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어 한 알의 밀이 되는 것.
그것은 예수님이 친히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예언한 것으로,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을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하신 은혜를 말씀하심이다. ‘복음을 위하여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던 바울의 결단과 죽음은 기독교인들의 본이 아닌가.

한국에 복음이 전래되던 초기 성도들은 어려운 때에도 믿음의 정절, 순결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 가운데 한 분 염광 박관준(鹽光 朴寬俊(1875-1945.3) 장로를 생각해본다.

‘人生有一死 何不死於死/ 君獨死於死 千秋死不死/ 時來死不死 生樂不加死/ 耶蘇爲我死 我爲耶蘇死-인생은 한 번 죽을 때가 있으니/ 어찌 죽을 때에 죽지 않으리/ 그대 홀로 죽을 때에 죽었으니/ 천추에 죽어서도 죽지 않음이라/ 죽을 때가 와도 죽지 않으면/ 살아서 즐거움이 죽음만 같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으니/ 이번엔 내가 주를 위해 죽으리라.’

박 장로님이 조선총독부의 만행을 보면서도 믿음을 지켜 죽기로 작정했던 고백이다.
1938년 9월 9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평양에서 열려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일본의 강압으로 어쩔 수 없이 그런 결의를 했다지만 많은 목사님과 평신도들이 통곡하며 슬퍼했고, 순교의 제물이 되면서라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우상 앞에 절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박 장로님도 그런 결단의 표로 한 전도사에게 이 한시(漢詩)를 써 주었다.

조선총독부가 총대들을 겁박해서 총회의 신사참배 거부를 가로막으려했다.
박 장로님은 총회에 참석하는 목사 장로들께 배포할 ‘반대 투쟁 격문’을 준비했다. 총회 당일 회의 장소에서 배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전날 주기철 목사님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어 그 일은 실패하고 말았다.
박 장로는 그동안 총독을 방문해서 경고도 하고, 때로는 진정서를 올려 ‘기독교를 핍박하는 일본’이 파멸하리라 경고했다. 사람들은 그의 그런 담대함을 보고 ‘조선의 엘리야’라 부르기도 했다.

다음은 진정서 한 부분이다.
“소생이… 벌써 6회를 통하여 정부를 내방한 바…우가끼 총독 시대에 2회, 현금 각하 부임 이후에 이번까지 4회로 충고 직간하려고 일부러 찾아온 것은 진실로 국가와 인민을 위함입니다…원컨대 각하는 묵사만념(黙思萬念)하여 조선 기독교에 문제 된 신사참배는 교회 자유에 방임(放任) 함으로써 정부는 관계하지 마시기를 거듭 열혈히 충간하는 바입니다……. 정부가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피를 흘려 충고하면서 까지라도 마침내 이해시키고야 말 것입니다. 주 강생 1938년 5월 27일 위천위인생(爲天爲人生) 박관준”

이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일본 당국은 교회를 짓눌렀다.
박 장로님은 조선교회의 실상을 일본에 알리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9년 3월 24일 중의원 의사당. 5백 명 의석과 1천여 방청객이 모이고 의장은 개회 방망이를 울렸다. 그 순간 벽력같은 소리가 들렸다. “여호와 하나님의 대사명이다!”(에호바 가미사마노 다이시메이다!) 동시에 경고문 두루마리를 담은 봉투가 의사당 중앙에 던져졌다. 의사당은 소란이 일었다. 2층 방청석 앞줄에 앉았던 박관준 장로의 큰 외침이었던 것이다.
그는 즉석에서 체포되고 동행한 아들 박영창과 안이숙도 체포되었다. 30여 일 조사를 받고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박 장로님은 6년 옥살이 끝에 순교했다. 1945년 8월이 일본이 망하는 해라고 경고했지만 그 성취를 보지 못하고 그해 3월 1일 하늘나라로 갔다. 그는 30세에 예수를 영접하고 70세에 순교하기까지 믿음의 정절을 굳게 지켰던 한국 교회의 역사적 인물이다.

“이 세상 이 세상 나의 집은 아니요 우리 구주 머지않아 다시 오실 때 천사들은 하늘에서 날 오라고 부르니 나는요 이 땅에 있을 맘 없어요” 일사각오(一死覺悟) 믿음을 지켜 온 한국 교회의 아름다운 찬양이다.

불같은 연단 없이 정금 믿음 없고, 십자가 없는 영광도 없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내 모습 살피며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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