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8/20) 교갱협 제18차 영성수련회 주제특강

본문: 마태복음 7:20~27

지금 한국교회는 ‘바른 복음’과 ‘다른 복음’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분별하는 시각을 제대로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아요. 오늘 본문은 산상설교의 결론부분입니다. 예수님의 설교 전문이 그대로 수록된 것이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입니다. 설교학적으로 분류해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 “복이 있나니”는 헬라어로 ‘마카리오스’인데 이것은 사람이 누리는 복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리는 복입니다. 그래서 故옥한흠 목사님께서 산상수훈을 강해하시면서 “하늘의 행복을 누리고 사는 작은 예수들”이라는 제목을 붙이셨습니다.

산상설교에서 ‘마카리오스, 마카리오스’ 하는 것은 하나님이 온 인류에게 정말 주고 싶어 하셨던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무너졌을 때 외아들을 내어주십니다. 그것을 회복해 주려고 예수님이 오십니다. 그 예수님이 그것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은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입니다. 본론을 말하기 위해서 서론과 결론을 말하는 게 아니라 결론을 말하기 위해서 서론과 본론을 말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산상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인데 거의 다 이 부분을 싫어합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 믿음의 집을 반석위에 세워라. 정말 매력 없어요. 산상설교를 하다가 마지막에는 용두사미로 빠지는 분들이 많은데 이 본문을 보는 신학적 시각이 없어서 그래요. 이 산상설교 전문을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이 “나는 너에게 마카리오스를 주고 싶어. 이거 주려고 너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어.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이걸 놓쳤어. 그래서 나는 여인의 후손을 너희에게 보내겠다고 약속했어. 마카리오스 주고 싶어서” 그런데 누가 이 하나님의 나라, 마카리오스를 누릴 수 있는 자냐? 예수 제대로 믿는 사람, 믿음의 집을 제대로 짓는 사람, 다른 믿음 붙들고 있지 말고 유사품에 속지 말고 짝퉁이 아니라 진품 믿음 붙들고 있는 자만이 마카리오스 받을 수 있어. 그래서 산상설교의 결론은 믿음의 집을 제대로 지으라는 것입니다. ‘다른 믿음’ 붙들고 있지 말고 ‘바른 믿음’ 붙들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 있어요. 너는 종교인이냐? 신앙인이냐? 제가 목사이고, 교회 개척했고, 저도 제자훈련을 통한 복음적인 교회를 목포에 세워서 사랑의교회처럼 낙후된 도시민에게 양질의 신앙을 제공하는 교회가 되고자 하는 그림을 가지고 교회를 개척했어요. 남들이 교회가 부흥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신앙인인가? 종교인인가? 늘 문득문득 그런 질문을 합니다. 알곡과 쭉정이는 겉모양은 똑같은데 알맹이가 있으면 알곡이고 알맹이가 없으면 쭉정이가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종교인이 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전형적인 종교인의 모델이 2장 22절과 23절입니다. 22절을 보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러니까 “주여! 주여!”입니다. 이 ‘주여!’라는 말은 구주가 되셔서 나의 주인이 되셨다는 뜻이고 도마의 신앙고백입니다. 더 확대하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입니다.

나는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죠. 그것도 직분자에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목사가 되었어요.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말하니까 귀신이 나가고 권능이 나타나요. 이 부분은 어떻게 구원받지 않았는데 역사가 일어날까하고 몇 년 동안 풀리지 않았어요. 빌립보서 2장 9절과 10절에 보니까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어” 그 사람이 무서워서 귀신이 나간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이름이 그 일을 행한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귀신이 나가는 것을 보아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직분도, 신령한 것도 못 믿습니다. 예수님이 사람 말을 안 믿습니다. 베드로가 “다 주를 버려도 나는 주를 안 버릴께요” 이러니까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부인하니까 자빠져있으라”고 하면서 안 믿더라구요.

주님이 그래요. 주여, 주여 하는 것 보고 믿지 마라, 신령한 것 보고 믿지 마라, 귀신 쫓아낸 것 보고 믿지 마라. 아니,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거 그것도 믿지 마.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신앙고백 확실하고 직분받고 귀신이 쫓겨나가고 그러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굉장한 확신을 갖게 되지요. 그런데 23절 보세요.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가 하리라” 여기서 불법은 믿음의 법을 따르지 않고 다른 법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유사품에 속았다. 짝퉁 믿음을 붙들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수가 얼마나 되냐 하면 22절에 보면 “많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말세에 믿음 있는 자를 보겠느냐?” 또 그 얘기를 할 때가 언제냐 하면 “기도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할지니” 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내가 들어줄게, 강청해서 기도해, 간이 절이도록 기도해. 내가 응답해 줄게. 그런데 말세에 그렇게 역동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많을 거야. 그러나 진짜 믿는 자들은 적어.”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교회 역사가 1,000년, 2,000년 흘러가면서 어떤 모습으로 변질될 지를 보고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처럼 예수가 없습니다. 사람도 많이 모이고 재무구조도 튼튼하고 그런데 예수님은 문 밖에 있어요.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이런 모습으로 교회가 많이 변질될 것을 주님은 알고 계셨어요.

그러니까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얼마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온 인류에게 주고 싶은 것은 내가 누리는 하늘의 행복이야. 누가 그것을 누릴 자냐?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으면 영광을 보리라. 그런데 그 믿음이 전부 유사품에 속을 거야. 다른 믿음을 쫓을 거야, 바른 믿음을 놓치고 살거야. 그러면서 예를 들어주는데 “주여, 주여, 내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았쟎아요. 선지자노릇을 했쟎아요.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쟎아요.” 엄청난 사람이 나에게 그렇게 외칠 거야. 그 때에 내가 밝히 말하되 “나는 너를 도무지 몰라. 내게서 떠나가.” 그런 취급 받은 사람이 많아. 믿음의 집을 모래위에 짓지마. 반석위에 제대로 지어야돼. 그것이 오늘 산상수훈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그럽니다. 니가 ‘바른 믿음’의 사람인지, ‘다른 믿음’의 사람인지, 짝퉁 붙들고 사는지 진품인지 뭘로 아는 줄 아니? 20절을 보면 “열매를 보고 안다”고 합니다. 그 열매가 뭔가 하면 21절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딱 바라봐야 할 것은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지만 봅니다. 여기서 내 아버지의 뜻을 율법적으로 이해하면 율법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율법으로 구원받을 육체가 없어. 율법을 붙들면 안돼. 오직 예수 붙들어야돼. 예수님의 십자가와 오직 믿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른 복음’은 율법을 붙들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의 의미는 마태복음 16장으로 가 봅시다. 마태복음 16장 21절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수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이 전에는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어요. 이것을 말하지 않고 죽어버리면 제자들은 100% 흩어지게 되요. 그리고 이 분이 정말 구주라는 것을 모를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자기가 수난받고 죽는 다는 얘기를 했어야 되요.

이제 십자가를 져야 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어요. 자기에게 인생을 걸고 따라오는 제자들에게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 받고 십자가에 죽은 후에 살아날 거야” 제자들에게 비로소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하면 제자들이 충격이 얼마나 클까를 생각하고 들러리를 세웁니다. “ 야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냐?” 그러니까 “선지자 중에 한 분이라고 그래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니?” “예,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이를 너에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천부이시다. 내가 이 반석위에 교회를 세울게, 그리고 내가 너에게 천국 열쇠를 줄게.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려.” 베드로도 야고보도 요한도 천국열쇠 할렐루야! 하면서 붕 떴습니다.

이때 비로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예수살렘에 올라가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갖은 수모와 수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게 된다. 죽는 다는 말이 제자들 머릿속에 들어가 버리니까 사흘 만에 살아난다는 소리는 안 들려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항변합니다. 항변하면서 베드로는 22절에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 주인 노릇은 누가 해요? 베드로가 하고 있습니다. 죽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국열쇠고 뭐고 다 날아갔습니다. 23절에 보면 “이 마귀새끼야” 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기를 베드로를 봐라. 주여, 주여는 하는데 지가 주인노릇 하쟎아. 그렇다면 주여, 주여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니? 입술의 고백이 삶으로 고백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니? 지금 베드로는 입으로 “주여”는 하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행동하지는 않쟎아요. 이게 짝퉁이고 사쿠라입니다.

24절에 너무 너무 중요해서 모든 크리스천이 인생을 걸어야 되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서 예수님을 따르려면 선재조건이 ‘자기부인’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부인이 없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자기부인은 아시죠? 자기 십자가가 뭘까요?

저는 오랫동안 예수님 사명이 이 땅에서 십자가 지는 것이었다면 내 사명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 거다. 즉 증언자로 복음을 전하는 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해하면서도 시원하지가 않았어요. 아 그런데 요즘 깨달았어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죽으라는 말이었어요. 나와 함께 죽자는 말이었어요.

그 정확한 뒷받침은 25절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구하겠느냐?" 그러니까 죽는 자는 산다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죽자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다만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제 딸아이가 서른 살 인데 이번에 여행을 간곳이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갔습니다. 주로 가톨릭에서 많이 갑니다. 그 800Km를 걷다 보면 무게를 줄여야 되니까 내려놓는 법을 배운답니다. 그리고 잘 쉬어야 멀리 갈 수 있데요. 참 많은 것을 배운데요. 하루는 미국인 크리스천 부부를 만났는데 자기보고 “Are you follow jesus?”라고 묻더랍니다. 예수 믿느냐고 묻지 않고 예수 따르는 사람이냐고 묻더래요. 요즘 미국에서는 크리스천이냐는 질문은 별로 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것은 언제나 나를 따르라는 것이에요. 우리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을 너무 오해하고 있습니다.

로마교회에 복음이 전해진 당시 상황은 가이사가 주인이냐? 예수가 주인이냐? 이것이었습니다. 콘스탄틴 대제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습니다. 신하들 중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듣고 묻기를 “가이사가 주인이냐? 예수가 주인이냐?” 예수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신하가 있다면 관복을 벗도록 했습니다. 그 때 몇 명이 벗고 나갔답니다. 그래서 과연 예수가 누구이기에 이 좋은 관직을 버리고 나가는가? 그리고는 콜로세움이나 카타콤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그게 바로 열매입니다.

폴리갑 교부님, 나는 교부님을 죽이고 싶지 않아요. 속으로 믿고 겉으로는 한 번만 부인해줘요. 그러자 폴리갑 교부는 “83년 동안 예수님은 나를 한 번도 부인한 적이 없어. 예수가 나의 구주이고 나의 주인입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에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에 대한 산맥을 소개한다면 마태복음 7장 20절과 21절, 그 다음에 그것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본문이 마태복음 16장 24절 또 바울서신에서 정말 알기 쉽게 보여주는 본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은 영접기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십자가 복음으로 예수와 연합이 되어 나는 죽고 예수가 사는 그 상태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마태복음 16:24’절과 ‘갈라디아서 2:20’절에 걸어야 됩니다. 세상에서 난도질 당해서 교회 왔는데 앞에서 설교하는 사람의 형편은 그 사람보다 더 못하다면 어떻겠습니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기쁘지 않다면 사기입니다.

(고린도후서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거하시는 것을 점검해봐야 합니다. 스스로 느낄 수 없다면 너는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본 성령론은 요한복음 14장인데 성령님께서 하시는 가장 중요한 사역은 예수님과 나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한 몸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것이 성령님의 중심사역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만들어 주시는 분이 성령님 이십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13절에 보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열매를 보는 것입니다. 저 분은 진짜 십자가의 복음으로 연합이 되어있고 저 분은 진짜 예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야. 나는 저 분을 보면 예수님을 느낀다니까? 그런데 교역자한테서 사람냄새가 나면 그건 100% 사쿠라입니다. 예수님의 냄새가 물씬, 물씬 나면 이건 진품이예요. 주님이 열매로 그들을 알라고 하시잖아요. 분별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더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나는 죽고 예수님이 이끄시는 그 상태에 있으면 니 안에서 내가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16절부터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게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이루어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완전히 십자가 복음으로 예수님과 연합이 되어 내가 죽어야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나를 인도하십니다. 나를 쓰십니다. 내가 시퍼렇게 부활해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번 생각해보세요. 내가 죽어야지만 그 분이 놀랍게 살아납니다. 한마디로 믿음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쓸 수 밖에 없는 것은 믿음이 광대하기 때문입니다. 그 전체적인 믿음의 그림은 마태복음 16:24, 갈라디아서 2:20입니다. 한마디로 ‘follow jesus’입니다.

구원은 무엇입니까? 저는 처음에 구원이 예수 믿고 죄사함 받고 천국가는 것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구원은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닮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와서 보니 진짜 구원은 예수님처럼 되는 거예요. 놀라운 은혜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부, 성자, 성령님이 누리는 마카리오스를 누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성령의 열매 중에 희락입니다.

어떻게 내가 하나님처럼 되요? 그건 불가능한 줄 알았어요. 우리 교회는 제자훈련 졸업여행을 손양원 목사님 순교기념관으로 갑니다. 그래서 저는 한 30번 정도 갔을거예요. 처음에는 기념관에 가도 그 맛을 몰랐어요. 그런데 갈 때마다 성령님께서 맛을 알게 하시는데 30번을 갔는데도 갈 때마다 은혜가 됩니다.

손양원 목사님 기념관의 최고의 가이드는 바로 저 백동조입니다. 성산교회 이강일 목사님이라고 손양원 목사님의 뒤를 이어서 기념관도 만드시고 그 교회를 아름답게 세웠던 목사님이 얼마 전에 낙원으로 이민을 가셨어요. 성산교회는 손양원 목사님 다음으로 이강일 목사님을 존경합니다. 제가 봐도 예수님 동생같더라구요. 그 목사님이 손양원 목사님이 시무하셨던 애향원교회에서 한 30년정도 시무하셨어요. 그런데 애향원 교회 교인들이 늘 손양원목사님과 비교할 거 아녜요.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 목사님이 살아있는게 기적이더라구요. 그러지 않겠어요?

언제나 구관은 명관이쟎아요. 항상 구관의 장점과 신관의 단점을 비교하쟎아요. 그래서 가끔 집회가면 부목사님들한테 저는 그래요 절대 큰 교회에 가려고 하지마라. 1,000명이상 모이는 교회는 아예 가지마라. 하여튼 1,000명 쯤 모이는 교회는 목회의 달인, 고수들이 다 지나간 자리입니다. 어떤 달인은 새벽 2시부터 나와서 기도하고, 어떤 달인은 성경 본문만 가지고도 설교를 잘해버린다. 그래서 교인들은 항상 구 달인의 장점과 신관의 단점을 비교한다. 그래서 1,000명이상 되는 교회가면 불쌍하다. 정필도 목사님도 항상 10년이 지나지 않아서는 자리잡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뛰어야된다고 하시거든요. 저는 개척하고 15년이 되니까 목사로 받아들여주더라구요. 그렇게 힘들어요.

이강일 목사님이 30년정도 계시면서 손양원 목사님 다음으로 훌륭한 목사님으로 인정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 목사님이 부임해서 자신도 어떻게 하면 손양원 목사님처럼 될 수 있을까 하면서 손양원 목사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성도들한테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말해줍니다. “처음에 전도사로 부임해와서 걸핏하면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손전도사님도 나병에 걸렸나보다 그래서 그렇게 울고 기도하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전도사님한테 손전도사님도 저희랑 같은 병 걸리셨어요? 하고 물어보면 차라리 병이라도 걸렸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왜 그렇게 울어요? 기도제목이 뭐예요?” 손전도사님은 “내가 살아있어서요. 내가 살아있어서요.” 하는거예요. 왜 그런가 봤더니 당시에는 부흥회를 가면 한 달만에 돌아왔어요. 요즘같이 사례비를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사례비를 받아도 오는 길에 다 주고 와버립니다. 그리고 내 아들죽인 원수를 양자 삼아서 처음에는 데리고 다니더니 나중에는 쑥덕거리니까 집에 놔두고 가면 사모님 입장에서는 내 아들 죽인 원수와 밥을 차려서 한 상에서 밥을 먹어야 되니 그 사모님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리고는 한 달 만에 들어오신 손전도사님은 사모님하고 오순도순 했겠어요? 그저 한 달 동안 못 돌본 환자들 돌보느라 정신없고 지치고 그리고 생활도 어렵고 원수까지 양자를 삼았으니 사모님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러다보니까 사모님이 말이 곱게 나갔겠어요? 성질을 내면 손양원 목사님이 다 죽은 줄 알았던 자기가 살아나더라는 겁니다. 그러면 또 일주일을 금식하면서 자기를 죽이는 거에요. 날마다 자기를 죽였답니다.

성도들한테 손양원 목사님을 보면 어떤 느낌이었는지 물어보면 “어린아이 같았어요. 얼마나 순수한지 완전 어린아이 같았어요.” 어떤 장로님은 “손양원 목사님이 예수님 같았어요. 그 분 앞에 있으면 내가 예수님 앞에 있는 것 같았어요.”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이루지 못할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분히 이를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강일 목사님도 그 훌륭한 손양원 목사님을 닮아서 어린아이같이 때묻지 않은 분이었습니다.

우리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야 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구원상담하러 오는 사람이 있었어요. 한 명은 니고데모이고 한 명은 부자청년이고 한 명은 율법사였어요. 예수님께서 구원상담하러 오는 그들에게 믿음의 처방을 내릴 때 눈높이에 정확히 맞춰서 처방하셨습니다.

바울이 가말리엘 문화에서 율법의 훈련을 받은 것처럼 니고데모도 바울 못지않게 훈련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니고데모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은 거듭남이었어요. 그래서 ‘born again’ 처방을 내립니다.

그리고 부자청년에게는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으니 주인을 바꾸라는 처방을 내립니다. 니가 가진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너는 재물을 다스려라. 누려 누려, 보는 것도 좋지만 섬기는 것이 얼마나 행복해. 그 재물을 주인 삼지 말고 다스려라. 그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한마디로 회심의 믿음, 주인 바꾸는 믿음 이었습니다. 재물과 하나님은 겸하여 섬길 수 없어.

그리고 율법사에게는 율법사 눈높이에 맞춰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까요? 하니까 율법에 뭐라고 기록되어있냐고 물으십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다고 하면서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누가 나의 이웃일까요? 하고 반문을 하니까 예수님이 진짜 종교인과 신앙인을 모델로 보여주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죽어가는데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도 제사드릴 시간이 돼서 그냥 갔단다. 레위인도 가다가 봤는데 당번시간이야, 그러면서 그냥 지나갔어.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돌보아주고 주막 주인에게 돈이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고 부탁하고 갔단다.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니?”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결론입니다.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그러면 구원받는 다는 것입니다.

율법사에게 처방한 믿음은 ‘열매믿음’이었어요. 그리고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당시에 있었던 실화를 근거로해서 말하신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은 돌에 맞아 죽어요. 누구도 그 이야기에 반론을 제기할 수 없도록 사실적 사건을 들어서 얘기를 하면서 주님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구원은 받아놓은 당상이라고 확신하거든 근데 그들은 종교인이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것이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야. 내 안에 사는 게 예수님이면 레위인이나 제사장처럼 살 수 없어, 예수님이 중심에 살아있는 사람, 주님의 프로그램에 맡기고 따르는 사람은 사마리아인처럼 사는 거야.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 바른 믿음의 개념이 잡히기를 기대합니다.

또 모델링은 바울입니다. 바울은 지,정,의, 전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고 그 예수님을 따라 삽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 계신 예수님께 자기를 관제로 부어드립니다. 그렇게 살면 자아상이나 자존감이 굉장히 건강합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부요한 자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입니다. 그리고 모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다. 라고 합니다. 내가 니 속에서 위대한 일을 거야. 날마다 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성공하고 예수님이 나를 이끄시는 일에 자꾸 성공하게 되면 여러분 최고의 설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은 순종하는 자가 체험합니다. 언제나 어떤 사건에서나 나는 죽고 주님이 어떻게 나를 이끄시는지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프로그램에 자기를 올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의 올인하지 않고 말장난만 합니다. 입술의 고백은 있는데 삶이 없어요. 그건 가짜예요. 그 사람은 복음 안에서 행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너무 쉽게 믿음을 말합니다. 영접기도만 하면 됩니까? 회개만 하면 됩니까? 입을 찢어야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과 우리 교회부터 다시 십자가로 올라가야 됩니다.

제가 이 노래를 부르면서 며칠을 울었는데, 하덕규 목사님이 예수님을 만나고 너무 좋아서 목사가 되었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행복한 마음이 사라졌고 그래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시를 썼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주님의 쉴 자리없고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주님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주님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면 염려도 사라져버려요. 죽은 자가 무슨 염려를 해요. 경찰보다 무서운게 소방관입니다. 그들은 물불을 안 가려요. 그 소방관보다 더 무서운건 소경입니다. 눈에 보이는 게 없어요. 그런데 제일 무서운 것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입니다. 인생 다 살았거든요.

내가 그리스도와 죽어버리면 누구도 나를 못 당합니다. 믿습니까? 그리고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과 함께 죽고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방식을 따라 살아보면 하나님의 비밀을 많이 알게 되고 내가 체험한 하나님을 말하기 때문에 탁월한 설교가가 됩니다. 내가 만난 말씀, 나를 통해 경험한 진리처럼 파워풀한 설교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로 올라갑시다. 우리는 모두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교갱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