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10) 한목협 제33차 열린대화마당

 

▲ 5월 10일(화) 오후3시 덕수교회에서 열린 한목협 제33차 열린대화마당에서 前 총신대신대원장 및 부총장 심창섭 교수가 "칼빈의 종교개혁과 시민사회개혁"을 주제로 첫번째 발제를 하고 있다.

I. 서언

한국교회가 소용돌이치고 있다. 3고 시대의 터널에 갇혀 있다. 교인수의 고갈, 교회 재정의 고갈, 그리고 신앙 열기의 고갈이 그것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교회가 성장과 더불어 자만해져서 영적 교만, 교권투쟁, 분열의 역사, 물질 만능주의 그리고 모랄 헤저드에 빠졌던 결과이다.  중세 1000년 간 성장한 로마 가톨릭 교회가 교황 권(교권)의 신장, 물질 만능주의 그리고 성직자의 모랄 헤저드로 인해 세속화된 현상과 유사하다. 종교개혁자들은 부패한 중세기독교를 바로 세우기 위해 16세기 교회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엄밀히 검토해 보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단순히 교회의 부패만을 개혁하려고 하지 아니했다. 부패한 중세 기독교를 참다운 기독교로 다시 바로 세우기 위해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고 나온 것이다. 그래서 16세기 교회개혁을 사회개혁과 분리된 개념으로 이해하거나 해석할 수가 없다. 즉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교회개혁을 할 때 사회개혁과 전혀 무관한 종교개혁을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이런 맥락해서 종교개혁을 조명해 보면 종교개혁이 시민사회개혁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특히 칼빈의 종교개혁의 요람지였던 제네바 시의 종교개혁이 대표적이다. 당시 사회개혁과 무관했던 종교개혁을 시도한 종파들은 재세례파였고 이들은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개신교는 이러한 종교개혁의 포괄적인 의미를 간과하고 정교분리라는 미국 건국초기의 종교정책을 잘 못 이해하여 교회의 사회적인 기능을 많이 약화 내지 상실하였던 것이다. 종교개혁의 정황적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현실을 조명해 본다면 두 가지 관점에서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의 정신에서 이탈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교회내의 부패와 사회개혁 영향의 미진한 점이다. 이 두 가지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한국교회의 당면한 과제이다.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의 주제인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도 회복되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본고를 통해 16세기 종교개혁자 칼빈의 종·사 개혁을 위한 몸부림을 살펴보고 새로운 500년을 향한 한국개신교의 모습 다듬기를 위한 방향을 제시하려 한다. 본고는 두 분야로 연구되어질 것이다. 첫 단원은 칼빈의 제네바 종교사회 개혁을 다룰 것이고 두 번째 단원은 칼빈의 종교사회개혁의 신학적 근거를 다룰 것이다. 연구 자료는 필자의 제한된 환경으로 인해 인터넷 공개된 신뢰할 만한 학자들(이정숙, 황대우, 임희국, 안인섭 등)과 김병환 목사의 자료 등 그리고 나의 평소의 논문 등이 활용될 것이다. 이미 이 방면에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으므로 밝혀진 자료들에 나타난 칼빈의 견해를 해석하는 작업이 더욱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본 논문의 주제는 종교개혁이 단순히 교회개혁의 관점에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사회(christendom) 개혁의 맥락에서 이해하려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II. 개혁의 정치, 사회적 배경

스위스 종교개혁의 연구를 위해서는 정치, 사회적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특히 대의회과 소의회의 형성 배경과 성격이다. 스위스 종교개혁의 주요 도시인 쮜리히는 대의회(Der gros se Rat)와 소의회(Der kleine Rat)로 구성된 시의회를 갖고 있었다. 대의회의 구성원은 각 직종의 대표자들인 군인, 상인, 지주, 금용업자 등 162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의회는 무역과 금용 그리고 지주 대표자들로 구성된 반면 소의회원들은 대의회원들의 상업윤리와 사회의 도덕질서 확립을 위한 행정기구였다. 즉 대의회가 경제적인 지배층으로 특권을 누리며 사회의 부패와 갈등의 요인이 되자 소의회를 구성하여 사회를 정화하려 하였다. 그래서 대의회원들은 입법권을 행사했지만 소의회는 시의 실질적인 행정을 담당하였다. 대의회의 위원이 소의회의 위원이 될 수는 없었고, 소의회의 위원장이 시장이 되었다. 두 의회는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긴장 관계에서 정치적인 쟁점은 물론이고 교회에 대한 안건도 전체회의에서 처리하였다. 전체 회의에서 다루어질 안건을 소의회에서 검토하고 의견서와 함께 대의회에 제출하였다. 쯔윙글리는 사회의 도덕질서 확립과 정화를 맡은 이 소의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회의에 참석했고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므로 소의회의 결정에 영향력을 미쳤다. 쮜리히의 종교개혁은 이처럼 쯔윙글리가 소의회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진행되었다. 쮜리히는 바젤이나 제네바에 비해 비교적 적은 5,000명 정도의 인구로 구성된 소도시였다. 그러나 지역적으로 스위스 내륙 지역과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프랑스와 근접한 까닭에 국제 무역도시로 발전하였다. 일찍이 비단과 같은 수공업이 발달되었고 가축, 소금, 곡물과 같은 교역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초반에 인구 증가와 수공업의 부진으로 경제적인 불황을 맞게 된다. 생필품이 부족하게 되고 농지가 없는 환경에서 도시의 날품팔이가 증가하면서 사회의 빈곤층이 심화되었다. 이때 무역을 통해 형성된 신흥 부유계급과 지주들로 구성된 부유층에 대한 서민들의 불만은 팽배하였다. 바로 불만의 대상이었던 부유층들로 구성된 대의회의 정책에 맞서 소의회가 사회의 도덕윤리 실현에 앞서게 된 것이다. 이 소의회에 쯔윙글리의 역할이 지대했던 것이다. 이처럼 쯔윙글리의 종교개혁은 사회개혁과 맞물려 태생적으로 기독교사회의 구현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1) 임희국 교수, 쯔윙글리와 스위스 종교개혁, ftp://210.102.253.7/t0212303.pdf

쮜리히의 종교개혁이 소의회의 역할을 떠나서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베른과 제네바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1534년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시도했던 파렐은 베른의 도움을 받았다. 베른 시도 역시 대의회와 소의회로 구성된 통치기구를 실행했고 소의회는 역시 시의 도덕과 윤리의 실천을 위한 행정을 담당하였다. 베른의 정치적 영향 아래 있던 제네바는 1540년 베른으로부터 영적 문제를 다루기 위한 치리회의 구성을 요구 당하기도 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치리회(명칭: Chorgericht = Ehegericht = Consistorium)가 이미 쮜리히와 베른에 존재하였고 치리회의 구성은 소의회원 2명, 대의회원 2명, 목사 2명 모두 6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때 쮜리히와 베른에서는 치리회가 소의회의 윤리와 도덕 문제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 제네바 치리회(consistory)의 형성과 성격

칼빈이 제네바 시 당국에 의해 시의 개혁자로 요청될 때 제네바 시는 이미 다른 지역처럼 대·소의회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칼빈을 초청하였다.

‘제네바 시장과 시의회는 우리의 훌륭한 형제요 탁월한 친구인 칼빈 선생님께 편지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말씀의 확장만이 당신의 바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제네바 시의 대·소의회와 총의회(총의회는 자신들의 이름이 여기에 쓰여 있다는 것을 당신에게 알려 줄 것을 매우 간절히 우리에게 부탁하였습니다.)의 이름으로 정중하고도 간절하게 당신을 초청합니다. 우리들이 당신을 절실히 요청하는 이곳에서 당신의 옛 직무를 다시 맡아 주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어떤 어려움이나 곤란도 느끼지 아니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모든 면에서 당신을 예우하고자 합니다.’2) admin, 칼빈의 종교개혁, agkd.org/board/bbs/board.php?bo_ta

칼빈은 제네바 시민의 신앙과 시의 윤리와 도덕성의 회복을 위해 자신을 초청한 대·소의회와 협의하여 제네바의 치리회를 탄생시킨 것이다. 물론 칼빈이 1541년 제네바 정부의 요청으로 재 입성할 때 제네바 시의 치리회가 삐에르 비레(Pierre Viret)에 의해 추진되고 있었다. 칼빈은 베른의 요청으로 진행된 치리회의 조직이 제네바에서의 실현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하고 제네바 시의 요청을 수락한다. 물론 그 배후에는 부쳐와 같은 스트라쯔부르그의 종교지도자도 있었다. 제네바 치리회는 비레가 작성한 치리회 법으로 칼빈이 제네바에 도착한(9월 13일) 후 11월 30일에 시 당국에 의해 인준되었다. 제네바의 치리회원은 약 25명으로 구성되었다. 소의회에서 2명, 60인회에서 4명, 그리고 200인회에서 6명 그리고 제네바 시의 목사[시대별로 9명에서 25명까지] 등 약 25명으로 구성되었다.3) 황대우 교수, 칼빈과 제네바 종교개혁, cafe.daum.net/jrcalvin

베른과 쮜리히 치리회는 정부 주도적인 시민 법정의 성격이 강한 반면에, 칼빈은 제네바 치리회를 목회적 성향을 띤 교회법정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베른과 쮜리히처럼 시 당국 주도적인 시민 법정의 성격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리회의 성격은 소의회의 주요 업무였던 시민의 도덕적 윤리적 회복이 중심이 되었다. 칼빈은 치리회에 참석하는 장로의 자격으로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영적인 지혜를 지닌(sur tout craignans dieu et ayans bonne prudence spirituelle)’ 사람을 요구하였다. 치리회의 교회주도에 대한 칼빈의 의지는 1561년의 「제네바 교회의 교회법(Les Ordonnances Ecclesiastiques de l’Eglis de Geneve)」에 다른 도시들의 치리회(Consistorium)와 구분되는 ‘교회치리회(Consistoire Ecclesiastique)’라는 용어를 사용하므로 분명하게 드러난다.4) 황대우 교수, 칼빈과 제네바 종교개혁, cafe.daum.net/jrcalvin

칼빈의 이러한 결단은 교인들에 대한 영적 치리권은 교회의 고유한 영역임을 확인해 준다. 칼빈은 영적 다스림을 위한 교회의 권징에서 누구(시장 시의회원 등)도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 치리권은 장로회(당회?)에 의해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칼빈은 교회의 영적 치리권을 가진 장로회를 시의회와 대비하지만 실제로 제네바교회에서 장로를 직접 투표하고 조직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16세기 스위스의 종교개혁 당시 치리회의 형성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치리회는 교회와 국가가 동반자로서 사회와 교회개혁을 함께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이것은 소의회의 성격과도 부합된 것이다. 비록 칼빈은 영적 문제에 대해서는 교회의 권위를 주장했지만 실질적으로 시 당국이 치리회의 권한을 주도한 것처럼 보인다. 치리회의 성격을 통해 3가지 중요한 사실을 통찰해 볼 수 있다. 첫째, 종교개혁은 사회개혁의 정황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종교개혁과 사회개혁을 분리해서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종교개혁은 단순히 성경적 교회 회복이 아니라 기독교사회의 성경적 회복(하나님 나라의 회복)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칼빈은 교회의 영적 다스림의 권위를 주장하면서 동시에 치리회를 통한 사회개혁에 대한 교회의 역할을 담당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치리회의 역할을 통해 사회적 윤리적 개혁을 이루려고 한 것이다. 칼빈은 시 당국과 함께 치리회를 통해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의무교육 등의 사회적 이슈에 관여한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칼빈은 자유의 도시 제네바에서 타락한 시민사회의 부패를 막기 위해 강력한 생활규범과 훈련의 필요성을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신학이 사회 권력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주장들은 제네바 시의 행정 사법에 영향을 주게 되었던 것이다. 1541년 칼빈이 시 당국의 요청에 응하여 제네바로 다시 돌아올 때 시민의 바른 삶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고양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돌아온 이유이고 교회법과 치리회를 만든 이유였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저를 여러분들의 목사로 원하신다면 여러분들의 생활의 무질서를 고치십시오. 만약 여러분들이 신실한 마음으로 저를 망명생활에서 다시 부르신 것이라면, 여러분 가운데 만연하고 있는 범죄와 방탕함을 제거하십시오. ....... 제 생각에 복음의 제일 큰 적은 로마의 교황이나 이단이나, 미혹케 하는 자들이나 독재자가 아니고 나쁜 기독교인들입니다. ....... 선행을 겸비하지 않은 죽은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악한 생활이 진리를 가장하고 행동이 말을 부끄럽게 한다면 진리 자체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제 저로 하여금 두 번째로 여러분들의 고장을 버리고 떠나 새로운 망명지에서 제 고통의 쓰라림을 삭히게 하시든가 교회 안에 법이 엄격하게 지켜지도록 해 주십시오. 순수한 훈련(discipline)이 재건되게 하소서.5) 이정숙, the Genevan Consistory, kacs.or.kr/c01-7.tm

칼빈은 실로 치리회를 통해 시민의 악을 제거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교회와 사회의 질서를 회복시키려 하였다. “그는 춤, 도박, 주정, 술집 출입의 횟수, 방종, 사치, 접대 행위,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분수에 넘치는 의복 착용, 음란하거나 비 신앙적인 노래 등에 금지, 혹은 비난, 구금 형을 가하였다. 심지어는 잔치집의 접시까지 세며 규제했다. 주민들의 교회 참석 여부를 감독하는 사람이 파견되었으며, 교회법원의 사람들이 가정을 1년에 한 차례씩 찾아가서 신앙상태를 점검하였으며, 심지어는 길거리에서 무심코 뱉은 말까지도 책임져야 했다.”6) ko.wikipedia.org/wiki

제네바 치리회는 사회개혁이 동반된 일벌 백 개 주의의 법정적 기관이 아니라 상담, 중재, 교육을 통해 치유의 기능을 동반한 것이다. 치리회는 대·소의회와 함께 시민들의 삶을 바로 세우고 제네바 시를 거듭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그래서 존 낙스는 제네바를 “the perfect school of Christ”라고 하였다.7) 이정숙, the Genevan Consistory, kacs.or.kr/c01-7.tm

2. 종합사회복지기관 구빈원

구빈원은 칼빈의 시민사회개혁 구현을 위한 대표적인 프로젝트였다. 그가 시 당국과 함께 만든 시민복지 사업이었다. 제네바 시 당국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기존의 구빈원을 활성화하면서 옛 교회의 물건들을 종합구빈원(Hopital General)으로 사용하였고 프랑스 난민을 위한  프랑스 구호 기금(Bourse francaise)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는 물론 종·사 협력을 통한 시민사회개혁의 일환이었다. 치리회와 구빈원은 사회개혁의 동반자로 협조하였다. 칼빈은 제네바 시를 영육간의 번영을 위한 총체적인 치유로 접근했으며 이것이 그의 개혁의 의지와 비전이었다. 특히 치리회가 구빈원을 확대 운영하도록 하는 데는 칼빈의 역할이 있었다. 구빈원의 필요성이 사회의 절대적인 요청이었던 것이다. 당시 유럽은 백년전쟁(1337-1453) 그리고 흑사병으로 시달리면서 종말론적 열망을 가질 정도로 열악한 삶의 환경 속에 빠져 있었다. 봉건사회에서 자본, 상업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가난한자와 거지들 그리고 사회적인 부랑자들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적인 약자를 돌봐야 할 사회 복지 문제는 시급한 상황으로 대두되었다. 유럽의 중요한 도시에는 이미 빈민을 돕기 위한 구제를 위한 구제기관들이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치리회는 이런 문제를 도외시하지 않고 치리회의 중요한 과제로 삼고 구빈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 중심에는 제네바 시의 담임목사였던 칼빈이 있었던 것이다. 구빈원은 칼빈의 목회적인 계획안에 치리회를 거쳐 철저하게 진행된 시민사회개혁의 일환이었다.

이처럼 복지 개혁을 위한 움직임의 확산은 종교개혁과 더불어 일어났던 것이다. 교회와 목회자가 아닌 평신도가 빈민과 병자를 치료할 목적으로 운영하는 종합 구빈원이 활성화 된 것이다. 특히 제네바 종합구빈원(Hopital General)은 칼빈의 주도 하에 확장 설립이었고, 구빈원에 행해진 구제 사업은 다목적이었다. 전쟁고아, 돌봄이 필요한 사람, 노인, 병자, 심장 장애, 가난한 자, 나그네 등에게 빵과 숙소를 제공해 주었다. 자신들의 숙박료를 지불할 수 없거나 막 제네바에 도착한 방문객에게 매일 저녁 쉼터와 음식을 제공하였다. 구빈원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자선 행사도 있었으며 책임은 집사가 복지 행정사로 사역하도록 하였다. 칼빈이 교회의 조직에서 4직분을 말할 때 집사는 바로 이러한 구제활동에 전념하기 위한 직무를 위한 것이었다. 칼빈은 또한 집사의 두 직분을 말하면서 구제와 행정을 전담하는 집사와 병자를 방문하고 위로하는 집사로 구분하기도 한다. 양자 다 교회 중심의 집사의 역할을 제한하지 않고 대 사회적인 역할을 중점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당시 로마가톨릭교회가 집사를 예전을 돕는 집사나 성직자가 되는 중간 계급으로 인식했던 것과는 차이가 난다.

제네바 종합구빈원의 행정관들은 대부분 시 당국의 상설위원회에 속하고 제네바 시의 치리를 담당하던 치리회의 장로들이 대부분이었다. 대부분의 행정관들은 정부의 상설위원회에 속한 의원들이었으며, 제네바의 치리를 담당하고 있던 컨시스토리(Consistory)의 장로들인 경우도 많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신학생들이 종합구빈원의 어린이들을 교육시키는 책임을 맡기도 했다는 것이다.8) 박경수 교수 글 webmaster@pckworld.com

이와 같이 16세기 제네바의 사회복지 제도는 체계적이었고 오늘날의 사회복지 제도를 무색케 할 정도였다. 

3. 프랑스 기금(Bourse francaise)의 조성과 운영

구빈원의 역할이 프랑스 난민의 유입으로 한계에 달하게 되자 칼빈과 기부자들이 이방인들을 돕기 위한 새로운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프랑스 난민 뿐 아니라 네델란드, 스코트랜드, 영국에서도 개신교의 난민들이 유입되었던 것이다. 프랑스 기금제도는 1540년경에 세워졌다. 종교의 자유를 위해 제네바로 이주해온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기구였다. 프랑스 기금 역시 기부자들이 선정한 평신도 집사들이 운영하였다. 이들은 모금운동과 분배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심방 사역을 담당했다.

“프랑스 기금을 위해 봉사했던 집사들의 명단과 기부자들의 명단은 잘 기록되어 있는 반면, 수혜자들의 이름은 회계장부에 사실상 익명으로 표기되었기 때문에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치리회의 문서, 소송사건의 기록, 집사들이 남긴 메모들에 여기저기 수혜자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수혜자들은 대체로 여성, 아이들, 실직한 남성들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프랑스 기금의 도움을 받았던 피난민들이 나중에는 그 기금의 후원자들이 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칼뱅은 프랑스 기금의 형성에 직접적으로 관여했고, 정기적으로 기부했다. 1554년 7월 1일에는 프랑스 기금을 관리하는 집사들을 선출하기 위한 모임을 칼뱅의 집에서 가지기도 하였다.”9) 박경수 교수 글 webmaster@pckworld.com

이 기금은 복음사역을 위한 기금으로도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칼빈의 성서 강의와 설교를 기록하기 위한 고용된 사람의 임금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출판된 책의 수익금은 다시 프랑스 기금의 수입금이 되었다. 프랑스 기금은 또한 프랑스로 파송되는 개혁 선교사의 파송비로도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프랑스 기금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던 것이다. 특히 프로방스에 심한 박해를 받은 개신교들이 집과 토지 그리고 자산을 잃고 피난길에 올랐을 때 이들을 돌보기 위해  프랑스 기금은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칼빈의 종교개혁은 교회중심의 개혁이라고 주장하지만 사회복지 개혁을 동반한 기독교사회 개혁이었다.

프랑스 기금을 설립한 칼빈은 실로 가난한 사람은 물론이고 난민들을 향한 박애 정신을 가진 개혁자였던 것이다. 프랑스 기금은 구빈원과 대등한 위상을 갖고 조직화 했던 것이다. 프랑스 기금을 통해 도움을 받았던 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조직을 만들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성직자들과 긴밀한 관계 하에서 구제 사업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일정한 기금을 정기적으로 헌금하기도 하였다. 난민들은 다양한 원조 물자를 프랑스는 물론이고 다른 지역에도 관심을 갖고 보내 것은 특히 한 점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칼빈이 시작한 개혁교회는 종·사 개혁이 동반한 전적 개혁(total reformation)이었다고 볼 수 있다.

4. 신정정치를 통한 사회개혁

16세기 제네바는 주변 도시 보다도 자유로웠고 방종하여 도덕적 영적 타락이 심화도어 가고 있었다. 제네바 치리회의 기록들을 보면 이혼 등 가정문제가 많이 다루어지고 있다. 칼빈은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한 시민들을 치유하기 위해 치리회를 만들었고 강력한 생활 규범과 훈련을 하였다. 제네바 1차 개혁에서 실패한 칼빈의 경우도 이러한 엄격한 도덕률을 적용하여 시민들의 반대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중단되지 않고 2차 부임 때에도 지속되었다. 그는 신학이 제네바 사회의 개혁에 영향을 주어야 함을 간과하지 아니했다. 그는 춤, 도박, 술주정, 술집 출입의 횟수, 방종, 사치, 접대 행위와 지나친 사치, 음란과 비 신앙적인 음악을 금지하고 이것들을 비난하며 때로는 재판을 통해 위반자들을 구금하기도 하였다. 당시 가톨릭 신부들과 수도사들도 창녀나 여인들과의 스캔들로 평판이 좋지 아니했다. 개신교 목사들도 시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었다. 1545년 시몬 모로(Simon Moraux)는 다른 2명의 목사들과 위그노 여신들과 함께 목욕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제네바 치리회는 가혹한 아버지, 무자비한 채권자와 고리대금업자들, 투기꾼과 독과점자 그리고 불량한 상인들, 포악한 남자, 힘없는 자와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는 일들을 개혁하려는 시도가 영적 문제와 더불어 주된 업무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칼빈은 당시에 발달한 상업의 위험성과 중요성을 동시에 수용하면서 공공복리를 위한 국가적 차원의 계약과 통제를 인정하였다. 이 점에 대한 비엘러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국가의 경제적 역할에 대한 칼빈주의 이상은 모든 시대의 기독교 가르침에 따르고, 스콜라주의자들의 가르침 뿐만 아니라, 다른 개혁자들의 것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인간 사이에 어떤 명확한 경제적 조화를 유지시키고, 부자에 대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지켜주고, 돈에서 압제적인 권력을 떼어놓는 것이, 국가의 영역이라고 인정하는데 이의가 없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신앙과 순종의 표제를 엄격히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일에 아주 유연하고, 기동력 있게 대처할 때에 비로소 확증된다.”10) 김병환, 사회복지사업에서 본 칼빈연구(목양, 2010, 356)

칼빈은 시민 생활의 검소함을 주장하면서 잔치집의 접시까지 규제했다. 그는 시민들의 신앙을 감독하기 위해 주일에는 장로들을 파송하여 교인들의 교회 출석을 점검하였다. 그는 또한 경건한 삶을 위해 길거리에서 무심코 뱉은 말까지도 책임을 물었다. 이러한 금지조항들은 당시 제네바 시민들의 삶이 얼마나 거칠고 무질서함을 보여준다. 칼빈의 엄격한 윤리적인 삶의 요구를 거절한 시민들은 칼빈을 에큐지티브 혹은 자신들의 애완용 개의 목에 칼빈의 이름을 달고 다니기도 하였다. 칼빈의 제네바 시의 성시화 운동은 치리회의 법을 통해 이루어졌고 이는 바로 기독교사회의 회복을 위한 투쟁으로 볼 수 있다. 칼빈은 종교인이기 전에 인간이었고 성인이기 전에 목회자였으며 성직자이기 전에 시민이었다. 그는 자신의 성경 강의와 말씀 선포가 시민들의 영·육간의 삶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모습으로 변화되길 원했으며 이것이야말로 제네바 시민이 추구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 실현으로 보았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사회의 경제적 정의, 평등, 정치 개혁 등의 용어는 사용하지 아니했지만 치리회를 통한 제네바 시민사회의 개혁을 교회의 사역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칼빈의 사회 개혁의 정신은 교회개혁의 나변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였고 교회개혁의 당위성을 점하고 있다.

“이렇듯이 칼빈은 제네바 사회생활 전반 즉, 부, 상업, 노동, 직업 등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이는 자신이 반드시 사회사업을 해야 만하는 당위성을 인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11) 김병환, 361

칼빈은 하나님의 통치(신정통치)가 임할 때 반드시 삶의 변화가 시민사회에 구현되어야 함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5. 의료사업 프로그램

확장된 제네바의 구빈원은 과부, 고아, 노인들 나그네의 안식처 뿐만 아니라 병자들의 치유센터 역할을 하였다. 칼빈은 이 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전문직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하였다. 그는 실제로 사회사업가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제네바는 1만 명의 도시로서 시내에서 가축이 도살되고 쓰레기가 버려지는 등 불결한 주거환경이었다. 역병이 퍼지면 시민들의 건강을 위한 치료 등 시급한 상황들이 돌출하였다. 제네바는 유럽에서 몰려온 이민자들의 급작스런 증가로 주거 환경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1542년 주민 대장에 오른 이민자의 수는 4776명에 달했고 17년 후 1559년에는 2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의 도시가 되었다. 지속적인 피난민의 증가로 인해 의료 시설의 확장 및 봉사가 사회적으로 요청되었다. 칼빈은 의료 서비스 제공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는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는 것은 교회와 국가의 공동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 주도하의 교회와 국가는 이 문제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 협력했다. ... 그래서 칼빈은, 제네바에서 의료사회사업을 위해 교회 법령을 제정해, 고대 교회가 있었던 당시의 집사들(procureur)과 구빈원(hospitallers)의 제도를 활동해서, 제네바의 의료사회사업에 적용했다.”12) 김병환, 362

전염병이 발생하면 성곽 서편에 구빈원을 따로 운영하여 치료하기도 하였다. 칼빈의 의료서비스 사역은 일시적인 해브닝이 아니라 지속적인 대안이 될 수 있도록 구빈원의 중요한 직무중의 하나로서 제네바 시와 협력 하에 이루어지도록 제도화 했던 것이다.

6. 노동, 경제정의(?) 실현

제네바는 경제활동이 활성화 되면서 야기된 임금 문제, 무역 분쟁 등 노동자들의 직업 안정에 대한 불안이 발생하였다. 분쟁이 발생했을 때 칼빈과 목사들은 중재역할을 했다. 특히 칼빈은 법률 전문가로서 소중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제네바의 노동문제와 경제 정의 실천을 통해 혼란을 사로잡고 칼빈은 제네바가 건전하게 경제적으로 번영하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칼빈은 제네바 시 당국에게 단순한 목회자가 아니고 시 발전을 위한 고문이었고 법적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했던 것이다. 시는 칼빈의 도움을 받아 제네바 시의 노동과 경제 문제를 해결하여 산업 발전을 도모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노동 문제와 경제 문제는 제네바로 이주해온 피난민들을 중심으로 발생하였다. 제네바 인구의 과분수를 초과하는 상황이 되자 더욱 이런 문제들이 사회적인 이유로 나타났다. 1550년부터는 인플레가 심화되었다. 날로 상승하는 물가는 임금을 끌어 올렸다. 주된 식품인 밀 가격이 폭등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경제 발전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노동자의 피해를 극소화 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 당시 경영주들이 단합하여 근로자들의 권익을 탄압하는 현상을 목도한 칼빈은 근로자와 가족들을 위해 산업복지를 주장하였다. 그래서 근로자들의 기본생활이 보장되도록 노력한 것이다. 물론 칼빈은 경영자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이기적인 행동을 자제할 것을 주장하였다.

“경영주들이나 직공들은 누구든지 직업을 막론하고, 이전에 시의회에 제출되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아주 무서운 영주들이 이성에 따라 모든 남용을 막기 위하여 조사하여 개정했던, 이전에 공표된 어떤 법령이나 포로령들이나 조례들을 이용하여, 1시간 이하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불법적인 집회들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것을 어기는 사람은 누구든지 정도에 따라 60수의 벌금과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13) 김병환, 395

이러한 포고령은 당시 인쇄업 경영진들의 근로자들 사이의 갈등에도 적용되었다. 유럽의 이주민 가운데서 인쇄 기술을 가진 자들이 유입되므로 인쇄 발달에 기여하기 하였지만 서로간의 갈등이 유발되었다. 저작권과 같은 것이었다. 주로 칼빈의 저작이 잘 팔렸기 때문에 칼빈은 이런 문제들을 간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칼빈은 인쇄업의 바른 경영과 함께 노동자들의 공익을 위해 정당한 대우를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제네바 시의 모든 다른 노동자의 문제이기도 하였다.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 시간은 인간다운 삶의 기본적인 과제이기도 하였다. 칼빈의 태도는 노동자들의 권익의 부당한 대우를 간과하지 않는 데 있었다. 노동조합이 형성되는 등 사회가 불균형적으로 발전하는데 대한 칼빈의 관심은 기독교사회의 바른 개혁을 위한 과제이기도 하였다.

7. 사치금지법

상업화 된 제네바는 사치문화가 급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밤새워 진행되는 카드놀이와 주사위놀이는 시민의 가정생활을 위협하였다. 노름으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였다. 칼빈은 제네바 시의회의 사치금지법을 제정하는 일에 관여하여 사회적 갈등이었던 빈부 격차를 줄이고 빈곤퇴치를 위한 운동에 나섰다. 1558년 제정된 사치 금지법정은 시민들의 과소비를 규제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시의회는 사치야말로 많은 악을 산출하며 인간의 탐욕스러운 교만을 키우며 빈곤과 높은 생활비를 초래하므로 많은 사람들을 파멸시키는 원인이라고 규명하였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을 크게 화나게 하는 악행이라고 규정하였다. 제네바 시의회에 의해 의결된 사치금지법은 건강한 시민의 생활 향상과 사회적 통합을 위한 것이었다.14) cafe.daum.net/bongsoongamj

사치금지법의 제정은 목사들과의 협의로 이루어졌다. 물론 그중에 칼빈이 중심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시의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공적인 선포가 되도록 할 것이지만, 그 법들을 성안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많은 악을 발생시키고, 탐욕스런 교만을 마음에서 품게 만들고, 그 다음에  빈곤, 높은 생활비 및 많은 파멸의 원인이 되는 그런 사치 행위들을 근절시키는 어떤 좋은 방책을 찾기 위하여, 먼저 목사들과 협의가 되도록 지시했다. 더구나 그러한 행동 원리는 하나님을 심히 화나게 만든다.”15) 김병환, 369

사치금지 항목은 구체적이었다. 부유한 자들의 귀금속품을 중심으로 금목걸이와 자수품 등이었다. 사치금지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제네바 시민들의 무절제한 생활을 지양하고 기독교사회의 실현에 필요한 사회 윤리를 세우는 중대한 시민사회개혁의 사안임을 보여준다.

8. 고리대금, 임금, 노동조합

흥미로운 것은 칼빈은 당시 사회적인 경제활동의 이슈로 등장한 문제들에 대해 침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칼빈이 기독교사회의 지평을 교회라는 영적인 영역에만 국한시킨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적용에도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리대금에 대한 칼빈의 견해는 루터와는 달리 정당한 고리대금을 인정한다. 칼빈은 1545년 사키누스(Sachinus)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리대금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우선 성경의 증거가 고리대금업을 전면적으로 정죄한다는 어떠한 암시도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고리대금업이 전면 금지된 것은 아니다. 고리대금업은 공익을 용인하는 것이 필요하며,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허용하셨던 상황과 다른 많은 형편들은, 유대인들이 고리대금업이 없이도 그들 사이의 거래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다. 그래서 고리대금업이 공의와 자선에 배치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면 금지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16) 김병환, 384

칼빈의 고리대금에 대한 입장은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고리대금을 해서는 안 되지만 부자들을 대상으로는 고리대금의 사용을 용납함을 볼 수 있다. 즉 이자놀이는 공평과 형제적인 협력을 위배하지 않는 한 서로의 도움을 위해 허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리어 돈을 빌린 자들이 원금에 대한 소득의 일부를 대금업자에게 지불하는 것이 공평한 행위라는 것이다. 칼빈은 그래서 돈을 빌려주는 자가 정당하게 이자를 받는 것은 정당한 행위라는 것이다. 단지 그로 인해 상대에게 손해를 끼쳐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칼빈의 입장을 정리하면 고리대금의 행위는 공정한 룰과 균등한 기회의 제공을 토대로 정당하게 사회적 기능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칼빈은 악덕 고리대금업자들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비난했다.

“이 세상에서 고리대금업자가 토색 꾼이 아니며, 부당하고 수치스러운 이득에 중독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따라서 옛날 카토(Cato)가 고리대금업과 살인을 동일한 범죄로 취급한 것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사람들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의 피를 빠는데 있기 때문이다. ... 더욱이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그들의 이자 놀이 때문에 고역을 치르는 쪽은 부자들이 아니라, 마땅 구제되어야 할 가련한 사람들이다. ... 우리가 고통과 곤경에 처해 있는 가련한 자들을 약탈하거나, 집어삼키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사실은, 모든 민족과 모든 세대에 걸쳐서 통용되는 정의의 일반 원칙이다.”17) 김병환, 385

칼빈은 악덕 고리대금업으로부터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시의회의 현물에 대한 이자의 비율을 5%로 감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가난한 농부들을 보호하기 위한 칼빈의 생각이었다. 칼빈의 요청이 있은 지 1년 후 1544년 시의회에서 칼빈의 의견을 수용하여 입법조치 하였다. 이 조치는 소의회, 200인 의회 그리고 총회와 모든 부르조아지 회의에서 수용되었다. 그리고 1547년에 농민으로 구성된 지방의 교구민들을 위한 교회법령으로 가결되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도 고리대금이나 이익을 위해 5% 이상의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어서는 안 된다. 이것을 어길 시에는 사건의 요건에 따라 원금의 몰수 내지는 임의의 벌금형을 받게 될 것이다.”18) 김병환, 386

이러한 법령을 통해 지주들과 도시의 성주들의 횡포를 막고 농민과 가난한 자들이 보호하게 되었다. 칼빈은 농민들과 빈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리대금의 일곱 가지 규정을 두었다. 가난한 자에게 이자를 부과하는 것은 잘못이며, 이들로부터 지나친 담보를 요구하는 것도 안 되며, 담보가 없다고 돈을 빌려주지 않는 것도 잘못이며, 그리고 법이 정한 이자 이상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 등이었다. 칼빈은 고리대금에 대해 양면성을 갖고 있다. 칼빈은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고리대금 행위는 건전한 경제활동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한편으로 지나친 이기적인 상업행위로서의 고리대금은 사회악을 조장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특히 그는 지주들과 영주들에게 착취당하는 농민과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리대금업을 합리적으로 법제화 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칼빈은 투기, 독점, 시장 조작 등 부정직한 상행위를 비난했다. 그리고 이것들은 인간사회의 와해는 물론 하나님과 인류의 연대성을 파괴하는 행위로 정죄하였다.19) cafe.daum.net/the covenant

칼빈은 또한 기업주나 노동자들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 단합해서 임금을 올리거나 동결시키는 행위를 금지시켰다. 노사문제가 발생했을 때 칼빈은 법률가로서 조정역할을 감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노동 계약 제도를 옹호하면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도 하였다. 노동자가 받은 임금이나 기업가의 남은 이익은 자신의 공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기업가가 임금을 속이거나 시장을 조작하여 근로자의 임금을 낮추는 행위는 도둑질하는 것으로 비난하였다.20) cafe.daum.net/the covenant

칼빈은 시 당국에서 책정한 목회자들의 생활비의 합리적인 책정을 위해 시 당국에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월급을 다른 목회자들과 동일하게 책정해 달라고 간청하기도 하였다. 특히 빈약한 봉급으로 생활을 어렵게 꾸려 나가는 동료들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아니했다. 칼빈의 견해는 목사도 부유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자로서 정직하게 살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시의회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을 동결하는 포고령을 통과시키는 상황에서 칼빈이 이러한 주장을 한 것은 의미 있는 결단으로 보인다. 노동자들의 임금을 동결할 권한을 가진 시의회원들은 대부분 상당한 토지와 부를 소유한 경제적인 지배계급들이기 때문이다.21) cafe.daum.net/the covenant

9. 교육을 통한 사회개혁

기독교사회 건설을 위한 칼빈의 또 다른 노력의 중심에는 교육프로젝트가 있었다. 칼빈은 사회개혁의 프로그램은 인재 양성과 더불어 가능함을 인식한 듯하다. 치리회를 통한 징계와 다스림의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칼빈은 제네바 시의 기독교사회 개혁을 실현하기 위한 방안으로 무엇보다도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칼빈은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아니하는 부모들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시 당국의 정책에 동의하였다. 그는 청소년을 위한 신앙 교육서를 만들기도 했던 것이다. 제네바에 추방되어 3년간 스트라스버그에서 교육자 스트륨을 만나면서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을 강화시킨 것 같다. 그가 두 번째 제네바로 돌아온 후 고등교육의 필요성을 1541년에 선포했다. 그것은 장차 개혁교회를 지도할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가진 목회자와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칼빈은 단순히 목회자만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높일 수 있는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의 대망은 여러 가지 종교개혁을 위한 일들과 시 당국의 몰이해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였고 1558-1559년에 이루어졌다.

1558년 대학설립을 위한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대학 설립 장소가 정해졌다. 1559년에 비로소 열매를 맺게 되었는데 대학 건축비로 30,000플로렝 정도의 모금이 이루어졌다. 시 정부가 앞장서서 제네바 시를 도주한 범죄자들이 참수당한 자들의 동산과 부동산을 기금으로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시 의회위원들이 모금 운동에 동참하였고 변호사들이 고객들의 유산세 등을 높이 책정하여 건축 경비에 헌납하도록 하였다. 칼빈도 적극적으로 후원자를 모집하였다. 칼빈 스스로 호구를 방문하여 건축비를 위한 기부금을 간청하였다. 시민들은 기부금을 내었고 유산을 헌납하기도 하였다. 특히 불란스에서 온 피난민들의 모금 운동 동참이 두드러졌다. 칼빈은 대학시설과 더불어 유능한 학자들을 모셔오는 것을 우선시 하였다. 당시 베른 당국과 로잔느의 대학교수들 간의 대립과 갈등이 칼빈에게는 훌륭한 교수들을 제네바로 유치하는데 유리하였다. 칼빈은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a)와 비레(Viret) 같은 실력 있고 덕망이 높은 개혁자들을 영입하게 되었다. 베자는 초대학장으로 학교를 이끌어 가게 되었던 것이다. 칼빈은 자신보다 10살이나 어린 젊은 인재를 대학의 지도자로 세우는 용단을 한 것이다. 제네바 대학은 종교개혁을 위한 지도자 양성이 목적이었다. 교회를 위한 목회자 양성과 정부기관을 위한 지도자 양성이었다. 제네바 대학은 신학, 법학, 의학과 같은 전문 학문을 하기 전에 철저하게 인문학(liberal arts)을 습득하도록 하였다. 즉 문법, 논리학, 수사학, 산수, 기하학, 음악, 천문학의 7과를 이수 하도록 하여 전인적인 인격의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다. 개학을 하자 600명의 학생들이 몰려왔고 그중 유럽각지(스코틀랜드 영국, 화란, 독일, 헝가리, 그리고 불란서 등)에서 160명의 학생들이 제네바 대학에 등록하는 등 첫 해에 900명의 학생이 모였다. 그 후 10년이 되었을 때 1600명의 학생이 수학하는 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칼빈은 대학이 단순한 지식의 토론장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한 요람지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학교의 목적을 홍보하고 지역사회에 부응하는 내용과 목적을 주민들에게 알렸다. 또한 지역사회의 요구에도 경청하였다. 칼빈은 지속적으로 학교의 발전을 위해 시의회와 협의하였고 시 당국과 긴밀한 협조를 통해 교회와 사회의 지도자를 양성했던 것이다. 칼빈은 중세 대학이 중세사회에 얼마나 큰 역할을 했던 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기독교사회의 성경적 실현을 위해서 제네바 대학교육의 필요성과 대학의 역할이 지대함을 인식한 것이다.

 

III. 개혁의 신학적 배경

칼빈의 시민사회개혁의 신학적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 과제는 여러 관점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칼빈의 성경주해를 통해서 그리고 기독교강요 연구를 통해서 집중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강요에 인용된 사도행전 2장 24절, 로마서 12장, 야고보서 1장 5절, 그리고 이사야 23장 18절에 대한 해석이다. 본고에서는 두 가지 관점에서 칼빈의 시민사회개혁의 근거를 검토하려 한다. 하나는 그의 신학주제 중 하나인 생명의 실존적 삶에 대한 그의 견해이며 다른 하나는 그의 섭리교리와 정치윤리의 견해이다. 이 내용은 본인이 이미 발표한 논문을 수록하였다. 

1. 생명의 실존적 삶에 대한 이해22) 기독교학술원 세미나에서 발표한 글임.

칼빈은 하나님에 의해 그리스도로부터 부여 받은 생명을 가진 기독교인의 삶에 대해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다.23) CO. 3.6.1-3.10.6. pp. 501-532. 칼빈은 우리의 삶의 주인이요 소유주이신 하나님을 쫓아서 삶을 이끌어 갈 때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24) Ibid.,. 3.6.1. p. 686.

그러나 성경은 참된 근원으로 부터 그것의 교훈을 이끌어낸다. 성경은 우리의 삶의 주인이요 소유주이신 하나님께로 우리의 삶을 이끌도록 언급할 뿐 아니라 우리가 창조의 참된 조건과 기원에서 타락했다는 것을 가르치며 또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의 삶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표현해야 할 패턴으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삶을 모범에 쫓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의 속성인 거룩한 삶을 추구하므로 하나님과의 연합의 관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룩함이 공로가 되어 그 근거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간다는 의미는 아니다.25) Ibid., 3.6.2. p. 502. 그리스도를 통해 중생한 삶의 결과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악과 부정을 원치 아니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원한다면 당연히 우리의 삶이 거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26) Ibid., 3.6.2. p. 502: sed quoniam ad cius gloriam magnopere pertinet, non esse illi consortium cum    iniquitata et immunditia. 여기서 칼빈은 그리스도로부터 새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적인 삶의 당위성을 속죄와 구원론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칼빈은 중생한 자의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요. 하늘에 소망을 둔 삶이어야 함을 강변한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의식이야 말로 올바른 삶을 세우는 가장 확실한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27) Ibid., 3.6.3. p. 504: Hace, inquam, auspicatissima sunt bene constituendae vitae fundamenta... 칼빈에 의하면 일반 철학자들의 도덕론은 단순히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데 그치며 그 이상의 것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것이다.28) Ibid., 3.6.3. p.504:...quibus nequaquam similia deprehendas apud philosophos: qui in condemmdatione virtutis nunquam supra hominis naturalem dignitatem conscendunt.

그래서 칼빈은 영적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고 권면하고 있다.29) Ibid., 3.7.1. p. 505. 칼빈은 이렇게 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생각과 뜻이 하나님의 계획과 행동을 주관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뜻과 지혜가 우리의 모든 행동을 다스리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삶이 아니라 매일 하나님을 향한 삶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것이야말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생명에 이르는 관문이라는 것이다.30) Ibid., 3.7.1. p. 506: Sit hic itaque primus gradus, hominem a se ipso discedere, quo totam ingenii vim applicet ad Domini obsequium. Obsequium dico, non modo quod in verbi obedientia iacet, sed quo mens hominis, proprio carnis sensu vacua, se ad spiritus Dei nutum tota convertit. Hanc tranformationem, quam renovationem mentis Paulus appellat(Eph.4,23)

그러므로 이것이 첫 단계가 되도록 하자. 즉 사람이 그 자신을 떠나서 그의 능력의 모든 힘을 하나님을 섬기는데 바치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말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육체의 정욕을 비우고 전적으로 성령의 부르심에 마음을 응답하는 것을 의미 한다. 이러한 변화야말로 생명에 이르는 첫 번째 관문인데 바울은 “심령을 새롭게 하는 것”(엡 4:22)이라고 불렀고, 철학자들은 이것에 대해 무지했다.

칼빈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헌신의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그리도인들이 소유한 생명의 존재 의미와 가치임을 역설하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히 일어나야 할 축복된 삶의 형태이며 이것은 곧 자기 비움의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부인의 삶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과 이웃의 유익을 위한 삶으로 채워진다는 것이다.31) Ibid., 3.2.2-7. pp. 506-512. 그러면 칼빈은 왜 자기 부인의 삶을 강조했는가? 칼빈은 자기 부인의 삶이 없이는 세상의 정욕에 사로잡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한 삶의 추구가 불가능 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32) Ibid., 3.2.2. p. 507:...quae ubi semel in amno obtinuit, primum neque superbiae, neque fastui, neque ostentationi, deinde neque avaritiae, neque libidini, neque luxuriae, neque mollitiae, neque aliis quae ex amore nostri generantur malis, locum ullum relinquit. Contra ubieunque non regnat, illie vel spurcissima vitia sine pudore pervagantur: vel, si qua est virtutis species, prava gloriae cupidine vitiatur.

그것(자기를 부인함)이 한번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면, 교만과 허식 탐욕과 욕심 그리고 화려함을 좋아하는 것과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데서 온갖 종류의 악행들의 여지가 없어진다.(참조. 딤후 3:2-5) 반면에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는 곳에서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추하고 거짓된 죄악에 빠지든지 어떤 유사한 덕목을 나타낸다 해도 그것은 자기 영광을 위한 부패한 욕심에서 나타난 것이다.

칼빈은 자기 부인은 주님의 명령이며 그것 없이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것은 가능치 않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에 대한 의무는 자기 포기라는 결단이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 포기를 주장하는 칼빈은 인간의 본성은 원천적으로 자신만을 사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3) Ibid., 3.7.5. p. 509.

결국 칼빈이 말하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무엇이든지(quidquid a Domino gratiarum obtinemus) 이웃과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아낌없이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34) Ibid., 3.7.5. p. 509. 그러면 이웃과 교회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신자의 삶의 자세는 무엇인가? 칼빈은 우리가 교회의 공동 유익과 이웃을 위해 섬기는 태도는 청기지(oeconomos)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생각은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이웃을 돌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물질관 때문이다. 그리고 칼빈은 청지기의 사역을 감당하는 유일한 길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35) Ibid., 3.7.5. p. 510: quidquid in nos Deus contulit, quo proximum queamus adiuvare, eius nos esse oeconomos, qui ad reddendam dispensationis, rationem astrigimur. Eam porro demum rectam esse dispensationem, quae ad dilectionis exigatur regulam.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한 모든 것들에 대한 청지기이며 그로 인해 이웃을 도울 수 있도록 하셨다. 그리고 청지기직의 평가를 계산하기를 원하신다. 또한 올바른 유일한 청지기직의 길은 사랑의 법에 의해 시험되는 것이다.

그러면 칼빈이 이웃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칼빈은 왜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가? 칼빈은 인간을 단순한 생태학적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ad imaginem Dei) 창조된 생명체로 보기 때문이다.36) Ibid., 3.7.6. p. 510. 여기에서 칼빈의 위대한 인간존중의 사상을 볼 수 있다. 칼빈은 사람들이 선을 받을 자격이 대부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에게 서로 선을 행하라고 하나님이 가르친 것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러한 원리에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귀와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37) Ibid., 3.7.6. p. 510.

여기서 성경은 가장 최상의 길을 보여준다. 즉 우리가 사람들을 그들의 행위의 공로에 따라 판단하지 말고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인간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과 영예를 받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엄성 때문에 알지 못하는 사람이든, 비천한 사람이든, 불학무식한 사람이든 혹은 전혀 가치 없는 사람이든 관계없이, 그 사람들 속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 빛나고 있으므로 그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는 언제라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38) Ibid., 3.7.6. p. 510. 특히 칼빈은 마 5:44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태도를 밝히고 있다.39) 원광연 역,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5. p. 212. CO. 3.7.6. p. 511.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고, 악을 선으로 갚아 주며, 저주하는 자에게 축복한다는 것은(마 5:44) 정말 어려운 일일 뿐 아니라 인간의 본성도 완전히 거스르는 일인데, 그런 일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길은 오직 한가지 밖에는 없다. 곧 사람의 악한 것에 개의치 않고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형상이 그 사람들의 잘못된 점들을 덮어주고 제거시켜 주는 동시에, 그 형상의 아름다움과 위엄으로 우리를 이끌어서 그 사람들을 사랑하고 포용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칼빈의 이웃사랑과 존엄사상은 또한 인간의 외형적인 행위에 의존하지 않는다. 칼빈은 사랑을 베푸는 자들이 인격적인 내적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 자신을 죽이는 일(mortificatio)이며 그것은 사랑의 수혜자의 위치에 자신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인은 자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바로 그 사람의 입장에 자기를 가져다 놓고서, 그 사람의 불행을 마치 자기가 당하는 것처럼 그렇게 안타깝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40) Ibid., p. 213. CO. 3.7.7. p. 511. 이것이 인간다운 감정이고 참된 동정심이라는 것이다.41) Ibid., p. 213. CO. 3.7.7. p. 511.

칼빈은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선물이므로 우리의 삶 자체가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귀한 존재임을 주장하면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칼빈은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쫓아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섬기는 청지기로서의 삶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삶이 지속될 때에 생명의 가치와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다. 칼빈의 인간 생명 존중 사상을 보면 그가 왜 제네바 시민사회의 개혁을 위해 목회적 차원에서 온힘을 쏟았는가를 알 수 있다.

2. 섭리교리와 정치윤리와의 관계42) 한국기독교통일학회세미나에서 발표한 글임.

칼빈의 섭리론과 정치사상은 어떤 함의를 갖고 있는가? 칼빈의 섭리론은 기독교인의 정치참여와 윤리를 배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적인 행위로 인해 죄가 인간의 마음속에 윤리적인 인식과 양심을 폐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칼빈에 의하면 죄는 결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정의와 불의를  충분하게 분별할 수 있는 양심의 판단력을 지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인간이 자신의 양심에 의해 변명할 수 없게 되어 있다.43) Inst. 2. 2 .22. in C. Gamble. ibid., Vol. 3. p. 191.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인간의 능력 속에는 정치를 할 수 있는 기능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사회적인 동물이므로 자연적인 본능에 의해 사회를 보존하고 중하게 여기기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인간의 마음에는 시민의 질서와 정직이 각인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개인은 인간사회가 법에 의해 어떻게 규정되어져야 하는지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법들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주제에 관하여 보편적인 동의가 개인과 국가 가운데 심겨져 있고 이것은 선생이나 입법자가 없이도 모든 이의 가슴속에 보편적인 법의 씨가 심겨져 있다...그래서 어떤 사람도 현재의 삶의 법령에 관하여 이성의 빛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44) Inst. 2. 2. 13. in R. C. Gamble. ibid., p. 191.

이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시민질서와 법에 대한 인식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에 이루어진 것임을 칼빈은 확인하고 있다. 섭리가 세상 질서와 하나님이 법과 정의에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은 복음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45) Ibid., 191.

시민의 질서와 법이 하나님의 섭리차원에서 이루어진다면 정치는 권위를 가진다는 것을 약속한다. 정치적인 질서와 법이 하나님의 섭리적인 약속으로 이해되어지므로 이것은 인간의 귄리 즉 자유와 평등의 신학적인 기초로 반영될 수 있는 것이다.46) Ibid., p. 192. 이러한 약속 때문에 칼빈은 냉소적인 방법으로 정치를 정의하는 것을 거부한다. 정치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보장된 약속이라는 개념이 칼빈의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계획의 기초가 된 것이다.47) Ibid., p. 192.

이와 같이 정치적인 질서가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는 확신이 칼빈으로 하여금 시민사회의 질서에 대한 긍정적인 정의를 내리도록 했던 것이다.

“시민정부는 우리가 인간 가운데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외적인 예배를 기리고 유지하도록 주어진 것이며, 교회의 건전한 교리와 조건을 수용하고, 우리들의 태도가 시민의 정의를 형성하도록 하며,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강화하며, 공통된 평화와 평정을 키우도록 하는 것이다.”48) Inst. 4. 2. 2. in R. C. Gamble. Ibid., p. 192.

시민정부의 이러한 역할에 대한 섭리적인 이해를 갖고 있지만 칼빈은 정치적인 질서와 종교적인 질서를 혼돈하지 않는 범위에서 정치와 윤리의 관계를 이해하고 있다. 통치자들의 무제한적인 정치권력의 행사에 대항하여 칼빈은 정치의 윤리적인 기초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fear of God)이다. 선을 베풀어야 할 신적인 섭리 가운데 있는 통치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복음의 이름으로 하나님이 세운 질서나 통치자들을 뒤집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들도 동일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49) Ibid., p. 192. 이 점에서 칼빈은 양극단적인  행동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칼빈이 말하는 정치윤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계율에 따라 평등과 자애의 정치적인 적용에 있다. 그러므로 이런 윤리는 정치의 기능에 믿을 만한 판단의 기준을 제공하는 것이다. 고로

“각국은 유익이 된다고 판단되는 법을 제정할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 이 법들은 자유의 규율에 의해 항상 검정되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형태의 변화를 할 때도 그들은 동일한 원리 위에서 진행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50) Inst. 4. 20. 15. in R. C. Gamble. ibid., p. 193.

특별히 섭리의 교리는 믿는 자들에게 인간의 존재와 창조세계로의 세상에 대해 긍정적인  확신을 갖게 하기 때문에 정치는 이웃과 하나님의 봉사 사이에서 진정한 중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믿는 자들은 사회적, 정치적, 법적인 정황 속에서 산다는 소명을 가져야 하며 그러면서 세상 나라와 동일하지 않는 나라를 향하고 있음을 동시에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51) Ibid., p. 193.

칼빈의 섭리교리는 정치적인 책임에 대해 비판적인 프락시스를 인식케 한다. 칼빈은 권력에 대해 고통당하는 비판이 따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인식케 된다면 희망을 상실하지 않고 통치자들의 불의에 대해 인내해야 할 경우를 맞게 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일인통치와 같은 정부도 하나님께로 나온 권세로 인정하는 바울처럼 “비 그리스도인의 정부와 통치자들 역시 하나님께 권위를 받았으므로 순종해야 한다고 여긴 것이 분명하다.”52) 도날드 맥킨. 상게서, p. 348.

이러한 무비판적인 복종과 비판적인 순종의 혼합은 모호한 것처럼 보인다.53) Ibid., p. 194.

특히 이러한 생각은 강요 마지막 장 “Of Civil Government”에서 표현되어 진다. 칼빈은 프린스들이 무엇을 한다 할지라도 신하들의 복종을 정당하다는 것이다. 특히 칼빈은 섭리의 이름으로 이것을 주장하고 있다. 칼빈은 이런 프린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심판하는 가를 예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프린스에 대한 개인적인 저항은 고통에 대한 명백한 거절이기에 금지된다. 그러나 칼빈은 법적이고 제도적으로 조직된 저항은 고려될 수 있다고 부언하고 있다.

“평판이 좋은 행정관들이 왕들의 독재를 견제하기 위해 임명되어 졌을 때 왕들의 부당한 방종을 점검하기 위해 하는 이것을 금하지 않았다. 만약에 왕들이 독재하고 백성들 중 겸허한자들을 모독할 때에 행정관들이 그들과 함께 잔치에 않는다면 나는 그들의 동화는 사악한 배신행위로 규정지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악하게 백성들의 자유를 배신했기 때문이다. 반면 그들은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백성들의 보호자로 임명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54)Ibid., p. 194.

칼빈의 섭리교리에 있어서 개인의 저항권 불허와 제도적인 저항권의 인정은 상당히 모호한 역리적인 교훈을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 이러한 모호성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해야 할까?

이와 같이 통치자들이 악정을 행할 때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인지 혹은 이것은 인간의 사악함에 돌려야 하는지 대한 모호성이 발생한다. 칼빈은 이러한 모호성을 해결하려는 이슈로 보지 않는다. 모호함 보다는 역동적인 정치윤리의 개념이 칼빈의 정치사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는 극단적인 무모한 복수적인 저항은 거부하면서 정당한 저항 행위에 대한 정치윤리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은 양자를 인정하면서 어떤 극단적인 경우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것처럼 보인다.55) Ibid., p. 195.

칼빈의 정치적 윤리의 이러한 모호성은 섭리교리가 정치의 자율성의 근거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칼빈은 정의롭지 못한 프린스가 하나님의 사자로서 자신의 소명을 무시했을 때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56) Inst. 4. 20. 24. in R. C. Gamble. ibid., p. 194.

칼빈의 섭리교리의 정치적, 윤리적 해석에서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역시 이성적인 지식의 논리에서 보다 섭리교리는 신앙의 고백(confession of faith)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창조세계에 대한 약속이다.57) Ibid., p. 195. 섭리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불의한 자에 대한 통치를 하나님께로 돌릴 수 없고 도리어 독재자 프린스에 대한 고통스런 참여로 우리를 인도하며 동시에 불의를 거부하는 데로 인도한다.

“이것은 동일하게 섭리 그 자체를 역사의 지식의 주인으로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위치를 불법으로 침해하는 정치조직에 대해 비판을 초래한다. 이와 같이 섭리를 믿는 신앙은 우리시대에 작은 일이 아닌 묵시적인 절망의 유혹은 물론 권력을 이데올로기화 하는 유혹을 피한다.”58)Ibid., p. 196.

하나님의 섭리교리는 또한 비록 죄로 오염된 상태지만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 속에 질서의 가능성을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응답하도록 인도한다. 이것이 정치윤리의 범주에 적용될 섭리의 교리이다. 칼빈에게 이점은 명확한 것이었다.

“개인의 운명과 이 세상 역사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진대 믿는 자들은 두려움이나 핑계 없이 그 자신을 윤리적인 일에 자유롭게 헌신해야 한다. 물론 그 일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명예를 나타나기 위한 모든 것을 행하는 데 있다...”59) Ibid., p. 196.

그래서 칼빈은 행정관들(magistrates)의 정치적인 일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행정관들은 모든 관심, 부지런함, 그리고 근면함으로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섭리와 지키심과 선하심과 그리고 관대하심과 정의로우심의 이미지를 나타낼 수 있도록 [백성들을] 돌봐야 한다.”60) Inst., 4. 22. 6. in R. C. Gamble. Ibid., p. 196.

그래서 하나님의 법의 명령을 고려한다면 모든 사람은 분명히 섭리의 선하심에 반하게 하는 모든 장애물들에 대해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지상에서 현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려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최종적인 것이다.61) Ibid., p. 196.

마지막 질문은 불합리한 현실 역사의 경우를 하나님의 섭리라고 할 수 있는 가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전쟁과 살인 그리고 재난 등이다. 특히 유대인 600만 명의 희생을 섭리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구체적인 문제 등이다. 물론 스토아파 같은 일반 세속 철학자들은 운명론으로 쉽게 돌릴 수도 있다. 혹은 불교 신앙에서는 윤회적인 사건으로 해석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칼빈의 섭리교리에서는 수용될 수 없는 것이다.62) Ibid., p. 196.

칼빈은 섭리교리에서 성경은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이성론자들처럼 이신론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피조물 즉 가장 작은 새 한 마리의 생명도 유지하시고, 돌보시고, 그리고 지키시는 분임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우연이나 행운에 의존케 하는 것은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어떤 것이 우연히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과 영예를 최소화 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에는 우연한 것이 없다.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개인의 삶에도 마찬가지다.”63) Iid., p. 186.

칼빈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알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칼빈은 제한적인 선택과 자유의지의 견해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 죄로 인해 오염되었다 해도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적인 돌봄의 은총으로 인해 인간은 선을 행하도록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선한 일을 시작하시며 동시에 모든 공로는 그에게만 속한다는 것이다.

특히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가 모든 것을 주장하는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이 악한 행위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악한 행위에 있어서는 부패한 인간의 자율적인 행위를 인정하고 있다. 이것이 칼빈이 말하는 섭리교리의 역리적인 진리이다. 하나님의 동기는 언제나 선하지만 인간의 동기는 성령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 한 악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저작이면서 악한 행위의 저작자는 아니라는 역리적인 진리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는 결정론이 아니고 섭리(providentia)로 표현되는 것이다.

칼빈은 신의 섭리교리에 함의 된 정치윤리와 크리스챤의 책임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적인 행위에 의해 죄는 인간의 마음에 있는 윤리적인 지식과 양심을 지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죄의 문제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죄악 자체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불의와 의를 충분하게 분별하는 양심의 판단을 지울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불안전한 질서지만 신의 섭리에 의해 보장된 질서가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죄악에도 불구하고 발달된 인간 속에 새겨진 최소한의 시민의 질서는 유지된다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타락한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선물로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섭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정치적인 기술의 능력도 동일한 의미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칼빈의 섭리사상을 조명해 본다면 칼빈의 종교개혁은 시민사회의 개혁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IV. 정리

칼빈의 제네바 시민사회개혁은 쮜리히나 베른의 종교개혁 맥락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대의회와 소의회의 형성과정과 성격을 전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치리회의 역할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의 총체적인 목회사역 속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시민의 삶의 전 영역을 포함한다. 교회개혁을 넘어 기독교사회개혁으로 이해되어진다. 단순한 신자의 삶의 결과가 아니고 생명존중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그의 섭리에 부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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