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08) 한목협 제32차 열린대화마당

 

▲ 3월 8일(화) 오후3시 성락성결교회에서 열린 한목협 제32차 열린대화마당에서 서울신학대학교 정병식 교수가 "종교개혁의 배경: 중세 후기 교회와 신학적 정황, 면죄부"를 주제로 첫번째 발제를 하고 있다.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독일은 이미 2008년부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루터10년”(Luther2017) 로드맵이 시작되었다. 매 해마다 특정한 주제를 정하여 학술과 문화행사를 펼쳤다. 2008년은 프로젝트 시작의 해였으며, 2009년은 종교개혁과 신앙고백, 2010년은 종교개혁과 교육, 2011년은 종교개혁과 자유, 2012년은 종교개혁과 음악, 2013년은 종교개혁과 관용, 2014년은 종교개혁과 정치, 2015년은 종교개혁 – 그림과 성경 그리고 올해 2016년은 종교개혁과 하나의 세계라는 주제로 각종 행사가 진행되며, 내년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고, 종교개혁이 가져온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의미를 찾으며, 500주년을 기점으로 종교개혁의 현대적 적용과 의미를 모색할 것이다. 다행히 한국에서도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500주년기념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어 매년 다양한 행사를 펼치고 있다.

이 글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기 위한 제반 준비를 모색하면서 종교개혁이라는 시대변혁적 일이 가능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다루었다. 특별히 중세후기의 정치와 신학을 고찰하고,  그리고 종교개혁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면죄부를 다루었다. 중세후기는 곧 스콜라 쇠퇴기(14-15세기)를 말한다. 정치적으로는 한 왕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민족국가가 대두했고. 사회적으로는 시민계급과 민족의식이 고조되었다. 사상적으로는 오캄(William of Ockham 1285-1347)의 유명론 및 민중경건운동의 대두로 인하여 중세전성기의 종합이 와해되는 시기이다. 중세의 와해는 곧 교황청의 몰락을 의미한다. 5세기에 ‘교황’(Pope)이라는 종교적 절대권자의 부상으로 시작된 중세의 교회적 특징도 그 교황의 몰락으로 끝나게 된다.

1. 중세후기의 정치적 상황: 교황권의 쇠퇴

교황(pope)이란 ‘아버지’란 의미이다. 고대교회에서 중세로 넘어오는 시대적 전환기에 교황은 존경받는 감독에 대한 일반적 호칭이었다. 상반된 교리논쟁에서도 교황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대교회의 에큐메니컬 회의를 보면, 431년 에베소회의와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 정통신앙이 확립되는 과정에 로마의 감독이었던 레오(Leo I, 440-461)의 개입을 볼 수 있고, 그로 인해 단성론이 배제되고 기독론에 있어서 양성론이 정착되었다. 로마의 감독이었던 레오를 현대적 의미에서 최초의 교황이라고 교회사는 평가한다. 476년 서로마가 게르만족에 의해서 멸망할 때 교회를 중심으로 감독은 문명의 유산을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했고, 세속적 권력자에게 부여된 자국민 보호라는 제도적 의무가 아닌, 생명존중이라는 천륜적인 차원에서 백성을 돌보고 치리를 담당하여 감독과 교회의 권위는 더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교황제의 실질적인 토대를 구축한 감독은 그레고리(Gregory I, 590-604)였다. 540년경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568년 롬바르드족이 로마를 침략했을 당시 28세의 로마시 행정담당 관료였다. 574년에는 얼룩진 현실을 피해 수도원에 귀의했으나, 감독의 명령으로 다시 시에 복귀했다. 이민족과의 긴 싸움의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당시 교황이던 펠라기우스(Pelagius II, 579-590)가 전염병으로 사망하자, 시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얻고 590년 교황이 되었다. 초기의 교황들은 이와 같이 권력에 대한 욕심과는 무관했고, 전시의 혼란기에 시민적인 필요성과 도덕적 책임의 차원에서 시정에 관여했다.

교황의 세속적 권위에 대한 야욕과 그로 인한 황제와의 갈등은 중세 전반을 통해 계속 반복되어온 성과 속의 갈등사이기도 하다. 10세기 이후로 이러한 갈등은 더욱 노골적이 되었고, 중세 후기에 이르러 교황과 교회의 권위를 스스로 실추시킨 역사적 계기를 제공했다. ‘서임권’(1057-1122)을 놓고 그레고리 7세와 하인리히 4세가 서로 격돌했고, ‘카놋사의 굴욕’이라는 일화를 남기며 교황 그레고리가 일시적으로 승리한 듯 했으나, 결국은 황제에게 굴복 당했다는 역사적 사건은 잊지 못할 교회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세속적 군주에 비하여 교황의 권위를 한 차원 더 높게 고양시킨 이는 교황 인노센트 3세(Innocenz III, 1160출생, 1198-1216)였다. 1198년 교황이 되었을 때 그는 불과 37세의 나이에 불과했다. 그로 인하여 교황권은 절정에 올랐다. 젊음과 더불어 귀족출신이라는 신분과 볼로냐, 파리, 로마에서 공부한 최고의 지성이 그의 장점이었다. 그는 클루니 수도원 등을 통한 교회의 개혁정신을 잘 알았고, 교회를 지키고 교권을 신장시키기 위해서 정치에도 과감히 개입했다. 그의 관심은 무엇보다도 교황령을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적인 주체로 유지시켜서 제국하의 모든 교회를 자신의 관할에 예속시키고 그 결과 교회의 권위와 위상을 구가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당시 열정적으로 번지고 있던 민중 경건 운동에도 효과적으로 잘 대처하여 이단성이 있는 단체는 엄격히 처벌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제도권 안으로 수용하는 포용정책을 병행했다. 교황청과 교회생활을 개혁하고 자신을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ius Christi)라고 스스로 호칭한 그는 세속통치자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까지도 소유했다.

이 시기는 제후들의 각축장이었다. 그들은 황제로 인해 자신의 이익이 침해당하지 않기를 바랐고, 유약한 왕을 선출해서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해 갔다. 하지만 이러는 사이에 군소 제후들이 급성장했고, 대제후들의 세력을 위협했다. 따라서 대제후들은 이제 그들을 지켜줄 강력한 왕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하인리히 5세가 후계자로 지명했던 프리드리히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바바로싸(Friedrich Babarossa)가 왕으로 선출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 1152-90)라는 이름으로 왕이 된 그에게는 두 가지 큰 당면 과제가 놓여 있었다. 로타르부터 콘라트에 이르는 혼란기에 거의 왕권에 도전할 만큼 세력이 커진 제후들을 견제하는 것이 첫째요,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는 것과 빼앗긴 왕의 영지들을 회복해서 유럽에서의 지배권을 강화하는 것이 두 번째 과제였다. 그는 회유를 통해 세력이 강했던 제후들과 협력관계 유지에 성공했다. 내부의 정치적 문제를 정돈한 그는 두 번째 과제를 위해 북이탈리아의 지배정책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교황청과의 마찰을 야기했다. 교황 하드리안 4세에 의해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대관을 받은 그는 다음 교황인 알렉산더 3세가 반황제적 성향의 교황임을 알자, 노골적으로 반대하며 다른 사람을 교황으로 지명하고자 했다. 그 자신도 물론 그러한 사례에 속하기는 하나, 지금까지 교황의 대관에 의해서 황제가 되고, 신성한 역할을 맡게 된다는 전통적 황제의 개념을 변화시켜, 제국이 그 자체로 신성하다는 신성제국(Sacrum Imperium)개념을 처음으로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에 의하면 로마황제는 교황의 허락 여부와 상관없으며, 황제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지상의 대리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프리드리히 바바로싸는 교황과의 세력 다툼이라는 기나긴 역사적 골을 청산하지 못한 채, 1190년 3차 십자군 운동 당시 소아시아에 갔다가 강에서 익사하는 변을 당했다.

다음 황제는 그의 아들인 하인리히 6세(Heinrich VI, 1190-97)였다. 독일의 왕을 세습제로 바꾸어 자신의 가문에서 계속 왕이 나오도록 제안했으나, 제후들에 의해서 거절당한 그는 1197년 갑자기 죽었고, 그 1년 후 1198년 교황 인노센트 3세가 즉위했다.

인노센트 3세는 교황이 세속문제에 관여해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교황이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Vicarius Christi)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교황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지상 대리자였고, 세상의 일을 그리스도의 뜻에 맞도록 가르쳐야 할 의무를 가진 자였다. 그에 의하면 교황만이 본질적인 황제였고, 세속적인 황제는 교황의 명령을 따라 세상 권력을 실행하는 기관에 불과했다. 교황은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으나, 황제는 단순한 속인에 불과했다. 교황과 황제를 그는 해와 달에 비유했다. 그가 주최한 1215년 제4차 라테란 회의(IV. Laterankonzil)는 당시 최고 권위를 구가하던 교황과 교회를 내외에 천명하고,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회의였다. 400여 명의 주교와 80여 명의 수도원장과 참사회원들이 참여했다. 여기서 화체설이 가톨릭교회의 공식 교리로 결정되었다. 물론 이 교리는 이미 존재해 왔으나, 복음뿐만이 아니라 교회를 통한 공식 성찬에 참여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제도화하기 위한 조처였다. 가톨릭 교인은 1년에 1회 고해를 의무화했다. 그리고 대주교는 1년에 1회씩 주교회의를 열어 배교자를 색출하는 것을 의무화했다.

13세기의 다양한 변화는 사실은 중세 전성기가 해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3세기 초까지만 해도 절정에 달했던 교황권이 중세후기에 들어서 쇠퇴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외부적 요인으로 우선 군주들의 재기를 들 수 있다. 군주들은 교황의 권위보다는 자국과 자국민의 권익을 염려했고, 이것을 침해하며 간섭하려는 교황권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교황청을 파괴하고, 교황도 제도권 아래에 예속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둘째는 제도권 교회의 가르침보다는 개인의 신앙고백을 중시하는 평신도들의 도전과 신학자들이다. 중세의 삶의 모든 면에서 철저히 교회에 예속되어 있던 평신도들의 자의식 발견에 일익을 담당한 것은 물론 알프스 이남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운동이었다. 고전과 문화 예술을 통한 인간 가치에 대한 재발견은 교회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던 13세기까지의 획일화되고 왜곡된 교회전통에 강력한 도전이었다. 셋째는 국가간의 전쟁과 각종 질병 등을 들 수 있다. 전쟁은 주변국가들, 혹은 권위를 가진 자들의 측면 지원 속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순수 세속적인 전쟁이라고 할지라도 교회의 영역 및 권위자와 무관한 전쟁은 없었고, 그와 더불어 발생하는 전염병으로 인하여 교회의 권위는 급속히 하락하였다. 이와 함께 교황청의 분열이라는 내부적 요인도 교황권의 붕괴를 촉진시킨 한 요인이다. 

※ 교황의 권위는 인노센트 3세의 후임자들로부터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1216-1227 Honorius III
1227-1241 Gregor IX
1241            Coelestin IV
1243-1254 Innocenz IV
1254-1264 Alexander IV
1261-1264 Urban IV
1265-1268 Klemens IV 
1268-1271 Sedisvakanz
1271-1276 Gregor X
1276            Innocenz V
1276            Hadrian V
1276-1277 Johann XXI
1277-1280 Nikolaus III
1281-1285 Martin IV 
1285-1287 Honorius IV
1288-1292 Nikolaus IV
1292-1294 Sedisvakanz
1294            Coelestin V
1294-1303 Bonifatius VIII

중세 전체는 교황권과 황제권의 불안한 공존이었다. 장기간에 걸친 어느 한편의 완벽한 승리는 없었다. 해와 달의 시소게임이 중세를 특징 지웠다. 후대에 갈수록 교황권이 강화되는 모습을 그레고리 7세나 인노센트 3세를 통해 볼 수 있다. 이에 맞서서 하인리히 4세나 프리드리히 바바로싸, 또 그의 손자였던 프리드리히 2세(1215-1250)는 황제야말로 유럽의 진정한 절대 군주이자 성과 속의 지배자임을 천명하고자 힘을 기울였다.

교황 인노센트 3세와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전성기의 영권과 속권의 대표자였다. 인노센트의 상대적 우위는 중세 교회를 전성기로 이끌었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롬바르드를 빼앗고자 노력하는 중에 죽었다. 그의 죽음으로 독일의 왕조는 호헨슈타우펜이 실제로 끝나고 후에 합스부르크 왕조가 생겨나는 계기를 주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 콘라트 4세(Conrad IV, 1250-64)가 독일의 왕위를 이었으나 4년 만에 죽어, 독일은 다시 제후들의 각축장이 되자, 이 과정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Rudolf, 1273-91)가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 13세기에 민족국가라는 새로운 통치형태가 구축되었다. 지방에 분산되어 있던 다양한 개별적인 힘들이 중앙으로 통합되었다. 중세교회에 비하여 여태까지 중앙집권적인 정치적 세력은 없었다. 중앙집권적인 정치적 세력이 없었기에 교회는 중앙집권적인 로마교황청 체제로 그 정치적인 세도에까지 권력을 확장시킬 수 있었으나, 민족국가가 프랑스에서부터 서서히 시작됨으로 교회의 정치적 권력형성에 근본적인 배경이었던 이러한 전제들도 이제는 없어진 것이다. 새로운 민족국가의 형성과 도시들의 경제적인 부흥으로 기사제도 역시 그의 역사적인 종말을 맞았다. 십자군의 시대도 이제 결국 지나갔다.

군주들의 교황청지배의 직접적 예는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이다. 프랑스의 교황청지배인 이 사건의 발단은 우르반 4세(Urban IV, 1261-64)로 인해 비롯되었다. 프랑스인 이었던 그는 교황이 되자, 프랑스인들을 추기경으로 많이 임명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시칠리를 프랑스 왕의 친척이자 앙쥬의 영주였던 샤를에게 헌납했다. 당시 프랑스는 존엄왕 필립 2세(1180-1223) 이후 안정된 체제를 갖추어가고 있었기에 체제유지를 위한 정치적 의존이었던 것이다. 경건왕 루이 9세(Lewis IX, 1226-1270)와 필립 4세(1285-1314)를 거치면서 프랑스는 더욱 강해졌다. 한편 이태리에서는 교황의 자리를 놓고 두 가문이 격렬하게 싸워, 10명의 교황선출추기경단은 이태리인과는 무관한 제3의 인물인 켈레스틴 5세(Celestine V)를 교황으로 세웠다. 그는 수도사로서 은둔을 좋아했고,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살던 나폴리는 당시 프랑스의 제후 칼 2세의 통치하에 있었기에 아무런 사심 없이 8명의 프랑스인 추기경과 4명의 나폴리인 추기경을 임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으로 교황청의 프랑스 예속을 더 굳혀버린 계기를 제공했다. 교황직이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다고 판단한 켈레스틴 5세의 자진 사임후 등장한 후임 교황이 바로 보니페이스 8세(Boniface VIII, 1294-1303)이다. 그에 의하여 한 세기 전 인노센트 3세 시대에 있었던 교황권의 절정이 다시 재현되는 듯했다. 교황권의 강조가 그에 의하여 극에 달했으나, 실제로 교황권 자체는 그러나 정상에 이르지 못했다.

그는 교황의 역할보다는 재물이나 권력에 더 관심이 많았다. 이태리의 귀족들은 이것을 좋게 보지 않았으나, 그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교황의 권위와 영광만을 탐닉해 나갔다. 그때 마침, 본인이 원인제공을 한 것은 비록 아니라 할지라도, 세속군주와 부딪혀야만 하는 전쟁이 발발했다. 후대에 ‘백년전쟁’이라고 부른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이다. 이것은 현재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계지역에 있는 가스코뉴(Gascony)의 소유권 전쟁이었다. 본래는 영국왕의 봉토로 되어 있던 이 지역을 1294년 프랑스 왕이 몰수했고, 화가 난 영국의 에드워드 1세(Edward I, 1207-1307)가 프랑스를 침공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전쟁비용이었다. 영국의 에드워드 1세나 프랑스의 필립 4세는 그 비용을 교회를 통해서 충당하고자 계획했다. 이러한 상황에 가장 민감하게 거부반응을 일으킨 것은 교황 보니페이스 8세였다. 교회의 돈은 곧 자신의 돈이었고, 교회를 통한 군비 조달은 곧 자신의 재산의 손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1296년 “사제에게 주는 명령”(Clericis Laicos)이라는 칙령을 반포하고, 어느 나라의 사제도 교황의 허가 없이 군주에게 세금을 내는 행위를 금한다고 선포했다. 1299년에는 교황은 스코틀랜드를 교황의 소유로 선언하고 영국의 에드워드 1세에게 스코틀랜드 정복을 금지시켰다. 이것은 영국과의 마찰의 시작이었다. 이것은 각국의 군주에게는 내정간섭이자, 세속권력에 대한 교황의 도전이었다.

프랑스의 미남자 필립 4세와의 대립은 교황 패배의 절정을 이루었다. 프랑스왕 필립은 즉시 같은 명령을 내려 자국의 돈이 어떤 명목으로도 타국으로 유출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또한 궁정에 파견된 교황대사인 파미어스의 감독 베르나르 드 쎄쎄(Bernard de Saisset)를 체포하여 배반자요, 명예 훼손자로 재판에 회부해 버렸다. 그에게는 두 가지 임무가 있었다. 첫째는 필립이 약속한 십자군 수행에 대해 지도하고, 둘째는 십자군의 목적으로 거두는 십일조를 오로지 십자군 준비를 위해서만 쓰도록 조처키 위해서였다. 그러나 교황청 사신을 보낸다는 자체가 왕에게는 하나의 도전이었다. 또한 대사의 선택 역시 필립을 자극했다. 왜냐하면 쎄쎄는 왕실에 반하는 인물로서, 교황의 대사임을 뻐겨 오만불손했다.

교황 보니페이스 8세는 이에 맞대결했다. 교황은 ‘세상의 구원자’(Salvator mundi, 1301년 12월 4일)라는 교서를 통해 대사 석방과 보고를 위해 로마로의 귀환, 그리고 프랑스에 대한 교황의 이전의 모든 허용을 취소했다. 또한 프랑스의 최고의 지도층들, 곧 모든 감독, 신학자, 성당의 대표자들을 로마로 오도록 요청했다. 그래서 프랑스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그들의 조언을 듣고자 했다. 그러나 교황청 내의 분위기가 그를 지원하지 않았다. 즉 이태리의 귀족들과 수도사들은 그의 권력탐욕과 물욕으로 반(反) 보니페이스 8세였던 것이며, 그의 교황 직위의 무효를 주장했다. 프랑스 의회(삼부회, 귀족, 승려, 국민으로 구성) 역시 필립을 지지하며, 교황을 이단자요, 파문해야 한다고 강경 대응했다. 교황은 프랑스와 영국왕의 조처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예외적인 상황이 있음을 인정했다. 즉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는 과세의 주체가 왕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이것은 교황권 몰락의 첫 징조였다.

하지만 교황은 물러서지 않았다. 반격으로 그는 1302년 11월 8일에 발표한 ‘우남상탐’(Unam sanctam ecclesiam, 하나의 거룩한 교회)이라는 교서를 통해서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모든 교회는 교황의 지도아래 통일을 이루고 있고, 따라서 영적 권위가 통치자요, 세속권력은 그의 피통치자이며, 교황은 단지 하나님에 의해서만 판단 받는다고 선언했다. 또한 교황에 대한 순종은 구원의 절대적 조건이라고 천명했다(“subesse pontifici Romano omni creaturae humanae omnino est de necessitate salutis” 로마감독에게 복종하는 것은 모든 인간적인 피조물들에게 구원의 절대성에 관한 것이다). 그는 두 검, 즉 영적 그리고 세속적 검의 소유자였고, 하나님이 임명한 왕의 판사였다.

‘Unam Santam ecclesiam’(1302,11,18)의 내용은 여섯 가지이다. 첫째, 교회는 하나이며, 유일하다. 둘째, 하나의 몸과 하나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 셋째,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대리자, 베드로와 베드로의 후계자이다. 넷째, 베드로는 구원의 전수자요. 교황은 베드로의 후계자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역할을 한다. 다섯째, 어느 누구도 그가 만약 교황의 통치하에 있는 교회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임을 주장할 수 없다. 여섯째, 두 검의 원리이다. 세속적 검은 교회를 위해서 수행되어야 한다. 두 검은 교회의 권한에 있다. 영적인 검은 사제의 손에 있다. 세속적 검은 왕과 전사의 손에 있으나, 사제의 명령을 받는다. 하나의 검은 다른 검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즉 세속적 검은 영적인 검에 복종해야 한다. 영적인 권력이 잘못된다면, 인간이 아닌, 그 보다 더 높은 하나님에 의해서 바로 잡아져야 한다. 교황에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에 대항하는 것이다. 로마교회에 복종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다.

교황은 필립의 파문조치를 준비했으나, 프랑스 왕 필립은 이에 뒤지지 않고 스스로 세상의 통치자라고 자처하던 교황을 노가렛의 빌헬름(Wihelm von Nogaret)을 중심으로 하는 몇몇 무장인들을 시켜 아냐니(Anagni)의 성으로 잡아와 버렸다. 이러한 과정이 교황이 세속지배의 몰락을 보여준다. 그 후 교황은 귀족들과 아냐니의 시민들의 요청에 의해 석방되었으나, 그 충격으로 몇 주 후 1303년 10월 11일 로마에서 죽었다. 이후 프랑스의 교황청 지배는 더 두드러졌으며, 그 어느 때도 교황권은 다시 재기하지 못했다. 이 사건은 교황 보니페이스 8세 개인뿐만 아니라, 교황권 자체의 몰락을 대변해주는 것이었다.

보니파키우스의 실패에는 적어도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는 그 자신의 인격적인 취약점과 자기기만이다(자질부족). 그의 교황임기는 중세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에게서는 영적수장으로서 내면적 힘, 용기, 덕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행한 정책은 시대착오적인 특징만을 가진 것이었다. 또 하나는 그는 인노센트 3세 이후 종교와 정치 분야에서 일어난 실질적인 변화를 체감치 못했다(시대의 구조적 변화). 왕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와 영국이라는 새로운 국가들이 등장했다. 이들 국가는 자신들의 영지 내에 있는 교회의 통제권을 결코 로마에 넘겨주려 하지 않았다. 세속세력은 알레그로(allegro)로 달려가는데, 교회는 안단테여서 시대적 흐름에 발맞추지 못했고, 새로운 국가들과 계속 마찰을 빚은 것이다. 전적으로 성직자주의적인 교회는 평신도 중심화 되어 가던 시대를 파악치 못한 것이다.

프랑스의 교황청 지배는 교황 클레멘트 5세(Clement V, 1304-1314) 때부터 본격화되었다. ≪보니페이스 8세(Boniface VIII, 1294-1303) - 베네딕트 11세(Benedict XI, 1303-1304) - 클레멘트 5세(Clement V, 1304-1314)≫. 프랑스왕의 위협에 시달리던 다수였던 이탈리아의 추기경이나 소수의 프랑스의 추기경들이 그를 선출한 것은 클레멘트 5세가 프랑스인이었지만, 영국 왕 에드워드1세의 신하였고, 그로인해 커다란 문제는 없을 것으로 판단해서였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그는 1304년 교황이 되자, 프랑스 지역인 리용(Lyon)에서 취임식을 거행하고, 거처를 프랑스의 아비뇽(Avignon)으로 옮겨버렸다. 또한 추기경 28명중 25명을 프랑스인으로 다시 임명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약 70년간의 프랑스 왕 산하의 예속기간(1309-1376)을 ‘교황청의 바벨론 포로시대’라고 일컫는다. 이 기간은 교황청의 해체 기간이었고, 각 지역에 있던 교회와 성직자들도 교황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군주의 권력 아래로 흡입되어간 기간들이다.

교황청이 독자적인 세력으로 그 영적인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하자, 교황청 운영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이태리 교황의 영지로부터는 세금도 오지 않았고, 기존의 교황청 수입을 이루었던 여러 재원들도 왕에 의해서 탈취당했다. 교황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도를 강구해야만 했다. 소위 임명세는 새로 임명된 주교가 그 대가로 1년 수입을 몽땅 교황에게 헌납하는 제도이다. 종교개혁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면죄부도 이런 연유에서 만들어진 교황청의 일종의 재원확보 제도였다.

아비뇽 교황청은 그레고리 11세(Gregory XI, 1370-1378) 때에 다시 로마로 돌아왔다. 그러나 70년의 교황청 포수 기간은 심각한 휴유증을 동반했다. 교회와 신앙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한 백성이라는 생각은 사라졌고, 민족 간의 갈등이 더 노출되어, 그레고리 11세가 죽자, 그 후임 교황으로 로마인을 선출하라고 로마의 시민들은 요구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우르반 6세(Urban VI)가 교황에 취임했다. 그는 다수를 차지했던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을 노골적으로 모욕했다. 그 결과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은 아비뇽에 다시 모여 우르반 6세의 선출은 강압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라고 선언했고, 스위스 제네바의 추기경이었던 로베르를 클레멘트 7세(Clement VII, 1378-94)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교황좌에 앉혔다. 한명은 로마, 한명은 아비뇽, 이렇게 두 명의 교황시대를 맞은 것이다. 이들은 서로 상대를 비난하고 파문했고, 유럽은 각자가 가진 이해관계에 따라 둘로 나뉘어졌다. 이태리, 독일, 보헤미아, 폴란드 등 동유럽지역과 영국은 로마의 교황을 지지했고, 프랑스, 스페인, 스코틀랜드, 나폴리, 시칠리 등은 아비뇽의 교황을 지지했다. 교황과 교황청의 영적 위엄은 이로 인하여 완전히 사라졌고, 정치 집단으로 쇠퇴한 것이다.

분열은 4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교황교회의 겉치레와 교황청의 무분별한 세속화는 영적 세계의 피폐를 가져왔다. 개혁공의회의 필요성은 이러한 상황에서 제기된 것이다. 교황청의 분열은 반드시 해결해야만 할 시급한 문제였다. 그 결과 1409년 피사(Pisa)공의회가 소집되었다. 공의회의 결정은 기존의 두 교황의 폐위와 새로운 교황의 선출이었다. 그러나 기존의 두 교황이 이에 불복했고, 결국 세 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모양이 되어버렸다. 이런 사태는 1414-1418년에 열린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세 명을 퇴위시키고, 마틴 5세(Martin V, 1417-1431)를 단일교황으로 선출함으로 해결되었다.

 

2. 중세 후기의 신학적 정황

중세후기의 전체적인 발전은 보편적인 거대한 기독교라는 몸체 안에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난 도약과 균열이 특징이다. 점차 증가하는 차별(Differenzierung)과 개인화(Individualisierung)로 특징 지워진 중세후기의 신학적 사고 역시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중세후기는 교회성이 최고 절정에 이른 시기’라고 묄러(B. Moeller)가 말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모든 국민들의 교회에로의 밀착을 의미한다. 즉 교회는 산발된 여러 제도를 통해 중세후기를 사는 사람들의 전체적인 삶을 다스렸던 것이다. 모든 경건행위의 한 가운데는 영혼의 영원한 구원에 대한 문제가 있었다. 중세후기의 교회의 부패에 대한, 가령 면죄부나 혹은 교황청의 권력과 금전정책에 대한 비판은 위클리프나 후스와 연관된 두 개의 개혁운동이 실행했다. 정신사적으로 본다면 종교개혁이전에 두 개의 중요한 운동들이 진행되었다. 즉 르네상스와 인문주의이다.

교회 내부가 분열로 난립되어 있을 때, 교회 밖에서는 새로운 정신문화가 싹텄다. 14세기에 이태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르네상스 운동이다. 이 르네상스는 기존의 신중심적인 세계구조 이해에 반기를 들며 인간에 대한 관심을 주제로 한 인간의 재발견운동이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저항이나 도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적 차원에서도 함께 일어나고 있던 인간과 세속에 대한 관심이 개화했다고 볼 수 도 있다. 르네상스 운동은 확실히 중세의 구조적 변화를 가속화시켰고, 가톨릭교회의 약화와 교황지상주의의 쇠퇴에 일조를 담당했다. 오늘날에는 르네상스를 이태리를 중심으로 한 알프스 이남의 르네상스와 유럽을 중심으로 한 북유럽의 르네상스로 나누고, 후자를 종교개혁과 연관 지으며, 전자를 인문주의와 연결하는 것이 일반적 이해이다.

르네상스의 기운에서 싹이 튼 인문주의는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고전문헌 연구(그리스 로마 고전의 문화 가치의 재생을 추구)에 헌신한 학문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중세의 주춧돌이었던 신앙에다 고전문학에서 중시하는 지혜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고전연구를 위해서 헬라어를 연구했으며, 히브리어를 탐구했다. 그 결과 플라톤이나 세네카 등의 고전문헌이 재등장했고, 고대 기독교 문헌들도 발굴하고 재생시켰다. 기존 문헌을 원전 검토를 통해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일도 병행하여 ‘콘스탄티누스 증여’ 문서가 가짜임을 밝힌 것도 인문주의자들의 공헌이다(로렌조 발라, Lorenzo Valla, 1406-75). 중세교회에 갇혀있던 성서도 이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고, 라틴어 성서와 헬라어 성서를 비판적으로 비교 연구함으로 텍스트 비평에 새 길을 열어 놓았다. 종교개혁은 우선 인문주의 한 정신, 즉 중세적 사고의 협소함으로부터의 인간의 자유라는 정신을 이어받았다. 그 때문에 인문주의는 어느 정도 종교개혁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인문주의는 스콜라처럼 사상의 건물을 세우지 않았고, 오히려 성서와 고대의 이념세계에 뿌리를 둔 경건을 묘사했다. 이것이 인문주의의 기본적인 주제가 된다. 즉 기독교와 고대의 모습을 통한 교회의 갱신과 개선이다.

이태리의 르네상스는 교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아비뇽 포수 이후에 등장한 교황들은 르네상스나 인문주의를 수용하고 추종했다. 이들은 교황의 권위와 권력을 고양시키려했던 그레고리 7세나 인노센트 3세 혹은 보니페이스 8세와는 달리, 교황청이나 로마를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려는 인간적 노력이 강했고, 문화와 예술의 후원자 역할을 하려는 욕구는 점점 비대해진 반면 영적 모델의 역할은 다하지 못했다. 롤란드 베인톤은 가톨릭 역사가들의 말을 인용하여 그 시기의 교황들을 “세속화되고, 품위가 없고, 경박했으며, 관능적이요, 호사스러웠으며, 제멋대로였다”고 평하고 있다.

르네상스 교황의 첫 예는 니콜라스 5세(Nikolas V, 1447-1455)이다. 학문에 대한 관심과 로마를 학문적 전당으로 만들려는 그의 노력으로 바티칸 도서관이 세워졌다. 칼릭스투스 3세(Calixtus III, 1455-58), 피우스 2세(Pius II, 1458-1464)에 이어 등장한 바울 2세(Paul II, 1464-1471)는 사치와 향락, 그리고 성적 방탕 등 특별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고대 로마문화를 지나치게 애호했고, 우상까지도 복원하고자 많은 비용을 썼다. 식스투스 4세(Sixtus IV, 1471-1484)는 돈으로 추기경들을 매수하여 교황이 되었으며, 자신의 이름을 따 식스틴 대성당을 세웠고, 사적인 재산증식을 위해 부당한 세금제도를 운영한 결과, 가격의 폭등 등 많은 어려움을 초래시켰다. 이후 등장한 인노센트 8세(Innocent Vlll, 1484-1492), 알렉산더 6세(Alexlander Vl, 1492-1503), 율리우스 2세(Julius II, 1503-1513)도 전임교황들과 동일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개인의 사욕을 위해서 교황의 지위를 악용한 사람들이다. 르네상스 교황의 마지막 주자는 종교개혁시대의 교황이었던 레오 10세(Leo X, 1513-1521)였다. 그가 추진한 베드로 성당의 신축도 르네상스 교황다운 무리수였고, 그로인해 많은 재원이 필요하자, 면죄부 제도를 재시행한 것이다.

문화나 예술사적으로 볼 때 이들 르네상스 교황들은 긍정적인 평가를 얻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회와 관련하여 그 주어진 직임과 본질을 놓고 본다면, 결코 좋은 평가만을 얻을 수는 없다. 르네상스나 인문주의는 굳이 종교개혁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정신사나 문화사적으로 볼 때 중세를 끝내고, 새 시대를 연 시발점이었고, 고전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성경 원전에도 눈을 돌려 교회를 새롭게 이해하고, 인간과 신앙에 대한 바른 이해를 그 안에서 찾도록 신선한 동기를 부여해 주었다.

200여 년에 걸친 교회의 타락과 쇠퇴, 영국과 프랑스의 장기간의 전쟁(100년 전쟁), 여기에 흑사병은 일반백성들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현실과 현실에서의 신앙은 더 이상 만족하지도, 평안을 보장해주지도 못했다. 이들은 기적이 일어나서 현실적인 불안을 씻어주기를 바랐다. 신앙의 태도는 자연히 신비적으로 빠져 들어갔다. 스콜라신학이 주창하던 이성과 추론을 통한 합리적 해결은 이제 더 이상 대안이 되지 못했다. 14세기 말엽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새로운 경건(devotio moderna)운동은 이러한 암울한 현실로부터의 탈출구였다. 새로운 경건운동의 목적은 하나님을 경외하되, 단순 소박하게 경외하고, 매일의 삶에서 성실성과 절제를 잃지 않고자 하는 신앙적 삶의 재현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몸부림은 큰 사회적 관심을 얻지도 못했고, 역으로 큰 영향력을 끼치지도 못했다.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en)의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 christi)는 이 시대의 민중경건운동을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이다.

그런데 참된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순수성은 여지없이 교회에 의해서 이용당하고 말았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교회 밖에서 일어난 신앙운동이 순수한 청빈과 가난운동으로 전개될 때에는 이단으로 매도하고, 영혼의 구원과 관련된 본질에 머물러 있을 때는 그것을 역이용하여 교회의 치부의 수단으로 삼았다. 르네상스 교황들의 사치와 문화적인 욕구를 채우는 데에는 마침 많은 재원이 필요했고, 때를 같이해서 일어난 민중경건운동은 교회의 돈벌이에 좋은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르네상스가 문화적 측면에서 등장했다면, 정신사 측면에서 시작된 것은 유명론(Nominalismus)이다.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5/66-)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출생으로 곤잘레스의 평에 의하면, ‘아우구스티누스-프란시스 전통의 극치를 이룬 인물’이다. 그는 프란체스코회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1291년 프란체스코회 소속의 사제(司祭)가 되었다. 보니페이스 8세(Boniface VIII, 1294-1303)가 교황으로 등장하여 인노센트 3세 시절의 교황권의 영광을 재현하려고 시도하던 시대에 파리와 옥스퍼드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1293-1296). 1302년 스콜라 철학자로서 파리 대학의 교단에 섰다가, 1308년 쾰른으로 초빙 받았다. 그는 프란체스코회의 전통적인 아우구스티누스주의를 대표하여 토마스주의적인 학파와 대립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의도는 전통을 비판하고 파괴하자는 것이 아니고, 아우구스티누스적이며 프란시스코적인 사상을 체계화하고 종합함과 동시에 토마스적이며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스콜라신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성찬에 있어서 화체설(化體說)을 옹호했고, 마리아의 무흠수태(동정녀에게 원죄가 있음을 부인하는 것, 1854년 교황 피우스 9세가 공식적인 교리로 확정)를 주장했다. 그는 신학이란 실제적인 학문이어야 한다는 프란시스파의 기본입장을 고수했다. 이것은 신학이 공허한 사상적 체계로 끝나서는 안 되며, 삶 속에 적용되는 구체적인 것이어서 인간의 창조목적을 획득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무흠수태에 대해 초대교회 교부들은 성모 마리아를 거룩하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무죄하다고는 보지 않았다. 그러나 차츰 그녀의 거룩함을 완전무결한 것으로 믿고자 하는 경향이 일어났고, 서방교회에서는 10-11세기경에, 비록 교의로 확정되지는 않았으나 일반적으로 수용되었다. 동방에서는 이와는 달리 8-9세기경에 일어났다가 11세기경에 사라졌다. 특히 서방에서는 12세기경에 마리아의 잉태를 기념하는 축제가 재개되면서 논쟁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논쟁은 축제를 지키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문제로부터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잉태할 당시 원죄아래 있었는지에 대한 신학적인 문제로 발전해갔다. 베른하르트는 그러한 축제 및 신앙에 대해 “성령께서 아기의 잉태처럼 본래적으로 악한 일에 개입했을 리가 없다”고 일축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만일 동정녀의 영혼이 원죄 아래 있지 않다면, 그리스도가 만인의 구속자라는 교의와 상충된다”며 마리아의 무흠수태를 부인했다. 그러나 둔스 스코투스는 “마리아는 아직 원죄 아래 있지 않았지만, 원죄에 물들 가능성은 있었다”고 말함으로 무원죄잉태설과 구속론을 절충시켰고, 무흠수태 신앙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에 입각해서 이성보다 의지의 우위를 주장한다. 그 결과 신앙의 문제를 다룰 때에 이성을 배제하고자 했던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신은 자유하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을 넘어서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이성은 신을 사유하기에 적절치 않다. 의지는 행동을 유발하는 유일한 원인이다. 또 모든 것은 신의 자유이며 한없는 사랑의 발로로서, 신이 바라는 것은 모두가 선이라고 설명한다. 의지는 보편적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의지는 하나님 자신 밖의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규정될 수 없다. 신적 자유, 이것은 스코투스에 의하면 신학의 중심이다. 선이 선되는 것은 다만 하나님이 선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르고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기 때문에 그것은 바르고 의로운 것이다(Gott will nicht etwas, weil es richtig oder gerecht ist, sondern weil Gott es will, ist es richtig oder gerecht). 세계가 이러한 세계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지적 필요성도 필요치 않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부정하는 것(하나님이 하나님이기를 그만두는 것) 이외에는 무엇이나 가능하다. 스코투스는 이것을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potentia Dei absoluta)라고 불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절대적인 힘을 일정한 질서를 갖는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서만 사용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 힘을 하나님의 질서를 통한 힘(하나님의 질서력 potentia Dei ordinata)에다 한정시킨 셈이다. 세계가 이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하고자 하는 것을 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계시(말씀과 율법)에 의해서 구원이 이루어지게 계획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질서력 때문이다.

질서를 통한 하나님의 힘(potentia Dei ordinata) 배후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절대적 힘(potentia Dei absoluta)이 있다. 하나님의 권능을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아무런 모순이 없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진 두 개의 힘의 능력이 아니라, 한 권능의 두 가지 실행방식일 뿐이다. potentia ordinata 배후에 언제나 potentia absoluta가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위협적인 것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질서력이 이 세상에 있기는 하나, 하나님이 원하면 절대적 권능으로 모든 것을 달리 변화 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사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주어져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그리고 이 주어져 있는 것을 이성적으로 연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이 현실에 대해서 겸허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상은 안셀름의 화해론과 속죄론과 대립된다. 안셀름은 구원의 길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인간과의 필연적 관계로서 서술한다. 그러나 스코투스는 이러한 필연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질서 지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신이 의지로서 - 곧 신이 지성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신 자신에 의해서만이 규정되는 것으로서 - 파악되는 순간 세계는 불가능한 것이 되며, 불확실한 것이 되며, 불안정한 것이 된다. 면밀한 사변(思辨) 때문에 ‘정묘(精妙)한 박사’(subtle Doctor)라고 불리운 스코투스는 중세의 종합(Synthese)을 와해시킨 최초의 비평가였다. 토마스에게서 이루어진 신앙과 이성의 종합이 스코투스에 의해서 결렬되기 시작하고, 결국 스콜라주의가 몰락하게 된다.

3. 면죄부와 루터의 면죄부 비판

16세기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타락한 중세기독교에 대한 거부이자, 새로운 틀짜기였다. 다시 말하면, 종교개혁은 제도, 전통, 성서와 무관한 교회의 삶 그리고 인간 권위 중심적인 중세 기독교를 거부하고, 성서와 하나님의 은혜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교회 형성, 즉 ‘새판 만들기’였다.

중세후기의 수도원, 교회 그리고 성직자는 혼탁이라는 말로 그 실상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둠속에 있었다. 교회와 성직자는 겸손, 청빈 그리고 경건에 있어서 성서의 가르침과는 정반대 현상을 보였다. 보편성을 강조하는 가톨릭교회의 유기체적 성격은 언제나 엄청난 액수의 돈을 필요로 했다. 돈에 대한 욕구는 강하면 강할수록 다양한 제도를 등장시켰다. 교황의 성직 독점과 성직 분배 내지 할당은 언제나 큰 액수의 돈이 오고 갔다. 초년도성직상납금(fructus primi anni) 징수율을 높이기 위하여 많은 성직자를 자주 교체했다. 다음 자리를 예약하도록 대기표도 판매했다. 대기자들은 동일한 자리를 두고 동일한 대기표를 구입했다. 공석이 생길 경우, 성직은 경매처럼 팔려나가 분쟁도 자주 발생했다. 교회는 법적인 판결에 높은 비용을 부과하였고, 지불을 이행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파문도 불사했다. 슈미트에 의하면, 14세기 중엽 이후 7명의 대주교, 49명의 감독, 123명의 수도원장 그리고 2명의 수도사에게 위증죄를 선고하고 벌금을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출교시켰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불러온 직접적인 촉매제는 면죄부(indulgentia)였다. 면죄부를 뜻하는 인둘겐시아(Indulgentia)는 ‘완화’ 혹은 ‘경감’(Milderung)을 뜻하며, 참회에서 보속의 행위(Satisfactio operis)를 대체해주는 기능을 가졌다. 보속의 행위란 죄를 범했을 경우, 고해성사를 통해 용서를 얻었으나, 그 죄로 인하여 발생한 형벌을 없애기 위해 고해신부가 부과하는 공로적 행위이다. 죄 그 자체가 아니라, 죄로 인하여 발생한 벌을 면해주는 것이며, 따라서 면벌부가 정확한 이름이나, 행위의 보속을 대체했기에 행위의 보속을 정해주는 고해신부에게 가는 것이 불필요하게 되었고, 죄를 사해주는 신부의 용서(Absolutio) 단계가 자동으로 생략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죄 자체를 면해주는 것으로 이해되어 ‘면죄부’라고 불렀다. 교회는 본래 고대교회 때부터 죄로 인하여 고통을 겪는 신자들을 돕고자 노력했다. 참회제도는 그 노력의 일환이며, 이것은 세례 이후 죄를 범하고 두려워하는 신자를 돕고자 만든 교회적 제도였다. 죄인에게 정죄나 혹은 영원한 형벌이 아닌 생명과 삶으로의 길을 제시하고자 끊임없이 모색했다는 점에서 고대교회의 참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중세시대에 이르러 죄로 인한 형벌을 해결하려는 극단적 대체방법들이 등장했다. 십자군참여와 로마의 순례는 그 대표적 예이다. 중세후기에 교회가 강한 재정적 압박을 받으면서 죄와 연관된 교회제도는 교회 수익을 창출해내는 도구가 되었다. 사람들은 고통스런 참회의 행위를 하는 대신에 비용을 부담하고 형벌의 감면을 받았다.

로마교회는 소위 ‘르네상스교황’인 알렉산더 6세(1492~1503), 율리우스 2세(1503~1513) 그리고 레오 10세(1513~1521)를 거치면서 건축과 예술에 막대한 돈을 쏟아 부었다. 37살에 교황이 된 레오 10세는 종교적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로마를 건축과 예술로 치장하는 일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바티칸 궁을 열정적으로 재건축하고, 성 베드로 성당을 개축했으며, 율리우스 2세의 건축가였던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di Pascuccio d’Antonio, 1444~1514)를 다시 고용했다. 교황궁의 공무실은 브라만테의 추천을 받은 라파엘(Raffael da Urbino, 1483~1520)이 백마를 탄 레오 10세의 그림으로 장식했다. 건축과 예술 외에도 사냥, 무도, 연극 등에 관한 레오 10세의 다양한 취향은 항상 자금난을 불러왔다. 그는 돈이 많은 귀족들에게 성직을 약속하며 기부를 요청하여 부족한 재정을 보충했다. 특히 면죄부는 종교적 사회나 다름없던 중세시대에 투자 없이도 큰 돈을 벌어들이는 수익원이었다. 1516년 요한 텟첼(Johann Tetzel)이 베드로 성당 개축 자금을 위한 독일지역 면죄부 대사로 임명되었다. 1517년에는 독일 마인츠, 할버스타트 그리고 마그데부르크 대주교인 알브레히트(Albrecht von Brandenburg)의 위임을 받아 아이스레벤, 할레, 체릅스트, 베를린, 유터보그 그리고 마그데부르크에서 면죄부를 판매했다.

텟첼의 면죄부 판매는 루터가 사제로 있던 비텐베르크 신자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그 결과 루터의 95개 면죄부 반박논제를 불러와 종교개혁이 일어났으며 프로테스탄트가 등장했다. 루터는 가난한 자에게 주고 궁핍한 자에게 꾸어주는 것이 면죄부 매입보다 더 나음을 그리스도인에게 가르쳐야 한다(논제43)며, 중세교회나 교황에 대한 적대적 표현이 없이(논제71)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표명하고(논제58) 토론하기를 원했다. 면죄부의 구입은 신자의 기본적 삶인 ‘회개’를 불필요하게 만든다. 루터는 논제 1에서 “예수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4:17) 하신 것은 믿는 자들의 전 삶이 회개의 삶이기를 원한 것”이라며, “진실한 회개가 벌과 죄책으로부터의 완전한 사면(赦免)을 가져 온다”고 논제 36에서 강조했다. 더 나아가 논제 28에서는 “하나님만이 구원할 수 있으며, 사람은 다만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고 밝히고, 그 믿음의 근거는 성서밖에 없다고 명시했다.

루터의 면죄부 비판 논제는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00~1468)의 활자 인쇄술에 힘입어 신속하게 독일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중세후기에 등장한 르네상스와 인문주의는 교회에 대한 비판적 음성이 대중에게 파고들 수 있는 좋은 배양토가 되어 주었다. 루터는 다만 면죄부의 타당성에 대해 성서에 기초한 학문적 토론을 원했다. 그러나 일반대중이 면죄부를 비판한 그의 95개조에 대해 열광적으로 편승하면서 처음에 의도한 대학 안에서 할 수 있는 토론의 한계를 벗어나고 말았다. 루터의 문제제기는 곧 일반대중의 문제제기가 된 것이다.

루터가 교회의 오류를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탁월한 신학적 통찰 덕분이다. 리처드 포스터의 말처럼 “그는 신학적 질문들의 핵심을 파악하고, 놀랄만한 독창성과 기세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1518년 하이델베르크에서 논한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은 루터의 신학적 통찰의 금자탑이다. 루터에 의하면, 모든 것이 십자가를 가리키고, 모든 것이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룬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죄의 값을 지불했고,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고,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케 하고 평화를 가져왔다. 십자가는 하나님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길이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정의와 평화 그리고 은혜와 사랑을 보여준다. 따라서 십자가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신학자이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인간의 공로와 업적, 즉 가시적인 것에 토대하여 비가시적인 하나님을 표현하려고 했던 중세교회의 소위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을 거부했고, 중세교회의 거대한 신학적 구조를 뿌리 채 흔들어 놓았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신학적 통찰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어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그리고 몰트만(Jürgen Moltmann)을 통해 현대에까지 개신교신학의 요체가 되고 있다.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직(Nachfolge)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것임을 강조했고,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통해 희망의 신학을 역설했다. 교회의 교회됨은 십자가 신학과 그리스도의 고난을 얼마나 충실하게 뒤따르는가에 있다.

신학적 통찰을 통해 참된 복음과 교회의 사명을 알리려는 측과 제도와 권력을 방패로 기득권을 사수하려는 측과의 싸움은 불가피했다. 에라스무스(Erasmus von Rotterdam, 1466/9~1536)는 가톨릭을 견고한 성에 비유하며, 루터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견했지만 시대가 달랐다. 놀랍게도 지배층을 넘어 모든 평범한 사람들이 루터와 함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루터가 의존한 것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의존하며 교회의 오류에 맞섰다. 하나님의 말씀은 루터에게 창이자 방패였다. 1520년 종교개혁 3대 저서가 출간되고, 교회의 오류와 성직자의 오용이 무엇인지를 성서를 근거로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중세교회는 루터를 이단으로 몰아붙이며 출교와 파면으로 협박했다. 개혁의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루터와 그를 따르는 개혁진영은 중세교회의 비교회적 요소를 성서를 근거로 바로잡아 달라며 계속 노크했다. 그러나 시정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Augsburg)에서 개혁을 원하는 정치가와 신학자들이 모두 모였다. 신학자를 대표한 멜란히톤(Melanchthon)은 개혁진영의 요구를 담은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Confessio Augustana)를 작성하여 황제인 칼 5세에게 제시했다. 28개항으로 구성된 개혁진영 신앙고백서는 신앙, 칭의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더욱 명확한 입장을 밝혔다. 인간은 자신의 힘이나 선행이나 행위로 자기를 의롭게 할 수 없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연습한 결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말적인 선물이다. 이것은 밖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며, 은총 또는 그리스도의 의는 단지 신앙 안에서만 받거나 실현 할 수 있는 것이다.

1529년 슈파이어에서 등장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는 새로운 틀이며,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새로운 틀에 담긴 내용이 되었다. 루터의 개혁은 결과적으로 그가 소속된 가톨릭교회의 쇄신이나 오류의 시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돌리고,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의를 얻는 다는 내용의 틀을 가진 프로테스탄트로 등장했다.

루터 신학의 핵심이 칭의론으로 귀결되지만, 종교개혁은 결코 칭의론 발견에서 그친 것은 아니다. 루터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신앙을 통한 칭의를 말하면서 동시에 칭의의 복음이 올바르게 선포되지 않는 중세교회의 갱신을 시도했다. 그가 처음부터 원한 것은 또 다른 제2의 중세교회가 아니었다. 오직 칭의의 복음을 증거하는 하나의 교회만이 그의 소망이었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진정성을 결과적으로 등장한 프로테스탄트를 근거로 교회분열로 귀착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새로운 틀로서 프로테스탄트의 등장은 올바른 교회를 염원한 종교개혁의 필연적 결과이자, 역사 속에 반복하여 등장한 개혁 패러다임의 전형적인 실례이다.

4. 나가는 말

지금까지 종교개혁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았다. 먼저, 개혁의 불가피성을 교회의 리더십에서 찾았다. 교황은 본래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출발했다. 그러나 중세가 깊어 갈수록 본질과 고유의 과제에서 벗어났고, 교황직은 권력과 이권의 각축장으로 변질되었다. 때로는 두세 명이 난립하여 다툼을 벌이는가 하면, 섬기는 자가 아닌 지배자와 통치자의 전형이 되었다. 재물과 권력을 놓고 세속군주와 시소게임을 벌였고, 화려한 건축과 사치스런 예술에 도취한 르네상스 교황들이 등장했다. 약 70년간의 교황청의 아비뇽 시절(1309-1376)과 이후의 약 40년간의 교회분열시대(1378-1415)는 중세 후기의 타락한 리더십이 표출한 흉측한 교회의 한 단면이다.

교회 밖에서는 르네상스와 인문주의라는 새로운 정신문화가 싹이 텄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관점의 변화와 고대에 대한 관심(ad fontes)은 중세의 구조적 변화를 가속화시키고, 중세교회와 교황지상주의의 쇠퇴에 일조했다. 종교개혁 역시 새로운 정신사조의 영향으로 중세적 사고의 협소함을 이겨내고 인간의 자유라는 정신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르네상스 역시 교회에 의해서 그 본질이 훼손되었다. 교황은 르네상스적 기치를 자신들의 업적과 공로로 포장하고 자신들의 욕구와 욕망을 채우는데 이용하여 예술의 순수성이 빛을 잃게 만들었다. 중세에는 신학적 정황도 불분명하고 불명확했다. 무엇보다도 유명론의 등장은 이성적 기반의 스콜라신학을 무너뜨렸다. 유명론은 이성보다 의지를 강조했다. 둔스 스코투스는 의지는 신학의 중심이라고 보았고, 하나님의 의지가 세상의 원리라고 역설했다. 하나님의 영역을 이성적으로 접근 가능하다고 본 스콜라신학과 이성보다는 의지에 더 우위를 두었던 유명론은 루터가 보기에 지나친 자의적 해석이었다.

중세후기에는 종교성이 최고조에 달했으나, 교회는 그것을 악용하여 면죄부를 팔고, 부를 축적했다. 면죄부는 참회에서 보속의 행위를 대체하는 것으로서 형벌을 없애는 기능을 가진 것이다. 중세후기 이르러 재정적 압박에 시달린 교회는 이러한 면죄부를 수익 창출의 도구로 전용했다. 사람들은 고통스런 참회의 행위를 할 필요가 없었고, 형벌 심지어 죄 자체까지도 사면 받을 수 있었다. 면죄부는 루터의 관할권인 비텐베르크 신자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면죄부를 비판하는 95개 논제를 발표하여 성서에 기초한 학문적 토론을 원했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어주었다.

사실 참회와 칭의는 바울에 의하면 직접적 관계가 없다. 로마서 어디를 읽어도 참회가 칭의를 가져온다는 말은 없다. 참회를 행하면 칭의를 얻을 수 있다는 사상은 로마의 법률사상을 통해서 기독교를 이해한 결과요, 터툴리아누스에게서 온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참회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에 인간을 그 지은 죄의 정도에 따라 벌하셔야 하지만, 죄 용서함을 받고, 다시 살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참회의 행위였다. 고대교회의 이러한 참회이해는 중세 스콜라에 전해져서 참회를 행하면, 칭의를 얻을 정도는 아니나 벌은 확실히 면하는 것으로 정리되었고, 이러한 형벌을 면해주는 권세를 교회가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세교회는 성자들이 자신들의 죄를 상쇄하고 남은 공적을 교회가 관리하고 있기에 그 잉여의 공로에서 죄지은 사람들이 받을 형벌을 사해줄 수 있다는 전거를 삼았다. 이러한 논리는 한 단계 더 진전되어 교회가 개인의 죄를 사해주고 영적인 구원을 베풀 수 있다는 주장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그 구체적 예가 십자군 전쟁의 경우이다. 십자군에 참여하지 않고, 재정적으로 십자군을 돕기만 해도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경건에 대한 열망, 거룩과 성화의 삶을 살고자 하는 신자들의 마음, 죽음과 형벌을 두려워하는 신심을 이용해서 교회는 돈을 벌고자 했고, 그 목적을 이루는데 면죄부를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사람들의 종교적 경건심리와 죽음과 형벌에 대한 공포를 치부의 수단으로 삼은 르네상스 교황들에 대한 도전과 반감들은 유럽 곳곳에서 저항을 일으켜, 보헤미야의 후스(Hus), 영국의 위클리프(J. Wyclif), 이태리의 사보나롤라(G. Savonarola), 프랑스의 페트루스 발두스(P. Waldus)라는 개혁 이전의 개혁가들을 만들어 내었고, 마침내 종교개혁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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