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8/20) 교갱협 제18차 영성수련회 저녁집회

마태복음 13:31~32

저는 짧은 시간이지만 오늘의 본문을 중심으로 한국교회와 동역자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인도함을 받고자 합니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우리 모두 익히 아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장하고 확장해서 커지게 되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에 질문을 던져봅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는데 세력과 크기로 말했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의 나라가 크기로 설명됩니까? 성경 어디에도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설명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면 이 본문은 무슨 의도를 담고 있을까요? 저는 이것은 뒤집힌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속에 원수가 가라지를 심을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24~25절을 보십시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천국을 설명하면서 원수가 가라지를 뿌리는 영역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마태복음 13장 31~32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여러분, 겨자씨는 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톰슨의 ‘땅과 성서’라는 책에 보면 겨자씨는 절대 나무 정도의 크기로 자랄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무로 자랐다는 것은 이 성장이 잘못된 것입니다. 정확히 한국교회의 성장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동의하지 않아도 그건 사실입니다.

멀리 갈 것 없이 우리 교단을 한번 보십시다. 수습이 가능하다고 보세요? 불가능합니다. 뭐든지 커지면 그 속에는 이권이 있고 세력이 커져서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잘못된 성장이 계속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새가 깃들인다는 말은 다니엘서나 에스겔서를 참고해서 보시면 잘못된 악한 것들을 갖다가 심는 것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요소 속에 잘못 성장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아닙니까? 큰 것이 좋은 겁니까? 아닙니다. 교회가 커질수록 본질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 천국에 관한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커져야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목회자들 가운데 과대망상과 믿음을 헷갈려하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정신의학과 교수들의 말을 들어보면 실제로 신앙인들 가운데 믿음과 과대망상을 헷갈려하는 사람들이 많고 특별히 목회자나 지도자들 가운데 많이 있다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첫 번째로 싫어하는 것이 사람의 영향력이고, 두 번째는 크기로 일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커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지금 여기에도 삼일교회 교역자들이 다 왔는데 일반 교역자들과 많이 다릅니다. 이들 중 99%는 삼일교회에서 처음 예수를 믿고 거기서 젊은 날을 보내고 소명을 받아 신학교에 가서 목사안수 받은 사람들입니다. 삼일교회에 평균 20년을 다녔습니다. 그러니 제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제가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이 분들이 잘 따라주었습니다. 그래서 1년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고마움이 큽니다.

깜짝 놀란 것은 대형교회가 되고 커갈수록 성도들이 우민화되어 가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 삼일교회도 많은 우민화 현상이 있습니다. 삼일교회만 그럴까요? 그것을 목회자들이 방치합니다. 잘 못 자라는 예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눈을 열어서 보지 못한다면 함께 멸망합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때에 우리 교갱협의 모든 멤버들을 귀하게 쓸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야단만 치고 소리만 지른다고 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저희 삼일교회는 90%가 청년입니다. 한국교회의 모판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삼일교회를 개교회로만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 교회학교들이 다 무너지고 있고 청년들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위기를 제일 못 보는 사람이 담임목사들 같아요. 다녀보면 한국교회는 이미 쇠퇴를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교회학교 시스템이 없는 곳이 많습니다. 교회 덩치가 크니까 각종 이권과 이익 때문에 비본질적인 것을 붙들고 싸우고 있습니다.

제가 삼일교회 청년들과 처음 했던 이야기는 “한국교회가 사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한국교회는 재정을 갖추었고 인적 자원을 갖추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하지 않다. 이제 한국교회의 모든 에너지를 낮은데, 저지대로 끌고 가야한다.” 신학적으로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하나님께도 약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세요. 그래서 약자이십니다. 자식을 길러보면 아이들이 권세가 등등하고 부모는 늘 약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늘 약자이신데 하나님의 관심은 눈물짓고 고단한 곳에 있다는 것을 목회현장에서 깨닫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5년을 다녔습니다. 정상으로 다닐 수가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1학년 때 자퇴를 하고 3학년 때 강제로 휴학을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공장을 다니면서 야간학교를 다녔습니다. 1학년 마치고 겨울방학이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머리맡에 어머님이 연필로 두 줄을 써놓았습니다. "태근아, 엄마 찾지 마라. 밥 굶지 말고 다녀라." 이렇게 써놓고 막내가 그 때 초등학생이었는데 데리고 사라지셨어요. 그런데 별로 놀라지 않았어요.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거든요. 늘 집구석이 아슬아슬했어요. 중학교 때 학교마치고 골목에 들어서면 맨날 싸우는 소리가 들렸어요. 빚쟁이들이 모여와서 엄마랑 싸우는 거에요.

저희 엄마는 이북 분이셨는데 욕도 잘하고 싸움을 잘 했습니다. 어머니는 부잣집 딸이었는데 전쟁이 나서 여자들이 집에 있으면 위험하니까 외할머니가 어머니를 남쪽으로 내려 보내셨어요.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부자였냐 하면 끝이 보이지 않는 큰 과수원이 두 개 있었고, 당시는 집에 전축이 있는 게 부자였는데 그 전축이 두 대나 있었데요. 잘 살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던 부잣집 딸이 피난 내려와서 대구에 혼자 남았는데 누가 말하기를 “처녀가 이러고 있으면 위험해, 밥 안 굶고 살려면 군인한테 시집가는 게 제일 좋아.” 전쟁시에는 군인은 안 굶기거든요. 그래서 직업군인이셨던 저희 아버지와 덜커덕 결혼을 하셨어요. 그리고는 아버지가 34세에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29세로 청상과부가 되셨습니다. 그 때 9살 누나, 제가 8살, 동생이 6살, 갓 태어난 애기 이렇게 넷을 키우셨습니다. 남자도 힘든데 여자 혼자 몸으로 얼마나 고생을 했겠어요.

저희 어머니는 배포가 얼마나 큰지 치마만 입었지 남자였습니다. 장사를 해도 조금씩 하면 되는데 왕창왕창 하는 거에요. 잘 될 때는 괜찮은데 어떻게 늘 잘 되겠어요.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평화시장에 큰 불이 났습니다. 그 한복판에 어머니 가게가 두 개 있었는데 완전히 타버렸습니다. 자기 자본으로 장사하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그 불로 창고의 옷이 전부 잿더미가 되버리고 그게 전부 빚이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희 집은 매일 빚쟁이들과 싸우는 소리가 그치지를 않았고 언제나 무슨 일이 날 것처럼 아슬아슬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학교생활은 끝이 났습니다. 그 때부터 제가 전전한 직업은 주유소, 단추장수, 배장수, 테이프 장수, 인쇄소 공돌이... 짧은 청소년 시절 동안 도둑질 빼고는 다 한 것 같아요. 그러면서 야간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때 다니던 교회가 내수동교회입니다. 내수동교회에서 자랐지요. 가정이 풍비박산이 난 상태이기 때문에 집이 없었어요. 총신대를 갔는데 고향 내려가는 친구의 빈 침대가 있다고 알려주면 거기 가서 잠을 자곤 했습니다. 방학 때는 갈 때가 없어서 교회에서 어슬렁거렸습니다. 그러니 사찰집사님이 볼 때 좋겠어요? 본당에서 자고 쫓아내면 본당 2층에 가서 자고 그렇게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한 날은 교회 청년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내용은 자기가 월요일마나 청와대 밑에 궁정동이라는 동네에 있는 ‘서울국립맹인학교’에 가서 맹인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데 회사에 감사가 나와서 갈 수가 없으니 하루만 땜질을 해달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제가 갔습니다. 가서 보고 깜짝 놀랐어요.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3까지 맹인들만 100여 명이 앉아있는데 그 애들 앞에서 무슨 설교를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구요. 그 때 설교를 하고 진땀을 뻘뻘 흘리고는 내려왔어요. 근데 중간에 앉았던 초등학교 5학년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 세 명이 벽을 짚으면서 잽싸게 앞으로 오더더니 제 목을 딱 잡으면서 “오늘 설교 참 재미있었는데 다음 주에도 오실거죠?” 그래서 안 온다고 했더니 멱살 잡은 것을 안 놓는거에요. 알고보니 맹인학교에서 호신용으로 유도를 가르쳐서 다 유단자였어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대충 오겠다고 하고는 왔습니다.

그리고는 부탁한 자매로부터 연락이 와서 말하기를 수고했는데 다음 주에 또 간다고 했느냐고 묻기에 애들이 놔주질 않아서 그냥 그렇게 말했다고 했더니, 이 자매가 하는 얘기가 그러면 큰일 난데요. 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사람에게 마음 문을 여는 게 너무 힘들기 때문에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된다는 거에요. 듣고 보니 그 말이 맞더라구요. 그래서 그 다음 월요일 날 또 갔어요. 담당자들이 왔기 때문에 저는 할 일이 없었어요. 쉬는 시간에 애들이 저에게 축구를 하자고 해서 갔더니 이미 밖은 어둠웠습니다. 라이트도 다 꺼졌어요. 얘들이 빨간 돼지저금통에 돌맹이를 넣어서 가져오고 제 눈은 못보게 밴드를 붙여주었습니다. 그렇게 소리만 듣고 쫒아다니면서 축구를 하는데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아이들과 놀면서 이왕 이 아이들하고 약속을 했으니 딱히 할 일이 없어도 매주 와서 놀아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월요일마다 꾸준히 갔습니다.

그날도 맹인아이들을 보러 갔는데 쉬는 시간에 교무과 김 선생님이라는 분이 저를 부르더니 아주 난처하고 조심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제게 거처를 하나 소개해도 되겠는지 묻더라구요. 저는 너무 좋았죠. 어디냐면 남산 밑에 맹인교회가 있는데 사찰처럼 연탄도 갈아주고 하면서 지내면 된데요. 그런데 이 자리가 얼마나 힘든지 길어야 6개월이고 보통은 3개월이면 다 나간데요. 그래서 사찰집사님 찾는 게 너무 힘들다는 거에요. 그런데 그동안 저를 지켜봤더니 애들하고 노는 것도 아주 성실히 놀더래요. 그래서 저런 성실성이면 되겠다 하고는 저한테 넌지시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회현동으로 찾아갔습니다. 그 곳을 가보니 옆에는 창녀촌이 있고 할렘가 같은 동네였습니다. 집들이 일제 때 지은 것이라 나무집으로 구부정하게 해야 겨우 설 수 있는 다락방이었어요. 거기를 맹인 100여 명이 세를 내서 ‘한국맹인연합교회’라고 운영하고 있었어요. 계단이 거의 등정하는 수준으로 급경사인데 거길 올라가면 다락이 나오고 다락 한 귀퉁이에 연탄난로를 피워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제 방은 연탄난로 옆 쪽방인데 얇은 판대기로 막은 곳이었어요.

제 몸뚱아리 하나 누울 곳이 생겼다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열심히 청소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청소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전화가 오면 나가서 맹인을 한 명씩 교회로 데리고 와야 했습니다. 맹인들이 얼마나 무섭겠어요. 그러니까 막 뛰어가서 교회로 데리고 오는 겁니다. 교인 60%가 남대문시장 육교에서 악기들고 구걸하는 사람들이고, 30%가 안마해서 먹고 살고, 10%는 집밖에도 나가지 못하는 분들이었어요. 이분들 영업이 끝나면 새벽 1시이고 새벽기도는 2시에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새벽기도 준비를 위해서 일어나야 됩니다. 당시 학부를 다니고 있었는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학교에 가서는 거의 잤어요. 그래서 당시 성적을 보면 거의 무기창고입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났을 즈음 맹인교회 목사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우리 교회에 전임 전도사님을 한 분 모시기로 결정했는데, 다른 분 모시는 것 보다 송 선생님을 지켜보니까 비록 학부생이긴 하지만 전임 전도사로 청빙하기로 결정했다고 그러시는 겁니다. 제 머릿속에 '이제 사찰 집사는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보니까 사찰처럼 하던 일을 그대로 하면서 전임이 된 것이었어요. 일이 하나 더 늘어났던 겁니다. 그러니 잠 못 자고, 몸 혹사하고 못 먹고 견디질 못하니까 쓰러지더라구요. 그래서 결국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맹인학교 아이들과 먹고 자고 하면서 13년을 생활했습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고 처음 부임했던 교회가 강남교회였습니다. 그 전에 서대문동산교회에서 대학부를 지도하고 있었는데, 그 대학부 자매하고 결혼을 하면서 엄했던 시절이라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당장 갈 곳이 없었습니다. 저는 서울보다 지방으로 내려가고 싶었습니다. 제가 경상도라 영호남의 화합을 위해서 이력서 10통을 호남지역에만 냈습니다. 그랬더니 목포 상리교회 딱 한군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면접을 보는데 장로님이 고향을 물어보셔서 경북 영주라고 했더니 안되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던 차에 제 친구가 노랑진에 연세가 드신 목사님이 교육목사를 찾는데 가보라고 해서 이력서를 냈더니 새벽에 설교를 시키셨습니다. 마지막 4명이 남아서 설교를 했어요. 원래는 제가 떨어져야 되는데 장로님들이 옥신각신하다가 딱 한 표차로 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알고 보니 교육목사한테는 사택이 없다고 해서 땅이 꺼지는 것 같았습니다. 결혼은 해야 되는데 사택이 없으니 어떡합니까? 너무 좌절해서 집에 갔는데 담임목사님이 보자고 연락이 왔어요. 당회에서 결정하기를 기도해서 목사님을 뽑았는데 사택이 없다고 안 뽑는다면 그게 옳지 않다고 하고는 교회 옆 구석을 막아서 방을 만들어 주기로 한 것입니다.

이제 제가 살 집이 생기고 결혼하면 들어갈 방이 생겼쟎아요. 너무 감사했어요. 그래서 결혼할 자매를 데리고 가서 사택을 보여줬더니 우는 거에요. 그래서 속으로 '이런 믿음 없는 여자하고 어떻게 사나' 했어요. 저도 참 철이 없었지요. 저희 집 사람은 딸 넷 중에 막내에요. 여의도에서 태어나서 여의도에서 학교를 나오고 여의도에서 시집을 왔어요. 연탄 부짓개를 안 만져봤죠. 괜찮게 살던 사람이 저를 만난 거에요. 장인 될 분이 오셔서 보시더니 그 다음에는 발을 딱 끊으셨습니다. 그 뒤로 한번도 안 오셨어요. 얼마나 결혼을 반대했냐면 장인어른이 약혼식인데 전날까지 와이프를 앉혀놓고 이 모든 책임을 아빠가 질 테니까 지금이라도 뒤엎자고 끝까지 설득을 하셨어요. 그런데도 자매가 고집을 피우니까 당할 수가 없지요. 그렇게 결혼을 하고 저는 행복한 교육목사 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렇게 6월이 지나가는데 연세 많으신 담임목사님께서 은퇴를 선언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새로 담임목사님이 오시면 어차피 그 분 위주로 물갈이가 되니까 미리 사표를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충현교회에서 교역자를 찾는 광고가 나서 찾아갔습니다. 그 때 충현교회 상황은 충무로에서 역삼동으로 이사 온 직후 김창인 목사님이 원로가 되시고 이종윤 목사님이 2대 담임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목회자를 뽑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신문광고는 교역자 공채 시험광고였습니다. 총 5과목인데 영어, 헬라어, 설교, 상식, 면접이었습니다. 본문도 미리 주지 않고 즉석에서 뽑아서 하는 거였습니다.

시험장에는 해외 유학파들이 몰려왔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갈 자리도 아닌데 간 거였습니다. 참 난감했지만 어차피 온 거 시험이나 보기로 하고 시험지를 딱 보니까 이게 내가 쓸 문제가 아니었어요. 수준이 너무 높아서 거의 못 풀고 이름만 석자 써놓고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잊어버렸는데 11월에 충현교회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최종 4명 면접자 중에 한 명이니까 면접 보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동명이인이겠거니 하고는 비서한테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제 생년월일이 맞더라구요. 그래서 갔더니 미국에서 온 목사님 한 명, 수영로교회에서 온 목사님 한 명, 대구에서 올라온 한 명, 그리고 저 이렇게 4명을 최종적으로 뽑아 놓은 거였습니다.

담임목사님이 나오셔서 환하게 웃으시면서 같이 일하게 돼서 반갑다고 악수를 하셨어요. 저는 계속 이상했어요. '이게 뭘까?' 하고 있는데 목사님께서는 “역삼동에 방 3개짜리 빌라가 사택으로 준비되어 있고 차량은 1,500cc가 지급됩니다” 하면서 꿈같은 얘기를 하셨어요. 그 당시에는 부목사에게 차량을 지급하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저는 계속 안개속이었어요. 다른 목사들은 다 돌아가고 혼자 남아서 비서한테 목사님을 뵙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목사님께 “저는 시험도 못봤고 이력으로나 경력으로나 학력으로 뽑힐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는데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하고 여쭸더니 파일을 꺼내셔서 보시더니 “송 목사님, 저는 학자이기 때문에 학자들의 약점을 잘 압니다. 제가 충현교회에 와서 해보고 싶은 오랜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 좋은 장애인센터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국에 나가서 공부한 학자 말고 장애인의 눈물과 땀을 온 몸으로 경험한 사람을 찾으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쉽지 않더군요. 그런데 이력서를 보니까 한 사람이 장애인교회 사찰부터 했기에 내용은 보지도 않고 미리 뽑아 놓았습니다.” 그게 바로 저였던 겁니다. 그 말을 듣는데 전율이 왔습니다. “하나님, 저는 그 때 오갈 곳이 없었고 저 잘 곳 있어서 갔던 것이고 눈물짓고 힘들게 살아가는 장애인들 조금 도와준 것 뿐입니다. 제가 오히려 도움을 받았는데 먼 훗날 이렇게 갚아주시니 면목이 없고 할 말이 없습니다.”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네 부서가 있는데 어디를 가고 싶은지 고르라고 하셨어요. 영어예배부, 고등부, 대학부, 직장전도교육부였어요. 근데 제 마음에 직장전도교육부가 산뜻하니 마음에 들어왔어요. 그래서 거기를 하겠다고 했더니, 이 부서가 어떤 곳이지 아느냐고 하시면서 없애야 할지 존속시켜야 할지 고민중인 부서라고 하시는 거에요. 그 부서는 너무 가슴 아픈 부서였어요. 충현교회가 충무로 시절에 그 옆은 시장바닥입니다. 하루는 김창인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는데 어른은 아닌데 남루한 기름때 묻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앉아서 설교를 듣고는 바로 빠져나가곤 했습니다. 목사님이 그 아이들의 정체를 알아보고자 여전도사님을 보냈더니 공장으로 들어가고 휴일은 다락방에 가서 웅크리고 생활했습니다. 그 때 당시는 시골에서 밥벌이가 없으니까 서울 방산시장 같은데 미싱 시다로 보냈습니다. 몇 푼 되는 월급으로 동생들 학비 보태고 생활비도 보태고 어렵게 생활을 하는 10대 청소년들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목사님이 마음이 너무 아프셔서 이들이 학교도 못 다니고, 교복도 못 입고, 중고등부도 안가니까 그 아이들만의 부서를 따로 만들었어요. 그랬더니 애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드는 겁니다. 많이 모일 때는 800명까지 모였어요.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교회가 강남으로 이사를 가서 기분 좋게 따라와 보니까 대한민국에서 대단한 사람들이 다 몰려드는데 얘들이 점점 눈칫밥을 먹는 겁니다. 연말이 되면 봉사할 부서를 배정해 주는데 ‘직장전도교육부’를 배정해주면 다들 싫어하고 거부하고 했답니다. 이 애들도 사람인데 그걸 못 느끼겠어요? 그 때부터 애들이 상처를 입고 다 떠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이제는 몇 십명 밖에 안 남았어요.

그래서 담임 목사님도 이 부서를 없애야 되는지 고민중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하나님이 마음을 주시는데 이것은 저를 위해 준비한 부서라는 느낌이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맡겠다고 말씀드렸어요. “목사님, 실은 제가 공돌이 출신입니다.” 초면인데 제 간증을 했더니 목사님이 우셨어요. 그러면서 송 목사님을 위한 부서인 것 같다고 맡아 달라고 하셨습니다. 먼지 쌓인 교적부를 정리를 한 다음 헌신할 수 있는 사람 10명을 뽑아서 교사를 부탁했어요. 그리고 그 10명을 제자훈련을 했어요. 한 영혼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지를 가르쳤어요. 그렇게 제자훈련을 시킨 다음 일산, 포천, 방산시장 등 아이들이 숨은 곳으로 찾아다니면서 다 불러냈어요. 그렇게 300명까지 모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담임 목사님이 우연히 말씀하던 중에 ‘직장전도교육부’의 애들은 지방에서 와서 일하고, 돈 벌어서 집에 보내고, 신앙생활도 잘하고 대단한 부서라고 칭찬하셨어요. 그랬더니 연말에 저희 부서로 교사 신청이 막 들어오는 겁니다. 인간이 참 간사해요. 그 때는 제가 심사를 해서 잘랐어요. 그리고 부서가 점점 커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사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그 남편은 언론계 고위직으로 있었어요. “목사님, 토요일에 시간 좀 내세요.” 약속된 소공동 롯데호텔 커피숍으로 나갔더니 미국 사람 같은 분이 있는데 이 분은 이승만 대통령 당시 최초로 우리나라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 국비 유학생 2명 중에 한 명이었어요. 이분은 미국에서 예수를 믿고 신학을 해서 신학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은퇴를 해서 ‘비버리힐즈’라는 부자동네에 한인교회를 개척해서 80명쯤 모이는 교회를 목회하고 있었어요. 본인의 나이가 많으니까 고국에 후임자를 찾으러 왔던 겁니다. 미국에 눌러앉을 목사 말고 미국에서 목회를 배워서 고국으로 돌아가 이바지할 사람을 찾으러 왔다는 거에요. 그런 사람이 찾기가 쉽지 않지요. 그런데 어떡하다가 우리 교사와 연결이 되었어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딱 한 사람이 있다고 했데요. 그게 바로 저였습니다.

이기준 목사님이신데 첫 마디가 지금 늦긴 한데 토플공부를 할 수 있느냐고 하세요. 그래서 할 수 있다고 대답하고는 강남역 영어학원에 다니는데 아무리 해도 점수가 안 나오는 겁니다. 미국에서는 자꾸 전화가 와서 빨리 들어오라고 하셨어요. 미국학교는 컨디션 입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조건부 입학입니다. 한 학기를 공부시켜 보고 따라가면 레귤러로 바꿔주고 못 따라가면 아웃시키는 것입니다. 그 케이스로라도 들어오라고 하세요. 그래서 컨디션 입학으로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3년이라는 과정을 지냈는데 제가 많은 스토리를 생략했는데 일관되게 흔들리지 않았던 관점은 제 마음은 항상 작은 자, 낮은 자에게 있었습니다.

여러분, 한국교회의 에너지를 낮은 데로 내려가는 연습을 하지 않는 한 한국교회의 명예를 회복하기가 어렵습니다. 믿기지 않는 얘기를 들었는데 어느 목사님이 휴가를 내서 성도가 1만 명 넘어가는 10개 교회를 순례하면서 마당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고 "나에게도 1만 명을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게 대한민국 목회자들의 의식 수준이에요. 여러분, 1만 명이 우상입니다.

오늘 본문이 뭡니까? 잘 못자란 나무에 새가 깃들기 시작했어요.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를 한 번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잘 못자란 영역이 너무나 많아요. 가족, 친척의 이권에 물려서 끊어내질 못합니다. 영적인 ‘제로베이스 운동’을 해야 합니다. IMF 때 매스컴에서 제일 많이 쏟아냈던 말이 ‘제로베이스 운동’이었습니다.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시작하자, 본질에서 다시 시작하자입니다. 요즘처럼 목사로 사는 것이 치욕스러울 때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몇 년 전 ‘디사이플지’에서 특집으로 옥한흠 목사님과의 인터뷰를 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목사님, 목회자로서 제일 행복할 때가 언제입니까?” 저 같으면 이렇게 대답했을 거에요. “성도들이 변화되고 성도들이 열매가 나타나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다.” 그런 대답을 기대하면서 물었어요. 그랬더니 옥 목사님이 이런 얘기를 하세요. “나는 솔직히 말해서 목회자로서 제일 행복한 것은 나 같은 죄인이 구원 받아서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로 행복해.” 제가 “그러면 교회가 성장하고 성도들에게 열매가 나타나는 것은 행복의 요인은 아닙니까?” 물었더니 “왜, 좋기야 좋지, 그런데 그건 내 관심이 아니야“라고 하시면서 도리어 저에게 물으시는데 “송 목사, 만약에 열매가 안 나타나면 어떡할 건가? 목회란 것은 숨을 길게 쉬는 것인데 열매가 안 나타날 수도 있지. 그 목회는 실패한 건가? 꼭 꽃을 보고 열매를 봐야 성공한 목회자인가?” 제가 뜨금했습니다. 이게 문제다. 그저 항상 열매에 관심이 있어요. 나지 아니할까? 피지 아니할까?

여러분, 예를 들어서 석탄을 때는 열차를 가정합시다. 신의주에서 부산까지 가는데 3명이 교대합니다. 출발하는 기관사가 있고 중간에 하는 기관사가 있고 마지막 마무리하는 기관사가 있는데 박수는 늘 마지막 마무리한 기관사가 받아요. 그 사람 혼자 한 일입니까? 앞에 뿌린 사람이 있고 심은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고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여러분, 스데반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한국교회의 복음의 내용이 그것을 답할 수 있습니까? 지금처럼 비틀어진 복음을 전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설명하겠어요. 어줍잖은 고지론을 얘기하고 효율과 기능과 방법을 주장하고 강조하고 설명한다면 당장 효과는 나니까 좋죠. 그래서 대형교회가 되면 숫자의 논리에 빠지기 쉽습니다. 잘 못 클 수 있다니까요? 얼마나 무섭습니까?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잘 못 자라는 요소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갈수록 낮고 천한 곳으로 내려가고 희미해지는 연습, 작아지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 복음 붙들고 외진 산골에서 20년, 30년을 10명도 안 되는 영혼들을 붙들고 물러서지 않고 목회하는 목회자들은 진 겁니까? 실패한 겁니까? 패배한 겁니까? 누가 감히 그런 판정을 합니까?

아닙니다. 천국에서는 다를 것입니다. 법대로 경주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사도바울의 유언을 나누고 마치겠습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여기서 ‘옳게 분별하며’는 길을 제대로 내라는 것입니다. 길을 잘못내면 따라가는 양떼들이 죽습니다. 우리가 맡은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세요? 열매에 관심 갖지 마세요.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지 내 몫이 아닙니다. 로마 화폐를 만드는데 공정과정 중 마지막 과정이 로마황제의 인을 찍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정된 자’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그 검증 속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힘쓰라’의 의미는 '애쓰라'가 아니라 제의적 의미입니다. 처분에 맡기라는 겁니다. 퇴직할 때도 대우해 주는 대로 받고 나가세요. 그게 제물입니다. 안 그러면 장사해서 돈을 벌지 왜 목회합니까? 부끄럽지 않아요? 치사하지 않아요? 굶게 되면 그냥 굶으세요. 죽게 되면 그냥 죽으세요. 그 열심 없이 어떻게 이 길을 갈 수가 있습니까? 동역자들이 서로 서로 그런 것에 격려가 되고 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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