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이야기

일송정
황 영 준

일송정 늘 푸른 솔
자취도 없고 쓸쓸한 비암산

용주사 종소리에
얼굴 맞대던 애국 선구자들

용문교 다리에서
조국의 광복 굳게 맹세했네

용두레 샘가에서
고향 이야기 눈물진 아낙들

해란강 천년 역사
한 마디 없고 임들도 못 뵙네

조선족. 한 핏줄 한 언어 우리 동족이다.
두만강 건너 도문과 연길, 용정 그리고 훈춘을 왕래하며 만났던 반가운 사람들.
목사인 내게는 오랜동안 단절되었던 이방인 같은 그들을 만남이 큰 기쁨이고 즐거움이고 사명이었다.
일제 때 간도로 떠났던 한맺힌 사람들의 후손,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새 삶의 터를 찾았던
우리네 조상들 삶과 정신을 이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설교하고,
지역 교회를 담당하는 평신도들을 훈련시키고,
무교회 지역에 교회를 설립하고, 필요한 것을 부분적으로나마 나누는 일은 보람이었다.
한국 돈이 가치가 있을 때는 적은 정성으로도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어느 해에 중학교에 장학금으로 1백만원을 드렸더니 10명의 아이들에게 1, 2학기로 나누어서
지급하겠다고 하였다. 교사의 한 달 월급이 한국 돈으로 10만원이 못되는 시절이었다. 

두만강 건너는 도문의 국경 다리. 그 한가운데 중국과 북한을 나누는 노란 선 하나.
그것이 국경이었다. 도문쪽은 중국 병사가, 북한 쪽에는 북한 병사가 경계를 했다.
선 하나를 두고 한 발짝도 옮기지 못했던 긴장된 국경.
동족이 사는 북한 쪽을 바라보기만 했다. 말도 붙여보지 못했다.
그 두만강 어두운 밤에 어디를 건너 탈북하는 것이다. 
자유가 그립고 배가 고파서.
찾아보고, 이야기하고, 나누고 싶은 우리의 혈육인데 만날 수가 없다.

북조선 제비들, 북한 땅에 먹을 것이 없어서 두만강을 건너서 중국 도문으로 건너와
식당가에서 만났던 아이들이다. 먹을 것도 받아먹고, 한 닢 두닢 돈도 받았다.
나이 든 탈북자들도 만났다. 그러나 누구나 가까이 할 수 없었다.
누가 중국 공안이거나 북한의 사복 병사인지 알 수 없었다.

그쪽을 대상으로 사역했던 몇 년을 돌이켜본다.
우리에게 새롭게 열려진 중국에 사는 동족들과의 교류였다. 상황이 많이 변했다.
그 때는 좁은 길로 다녔지만 지금은 대문이 열려진 것 같다.  추억이 새록새록하다.

▲ 중국과 북한을 잇는 도문 국경 다리 중앙에서 중국쪽을 등지고 앉은 동산교회 성도들.

 

▲ 조선족이 많이 모여사는 용정의 용두레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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