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6/23) 한목협 제17회 전국수련회 기조강연

저는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기독교의 영적 유산(학문적 유산 및 현장의 유산)을 정리하고 이를 국내외에 알리는 작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은 불변의 진리지만, 김치냄새 나고 한 많았던 우리 민족이 생명의 복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발전시켜 왔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세계 10위권을 육박하는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생각할 때, 한국기독교 역시 세계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1. 한 많은 한국민족과 생명의 한국교회

한국역사와 한국기독교 역사를 연구해 온 지난 10년간은 한국인으로서의 나 자신의 정체성과 세계기독교에서의 한국기독교의 공헌 가능성을 재발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흥미로왔던 것은 수천 년간 축적된 한국역사와 한민족의 특징이 기독교의 한국유입과 발전 과정에서 기가 막힐 정도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익히 아는 바와 같이 한국역사는 한탄과 좌절의 역사였습니다. 우리 민족은 지난 수천 년의 역사 가운데서 960번이 넘는 외적의 크고 작은 침입을 당해 왔습니다. 몽골 침입과 만주족 청군의 침입을 받아 수십만 명의 우리의 부모들과 형제들이 사로잡혀 갔지만, 아무도 그들의 신변에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천신만고 끝에 살아온 그들을 사람들은 환향년(화냥년)이라고 부를 뿐이었습니다. 도성을 지키는 국민을 버려두고 피신한 조선시대 선조나 한강다리를 폭파하면서도 자신은 도망처버린 20세기 장로 출신 대통령의 모습은 한민족의 오랜 한탄의 역사 가운데 드러난 전형적인 한 모습에 불과합니다.

전세계가 산업혁명과 근대화의 와중에서 바삐 움직일때도, ‘동방의 예의지국’과 ‘조용한 은둔의 나라’ 조선 백성들은 이조 500년의 몰락을 보면서 19세기 말 열강의 각축장에서 갈 곳을 잃고 민족의 주권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비탄한 심장으로, 발만 동동 구르면서 그저 바라만 보았습니다. 권력과 비리로 얼룩진 과거장을 박차고 나온 청년 길선주는 석양 노을 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산림처사춘몽가”라는 글을 통해 한민족의 장구함과 웅장함을 마음속으로라도 그려보았지만, 그것은 아직도 꿈으로만 남았습니다.

주권의 상실, 반상의 차별, 미신의 난립, 함석헌의 지적처럼 그 동안 의지해온 “유생들의 갓끈과 산사의 불단밑”에서 민족의 희망을 볼 수 없었을 때, 바로 그 시점에 하나님이 이 낮은 조선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굳이 호사가들의 입담을 빌리지 않더라도, 한민족의 5천년 역사에 가장 복된 일이 바로 그 참담한 시대와 영적인 상황에서 벌어졌습니다. 우리는 가장 처참한 고난의 중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맞이했습니다. 예수는 우주의 그 높은 곳에서 혼돈의 와중에 한에 서린 민족의 중심부로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눈물에 겨운 한민족의 심장을 위로하고 만지면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선교사들, 이름없는 천민들과 고아와 과부들, 민족의 신앙지도자들의 열정과 헌신속에서 예수를 통해서 우리 한민족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처음으로 깨닫고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했습니다. 한국개신교 초창기 최전선에서 수고했던 제임스 게일James Gale 선교사는 세계만민이 투표를 통해 세계대통령을 뽑는 날이 온다면 당연코 황색 한국인이 그 당사자가 될 것이라 믿음으로 선포했습니다. 갇바치 출신의 천민 고찬익을 예수의 이름으로 회개시켜 연동교회 초대 장로를 만들었으며, 누군가 자기에서 노벨상 후보를 추천하라면 주저하지 않고 고찬익을 추천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절망의 상황에서 한민족에게 희망을 주었던 하나님은 우리민족이 내놓기 부끄러워하는 우리의 습성까지도 교회와 민족을 새롭게 하는데 값진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국내외 우리민족은 역동성Dynamics의 힘, 열정Passion의 진정한 의미, 헌신Sacrifice의 맛, 그리고 빨리빨리의 미학을 느껴왔습니다.

비록 21세기 오늘의 한국기독교가 교외 안팍에서 적지 않은 시련과 도전을 맞닥트리고 있지만, 이러한 역사적 정황은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 수 없는 이유를 제시해 줍니다.

2. 우리도 잘 몰랐던 한국기독교의 6가지 장점과 자랑거리

한국기독교는 짧게는 150년의 개신교 역사와 길게는 400여 년에 이르는 가톨릭의 역사를 통해 엄청난 축복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왠일인지 이땅에 기독교 르네상스를 펼쳐보기도 전에, 김준곤 목사님이 그렇게 꿈꾸었던 ‘이땅에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기도 전에 한국개신교회는 적지 않은 시련에 직면해 있습니다. 기업가정신을 가진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개독교”의 포탄을 유도해 오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묻기 전에 우리는 먼저 한국기독교의 과거와 현재 상태를 기반으로 우리 역사에서 어떤 장점들을 지녀왔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 간추려 본 7가지 한국기독교의 장점이 한민족이란 우리 민족의 습성과 특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왜 우리 교회가 결국은 민족을 품어야 하는가를 나중에 설명해 줄 것입니다.

(1) Passion - 열정과 고난

첫째로 한국기독교인의 특징은 열정입니다. 한국기독교인의 열정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은 다름 아닌 복음을 처음 수용하는 과정, 즉 이땅에 복음이 처음으로 들어오는 과정과 우리의 ‘난곳 방언’으로(사도행전4:12) 성경을 번역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납니다. 성경은 “복음을 전하는 이가 없으면 누가 듣겠으며, 듣지 못하겠거든 누가 믿겠느냐”(로마서10:14)고 반문하고 있지만, 모든 원칙에는 예외가 있습니다. 한국의 가톨릭교회나 개신교회 할 것 없이 그 어떤 외국 선교사가 은둔의 땅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 한국인 선배들이 먼저 생명의 종교를 발견하고, 예배를 시작하고, 신앙을 세웠습니다. 외국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고, 일본에 간 이수정은 선교사들이 일본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한국에도 선교사들을 보내 달라는 일종의 ‘선교사 초치운동’을 벌였습니다. 이는 세계기독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들어오기 전에 정약종의 형제들과 이벽은 자기들끼리 주일예배를 시작했으며, <천주공경가>를 지어 하나님을 찬양했고, 한국교회 전체에 최초의 조직신학 교과서인 《주교요지》를 썼습니다.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제물포를 통해 한반도에 처음으로 발을 내딛었을 때 그들은 이수정이 작업한 쪽복음서를 들고 왔습니다. 마펫과 게일을 따라 전국 오지를 돌면서 교회를 세우고 요리문답을 가르친 사람들은 다름아닌 전도부인들, 중인, 시골에 이름없는 이땅의 “작은 성자들”이 지닌 열정이었습니다.

패션Passion은 이런 신앙에의 열정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라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한국만큼 계몽주의 이후 기독교 신앙 때문에 처절할 정도로 수많은 순교적 죽음을 경험한 나라도 없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정약용은 큰 아들 정철상과 함께 1801년에, 둘째 아들 정하상과 아내와 딸 정정혜도 1839년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19세기 조선사회에서 최소 2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런 순교의 역사는 개신교의 도입과 전개 시절에도 여전하게 등장했습니다. 복음이란 열정과 순교를 나줄과 씨줄로 해서 발전해 온 것입니다.

(2) Sacrifice - 집 팔아 헌신해 온 민족

둘째로 이러한 열정에 기초한 한국기독교인들은 헌신의 의미와 맛을 살려 왔습니다. 1890년대 기초를 잡았던 네비우스 선교방법론Nevius plan이 한국교회에 채택된 것은 한국교인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입니다. 전세계에서 우리 민족의 헌신을 따라올 나라와 민족은 없습니다. 우리 민족은 은혜를 받으면, 자기몸과 자기집을 돌보지 않고 헌신할 정도였습니다. 문자 그대로 ‘집 팔아 헌신’해 온 민족입니다.

이러한 헌신은 한국기독교의 독특한 문화인 전도부인, 권서인, 매서인, 영수 제도, 날 연보Day offering라는 독특한 한국교회 유산을 만들어냈습니다. 심지어 주기철 목사는 “나의 기도의 5종목”이라는 설교를 통해 정몽주의 선죽교의 시를 읊으면서 자신을 산제사로 드렸습니다. 후에 27세에 예수를 믿었던 김구 역시 암살당하기 직전에 이런 심정을 자신이 즐겨하던 시로 읊었습니다.

100여 년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전세계 한인디아스포라의 잠재력을 확인시켜 준 우리 한인들도 때로는 유카탄 반도에서 돼지에 치이고, 하와이 수수밭에서 손이 부르트도록 일을 하고, D.C.에서 온갖냄새에도 불구하고 닭똥을 쳐도, 굴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떨리는 손으로 교회 문고리를 잡고 기도했습니다. 한국기독교 150년의 역사는 바로 성도들의 이러한 헌신의 결과였습니다.

(3) 책의 민족

셋째로 한국기독교인은 책의 민족입니다. 1866년 병인양요를 통해 강화도와 조선 땅에 처들어온 프랑스 군인들은 집집마다, 심지어 머슴과 행랑아범의 집에도 갖추어져 있는 책을 보고 조선인들의 책 문화에 감탄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선배들은 초창기부터 예수를 믿되, 그저 기도나 하고 울부짖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선배들은 자신들의 삶의 질곡에서 만나주신 하나님, 그분이 베풀어주신 기적, 굴절과 좌절 속에 쏘아올린 희망의 메시지를 책과 노래라는 매개로 남겼습니다. 19세기 순교자들의 순교묵상기인《사후묵상》이나 20세기 초반 감리교의 태두 탁사 최병헌의 《성산명경》은 신앙선배들의 책에 대한 열정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20세기 한국교회가 가장 등한시했던 것이 바로 우리 신앙선배들이 남긴 자료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 한국교회 아버지 길선주는 《천로역정》의 한국적 해석인 《만사성취》를 남기며 기독교 민족지사로의 한민족의 자존심을 살려주었습니다. 길선주는 3·1운동 이후에도 한국교회 최고의 종말론 책인 《말세학》을 통해 일본의 억압을 뚫고 진정한 해방과 신앙의 저항감을 한국교회에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김익두의 기적과 이적을 총 정리한 《조선예수교회이적명증》은 목회와 가르침의 현장에서 더 치열하게 살지 못하고 있는 우리를 도전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직도 몇백 권째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이러한 자료들이 진정한 한국기독교의 복음과 신학의 원류를 만들어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신앙 선배들은 책을 통해 선비신앙을 빚어 내었습니다. 이들은 ‘정신이 살아야 민족이 산다’는 원리를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4) 선교에 대한 열정, 한국선교 130주년

넷째로 한국기독교인의 열정과 헌신은 20세기 후반 세계선교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30년도 채 되지 않아서 인구대비 세계 제1의 선교강국을 만드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일부 선교사들의 성실하지 못한 선교현장 사역이야기는 제쳐두고서라도, 이제 한국을 제외하고는 선교의 이야기와 밑그림을 그리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2년이상 장기거주 선교사를 2만 명 넘게 파송하고 있는 한국교회, 어쩌면 그 자체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선교사들이 단순 복음전도에서 창의적인 선교전략개발로 변화하는 모습과 서양선교사들의 틈바구니에서 동등한 협력구조를 만들어나가는 것을 볼 때, 이 광범위한 선교사들 사역의 네트워크와 결과물은 작은 한국이 세계를 새롭게 섬길 기본구조를 만들어 줄 것입니다.

1894년 9월 14일 호레이스 알렌이 부산에 발을 내딛고,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인천에 도착한 때로부터 벌써 130년이 흘렀습니다. 당시 서구인의 입장에서 한국은 중국과 인도와 일본에 밀려 선교사역에 우선권을 갖지 못했습니다. 중국과 일본 등에 선교자금을 쏟아 부은 서양선교부는 자립과 자조를 강조한 한국기독교의 네비우스 때문에 그나마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을 지 모릅니다.

한국교회는 최초로 장로교 목사를 세울 때 이기풍을 최초의 전도목사로 삼았고, 연이어 중국 산동과 간도와 연해주에 선교사역자를 파송했습니다. 물론 한국교회가 해외선교에 전폭적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0년 이후입니다. 1990년에 처음으로 100명이 넘는 선교사가 파송되었고, 이후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를 맞이할 때까지 꾸준하게 선교사 파송숫자는 증가해 왔습니다. 비록 21세기 한국교회의 총제적 위기와 함께 선교의 방향을 재설정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지만, 선교가 한국교회의 중요한 특징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5) 한국인 Diaspora

다섯째, 세계의 선교의 큰 그림을 완성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한민족이 세계를 섬기게 만들어 줄 우리 민족만이 가진 강력한 히든 카드는 바로 남북한 인구와 전세계 750만 명에 이르는 우리의 한인디아스포라입니다. 한인디아스포라만큼 잘 교육받고, 명석하며, 열정적인 이민자 사회는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들 디아스포라의 80% 정도가 이민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교회를 찾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고국을 떠나 살아온 한인들이 이제는 한국의 세계진출의 교두보와 핵심세력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선배 이민자들과 나그네 같은 자들이 흘린 눈물과 헌신이 이제 아름답게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지닌 이중언어의 구사력, 아시아와 세계를 잇는 가교의 힘, 김치와 치즈의 맛을 연결하는 현대적인 감각은 한인디아스포라의 장점이자 힘입니다. 이제 대표적인 강소국으로 솟아오른 대한민국의 고국의 힘과 세계화의 최전선에 나가 있는 한인디아스포라가 힘을 더한다면, 세계 속에 한국인과 한국교회의 역할을 더 크게 증진시킬 수 있습니다. 한국어의 아름다움과 영어의 보편성이 결합된다면, 한국의 역동성과 한인디아스포라의 세계적 관점이 결합된다면, 우리시대 뿐만 아니라 다음세대의 주인공들에게 더 없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4500여 개의 세계이민교회는 한국교회가 히든카드로 갖고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자랑거리입니다. 단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잠재력을 한국교회에 어떻게 사용하느냐인 것입니다.

(6) 한국기독교의 전략적 위치

마지막으로 최근 20여 년간의 상황을 두고 볼 때 한국기독교가 아시아에서 갖는 위치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980년대 들어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한국문화의 비약적 발전은 한국기독교가 자기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러시아의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Glasnost, Perestroika]에서 촉발된 아시아시장의 비약적 발전은 세계의 경제 중심축을 미국과 동북아시아로 재편하게 만들었습니다. 한때 세계의 끝이었던 극동Far East, 그중 중국-한국-일본으로 이어진 동북아시아의 3대축은 이제 21세기의 세계경제와 문화의 중심축이 되었습니다.

다만 수출입기준 세계 8위인 한국의 경제와 군사력은 아직까지 중국과 일본에 뒤져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기독교 발전만 두고 보더라도 한국기독교인의 규모는 중국과 인도보다는 훨씬 못하고, 일본에 앞서 있습니다. 다만, 흥미롭게도 아시아 각 국가와 세계적인 차원에서 기독교적인 활동과 공헌가능성을 두고볼 때 한국기독교는 일본과 중국을 앞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부의 지원과 젊은 신학자들을 등에 업고 무섭게 따라오는 중국기독교의 10년 후는 잠시 제쳐 두더라도, 중국기독교의 신학과 국제적 위상은 한국에 비해 아직은 10년 정도 뒤떨어오지 않나 조심스럽게 추정합니다.

스위스와 같이 극동의 강대국 사이에서 완충지대를 하는 한반도가 복음 이외에 어떤 것으로 동북아시아에 항구적인 평화를 가져오겠습니까?

** 이외에도 기도원(대한수도원), 금식기도(최자실), 새벽기도(각종 특별기도회), 통성기도, 구역과 셀 모임, 대심방 제도,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한국교회가 세계에 내놓을 만한 것들이 결코 적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서 한국기독교가 지난 짧은 세월 동안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얼마나 많은 강점과 장점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나누고 싶었을 뿐입니다.

3. 딜렘마에 빠진 한국기독교

세계기독교의 역사에 있어서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한국기독교가 너무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 왔는지 지금은 탈진상태에 빠져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5절의 말씀처럼 “차던지 덥던지”하라는 말씀을 너무 충실히 따라온 것인가, OECD 지표의 대부분 항목에서 1등 아니면 꼴등을 차지하는 유별난 한국인 DNA를 반영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한국기독교가 100년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많은 장점과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몇가지 딜렘마와 아쉬운 점을 갖고 있는 것도 분명합니다.

한국기독교 역사의 장점과 딜렘마를 명확하게 살펴보는 것은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를 묻기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 것은 제가 딜렘마로 제시한 것들이 특정교회나 교단이나 목회자들을 염두해 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단지 한명의 학자로서 전반적인 흐름을 규명하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전제 장치로 고찰해 보는 것임을 미리 밝혀 둡니다.

(1) 첫째, 한국사회 중심부에서, 20세기에 기독교 르네상스Re-naissance를 경험하지 못한 한국기독교의 자화상

도입초기에 엄청난 역량을 발휘해 온 한국기독교가 해방 이후 한국사회의 중심부에서 한번도 학문적인 기독교 르네상스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우리 영적인 아버지와 한국교회가 대단한 부자였고 엄청난 영적 유산을 갖고 있지만, 우리 자신이 진정 얼마나 중요하고 뼈대있는 가문의 후손인지 모르는 ‘20세기 집 떠난 탕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학문적 측면에서 한국개신교뿐만 아니라 한국가톨릭의 ‘신학적-신앙적 르네상스’는 모두 과거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가톨릭의 경우 성호 이익(1681-1763)의 제자로서 서학을 ‘하나님에 대한 학문’, 즉 ‘천주학’으로 받아들인 정약종(1760-1801)과 이벽(1754-1786)의 시대에서(1790s) 한국가톨릭의 대부 정약종의 천재 아들이요, 한국가톨릭 역사의 최고의 변증서 “상재상서”를 남겼던 정하상이 순교한 시대(1839)를 저는 주저없이 한국가톨릭의 르네상스라 부릅니다. 이 시기에 한국가톨릭 역사에 가장 중요한 작품들과 기본 사상들이 형성되었습니다. 그것도 피비린내나는 순교의 칼을 넘어서 말입니다.

개신교의 경우 초기 몇 년간의 실패를 딛고 본격적인 성서번역과 제자양육으로 한국교회의 기틀을 놓고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한 1895년부터 3·1운동을 지나 일제의 여전한 강압정책에 한국교회가 분화되기 시작한 시점, 이 어간에 김익두의 기적을 모은 《조선예수교회이적명증》이 출간된 1921년으로 잡으려 합니다. 특히 이 시간 한국초창기 지도자들은 수많은 책, 설교, 글을 통해서 복음을 이해하고, 한국적인 삶의 현장에서 복음의 진수를 수용하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당시 1700만 한국인 전체의 2% 내외에 불과했던 기독교인들(1919년 30만 내외 추산)이 한국독립 운동의 최전선에 섰습니다.

일제하 시대는 한국역사의 특수성이라 치더라도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는 70여 년 동안 한국사회의 중심축으로서 기독교 르네상스를 한번도 이루어본 적이 없다는 점은 한국교회에 심각한 도전입니다. 아무리 유교와 불교의 영향력이 강하고 비평적 혹은 반 기독교적인 정서가 있다 하더라도, 한국기독교가 가진 내실에 비해 그것이 사회의 핵심 가치나 컨텐츠로 나름의 르네상스 시절을 만들어내지 못한 점은 우리가 반성을 해보아야 합니다. 한국기독교가 생각보다 약골이라는 소리는 여기서 나옵니다.

정신과 사상은 세상살이에 가장 중요한 잣대입니다. 책 한권이 세상을 바꾸는 시대에, 한국기독교의 핵심적 지침서가 모두 앞부분에 위치한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도전합니다.

(2) 둘째, 근본을 모르는 자식들! 시대에 부응한 한국기독교

한반도의 비정상적인 근현대사의 암울한 역사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독교가 한국사회에서 어깨를 펴고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역할을 시작하게 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입니다. 다만, 평양과 원산을 중심으로 한 한국전쟁 전 북한기독교가 한국기독교의 본류라 본다면, 통일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전에 한반도 전체의 기독교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진단하는 것은 보류해야 할지 모릅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시작과 함께 한국교회는 성장과 부흥을 모토로 폭발적인 발전을 했습니다. 한 때는 목 좋은 곳에 십자가만 세워도 교회가 된다는 시절이 있을 정도로 80년대 초반까지 한국교회는 정신없이 성장해 왔습니다. 심지어 교단의 분열도 교회성장에는 도움이 된다는 우스개소리를 정당화시켰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 이후 한국교회를 깊이 들여다 보면, 경제화와 독재시기-민주화를 거치는 사회 흐름에 맞추어 한국교회 역시 생존방식과 자기성장에 보다 큰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일부 제한적인 시도가 있었지만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고민보다는 업으로의 교회 발전, 혹은 문화와 사회의 종교적 기능을 세련되게 감당하는 교회 발전이 주를 이루지 않았나 학자들은 평가합니다.

198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경제규모가 급격하게 커지면서 교회의 경제규모도 커졌습니다. 돈과 백이 없어도 최소한 기독교에서만은 “개천에도 용이 여전히 날 수 있던” 좋은 시절도 다 지나갔습니다. 물론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돈을 선하게 사용하면 기독교가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80년 강남의 충현교회 건축에서 시작된 ‘강남스타일’의 대규모 교회 건축은 한국교회에 대형화, 건축 붐, 부자세습, 교회의 권력화라는 중심단어를 만들어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장로 독재와 이어지는 독재에 대한 대다수 교회의 침묵 외에 사회와 경제적 발전을 너무 충실히 따라왔습니다.

맘몬주의를 그렇게 꾸짖던 선지자의 모습은 간곳 없고, 시대에 무관심하면서 자신만의 성채를 쌓아가는 경주를 해왔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도 찾지 않은 예루살렘을, 우리 자신은 열심히 그런 성채를 만들어 왔습니다. 보수와 진보를 넘어 일부 의식적인 몸부림이 있었지만, 부패한 사회만큼 교회는 더욱 부패했습니다.

(3) 셋째, 껍데기는 가라, 기독교적 가치/교회론을 상실한 한국교회

문제는 너무나 화려한 강대상과 건물 바닥, 우아한 종탑과 건물에서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는 지난 2천년 기독교가 그렇게 강조해온 청빈과 자유의 깊은 의미, 진정한 믿음의 의미를 상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황량한 만주벌판의 조그만 교회에서 십자가를 부르면서 “모가지를 드리우고 뜨겁게 피어 오르는 피를 바치겠다”는 윤동주의 처절한 기운도, 지리산에서 맨발로 고아와 과부들을 모아두고 하나님의 말씀에 미쳐서 한구절한구절 가르치던 이현필의 기개와 부유함을 우리는 까맣게 잊어 버렸습니다. “등이 따시면 영성은 죽는다”고 주장한 이현필의 피를 토하는 주장은 매력적이지 않았나 봅니다. 그러면서 원초적 복음의 영성이 지닌 야성, 풋풋함, 기개, 호연지기를 우리를 망각해 왔습니다. 온실하우스에서 자란 여들여들한 한국기독교는 세련된 현대문명의 생활도우미와 심부름센터로 전락하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물어본 때가 언제였습니까? 한때는 의와 진리와 바름과 올곧음을 위해 내 젊음을 바쳐보겠다고 했는데, 지나간 세월과 변화된 문화만 탓해야 합니까, 아니면 그렇게도 못난 나 자신의 신앙을 탓해야 합니까?

믿음은 단순한 반복과 암기와는 다릅니다. 믿음은 맹목적인 순종과도 다릅니다. 생각없는 믿음과 고민하지 않는 맹목적 믿음이란 민족과 교회의 대답과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과 참된 신앙은 잔머리학에 기초한 성공의 처세술과는 분명 다릅니다.

우리 신앙인은 ‘Having/가진 것’의 힘이 아닌 ‘Being/존재’의 힘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숫자와 크기와 우아함으로 대변되는 현실의 힘은 때로 Being으로 서기도 힘든 사람들, Having과는 원천적으로 거리가 먼 사람들을 왠지 더 비참하게 만듭니다. 신앙은, 우리의 신앙이란 그 반대로 가야만 하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씀과 그 말씀에 깃든 정신과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함석헌은 이를 ‘뜻’으로 표현했고, 그의 스승 유영모는 “육신의 밥 한끼에 영과 정신의 밥 두끼”를 먹고 하늘을 준비했습니다.

믿음을 세상적 성공으로 엿 바꿔 먹어 버린 우리의 행태가, 생명의 주를 흥신소 심부름꾼으로 전락시킨 우리의 어리석음이 가난과 비움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풍요로움과 부유함의 의미를 잊어버리게 했습니다. 고-빈-비의 사상을 외치며 33살의 나이에 죽어간 이용도의 신앙과 가르침이 21세기 벽두에 주목을 받는 이유는 당연한지 모릅니다. 내가 왜 기독교를 믿는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고, 내가 어떻게 하면 그 본질을 부둥켜안고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질문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숙제가 되어버린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란 무엇인가를 물을 수 있습니다.

(4) 넷째, 놓쳐버린 Back to the Basics의 기회 - 1987-2008년 한국기독교가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해방 이후 무엇인가 갈피를 잡지 못한 한국기독교, 기독교적 가치와 교회론을 상실한 한국기독교에 마지막으로 기회가 주어진 것은 역설적으로 한국사회가 민주화의 길로 접어든 1987년 이후 리먼-브라더스 사태가 터진 2008년까지 20여 년간의 시간이었습니다.

한국사회가 민주화의 길로 접어들었고, 20세기 넘어 정치적으로 보수와 진보가 10년씩 권력을 분점했습니다. 한국사회는 우리의 것의 가치를 되찾는 작업을 시작했고, 한국의 경제적 총량은 폭발적으로 늘어나 어느덧 세계 10대 강국으로 발전했습니다. 작은 나라 한반도가 사전에도 없는 한류Korean Wave라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고, 마침내 사이Psy는 미국문화의 중심지 타임스퀘어를 점령했습니다. 한국기독교도 이 사이 폭발적인 선교 열정을 보여주었고, 어느 정도의 기독교컨텐츠를 개발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전의 민주화시대 양심의 목소리와 거장들이 연이어 정치현장에 뛰어들고 소천하는 사이, 그 귀한 자리를 차지했던 것은 교회의 대형화와 건축열기, 부자세습과 기독교신앙의 권력화였습니다. 이 시기에 평양부흥운동 100주년이라는 초유의 사건이 있었지만, 기도회와 집회와 일반적인 학술행사를 갖는 선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2008년 중국을 열어제친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 선교사의 입국 200주년을 맞이해 중국기독교 전체를 70여 권의 책으로 정리해 낸 중국기독교의 바라보는 우리네 심정은 그리 편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지난 20년간 우리는 한국기독교 100년를 제대로 정리해 냈어야 합니다. 지난 20년간 그 황금기에 우리는 한국교회의 강점과 장점, 단점과 문제를 정직하고 포괄적으로 정리했어야 합니다. 한류만큼이나 경쟁력있는 한국기독교의 콘텐츠를 새롭게 만들어 내었어야 합니다.

불교권은 한국불교 1천년을 기념하는 어간에 한국불교 국제화를 위한 1차 세미나를 2006년 5월 성대하게 열었습니다. 한국적 불교를 세계에 가장 알린 불교의 템플스테이는 2012년 성대하게 10주년을 맞았습니다.
적지 않는 분들이 노력했지만, 우리가 좀더 잘 할 수 있었던 지난 20년의 세월을 우리는 그렇게 보냈습니다.

4. 한국기독교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2001년의 9·11사태는 미국만의 사태만은 아니었습니다. 보통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었던 빈라덴의 행동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지만, 그의 행동은 역설적으로 동양과 서양, 특히 기독교에 미국중심주의적인 20세기 신학의 정당성과 지향성을 재검토하게 만들었습니다. 더불어 2008년 리먼-브라더스사태는 국내외 적지 않는 충격을 주었습니다. 사실 이 두 가지 사건은 세기말Millenium 소동보다 더 큰 충격을 세계와 한국사회에 던져 주었습니다.

급격한 경제적인 지표의 변화, 한국문화와 한국적인 것의 세계화, 기독교지도자들의 탈선과 사회문제화, 무엇보다 기독교가 더 이상 잉여자산과 인력과 지금의 고착된 한국교회의 현실을 치고 나갈 지도력과 능력을 갖지 못한 상황은 무엇보다 우리를 암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발전시켜 온 한국교회입니까? 지난 오랜 세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발전시켜 온 한국기독교입니다. 어찌보면 우리 선배들이, 부모와 조부모들이 눈물과 헌신으로 다듬어 온 교회입니다.

현재 우리 앞에는 한쪽에 한국민족의 장점과 특징을 고스란히 담은 긍정적 유산이, 다른 한쪽에는 우리가 넘어야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그리 넉넉한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보다 효과적인 대안을 내 놓기에 늦은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이라도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향후 30년간 한국기독교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 몇 가지 대안을 제안해 보고자 합니다.

(1) Ad fontes/ 문제의 근원과 원초적 능력을 찾아서

문제가 생기면 자신과 현실을 개탄하고 앉아있기 보다는 문제의 원인, 해결방안, 그리고 해결할 힘의 원천을 찾아야 합니다. 세상에 모든 문제에는 답이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수많은 도전을 당신이 주시는 힘으로 치고 나가라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중세 천년이 만들어낸 제도와 전통의 부작용은 중세말 많은 사람이 교회를 떠나게 만들고 급기야 가톨릭과 개신교종교개혁을 야기했습니다. 중세 천년의 프레임이 더 이상 먹혀들지 않을 때 중세말 사람들은 신과 인간을 새롭게 잇는 휴머니즘과 새로운 문명의 발전과 발견을 세련되게 집대성한 문화의 종합인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인식과 정신의 틀을 만들어 냈습니다. 당시 근본을 바꾼 작업이 근대와 근대의 산물인 개신교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런 혁명적 신앙과 사고의 근저에는 우리 민족이 지금까지 가꾸어온 신앙적 자산이 지닌 가치와 힘에 대한 확신이 자리해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에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복음이 지닌 원초적인 힘이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그 어떤 학자나 스승보다 더 위대한 예수님의 3년간의 공생애라는 살아있는 교과서와 가르침이 있습니다.

들판과 현장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교육은 원초적인데, ‘원초적’이란 말에는 근본적이란 뜻과 혁명적이란 뜻이 동시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복음의 원초적 능력을 믿고, 머리나 입으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복음을 살았던(Lived the Word)” 4-5세기 사막 교부들의 자세와 같습니다. 복음을 수없이 필사하고, 암기하고, 가르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아포테그마타>Apothegmata에 나오는 사막의 교부들이 그러한 복음 이해에 코웃음을 쳤다는 것은 “복음을 사는 것”, 즉 “복음살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부흥과 회복을 위해서는 아이비리그를 나온 신학자나 초대형교회 목사가 더 많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눈먼 시각장애자라 할지라도, 말씀 한구절을 손으로 마음으로 만져가면서 복음을 온몸으로 살아내려고 하는 무명의 기독교인, “복음살이 기독교인”이 더 필요할지 모릅니다.

(2) 새로운 플랫폼 만들기 - 기독교 인문주의와 르네상스 만들기

한국교회의 현실은 한두 번의 회개운동과 만연된 프로그램으로 21세기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특히 1945년 해방과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플랫폼으로는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들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150년의 한국개신교, 400여 년의 한국가톨릭을 총괄하면서 다시금 기독교의 하나님과 한민족과 한국문화를 만나게 하는 기독교 인문주의와 기독교 르네상스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이것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재설정하고, 근본적인 존재이유와 삶의 양태를 묻는 것입니다. 르네상스가 의미하는 것처럼 “다시 태어남”re-brith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지식의 집대성과 각양 문화의 만개와 같은 결과를 보고 르네상스를 이해하고 평가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근본 출발점과 마음상태와 근본적 태도입니다. 이제 한국기독교가 그런 마음과 신앙의 혁명적 전환을 이룰 때가 되었습니다.

이런 거대한 구조와 근본적인 플랫폼을 보면서 우리가 한국교회의 역사와 현재를 다시 한번 생각합니다. 세계교회는 1980년대 이후 세계기독교 강국으로 떠오른 한국기독교가 자신들만의 발언과 의견과 정책을 내 달라는 주문을 많이 합니다. 이러한 주문은 2011년 남아공에서 열린 로잔대회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고, 신학과 교회의 모든 부분에서 한국기독교의 성장과 발전을 세계와 나눠달라고, 세계기독교에 기여해 달라는 부탁과 기대를 지속적으로 받습니다. 칼빈의 종교개혁과, 칼빈의 프로테스탄트 신학과 막스 웨버의 윤리가 결탁해 지난 500여 년 동안 현대시대의 자본주의체제에 이르도록 사용되어 온 이래 수명을 다했습니다. 새로운 형태의 영성과 신앙과 자세를 추구하는 세계기독교가 한국에 손을 내미는 것은 20세기 세기적인 교회 부흥을 이룬 한국교회에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렇기 위해 우리는 지난 과거의 역사를 정리 분석하고 평가하면서, 현재와 미래에 제시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한국기독교의 집현전을 만들고, 영적인 대동여지도를 만드는 것은 이런 차원에서 아주 근본적인 작업입니다. 이런 작업이 탄탄하게 진행되었을 때에 바로 21세기 한국판 기독교인문주의와 르네상스가 일어날 것이며, 종교적인 개혁과 변혁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세계기독교에 공헌하면서 동시에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 신앙선배들의 원형질과 같은 신앙의 원판, 즉 한국기독교의 영적 유산의 근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재해석해 오늘 우리를 살게 만드는 힘으로 재탄생시킬 때 가능합니다. 우리 신앙선배들은 신학과 목회의 기교에 있어서는 우리만큼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삶과 사역의 척박한 현장을 담은 그들의 영적 유산은 훨씬 도전적이고 원판의 생생함을 잘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저는 지난 10년간 한국기독교의 영적인 맥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 부류로 나누어 원전정리와 현대 한국어 편찬착업으로 정리하고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a) 지조와 멋을 아는 선비신앙: 길선주, 남궁억, 이원영, 안창호
(b) 신비적 소통을 통해 하늘을 만진 신앙: 김익두, 이현필, 이용도
(c) 순교신앙과 선교열정을 살아낸 사람: 손양원, 주기철, 이기풍
(d) 거룩한 암탉과 씨암탉 같은 어미들의 신앙: 문준경, 강완숙, 조수옥

(3) 민족과 역사를 복음으로 껴안기

100여 년 전 사랑하는 고국을 떠나 엘에이 근교 리버사이드시에서 오렌지 열매를 따면서 민족의 독립을 꿈꾸었던 안창호 선생님께서 말했습니다. “돌아갈 고국이 없는, 나라를 잃어버린 민족의 서러움을 아시오?” 자신의 학업을 포기하면서까지 동료들과 지인들과 젊은 세대들이 시대 인물로 자라나가기를 원했던 기독교 민족지도자 안창호는 성경책을 품에 꼭 껴안고 세계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조국의 미래를 꿈꾸었습니다.
안창호와 같은 시기 민족의 스승으로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해 자기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함흥을 떠나 중국에 규암재와 명동학교를 세웠던 김약연 목사는 호연지기를 가진 지도자가 배출되기를 신앙으로 절규했습니다. 그리고 밝은 마을, “명동학교”를 세워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한국개신교가 배출한 2천 명이 넘는 순교자들 중에 2/3 이상이 민족에 대한 고민을 품에 안고 순교의 잔을 받았습니다. 조국이 분단되어 가는 참담한 현실을 보면서도 나 혼자 살겠다고 38선을 넘지 않고 북녁땅에 남아 있다 순교를 당한 수많은 신앙인들, 해방과 분단 70주년을 맞이하는 오늘의 우리를 숙연하게 만듭니다.

나라 잃은 백성이 돌아갈 것이 없듯이, 국민과 역사를 외면한 기독교는 생명 담지자 이전에 종교로서 설 자리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다종교 사회에 익숙한 한국국민들은 특정종교가 지도력을 다했을 때 언제든지 말을 갈아타 버린 전력이 있는 민족입니다. 이는 기독교의 유일성이나 생명의 힘을 간과한 것이 아니라, 민족공동체와 현실이라는 것이 신앙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한국종교와 역사의 특수성상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민족의 현실과 민족이 나아갈 바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고서는 이 시대 민족을 품는 생명의 종교가 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조선이 신라와 고려 천년을 지탱해온 불교를 하루아침이 억압해 버리고 백성들이 버려 버리고, 조선 500년 정신적 지주가 되어온 유교를 개화기 때 순식간에 망각해 버린 사람들이 바로 우리 국민입니다.

우리 민족의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바로 일제시대 이후 한국적 부패로 상징되는 비정상적 사회를 신앙인들이 극복하는 것과 분단을 이겨내는 일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 우리가 시지프스 신화처럼 싸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4) 다시 민초의 현장으로 내려가기

한국교회가 진정한 예수혁명을 꿈꾸려거든 예수님이 3년간 살아가신 갈릴리 생애를 우리도 “나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나서야 합니다. 예수님이 왜, 신학적 중심담론이 있고 권력이 집중된 예루살렘을 그렇게 피하셨는지, 왜 창녀와 거지들과 공인된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판을 받았는지를 되새김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현장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머리로만 예수의 ‘케노시스’(빌2:6-7)를 넉두리처럼 반복하지 말고, 우리 자신이 낮은 곳으로 성육신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구원을 얻게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현장의 절규에 민초들의 귀와 마음을 기울이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기독교역사는 지난 2천년간 일어난 모든 종류의 종교개혁의 1차적 동인이 ‘시대와 민초들의 현장의 삶과 절규에 대한 반응’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한반도에도 신앙의 절규와 한탄, 기쁨과 환희를 절절히 느낄 수 있는 현장이 많습니다. 한반도의 호세야라고 불린 이세종이 각성한 기도바위, 소록도의 자살바위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삶의 현장이 도처에 널려있습니다. 한반도 전역을 누비면서 1860년에 대동여지도를 만들어낸 김정호의 심장의 박동소리를 우리 기독교인들이 느낄 만한 곳은 한반도 전역에 산재해 있습니다. 그 현장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당장 우리의 모든 삶의 형태를 바꿀 수 없지만, 우리의 마음과 각오만큼이라도 그렇게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안락의자에 앉아있는 학자와 목회자의 신분에서, 흥신소나 심부름센터 직원과 같은 상황에서 한 시대의 정신과 화두를 던지며 온몸으로 복음살이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나가야 할 때입니다. “생즉사生卽死, 사즉생死卽生”이라,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명언은 예수를 믿지 않은 선조들도 발견한 삶과 역사의 진리였을지 모릅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나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누가복음 9장 23-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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