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08) 한목협 제32차 열린대화마당

▲ 3월 8일(화) 오후3시 성락성결교회에서 열린 한목협 제32차 열린대화마당에서 한목협 상임회장 김원배 목사(꿈동산교회)가 "한국교회, 종교개혁 500주년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나?"를 주제로 세번째 발제를 하고 있다.

1. 들어가는 말

종교개혁 500주년을 눈앞에 두고 한국교회의 개혁을 꿈꾸는 일은 시의  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선교역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한 세기 안에 이루어낸 한국교회의 성장은 밖에서 보면 “기적”같은 일이요, 안에서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실로 한국교회의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배 그리스도인들의 피나는 눈물과 기도와 헌신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최근 몇 해 동안의 한국교회 신뢰도와 호감도 조사가 말해주듯이 한국교회 전체가 위기를 겪고 있는 것 또한 더 설명이 필요 없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신뢰도는 낮아지고 호감도가 줄어들어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며 세상을 변화시켜야할 자리가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며 조롱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는 종교개혁 500주년이라는 문턱을 넘기 위해 지나온 날들을 꼼꼼히 짚어보면서 새로운 방향설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기독교가 지금까지 지나치게 앞만 보고 달려왔다면 이제는 위도 쳐다보고 옆도 바라보면서 우리가 제대로 된 곳으로 가고 있는지 우리의 방향과 그간의 족적을 살펴보면서 비판적 성찰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때입니다. 경주자에게 속도보다 중요한 것이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빨리 달려간다 할지라도 엉뚱한 방향으로 간다면 그것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해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고 그 위기론은 이제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과연 한국교회가 교회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인지, 아직도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인지, 30년 후의 한국교회의 모습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 걱정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어디에서부터 헝클어진 실타래 같은 한국교회의 위기 현실을 풀어야 할 것인지 실로 난감한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 안에서 오늘 동역자 여러분들과 함께 이러한 우리의 자화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희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2. 본론: 무엇을 어떻게?

저는 오늘 두 가지 관점에서 우리 문제를 담당하는 발제자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첫째는 종교 개혁 500주년을 앞둔 이 시점에서 한목협의 입장에서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이며 둘째는 목회자의 입장에서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먼저 한목협의 입장에서 무엇을 어떻게 대해서 말씀드리고 두 번째는 목회자의 입장에서 무엇을 어떻게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한목협의 입장에서라면 먼저 구조적인 면에서의 접근입니다.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온 후 오늘까지의 우리 한국교회가 처한 현실적인 상황과 현재 우리 자리의 구조적인 것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이 구조 속에서 중요한 자리에 있는 우리 목회자들의 입장에서의 접근입니다.

2.1 한목협 탄생의 역사적 의미와 과제: 불가능의 가능성

제가 가끔 지면을 통해서나, 발표의 자리에서 이런 내용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본론으로 들어가지 전에 먼저 한목협의 지난 시간을 잠시 돌아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한목협의 탄생 배경과 정신이 오늘 이 자리의 우리들에게 주는 커다란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회고해 보건대 한목협의 탄생 자체가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받아 참된 교회를 이루어 가고자 하는 목회자들의 열망이 결집된 결과로 나온 것이라고 믿습니다. 한국교회역사상 처음으로 복음주의 진영에 속한 목회자들과 에큐메니칼 진영에 속한 목회자들의 협의체인 한목협의 탄생을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사가이신 이만열 교수는  한국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이루어진 열린 진보와 열린 보수의 만남으로 의미 있는 평가를 했습니다. 그는 한국교회의 전진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을 닫힌 보수와 닫힌 진보의 양극화로 인식하고 한목협의 탄생이 한국교회의 창조적인 미래를 열어주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닫힌 진보와 닫힌 보수의 양극화의 현실을 넘어 제 3의 길을 열어가고자 했던 한목협은 목협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동역자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일치, 갱신, 섬김으로 설정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8년 동안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 나름 몸부림쳐왔다고 생각합니다. 발제자는 이 세 가지 목표 설정 속에 한국교회의 현실 속에서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가고자하는 목회자들의 열망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며  앞으로도 이 목표를 충실히 실천해가는 것이야말로 종교개혁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한목협의 초창기 설정된 이 세 목표야말로 지속적으로 추구해 나가야할 유의미한 가치이고 시대적으로 요구되는 현실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발제자는 이 3가지 기본적인 목표 속에 숨어 있는 정신을 밑바닥에 깔고 한목협이 지향해야 할 종교개혁 500주년을 향한 준비의 과제 그리고 목협의 회원들인 우리 목회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연합을 통한 일치의 과제입니다.

한목협은 창립초기부터 한국교회의 일치야말로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는 한국기독교의 일차적인 과제임을 인식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이러한 일치의 노력가운데서 우리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받은 세계기독교 교회들의 일치 노력가운데서 축적된 지혜를 이어받아 한국교회의 연합을 통한 일치를 성취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왔다고 봅니다. 한목협의 연합을 통한 일치의 노력은 한국교회 연합을 위한 교단장협의회(The Association of Moderators for Uniting Korean Churches)의 탄생으로 나타났습니다. 한목협의 교단장협의회의를 통한 일치노력은 당시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통합을 통한 명실 공히 한국기독교를 대표할 수 있는 하나의 연합기구의 창출을 목표로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괄목할 만한 성과도 있었으나 현재는 세 개의 연합기구로 나누어져 한국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공교회성이 아직 구축되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교단장협의회의 복원을 통한 일치의 노력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으나 별다른 성과는 기대하기가 힘든 실정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를 명실 공히 대표할 수 있는 통일된 연합기구를 창출하는 일은 한국교회가 꼭 성취해야 할 일차적인 개혁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이 일치의 문제는 현실적으로 매우 필요하고 절실한 문제임에도 일치에로의 길은 참으로 지난하고 쉽지 않은 험난한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국교회의 연합을 통한 일치의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논의되어져야 하며, 이러한 논의를 통해 일치를 위한 합의를 도출하고 해법을 찾아서 반드시 실현해야 할 과제입니다. 명실 공히 한국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연합기구를 세우는 일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 시대에 주신 명령입니다. 다시 강조하건데 한국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연합기구의 창출을 통해 하나 된 공교회의 모습을 갖추어 일치를 드러내지 않고는 한국교회는 결코 한국사회로부터 신뢰를 회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많은 분열과 흩어짐이 기독교인 스스로에게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로부터 얼마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는지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한국교회가 이루어야할 제 1차적인 개혁의 목표는 한국교회의 연합을 통한 공교회성의 확보입니다. 한국교회가 이 연합의 관문을 통과하여 하나 된 기구로 세워질 때 한국교회가 한국사회로부터 새로운 신뢰를 회복하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로 창출될 연합 기구가 달성해야 할 목표는 무엇입니까?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구는 마치 우리나라를 통치하고 있는 정부가 하고 있는 것과 같이 교회정부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연합 기구는 한국사회 안에서 교회가 실천해야 할 선교적 과제를 총체적으로 다루는 기구가 될 것입니다.  지금도 교단적으로, 개교회적으로 많은 일들을 하지만 연합된 일치 속에서 이루어내는 사역들은 더 큰 시너지 임팩트로 하나님나라를 확장해 갈 것입니다. 물론 한국교회의 연합회에 회원이 될 교회들은 공교회의 성격을 가진 교회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한목협은 교단장협의회를 창립하면서 공교회의 성격을 네 가지로 정리한 것들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킵니다.

1)이단시비가 없는 교단, 2)정관에 따라 총회와 지방회(노회)를 가지고 있는 교단, 3)교육인적자원부의 인가를 득한 신학대학을 가지고 있는 교단, 4)교단장의 주소와 교단의 주소가 다를 것 등입니다. 이러한 공교회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한국교회의 정부인 연합기구가 일차적으로 추구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구는 한국사회안에서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구는 공교회를 대표하는 진보적이고 보수적인 교단들이 대표를 파송하여 서로 협력하고 연합하여 시대와 사회의 도전에 대해 일치된 목소리를 내고 선교, 교육, 봉사 등의 과제들을 공동으로 수행하는 장이 될 것입니다. 먼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구가 한국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시급히 해결해야 할 긴급한 과제 몇 가지를 언급하고자 합니다.

현재 한국교회를 명실 공히 대표할 수 있는 연합기구를 창출시키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고  연합기구가 한국교회를 위해 해야 할 과제도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보여지는 것은 일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을 불가능의 가능성으로 만들지 않으면 한국기독교의 창조적인 미래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한국기독교가 죽지 않고 살기위해서는 연합기구의 창출과 연합기구를 통한 한국교회의 개혁의 작업은 우리 시대가 필연코 성취해야 할 시대적인 과제이고 지혜를 모아 풀어야 할 커다란 숙제입니다.

첫째로 연합기구가 시급히 단행해야 할 개혁의 과제는 난립한 신학교들을 정리하여 목회자 교육의 수준을 높이고 목회자가 되는 자격기준을 통일하여 부실한 목회자가 양산되는 구조를 막는 일입니다. 한국교회가 신학교의 정비를 통해서 목회자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승려제도 때문에 망한 신라의 전철을 밟게 될지도 모르는 우려를 대전신학대학 허호익 교수의 글을 기독공보(허호익, 기독공보, 2012.2.25, http://www.pckworld.com/news/articleView.html?idxno=52767)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삼국사기 내용중 천년왕국 신라가 망한 것은 사찰이 너무 많고 승려가 너무 많은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승려가 되면 군대에 가지를 않고, 세금을 내지 않고 노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국토방위에 헌신해야 할 한창 나이에 사내들이 군대에 가지 않으니 국방력이 약해지고, 세금을 내지 않으니 국가 예산이 줄어들게 되고, 노동을 하지 않으니 생산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승려가 너무 많으니 국력이 약해져 망국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는 것이 김부식의 견해입니다.

우리나라는 매년 313개의 신학교에서 15,000명의 목회자들이 배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목회자 과잉 배출에 따른 대혼란을 해결해야 하는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존경받는 장로교신학대학의 원로교수이신 박창환 박사께서 장신대에서 강연을 하면서 7개 신학대학이 당분간 몇 년 동안 신입생을 받지 말자는 제안을 한 바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개교회는 신학대학교 교수들을 선교사로 생각하고 이들의 생활비를 부담하도록 하자는 대안까지 제시하여 큰 호응을 받은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바 있습니다(박창환 교수의 견해도 같은 기독공보에서 특집으로 다루었다. http://www.pckworld.com/news/articleView.html?idxno=52613).

오늘 한국기독교도 매년 신학교에서 양산되는 부실한 목회자의 문제를 속히 해결하지 않고는 한국교회 앞에 다가올 재앙은 불을 보듯 뻔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수도권은 수도권대로 그렇지만 지방은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부실한 신학교 정도가 아니라 교수라는 군소교단의 목사가 평신도의 집을 찾아가 저녁시간에 신학공부를 몇 년 시키고 안수를 주는 웃지 못할 일들도 많습니다. 이런 현장을 우리가 보더라도 그것이 타교단이고 통제할 하나 된 기구가 없다보니 누가 제제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연합기구가 창출되면 무엇보다도 먼저 부실한 목회자를 양산하는 신학교의 정리와 목회자가 되는 과정의 기준을 통일하는 작업을 창조적으로 잘 감당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목회자의 자질문제도 향상될 것이고 전문적인 사역자로서의 준비도 체계적으로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의 근원을 깊이 들여다보면 목회자의 위기에서 비롯된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목회자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리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교회에서 목회자가 다른 구성원들에 비해 보다 중요한 역할과 기능을 맡고 있기 때문에 목회자의 수준은 곧 교회의 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한국교회의 목회자의 질적 수준으로 영성과 전문성은 어떠한지, 과연 한국교회에서는 누가, 어떤 자격을 지닌 사람을, 어떤 절차와 방법을 통해 선발하고 있는지, 어떤 면을 가장 중시하면서 목회자를 선택하는지, 또한 목회자의 교육과 훈련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잠깐 한국교회의 현실을 떠나 종교개혁의 중요한 근거지 역할을 했던 16세기 제네바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칼뱅의 제네바는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541년 제네바의 교회법령(박경수, 한국교회를 위한 칼뱅의 유산, 대한기독교서회, 2014, 148쪽)에 따르면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서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그 생활이 거룩하고 순전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내적소명을 받은 사람 중에서 교리와 생활의 외적 검증을 거친 사람만이 목회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건전한 교리뿐만 아니라 깨끗한 생활의 검증을 요구한 이유는 생활이 거룩하지 못하다면 목회자로서의 권위를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목회사역자체가 망신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목회자들의 성적 추문, 물질적 부정행위, 명예욕과 야망으로 인해 겪는 한국교회의 고통을 생각해 볼 때, 16세기 제네바교회에서 목회자의 자격 조건으로 거룩한 생활을 강조했다는 내용이 눈에 띠는 대목입니다. 제네바의 목회자 선발 기준과 방식에 현재 우리의 실상을 비춰볼 때, 한국교회에서 목회자가 되는 길이 너무 쉽고, 넓고, 편안한 길이 아닌지 목회자 후보생의 영성, 인성, 지성을 검증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 아예 없는 것은 아닌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교회연합회가 기울여야 할 다음의 중요한 과제는 목회자가 되는 기준의 통일과 더불어 목회자들의 생활비의 평준화를 위한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논리에 의해서 각 교회별로 천차만별로 지급되고 있는 목회자 사례비의 평준화를 통한 정의의 실현이 없이는 한국교회가 연합된 힘을 발휘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필자는 독일교회에서 선교동역자로 일했던 경험을 통해서 독일교회는 목회자들의 봉급 평준화를 실천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독일교회는 우리처럼 수많은 교파로 나누어져 있지 않고 주 지역총회(Landeskirche)라는 구조를 통하여 하나의 교회를 이루고 있고 그리스도인들이 매월 봉급에서 지불하고 있는 종교세를 통해서 교회의 재원을 조달하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를 우리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간의 정의의 실현이야말로 한국교회가 넘어야 할 커다란 산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최근 서울신학대학 겸임교수가 저지른 만행은 개인윤리의 차원에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개척교회를 하면서 극심한 생활고를 겪어야 했던 처절한 가난의 현실이 그를 범죄에 이르게 하는 구조적인 문제였다는 것을 한국교회는 알아야 합니다. 동역자님들도 그 개척교회 목회자의 현장검증 영상에서 부천이라는 수도권 도시지만 낡은 철대문과 누추한 집안 분위기를 보셨을 줄 압니다. 어찌어찌해서 유학을 하고 돌아와 대학에서 시간 강사도 하고, 개척목회도 했지만 너무 생활이 핍절하다 보니 가정의 아이들을 돌보기가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분이 잘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목포에 가서 사역하는 가운데 우리 한국교회 지방 목회자들의 경제적인 삶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상위 10% 정도의 중대형 교회의 목회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생활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모님들이 다양한 직종의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식당의 주방보조부터 막노동현장까지 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이중직 문제가 검토되는 것도 가장 큰 원인은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목회자와 사모는 기도 시간이 줄어들고, 생계를 꾸리기에 지쳐 성도를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현실이 때로는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목회자로서 품위를 떨어뜨릴 수도 있고, 목회적 권위가 추락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런 표현을 쓰기가 괴롭고 아프지만 “먹고 사는 문제”가 목회자에게 육신의 문제가 아닌 영성을 갉아먹는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광야 시험을 힘차게 외칠 수 있는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목회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이러한 한국교회 목회자들 사이에 현존하는 양극화의 현실을 극복하지 않고는 앞으로도 비슷한 경우의 문제가 터지지 않는다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 당시에는 수도원에 부가 많이 축적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종교개혁교회는 개혁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수도원의 재산을 개방하여 가난과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하고 복지기관을 만들어 정의롭고 은혜로운 구조를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현재 한국교회의 부가 축적된 곳은 어디입니까? 선교현장의 복음전파를 위한 것입니까? 한국과 세계의 굶주린 생명들을 위한 나눔의 현장입니까? 교회 세습 문제가 한국교회개혁의 중요한 과제로 인식되고 있는 배경은 무엇입니까? 연합기구는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주신 은혜를 정의롭게 나누고 분배할 수 있는 은혜로운 방법을 창출하여 한국교회가 처한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하고 결집된 힘으로 한국사회를 개혁하고 선도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빵의 문제는 내 육신의 문제이고, 너의 빵의 문제는 나의 영적인 문제이다. 때문에 나의 빵보다도 너의 빵문제가 더 급하다”고 외치지는 못할지언정 나를 위한 소유와 축적의 불균형으로 양산된 한국교회의 문제를 푸는 것이 우리의 커다란 과제입니다.

2.2 목회자의 입장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교회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거세다는 말씀을 이미 드렸습니다. 왜 한국교회의 위기와 개혁의 절박성을 말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를 생각할 때 다양한 이유들을 제시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위치를 지키지 못한 삶이 그 이유라고 여겨집니다. 특별히 한국교회의 목회자가 목회자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목회자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이 한국교회위기의 근본 이유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목회자가 자신의 임무를 바로 수행할 때 성도들도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게 될 것이고 한국교회가 교회다움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발제자는 16세기 제네바의 목사로서 목회자의 임무가 무엇인지 충실하며 목회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분투했던 제네바의 칼뱅과 취리히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하인리히 불링거’를 통해서 목회자의 임무가 무엇인지, 목회자라면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이 시간 동역자님들께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2.2.1 칼뱅

먼저 칼뱅입니다. 칼뱅에 따르면 “하나님으로부터 내적 소명을 받고, 교회로부터 정당한 절차에 따라 외적 소명을 받은 목회자는 누구든지 사도적이며 목회적인 직무가 명하는 두 가지 임무를 신실하게 수행해야만 한다”(박경수,칼뱅을 통해 본 목회자의 역할과 임무, 위에서 언급한 그의 책 한국교회를 위한 칼뱅의 유산, 146 제 5장을 참조)고 말했습니다. 칼빈은 목회자에게 부과된 두 가지 임무는 곧 주님께서 마태복음 28:19절과 누가복음 22:19절에서 사도들에게 명하신 바, 복음을 전하고 세례와 성례를 거행하라는 명령으로서 이것은 “거룩하고 신성불가침의 영원한 법”(기독교강요IV,3,6)이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칼빈은 사도적 직무를 계승한 목회자에게는 “복음을 전하고, 성례를 집행하는 두 가지 특별한 임무”(같은 곳)가 주어져 있다고 보았습니다.

칼빈이 1541년 작성한 교회법령에는 목사의 임무를 세 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목사의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가르치고, 훈계하고, 권면하고, 책망하는 것이며, 성례를 집행하며, 장로들과 동료들과 함께 형제애적 교정을 행하는 것이다”(John Calvin, “Draft Ecclesiastical Ordinances”(1541). LCC, J. K. S. Reid tr, “Calvin: Theological Treatises”(London:SCM Press, 1954). 58)라고 했습니다. 먼저 그의 설교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하겠습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사역하는 동안(1536-1538) 쉬지 않고 설교했습니다. 그는 스트라스부룩에서 제네바로 돌아온 1541년부터 1564년 죽을 때까지 쉬지 않고 설교하였습니다.

칼빈의 설교는 대체로 1시간 이상 지속되었고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성서를 가지고 강단에 올라가서 원고나 메모 없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1549년 이후 제네바에서는 주일에는 3번의 예배와 1번의 교리문답 교육이 있었고, 주중에는 매일 1번, 수요일에는 특별기도회로 2번의 예배가 있었습니다. 그의 설교 방법은 연속 강해방식이어서 한 권의 책을 택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연속하여 설교하였습니다. 그는 주일 오전에는 신약, 오후에는 신약이나 시편, 주중에는 구약을 강해하였고, 성탄절이나 부활절과 같은 특별한 때에는 강해설교를 일시 중단하고 절기에 합당한 본문으로 설교하였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1549년 8월 25일 제네바교회는 대단히 의미 있는 결정을 하였는데, ‘라구에니어(Denis de Raguenier)’라는 속기사를 임명한 것이 그것입니다. 라구에니어는 1560년 죽을 때까지 칼빈의 설교를 속기로 받아 적는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였습니다. 칼빈의 설교들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전적으로 그의 덕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칼빈의 설교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위에 언급한 박경수 교수의 책 149쪽 이하를 보라.).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목회자인 우리 자신이 더 집중하고 진력하여 이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있어 설교는 최선을 다해 감당해야 할 하나님이 주신 사역중의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요즈음은 정보매체가 발달하여 수많은 목회적 정보들이 온라인상에 있습니다. 때로 쉽게 설교할 수 있는 방법이 목회자들에게 유혹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의 진정성 있는 설교가로서의 면모를 우리는 배워야 할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한 가운데서 한 몫을 했던 이들의 목회적 발자취와 행적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뜨거운 결단과 삶의 실천과 태도를 배우고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칼빈의 성례에 대한 이해를 간단히 집고 가려고 합니다. 칼빈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두 가지 표지가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은 바로 말씀과 성례였습니다. 기독교강요(기독교강요IV,1,12)에서 칼빈은 “순수한 말씀사역과 순수한 형태의 성례전 거행, 이 두 가지 표지가 있는 공동체를 교회라고 간주하는 것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말씀사역뿐만 아니라 성례를 집행해야 할 막중하면서도 고유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에 교회의 참된 표지로서 참된 예배의 회복을 통한 성만찬의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그는 사도행전 2장 42절의 말씀,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는 말씀 안에 예배의 중요한 요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는 것이요, 서로 교제한다는 것은 성도간의 섬김과 세상을 향한 구제가 이루어진다는 것이요, 떡을 뗀다는 것은 성만찬이 거행된다는 것이며,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칼뱅은 말씀선포, 구제, 성만찬, 기도(찬양)가 예배의 핵심적 네 요소라고 보았습니다. 칼뱅은 말씀과 성만찬이 균형을 이룬 예배를 지향했습니다. 칼뱅은 비록 의회의 견제로 인해 한 달에 한차례 성만찬을 행하는 것으로 만족하긴 했지만, 그는 기독교 강요에서 매주 성만찬을 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힌바 있습니다. 성만찬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총과 형제자매의 일치를 확인하고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칼뱅에 따르면 성례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세례와 성만찬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성례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격려하기 위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약속을 우리 마음에 보증하시는 외적인 표징이며, 또한 우리 편에서는 하나님과 천사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충성을 증언하는 외적인 표징”(기독교강요IV,14,1)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한국교회의 목회현장에 있는 동역자님들에게도 칼뱅의 이러한 목회적 철학과 실천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2.2.2 하인리히 불링거(1504-1575) (다음에 서술되는 내용은 스위스 취리히대학교 EMidio campi 교수의 Die Zuericher Reformation:Die Bullinger Aera1531-1575라는 논문에서 발췌요약했음을 밝힌다.)

하인리히 불링거는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울리히 쯔빙글리가 1531년 가톨릭군과의 카펠 전투에서 전사한 후 약관 31세에 쯔빙글리의 후계자로 부름 받아 43년 동안 취리히 대성당의 목회자로 일하면서 스위스 종교개혁의 지도자로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그도 칼빈처럼 거의 전체 성경을 순서대로 강해했습니다. 그가 1549-1551년까지 행한 설교전집이 일어, 영어, 불어, 홀랜드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 대한 100편의 설교, 다니엘서에 대한 설교 66편, 에레미아 170, 이사야서에 대한 190편의 설교는 잘 알려진 설교들입니다. 그는 또한 모든 신약성경에 대한 주석서를 남겼습니다. 그는 칼빈과의 부단한 교류와 대화 가운데 스위스 제 2신앙고백서를 완성함으로 장로교신학의 근간을 만든 종교개혁자가 되었습니다. 1566년에 탄생한 제 2스위스신앙고백 첫 번째 조항은 종교개혁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시 여겼는가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 첫 번째 조항에 다음과 같은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Praedicatio verbi Dei est verbum Dei”(die predigt des Wortes Gottes ist Gottes Wort)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이 선언은 목회자가 얼마나 말씀에 생명을 걸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직 말씀으로 그 말씀을 전하는 것이 설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강단의 설교를 종교개혁 당시의 설교자들이 본다면 어떤 평가를 내릴지 궁금합니다. 목회자들이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을 시럽으로 발라서 말씀 본연의 핵심을 비껴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는 강단에서 외치는 말씀을 스스로 자신이 철저히 말씀으로 검증해 보면서 설교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과 그 말씀에서 나온 설교는 설교자의 엄중한 하나님에 대한 의무감에 대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설교자의 의무는 진리, 정의, 그리고 상호적인 사랑이 세계가운데 빛처럼 침투해 들어감으로 사회의 다양한 영역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도록 성경을 사실대로 주석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말씀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특별히 루터와 쯔빙글리의 성만찬에 대한 이해의 차이로 분열 위기로 치닫고 있는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분열을 막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는 칼빈과 3년에 걸친 끈질긴 대화와 교류를 통해 루터교와 개혁교회 사이에 놓은 성찬에 대한 차이를 극복하는데 합의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여 칼빈과 함께 1549년  성만찬에 대한 취리히 합의문(Consensus Tigurinus)에 서명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쯔빙글리의 후계자로 취리히를 중심으로 종교개혁 운동을 이끌었던 하인리히 불링거는 칼빈과의 깊은 교류 가운데  스위스 제2 신앙고백서를 통해 장로교회의 초석을 놓았던 개혁자였습니다. 한목협의 현장에 계신 우리 동역자님들도 이처럼 말씀 안에서 하나와 일치를 향한 부단한 기도와 노력이 함께 해야 합니다. 1년, 5년, 아니 10년이 더 걸리더라도 한국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지속적이고 일관성 있는 최선의 노력들이 한목협 안에 있을 때 말씀의 역사와, 한국교회의 변화의 역사가 함께 일어날 것을 확신합니다.

칼빈과 불링거는 하나님의 부름 받은 목회자로서의 사명의식 가운데 목회자로서 그들의 자리를 지키며 종교개혁교회의 근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특별히 그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교회의 본질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새롭게 탄생한 프로테스탄트교회에 대한 이해를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게 선포되고 성만찬이 그리스도께서 제정한 대로 거행되는 곳이라는 정의에 걸맞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고 진정한 성만찬의 정신을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쯔빙글리는 1525년 11명의 동역자들과 함께 ‘propezei’라는 성서 연구모임을 만들고 일주일에 5번씩 모여 원문성서를 놓고 함께 공부했던 것입니다. 그의 사후에 하인리히 불링거를 통해 그 전통이 이어져 갔음은 물론입니다. 제네바에서는 칼빈의 주도하에 ‘congrigatio’라는 성서연구모임이 만들어졌습니다. 제네바의 성서연구 모임은 오늘날 우리 목회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제네바의 목사들은 매주 금요일 함께 모여 성서를 연구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상호 비판하는 공동체-모임을 가졌습니다. 때문에 제네바의 목사들은 서로 간에 깊은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 점검과 통제의 수단을 지니고 있었고, 교회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질적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나약하고, 죄성이 있고, 자기중심적인 존재라서 객관적이고 구조적인 측면의 강제하는 장치가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그 장치 속에서 목회자들이 갖는 문제와 한계들이 억지되고, 조절되고, 해소되는 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현재 이러한 노력들이 교단차원이나, 지역 차원에서 대규모, 소규모로 이런 장이 마련되지만 좀 더 일원화되고, 체계적인 접근과 검토가 필요한 점도 있습니다. 저도 이러한 모범에 따라 제가 목회하는 목포에 아침나라 성서학당을 만들어 한 달에 두 번씩 원문성경을 중심으로 성서연구모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다시 제2 스위스신앙고백서로 돌아갑니다. 그 서두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설교자로 우리가 선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좋고 거룩한 교육과, 겸손하고 성실한 사람으로 경건한 수사력과 깨끗한 명철을 가진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한목협의 초대회장 옥한흠 목사께서 참된 교회의 표지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중요시 여겼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한목협의 창립예배에서 아모스서 3장 7-8절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한목협의 창립이유를 우리 목회자들이 사자처럼 울부짖는 하나님의 부르짖음을 듣고 예언자로 부름 받은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기 위함이라고 역설한 바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교회의 갱신 운동은 내적 소명 아래 순결한 영성과 도덕성을 지닌 선택받은 목회자들을 통한 참된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께서 제정한 대로의 성만찬을 행하는 예배의 회복을 통한 교회 갱신의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철저한 내적성찰과 말씀의 빛 속에서 종교개혁 당시의 그 새로운 출발을 기억하고 실천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킬빈과 하인리히 불링거가 교회의 중요한 사명으로 약자들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했음을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칼빈은 제네바에 설립된 구빈원을 통하여 불란서에서 온 피난민들을 비롯하여 사회적인 약자들을 위한 구제 사업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불링거는 이태리, 불란서, 독일, 항가리드에서 온 핍박받는 개혁교회 그리스도인들을 취리히시가 받아들이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행사했고 사회적인 약자들을 돌보고 구제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칼빈과 하인리히 불링거로 대표되는 종교개혁 운동은 참된 교회의 탄생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새로운 사회의 탄생을 가져왔습니다.

‘막스 베버’는 칼빈주의 윤리가 뿌리내린 곳에서 근대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튼 것에 주목하였던 종교 사회학자였습니다. 그가 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은 그의 연구결과가 집약된 결과물입니다. 그는 칼빈주의의 영향 아래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된 모습을 주목하였습니다. 그들은 근면과 절제와 노동과 절제의 삶은 그들에게 물질적인 축복을 가져다주었고 축적된 자본은 사회와 경제를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막스 베버는 칼빈주의의 윤리를 “세계내적 금욕(die inneweltlic-he Askese)”이라 명명하고 이 세계내적 금욕이야말로 근대 자본주의 문명을 일으킨 정신적인 동력이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이러한 막스 베버의 해석은 자본주의 발달의 역사를 변증법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해석하였던 칼 막스의 유물론적 역사철학에 쐐기를 박고 새로운 역사해석의 지평을 열었던 것입니다(이 주제에 대해서는 스위스바젤대학교 교회사 교수 Max Geiger 교수가 그의 동료교수 FS.E. Staehelin 은퇴 기념 논문집에 쓴 “Calvin,Calvinismus,Kapitalismus”라는 논문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문제는 그들의 믿음의 결과로 주어진 물질의 축복을 어떻게 관리하고 무엇을 위해 쓰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그리스도 문명을 일으킨 서구 식민지배 세력들은 더 많은 부를 확장하기 위하여 축적된 자본의 힘을 가지고 다른 민족을 정복하고 자연을 파괴함으로 세계는 가진 나라와 못가진 나라로 양극화되었고 양극화의 결과는 세계전쟁으로 나타났고 자연이 파괴되어 지구는 더 이상인간이 살수 없는 곳으로 황폐화되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세계의 부의 불균형을 20:80의 틀을 가지고 말해왔는데 지금은 99:1의 틀을 가지고 말할 정도로 세계 양극화의 구조는 심화되어 있는 현실입니다.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을 통한 최대이윤창출과 경쟁에서 이겨야 생존하고 더 취득하는 자본주의의 극단적인 폐해가 한국사회의 교육현실을 어둡게 하는 것이 오늘의 모습니다.

지금부터 130여 년 전에 우리나라에 전해진 기독교는 우리 민족의 의식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성장했고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능력에 힘입어 한국사회를 이끌어가는 주류세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와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번영의 신학입니다. 한국교회는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물질의 축복을 강조하는 번영의 신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교회도 성장했고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도 믿음의 영향으로 물질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도전과 과제는 하나님이 주신 물질적인 축복을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앞으로 한국교회에 주어진 과제는 종교개혁의 자리로 돌아가 세계내적 영성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개혁자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세상을 떠나 수도원으로 갔던 사람들이 타락하게 됨으로 더 이상 세상을 떠날 필요가 없이 세상 속에 살면서 금욕적 삶을 통해 믿음을 실천하는 삶을 권고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세계내적 금욕입니다. 세계 안에 살면서 근면과 절제와 기도와 노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축복의 열매는 더 이상 부(富)를 축적하기 위하여 자본을 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축복을 자발적으로 선한 목적을 위하여  내어 놓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한국교회의 개혁운동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물질적인 축복을 자발적으로  내어놓도록 설득하는 일에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대형교회는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을 기꺼이 선한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내어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평신도들도 그들이 받은 물질적인 축복을 자발적으로 내어놓아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자발적으로 모아진 물질을 가지고 일차적으로는 한국교회의 양극화의 현실을 극복하는 일에 사용하고 나머지는 종교개혁 당시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함으로 우리 사회를 은혜로운 구조(정의로운 사회구조)를 만들어가는 일에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은 마가복음 10장 17절 이하에 등장하는 길 가는 예수님께 달려와 묻는 부자 청년의 모습이 아닐까요? “선하신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는 그를 선하다고 말하는 그를 꾸짖으시고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음을 환기시켰습니다. 그리고 10계명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부자청년은 그 계명은 그가 어려서부터 지켰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여기시고 말씀하시기를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역린(逆鱗)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용이라는 상상 속의 동물이 있습니다. 용의 비늘은 단단해 어떤 무기도 뚫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용의 목 아래 비늘 하나만은 거꾸로 붙어 있는데, 이 부분이 급소입니다. 이를 역린이라고 하는데, 역린을 건드리면 용은 인정사정 보지 않고 덤벼듭니다. 한국교회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하늘에서 내리는 보화를 선물로 받을 것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보화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용의 역린을 건드리는 행위가 될 것임이 확실합니다. 아마도 엄청난 저항에 부딪칠 것이 분명합니다. 기득권이라는 것은 수혜자에게는 늘 고마운 징검다리이지만 또 다른 누구에게는 걸림돌이고 방해거리입니다. 때문에 이것은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로 선하지 않은 인간의 본성만 가지고는 해결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혁명적인 결단이 필요하고 그 중심에 목회자가 앞서서 그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한국교회의 개혁의 과제는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우리 교단의 한 교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이 교회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가진 것을 함께 나누면서 믿음의 공동체를 초대교회처럼 일구어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각 가정의 수입을 모두 모아서 가족 수대로 비슷하게 나누어 사용하는 형태의 교회공동체를 꿈꾸며 처음에는 그런대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100명이 넘던 성도들이 지금은 많이 줄어서 두 자리 숫자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마 목회자 공동체도 이런 상황이 되면 마찬가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일에 나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더불어 너와 함께, 한국교회가 함께 가는 길을 목회자인 동역자님들이 앞서서 이 길을 헤쳐가야 합니다.

다음으로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경건의 모양이 아닌 경건의 능력을 갖는 일입니다. 

제가 목포에 내려가서 있는 동안 절감했던 사실은 한국교회의 현실을 비로소 피부로 더 정확히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야기되어 목회자와 성도들의 문제까지를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중에 한 가지가 바로 “제 자신의 경건의 능력 없음”이었습니다. 이것은 동역자분들께 고백하기 부끄러운 것입니다만, 얼마나 그 사실에 대해 절감했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비단 제가 목회초년생으로 새로 목회에 입문하여 미숙한 목회 스킬을 말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60이 넘은 목회초년생으로 목회적 역량도 부족하고 목회현장에 대한 이해와 접근에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더 저 자신을 힘들게 하고 괴롭게 했던 것은 목사로서의 마땅히 갖추어야 할, 그리고 형성되어 있어야 할 내적 경건의 능력의 부족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저를 매우 슬프게 했고, 한없는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제 존재 자체에 대한 좌절과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이러한 자신에 대한 참혹한 들여다봄은 제가 개척의 땅에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비로소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동역자 여러분들도 목회의 현장에서 이런 경험들을 하셨겠지만 저에게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경험이었습니다.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지 고민이 되는데 목회자의 경건의 능력의 충만과 회복을 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목회자의 경건의 능력을 갖추고 자정능력을 회복하고 부단히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일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만이 이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황금만능주의의 물질사회 속에서 우리가 목회자로서 자존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의 수많은 구조적인 문제와 시대적 상황이 맞물리어 교회의 교회됨과, 하나님의 하나님 됨이, 목회자의 목회자됨이 훼손되는 시대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길은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세워가는 것만이 해답이라고 봅니다. 이 역할을 우리 한목협과 목회자들이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 우리들의 만남 가운데 깊은 고민과 대화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3 결론:  제 3의 종교개혁을 향하여

지금까지 발제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있는 한국교회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질문과 관련하여 한목협의 입장에서 또한 목회자의 입장에서 시급한 교회개혁의 과제를 언급했습니다. 그것은 한목협이 지향하고 있는 틀 안에서 바라본 전망입니다만 대부분 불가능해 보이는 유토피아적인 것입니다. 유토피아는 ‘utopos’라는 라틴어에서 비롯된 말로 “there is no place in the history”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역사 속에 현존하지 않는 것이지만 역사창조를 향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엄청난 힘을 그 자체 안에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셨던 하나님나라 실현을 위해 부름 받은 지상의 교회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고 세상과 타협하는 자리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때마다 교회사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돌아가고자 하는 운동이 끊임없이 생겨나곤 했습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운동은 성공한 운동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된 기독교회의 탄생을 가져 왔지만 교회사 속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한 개혁운동들도 많이 있습니다. 교회사가들은 16세기 종교개혁 이전에 있었던 13세기의 발덴저(Pertus Waldes, 1184-1218) 교회개혁운동, 14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존 위클리프(John Wiclif, 1320-1384)의 교회개혁운동, 15세기 체코를 중심으로 전개된 얀 후스(John Hus, 1369-1415)의 교회개혁운동을 가리켜 첫 번째 과격한 교회개혁운동이라고 부르고 16세기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쯔빙글리(Huldrych Zwingli, 1484-1531), 칼빈(Jean Calvin, 1509-1564)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 교회개혁운동을 제 2종교개혁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첫 번째 교회개혁 운동들이 지향했던 역점은 예수께서 선포하셨던 하나님나라 운동의 실현에 주어진 반면에 16세기에 전개된 제 2의 종교개혁의 역점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의인화에 역점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습니다만 체코출신 신학자였던 밀란 오포첸스키 박사는 그가 세계개혁교회연맹 총무로 재직하던 시절에 첫 번째 종교개혁과 두 번째 종교개혁이 가지고 있는 강점과 약점을 보완하여 제 3의 종교개혁의 모델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첫 번째, 두 번째 종교개혁의 전통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학자들을 동원하여 여러 번의 협의회를 거쳐 제3의 종교개혁의 모델을 창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저도 한번 이 협의회에 참석한 바 있습니다. 그가 지향했던 목표는 제1차 교회개혁 운동들이 결여하고 있는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차원과 제2의 종교개혁이 결여하고 있는 하나님나라 실현을 위한 차원을 종합하여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이 통전된 종교개혁의 모델을 창출코자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오포첸스키의 시도는 우리에게도 영감을 줍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도 두 요소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안하는  제3의 종교개혁의 모델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생애의 전반기는 불의한 사회구조변혁을 일차적인 복음의 목표로 삼았던 에큐메니칼 진영의 지도자 강원용 목사님과 함께 일했고 제 인생의 후반기에는 한 영혼의 구원을 복음의 제 일차적인 목표로 설정했던 옥한흠 목사님을 만나 한목협을 중심으로 동역을 했습니다. 강원용 목사님의 한국사회의 구조를 변혁하기 위한 노력은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실현하는 중간매개 집단지도자를 교육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옥한흠 목사님의 한 영혼을 복음 앞에 온전히 세우고자 하는 꿈은 제자훈련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발제자의 생각으로는 이 두 개혁운동의 장점을 살리고 약점을 보완하는 제 3의 종교개혁 운동의 모델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향후 한국교회의 개혁운동이 나아갈 때 창조적인 한국교회의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향후 한국교회의 교회개혁 운동은 이 모델의 장점은 살리고 약점은 보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제안합니다. 이것이 한목협이 향후 지향해야 할 교회개혁의 방향이라고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교갱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