) 교갱협 제17차 영성수련회 저녁집회

사무엘상 17장 45절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삼중혁명의 영성’이라는 책이 있는데 저자가 프랑스의 부르고뉴 지역을 방문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 곳에는 ‘떼제 공동체’와 ‘클리니 수도원’이 있다고 합니다. ‘떼제 공동체’는 겉으로 보기에는 허름하고 볼품없는데 안으로 들어가 보면 전 세계에서 몰려든 방문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특별히 기도회 시간에는 3,000여 명의 젊은이들이 영성을 추구한다는 요지였습니다. 이 ‘떼제 공동체’에서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건물이 화려하고 역사도 깊은 ‘클리니 수도원’이 있는데 지금은 관광객들에 의해서 명맥만 유지하는 초라한 공동체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 ‘클리니 수도원’은 AD 910년에 세워졌는데 그 건물이 얼마나 큰지 로마의 바티칸 성당이 건축되기 전까지 가장 큰 교회 건축물이었다고 합니다. 이 수도원의 설립 목표는 교회와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설립초기에는 목적대로 잘 되었다고 합니다. 중세교회에 큰 공헌을 했고, 개혁적인 인물도 많이 배출하고 추기경도 배출하고 심지어는 여러 명의 교황도 배출했습니다. 이렇게 역사도 있고 일도 많이 했고 존경도 받았는데 지금은 관광객만 오는 교회로 전략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유명해지고 종교적인 권력이 주어지면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수도사들이 묶으며 수행했던 공간은 ‘목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책의 내용 중에 제 마음에 특별히 와 닿았던 것은 “남을 개혁하고자 하면서도 스스로를 개혁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교갱협에도 경고처럼 들려집니다. 중세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개혁적인 인물도 배출했지만 스스로 계속 개혁해내지 못하면 변질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만나기만 하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한국교회가 이러면 안 된다. 변질했다. 타락했다.” 그런데 그걸 누가 모릅니까? 항상 열변을 토할 때 보면 저 자신은 제외시키고 있는 것을 봅니다. 자기 자신은 굉장히 의식적이고, 생각도 깊고, 목회도 반듯하게 하고, 표현은 안하지만 나는 잘하고 있다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교회가 문제가 많고, 썩었고, 정신이 나갔다고만 생각하면서 가다보면 어느 날 봤을 때 클리니 공동체가 되어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클리니 공동체와 같은 비참한 자리에 빠지지 않기 위해 자성하면서 변화되어야 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오늘 새벽에 불현 듯 한경직 목사님이 생각났습니다. 소천하시기 전에 남한산성에서 휴양중이셨는데 젊은 목사님들이 인사드리러 가서 한경직 목사님께 젊은 목사들을 위해 한 말씀만 해주십사 부탁드렸더니 한 목사님이 진짜 한 마디만 하셨는데 “목사님들, 예수님 잘 믿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 잘 믿어야 돼”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를 잘 믿는 다는 것이 뭘까? 계속 질문을 하게 됩니다.

저는 5남매 중 막내로 자랐습니다. 저희 형들은 클래식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눈 뜨면서부터 듣고 했더니 어떤 때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거의 대부분 아는 곡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문제는 제목도, 작곡가도 몰랐습니다. 그저 귀에 익숙한 곡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어떤 사람은 음악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박식합니다. 작곡가들의 생애와 곡과 모든 것을 다 압니다. 그런데 음악을 듣지 않아서 들어도 누구의 무슨 음악인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면 이 둘 중에 누가 음악을 아는 건가요? 제일 좋은 것은 이론적으로도 박식하고 듣는 것도 즐거워하면 좋지만 그게 아니라면 음악을 아는 것은 듣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경직 목사님의 충고와 연결해서 우리의 목회가 음악은 안 들려주고 계속 하나님에 관해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고,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셨고, 예수님은 뭘 하셨고, 이렇게 교과서만 외우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목회와 삶 자체도 이와 같은 것은 아닌가? 늘 설교를 해야 하니까 성경을 읽어야 되고, 또 주석도 봐야 되고, 참고 도서도 읽어야 되고, 신학 사조도 알아야 되고, 그런 것들에 우리의 마음이 쏠려있다면 음악을 안 듣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늘 음악을 말합니다. 모차르트를 말하고 바하를 말하고 베토벤을 말하는데 음악을 듣는 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음악에 대해 공부를 해야 되는데 음악 들을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한경직 목사님의 “젊은 목사님들, 예수, 잘 믿으세요”가 듣기에 따라서는 기분 나쁠 수도 있습니다만 우리 모두가 자기를 깊이 돌아보고 그러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하나님과 날마다 대면하는가? 나의 위기 가운데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고 그 때 내 마음이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아 어떤 영향을 받고 그래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제 눈에는 그게 안보입니다.

정치하는 목사님들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목회 잘 하시는 목회자분들과 대화할 때도 “성령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고 이렇게 인도하셔서 이렇게 회개하고 방향을 바꾸고” 이런 이야기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 것 때문에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런 경험을 해보셨습니까? 여러분, 우리 목사들이 예수를 잘 믿어야 한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론적으로 통달을 하고 꿰뚫고 있으면서 실제적으로 그 하나님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시고 가이드가 되어 주시는 지 의문이 듭니다. 젊은 부교역자 시절부터 그게 방치가 되면 40대, 50대에는 ‘클리니 수도원’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수로 ‘클리니 수도원’을 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습니다. 기적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모두가 다윗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저는 주장하기를 우리 같은 사람이 골리앗에게 덤볐다가는 한 명도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다 밟혀 죽어요. 우리는 설교할 때 “골리앗에게 덤벼라. 다윗이 이겼잖아. 너도 이길 수 있어”라고 하면서 맨날 뻥이나 치고 있으니까 애들이 거기에 속아서 혼미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덤벼서 이긴 것이 본문의 핵심이 아니고, 쥐뿔도 없는 다윗이 골리앗에게 덤빌 수 있었다는 것이 핵심 아닙니까? 만약 다윗이 골리앗에게 밟혀 죽었다면 실패한 겁니까?

다윗은 무슨 배짱으로 아무 힘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어린놈이 어떻게 그 감당할 수 없는 골리앗에게 덤빌 수 있었냐하면 사무엘상 17장 31절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이것을 성도들에게 적용해보겠습니다. 한 성도가 회사에 일하러 갔는데 맨날 자기만 보면 개독교라고 소리지르는 직급이 훨씬 높은 어느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한테 대들었더니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고 그 사람을 감화, 감동시켜서 꼬꾸라지게 만들고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일이 일어났다. 이렇게 삶 속에서 위기가 있을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모든 위기를 모면한다. 이런 이야기 아닙니까? 내가 양을 지키는데 하나님이 곰의 발톱과 사자의 발톱에서 나를 건져내시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했기 때문에 골리앗도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 힘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담대하라’는 설교는 수도 없이 하는데 조그만 위기만 오면 저부터 무너질 것 같아요. 부들부들 떨고 안절부절 합니다. 우리 교회 부목사가 아무 일도 아닌 일로 하도 떨기에 불러서 우리 설교한대로 흉내라도 내보자라고 했습니다. 목회 현장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에 빠질 때 밟혀 죽을 지도 모르지만 과거에 위기를 만날 때 내 삶속에서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했더니 어떤 은혜를 주셨는지 그 체험이 쌓이고 쌓이고 쌓여서 골리앗에게도 덤빌 수 있을 만큼 무모함이 생겨나는 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목회현장은 골리앗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지 3가지 정도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거룩한 분노입니다.

사무엘상 17장 26절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분노가 느껴지십니까? 저 같은 비겁한 자에게 없고 다윗에게 있는 것, 바로 거룩한 분노입니다. 지금의 현실은 눈만 뜨면 주님의 이름이 조롱당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짓밟히고 있는데 분노가 안 일어나는 겁니다. 여전히 내 관심은 몇 명 목회하고, 어떤 좋은 담임 목사 만나서 부교역자 생활을 편하게 할 건지, 어느 교회는 월급을 많이 주는지, 어느 교회로 가면 내 인생이 편할지, 옆에 교회가 좀 잘되면 분노가 일어나고 울분이 생기는데 주님의 이름이 조롱을 당하는 한국교회 현실에 대해서는 분노가 안 일어납니다.

저는 솔직히 여러분 앞에서 설교하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제가 제일 부담스러운 것은 청년들 앞에서 설교할 때입니다. 얼굴을 들고 설교할 수 가 없습니다. 내 얼굴에 침을 뱉으라고 했습니다. 목사들이 하나님 앞에서 대역 죄인이 되어서 한국교회를 시궁창에 처박았는데 밥이 넘어갑니까? 밥이 넘어 갑니까? 잡담이 나옵니까? 저는 제 역할이 끝나면 하루라도 더 살고 싶지 않습니다. 진심입니다. 사실 죽는 것도 두려워요. 하나님 앞에 가서 무슨 낯짝을 들겠습니까? 하나님의 고귀한 피로 산 교회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무슨 면목이 있습니까?

신문지상에 상가 교회들이 망해서 불교가 하나씩 하나씩 차지하고 그래서 교회 종탑위 십자가가 불교 표시로 바뀌는 사진이 났습니다. 이런 무례한 불교에 대해서 울분이 안 생깁니까? 우리가 아무 할 말이 없는 것은 그보다 더 무례한 짓을 많이 했고 그 원인 제공을 했습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 보면 “나는 태어날 때부터 심장에 화살을 꽂고 태어났나 보다. 빼려고 해도 아프고 가만히 둬도 아프다.” 이 글을 인용해서 제 트위터에 글을 남겼습니다. 이 시대의 목회자로 살아가는 저의 아픔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는 순간 제 심장에도 화살이 꽂혀졌습니다. 그냥 둬도 아프고 빼도 아프고, 옥 목사님 밑에서 청소년 사역할 때도 아팠고, 개척을 해서 30여 명 모일 상가 보러 다닐 때도 아팠고, 2만 명이 모이는 지금도 아픕니다. 교회가 크면 안 아플 것 같으세요? 더 아픕니다. 이 화살이 저한테만 꽂혀있습니까?

최근 '주님은 나의 최고봉'(오스왈드 챔버스)의 글을 읽고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아픈 마음 때문에 이 세상에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신 것에 감사하라." 제가 그렇게 아픈 것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도구가 되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더 아파야 되지 않을까요?

지난 7월 1일 저희 교회에서 ‘화약 없는 총알’이라는 설교를 했더니 그 설교가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마치 태풍 속에 들어간 것 같았습니다. 그 설교는 제가 우리 교회에서 늘 하던 것을 모은 것 뿐 입니다. 지난해에 저희 교회에 3,500명이 등록했습니다. 올해 추정하건데 5,000명이 등록한다고 합니다. 한 교회가 이렇게 비대해지는 것을 저의 양심으로는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모든 교회가 이렇게 부흥이 된다면 축제가 되겠지만 힘든 교회가 많은데 우리교회만 숫자가 늘어나는 것은 마음을 힘들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에 가위가 눌리고 고통스럽고 잠을 잘 수가 없고 하면서 정각 새벽 3시에 눈이 떠졌습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님의 '주의 음성'이라는 책을 손에 잡았습니다. 거기에 이사야서의 "네가 오른 쪽으로 기울어지거나 왼 쪽으로 기울어지거나 잘못된 길로 갈 때 내가 그것을 바로잡아준다"는 메시지가 있었어요. 저는 그런 것을 신뢰하는 목사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날 가위도 눌리고, 고통스럽고 힘들고 하면서 제가 서원 비슷한 것을 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이 교회가 늘어나는 것에 대해서 방치하지 않겠습니다. 잘 훈련시켜서 순차적으로 약한 교회, 지역 교회로 보내겠습니다. 우리 교회의 공간이 없어서 교육관을 장만했는데 이렇게 사람들을 파송하다보면 공간도 필요없어지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 공간을 팔아서 한국교회를 위해 사용하겠습니다” 하고 새벽 3시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것을 설교시간에 간증한 것입니다. 선언도 공표도 아니고 간증이었습니다. 그것을 어느 기자가 의논도 없이 기사로 터트리고 나니까 걷잡을 수 없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날부터 항의가 오기 시작하는데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네가 뭔데 교회를 해체하느냐는 겁니다. 저는 그냥 하나님이 제게 주시는 생각을 말했던 것 뿐입니다. 너무 마음이 두려웠습니다. 어떻게 자유하게 되었느냐면 사단의 이간질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쐐기를 박으시고 인준해주신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유로워졌습니다. 저는 그렇게 할 겁니다. 이게 한국교회에 어떤 일을 가져올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울분이 있었고 그 새벽에 하나님의 터치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2만 명을 3만 명으로 늘리는 것이 쉽겠습니까? 2만 명을 1만 명으로 줄이는 것이 쉽겠습니까?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고마운 것은 그렇게 시끄러운데도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늘 해오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겁이 많고 비겁한 사람이지만 다윗이 골리앗에게 덤빌 수 있었던 정답은 알고 있기 때문에 피할 수가 없습니다.

타이타닉 영화에 보면 처음에는 영화가 천천히 진행됩니다. 그리고 큰 배에 사람들이 골고루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암초에 부딪히면 속도가 빨라집니다. 그리고 사람이 쏠립니다. 제가 분당우리교회를 볼 때 1년에 3,500명에서 5,000명씩 몰려드는 현상은 딱 타이타닉의 난파 직전의 쏠림현상입니다. 이것을 방치하는 것이 옳습니까? 그렇게 쏠림현상이 있은 후에 같이 가라앉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지난여름 ‘러브 괴산’이라는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장년 약 800명이 괴산지역으로 가서 연약한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한 30명씩 원하는 교회의 신청을 받아서 그 교회를 섬겨주고 돌아옵니다. 또 우리 교회 대학청년들 700명이 ‘러브 충주’라고 해서 충주지역을 가서 섬겼습니다.

그 중에 기가 막힌 교회가 있었습니다. 성도가 딱 한 가정인데 사실은 한 명이었습니다. 그 한 명이 권사로 피택되었어요. 임직식을 해야 되는데 당사자가 임직 받고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 교회에 배정된 팀 30여 명이 현수막도 가져가고 하면서 첫날 성대한 위임식을 해드렸습니다. 큰 교회에 있던 성도들에게는 너무나 작은 숫자였지만 한 명이던 교회에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며칠 동안 마을회관에 가서 어른들 잔치도 해드리고, 전폭팀이 가서 복음도 전하고, 마지막 날 저녁에는 우리 교회 봉사자들과 괴산에 있는 교회 연합회가 다 모여서 연합예배를 드렸습니다.

괴산이 생긴 이례로 그렇게 많이 모여서 예배드리기는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이 모여서 북적북적하고, 예배드리고 이제 우리는 떠나는데 그러면 한 명 모이는 목사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 한 명의 성도는 어떡합니까? 생각만 해도 목이 메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얼마 전에 들은 소식인데 한 명 나오던 그 교회에 8명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몸부림을 쳐야 되지 않겠습니까?

골리앗은 죽이겠다고 달려들고 왕이라는 사람부터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게 현실인데 교갱협 수련회는 이런 의미를 가진 수련회라고 믿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내어놓아야 할 것입니다. 비겁하게 내 교회만 잘 되는 것을 자랑하고, 목회가 성공했다고 떠들고 다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안타깝지도 않고 분통도 안 터지는 이것이 비극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물맷돌입니다.

사무엘상 17장 34~35절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다윗의 손에 들려진 물맷돌은 골리앗을 타도하려고 만든 무기가 아닙니다. 그 물맷돌은 단지 자신이 해야할 일이 양을 지키는 일이라면 그거 하다가 죽을 사람처럼 온 마음을 다 걸었던 것에서 생겨난 부산물입니다. 다른 목동들은 혼비백산 도망가도 하나님이 내게 그것을 맡겨 주신 일하다가 생겨난 것입니다. 다윗은 그 물맷돌이 나라를 구할 줄은 기대도 안했고 꿈에도 몰랐습니다.

우리의 결정적인 문제는 구호가 너무 거창하다는 것입니다. 입만 열면 한국교회를 살리고 세계 복음화를 외치는데 뻥이 너무 쌥니다. 여러분, 목회를 그렇게 해도 괜찮습니까? 시간 관리를 이렇게 해도 되는 거냐고요.. 오죽하면 평일에 온천장에 가서 ‘김 목사님’ 하면 남자 반이 돌아본다는 말이 있겠습니까? 남고 남는 게 시간이어서 교회 출근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스포츠신문 뒤적거리고 컴퓨터 뒤집니다. 컴퓨터 정보는 목사님들이 제일 빠릅니다. 아무도 모르는 것을 부목사한테 말하면 다 알아냅니다. 대학부, 청년부를 인도하는 담당 교역자를 보면 구호는 거창한데 물맷돌이 없습니다. 물맷돌도 없으면서 골리앗을 이긴다고 하니까 허풍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의 그리운 부분은 화요일 교역자회의 때 한 번도 숫자를 가지고 말하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불같이 화를 내신 때는 어느 성도가 어려움을 당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교역자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면 그날 우리는 다 죽습니다. 옥 목사님은 다혈질적인 부분이 있었는데, 그 교역자보고 당장 나가라는 겁니다. 왜 너 같은 게 와서 성도를 괴롭히냐는 겁니다. “당신이 목사야? 성도가 아파서 신음소리를 내는데 그것도 모르고 있는 당신이 목사냐고?” 그 큰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기도회를 인도하시다가 막 우십니다. 왜 우시는지 아세요? “하나님, 지금 어느 권사가 암이랍니다. 암으로 신음하는데 이 종이 무능해서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서 마음이 힘듭니다.” 그러시면서 막 우시는 거에요.

옥 목사님은 대형교회를 하자고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지금 있는 성도도 관리도 못하고 방치해 놓으면서 ‘부흥, 부흥’ 그러냐고요. 부흥이 되면 뭐하려고 그러십니까? 제가 교갱협 오면 교갱협 어른 들게 꾸중 듣고, 사랑의교회 교역자 모임 가면 거기서 꾸중 듣고, 칼넷 가면 칼넷에서 꾸중 듣고 합니다. 제가 이기적이고 저 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보면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돌아가면 저는 다시 제게 맡겨주신 양들을 잘 섬기고 싶은 마음만 있어요. 그 마음이 너무 크니까 이런 연합 사역을 소홀히 하게 되는 거에요. 그게 저의 한계입니다. 다윗은 조국통일, 민족구원, 타도 골리앗이라고 떠들지 않았습니다. 그냥 양치는 일을 묵묵히 했습니다. 그게 결국은 나라를 구했습니다.

젊은 목회자님들 중에 한국교회를 살리는 인물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정말 간절히 원합니다. 30대에는 자기에게 주어진 한 영혼, 한 영혼을 돌보다가 죽을 것처럼 자신의 눈에는 이 영혼밖에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이 여러분의 손에 물맷돌을 들려주셔서 한국교회를 살려낼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 하나님 이름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45절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이 구절은 목회를 하는 저에게 너무나 소중합니다. 저는 딱 두 마디로 외웁니다. "너는~ 나는~" 강단에서는 ‘나는~’의 삶을 선포하고는 내려와서는 ‘너는~’의 삶을 살지는 않습니까? 우리 모두 이중적인 생활이 익숙하기 때문에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거에요. 인식하지 못할 거에요. 어느 날 저를 보니 그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지난여름 ‘연가시’라는 영화가 흥행했습니다. 변종 기생충 연가시가 사람 몸을 숙주로 삼아서 점차 사람을 파멸시킨다는 간단한 스토리입니다. 몸속에 숙주를 틀고 있던 연가시가 어느 정도 숙성이 되면 몸을 파괴시키고 원래로 가야 되는데, 그렇게 자라면 사람으로 하여금 갈증을 유발시킵니다. 물을 벌컥 벌컥 마셔야 돼요. 안 되면 변기물이라도 마셔야 됩니다. 이 갈증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허기가 져서 밥을 게걸스럽게 먹습니다.

그 영화를 굉장히 재미있게 봤는데 한 사람이 와서 ‘연가시’가 바로 한국교회라고 하는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생각해 보니까 말이 되더라고요. 그렇게 물을 마시고 마셔도 갈증이 해결이 안 되고, 게걸스럽게 퍼먹고, 퍼먹는데도 허기를 채울 수 없는 사람들을 보면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저를 돌아봤어요. 내 안에 기생하는 이 연가시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은 살아계신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이 저를 통제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제 속에 있는 저급함, 속물적, 채울 수 없는 목마름을 제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저는 “너는~ 나는~”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외부의 적을 죽이는 능력에도 사용해야 되지만 내면의 탐심을 죽이는데도 사용해야 됩니다.

저희는 전 가족이 이민을 갔고 저는 미국시민권자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업을 했습니다. 어린 20대에는 할 수 있는 대로 돈을 많이 벌어서 40세가 되면 한국에 와서 자선사업을 하려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학 졸업을 하자마자 흑인동네로 들어가서 그 분야에서 자수성가한 사람을 만나서 나를 써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쓰레기 치우는 밑바닥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 있다가 매니저가 되고 형님의 융자와 누님의 도움으로 가게를 시작했습니다. 석 달 만에 3,000불 수입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빈터에서 하기 때문에 수입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3,000불 되는 그 시점에 하나님이 저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와서 신학교에 갔는데, 6개월 동안 미국에서의 돈 벌던 것을 자랑했습니다. 어느 날 ‘너는 포기한 것이 없다’는 부인할 수 없는 성령님의 책망이 있었습니다. 저는 버린 것이 아니라 옷만 갈아입었던 것입니다. 돈을 향한 갈증, 목마름에서 종교적인 스타,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 이런 것들로 바뀌어서 꽉 차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다 버린 줄 알고 있었습니다.

결론으로 ‘추적자’라는 드라마가 공전의 히트를 쳤습니다. 거기서 배우 박근형의 대사가 있는데 정치 초년생에게 하는 말입니다. “내가 어째서 술을 배웠는지 아나? 내 20살 때 옆집 딸래미를 안좋아했나. 그런데 딸래미가 딴데로 시집을 가뿐기라. 그래서 마음 시록 그래가 술을 배웠다아이가. 그칸데 두어달 지나이 딸래미는 이자뿔고 술먹는 버릇만 남은기라. 지금은 그 딸래미 이름도 기억도 안나고 술은 요새도 내 안묵나. 꿈도 그런기다. 머 하겠다 이러면서 정치판에 끼어들지만 인자 니는 내가 잊어뿐 그 딸래미 이름처럼 첨에 멀하겠다 하는 것도 이자뿔고 권력을 갖겠다는 욕심만 남은기라.” 그 타락한 정치가처럼 처음에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치판에 뛰어들었지만 이제 너는 내가 잊어버린 그 여자애처럼 처음 가진 초심과 꿈은 사라지고 권력만 갖겠다는 욕심만 남는다는 것이 바로 오늘 저의 모습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제 심장에 화살이 박혀 있는 것처럼 둬도 아프고 빼도 아픕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너무 변질된 것 같아서도 아프지만 제 꼴이 한심해서 아픈 겁니다. 연가시가 꿈틀거리는 제 자신이 한심해서 아프고 옥 목사님이 피를 토하면서 저에게 가르쳐 주셨던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을 여전히 실천하지 못해서 아픕니다. 죄송하지만 오늘 저녁만큼은 통증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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