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 그 단어는 영원한 숙제이자, 문제입니다. 그러나 혹 갱년기를 우리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비유로 말씀드린다면 이럴 것입니다. 즉 봄에서 여름으로 들어갈 때 환절기가 오듯이 사춘기가 그렇습니다. 그 후 가을에서 겨울로 들어가는 길목에 환절기라는 불청객이 문득 찾아오듯이 갱년기가 그렇습니다.

갱년기가 오면 남편이 이유 없이 꼴도 보기 싫습니다. 남편이 위로해 준다며 말하는 것도 싫고, 말하지 않으면 더 싫습니다. 드라마 밤샘 보기, 또한 집에서 게걸스럽게 먹기, 그것도 부족하여 맛 집 순례를 해 보아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십견으로 생고생하며 얼굴이 아무 곳에서나 벌게지며 몸도 후끈거려 미칠 지경입니다.

특히 ‘나란 존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철학자가 된 듯 하지만 해답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해 왔던 교회 생활, 봉사사역도 다 부질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시도 때도 없이 남편인 자기와 자녀들에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하면서도 자기만 외롭고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니 남편은 집에 들어가는 것이 지옥입니다. ‘내가 뭐 잘못한 것이 있나?’

실은 남편도 과거 사춘기가 있었듯이 사추기인 갱년기를 겪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에게 “니만 겪고 있냐? 나도 힘들다!” “혼자 유난 떠네. 좀 그만해라!”라고 말도 못합니다. 밥이라도 얻어먹으려면 말입니다. 그래서 남편들은 티를 내지도 못하고 스스로 사추기, 갱년기를 이겨내려고 나름대로 몸부림칩니다.

기독남편이 갱년기를 넘어가는 아내에게 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이 있을까요? 특별한 대응보다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 기도하며,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은 결코 무능한 남편의 자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성도님에게 그것을 나에게 맡기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해결해 주시며 동행해 주실 것을 언약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행동은 문자 혹은 편지를 써 보내는 것입니다. 특히 지금과 같은 세상에는 문자보다 일곱 배의 능력과 치유가 있는 것이 바로 편지입니다. 그 이유는 문자가 통조림이라면 편지는 활어입니다. 문자가 조화라면 편지는 생화입니다. 문자가 향기 없는 꽃이라면 편지는 향기 나는 꽃입니다. 문자가 재방송 드라마라면 편지는 감동을 전달하는 본방 드라마와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우체통은 1993년에는 약 5만 7000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약 2만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체통은 지난 3개월 동안 투입되는 편지가 한 개도 없으면 자동 폐기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편지를 많이 쓰거나 보내지 않는 시대에서 기독 남편으로서 갱년기로, 혹은 그 무슨 문제로 힘들어 하는 아내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면 그 결과는 생각보다 놀라울 것입니다.

왜 우체통은 빨간 색일까요? 여러 정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정의를 좋아합니다. '그리움이 심장 핏빛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힘들게 하루하루를 이겨내는 아내에게 편지를 써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진한 감동을 받고 회복될 때가 있습니다. 그 많은 이유 중 중요한 것은 성경이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영적 신부인 성도님에게 보내시는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이신 이해인 수녀님은 편지는 자신의 목숨 한 조각을 떼어 주는 행위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시어머님께, 자부에게 편지를 써 보는 한주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진정한 신앙은 깨닫는 것을 실천하는 것임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교갱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