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만남의 연속이다. 가정도 한 남자가 한 여자를,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남으로 비로소 출발한다. 목회도 만남이다. 만남 중에는 가슴을 치는 만남도 있고, 만면에 미소를 띠게 하는 만남도 있다. 은혜로우신 주님께서는 주의 종들을 다루실 때에 섭리적임 만남을 통하여 종들을 준비시키시고, 채우시고, 인도하신다. 만남은 신비한 일임에 틀림없다. 신비하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해의 경계선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필자는 좋은 목회의 스승들을 만나는 은혜를 선물로 받았다. 필자가 전도사로서 사역을 시작할 때 사역의 시작은 서울 내수동교회(예장합동 경기노회)였다. 그때의 담임목사님은 성경사랑의 대명사로 한국교회에 알려진 박희천 목사님이셨다. 오직 신앙의 자유를 찾아 고향 평양을 등지고 내려오신 실향민이시다. 사랑하는 이들과 정든 고향산천을 뒤로 하고 남쪽으로 내려온다는 사실이 말처럼 쉬웠겠는가. 필자는 박목사님으로부터 말씀사랑의 소중함을 익힐 수 있었다.

성경 본문을 벗어나지 않는 설교의 패턴을 배울 수 있었다. 지금도 필자의 사역현장에는 박목사님으로부터 배운 목회의 원리가 새겨져 있음을 안다.

내수동교회 사역이후 결혼과 군복무를 마치고 사랑의교회에서 사역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한국교회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목회하신 은보(恩步) 옥한흠 목사님을 곁에서 보고 배울 수 있는 복을 받았다. 세월이 흘러 옥목사님은 지금 천국에 계시지만, 목사님의 사역은 필자를 비롯한 여러 후학과 동역자들을 통하여 세대계승되고 있음을 본다.

한정된 지면을 통해서 다 털어놓을 수 없지만 필자의 목회의 DNA를 제공한 은보의 목회에 대하여 살펴보려 한다.

은보는 평신도의 재발견을 통하여 교역자 중심의 목회에서 평신도 중심의 목회로 목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간 목회의 지형을 바꾼 사상가였음에 분명하다.

은보는 ‘동결된 자산’이라고 일컬어지던 평신도들을 자유하게 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리고 평생 평신도의 동력화를 위하여 씨름하였다. 그 결과 그는 그가 속해 있는 교단의 자랑스런 목회자일 뿐 아니라, 한국교회의 존경받는 목회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지난 1986년에 시작된 ‘평신도를 깨우는 세미나’CAL(Called to Awaken the Laity) Seminar는 햇수를 거듭하여 올 봄에 100회를 맞는다. 이론과 실제가 균형 잡힌 세미나에 효시라고 생각한다. 칼세미나를 통하여 배출된 여러 교역자들이 칼넷을 통하여 지금도 은보의 사상을 계승하고 아름다운 목회현장으로 가꾸어 가고 있다.

은보는 탁월한 훈련자였을 뿐 아니라 존경받는 설교자였다. 그를 가리켜 목회자와 신학도의 전범이라 이야기 한다. 은보는 진액을 짜내는 설교준비자로 알려져 있다.

설교자로서 칭송이 자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설교만능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제자훈련 목회철학을 당대에 확립하여 후학들에게 전수했을 뿐 아니라 교단과 한국교회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은보는 남다른 안목으로 교회론을 정립하였다. 그는 목회자의 목회철학이 교회 본질에 일치할수록 바른 목회를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제자도가 최선의 목회철학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제자훈련은 제자도를 목회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은보는 평생 자신이 속한 교단과 한국교회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역자였다.

교단의 갱신과 성숙을 위하여 교회갱신목회자협의회(교갱협)을 앞장서서 만들었고, 교단의 벽을 뛰어 넘어 한국교회를 위해 한국교회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를 만들었다.

은보 옥한흠 목사의 목회를 압축하여 정리해 보았다.

1. 한 우물 파기 목회

한 우물 파기 목회는 집중의 목회이다. 한 영혼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목회이다.

어느 목회자인들 다수의 유혹이 없겠는가. 규모 즉 양에 대한 이끌림은 목회자 모두에게 생리적인 것이다. 그런데 성장에서 성숙으로, 무리에서 소수정예로, 넓이 추구에서 깊이추구 목회에 집중하여 결과적으로 성장과 규모의 확산을 경험하는 목회였다. 한 우물 파기 목회는 한 영혼을 소중하게 다루는 목회이다. 한 영혼을 소중하게 다루는 정신은 목회의 본질추구와 맞닿아 있다.

2. 균형 목회

이상과 현실의 조화에서 치우치지 아니하고 균형을 잡는다는 것은 철저한 자기 성찰에 기초한 것이다. 설교와 교육 그리고 훈련의 균형과 조화, 대그룹 주일예배와 소그룹 구역모임 사이의 균형, 신학적 이론과 목양적 실천의 균형, 영혼구원과 사회구원의 균형 잡힌 안목, 내치와 외치의 역동적인 사역, 전통과 현대의 손잡음은 찬송가 세대와 복음성가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스펙트럼을 제공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보수에 바탕하면서 진보를 끌어안을 수 있는 넉넉함이 있었다. 또한 그는 동역하는 부교역자들을 다룰 때 엄격한 모습과 자애로움의 모습이 공히 드러났다. 한없이 매서우면서도, 동시에 한 없이 부드러운 그 뿌리를 동일한 사랑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3. 동역 목회

목회자와 성도가 함께 손을 잡을 수 있는 구조를 이루는데 고민하며 실천하였다. 그는 탁월한 영성과 안목을 가진 담임목회자였지만 스스로의 독주를 견제하고 부교역자들과 함께 동역하기를 기뻐하였다. 부교역자들의 은사를 인정하고 계발해 주는데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수혜자중의 한 사람이 바로 필자이다.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장학금을 제공하여 미국 유학의 기회를 선물해 주었기 때문이다. 은보는 교회내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여성도 지도력 계발을 간파했을 뿐 아니라 남성지도력 또한 제자훈련 시스템을 만들어 개발하는데 힘을 썼다. 초대교회로부터 내려오는 여성도들의 강인한 교회봉사를 통한 지도력 강화를 계승했을 뿐 아니라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여 교회내에서의 남자성도 지도력의 계발에도 적지 아니한 힘을 쏟았다. 이러한 동역목회의 결과는 구세대와 신세대가 함께 어우러지는 목회현장의 풍토를 이루어내었다. 동역목회의 특징이 그가 목회하던 현장에 지금도 묻어있음을 본다.

4. 성육신 목회

모든 목회자가 성육신 목회를 꿈꾸지만, 모든 목회자가 성육신 목회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성육신 목회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성육신 목회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신다는 강한 소명과 확신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은보는 목회의 본질에 치중하되 허례허식은 과감히 탈피하였다. 열매 없는 바리새적 전통에 안주하지 않고, 영적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성육신 목회의 또 다른 이름은 양떼사랑의 목회이다. 긍휼과 공감 그리고 경청을 통한 소통의 목회의 역할모범으로 알려져 있다.

5. 현장 목회

은보는 헛된 욕심을 경계하였지만 숫자로서가 아니라 소중한 영혼을 얻기에 진력하였다. 그는 감화력 있는 설교자였지만 개인과 가정의 형편을 두루 살피는 전통적인 심방 또한 강조하였다. 부교역자들에게 맡겨진 교구를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파악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는 제자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현장목회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그는 루비콘강을 건너는 과단성을 가진 동시에, 돌다리도 두드려 한 걸음씩 전진하는 목회자였다.

6. 갱신 목회

은보는 안일함과 자기만족을 극도로 경계하였다. 목회자가 겉멋이 들어 여기저기 쏘다니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가 평생 멀리하고자 하였던 것이 삼허(三虛) 곧 허세(虛勢) 허수(虛數) 허상(虛像)이었다. 은보는 많은 사람이 당연히 누려야한다고 생각하는 은퇴까지 머물지 않고 65세에 은퇴하여 섬기던 교회와 한국교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늘 갱신을 지향하는 목회자의 단면을 보여준 것이다.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교회에 유익이 되는 것이라면 그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앞에 제시한 목회의 원리에 따라 필자 나름의 결론을 내리면 은보의 목회는

① 말씀 목회였다. 그의 목회의 원리는 철저히 성경적이며 신학적이었다. 은보를 균형잡힌 목회자라 말할 때 그 의미는 성경이 지지하지 않는 원리는, 아무리 포장이 화려하다 하더라도 목회현장에 도입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숫자를 늘리는데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을 도입하는데는 선뜻 손을 내밀지 않고 내실을 갖추는 일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② 성령 목회였다. 교회를 교회되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의존하는 목회였다. 그는 탁월한 담임목회자라 칭송을 받았지만 목회의 주도권은 늘 성령님께 내어 드리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을 선택하였다. 이러한 원리는 목회자의 정도를 벗어나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보호막이 되었다.

③ 자기 부인 목회였다. 은보는 상승세를 타는 목회자로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거나, 우쭐대는 것을 혐오하였다. 은보가 사랑의교회를 개척하기 전 전통에 얽매인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섬길 때에 직분자들이 자기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교회를 좌우지하려거나, 마치 관료주의에 붙잡힌 것처럼 직분을 사용하는 것을 경험이 반면교사가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부목사나 후배 담임목사 가운데서 은사가 남다르거나, 교회가 성장세를 탄다고 하여 선배에게 무례하거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에 대하여 매우 단호하게 다루었다. 자기 목양지를 버려두고 노회나 총회에 들락거리는 목회자들을 좋게 볼리 만무하였다.  그는 평생 사람들의 찬사와 환호 가운데 있을 때에도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잊지 않기 위하여 치열하게 자아와의 전투를 벌인 목회자였다.

④ 은혜 목회였다. 은보는 자신의 존재와 목회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이루어졌다는 것을 시시때때로 강조하고 고백하였다. 은혜가 사라진 목회의 비극을 누구보다도 처절하게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을 위한 세미나에서 빠지지 않고 강조한 것이 “은혜를 아는 목회자”이었다. 그는 은혜를 많이 받은 목회자였지만, 누구보다도 은혜를 갈망하는 목회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호는 은보(恩步) 곧 은혜의 발걸음이다. 필자의 호는 은천(恩泉) 곧 은혜의 샘이다. 평생 은혜의 샘물이 메마르지 않기를 기대하고 축복하는 마음으로 은보가 필자에게 선물해 준 것이다. 은혜로우신 주님께서는 필자의 인생여정과, 목회여정에서 은보 옥한흠 목사님을 섭리적으로 만나게 하셔서 부족함 투성이었던 종을 다듬으시고 채워 주셨다. 이것보다 더 축복된 만남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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