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밤 늦게 영화 『귀향』을 봤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그동안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과 정부의 안일하고 무능한 대응에 대한 반감이 생겼기 때문이고, 둘째는 귀향이라는 영화를 봐주는 것이 조금이라도 더 애국하는 것이라는 거룩한(?) 사명감이다. 허허허….

원래 내가 조금 감성적인 면이 있어서 어설픈 감동자아내기 장치에도 쉽게 눈물을 쏟고, 게다가 이제는 남성홀몬보다 여성홀몬의 영향을 많이 받는 50대 아자씨보다니 시도 때도 없이 센치해지면서 눈물샘이 터지는데, 이상하게도 귀향을 보면서는 눈물샘이 터지지 않았다. 아니 잠깐 눈물이 나기는 했는데, 빰에 와닿는 눈물이 차갑더라. 그만큼 영화를 보면서 복잡한 심경이 되었던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 마음을 가장 많이 지배했던 감정은 분노보다는 불편함이었다. ‘이 불편한 감정은 무엇 때문에 생기는거지?’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다가 불편한 감정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영화를 보면서 내 머릿속에는 베트남 도처에 세워져있다는 ‘한국군증오비’가 떠올라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비에는 이런 내용이 새겨져있다. “하늘에 오를 만한 죄악을 만대에 기억하리라. … 미제국주의와 코리아 남쪽 군대가 저지른 죄악을 우리는 영원토록 뼛속 깊이 새기고 인민들의 마음을 진동토록 할 것이다.” 나는 몇 년 전에 처음으로 베트남에 한국군증오비가 있다는 사실과 비에 새겨진 글의 내용을 듣고는 참으로 놀랐었다.

어쩌면, 내가 일본군에 의해 저절러진 만행을 다룬 영화를 본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군증오비를 이야기하면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은 우리가 일본에 대해 진실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만큼 베트남에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해주었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말이 나쁘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을진대, 정말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도덕적 우위에 있다면 일본에게 책임을 물음과 동시에 우리나라가 베트남에서 저지른 과오에 대해 책임을 져주는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좀 생뚱맞지만, 나는 지금 우리나라의 혼란스런 현실이 임진왜란 전의 현실 혹은 한일합방 전의 현실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정치인들도 갈등과 분열대신 평화와 안전을 말하고 국민들도 그걸 간절히 바라지만, 사사기 17장 6절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말씀처럼,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국민들도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역사도 그렇게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다가 망쪼가 든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우리나라 역사도 바로 그런 전철을 밟아왔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다보니 마음의 불편을 넘어 불안이 생긴다.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내 속에 불편함이 생겼던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영화 전편에 흐르고 있는 샤머니즘적 요소 때문이다. 물론 감독이 샤머니즘을 장려하기 위해 그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라 정말 위안부 문제를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나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신뢰를 하면서도 너무 무속적 장면이 많이 나오다보니 그 영화는 은연 중에 마치 우리 사회는 그 분들을 품고 한을 풀어주고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역량이 없고, 그러나 무속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호도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영화를 보면서  차라리 영화속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픽션이 아니라 팩트이듯이, 그동안 뜻있는 분들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많이 품고 치유해드리기 위해 노력해온 것도 팩트이듯이 영화 속에 샤머니즘적 장면들이 들어갈 그 자리에 그런 휴머니즘을 담은 팩트를 넣었더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는 자칭 타칭 상당히 오픈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목사라고 자부하지만, 우리 성도들이나 우리의 자녀들이나 한국교회 성도들에게는 그 영화를 권하고 싶지 않다. 위에서 언급한 불편한 때문이다. 물론 이건 그저 내 생각에 불과하다.

다음으로 ‘귀향’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나그네로 와서 험난한 인생여정을 걸어가면서 귀소본능에 따라 영원한 본향을 사모한다. 요즘 인본주의 사상에 토대를 둔 ‘자기주도’, ‘자존감’, ‘자기효능감’ 이런 라는 말이 애들에게나 어른들에게 굉장히 많이 말해지고 있는데, 사실 우리 대부분은  원치 않는 일에 원치 않는 곳에 끌려가는 인생을 살면서 자존감과 자길효능감이 극도로 저하된 시대를 살고 있다. 특히 요즘은 그 정도가 더 심해 우리가 사는 땅을 가리켜 ‘헬조선’이라고 한다. 참으로 비극이다.

귀향…, 이 귀향은 나의 간절한 소망이기도 하다. 동시에 보기완 달리 철학적 성향에다가 이상주의적 성향을 많이 가지고 있는 내가 영원한 안식처인 그 나라에 무사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도 가지고 있다. 위안부 할머니들에 비하면 새발에 피이겠지만, 나도 내 나름대로 원치 않는 길을 가고 원치 않는 일을 하면서 괴로워하고 버거워할 때가 많이 있다. 그와중에서도 한 여인의 남편이요 두 아이의 아빠, 동네어른들의 아들이자 동네 아이들의 아빠 노릇, 게다가 지역주민들 혹은 이래저래 상하고 약한 이들의 힐러이자 에너자이저 노릇을 하며 살고 있다. 그 삶의 여정이 만만치 않다. 우리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귀향을 해서 연원한 본향에서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을 터. 주여,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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