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릴적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었다. 사실, 재미있어서 읽은 건 아니고 한번 읽기 시작했으니 끝을 보자는 심정으로 읽었다. 다 잃고 나서도 감흥을 전혀 못 느꼈던 것 같다. 당연히 책 내용을 이해를 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제목에 대해 품었던 의문이 있었다. 전쟁과 평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두 단어가 왜 같이 쓰여지고 있지 하는 그런 의문 말이다. 그러다가 많은 세월이 흐르고 흐른 후에 어렴풋이 집히는 게 있었다. 그렇게 인생은 전쟁과 평화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그날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은 전쟁이 주는 파멸을 경험하는 데서 오는 몰락과 죽음에 무릎을 꿇고, 또 어떤 사람은 같은 전쟁의 파멸을 경험하면서 더욱 평화와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으면서 평화의 세계를 만들려고 생명의 에너지를 불사르는 인생을 사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톨스토이가 책 속에서 그걸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책 제목을 「전쟁과 평화」라고 하지 말고, 「전쟁을 넘어 평화를 향해」 이렇게 제목을 붙이면 그 의미가 보다 쉽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지난 주에도 난 해빌리지의 일상을 순간순간 아이폰에 담고는 시간이 날 때마다 열어보면서 새삼 느낀 것은 우리 교회가 참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왠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평화가 깃들어 보이고, 또 분명 설정샷에 가까운 장면이다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게 전혀 어색하지 않고 도리어 낭만과 즐거움이 있는 교회라는 게 느껴진다. 내 생각에 그렇다는 말이다.

웃기는 게 멀리서 나와 우리 교회를 지켜보는 사람들은 우리 교회가 꽤 큰 교회일 거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 성도들도 별로 없는 작은 교회라는 걸 알면 조금은 실망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또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런 반응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내가 워낙 오지랖이 넓어서 광폭행보를 하고 있고, 사람들은 교회가 담임목사의 그런 광폭행보를 지원해 주려면 교인도 많고, 그래서 재정도 빵빵해야 한다는 일반론적인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담임목사는 하고 싶은 목회를 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이 정도만 말해도 아마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10여 년간 나를 지켜봐왔기에 내 신앙과 철학과 사상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지인은 현재 우리 교회의 모습이 가장 해빌리지살렘교회다운 모습이라고 하더라.

사실, 내가 신앙 안에서 그려왔던 행복한 마을로서의 교회공동체는 대형화를 지향하면 이룰 수 없는 공동체다. 교회가 커지면 3대가 나란히 앉아 밥 한번 같이 먹기도 힘들다. 그리고 아예 3대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릴 수도 없다. 우리 사회가 사회문제의 해결방안의 하나로 세대통합을 주구장창 외쳐오고 있는데, 사실 세대통합이라는 건 기독교적 가치다. 그런데 교회들은 교회성장을 이유로 도리어 주일에서조차도 세대단절을 시키고 있다. 세대통합이라는 그 좋은 가치를 세상에 뺏기고 있는 것 같다. 내 생각에는, 교회는 100~200명 정도면 공동체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을 것 같다.

난 「전쟁과 평화」에 대한 분석글들을 읽어보면서 교회야말로 그렇게 다양성과 다중성과 다원성과 복합성을 띠고 있는 공동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대부분 교회 안에서 "내가 맞네~ 니가 틀렸네~, 어이구~ 니 팔둑 굵다~" 그러면서 "교회 다니네 마네~, 내보내네 마네~" 이딴 소리하는 것은 귤 보고 탱자라고 하는 것과 같다.

톨스토이는 살아있을 동안 결코 전쟁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경험을 피할 수 없었다. 아니, 언제 지구 역사에 전쟁이 없었던 때가 있었는가? 지구 역사는 전쟁의 역사인 것을. 암튼, 톨스토이는 전쟁의 잔인함과 비극을 온몸으로 경험하면서 전쟁이 주는 좌절과 절망으로 인해 삶을 회피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도리어 평화가 가득 넘치는 새로운 세계를 소망하였던 것이다. 「전쟁과 평화」의 원래 제목은 러시아어로 ‘평화’라는 뜻을 지닌 ‘미르’인데 톨스토이는 이 ‘미르’를 전쟁과 반대되는 평화라는 의미로 보다는 ‘새로운 삶의 세계’라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한다.

어떤 점에서 우리의 삶도 늘 전쟁 속에 살고 있고, 교회도 늘 전쟁 속에 살고 있다. 사실 평화로워 보이고 행복해 보이는 우리 교회도 전쟁은 늘 있었다. 현재도 진행중인 전쟁이 있고, 그 전쟁통에 우리가 주저앉았으면 오늘의 해빌리지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전쟁의 와중에도 해빌리지의 세계를 그리며 달려왔기에 좀 있어보이는 데다가 낭만스런 멋도 있는 해빌리지가 된 것이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속에서 생명의 에너지를 불어넣는, 생명 긍정의 사상을 구현하는 인물로 ‘나타샤’를 등장시키고 있다. 그녀는 저 위 사람들에게도 저 아래 사람들에게도 생명의 에너지를 불어넣어주고, 옆의 사람들에게도 생명의 에너지를 불어넣어주는 여인으로 그려져 있다. 즉, ‘미르’(평화)라고 하는 새로운 세상은 나타샤 같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은 듯이 말이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우리 사회에, 우리 교회에 바로 '나타샤' 같은 생명력이 용솟음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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