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06) 한목협 제34차 열린대화마당

16세기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 가톨릭으로부터 개혁한 교회를 우리는 프로테스탄트 교회, 즉 개혁교회라 부른다. 이미 우리 교회 이름과 본질이 개혁이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단 이 개혁은 내년도만을 목표로 다룰 일이 아니다. 개혁은 이미 교회의 일상이어야 하고 교회의 정체성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왜 우리가 이 자리에 모였을까? 그만큼 개혁의 명분과 불가피성이 너무도 크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바뀌어지지 않으면 안될 절대절명의 사명을 공감하기 때문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경의 회복운동이었다. 독일어로 성경이 번역된 일은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오직 말씀만으로” 500년 전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개혁의 힘이 말씀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천 년 이상의 구교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만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말씀이 있어야 할 자리를 잃어버리고 대신 교황의 절대권력과 교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신교와 구교를 가름하는 종교개혁의 대사건은 실은 교회를 다시 회복하는 운동이었다. 주님의 몸을 세상에 다시 세우신 주님께서 개혁의 내용이 되고 목표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말씀과 교회 이 둘은 영원한 개혁의 콘텐츠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 총회에서는 종교개혁의 3대 원리를 종합한다는 뜻에서 “다시” 그리스도만으로!를 500주년 종교개혁의 슬로건으로 정하였다. 

먼저는 말씀을 개혁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말씀을 개혁하는 것이 성경을 다시 쓰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말씀의 두가지 기능을 분별해야 한다. 한국교회 개혁의 방향을 발제해 주신 목사님이 제일 먼저 교회가 무엇을 개혁할 것인가에 대해 오늘 한국교회가 과연 복음만을 전하고 있는가 하고 질문하셨다. 이 물음은 우리 모두가 우리의 현실과 제도 등 우리 정체성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껍질을 벗겨내고 새롭게 고쳐야 할  명분을 재고하게 하는 물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돌려 말하자면 한국교회 130년 역사는 교회 본질인 복음에서부터 어느 정도 빗나가 있다는 말이다. 복음을 선포해야 할 교회가 율법을 강조하고 없던 율법까지도 정하여 철저히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차별화하려고 시도했다는 말이다. 율법을 통해 자신의 허물을 깨닫게 하였다면, 즉 상처 난 곳에 소독약을 발라주었다면 이 번엔 상처를 아물게 하는 연고를 발라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나를 돌아보아야 한다. 교회가 진정한 안식처로써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자문해야 할 것이다. 누구나 차별없이 그리고 당당하게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안에서 쉼을 누릴 수 있도록 교회의 조직과 행정을 과감하게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율법과 복음은 한 편의 설교 속에서도 반드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이것은 강단의 개혁이 시급한 과제라는 말이다. 물론 값싼 복음과 은혜를 남발하지 않도록 항상 강단이 긴장하며 깨어있어야 한다.

두 번째는 교회가 개혁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발제자께서 지적해주신 한국교회 현황을 지적한 개교회주의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갖고 극복해야 할 중요한 과제라 여겨진다. 개 교회주의 야말로 이 사회로부터 교회가 개혁의 대상이 되는 핵심적인 과제다. 교단과 각종 신학대학교가 양산하는 목회자들이 지금도 참다운 복음중심적인 교회와 세속적인 가치들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동안 기본적인 목회윤리의식 조차 무시되는 무조건적인 경쟁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제는 이런 대책없는 개척정책을 손질해야 할 때가 되었다. 선교중심적인 교회 지원정책들을 고민해야 한다. 지역과 노회별로 이 문제들을 함께 고민하고 대책을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개혁의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고 말 것이다. 물론 이것은 물질만으로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희생과 자기 부정 등 성숙한 그리스도의 제자도를 발휘해야 한다. 교회를 교회가 되게 하는 소위 “공교회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교회가 위치한 지역사회와 나가서는 국가와 정부와도 필요에 따라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더 이상 교회와 세상이 운명적으로 원수지간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루터의 두왕국론에서 강조하는 바와 같이 교회와 사회는 하나님 나라의 왼손과 오른 손의 관계인 것을 확인해야 한다. 특히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정부정책을 교회가 적극적으로 협력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보다 더 투명하고 소명적인 자세를 갖고 대사회적인 복지선교정책을 위해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사회를 섬기고 특히 소외계층에 대한 정보를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아 교회가 서로 경쟁적으로가 아닌 서로 협력관계를 이루어 참여해야 한다. 그래서 먼저 한 지역교회가 그 교회 교인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사회 주민들로부터 칭찬을 받아야 한다. 초기 한국교회는 그 동네에서 인정받아 없어서는 안될 정도로 꼭 필요한 교회가 되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애국교회였다. 지금은 어떤가? 다시 그 때를 교회가 돌려놓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가 교회를 외면하고 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사회를 반목하고 만 것이다.

개혁의 대상이 하필 나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적인 명제다. 개혁에서 나를 제외하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루터도 1521.4.17.-18 브룸스의회에서 자신을 파문한 교황 레오10세가 위임한 황제 앞에서 “주여 내가 여기 서 있나이다. 나를 도우소서” 하고 기도했다. 자신의 목숨을 쥐고 있는 로마교회의 막강한 권력 앞에서 그는 상대가 되지 못했지만 루터는 그곳에 그냥 더 이상 혼자 서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를 세워 교회와 세상을 개혁하기를 원하셨던 주님께서 그를 그곳에 세우신 것이다. 유대교를 기독교로 개혁한 바울사도처럼 하나님은 루터를 세우시고 카톨릭 옛 기독교를 새로운 프로탄티즘(저항 또는 개혁) 기독교로 바꾸셨다. 500년, 이제 또 다른 루터가 이 시대를 분명히 바꾸어 갈 것이다. 누가 그 루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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