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드디어 겨우내 움츠렸던 만물이 소생하는 은총의 계절 봄이다.

필자는 5월에 열릴 마라톤대회의 준비를 위하여 도심 속에 조성된 수목원을 아침에 빠른 걸음으로 거닐어 본다. 아직 완연한 봄은 아니지만, 나를 맞이하는 봄꽃을 보면서 자연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가슴에 담는다. 때로 집착하고, 때로 갈등하고, 때로 아파하는 목회자의 마음과는 상관이 없는 듯한 봄꽃의 엷은 미소를 통하여 주님의 치료하는 손길을 경험한다.

필자의 마음을 터치하는 들꽃의 교훈을 정리해 본다.

 

첫째, 꽃들은 비교하지 않는다.

꽃의 세계에는 인간세계에서 벌어지는 대형교회, 소형교회의 진영논리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장미가 진달래가 되고 싶어 했다거나, 목련이 땅으로 내려와 개나리가 되고 싶어 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없다. 화려한 꽃과 소박한 꽃이 각자 스크럼을 짜고 상호 연대하여 상대를 배타하는 기사 역시 읽은 적이 없다. 한국 교회의 목회현장을 조각내는 진영논리에 휘둘리는 가슴 아픈 일이 꽃의 세계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숫자에 집착하는 목사의 자화상은 어디로부터 출발했나.

 

둘째, 직분에 충성한다.

서로 비교하지 않으니 본분을 망각할리 없다. 어느 들꽃이 자기 마음대로 근무지 이탈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세우신 자리와 심겨진 곳에서 꽃을 피울 뿐이다(Bloom where you are planted). 주님 정해주신 자리에서 본분을 감당하는 것이 충성 그 자체가 아니던가.

목회자의 세계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일중의 하나가 위임식한 이후 잉크도 채 마르기전에 다른 사역지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이다.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꽃보다 할배’ ‘꽃보다 청춘’ ‘꽃보다 누나’ 혹은 ‘꽃보다 목회자’라면 꽃들은 대노할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시대의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결코 충성하지 않는 인간 군상을 바라보면서 꽃들이 뭐라고 할 것인가?

 

셋째, 스스로 만족한다.

꽃들은 본능적으로 창조주와 창조질서에 순종체질이 되어 화답하니 애초에 불만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 만족함만 있을 뿐이다. 우리네의 흔들리는 가정과 목회현장을 보면 불만투성이이다.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노동계는 노동계대로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기업가는 기업가대로 서로에 대한 불만이 충천한 현실을 볼 때 어떻게 꽃들로부터 배우지 않겠는가?

각 교단에서 벌어지는 목회자 세계의 스캔들의 민낯은 스스로 만족감이 없는 변질된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소명이 희미하니 사명이 흔들리고 사명이 흔들리니 만족함은 저 멀리 달아나 버린다. 남다른 주님의 은총을 받은 우리 대한민국이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로 계층간의 갈등을 부추기니 만족이란 단어는 깃들 곳이 없어진다.

 

넷째, 어울리기를 잘한다.

연합과 일치를 주야로 부르짖는 교회는 연합과 일치가 요원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목회자들이 지역과 교단의 벽을 뛰어 넘어 진정한 연합과 일치 곧 진정한 형제우애의 정신을 실천한다면 세상은 귀 기울여 교회로부터 메시지를 받을 것이다. 꽃들은 동종이 군락을 이루든지 아니면 다른 종류의 꽃들과 만나든지 어울리기를 잘한다. 다수라고 횡포를 부리는 일도 없고 소수라고 뛰쳐나가지도 않는다.

필자는 오늘도 이름 모를 봄꽃을 통하여 주시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통하여 필자 자신의 구부러지기를 잘하고, 쉬이 변질되는 심령의 상태를 관찰하는 은혜를 받고 있다.

 

도대체 언제쯤 존재를 반영하는 향기와 색깔과 내면의 만족함을 간직한 꽃 같은 목사로 세워질 것인가? 갑자기 마음이 간절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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