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 스토리가 뻔한 내용인데도 감동을 주는 요소가 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 나라와 국민을 구하기 위해 직접 전투기를 몰고 외계인을 물리치는 것이나, 전장에 갇힌 군인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병력을 보내 어마어마한 전투를 치루는 그런 영화는 뻔한 미국의 영웅주의를 그린 영화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감동을 받는다. 그런데 근자에 들어와 우리나라 국민들 사이에서는 ‘나라의  지도자들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하려 들지 않으며, 또한 국민들의 생명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팽배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저마다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 오늘 하루 무사하였음에 안도하게 되고 그러다가 내일도 무사할 수 있을까 하는데서 오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면서 속으로 내 가정 내 가족을 위해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하는 다짐을 하게 된다.

‘축소지향’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이어령 선생님이 일본사람들과 일본문화를 설명하면서 사용한 말이다. 간단히 그 의미를 말하면, 우리나라 사람은 자연 속에다 집을 짓는데 일본사람들은 자연을 축소시켜 집안에다가 자연을 들여다 놓는다는 것이다. 큰 소나무를 작은 화분에다 키우는 분재문화도 그렇고, 컴퓨터나 카메라 같은 전자제품도 소형화시키면서 성능을 높이는 것도 그런 축소지향의 일본인 특성을 잘 말해준다는 것이다.

각설하고, 오늘 칼럼의 주제는 가정의 행복이다. 근데 도입이 좀 삐딱 거창하고 거기에다가 축소지향주의는 뭥미? 암튼, 몇 년 사이에 ‘헬조선’이라는 말이 몇 몇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들의 소리가 아니라 광범위하게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도 공감하는 말이 되어버린 것은 엄연한 현실이지 않나 싶다. 게다가 사흘이 멀다하고 들려오는 천륜을 저버린 비극적 사건들의 소식을 들으면서 한 가정이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말하기가 자존심이 상하지만, 교계에 오르내리는 불편하고 불쾌한 뉴스들을 통해 성직자들도 교인들도 서로의 행복을 지켜주고 가꿀 수 있도록 돕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피차가 느끼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는 나와 내 가족의 행복을 어떻게 지켜나가고 어떻게 가꾸어나갈 것인가?

축소지향주의의 반대말은 확대지향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강한 나라들로부터 많이 당한데서 오는 콤플렉스가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콤플렉스에서 오는 확대지향적인 특성이 농후한 것 같다. 그래서 유난히 최초, 최고, 최대를 좋아하며 사실보다 다르게 과대포장하는 면이 많은 것 같다. 그러다보니 개인들도 덩달아 남들에게 소위 ‘야코’가 죽거나 없어보이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고, 그게 노출이 되면 무척이나 자존심 상해하면서 상처를 받는 경우도 많다. 하기사 나도 그랬으니….

내가 가정의 행복을 말하면서 뜬금없이 축소지향주의를 말하는 것은 이 말이 개인의 행복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좋은 방향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가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하면서 훈수들을 많이 둔다. 물론 사회에 대한 거시적 담론도 많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사돈 남 말하듯 남을 혹은 사회를 말하는 것을 지양하고 각자가 자기를 보다 깊이 들여다보며 자기와 자기 가족의 행복을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회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사회구성원이 불행하다는 논리도 성립될 수 있겠지만, 사회구성원 각자가 불행하다보니 사회 전체가 불행하다는 논리도 성립될 수 있지 않겠는가? 내 생각엔 뭐가 먼저냐를 밝히는 것은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를 밝히는 것과 같다고 본다.

개인의 불행을 사회구조탓으로 돌리고 스스로를 그 불행에 가두고 산다면, 결국 자신도 자기 가족도 불행한 삶을 살게 되고, 불행한 가족은 사회를 더 불행하게 만들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불행한 사회구조 속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자는 그 추구하는 노력 때문에 남보다 많거나 나은 행복을 누릴 것이고, 불행한 사회구조 속에서 행복을 일구어가는 그 사람으로 인해 사회는 점점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논리를 가지고서 축소지향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를 위해 소가 희생해야 한다’는 말에 길들여져 있는 면이 많다. 일반사회도 그렇고 종교계 안에도 그렇다. 더구나 자칭타칭 성직자라고 하는 내가 나의 행복 운운하면 함량미달 목사 혹은 이기적인 목사라고 손가락질 당할 위험도 있다. 하지만, 20여년의 목회경험과 사회활동 경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 있다. 사람은 자기가 행복하지 못하면 남을 불행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높은 사람이건 낮은 사람이건, 성직자이건 일반신도이건 피차일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쓸데없이 거창(확대)하게 사회 어쩌구 저쩌구하기 보다는 먼저 관심을 나 자신의 삶에 집중(축소)해서 나와 내 가족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고 불행한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 아들러가 말하는 행복해질 용기를 낼 필요가 있다. 행복해지려면, 쫄지 말아야 한다. 담대해져야 한다. 행복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할 댓가도 정직하게 치루어야 하는 용기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신앙 안에서 행복해질 용기를 내는 자에게는 예수님이 반드시 도와주실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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