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인기다. 한국과 중국에서 동시 방영되며 온갖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군대말투 ‘∼지 말입니다’가 유행어가 됐다. 심지어 박근혜 대통령도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이 드라마를 언급하며 문화 콘텐츠 개발에 힘써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갑자기 생뚱맞은 의문이 든다. ‘과연 이번 주 태양의 후예 시청률이 유지될까?’ 이런 의문이 드는 이유는 이번 주가 ‘고난주간’이기 때문이다. 고난주간이 되면 많은 성도들과 어린이들이 나름의 결단을 한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지 않겠어요.” “아침 금식을 하겠어요.” “새벽기도를 나가겠어요.”

목사로서 이런 결단을 하는 성도들과 어린이들을 보면 흐뭇해진다. 예수님의 고난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냐만, 그래도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마음이 얼마나 예쁜가. 분명 예수님도 흐뭇해하실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연 무엇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일까’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반복된 설교, 반복된 적용, 반복된 결단이 어느새 고난주간을 하나의 행사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염려 때문이다. 한 주간 힘들게 사는 것이 고난인 것은 맞지만 아무 의미 없이 그런다면 자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고난주간은 고난을 받는 주간이 아니라, 예수님을 묵상하는 주간이 돼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삶은 한마디로 ‘희생’이었다. 그 ‘희생’을 고난이라고 부르는 것뿐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사서 고생’하러 내려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오심은 시작부터 희생이었다.

그런데 그 희생이 나를 대신해서 ‘자처한 희생’이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분이 희생하지 않았다면 내가 다 짊어졌어야 할 희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을 보며 ‘참 좋은 분이셔’ ‘그런 분이 우리 예수님이니까 너무 좋다’라는 마치 드라마 속 풋풋한 주인공을 보듯 한다는 생각이 든다.

신앙생활은 희생생활이다. 신앙이 성숙하다는 것은 희생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직분을 받는다는 것은 희생하기로 작정한다는 것이다. 희생 없는 예수 없고, 희생 없는 믿음 없다. 고난주간에 우리가 정말 묵상하고 결단해야 할 것은 ‘나는 내가 처한 삶의 현장에서 어떤 희생을 감당해야 할까’라는 거룩한 질문이다.

희생이 사라진 한국교회를 향해 수많은 질타와 비판이 쏟아진다. 기독교의 실수를 보도하는 기사의 댓글을 보기가 무섭다. 이러한 현실 가운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럴듯한 우리만의 신학이나 구차한 변명이 아니다. 우리의 희생을 통해 예수님을 보여줘야 한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희생이 보이지 않아서 생겨난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통해 예수님을 보여주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한 희생에 한없는 은혜를 덧붙여 주실 것이다.

목숨 걸고 희생하자. 회피하지 말자. 도망치는 우리를 보며 사단이 얼마나 비웃겠는가. 담대히 싸우자. 희생이 승리의 도구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 희생이 회복된다면 분명 우리가 처한 곳에 하나님나라가 누룩처럼 펼쳐질 것이다. 고난주간 말미에 고난은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선포하자. 고난은 ‘주간’에만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임을 선포하자. 그럴 때에 부활의 참 소망과 기쁨을 누릴 것이며 한국교회의 미래는 희망이 될 것이다.

이번 주 태양의 후예 시청률은 낮아지고 온 성도들이 예수님을 집중해 시청하는, 예수님의 후예답게 사는 한 주간, 그리고 그러한 인생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 국민일보 2016년 3월 24일자에 실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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