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와 ‘오빠’는 분명하게 구별이 됩니다.

* 음식점에서... 신발 벗고 방으로 들어가면 아저씨, 테이블에 앉으면 오빠.
* 음식 값을 자기가 내겠다며 서로 싸우면 아저씨, 각자의 식대를 거두면 오빠.
* 노래방에서.... 노래 메뉴를 앞에서부터 찾으면 아저씨, 뒤에서부터 찾으면 오빠.
* 팬티의 모양에서... 사각이면 아저씨, 삼각이면 오빠.
* 이발하는 장소에서... 이발소로 들어가 오래 있다가 나오면 아저씨,
미용실에 들어간 것 같았는데 어느새 나왔으면 오빠.
* 목욕탕에서... 옷을 벗고 배에 힘주면 아저씨, 가슴에 힘주면 오빠.

이와 같이 일상생활에서 자연히 구별되는 것이 아저씨와 오빠이듯이, 성도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구별되는 것은 당연하며 그 때에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물론 그들과의 ‘차별’이 아니라 ‘구별’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참된 성도는 이 세상에서 100% 환영받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두움은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무신세계에서 ‘환영받는 다수’가 아닙니다. 도리어 ‘핍박받는 소수’가 되어야 하며,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까닭은 우리들의 그들 속에서 행동은 그리스도의 향기요, 우리들의 말은 그리스도의 편지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들의 삶은 그들에게 걸어 다니는 작은 교회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성도로서 이제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되게 생활하기 때문에 찾아오는 아픔과 외로움을 도리어 당연하게 여기거나 때론 즐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런 우리에게 이런 참된 소망의 언약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5:11~12).

그러나 성도의 사회생활은 비둘기처럼 순결하면서도 때론 뱀처럼 지혜로워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의 언행으로 인하여 비 기독교인들이 우리에게 지나친 반감을 품게 하는 것은 전도에 적지 않은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일본인 사위를 둔 한국인 장인이 계십니다. 오랜만에 가족모임이 있어 서로 만났을 때 장인 어르신께서 일본인 사위에게 이런 곤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자네가 판단하기에는 독도가 한국 땅인가, 일본 땅인가? 자네 견해를 듣고 싶네!” 정말 곤란한 질문이었습니다. 말 한마디에 서로의 마음이 상할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때 일본인 사위가 이런 대답을 해서 모든 어색하고 당황할 수 있는 순간을 넘겼다고 합니다. “독도는 한국 땅도, 일본 땅도 아닙니다. 독도는 하나님 땅이무니이다!” 그런 지혜를 성령 하나님께 구하고 얻어 “저 친구가 나를 차별하네?!”라는 말보다는 “저 친구는 나와 구별된 녀석이야!”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명절 기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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