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주 장로 이야기(5)

목이 탄다.
지독한 통증에 똥물을 마시고, 식량 한 줌이라도 아끼느라 배곯고, 직원들과 그들이 앞세운 원생에게 억울하게 폭행을 당했다. 시편 42편 ‘갈급한 사슴’ 같은 소록도 사람들이었다.

1953년 5월. 보리밭이 파랗게 춤출 때쯤,
‘치료’라는 희망의 빛을 따라 섬으로 들어간 18세 청년 고복남(가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강창석 시인이 쓴 고복남 장로의 자서전 [엄니의 희생]에는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언사들을 접할 수 있다. 나는 쓸 수 없는.
녹동에서 배를 타고 소록도로 건너는 밤바다는 추웠다. 동생리 선창에 내린 것은 자정쯤. 기다리던 사람들이 수동분무기로 DDT 가루를 온몸이 하얗게 살포했다. 남생리 마을에 배정되어 남자 독신 노약자 9명이 사는 22호사에 들어갔다.

고흥주 장로와 황영준 목사

다음날, 입원 수속을 하러 병원에 나가니 이번에 들어온 인원이 1백여 명이다. 병원에 소요사태(원장 퇴진운동)가 일어나서 많은 인원이 부상을 입고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들 구호는 ‘배고파 못 살겠다 원장은 물러가라’, ‘벌채 강제노동으로 사람 죽이는 원장 물러가라’, ‘치료 명분으로 사람 죽이는 원장은 물러가라.’였다. 갈등과 충돌을 짐작할 수 있는 구호들이다. 심한 긴장과 갈등이 있었다.

섬을 탈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러 이유였다. 나무토막이나 통을 붙들고 육지를 향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병원 당국은 병원선을 띄워 감시했다. 강제 수용으로 소록도에 들어왔다가 자유를 찾아 육지로 가려다가 중간에서 소용돌이 파도에 빨려 들어 죽거나 체포되었다. 지극히 소수가 육지에 올랐을 것이다.

교회에 출석하면서 믿음이 성장했다.
같은 방에 있는 분들이 소록도에 살려면 장로교회나 천주교회를 택해서 나가야 한다고 권유였다. 처음 찾은 남성교회의 영적 분위기가 뜨거웠다. 교인들이 손뼉을 치며 찬송가를 부르는데 얼굴들이 평온해 보였다. 복남이도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 날마다 새벽 기도와 낮기도(정오) 시간에도 참석했다. 예배가 소록도 사람들의 생활이었다.

집에서 다쳤던 다리 상처가 심해서 냄새가 심했다.
다리를 절단할까 싶어 늘 불안했다. 심하게 자통(신경통)을 겪을 때는 밤잠도 설쳤다. 친구가 명약이라며 똥물을 가져왔다. 복남이 코를 쥐고 마시게 했다. 다 토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다음 날은 진통이 멈췄다. 똥물 효험인 것 같았다. 병원이라도 의사 만나기도 약도 귀했다.

배워야 했다.
19세 청년이 초등학교 5학년에 들어갔다. 학교라고는 문턱에도 가보지 못 했던 그가 한센인 자녀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편입해서 공부를 했다. 중학교 공부도 했다.

맞기도 하고 갇히기도 했다.
친구가 자통을 앓고 있어서 갖고 있던 상비약을 나눠주었다. 고맙다며 돈을 찔러 주었다. 이것이 부정한 약장사라며 보도부로 끌려가서 심하게 구타를 당하고 조사를 받고 여러 달 감금실에 갇혔다. 억울해도 호소할 곳이 없었다.
자기 몸 추스르기도 어려운 사람이 오마도 간척지 공사에 동원되어 흙일도 했다. 장비도 없던 시절 맨몸으로 밤낮없이 흙을 파서 바다에 제방을 쌓았다. 바닷물에 몇 번이고 무너지는 어려움을 겪었다. 무너지는 흙더미에 여러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

교인들의 삶은 지극히 헌신적이었다.
1962년, 7개 교회를 동시에 건축했다. 준비된 건축비도 없이 공사를 시작했다. 성도들이 현장 일꾼이었다. 맹인은 리어카를 밀고, 손 마른 사람은 팔목을 모아 벽돌을 날랐다. 감각 없는 손이라서 피를 흘려도 아픈 줄 몰랐다. 벽돌에는 핏자국이 얼룩졌다. 뭉툭한 손목에 숟가락을 붕대고 감고 자갈을 주워 모았다. 새벽 기도를 마치면 잠시 밭일을 하고는 아침을 먹으면 공사장에 모여 땀을 쏟았다.
식량과 구호물자를 아껴서 헌금을 드렸다. 기 권사(남성교회)는 불편해서 자리에 누워 있다가 머리카락 장수를 불러서 머리카락을 팔았다. 고 권사도 그랬고, 다른 교회 여자 성도들도 그렇게 하였다. 그렇게 헌금이 드려져서 1963년 11월, 7개 교회가 입당할 때는 돈이 남았다는 기적 같은 보고를 했다.
예배당 건축 후로 예배시간마다 뜨거운 기도와 찬양으로 방언이 터지고 부흥의 역사가 일었다. 영적 분위기가 소록도를 덮었다.

고복남,
‘소록도 사람’으로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2015). ‘오직 믿음’으로 한 평생을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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