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22) 제21차 영성수련회 개회예배

1540년 10월 칼빈은 스트라우스버그를 떠나 보름스에서 개최된 제 3차 종교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 때 제네바 시 당국이 보낸 공문이 그에게 전달되었다. 제네바의 사신들이 수백 마일 말을 타고 스트라우스를 갔다가 다시 보름스로 와서 전달된 공문이었다. 공문의 표지에는 “To Doctor Calvin, Minister of the Gospel”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우리들의 훌륭한 형제와 특별한 친구: ...우리는 당신이 철저하게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말씀의 영광... 외에는 다른 욕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네바시의 소의회, 대의회, 총회원 모두는 아주 진지하게 기도합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와서 당신의 옛 자리를 회복하고 이전의 사역을 지속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거룩한 복음의 정진을 위한 유익이 있길 희망합니다. 우리 중에 많은 백성들이 당신을 크게 열망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당신이 만족할 수 있는 상황이 되도록 행동을 조치할 것입니다.”

당신의 좋은 친구들,
제네바의 평의원과 시의회, 1540년 10월 22일

공문 아래 제네바시의 인장이 왁스로 찍혀 있었고 그 위에 모토가 적혀 있었다. “Post Tenebra Spero Lucem - After Darkness I Hope for Light”

공문은 받은 칼빈은 앉은 채 울고 있었다. 그는 울음소리를 억누르기 위해 목이 잠길 지경이었다. 칼빈은 스트라스버그에서 같이 온 동료들의 충고를 듣기 위해 만나면서 눈물을 멈출 수가 없어서 자신의 말을 이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칼빈은 동료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도와 달라고 애절하게 간구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이나 자신을 생각지 말고 복음의 성장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무엇이 최선인지를 말해 달라고 하였다. 스타라스버그의 의회는 제네바의 초청을 알고 사자를 보름스에 보내어 칼빈이 제네바에 가는 것을 약속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 후 몇 개월 동안 제네바 시민들은 개인적으로 칼빈에게 서신을 보내 칼빈이 제네바에 속히 오도록 독려하였다. “Triumph, come quickly, brother come, come, that we may rejoice in God our Redeemer” 제네바 시를 떠났던 목사 한 사람도 “Do not say, ‘No’ You resist the Holy Spirit, not man. 당신이 프랑스에서 거둔 열매를 여기서도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하라. 제네바 교회가 너무나 중요하다. 아무도 당신처럼 현명하게 그리고 능력을 가지고 감당할 사람은 없다.”라고 했다. 이전에 칼빈을 대항하여 그를 쫓아낸 제네바의 두 명의 목사 중 한 명은, “Come, honored father in Christ, you belong to us, the Lord Himself has given you to us. Everyone signs for you.”라고 했다.   

이러한 동료와 시민들의 애절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제네바로 가는 것은 하루에 수천 번 죽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칼빈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제네바로 돌아갈 것을 독려하는 쯔리히의 목사들에게 “네 자신의 감정에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제네바로 가는 것 보다는 차라리 바다를 건너 멀리 도망가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칼빈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모든 주변의 환경이 칼빈을 제네바로 보내게 하였던 것이다. 칼빈은 결국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을 인식하면서 제네바 행을 결정을 하게 된다. 칼빈을 무척 사랑하던 마틴 부쳐는 칼빈에게 제네바가 안정되면 다시 스트라스버그에 돌아올 수 있도록 일시적인 방문으로 조치하였다. 그는 칼빈이 돌아올 수 있도록 시민권을 유지시키고 동시에 교수의 셀러리를 종전대로 지불하도록 시당국에 요청하였다.

1541년 9월 13일 화요일 칼빈은 초청이 있은 후 9개월이 지나서야 제네바에 입성하게 된다. 칼빈은 “slain scrifice”로 주님께 바쳐지는 심정으로 제네바에 입성하였다. 그는 수개월 동안 고민과 기도를 통해 소명의 다짐을 가진 후 허락하였던 것이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자신을 환영하는 이들의 내면에 자리 잡은 자신에 대한 그들의 숨겨진 적대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칼빈은 과거에 대한 모든 것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더 이상 과거에 대해 분노와 고통을 기억하지 않을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는 자신에게 십자가와 같은 지병들인 두통, 소화불량, 에스마, 그리고 담석증과 같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을 가기로 작정했다. 그는 스트라우스버그에서 시민권까지 얻어 누리던 편안한 삶을 포기하기로 했다. 사랑하는 아내와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았던 행복한 삶도 접기로 했다.

제네바 행을 결심한 칼빈에게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교회의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는 소명이었다. 그리고 제네바시를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의지였다. 왜냐하면 전 제네바시가 하나님의 나라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검정색 성직 복을 입은 칼빈은 25명의 제네바시의 소의회 위원들 앞에 섰다. 그는 3년 전에 떠났을 때 보다는 훨씬 권위 있고 관대하고 품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시의회원들도 칼빈은 이미 전 유럽인들의 입에 회자될 정도로 유명해진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시의회원들은 칼빈의 귀환을 환영하는 의미로 선물들을 제공했다. 털이 달린 새로운 가운을 준비하고 사노안로에 위치한 제네바 호수가 보이는 뒷 정원이 딸린  집도 마련해 주었다. 칼빈이 설교할 제네바 교회도 새롭게 단장했다. 강단도 우아하게 꾸몄다. 시 당국은 칼빈의 식구들을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모셔 오기 위해 두 말이 끄는 마차도 보냈다. 시의회의 회의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칼빈을 제네바에 항상 머물게 하기 위한 25명의 시의회원들의 단호한 조치였다.”

1541년 칼빈이 부임한 이틀 후 제네바의 베드로 교회에 특별 예배를 위해 사람들이 소집되었다. 시 당국자들이 검정색의 예복을 입고 전원 참석하였다. 칼빈은 새로 단장한 강단에 서서 위엄 있게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언급했다. “터키가 헝가리를 침략하고 있습니다. 전염병이 독일의 시와 농촌에 번져가고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박해의 불길이 치솟고 있습니다. 세상과 우리들의 형제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시를 보호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아멘.”

칼빈은 제네바로 다시 왔을 때 교회개혁을 위해 기독시민의 바른 삶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역설하였다. 이것이 그가 돌아온 이유이고 교회법과 치리회를 만든 이유였다고 천명하였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저를 여러분들의 목사로 원하신다면 여러분들의 생활의 무질서를 고치십시오. 만약 여러분들이 신실한 마음으로 저를 망명생활에서 다시 부르신 것이라면, 여러분 가운데 만연하고 있는 범죄와 방탕함을 제거하십시오. ... 제 생각에 복음의 제일 큰 적은 로마의 교황이나 이단이나, 미혹케 하는 자들이나 독재자가 아니고 나쁜 기독교인들입니다. ... 선행을 겸비하지 않은 죽은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악한 생활이 진리를 가장하고 행동이 말을 부끄럽게 한다면 진리 자체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제 저로 하여금 두 번째로 여러분들의 고장을 버리고 떠나 새로운 망명지에서 제 고통의 쓰라림을 삭히게 하시든가 교회 안에 법이 엄격하게 지켜지도록 해 주십시오. 순수한 훈련(discipline)이 재건되게 하소서.”

칼빈은 실로 치리회를 통해 시민의 악을 제거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교회와 사회의 질서를 회복시키려 하였다. “그는 춤, 도박, 주정, 술집 출입의 횟수, 방종, 사치, 접대 행위,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분수에 넘치는 의복 착용, 음란하거나 비 신앙적인 노래 등에 금지, 혹은 비난, 구금 형을 가하였다. 심지어는 잔치집의 접시까지 세며 규제했다. 주민들의 교회 참석 여부를 감독하는 사람이 파견되었으며, 교회 법원의 사람들이 가정을 1년에 한 차례씩 찾아가서 신앙상태를 점검하였으며, 심지어는 길거리에서 무심코 뱉은 말까지도 책임져야 했다.”

제네바를 방문한 존 낙스는 이렇게 변화되는 제네바를 “the perfect school of Christ”라고 하였다.

칼빈이 자신에게 지옥과 같은 제네바로 다시 돌아 온 한 가지 이유는 제네바시를 개혁하기 위해 “주의 일에 힘쓰는 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평생 soli deo gloria를 외쳤다. 칼빈의 결단은 자신을 비우는 뼈를 깎는 결단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1. 스트라스버그에서의 편안한 목회 생활을 접는다.
1. 아내와의 단란한 가정생활을 불확실한 미래의 운명에 맡긴다.
1. 자신이 가진 5가지의 질병도 무시해 버린다.
1. 자신을 사랑하고 교제하던 친구들과 헤어진다.
1. 대학교수직과 보장된 시민권까지 포기하게 된다.
1. 안정된 경제적인 생활을 떠나게 된다.
1. 사랑하고 아끼던 교인들을 떠나게 된다.

그는 다시 진흙탕과 같은 제네바로 온 것이다. 왜? 제네바 “교회개혁을 위해 힘쓰는 자”가 되기 위해. 칼빈에게 있어서 오직 주의 일에 힘쓰는 일은 부패한 제네바시와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1996년 3월 7일 140명의 합동측 목사들이 한국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교회갱신협의회를 출범시켰다. 그때의 결심은 신선하고 단호하였다. 그동안 교회의 정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이제 교갱협이 출발한 지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한국교회가 달라졌는가? 목회현장에 변화가 있는가? 합동측은 개혁되어 가고 있는가?

한국교회는 지난 20년간 달라지긴 했다. 불건전한 방향으로 많이 달라졌다. 한기총은 두 동강이 나고 교회는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이단들과 야합하여 해벌시켜 주었다. 목회현장은 변화가 있었는가? 목회현장도 많이 변화되었다. 교회의 위상이 추락되고 목회자의 평판이 바닥을 헤매고 있다. 목회 사역은 지난 20년간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목회자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다. 합동측은 개혁되어 가고 있는가? 합동측은 이전에는 한 두 명이 교단을 어지럽히더니 이제는 집단적으로 연계하여 교단을 부패의 늪으로 몰고 가고 있다. 총신과 총회는 정치 싸움에 얽혀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정치 목회자들의 도덕적 신앙양심은 마비되었고, 대부분 금권에 휘둘려 자리를 안배하고 뒷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 김영란 법 수준에서 본다면 진작 정리되어야 할 대상의 정치목사들이 수없이 활개를 치고 있다. 정치에 욕심이 있는 목회자들은 선악의 분별없이 이런 정치목사들과 야합한다. 명분은 있다. 이렇게 해서라도 정치권에 들어가 교단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이 되는 것처럼 들리지만 말이 안 된다. 호랑이는 짐승이다. 이런 호랑이한테는 통할 것이다. 그런데 정치목사들은 호랑보다 영리한 인간이다. 이들은 세력화하여 불랙홀처럼 사람을 빨아드린다. 성경은 이런 정치적인 꼼수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말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말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였다. 예수님도 “아니면 아니요”라고 분명한 태도를 보이라고 하였다.

칼빈이 제네바를 개혁하려고 했지만 제네바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칼빈이 개혁을 시도했던 것 보다 더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제네바 시민들은 칼빈을 다시 초청하여 강력한 개혁을 요구했던 것이다. 칼빈은 제네바에 봄이 올 희망이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 다시 입성하는 것은 십자가의 고통을 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말씀 앞에 순종한 것이다. 온 힘(죽을 힘)을 다해 주의 일에 매진해 보자고. 말씀이 칼빈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칼빈 연구가인 영국의 파커는 칼빈의 결단을 보면서 예수의 말씀을 인용한다. “나를 따르려는 자는 자기를 이기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점점 부패해 가고 쇠락해 가는 한국교회 앞에 선 사랑하는 교회갱신협의회 목사님들!! 특히 사랑하는 제자목사님들!! 고린도전서 15장 58절 말씀처럼 온 힘을 다해 일어서서 싸우면 교회를 다시 새롭게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의 일에 더욱 힘쓰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의 의미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죽을 힘을 다하라”는 의미입니다. 칼빈이 제네바를 개혁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한 것처럼 여러분이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교회를 새롭게 바로 세우기 위해 더욱 힘쓰야 할 이 시대의 결단은 무엇인가요? 칼빈처럼 케노시스(kenosis) 즉 자기 비움의 자라로 내려가야 합니다. 칼빈이 자기를 내려놓지 않았다면 제네바에 다시 갔을 리도 없고 제네바개혁이 일어나지도 아니했을 것입니다. 개혁교회도 태어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 뼈를 깎는 자기 성찰이 필요합니다. 목회자로서 누릴 것을 다 누리면서 부패한 교회가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은 공 염불과 같습니다. 개혁주의를 추구한다는 화려한 화술에 묻혀 모랄헤저드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교리로만 변증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증거하고 변증해야 합니다. ... 삶이 없는 변증은 위선이며 도덕성이 결여된 영성은 거짓 영성입니다. “Ad Fontes”라는 말이 있습니다. 근원으로 돌아가라는 개혁자들의 모토였습니다. 자기를 비우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갱신협의회도 20년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한국교회를 변화시키는 중추적인 역할을 다시 감당하는 목회자들의 연합운동이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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