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이숙 이야기(3)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날 붙드사 평탄한 길 주옵소서’
안이숙의 순교정신이 스며있는 이 노래는 고령의 성도들에게 언제나 눈물이고 감동이다.
“나는 자격 부족으로 실격된 순교자다. 진실로 나는 내 주님 예수를 위해 죽기를 결심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기회를 잃었을 때에 섭섭해서 몹시 울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 작은 기록을 보내면서 위로를 받는다. 이 책은 내가 사랑하는 내 주 예수님 앞에 드리는 내 사랑의 선물인 까닭이다.” 안이숙이 자서진 『죽으면 죽으리라』서문을 이렇게 썼다.

표지 날개에 붙은 그녀[安利淑, 1908-1997]의 약력이다.
“평안북도 박천 태생. 평양서문여고 졸업, 일본 경도여전, 동경가정여학원연구과 수료, 대구여고보와 선천보성여고에서 교편생활, 일제 말엽에 신사참배 강요 탄압에 궐기 투쟁”이라 했다.

죄목과 감옥생활 소개다.
“1939년 1월, 동경에 건너가서 위정자들을 위시해 대신, 대장, 대의사 등을 역방하여 일본의 망국행동을 경고하고, 한국기독교 박해에 항의, 일본 제국의회 제74회 의사당에서 검속 투옥되어 평양형무소에 이감 후 옥고 6년, 사형집행 몇 시간 전인 1945년 광복과 함께 8월 17일 출옥”이라 했다.

안이숙이 감옥에 있을 때
그녀가 ‘위대한 목사, 위대한 설교자’라 칭송했던 주기철 목사와 손가락 글씨로 대화를 나누었다. 안 선생이 물었다. “목사님, 이 유치장에서 내어보내면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요?” 주 목사는 “강대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사랑의 구원을 힘껏 외치며, 가슴이 시원하도록 설교를 하고 싶습니다.” 하고는 안 선생에게도 물었다. “안 선생은 자유가 되면 무엇을 먼저 하고 싶으신가요?” 그녀는 “큰 교회의 강단에 올라가서 수많은 성도들을 앞에 놓고, 아름다운 음성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희생을 힘껏 노래하고 싶어요.” 했다. “안 선생이 남자였다면 어떤 일을 했을까 생각이 됩니다.”하니 “남자가 되었드라면 목사님의 제자가 되어 목사님 같이 되어보고 싶었을 겁니다. 목사님 같이 위대한 설교자가 되려고 애썼을 거예요....성경 100장과 찬송가 150장이 제 가슴속에 가득합니다. 한국어 성경을 다 불 질러 없애도, 내 가슴 속에는 성경과 찬송이 있어서 염려되는 것 하나도 없습니다.” 하였다. 순결한 신부처럼 하나님의 신부된 성도로 믿음을 굳게 지켜 진실하게 살려했던 아름다운 신앙고백이었다.

비록 죄수라도 안이숙의 이런 믿음과 삶은 일부 일본인들에게도 큰 감동이었다.
평양형무소 여자 수인들은 매일 군복 제조에 10시간씩이나 작업했다. 안이숙은 주일작업을 거부했다. 소장실로 불려갔다. 일본인 소장이 “나는 대일본제국 천황폐하의 충실한 사신으로서 자네에게 매일매일 일을 해서 국가에 의례히 봉사하라고 명령한다.”고 호령했다. 안이숙도 담대했다. “주 여호와 하나님의 종 된 나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사람이 굴복시키려는 명령에 복종할 수 없소.”하고 단호하게 주일성수를 선포했다. 소장은 크게 감동을 받고 “자네가 신앙하는 자네의 신이 자네를 도왔네.”하며 그녀를 선대했다 한다.

하루는 일본인 간수장이 안 선생에게 “너는 죄수인 것을 아는가?”하며 짓누르려했다.
안이숙은 “죄수요? 나는 감옥엔 있지만 죄수는 아니지요...나는 법도 알고, 일본어도 당신 같이 추한 말은 못해도 세련된 일본 말은 더 잘한다고요. 그러니까 나는 당신 앞에 무서운 것이 없지만 당신은 나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하고 당당했다.

이런 일이 알려지면서 죄수들이 그녀를 만나면 절을 했다한다. 그러나 혹독하게 추운 평양의 겨울을 지내면 손톱발톱에 고름이 들었다. 뼈까지 상하지 않도록 참대 젓가락을 쪼개서 환부를 찔러 피고름을 짜냈다. 머리카락도 다 빠졌다. 옥중생활 6년을 오직 눈물과 기도와 찬송으로 견디었다.

안이숙,
그녀는 아름다운 산곡의 백합화요,
캄캄한 밤의 별빛이요,
한국 교회 수난사의 거룩한 증인 아닌가.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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