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23) 제21차 영성수련회 새벽기도회

요한복음 5:24~25

우리의 목회현장은 점점 더 척박해져 갑니다. 교육부서는 빈 자리가 더 많아지고 있고, 또 교회에 헌신하는 성도들 수도 줄어드는 것 같아 염려될 때가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메스컴에 알려지면서 교회가 ‘그것 밖에 안되느냐’ 하는 질타를 듣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70, 80, 90년대 영광스러웠던 한국교회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에서 떠올랐던 책이 한 권 있는데 바로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을 쓸 때에 그 상황이 우리가 지금 직면해 있는 상황과 참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서기 410년에 고트족에 의해서 로마가 멸망됩니다. 천년의 역사를 지녔던 로마가 고트족에 의해서 멸망되어지는 참담한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또한 교인들을 향해서 당신들 때문에 로마가 멸망되었다고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비난했던 이유는 313년에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공식 종교로 인정했습니다. 국교로 인정하진 않았지만 공식 종교로 인정해서 콘스탄틴 황제의 인정으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더 이상 탄압의 대상이 아니게 되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서기 380년에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국교로 정해지면서 교회들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는 사람들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이전에는 예수를 믿으면 박해를 받았는데 국교가 된 이후에는 예수를 믿는 것이 세상을 사는데도 훨씬 더 보탬과 유익이 되어지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국교가 되고 30년이 지나자 로마는 멸망되었습니다. 천년의 역사를 지닌 로마가 멸망되어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바로 기독교인들 때문이라고 지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까지 섬겨왔던 신을 버리니 로마의 멸망을 초래했다고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 직면해서 어거스틴이 로마 멸망 3년 후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13년에 걸쳐서 426년에 책의 집필을 끝냅니다. 그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는 다르다. 로마가 멸망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방식대로 자기의 나라를 세워가고 계시다. 또한 ‘결코 로마 멸망의 원인은 기독교가 아니다’라고 변증하면서 이 책을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방식대로 자기의 나라를 세워가시는 것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세상 나라는 자기 사람과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 것으로 가득한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이름이 존귀하게 여겨지고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라고 분명하게 적어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이러한 현실 속에 우리의 신앙의 선배였던 어거스틴이 고민했던 그 고민을 가지고 다시 한 번 우리의 목회 현장을 보고 한국교회도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의 부흥이 있었고, 재정의 넉넉함이 있었던 그 시기, 그 때 우리도 모르게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우리 속에 있지 않았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방식대로 자기의 나라를 통치해 오셨습니다. 축소되어져 보이는 이와 같은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방식대로 자기의 나라를 세우시고 또한 하나님 백성을 부르시는 그 일을 끊임없이 하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영혼 한 영혼을 세워가시는 그 일에 우리를 부르셨으니 우리도 그 일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세워가는 그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너무나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듣는 자는 살아날 것이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로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날이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한복음을 제가 매주 오전 예배 때 전하고 있습니다. 근데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와는 참 많이 다릅니다. 공관복음서는 어떤 사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일들을 하셨더라 그리고 우리들의 반응을 적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집요하게 '이 말씀을 믿느냐, 이 사건이 믿어지느냐'라고 우리에게 묻고 계시고 확인하고 계시는 그와 같은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요한복음 강해를 하면서 성도님들에게 교회 직분과 상관없이 예수 영접해야 한다. 장로로 섬기든 목사로 섬기든, 안수집사로 섬기든 권사로 섬기든, 모태신앙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가 고백되어지는 삶을 살고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생명이 속에서 살아나는 경험을 하고 있는가 하고 매 설교 때마다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를 잘 섬겨주는 것은 감사하지만 여러분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생생하게 고백되어지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다시 무릎 꿇어야 합니다. 그랬더니 성도님들이 제가 사석에서 만나면 그런 말씀을 많이 하세요. “목사님 이제까지 강해를 매번 하셨는데 요한복음에서는 더 날카로워지셨다”며 우리에게 계속 집요하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고 말씀하세요. 이것은 제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요한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 예수를 정말로 믿느냐?” “예수를 너희의 구세주로 믿느냐?” “예수를 너희의 그리스도로 영접해서 그 음성을 듣고 살아가고 있느냐?” 지금 우리에게 계속해서 묻고 계십니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내용들을 보면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가 많습니다. 달리 말하면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까지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율법학자였던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할 때에 니고데모는 도대체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가 이렇게 컸는데 어떻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습니까? 육신으로만 생각하는 니고데모 앞에서 예수님께서 ‘영생’이라는 것에 대해서 거듭거듭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사마리아의 여인을 우물가에서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할 때에 그 여인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저 육적으로 이해해서 “그와 같은 물을 저에게도 주셔서 제가 물을 뜨러 오지 않도록 해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십니다. 그것을 보았던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율법을 다 무너뜨리는 것 같은 행동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내 자의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합니다. 듣는 자들은 도무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점점 더 적대감을 가지고 예수님을 향해 나아오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다 보면 과연 바리새인들만큼 살아갈 수 있을까? 바리새인들만큼 내가 하나님 앞에서 경건의 모양을 갖출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면 자신이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엄격하게 율법을 준수하려하는 모습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가 죽을 때가 참 많은데 예수님께서는 그와 같은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회칠한 무덤과 같은 자’라고 비난하셨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져 있는, 그러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 그들에게 절대로 들려지지 않게 귀를 막아버리고 있는 모습들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함에 있어서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영국에 있을 때 하루는 비바람이 참 많이 불었습니다. 밤새 바람이 불고 비가 창문에 부딪혀서 자면서도 비가 참 많이 오는구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아침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요했습니다. 마침 주일 아침이었는데 뉴스를 보니까 담이 무너져서 지나가던 행인이 깔려 죽기도 했습니다. 교회 가던 길에 보니 큰 나무가 송두리째 뽑혀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 이상하잖아요. 10미터 훌쩍 넘는 나무가 송두리째 뽑혀 길가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대로 나무는 땅 위로 올라와있는 키 만큼이나 뿌리가 아래로 내려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나무는 위로는 키가 10미터가 훌쩍 넘는데 뿌리는 1미터도 되지 않았습니다. 1미터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바람이 부니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진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혹시 나의 삶도 이러지 않은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고 목사이고 여러가지 일들을 감당하는 사람처럼 보여지지만 과연 나의 속이, 내면이, 나의 실상이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그와 같은 모습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회 현장에서 또한 성도로 살아가면서 저는 그 나무의 모습을 생각해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저의 모습이 그와 같지 않길 원합니다. 하나님 저를 붙들어 주시고 인도하여 주셔서 저의 실상이 그와 같이 되지 않길 원합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믿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요한복음에서 ‘영생’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정의는 17장 3절에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영생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 속에 그와 같은 사귐이 시작됩니다.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그 어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도 영혼을 사모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목회 현장에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으며 살고 계십니까? 날마다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고 계십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얼마나 고백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렇게 많이 강조하셨던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들을 붙잡고 살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라는 가르침에 얼마나 신실하게 반응하며 살아갑니까? 우리도 모르게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서 어떤 평가들을 하고 결정들을 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는 여러분들 보다, 선배님들 보다 목회 경력이 훨씬 더 짧습니다. 전임사역을 한 번도 해보지 않고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목회를 시작하면서 하나님 앞에 부족함을 내려놓고 기도했던 적이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처음에 제가 부교역자들을 꾸리고 목회를 시작할 때에 교역자들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는 어떤 목회를 하시나요?" 저는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모르겠다. 나는 아는 것도 없고 이제 알아가고 있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주일 오전 설교와 수요일 저녁 설교를 합니다. 주일 오전 설교를 위해서 저는 일주일 시간 중 25시간을 할애합니다. 수요일 시간을 위해서는 8-10시간을 할애합니다. 이것이 다 충족되어지고 나서야 저는 사람들을 만나고 외부활동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저를 돌아보면 말씀 준비 다 하고 목회 초기에 기도원으로 올라가 골방에서 “하나님, 저에게 말씀을 주십시요. 하나님, 저에게 먼저 말씀하여 주셔서 제 영이 살게 하시고 제가 그 말씀 붙잡고 성도들 앞에 서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던 그와 같은 모습은 점점 더 저에게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기도원으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 갈급한 심경으로 무릎 꿇었던 그 마음과 기도의 모습들이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는 걸 저 스스로도 느끼고 이래서는 안되겠다 고 생각할 때가 참 많습니다.

처음 담임목사가 되어서 저보다 훨씬 연배가 많으신 장로님들 앞에 서거나 앉게 되었을 때에 그 자리가 얼마나 가시방석 같던지요. 형님들 같은 장로님들이 동생 같은 저를 잘 품어주셔서 지난 8년 동안 몇 번의 당회를 하는 동안에 한 번의 마찰없이 은혜 가운데 잘 지냈는데, 처음 당회를 할 때는 하나님 앞에 2시간, 3시간 전날 밤 기도했지만 이제는 기도하지 않고도 당회에 들어가는 제 모습을 보며 놀랄 때가 참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저희 교회가 건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걸어서 2분 거리부터 10분 거리 사이에 2만 세대가 몇 년 안에 다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도 3년 전부터 건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 성도님들을 보니까 어떤 분은 우리나라 최고 건설회사의 임원을 지내신 분인데 그분이 시청도 지었고, 인청공항도 지은 그 분야에서는 대단한 전문가이십니다. 어떤 분은 설계 분야에서 탁월한 분이 계시거든요. 그래서 건축위원회를 꾸리는 데도 전혀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요. 그렇게 꾸리면 되는 줄 알았는데 건축위원회 회의를 하는데 마찰이 계속 일어나는 겁니다. 두 분이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자존심을 내세우며 계속 싸우시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하나님 앞에 기도의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무 걱정 없이 건축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제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니 하나님께서 제 속에 들려주신 것 중 하나가 “야, 이놈아! 내 집 짓는 거다. 내 집 짓는 건데 뭘 사람 붙잡고 하느냐. 내 집 짓는 거다 이놈아”라는 말씀을 많이 들려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시간을 지나면서 우리도 모르게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내가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과연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사귐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음성을 날마다 들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종교개혁자들이 이야기했던 근원으로 돌아가면 아르폰테스의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일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에게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완전히 부인하며 하나님의 통치와는 전혀 상관없이 살았던 내 영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살아나게 되는 삶의 생명의 변화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우리의 목회 현장과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점점 더 없어지게 되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로 나아가서 내 영이 죽었고 살아나게 되어진 이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예수의 음성이, 성령의 음성이 우리 가운데 들려지게 되고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 입니다. 우리 모두 이 땅에서 길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바라보는 자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 나라, 그러나 우리가 영의 눈으로 보게 되어질 때에 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내가 하나님 앞에 나가고 싶다. 내가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싶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있기 때문에 내가 부득불 이 땅에서 감당하노라” 라는 그 고백이 우리 가운데에 있을 것입니다.

사모하는 우리 동역자 여러분, 저는 참 모자르고 부족한 자여서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점점 더 굳어져가는 제 모습을 봅니다. 우리가 갱신의 자리에 있게 되어질 때에 그와 같은 모습이 없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목회하는 현장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말 한 영혼 한 영혼을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마음속에 새겨질 수 있는 그와 같은 가장 근원적인 사명을 우리가 감당한다면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생명 살리시는 그와 같은 일들을 행하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시는 중에 여러분 속에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 없습니까? 처음에 막 뜨거워 하나님께 매달리며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그와 같은 모습이 혹시 저처럼 여러분들에게 점점 더 사라져버린 많은 모습 없습니까? 우리의 회복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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