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2/20) 부울경교갱협 목회자세미나

I. 들어가는 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교회 갱신을 꿈꾼다”는 주제로 강의를 준비하는 지금 가장 먼저 강력하게 떠오르는 생각은 바로 이것이다. 루터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가 세우신 교회는 산성과 같아서 마귀의 권세와 세상의 나라가 깨뜨릴 수 없다는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에서 재 발견한 은총의 복음을 들고 가난과 난민됨과 핍박과 심지어 순교 속에서도 흔들림없이 견딜 수 있었다. 그 결과 지난 500년동안 전 세계로 교회가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16세기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가장 감동적이고 희망적인 비전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딜레마를 안고 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 나라의 대사관과도 같아 영원하지만, 이 교회 안에 있는 우리들은 여전히 죄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었지만 우리의 현실은 늘 죄와 그 열매로 인한 혼란과 고통 중에 있다. 종교개혁500주년 국제 조직인 “레포500”(Refo500, 전 세계 180개의 기관이 회원임)의 총재인 네덜란드의 셀더하위스 교수(Herman Selderhuis)는 이 점을 잘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죄와 연약함으로 교회는 곧 문을 닫을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용서하심이 500년동안 교회를 지켜온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한국 교회가 종교개혁의 신학과 역사로부터 진지하게 경청해야 하며, 그럴 때 500년 이후의 역사를 계속 기록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본 발제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종교개혁을 감성적으로, 추상적으로, 또 구호만으로 이해하면 큰 오해가 생긴다. 종교개혁은 근본적으로 사상의 변화로부터 삶의 변화와 시대의 변화를 체계적으로 이끌어 간 포괄적인 운동이라는 것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개혁”이라는 말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다. 개혁이란 “뭔가 새롭게 바꾸는 것”, 혹은 “과거를 부인하고 앞으로 진취적으로 나아가는 것” “도덕적으로 개선하는 것”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종교개혁은 영어로는 Reformation이다. 라틴어 어근으로는 forma(모양, 전형)이고, re는 다시, 두 번이다. 여기서 모양은 성경과 초대교회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신앙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중세 말에서 근대로 접어드는 역사적 과도기요 변혁기에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났던 종교개혁은 신앙과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을 뿐 아니라 이 운동을 받아들였던 다양한 사회와 국가들에게 근본적인 변화들을 촉발시켰다. 이 시대를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세기 중 하나라고 묘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1)  결국 16세기 종교개혁은, “복음의 본질”을 발견하여, “교회가 그것을 향하여 가도록” 하며, 그 복음의 본질이 “그리스도인들의 매일의 삶의 영역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하는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직전인 15세기 말의 가톨릭 교회는, 중세 사람들을 사회적 법적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종교적으로 좌우할 수 있을 정도의 관료체제(bureaucracy)와 같은 형태의 권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 교회는 복음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당시 유럽인들의 간절한 영적 필요를 채워 줄 수 없었다. 동시에 그들의 삶의 불안도 해결해 줄 능력이 없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성경에 근거한 바른 교회를 다시 정립하게 되는 것이 종교개혁이다.

 

II. 루터의 교회 갱신2) : “교회를 바른 신학 위에 세우다”

1.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의 구조와 내용

종교개혁의 문을 연 마르틴 루터는 1483년 아이슬레벤에서 독실한 가톨릭 시민계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전형적인 엘리트 로마 가톨릭 사제의 길을 걷고 있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에 오게 되었고, 1512년 이곳에서 신학박사가 되었다. 그리고 1513년부터는 로마서부터 성경 강의를 하면서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 즉 이신칭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당시 교회의 관습이었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반대로 나타났다.

종교개혁의 불쏘시개가 된 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을 분석해 보면 다음의 몇 가지 요소로 분류할 수 있다.

1조부터 7조에서는 회개의 문제를 취급하고 있다. 8조에서 29조까지에서는 교황의 사죄권이 산 자에게만 효력이 있다는 말하면서, 죽은 자를 위한 면죄부와 그 배경으로서 연옥에 대한 교황의 권세를 비판하고 있다. 다음으로 30조에서 40조까지에서는 면죄부가 믿는 자들에게도 참된 안정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41조에서 55조까지에서는 면죄부를 구입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53조에서 58조에서는 가톨릭의 잘못된 신학에 대해 공격하고 있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뿐 아니라 성인들의 잉여 공로도 “교회의 보물”이라고 주장하면서, 교황이 이 공로에 근거해서 열쇠권을 사용하여 성도의 죄를 묶거나 풀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루터는 이것을 정면으로 반대한 것이다.

다음으로 59조에서 68조에서 루터는 교회의 진정한 보물이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가장 거룩한 복음”이라는 것이다. 루터는 또한 69조에서 91까지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교황의 십자가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루터는 92조부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선포될 때 진정한 평화가 있다는 점을 피력하면서 95개조의 반박문은 끝나고 있다.

 

2. 95개조 반박문의 신학적 의미와 교회 갱신

루터가 작성하여 제시한 95개조 반박문은 원래는 면죄부의 효력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서 제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 중세 천 년의 신학을 뒤집을 수 있는 혁명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는 것을 루터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95개조 반박문은 중세를 지탱하던 고해성사 제도와 교황의 열쇠권, 그리고 중세 신학 자체에 대한 성경적인 무기가 되어 종교개혁을 열어갈 수 있었다. 이 반박문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성경의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

루터는 당대의 로마 가톨릭이,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교황의 결정과 교회 회의에 근거하여 교회의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는 그 신학적 바탕을 근원적으로 비판했다. 면죄부와 고해성사가 바로 그런 것이다. 루터는 죄사함과 구원에 대한 신학은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얻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요 교회의 보물이라고 했는데, 교회를 성경의 반석 위에 세운 것이다.

특히 루터는 신약 성경을 통해서 회개의 의미를 재발견했다. 성경에 근거하여 루터는 죄를 용서하는 주체가 하나님이라고 밝혔다. 루터는 성경에 근거해서 교회를 은혜의 기둥에 세우게 되었다.

2) 하나님 중심적인 교회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다는 신본적인 신앙을 확고하게 제시했다. 루터가 발견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죄용서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에 의해서만 얻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루터는 교회를 개혁하는 것도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보았다. 교회가 언제 어떻게 개혁될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개혁의 시간은 오직 시간의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다고 함으로 우리는 95개조 반박문에서 루터의 하나님 중심적인 신학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3) 은총의 복음 안에 있는 교회

중세 말, 종교개혁 직전의 시대는 한 마디로 불안의 시대라고 할 수 있었다. 수백 년 간에 걸친 전쟁들과 공포의 질병이었던 흑사병의 창궐로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당시 교회 생활의 중심이었던 교황청이 남프랑스 아비뇽(Avignon)으로 유배(1305~1378)되는 교황의 바벨론 유수 사건이 발생되었다. 결국 3명이 저마다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교황청의 대 분열로 영적인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한편 기독교 제국이었던 동로마가 1453년 터키의 모하메드 2세에 의해서 몰락하고 말았다. 유럽은 이슬람의 침공에 대한 불안이 최고조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유럽의 중세 말 상황들은 당시의 교인들을 행위로 인한 구원의 길로 몰아 가게 되었다. 결국 당시 교회는 성자숭배나 면죄부의 판매 등 신학적 부패로 귀결되었다. 면죄부를 구입해야만 했던 일반 대중들은 그 제도에 대한 신학적 비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수탈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통해서 당시에 고해성사를 통해서 불안에 빠지고 고통을 당하는 영혼들을 자유게 하고 참된 평안을 주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루터의 목회 지향적인 신학의 한 단면이다. 루터는 신학을 통해서 고통 당하고 불안에 빠진 영혼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95개조 반박문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신학을 가지고 그들의 영적인 간절한 필요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응답하였던 것이다.

사실 중세 교인들은 성인들의 도움이나 천사들의 보호를 통해서 자신의 머리에 안전한 영적 지붕을 쓰려고 했으며, 고해성사를 통해서 내면적 죄와 양심의 가책을 씻으려고 했다. 교회 안에 수립된 계층적 성직 구조나 쌓아 놓은 공로를 내세워서 영적 보호막을 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그 모든 “장치”들을 제거해 버렸다. 그래서 종교개혁의 신학은 교회의 성직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은덕을 얻기 위하여 수단이 되는 성인들이나, 은혜를 받기 위한 여러 수단들에게 의존하는 것도 아니었다. 종교개혁은 죄인인 각 개개인을 하나님 앞에 서게 만들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구원한다는 복음”을 선포했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본성적인 죄와 불안에서 해방되고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종교개혁의 신앙의 재발견은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대상이나 방법론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종교개혁 신학의 정수였다.

 

III. 칼빈의 교회 갱신: “바른 신학 위에 서서 목양하는 교회를 세우다”

1. 교회 갱신의 롤 모델: 교부와 역사적 교회3)

종교개혁의 교회는 당시 도전적인 좌우의 극단적인 교회 이해에 맞서서 자신의 정체성을 세워야만 했다. 오른쪽에는 강력한 조직력을 가지고 교황 수위권을 주장하면서 성경보다 전통을 더 높이 보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맞서야 했다. 동시에 종교개혁의 좌측에서는 만인제사장설을 과도하게 주창하면서 성직과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교회의 순결을 주장하면서 역사적인 교회에서 이탈해 가는 급진 세력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개혁의 주요 흐름 속에 있는 교회의 성직자들은 자신들이 역사적 교회에서 이탈한 것이 아니라 왜곡된 중세 교회로부터 초대 교회의 본래의 정신을 되살려 내려고 하는 운동임을 천명해야 했다. 종교개혁자들이 교부들의 연구에 더욱 집중하면서 교부들의 교회와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종교개혁 성도들은 성경과 역사적 교회에 근거한 종교개혁의 교회를 어머니로 삼는다. 이 교회는 성직자인 목사와 일반 평신도로 구성된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집례하며 성도들을 목양하는 사역을 감당한다.

칼빈의 사상은 16세기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여러 문제들을 만날 때마다 기독교 전통과 부단히 대화하면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21세기 교회가 복잡하고 현대적인 삶의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서, 16세기 칼빈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과 동일한 이치라고 생각된다. 물론 칼빈에게 있어 가장 근원적이고 우선적인 권위의 근거는 성경이었고 교부들의 권위 또한 이 성경의 권위에 부속되었다.4) 그렇지만, 칼빈은 교부들을, 그 중에서도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을, 중요한 신학적 논리를 세워갈 때마다 적극적으로 사용(use)했는데, 그 이유는 칼빈이 어거스틴을 “순수하고 순결한” 교회의 선생(Doctor Ecclesiae)으로 존경했기 때문이었다.5) 또 실제로 칼빈은 교부들의 작품을 접하기에 아무 어려움이 없었는데, 왜냐하면 당시에는 이미 “ad fontes”의 정신에 의해서 많은 교부들의 저서들이 출판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6)

칼빈의 초기에 해당하는 1532년의 작품인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 (Commentary on Seneca’s De Clementia)부터 그의 후기 작품에 속하는 1559년의 기독교강요까지를 고찰해 본다면, 칼빈이 그의 사상을 수립하고 피력하기 위해서, 다른 교부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얼마나 많은 분량을 어거스틴에게 의존하고 있는가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7) 한편 칼빈은 어거스틴을 가장 많이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을 해석하고 있는 해석학에 있어서도 뛰어났다. 칼빈은 이미 16세기에,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서 어거스틴을 문맥없이 끌어와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4세기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어거스틴을 이해하려고 하는 해석학적 접근을 택했다.8)

칼빈은 가장 대표적인 교부이자 16세기에 가장 권위 있는 교부였던 어거스틴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신학이 칼빈 당대의 다양한 종교개혁의 흐름들과 한 전통 속에 있음을 확인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판 라펜스바이(L. van Ravenswaay)의 주장처럼9), 칼빈의 어거스틴 사용은 칼빈 당시의 종교개혁의 여러 전통들(예를 들어 멜랑흐톤)과의 신학적 공통 분모와 연결점을 확보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는 것도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칼빈의 사상은, 특히 그의 교회론은, 그가 숨을 쉬며 살고 있었던 16세기의 교회 현실과 무관하게 책상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개혁교회의 현장 속에서 수립되었다. 16세기 문맥 속에서 교회론이 수립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칼빈이 교부, 특히 어거스틴을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16세기의 개신교가 초대교회와 역사적 연대성을 가지고 있음을 역설하기 위해서이다.10) 또한 칼빈의 교부 사용은 개신교를 역사적 기독교와 연결시키기 위함이다. 결국 칼빈은 어거스틴을 고대 교회의 증언자요, 초대교회의 가르침을 지키는 수호자로 보았기 때문에 어거스틴을 많이 사용했던 것이다.11)

정리하자면, 칼빈은 자신의 작품들 중 교회론과 관련된 부분에서 16세기의 모든 신학자들에게 공통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어거스틴에게 호소했고, 그렇게 함으로 칼빈이 지향하는 교회가 지상 교회의 범형이라고 여겨졌던 초대교회와 역사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으며, 동시에 칼빈 당대의 다양한 종교개혁 그룹들 간의 신학적 연대감을 이끌어 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강요 초판의 헌정사(Dedicatory Epistle to King Francis)에서 칼빈은 종교개혁의 교회는 고대 교회와 매우 근접한 것이며, 로마 가톨릭 교회는 초대교회의 가르침과 위반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12) 또 로잔 회의에서 칼빈은 개신교회에 대한 로마 교회 진영의 비판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그들은 교부들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며, 그들의 주장은 교부들의 후원을 얻지 못한다고 명확하게 주장한 바 있다.13) 칼빈은 사돌레또에게 보낸 서신에서 다시 한번 로마 교회의 제도는 초대교회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데, 칼빈의 눈에, 종교개혁자들이 추구하는 교회론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사도들의 순전함이 여전히 살아있는 교회, 즉 동방의 크리소스톰과 바질과 서방의 키프리안과 암브로스와 어거스틴의 시대의 교회로 돌아가려는 것이었다.14)

우리는 동시에 또 다른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칼빈은 중세의 보편 교회를 통해서 참된 교회의 흔적을 찾고자 했다는 점이다. 비록 칼빈 당대의 로마 교회는 칼빈의 시각에서 볼 때 심하게 왜곡되어 있었지만, 칼빈은 그레고리(Gregory)나 버나드(Bernard)의 사상에 하나님의 참된 교회를 담지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렇지만, 칼빈은 당대의 왈도파(the Waldenses)를 후원하고 있었으면서도, 참된 교회의 흔적을 중세의 이단자들(medieval dissenters)에서 찾지는 않았던 것이다.15) 칼빈은 그런 논증은 설득력이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점은 칼빈이 교부를 사용해서 교회론을 개진하고 있는 특성의 한 단면이다. 결국 칼빈은 16세기 종교개혁의 교회가 초대교회와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종교개혁의 교회는 하나의 참된 교회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어거스틴을 사용했던 것이다.

칼빈이 어거스틴과 도나투스주의자들과의 논쟁 속에서 자신의 교회론을 개진한 것을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칼빈은 16세기의 로마 가톨릭 주의자들과 동 시대의 급진적인 재세례파들 사이의 양 극단적인 교회론 사이에서, 어거스틴과 도나투스주의자들 사이에 벌어졌던 도나투스 논쟁을 인용하면서 칼빈 자신의 교회론을 정립해 갔다. 둘째, 칼빈의 작품들을 고찰해 볼 때, 어거스틴과 도나투스주의자들간의 교회론에 대한 논쟁은 칼빈의 초기부터 후기까지 전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은 그의 초기부터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근거해서 칼빈의 교회론을 개괄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6세기의 가톨릭 교회는 최고의 관료제도처럼 강력하게 조직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급진적인 종교개혁 운동들은 유럽 사회에서 기독교적인 대안이 되기가 쉽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교부들의 시대 이래로 유럽에서 성장해 온 기존의 신학적 전통을 간과한 채 그 사회 속에서 소동을 일으키는 무리들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칼빈은 양 극단의 교회론들 사이에서 종교개혁 교회를 형성시켜야만 했다. 칼빈은 한편으로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지지하고 있었던 전통적인 신학을 비판해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 칼빈은 또한 종교개혁의 교회 자체를 재세례파들의 그것과 구별시켜야만 하는 긴급한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상과 같은 매우 미묘한 정황 속에서 칼빈은 두 개의 극단적인 교회론 기둥들을 피하면서, 성경에 근거한 그 자신의 교회론을 모색해야만 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칼빈은 4세기 북아프리카에서 활동했던 어거스틴과 도나투스주의자와의 논쟁에 그의 관심을 기울였다. 자신의 논리에 신학적 후원을 얻기 위하여 칼빈은 도나투스 논쟁을 인용하면서 어거스틴에게 호소하는 탁월한 방법론을 선택했는데, 왜냐하면 어거스틴은 16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권위자였기 때문이었다.

종교개혁의 교회는 고대교회의 참된 가르침을 보존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칼빈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최고의 권위를 공격했다. 그렇지만, 칼빈은 재세례파들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의도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를 순결하게 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보편적인 교회로부터 분리해 나갔기 때문이었다. 칼빈에 따르면 그들은 세례의 권위를 내적인 은혜의 참된 수여자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세례를 수여하는 성직자에게 의존했다는 점에서 오류를 범한 것이었다. 칼빈은 재세례파들의 이와 같은 입장은 도나투스주의 운동의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칼빈은 전적으로 어거스틴을 따랐다. 칼빈은 지상의 교회는 완전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서 지상에 존재하고 있는 교회는 성화(sanctification)라는 긴 여정을 이제 막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칼빈은 도나투스주의자들과 어거스틴의 논쟁을 인용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위한 위대한 원칙을 도출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영적이고 도덕적인 삶이란 겸손(humility)하고 경건함(godly modesty)으로 살아가되 분리하지 않는(without separation) 것이다. 

우리의 시각을 16세기에서 21세기로 옮겨보면, 칼빈의 교회론을 통해서 우리는 유익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서양의 기독교(Western Christianity)는 오랜 역사적 전통을 견지하면서 그 사회 속에 깊은 토대를 형성해 왔다. 현재의 서양 교회는, 문화화 되어 있었던 16세기 가톨릭 교회와 어떤 면에서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비서양 기독교(non-Western Christianity)는 비교적 역동적인 성장을 경험하고 있지만, 다원적인 사회 속에서 잘 조직된(well-organized) 기독 교회를 세우는 일이 손쉬운 작업은 아니다. 그 이유는 이 교회의 전통이 그 자신의 사회 속에서 상대적으로 젊기 때문이다. 영적 활력을 가지고 팽창하고 있는 이 젊은 교회들은 아직도 자신이 속한 사회 속에 뿌리를 내리면서 성숙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데까지 미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과 도나투스주의자간의 논쟁을 적절하게 인용하면서 자신의 신학적 길을 찾아갔던 칼빈은, 21세기 서양과 비서양권 기독교 모두를 새롭게 하는데 매우 소중한 통찰을 제공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교회의 갱신

1) 설교의 갱신16)

칼빈은 그의 제네바 사역 중에(1536-1538, 1541-1564) 무려 2천회 이상의 설교를 했다. 특히 그는 생애 후기에 악화된 건강으로 인해 의자에 실려 교회에 오면서 까지 설교 사역을 감당했다.17) 그만큼 칼빈에게 있어서 설교는 그의 최후까지 가장 비중 있는 사역이었다. 칼빈에게 있어서 설교는 교회의 영혼(de ziel van de kerk)과 같은 것이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축복의 통로(de van God gegeven weg ter zaligheid)였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자유와 개혁을 향한 칼빈의 투쟁은 일차적으로 설교의 자유와 개혁을 향한 투쟁이었다.

칼빈은 그의 에베소서 설교에서 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가 구원의 측면에서 중요하며 따라서 목사의 직이 중차대함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말씀의 선포라는 수단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몸(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말함)은 세워질 수 없습니다. 즉 말씀의 선포가 없이 교회는 건전한 상태에 도달할 수가 없으며, 좋은 상태를 지속해 갈 수도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만약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바란다면, 우리는 마땅히 겸손하게 배우는 자들이 되어 복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마치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리고 그 분께서 그런 임무를 맡기신 사람들의 말에 우리가 귀를 기울일 때, 그 분은 우리의 믿음의 순종과 복종을 인정해 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우리에게 보내 진 목사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18)

그렇지만 칼빈은 같은 에베소서 설교에서 바르지 못한 설교자들을 준엄하게 훈계하고 있는데, 칼빈의 기독교강요나 성경 주석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강력한 어조로 되어있다. 칼빈은 설교가 설교 답게 선포되지 못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한탄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좋은 설교가들이 거의 없고, 전혀 소용없는 불량배(knaves)들, 그리고 그들의 생계를 챙길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복음 대신 마호메트의 코란이라도 설교할 준비라도 되어있는 교황제도 속에 빠져있는 승려보다 더 타락한 자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돼지와 같은 욕심을 가진 술주정뱅이들(drunkards), 마구 짖어대는 사나운 개들(mastiffs), 빛과 어두움을 혼돈시키지 않고서는 결코 그들의 입을 열지 않는 자들, 그래서 모든 것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자들을 봅니다. 우리가 이런 모든 자들을 볼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복음을 그렇게 경멸하는 자들에게 정당한 복수를 실행하신다는 것을 깨닫도록 합시다.19)

칼빈은 1558년 5월 1일 주일 아침부터 1559년 3월까지 48주에 걸쳐서 에베소서 강해 설교를 했다. 당시 칼빈은 48세로서 제네바에서 사역을 시작한지 19년 정도 되었을 때였다. 또한 같은 기간인 1556년 7월 16일부터 1559년 여름까지의 주중에는 칼빈은 이사야 설교를 했다. 칼빈은 원고나 노트 없이 설교했기 때문에 칼빈의 설교들은 처음에는 유실되고 있었다. 그러나 제네바의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프랑스어권 빈민들을 섬기고 있던 집사(Deacon)들이 드니 라거니에(Denis Raguenier)라는 사람을 속기사로 임명하여 칼빈의 설교가 기록되게 하였다. 그의 역할은 칼빈이 행한 설교를 일단 속기한 후에, 일상적인 언어로 다시 정서하여 집사들에게 넘겨주는 것이었다. 집사들은 이 칼빈의 주옥 같은 설교문들을 출판하여 가난한고 병든 제네바 난민들을 돕는 구호 사업의 기금으로 활용했다.20)

칼빈의 설교학에 대한 이해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항은 설교자는 복음을 선포하는 자라는 것이다.21)  심지어 발꺼(W. Balke) 박사는 설교자의 입은 마치 그리스도의 입(de mond van Christus)과도 같다고 말할 정도이다.22)  칼빈이 이해하는 설교자는 하나님의 음성으로서의 성경을 강해하는 자이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청중에게 전달된다. 특히 칼빈은 설교자를 베드로에게 주었던 열쇠 기능을 가진 자로 보았다. 설교할 때에 죄 용서의 은혜가 선포되며 믿는 자는 이것을 수용하지만, 거부하는 자는 여전히 죄에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23)

그러나 칼빈의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단지 교리를 제시하거나 성경 해석을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다. 설교를 통해 성도들을 권면함으로 그들이 말씀을 자신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도 칼빈이 이해하는 설교의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24) 그렇기 때문에 칼빈이 말하는 설교의 목적은 믿는 자들을 교화(edification)하여25)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2) 예배의 갱신26)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는 긴급한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라는 단 하나의 교회만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 유일한 교회의 예배가 미사, 예배 의식, 성례관 등의 신학적 문제에 있어서 크게 왜곡되어 있었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중세 후기의 로마 가톨릭의 예배와 예전으로부터 성경적인 것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미사 중심적이고 모든 예전을 성례화했던 로마 가톨릭의 예배로부터 다시 말씀 선포의 의미를 되찾자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회중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라틴어 예배가 아니라 참예자들도 이해할 수 있는 자국어로 예배를 드리도록 하며, 더 나아가 예배에 참여한 자들로 하여금 직접 하나님을 찬양하고 성찬의 잔을 다시 나누도록 하는 예배의 개혁이 바로 종교개혁의 예배인 것이다.

종교개혁 교회가 기존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예배를 개혁했기 때문에, 개신교는 예배에 대한 자신들의 정체성을 새로 세워야만 했다. 종교개혁의 성직자들은 이런 의미에서 미사의 집례자가 아니라 성경적인 바른 예배의 인도자로서 정체성이 세워진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운동의 성직자들은 로마 가톨릭에서 진행하는 매일 미사의 희생제사, 빵과 포도주의 성체화,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화됨, 개인적인 미사, 죽은자들을 위한 미사, 비밀 고해성사, 그리고 교황제에 대한 정죄와 주의 “참된 기관”으로부터의 일탈 등의 개념이 아니라, 명확하게 성경적인 신학적 원칙에 근거하여 예배를 개혁하게 되었다.

칼빈이 1536년에서 세상을 떠난 1564년까지 거의 평생(잠시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난민 목회를 했던 1538년에서 1541년까지의 3년을 제외하고)을 목회하고 신학적 연구를 전개했던 제네바는, 로마 가톨릭의 종교적 박해와 사보이의 정치적 지배에서 방금 풀려난 신생 개신교 도시국가였다.27) 외부로부터는 제네바를 로마 가톨릭으로 되돌리려는 음모가 중단 없이 시도되고 있었고, 제네바 내부에서는 칼빈의 철저한 통치에 대한 반발이 거셌다. 이런 역사적 현실 속에서, 칼빈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예전을 버리고 전혀 새로운 교회를 세워야만 했던 중차대한 사명을 부여 받고 있었다.

칼빈은 1537년 다른 2인의 제네바 목사들인 엘리 꼬로(Elie Coraud)와 파렐(Farel)과 함께 시 의회에 제출했던 『제네바 교회 조직과 예배에 관한 규정』28)과 1541년의 『교회 법령』29)에서 매주 성찬식을 거행할 것을 의도했다.

그러나 칼빈은 인구가 약 10,000에서 12,000이나 되는 16세기 개혁 도시국가인 제네바라는 사회적 현실과 교회와 국가 간에 존재했던 긴장 속에서 성찬식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제네바의 3~4개의 교구 교회에서 돌아가면서 매달 성찬식을 실시하는 것으로 조정했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성도들은 한 달에 한번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성찬을 어떤 방식으로, 몇 번이나 실시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예배의 요소에 있어서 그의 목회적인 입장은 분명했지만 동시에 그는 제네바의 목회 현실을 고려할 줄 아는 안목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칼빈은 그의 초기 시대부터 예배에 대한 관점이 서서히 발전하여 점차 잘 조직된 형태로 확립되어 갔다. 이때 중요한 개념은 “eglise bien ordonnee” 즉 “잘 조직된 교회(well-organized church)”이다. 이 용어는『제네바 교회 조직과 예배에 관한 규정』30)(1537년 1월 16일) 에서 비롯해서, 『교회 법령』31)(1541년 9월 13일), 그리고 『교회 기도와 교회 찬송의 형태』32)(1542) 등에 나타나고 있다. 칼빈이 말하는 “잘 조직된 교회”를, “설교-중심적”인 예배나, “회중의 권징”, 혹은 교회의 “4중 직책”등의 개념으로 단순하게 축소시키기 보다는, “성경적인 사상”에 의해서 “철저하게 관통되고” “적절하게 조직된” 조화롭게 연합된 교회의 몸을 가르친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33)

한 마디로 칼빈이 말하는 예배는 “잘 조직된” 것이면서도 동시에 “영적인” 예배라는 균형 의식이 잘 나타나 있는 예배이다. 이것은 “via media”로 요약될 수 있는 칼빈 신학의 일반적인 특징과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우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회론인 교황제도 중심의 교회라는 개념을 거부하면서도, 좌로는 만인제사장과 영적 교회론을 극단화 시키면서 교회의 제도적인 측면을 과격하게 허무는 재세례파들의 주장도 배격하는 것이다.

오히려 양 극단의 교회 형태들을 피해가면서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교회론을 가지고 제네바 교회를 세워가려고 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이와 같이 성경에 근거한 “영적이면서도” “조직된” 균형 잡힌 교회론이 로마 가톨릭주의나 재세례파주의와 달리 칼빈주의를 전 유럽과 미주에 역동성 있는 교회 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게 하였으며,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했다고 이해된다. 칼빈의 위대한 점과, 그의 가르침이 아시아 교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칼빈의 신학은 영적으로 복잡하고 어둡던 시기, 옛 것을 새것으로 대체 해야만 했던 교회적 사회적 격변기에 예배와 교회와 인간 사회를 건강하게 세워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살아있는 신학이었던 것이다.

 

3. 목양하는 교회로의 갱신

1) 목양 장로 사역의 재발견

장로제도는 성경에 근거하고 있고 초대교회부터 존재했던 목양적인 의미를 함축하는 직제였다. 그러나 중세 천 년을 지나면서 왜곡된 교회 제도에 의해서 흙에 묻혀 있었다. 칼빈은 이 장로의 사역 개념을 재 발견하여 자신이 목회했던 제네바 교회의 역사적 현장에 적용했다. 개신교 도시가 된 제네바 시민들의 삶을 이끌어 갔던 것은 종교적으로는 컨시스토리였고 정치적으로는 시의회였다.

그렇다면 이 컨시스토리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컨시스토리를 “당회”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칼빈 당시의 컨시스토리는 그 구성과 사역의 내용에 있어서 보다 깊은 이해를 요구한다. 컨시스토리는 어떻게 보면 교회 안에서의 삶을 넘어서는 보다 넓은 의미의 사회적인 삶 까지를 함축하고 있다. 말하자면 장로는 목사와 함께 공동으로 제네바 교인들의 영적이며 사회적인 삶을 이끌어 가고 있었으며, 사회적인 권위가 아닌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론적부터 말하자면 이 컨시스토리에서 목사와 더불어 공동으로 사역을 감당했던 장로들의 사역의 내용과 그 의미를 면밀하게 살펴보면 자연스럽게 목양장로의 개념이 도출된다는 것이다.
컨시스토리는 16세기에 종교개혁 도시가 된 제네바 시민들의 일상의 생활에 대해서 적절하게 기독교적 지도를 할 수 있는 의사소통과 실행을 위해 필수적인 매체였다. 이 컨시스토리는 1541년 칼빈의 ‘교회 규칙서’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기관이었다. 말하자면 모든 제네바 사람들이 설교와 법령들에 표현된 새로운 개혁주의 가르침을 그들의 일상 생활 속에서 그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게 위한 것이었다. 1555년에 칼빈이 제네바에서 실제적인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이후에 이 컨시스토리는 판단을 위한 심리 재판소로, 상담의 봉사 기관으로 그리고 교육기관으로서 그 기능을 감당했다. 말하자면 16세기 제네바에서 모든 사람들의 삶의 차원을 관통하고 있었던 것이 이 컨시스토리였다.

(1) 컨시스토리의 사역 과정

칼빈 당시의 제네바의 컨시스토리에서는 권징이 주로 다루어 졌다. 권징은 마태복음 18장 15~18절과의 연관 속에서 간단하게 다뤄지는데, 권징의 목적은 올바르게 하는 것이지, 정죄하는 것이 아니기에, 칼빈은 필수적인 징계들 속에서 중용(완화, moderation)을 주장한다. 다양한 일들이 컨시스토리에서 다루어졌다. 컨시스토리 앞으로 나온 각 사람들은 신분이 확인되고, 남자나 여자나 대답하기로 되어 있는 것에 대하여 밝혀야 했다. 그런 후에 그들은 행정장관(syndic)의 지휘아래 컨시스토리의 멤버들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개인들은 개혁 초기의 대부분의 일반적인 판결은 간단한 질책으로 집행되었는데, 주로 목사나 칼빈 자신에 의한 ‘훈계’(admonition) 또는 ‘충고’(remonstrance)로 이루어졌다.

여러 사람이 관계되는 사건에서 컨시스토리는 종종 화해(reconciliation)하도록 하거나, 한 가정이나 이웃들, 사업체들 안의 분쟁을 해결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경우에는 법정보다는 좀 더 강제적인 상담이나 중재로서 일이 이루어 졌다. 존 낙스(John Knox)와 같이 제네바를 방문했던 기독교 지도자들도 이 컨시스토리의 사역에 의해서 제네바 교인들의 삶이 경건해 지는 것을 보면서, 예전에 결코 제네바에서처럼 바르게 살고 있는 기독교인의 삶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할 정도였다.

(2) 컨시스토리 사역의 내용: 장로의 목양 개념34)

일반적으로 컨시스토리에서 목사와 장로들은 제네바에서 살고 있는 모든 시민들이 성실하게 가정에 충실한 삶을 살도록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보통 일반적인 가정의 스타일은 한 남편과 아내, 부양된 아이들, 그리고 젊은 하인들이 한 집안에 조화롭게 함께 사는 것이었다. 칼빈을 포함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결혼과 가정을 세우도록 기대되었다. 평신도들도(laymen) 마찬가지로 결혼과 가정을 세우도록 요구되었다.

예를 들어 장로들이 컨시스토리에서 목사와 함께 지도했던 삶의 또 다른 양식은 난잡함(promiscuity) 이었다. 종교개혁 전에 난잡함은 보통 피할 수 없는, 필요악으로 여겨졌다. 그 당시의 대부분의 도시들과 같이 제네바도 매춘을 허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후에 매춘은 폐지되었다. 전문적인 소수의 매춘부들은 아주 조용히 거래하였으며, 다른 공동체로 떠나도록 요구 받았고 그들의 여행경비를 위해 약간의 돈이 지불되기도 하였다.

1546년, 1552년, 그리고 1557년 등 삼 년 기간 동안에 장로들이 목사와 함께 컨시스토리에서 다루었던 사안들의 종류와 경향들을 살펴보면, 장로들이 제네바의 컨시스토리에서 목사들과 함께 다른 교인들의 삶을 지도한 것의 특징을 알려주고 있다. 첫째로, 장로들이 컨시스토리에서 다룬 사안들의 약 60%가 성, 결혼, 가정에 대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영적인 엄격함이 후에 더욱 증가하였다는 것이다. 1546년에는 대부분의 일반적 구제책은 당사자가 더 잘하도록 권면하거나 많은 경우에는 짧은 훈계로 끝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역은 더욱 강화되었다. 셋째로, 장로들은 컨시스토리에서 적어도 회개와 화해를 위한 가능성(locus poenitentiae)을 내포하는 무거운 금지의 사용을 기꺼이 시행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네 번째로, 컨시스토리는 그 삼 년의 각각의 사안들을 영적인 방법으로 처리했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로, 이 삼 년의 예에서 가정과 관계된 문제의 발생 빈도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이것은 도시의 인구 증가와 장로들이 컨시스토리에서 다룬 일들의 증가하는 숫자와 비교하면, 그런 문제에 대한 컨시스토리의 영향력이 점차 증가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즉 제네바 교인들의 삶의 변화가 실제로 장로들의 사역에 의해서 유도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장로는 말씀을 설교하는 목사와는 구별되는 직분이었지만, 제네바의 컨시스토리에서 장로는 목사와 함께 교리교육을 내면화하여 삶에 적용시켰으며, 새로운 학교들, 커리큘럼들, 수업도구들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동시에 장로는 컨시스토리를 통해서 사생자, 유기된 사람과 학대 받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피난처를 제공했으며, 학대 받는 부인들과 가난하게 된 과부들에게 새로운 보호처를 제공하기도 했던 것이다.

당시 제네바의 컨시스토리에서 칼빈과 같은 목사들은 물론, 평신도 가운데 선출된 장로들이 함께 동석하여 이 복잡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문제를 일일이 목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16세기 제네바 교회의 유형은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의 장로교회들을 통해서 더욱 정교하게 되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심지어 근대 시민 사회의 질서와 전통을 창출하는 데까지 기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3) 한국 교회를 위한 목양 사역

칼빈이 활동 했던 16세기 유럽과 제네바를 중심으로 목양 장로제도에 대해서 고찰에 근거하여 필자는 한국 교회를 향한 시사점을 제시하려고 한다. 교회의 직분은 로마 가톨릭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성직 계층제도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실 때 교회 안에 직분자를 세워서 자신의 통치를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장로의 직분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장로의 직분을 감당할 때는, 그 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와 장로와 집사와 같은 직분자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서로 섬기는 자세로 교회를 이끌어 가야 할 것이다. 특히 장로는 단순히 교회 안에서 행정 및 회계 관리를 맡는 항존직이 아니었다. 장로는 교인들의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삶을 돌아보면서 그들의 영적 필요를 채워주어야 하는 것이다.

 

2) 복지 목회로의 갱신35)

16세기 문맥에서 종교개혁주의자들의 신학을 살펴볼 때 교회가 사회복지 사역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다양한 견해들을 발견할 수 있다. 크게 보아 두 가지의 경우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둘의 차이는, 사회 복지를 교회와 국가가 함께 감당해야 하는 사역으로 해석하는가, 혹은 사회 복지를 국가에 완전히 위임하고 교회는 말씀과 성찬에만 전념해야 하느냐의 문제에 놓여있다.

(1) 종교개혁 당시의 복지 목회의 유형

(a) 사회 복지를 국가에 위임하고, 교회는 말씀과 성찬에만 집중하는 유형

독일의 루터(Luther)와 스위스 쮜리히의 쯔빙글리(Zwingli), 그리고 영국의 성공회 등은 교회는 말씀 선포와 성례 집전만 해야 한다고 보면서 종교적 권위를 갖는 국가에게 교회가 할 실천적이고 행정적인 일까지도 위임했다.36)

(b) 교회와 국가가 함께 사회 복지를 담당하는 유형

그러나 스위스 바젤의 외콜람파디우스(John Oecolampadius)와 스트라스부르그의 마틴 부써(M. Bucer) 그리고 스위스 제네바의 존 칼빈(J. Calvin)과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J. Knox)등은 다소 다른 입장에 서 있었다. 개혁주의자들인 이들은, 무엇보다 교회는 국가의 권위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시에 교회는 교인들을 도덕적으로 훈계하며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는 사역도 자율적으로 감당하되, 이 중 일부는 사회 안에서 국가와 함께 그 책임을 수행하여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말하자면 칼빈주의는 국가가 수행하는 사회 복지를 그리스도인의 사역의 한 측면이라고 보았다. 또한 교회의 디아코니아(diakonia) 활동도 국가의 복지 활동과 구별되는 교회의 사역으로 보았던 것이다.

(2) 칼빈의 복지 목회

칼빈은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하는 초대 교회로부터 교회의 4대 사역을 주장하고 있다.37) 칼빈에 의하면 교회의 집회 때마다 반드시 시행되어야 하는 것이 4가지가 있다. 그것은 첫째 말씀을 가르치고, 둘째 기도를 드리며, 셋째 성찬에 참여하며, 넷째 구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이 네 가지, 즉 말씀과 기도와 성찬과 구제 없이는(sine verbo, orationibus, participatione coenae et eleemosynis) 어떤 교회의 모임도 없다는 것이 교회론적인 변함없는 규칙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칼빈이 교회의 예배를 구제와 구별하여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말씀을 듣고, 공적인 기도를 하며, 성찬을 하기 위해서 교회로 모이는 공동체는 동시에 반드시 구제를 시행하는 것이 초대교회의 규칙이며, 이것은 변경되지 않고 내려오는 규정이라는 것이다. 한편 기독교강요 초판에 나타나는 칼빈의 이런 사상은 그의 기독교강요 최종판(1559)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38) 칼빈은 초판의 내용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a) 집사: 복지 목회의 담당자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는 로마서 12장을 주석할 때, 교회의 자선 사업을 교회론의 차원에서 접근하여 해석하고 있다. 즉 집사를 2개의 직으로 나누어서 각각 자선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고 있다.39) 이 집사는 칼빈에게 있어서 교회의 사회 복지 사역을 실제로 담당하는 담지자가 된다. 칼빈은 먼저 그의 기독교강요 최종판에서 교회 안의 직분을 설명하면서, 다스리는 직과 구제하는 일의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다.40) 그러면서 칼빈은 “다스리는 일과 구제하는 일 두 가지는 영구적인 것이다”41)라고 기술하면서 교회 안에서 구제하는 직분의 영속성을 부여하고 있다.

한편 칼빈은 본격적으로 교회의 집사 직분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보다 명확하게 집사의 사역을 사회 복지적인 측면으로 강력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칼빈은 집사의 직분을 이렇게 정의 내리고 있다. 우선적으로 집사들이 맡은 것은 구제하는 사역이라는 것이다.42) 칼빈은 로마서 12장 8절에 등장하는 두 종류의 구제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러나 로마서에는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고 (롬 12: 8) 두 가지 종류에 관해 언급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공적인 직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분명하며, 따라서 집사직에는 두 가지 다른 등급이 있었을 것이다.43)

이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은 집사를 “구제 물자를 나누어 주는 집사”와 “가난한 자와 병자들을 돌보는 사람들”을 모두 지칭한다고 보았다. 칼빈은 집사를 구제 행정을 보는 역할을 맡은 집사와, 실제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찾아가서 위로해 주는 집사로 나누었던 것이다. 

칼빈은 계속해서 이 두 종류의 집사들의 역할을 명확하게 지적하면서 우리는 이 두 종류의 집사들의 사역을 마땅히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b) 칼빈의 사회 복지 목회의 실제

(ㄱ) 제네바 종합 구빈원(Hôpital Général)

복지 개혁을 위한 움직임의 확산은 거의 정확하게 종교개혁의 확산과 함께 동시에 일어났다. 종교개혁자들은 많은 정통 가톨릭에게 도전을 주었다. 칼빈의 리더십 아래에서 제네바는 교회 조직 안에서 가장 철저하고 완고한 개혁을 개발하였다. 그것은 또한 초기 개신교들이 어떻게 사회복지에 대한 행정을 개혁했는지에 대한 모델이 된다.

제네바의 복지 개혁은 당시의 다른 도시의 일반적 형태를 그대로 따랐다. 즉 교회와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가 빈민과 병자를 치료할 목적으로 운영하는 종합 구빈원이 그것인데, 빈민 구제 집중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제네바 종합 구빈원(Hôpital Général)은 개혁에 의한 설립이었지만 칼빈의 의한 설립은 아니었다.

이 종합 구빈원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필요를 채우지 못하고 있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게 환대를 제공하는 다목적 기관이었다. 대부분 전쟁으로 인한 고아와,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없는, 너무 늙고, 아프거나, 심한 장애를 가진 소수의 노인들에게 집을 제공하였다. 그곳에서는 가난한 가정에게 빵을 매주 나눠주었고, 자신들의 숙박료를 지불할 수 없거나 막 제네바에 도착한 방문객에게 매일 저녁 쉼터와 음식을 제공하였다.44)  구빈원 안팎에서는 재정과 행정적인 책임을 맡는 집사(procureur)와 직접 빈민과 환자를 방문하여 돌보는 구제 도우미(hospitallier)의 주관 하에 자선행사가 열렸으며 구걸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45)

자발적 기부를 기대하고 장려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세속화된 교회 재산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했다. 칼빈은 직접 이 구빈원에 관여를 하지 않았으나, 서신을 통해 적극적 관심을 가지고 사역했다. 요컨대 칼빈은 이 제네바 종합 구빈원에 직접 참여하여 사역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칼빈이 제시했던 집사 제도를 통해서 그는 사상적으로,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종합 구빈원(Hôpital Général)의 방향은 평신도에게 넘겨졌다. 전임 구제 도우미(hospitallier)를 임용하였다. 그는 그의 가족과 함께 본부로 거처를 옮기도록 요구되었고 식사가 포함된 하숙이 제공되는 것으로 인해 이 자리가 많은 인기를 얻었다. 칼빈이 1541년 교회조직 구축의 총 책임을 맡기 위해 제네바에 돌아왔을 시점에는 복지 행정사(procureur)의 역할이 이미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복지행정사(procureur)들은 이외에 다른 많은 특별한 임무가 있었다. 그들은 구빈원에 할당된 상당한 자산을 관리하는 책임이 있었다.

틀림없이 칼빈은 그의 글 여기저기서 구제도우미(hospitalliers)와 구빈원 복지행정사(procureur)들에 대해 언급하는데 특히 1541년에 스트라스부르에서 돌아온 직후 그가 감독하려던 개혁교회를 위한 정관으로 제네바 시를 위한 초안인 교회의 법령(ecclesiastical ordinances)에 많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교회의 법령들은 교회 안의 사역을 네 종류로 구분하는데 네 번째가 집사에 관한 것이다. 더 나아가 칼빈은 집사를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1) 가난한 자를 위해 구호금을 모으는 자들과 2) 이러한 구호금을 나누어주는 자들로 분리했다. 더욱이 칼빈은 그의 여러 글에서 집사와 관련하여 원리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진술들이 증거하는 것은 칼빈은 집사 직분이 오로지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일에 헌신하는 사역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한편 킹던 교수는, 칼빈이 제네바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제네바가 칼빈에게 영향을 주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갖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의 기독교강요 초판을 보면, 칼빈은 이미 제네바 사역을 시작하기 전부터 교회의 본질적인 4중 사역, 즉 말씀과 기도와 성찬, 그리고 구제를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6)

(ㄴ) 프랑스 구호 기금 (Bourse française)

종합 구빈원(Hôpital Général)이 해결해 줄 수 없었던 제네바의 사회적 문제는 다른 나라로부터 이주해 온 많은 종교적 난민들을 돕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구빈원은 제네바 시민과 제네바에서 단기 체재할 계획을 가진 사람들의 문제만 대처하도록 의도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네바에 장기간 거주하기 원하는 난민들의 경우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국제무대를 배경으로 한 종교 위기를 대비하려는 특별 헌금은 1545년 칼빈의 촉구에 의해 최초로 시작되었는데, 그 해 프랑스의 프로방스에서는 대대적인 개신교 박해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칼빈은 시민들의 각성을 촉구했고 원조를 구했으며, 탄원을 위해 여러 다른 도시들을 순회하면서 제네바에서 훨씬 멀리 떨어진 외부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런 문제 의식 속에서 현금 기금이었던 프랑스 구호 기금(Bourse française)이 칼빈에 의해서 세워졌다. 이 기금은 프랑스에서 제네바로 피난온 난민들, 즉 질병이나 가족의 문제나 프랑스에서 자산을 모두 상실하는 등, 더 이상 자신을 부양할 수 없는 가난한 프랑스 피난민에게 나누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 구빈원과는 달리 Bourse française는 사적인 기관이었다.47)  종교개혁 동안 제네바에 창립되었던 기관인 Bourse française는 칼빈의 목회와 사회 복지와의 관계 속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 곳은 기증한 사람들에 의해 선출된 집사의 직책을 가지고 있는 평신도들이 운영하였다. 이런 집사들은 돈을 걷고 분배하고 수입 지출 모두를 기록하였다.48) 이러한 점에서 Bourse française는 구빈원과 매우 유사했으나 처음부터 칼빈의 관심과 강력한 지지를 얻은 점에서 다르다.

칼빈의 광범위한 프랑스 구호 기금 활동을 고려한다면, 칼빈은 가난한 자들의 필요에 관심이 특심했으며, 그가 가치를 두는 사항을 진전시키기 위하여 국가와의 관계에서도 긴밀하게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부제로 운영되는 망명자 단체는 정기적인 헌금을 후원받았는데, 이 단체는 제네바 빈민층을 위한 종합 구빈원과 같은 선상에 놓여 있었다. 망명가 사회는 그들 사회 속의 빈민과 불우한 사람들을 돌보고자 자신들 스스로 조직화하기에 이르렀다. 최대 규모의 망명자 단체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집단으로, 가난한 구성원과 여행자를 후원하고자 정규 기금을 마련한 첫 번째 공동체였다. 집사는 기금 기부자들이 선출한 사람으로서 자금을 배분하고 빈곤층과 병자들에게 각별히 신경을 쓰고 돌볼 책임이 있었다. 망명자 단체의 회합에서 성직자의 참석은 관례였으며 유서 깊은 기업과 교회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올슨에 의하면, 많은 헌금 기부자들이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정해진 금액을 기부했다.49)

제네바의 망명자들을 위한 다양한 원조 물자와 함께 프랑스 및 다른 지역 교회에 대한 개혁가들의 관심사를 한데 모으면서, 구제헌금은 여기저기 흩어져 활동하고 있지만 서로 결속된 개혁 단체들 사이를 묶어주는 끈이 되었다.

 

IV.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국제적 동향

1. 레포 500(Refo 500: 홈페이지는 www.refo500.com)

16세기 종교개혁 지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매우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루터파는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쪽에 분포하고 있고, 앵글리칸 교회는 당연히 영국에 제한되어 있다. 재세례파를 중심으로 하는 급진종교개혁 운동은 워낙 극심한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유럽 각지에 간헐적으로 산재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칼빈주의 교회들이다. 이들은 동쪽의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 그리고 체코로부터 시작해서, 서유럽의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와 영국(스코틀랜드를 포함)에 까지 확산되어 민족적 성격을 완전히 초월해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개혁주의는 “신학”을 중심으로 “국제적”으로 연대해 왔기 때문이다. 1618-19년에 네덜란드에서 칼빈주의 5대교리,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 그리고 벨직신앙고백서가 공인된 것도 전 유럽에서 대표단이 참여한 최초의 칼빈주의 “국제 대회”인 도르트 총회를 통해서였다.

“Refo500(회장: 헤르만 셀더하위스 교수/화란 아펠도른신학대학교)”도 같은 맥락 위에 서 있다. “Refo500”은 Reformation 500주년을 상징하는 단어로 만들어진 국제적인 기관으로서 네덜란드에 본부가 있다. 현재 유럽 전체와 북남미 그리고 아시아 전체로부터 150개가 넘는 회원 기관들이 활동하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세계에서 가장 크고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 재단이다. 레포500의 홈페이지(www.refo500.com)도 영어, 화란어, 독일어 그리고 한글 등 4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최근에 아시아 회원들을 위한 영어 아시아 홈페이지가 시작되었다.

이 레포500의 기본 정신은 한마디로 500년의 종교개혁의 정신을 21세기에 다시 살아나게 하자는 것이다. 이 목표를 유럽과 북미뿐 아니라 아시아를 포함한 전 세계로 확산하기 위해서 대학교, 연구소, 교회, 박물관은 물론 TV방송국과 출판사와 심지어 도시까지 연대 되어 있다.  이 레포 500에서는 지난 2010년에 아시아의 책임자로서 총신대학교를 선정하였다. 그 이후 수년동안 총신대학교의 국제화는 더욱 발전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총신의 국제화가 종교개혁 정신의 국제적 확산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Refo500 Asia의 회원은 한국개혁주의학술원(원장: 정성구), 대한예수교 장로회 고신 교단, 고신대 개혁주의학술원(원장: 이신열),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총장: 정창균), 횃불트리니티대학원대학교(총장: 이정숙),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원장: 서창원), 열린교회(김남준 목사), 푸른아카데미(정영오 대표), 부흥과 개혁사(백금산 목사) 등이 있으며,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앞으로도 레포500은 종교개혁 정신과 개혁주의 신학이 오늘날 개인과 교회는 물론 한국 사회 전체에 꽃피울 수 있도록 계속 그 노력을 경주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2. 신학 선교

칼빈의 사상을 심장과도 같이 중요시하는 개혁주의 역사의 특징이 신학을 중심으로 국제적 개혁주의 연대를 형성해 온 점이라면, 현재까지는 모두 유럽과 미국과 남아공을 중심으로 하는 서양 문화권에서 그 흐름이 발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서양권의 개혁주의 신학자와 지도자들이 한국이 허브가 되어 중국을 비롯하여 점차 부상하고 있는 아시아의 교회를 개혁주의적인 교회로 세울 수 있도록 국제적으로 협력하는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되고 있다.

시대적 흐름에 따라 개혁주의 역사의 중심지는 변화를 겪어왔다.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는 칼빈의 제네바가 개혁주의 국제화의 센터였다. 17세기 이후에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가 그 역할을 맡았다. 20세기를 넘어가면서 그 거룩한 부담이 미국에게 주어졌다. 그렇다면 21세기에는 어느 지역의 교회가 그 시대적 소명에 응답할 수 있을까? 세계 개혁교회 형제들은 한국을 주목하고 있다. 특히 이 유형은 서양권과 비서양권이 수평적으로 조우하는 미증유의 국제화 모델이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총신의 글로벌 M.Div.를 한 예로 들 수 있다. 총신대 신대원에는 2015년에 영어 M.Div. 과정이 개설되었으며, 2016년에는 중국어 M.Div. 과정이 개설되었다. 현재 아시아(중국, 인도, 베트남, 캄보디아, 네팔, 대만, 우즈베키스탄)와 아프리카(남아공, 우간다, 카메룬, 탄자니아, 르완다, 리베리아) 등에서 온 36명의 학생들이 신학 훈련의 받고 있다.

 

V. 나오는 글: 한국 교회는 종교개혁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교회는 신학을 통해서 그 토대와 방향을 점검 받고, 또 반대로 신학은 교회 현장을 통해서 검증이 되어야 한다. 교회 현장과 신학이 지속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파트너십의 문화가 형성되어야 한다. 현대 교회는 성경에 근거한 십자가의 복음이 아니라 성공주의와 현세 기복주의와 주관적인 심리 치료가 강조되고 있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또한 체험주의적 성령 운동이나 신유 운동 등의 발흥으로 문제점을 노출해 왔다. 현대 교회는 또한 교회 밖으로부터 도전해 오는 세속주의와 이단의 공격 앞에 무기력하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 교회는 종교개혁의 신학으로부터 강력한 메시지를 경청해야 할 것이다.

 

1. 성경 중심적인 교회로 갱신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다수는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이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의 주관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의도대로 좌우되는 경향이 적지 않다. 이와 같은 교회에는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복음이 중심을 잡기 어렵다. 교회 지도자들의 취향이나 경험, 혹은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교회를 주도할 우려가 큰 것이다. 이런 교회는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에서 비판하고 있는 당대의 교황주의적인 교회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교회가 다시 생명력있는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종교개혁의 본질인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의 은총 중심으로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를 잠시 돌아보면 주관주의와 경험주의적인 경향이 크다. 이것은 말씀 중심적이며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거하는 교회에서 이탈해 가는 신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런 교회는 개인의 의와 능력을 전시하는 무대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3. 물질 숭배적인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적인 교회로 개혁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아니라 “물질의 공로”가 지배하고 있다는 평가는 받기도 한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려고 신앙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현세의 물질적 축복을 하나님께 위탁 받은 청지기 의식으로 해석해 내면서, 본질적인 신앙의 내용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4. 이기주의를 버리고 이웃을 향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자기 중심주의적이고 개교회주의적인 이기주의 경향이 크다. 교회의 안과 밖에서 지치고 상한 영혼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섬기는 교회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95개조의 반박문을 통해서 고통받고 있는 영혼들을 위로하며 성경에 근거한 참된 안식과 죄사함의 은혜를 맛볼 수 있는 길을 제공해 주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그들의 아픔과 실제적 문제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해답을 제시해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한반도의 통일을 위한 목회 사역도 이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1) E. Cameron, The European Reformation (Oxford: Clarendon Press, 1991), 2f.
2) 루터의 신학과 95개조 반박문에 대해서 독일 원전을 중심으로 잘 정리된 다음의 책을 보라. 김용주, 『루터: 혼돈의 숲에서 길을 찾다』 (서울: 익투스, 2012).
3) 다음을 보라. 안인섭, 『칼빈과 어거스틴: 교회를 위한 신학』 (서울: 그리심, 2009), 335-367.
4) D.C. Steinmetz, Calvin in Context (New York/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5), pp. 122-140.
5) A.N.S. Lane, “Calvin’s use of the Fathers and the Medievals,” Calvin Theological Journal 16 (1981), pp. 160-162.
6) J. van Oort, “Calvinus Patristicus: Calvijns kennis, gebruik en misbruik van de patres” in De Kerkvaders in Reformatie en Nadere Reformatie, (red.) J. van Oort (Zoetermeer: Boekencentrum, 1997), pp. 75-76. ; H.O. Old, The Patristic Roots of Reformed Worship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1975), pp. 156-158.
7) R.J. Mooi, Het kerk – en Dogmahistorisch Element in de Werken van Johannes Calvijn (Wageningen: H. Veenman & Zonen N.V., 1965). ; J. van Oort, “John Calvin and the Church Fathers,” in The Reception of the Church Fathers in the West , (ed.) I. Backus (Leiden: E.J. Brill, 997), vol. 2.
8) J. van Oort, “John Calvin and the Church Fathers,” p. 678.
9) L. van Ravenswaay, Augustinus totus noster : Das Augustinverstaendnis bei Johannes Calvin (Goettingen: Vandenhoeck&Ruprecht, 1990).
10) J. van Oort, “Calvinus patristicus: Calvijns kennis, gebruik en misbruik van de patres,” p. 69.
11) A.N.S. Lane, “Calvin’s use of the Fathers and the Medievals,” pp. 189-190. 171 - 173.
12) Calvin, CO 1. cols. 16-17. ( = Institutes, dedication) (1535/6).
13) H.O. Old, The Patristic Roots of Reformed Worship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1975), p. 142.
14) H.O. Old, The Patristic Roots of Reformed Worship, pp. 142-143.
       J. van Oort, “John Calvin and the Church Fathers,” p. 675.
15) A.N.S. Lane, “Calvin’s use if the Fathers and the Medievals,” pp. 182-183.
16) 다음의 책을 보라. 안인섭, 『칼빈과 어거스틴: 교회를 위한 신학』 (서울: 그리심, 2009), 223-251.
17) D. de Vries, “Calvin’s Preaching,”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John Calvin, (ed.) D.K. McKi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p. 106.
18) Calvin, Sermons on the Epistle to the Ephesians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9), pp. 374-375.
19) Calvin, Sermons on the Epistle to the Ephesians, p. 367.
20) W. de Greef, The Writings of John Calvin, Expanded Edition: An Introductory Guide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8), pp. 93-100.
21) R. Stauffer, Calvin et Sermon, 박건택 역, 『칼빈의 설교학』 (서울: 나비, 1990), pp. 61-65.
22) W. Balke, Calvijn en de Bijbel (Kok: Kampen, 2003), 83-84.
23) T.H.L. Parker, Calvin’s Preaching, 김남준 역, 『칼빈의 설교』 (서울: 솔로몬, 1993), pp. 17-56. 그리고 pp. 59-82.
24) R. Stauffer, Calvin et Sermon, 박건택 역, 『칼빈의 설교학』, pp. 68-71.
25) T.H.L. Parker, Calvin’s Preaching, 김남준 역, 『칼빈의 설교』, pp. 154-174.
26) 다음을 참조하라. 안인섭, 『칼빈과 어거스틴: 교회를 위한 신학』 (서울: 그리심, 2009), 369-388.
27) E. Cameron, The European Reformation (Oxford: Clarendon Press, 1991), pp. 2f.
28) Calvin, Articles concernant l’organisation de l’eglise et du culte a Geneve (1537) (=CO 10 a : 5-14).
29) Calvin, Les Ordonnances ecclesiastiques (1541) (=CO 10 a : 15-30).
30) Calvin, Articles concernant l’organisation de l’eglise et du culte a Geneve (1537) (=CO 10 a : 5-14).
31) Calvin, Les Ordonnances ecclesiastiques (1541) (=CO 10 a : 15-30).
32) Calvin, The Form of Church Prayers and Hymns (1541).
33) Shin Nomura, “Église bien ordonnée: Liturgical and Spiritual Aspects of Calvin’s Worship,”「9’s Asia Congress on Calvin Research」(Taiwan, 2005), pp. 1-22.
34) 안인섭, 『칼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의 사람』 (서울: 익투스, 2015), 221-234.
35) 다음을 참조하라. 안인섭, 『칼빈과 어거스틴: 교회를 위한 신학』 (서울: 그리심, 2009), 277-298.
36) E. A. McKee, 『개혁교회 전통과 디아코니아』(tr.) 류태선&정병준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0), 44-48.
37) McKee에 의하면, 칼빈은 에라스무스가 편찬한 헬라어 성경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을 4중 구조로 보았다. 반면, 벌게이트 성경을 사용했던 로마 가톨릭은 3중의 해석을 해서, “말씀”, “성찬의 교제”, 그리고 “기도”로 보았으며, 따라서 자선에 대한 강조를 발견할 수 없다. E.A. McKee, John Calvin on the Diaconate and Liturgical Almsgiving (Geneva: Droz, 1984), pp. 67-90.
38) CO. 2. colm. 1046. (Institutes: 1559, 4. 17. 44).
39) 칼빈의 사회 복지에 대한 전문가인 J.E. Olson 박사는, 16세기 유럽에서 가톨릭과 개신교가 함께 사회 복지 사업에 대해 관심을 증폭시키고 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지만, Olson박사에 의하면 그 중에서도 특히 개신교의 역할이 컸다. 사회 복지와 관련하여 칼빈에서 중요한 개념은 집사(Deacons) 제도이다. J.E. Olson, Deacons and Deaconesses through the Centuries (St. Louis: Concordia Publishing House, 2005), 107-149. 또한 다음을 보라. J.E. Olson, “De Zorg voor de armen en het leven van de vluchtelingen in het Geveve van Calvijn,” in: W. Balke, J. C. Klok, W. van’t Spijker, Johannes Calvijn: Zijn Leven, Zijn Werk (Kampen: Kok, 2008), pp. 155-158. 한편 칼빈의 집사 직무를 디아코니아와의 관계에서 고찰한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라. 황성철, “집사 직무에 대한 실천신학적 이해 연구: 칼빈의 집사 직무관의 적용과 Gerben Heitink의 방법론을 중심으로,” 「신학지남」vol. 274. (2003), pp. 127-169.
40) CO. 2. colm. 782. (Institutes: 1559, 4.3.8).
41) CO. 2. colm. 782. (Institutes: 1559, 4.3.8). “Duo autem sunt quae perpetuo manent: gubernatio et cura pauperum.”
42) CO. 2. colm. 783. (Institutes: 1559, 4.3.9). “Cura paupérum diaconis mandata fuit.”
43) CO. 2. colm. 783. (Institutes: 1559, 4.3.9). “Quanquam ad Romanos duo ponuntur genera. Qui largitur, inquit illic Paulus, id faciat in simplicitate; qui miseretur, in hilaritate. Quum de publicis ecclesiae muneribus eum loqui certum sit, oportet duos fuisse gradus distinctos.”
44) R.M. Kingdon, “Social Welfare in Calvin’s Geneva,” in: Articles on Calvin and Calvinism vol. 4. Calvin’s Work in Geneva (New York and London: Garland Publishing Inc., 1992), pp. 22-41.
45) J.E. Olson, “Calvin and social-ethical issues,” in: The Cambridge Companion to John Calvin, (ed.) D.K. McKim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 163-167.
46) OS. I. IV. 149. Institutues (1536), IV. C. 40.
47) R.M. Kingdon, “Social Welfare in Calvin’s Geneva,” in: Articles on Calvin and Calvinism vol. 4. Calvin’s Work in Geneva (New York and London: Garland Publishing Inc., 1992), pp. 22-41.
48) E.A.McKee, John Calvin on the Diaconate and Liturgical Almsgiving (Geneva: Droz, 1984), 106-109.
49) J.E. Olson, Calvin and Social Welfare (Selinsgrove: Susquehanna University Press, 1989), pp. 107-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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