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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차] AI(인공지능) 시대의 목회윤리(2016/08/23) 제21차 영성수련회 주제특강

1. AI(인공지능) 프로젝트

1)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이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이란 용어는 1955년에 미국의 컴퓨터 과학자이자 인지과학자인 존 메카시(John McCarthy)가 ‘지능을 가진 기계들을 만드는 과학과 기술’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하면서부터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때로부터 그와 그의 동료들이 기하학의 공식을 증명하거나 체스를 둘 수 있는 대학교 신입생 수준의 실력을 갖춘 AI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작업에 착수함으로써 초기 단계의 AI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1

최근 구글 딥마인드(Google DeepMind)에서 개발한 바둑 프로그램인 알파고(AlphaGo)의 활약으로 인해 사회 전반에 걸쳐 AI가 갑작스럽게 등장한 인상을 주고 있지만, 사실 AI는 예상하지 못한 채 갑자기 등장한 혜성과 같은 존재도, 예측할 수 없는 막연한 미확인 비행물체(UFO)와 같은 존재도 아니다. AI의 등장은 그동안 첨단 테크놀로지의 발전 과정 속에서 나타나게 된 예상되고 예측된 결과이다. 단지 그 등장하는 속도가 그 예상과 예측보다 급격히 빨라지고 있기 때문에 ‘예상하지 못한,’ 혹은 ‘예측할 수 없는’과 같은 수식어가 붙는 것이 어색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2) AI 프로젝트의 형성 배경

그러므로 AI를 말하기 위해서는 20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현대 테크놀로지의 발전 과정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세기의 테크놀로지는 NBC, 즉 핵(Nuclear), 생물(Biological), 화학(Chemical) 공학이라는 세 가지 테크놀로지로 대표된다. 이 세 가지 테크놀로지를 주축으로 20세기 과학기술은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컴퓨터학자 빌 조이(Bill Joy)는 21세기를 대표하는 첨단 테크놀로지가 더 이상 NBC가 아닌 GNR, 즉 유전학(Genetics), 나노기술(Nanotechnology), 로봇공학(Robotics)이라고 단언했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사항은 20세기 첨단 테크놀로지를 NBC 세 가지로 요약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던 반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가는 21세기 첨단 테크놀로지를 GNR 세 가지로만 요약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런 이유에서 2002년 미국 과학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의 보고서는 GNR에 추가하여 정보기술(Information Technology, IT)과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도 21세기의 대표적인 첨단 테크놀로지로 포함시켰다.

AI는 위의 첨단 테크놀로지들의 총체이자, 실체이자, 그 지향하는 최종 목표이다. 특별히 위에 언급된 테크놀로지들 중 인터넷 기술을 포함하는 정보기술(IT)과 뇌 과학 혹은 신경과학(Neuroscience)을 포함하는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은 주로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에 주된 관심을 두고 있는 알파고와 같은 AI를 창출해내는 선두 주자들이라 할 수 있다.3 쉽게 말해보면, 알파고는 모든 최신 전자 장치들을 인터넷에 연결하는 사물 인터넷(Internet of Things, IoT) 기술에 기반하여, 엄청난 양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빅 데이터(big date)를 자산으로 삼아, 인간의 사고 유형과 유사한 학습 방식을 따르는 머신 러닝(machine learning)을 컴퓨터에게 부과함으로써 주어진 문제 또는 상황에 대하여 컴퓨터 스스로가 답이나 결론을 도출해내도록 하는, 정보기술과 인지과학과 같은 첨단 테크놀로지들이 만들어낸 AI 프로젝트의 산물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AI 프로젝트는 엄청난 발전을 거듭하여 왔고 이제는 사회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으나, 그 목표에 비추어볼 때면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왜냐하면 이를 이끌어온 첨단 과학자들과 미래학자들은 AI 프로젝트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그 최종 목표를 단순히 ‘인간처럼’만이 아니라 ‘인간을 넘어서’ 이상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2. 인간처럼(Human-like)

1) AI 프로젝트의 목표 "인간처럼"

AI 프로젝트의 1차 목표는 ‘인간처럼’ 되는 것이었다. 특별히 주된 관심은 인간 같은 사고가 가능한 인공지능이었다. 인간과 같은 지능에 대한 관심은 1950년에 영국의 수학자이자 컴퓨터 과학자인 앨런 튜링(Alan Turing)이 철학 학술지 Mind에 게재한 논문 "계산 기계와 지능"에서 제시한 튜링 테스트(Turing test, 기계(컴퓨터)가 인공지능을 갖추었는지 판별하는 실험으로 1950년 영국의 앨런 튜링이 제안하였다. - 편집자 주[두산백과])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이 테스트의 핵심은, 질문자인 사람이 어떠한 질문을 하였을 때 그 질문에 대해 대답한 기계(컴퓨터)의 답이 인간에 의한 답인지 기계에 의한 답인지 분별할 수 없는 수준일 때 그 기계는 인간의 지능 수준을 가진 기계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튜링에 의해 제시된 테스트의 대표적인 초기 버전은 이미테이션 게임(Imitation Game)인데, 이 게임이 제시된 후 64년 만에 러시아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인 유진 구스트만(Eugene Goostman)이, 물론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2014년에 이 게임(테스트)을 통과해 큰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2014년에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유진 구스트만.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미테이션 게임의 이름 속에 들어있는 단어인 ‘모방’(imitation)이 말해주듯 AI 프로젝트는 인간을 모방하여 인간처럼 생각하는 기계(컴퓨터)를 만드는 것을 1차 목표로 삼고 있다. 현재 그 모방을 바둑이라는 게임 속에서 이루어낸 AI 프로그램이 바로 알파고이다. 이처럼 인간을 모방하여 ‘인간의 이미지(형상)’를 기계 속에 담아내려는 AI 프로젝트의 노력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하는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형상’ 담론과 교차된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인 인간'에 대한 기독교 신학적 담론과 ‘인간의 형상을 닮은 존재인 AI’에 대한 현대 과학기술의 담론이 서로 교차된다는 것이다.


2)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전통적인 신학의 담론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의 기본 논의는 창세기 1장 26-27절,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형상과 모양으로 번역된 두 히브리어 단어 데무트(likeness)와 첼렘(image)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그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하게 만들어진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성서의 표현이자 어휘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다. 첫째, 실재적(substantive) 해석으로서 이는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시작하여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집중적으로 조명된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 개념으로부터 기인한다. 이에 따르면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은 실재적으로 서로 유사성이 있다. 그 유사한 본질의 대표적인 특성은 이성이다. 이성은 인간만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고유한 능력이다.

둘째, 기능적(functional) 해석으로서 이를 대표하는 현대 신학자는 폰 라드(Gerhard von Rad)이다. 그는 위의 실재적 해석이 하나님의 형상 속에 들어있는 인간의 자기 초월적 능력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정신적일뿐 아니라 육체적인 한계도 지니고 피조된 인간과 창조자 하나님 사이에는 언제나 존재론적 차이(ontological difference)가 있기에 하나님의 형상은 실재적 유사성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인간이 그분의 뜻을 감당해가는 기능적인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셋째, 관계적(relational) 해석으로서 대표적인 현대 신학자로 칼 바르트(Karl Barth)를 들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창세기 1장 26절,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에서 하나님은 그의 형상 속에서 그 자신을 나타내고 있다. 즉 복수로 표현된 ‘우리’라는 표현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의 삼위일체적 관계성을 스스로 나타내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이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관계성을 나타내고 있기에, 그 속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존재적 유비가 들어갈 공간은 없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은 오직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삼위일체적 관계성이 인간을 향한 그의 관계성으로 확장될 때에만 가능하다. 다행이도 하나님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향하여 그의 관계성을 확장시켜 나가신다.


3)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 AI를 만드는 인간

위의 세 가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신학적 해석들 중 관계적 해석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과 유사한 방식으로서 인간과 AI 사이의 관계성의 담론을 가능케 한다. 신학과 컴퓨터과학의 연결을 시도하는 미국의 노린 헐즈펠드(Noreen L. Herzfeld)는 전통적인 신학의 주제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과 AI 프로젝트에 의해 추진되는 인간의 형상(imago hominis)을 비교 분석한다. In Our Image (2002)에서 그녀는 "왜 과학자들은 AI를 만들어내려고 애쓰고 있나?"2라는 근본 질문을 던지면서 이를 하나님의 형상의 신학적 담론과 연결시킨다. 이 질문의 답을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이 그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했듯이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도 그 스스로를 닮은 존재를 창조하려는 본성을 지니고 있고, 그러한 본성적 창조의 욕구가 첨단 테크놀로지인 AI 프로젝트를 통해 표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강의 중인 노린 헐즈펠드 박사와 그의 책 In Our Image.

이러한 논리가 신학적으로 도전이 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피조물인 인간이 스스로 창조자가 되려는 데에 있다. 사실 이러한 과학 문명의 도전은 그동안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대표적인 현대적 도전이라면, 20세기에는 NBC 중 생물(Biological) 공학이, 21세기에는 GNR 중 유전학(Genetics)이 주축이 되어 추진해온 인공수정, 게놈 프로젝트, 유전자 조작, 인간 복제 기술 등이 있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사로 볼 때 이러한 도전들과 AI 프로젝트가 별개가 아닌 동일선상의 발전 과정 속에 있기는 하나, 양자의 도전 방식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가 이미 존재하는, 즉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의 일부분이라도 사용하여 그로부터 만들어내는 재생(reproduction)으로서의 창조를 시도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그것조차 사용하지 않고 단지 그 창조의 패러다임을 모방(imitation)만함으로써 인간의 독자적인 재창조(re-creation)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자면, 현재 과학기술 수준에서는 유전 공학의 최첨단 프로젝트인 인간 복제 기술조차 이미 창조된 피조물 인간의 최소한 하나의 세포나 핵이나 DNA 조각이라도 이용하여 재생 인간(reproductive human)을 만들어내려 하지만, 인간의 지능을 좇아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려는 AI 프로젝트는 인간의 사고방식을 모방만할 뿐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어떠한 요소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지 않고도 재창조적 존재(re-creative being), 즉 AI를 직접 만들어내고자 한다.


4) 인간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형상', AI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의 담론이 강력한 신의 창조론의 틀 속에서 논의될 수 있는 이유는 인간 속에 신의 형상이 어떠한 형태로든 담겨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최소한의 어떠한 요소를 사용하여 창조된(정확히 말하면 재생된) 존재는 인간의 형상이 담겨있다고 말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며, 존재적 유비가 있다고 말하여도 완전히 반박하기 힘들 것이고, 더 나아가 그 형상과 유비의 근원이 되는 인간의 창조자 하나님, 그리고 그의 창조 질서(혹은 기능적 해석에서 말하는 신의 섭리)와 전혀 연결점이 없는 존재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반면 알파고와 같은 AI는 인간의 사고방식을 모방만 했을 뿐 실제로는 뇌를 통한 인간의 사고체계와는 상관없다. 컴퓨터의 연산과 운영체계를 통해 스스로의 독자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지능체로서의 결과를 도출해낸다. 때문에, 이런 유형의 AI는 인간이 인간을 투영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제작의 의도와 제작자로서의 권한, 그리고 제작된 사고의 패러다임의 유사성에 근거해서만 인간의 형상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유형의 인간의 형상이 그 근원인 하나님의 형상에 기인한다고까지 연결시켜 말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신학적 논의로부터 출발하였으나 논의의 끝에 남는 것은 단지 아련한(ambiguous) 인간의 형상뿐이며, 결국 AI의 인간의 형상 담론 속에서 기존의 하나님의 형상의 신학적 담론이 들어설 자리는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인간지향적(man-oriented) AI 테크놀로지의 형상화(technological imagination) 담론을 향하여 신지향적(God-oriented) 기독교 신학의 형상화(theological imagination) 담론이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가장 기본적인 대답으로서 인간의 형상 제작에 대한 전통적인 경고라 할 수 있는 출애굽기 20장 4절,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를 들 수 있다. 인간의 형상을 따라 AI 테크놀로지의 형상을 만들어내려는 모습 자체가 일단 십계명 제2계명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또한 현재 AI가 하나님을 대신하리만큼 우상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지는 않지만, 인간의 형상(지능)을 본떠서 만들어지는 AI가 앞으로 인간 지향적인 우상이 될 수 있는 여지가 크다는 점에서도 본 계명에 위배된다고 말할 수 있다.4

더불어 인간의 형상을 좇으려는 AI 프로젝트의 방향이 결국에는 인간 자신의 능력을 자만하게 만드는 ‘자기 우상 숭배’를 향하고 있다는 점을 신학은 미리 알려줄 필요가 있다. 케네스 벅스(Kenneth L. Vaux)에 따르면, “궁극적인 우상숭배는 자기도취(narcissism)이다.”5 하나님에게 집중하지 않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인간의 모습,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배제한 채 인간 자신의 모방(imitation)과 형상화(imagination)에만 관심을 갖는 것은 결국 인간의 자기 숭배로 치닫게 되고, 이는 분명 십계명 제2계명에 위배되리만큼 큰 죄악을 낳을 수 있다.

 


3. 인간을 넘어서(Transhuman)

알파고가 만들어진 동기가 ‘인간처럼’ 생각하는 바둑 프로그램이었을지 몰라도 그 결과는 사실 그 동기 속에 이미 처음부터 품어왔던 ‘인간을 넘어서’는 바둑 프로그램이었다. 인간 최고 프로 바둑기사와의 대국에서 4승 1패라는 대승을 거둔 알파고는, 인간처럼 생각하는 기계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는 AI 프로젝트의 초기 단계인 현재 상황을 훌쩍 뛰어넘어 벌써부터 인간을 넘어서는 AI의 높은 단계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형성시키고 있다. 한 번의 대국으로 한국기원으로부터 명예 프로 9단증을 수여 받으면서 당당히 세계 바둑 랭킹 2위에 오른 알파고를 “알사범”이라 부르면서 인간 프로기사들이 실제 대국에서 알사범의 새로운 방식을 따라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신문 기사는 인간처럼 생각하는 AI가 아니라 인간을 능가하는 지능을 지닌 AI, 그래서 오히려 인간들이 ‘AI처럼’ 되고자하는 AI 시대를 미리 예견해주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바둑에서만큼은 인간처럼 자유롭게 사고하는 알파고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인간을 넘어서는 AI의 미래 등장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이 많다. AI를 크게 두 부류로 구분하자면, 하나는 SF영화에 나오듯 자신을 지키고 위협을 물리칠 수 있는 자아를 지녀서 인간마저도 위협할 수 있는 강한(strong) AI이고, 다른 하나는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개발되어 인간의 요구에 부합하는 수준의 지능과 능력을 지닌 약한(weak) AI이다.

[그림 김동환 교수 제공]

물론 알파고는 바둑이라는 특정한 게임을 잘 수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된 약한 AI의 범주에 들어간다. 약한 AI의 등장도 아직 초보단계이기에 강한 AI가 등장하는 것은 먼 미래의 이야기라는 말이 물론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유념해야할 점은 이런 예측이 과학기술의 발전에서 거의 항상 그래왔듯이 그것이 제시되는 ‘현재’에서만 들어맞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예측과는 대조적으로 이미 2년 전인 2014년에 영국 BBC 방송을 통해 “AI가 최고조로 발전하게 되면 인류는 종말을 맞이할 수 있다”고 말한 저명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의 강한 AI의 등장에 대한 경고를 함부로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특별히 강한 AI의 등장이 불가능하리라는 입장에서 최근 제시되는 주된 내용은 아무리 AI가 발전해도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감성, 창조성, 예술성 등은 AI가 지닐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이 틀린 것이리라 예측할 수 있는 논거가 있는데, 그것은 AI의 기본 알고리즘인 머신 러닝(machine learning)이 사람처럼 ‘경험으로부터 학습’하여 ‘스스로 성능을 향상’하도록 짜여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AI에 빅 데이터를 입력하는 기본 작업은 인간이 해주지만, 그 다음에 빅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여 머신 러닝, 곧 자체 학습을 하는 것은 AI의 몫이기에, 결국 어떠한 결과가 도출될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알파고가 어느 순간에 어느 지점에다 바둑알을 놓을지를 구글 딥마인드의 제작자들조차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단순한 예이다. 더불어 감성 로봇 개발의 선두를 달리고 있는 일본에서 최근 문학상 공모전 1차 심사를 통과한 단편 소설이 AI에 의해 쓰여진 것이며, 아직 초기 개발 단계인데도 그 정확한 최종 문장을 제작자조차 예측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앞으로 감성, 창조성, 예술성을 지닌 AI가 등장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을 흔들리게 만든다.

[일본에서 문학상 공모전 1차 심사를 통과한 AI의 단편 소설의 첫 문장]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앞으로의 논의의 초점은 AI에게 감성, 창조성, 예술성이 가능한가를 넘어서서, 이를 결국 모두 이루어낸 AI가 과연 자유의지나 양심이나 도덕성까지도 지닐 수 있는가로 상향될 필요가 있으며, 만약 이 또한 지니게 된다면 AI에 대한 윤리적 담론까지도 형성되어야할 것이다. 이호근 교수는 최근 이러한 통찰을 지닌 글을 통하여, “생명과학분야의 기술개발에 생명윤리를 요구하는 것처럼 인공지능 분야도 ‘도덕적 기계(Moral Machines)'를 만들기 위한 윤리논쟁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담론을 형성시킬 수 있는 분야 중 하나는 분명 신학(특별히 도덕신학이나 기독교 윤리학)이기에 이에 대한 신학적 담론의 준비는 필수적이다.

십수년도 전에 미래 학자인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은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그 발전에 가속도가 붙는다는 ‘수확 가속의 법칙’(law of acceleration returns)에 근거하여, 현대 테크놀로지의 발전 속도를 추적해보면 하나의 신기술이 나타난 후 그 다음 신기술이 나타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기하급수적(exponential)으로 단축되고 있다고 예견했으며, 2005년에 그는 그러한 발전을 거듭하다가보면 인간이 도저히 예상할 수도 없을 특이점(singularity)이 올 것이며 그 때를 2045년 즈음으로 예측하였다. 그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특이점에 이르자마자 약한 AI의 시대는 순식간에 지나가게 되고 이제는 인간처럼 생각하려던 AI가 인간을 넘어서서 사고하게 되는 강한 AI의 시대가 급격히 도래 하게 된다.

[수확 가속의 법칙에 따라 현대 테크놀로지의 발전 속도를 추적한 그래프]

현재로서는 아직까지도 의구심이 들 수 있는, 인간을 넘어서는 AI에 대한 논의는 최근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을 통해 공론화되고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이라는 용어는 SF소설 Brave New World (1932)로 잘 알려진 알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형제 쥴리안 헉슬리(Julian Huxley)가 그의 저서 Religion Without Revelation (1927)에서 인간의 본성을 초월하는 가능성을 지칭하는 신념을 표현하기 위해 처음 사용하였다. 용어 속에 나타난 트랜스(trans-)는 기존 인간으로부터 다른 인간으로 전이(transition)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기존 인간을 초월하는(transcending) 인간을 뜻하기도 한다. 둘 모두가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기존의 전통적인 인간이 불완전함을 파악하고 첨단 테크놀로지의 도움으로 현존하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인간을 등장시키려는 것이다. 이 용어는 그 후 첨단 과학자들과 미래학자들에 의해 20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하여 첨단 테크놀로지를 통해 이루고자하는 미래 인류를 지향하는 새로운 학문적, 사회적 운동으로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옥스퍼드 대학의 철학자이자 미래학자이자인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에 의하면, 트랜스휴머니즘이란 과거 30년에 걸쳐 점차적으로 일어난 운동으로서 유전학, 정보기술, 나노기술, 인공지능과 같은 첨단 테크놀로지에 주요 관심을 두며, 이러한 테크놀로지들의 진보에 의해 인간의 신체와 인간의 제반 조건이 강화되는 기회들을 이해하고 평가하기 위한 다학문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의 자기초월을 향한 욕망은 기독교 휴머니즘과 그 출발선에서부터 차이를 보인다. 기독교 휴머니즘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피조성(creatureliness)로부터 시작하는 반면,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 자신이 논의의 출발점이 되며, 인간이 스스로를 초월하는 새로운 존재 곧 트랜스휴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극도로 인간 중심적인 창조성으로부터 시작한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대한 숙고를 통하여 피조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교만(pride)이며, 그 교만은 필연적으로 죄를 낳는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이해를 좇아 이러한 교만, 즉 피조성을 거부하는 인간의 교만이 원죄의 근원이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기독교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볼 때, 출발선에서부터 극도로 인간 지향적이며 인간 중심적 창조성을 지니고 있는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으로 하여금 교만이라는 죄성을 지니도록 만들어줄 수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 휴머니즘을 구성해낼 여지가 많다.

특이하면서도 주목해볼만한 점은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자신들의 인간중심적 휴머니즘을 말할 때 의도적이리만큼 신중심적 인간이해를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펼쳐나간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철학자이자 미래학자인 맥스 모어(Max More)는 트랜스휴머니즘을 지지하면서 인간의 자기초월의 삶 속에서는 결코 자기희생이나 초월적 존재들을 향한 예배가 일어날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 그동안 하나님의 개념은 압제적(oppressive)이었다고 단정한다. 엄밀히 말하면, 신학이 트랜스휴머니즘이 제시하는 인간중심적 인간이해가 기독교 휴머니즘의 신중심적 인간이해와 다르다는 이유에서 논쟁하거나 비판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처럼 자신의 인간중심적 인간이해를 피력하기 위하여 신중심적 기독교 인간이해를 표면적으로 비판하고 도전하는 경우라면, 신학은 최소한 자신의 인간이해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정면 도전과 비판에 대응하고 대답할 수 있는 신학적 담론을 구축해야할 필요가 있다.

특별히 첨단 테크놀로지들의 총체라 할 수 있는 AI 프로젝트를 사변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정당화시켜주는 역할을 트랜스휴머니즘을 제시하는 미래학자들이 감당하고 있기에, 갈수록 부각되어가는 그러한 담론의 형성을, 그 내용 속에서 실제로 도전받고 있는 기독교 신학이 넋 놓고 바라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인간처럼 되려는 AI 프로젝트가 인간을 넘어서려하는 것처럼, 기독교의 기본 개념인 하나님, 인간, 창조성 등을 사변적으로 건드리면서 이를 넘어서려는 트랜스휴머니즘의 담론의 형성에 신학은 부지런히 대처해야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위의 아우구스티누스-니버 계열의 피조성, 교만, 죄에 대한 신학적 성찰은 미래학자들의 도전에 대처하는 하나의 신학적 담론의 예시가 될 수 있다.

 


4. 신처럼(God-like)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후 알파고에게 붙여진 여러 별명들 중 “바둑의 신(神)”이라는 별명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AI 바둑 프로그램에 대해 그저 한번 신기해하며 붙여보고 지나가게 되는 별명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의미심장한 표현이다. 그 이유는 AI 프로젝트가 초기 단계에서부터 품고 있었던 최종 목표 단계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AI 프로젝트는 그동안의 모든 첨단 테크놀로지들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미래 과학기술 프로젝트이다. 여기에는 알파고와 같이 인간처럼 생각하는 기계(컴퓨터)를 만드는 분야뿐만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진행되어온 인간 자체를 강화시키려는 인간 강화 기술(Human Enhancement Technologies, HET)을 모두 포괄한다. HET의 1차 목표는 인공 팔, 인공 다리, 인공 심장 등 인간의 신체를 강화하는 것이었지만, 이 목표를 차근차근 실행해 가면서 자연스럽게 추구된 2차 목표는 그러한 강화 과정을 통하여 인간의 수명을 최대한 연장하는 것이 되었고, 인간의 수명을 최대한 연장하려 노력하면서 품게 된 최종 목표는 결국 ‘죽지 않는 것’이 되었다.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죽음을 종말로 여기는 과학의 논리 속에서 AI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최종 단계, 곧 과학기술의 유토피아(technological utopia)는 첨단 테크놀로지들의 도움을 받아 이 세상에서 수명을 무한히 연장시킴으로써 죽음을 무한정 연기하는 미래 인간(posthuman)들의 세상이다.

성서 속 아담과 하와의 에덴동산 이야기에 비추어볼 때, 첨단 테크놀로지를 활용하여 무한히 수명을 연장해서 죽지 않는 삶(immortal life)을 살려는 인간의 욕망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지상에서 수고한 후 죽음으로 귀결되는 삶을 살게 된 인간이, 다시금 에덴동산에 찾아들어와 생명나무의 열매까지도 따먹고 영생하려는 욕망으로 비유하여 볼 만하다. 성서에서 이러한 욕망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단호하다: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서,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서 먹고, 끝없이 살게 하여서는 안 된다”(창세기 3장 22절). 또한 이러한 도전을 미리 예견 하셨는지 하나님께서는 “그를 쫓아내신 다음에, 에덴동산의 동쪽에 그룹들을 세우시고, 빙빙 도는 불칼을 두셔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24절).

첨단 과학자들과 미래학자들이 수명 연장으로 죽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걸림돌이 되는 것으로서 제시하는 두 가지 사안은 ‘질병’과 ‘노화’이다. AI 프로젝트는 GNR 곧 유전학, 나노테크놀로지, 로봇공학을 통하여 인간의 질병들을 계속 정복해나가고 있으며, 그로인하여 노화를 최대한 억제함으로써 인간의 평균 수명을 지속적으로 늘리는 데에 성공해오고 있다. 만약 언젠가 질병과 노화를 모두 정복하게 된다면, 인간은 AI 프로젝트가 꿈꾸는 최종 단계인 죽지 않고 ‘끝없이 살게’ 되는 과학기술의 유토피아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질병과 노화는 성서가 말하는 ‘그룹들’과 ‘불칼’이다. 인간이 AI 프로젝트를 통해 최종 목표인 죽지 않고 끝없이 사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 그 목표를 가로막고 있는 질병과 노화를 정복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모습은, 마치 첨단 테크놀로지들로 무장한 사람이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기 위해 그 입구를 가로막고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그룹들과 빙빙 도는 불칼을 물리치고자 전력투구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만약 그러하다면, 이러한 도전은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 인간의 최고의 도전이 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한편 신체 부위를 아무리 강화하여 기계로 대체시킨다 해도 죽음을 무한히 미루는 것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이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하나의 방책은 유한한 육신을 과감히 포기하고 정신을 통하여 영원히 사는 것을 시도하는 것이다. 뇌의 기억을 최고로 집약된 컴퓨터 나노칩 속에 저장함으로써 육체가 아닌 정신 상태로의 무한한 삶을 시도하려는 뇌 다운로드 기술은 비록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이러한 시도의 첫 걸음이다. 앞서 살펴본 트랜스휴머니즘이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인간의 모습 또한 육체 없이(bodiless) 정신으로서 영생하는 미래 인간이다. 카네기 멜론 대학 로봇공학과의 연구가이자 미래학자인 한스 모라백(Hans Moravec)은 이미 십수년전에 그의 책 Mind Children (1988)에서 육체가 없는 초인공지능(super-intelligence)으로서의 미래 인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이와는 달리 성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육과 영을 함께 지닌 통전적인 존재로서 창조하셨음을 분명히 말한다. 이에 근거하여 기독교 신학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 사건은 영으로서뿐 아니라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었으며, 따라서 영으로서뿐 아니라 육체를 지닌 인간을 향한 그의 통전적인 존재론적 구원 사건이었음을 제시한다. 이에 비추어볼 때, 육체를 벗어던지고 정신으로서 영생하려는 AI 프로젝트의 궁극적인 시도는 하나님의 인간 창조 사건에 대한 도전일 뿐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 대한 도전이다. 기독교 전통 속에서 보면, 육체를 비하하고 정신만을 추구하려는 AI 프로젝트의 시도는, 마치 초기 기독교 시대에 육신을 입은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영으로서의 그리스도만을 인정하려했던 영지주의의 지나친 시도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기독교 신학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AI 프로젝트의 도전에 반응해야할 뿐 아니라, 이처럼 과학기술적 영지주의(technological Gnosticism)의 가능성을 내면적으로 품고 있는 AI 프로젝트의 도전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야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육체를 포기하고 정신에 집중하여 과학기술적 영생을 꿈꾸는 AI 프로젝트의 야망은 과거에 기독교를 향한 과학자들의 도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 야망은 “물질적인 것에 집중하던 이전 과학자들이 존재자체를 거부하던 영적(spiritual) 세계를, 물질적인 것을 넘어서려하는 현대 과학자들이 정신적(mental) 세계를 통하여 유사하게 맛보려”하는 고난이도의 도전이다. 이 도전의 핵심은, 예전과는 달리 과학의 관심이 물질적인 것에서 물질 너머의 것, 곧 정신적인 것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심의 변화 속에서는, 물질적인 것을 다루는 것이 과학이고, 물질 너머의 것에 대하여 다루는 것이 종교라는 과거의 단순한 이원적 사고의 틀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물론 테크놀로지가 말하는 정신(mind)과 기독교가 말하는 영혼(soul)이 다르겠으나, 둘 모두가 물질 혹은 육체를 넘어서서 그 다음 단계를 바라본다는 점에서는 사실상 큰 차이가 없다.

이러한 ‘경계의 무너짐’에 대해 기독교 신학은 다시 그 경계를 정확히 그어주어야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AI 프로젝트가 말하는 수명의 무한한 연장을 통한 불사생(immortal life)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육신의 ‘죽음’을 전제로 하여 주어지는 기독교의 영생(eternal life)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주어야 한다. 또한 육체 없이 정신으로서 무한히 연명하며 영생하려는 AI 프로젝트의 유토피아는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펼쳐지는 영적 천국과는 결코 견줄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신학은 기독교의 ‘구원관’을 통해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이와 함께 알파고 수준의 AI가 등장하기 이미 5년 전에 미국 타임지가 커즈와일과 같은 미래학자들의 예견을 담아 ‘2045년에 인간이 죽지 않게 될 것’이라는 내용을 커버스토리로 올리고 있는 과학기술 사회의 현실 또한 기독교 신학은 민첩하게 인지해야 하고, 이러한 시대적 담론에 민감히 반응해야 한다. 특별히 수명 연장과 정신적 영생에 대해 AI 프로젝트가 만들어가고 있는 현대 사회적 담론을 향해 신학은 ‘죽음’과 ‘구원’의 기독교적 해석을 통하여 신학 나름대로의 현대적 담론을 제시해줄 수 있어야 한다.

김동환 교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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