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30) 한목협 제29차 열린대화마당

들어가는 말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의 금번 열린대화마당의 주제는 “분단 70주년 선교 130주년, 한국교회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이다. 이 주제의 키워드는 분단과 선교이다. 분단의 극복은 해방 70주년을 맞아하는 한국사회의 가장 큰 과제이며, 교회의 부흥은 현재 침체를 경험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이다. 따라서 필자는 한국교회가 어떻게 하면 다시 부흥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아울러서 한국교회가 통일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검토해 보려고 한다.

필자는 역사학자로서 우선 해방 70주년과 선교 130주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여기에서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문제의 답을 찾아보려고 한다.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든 것은 연속적인 것이다. 따라서 현재 한국교회의 문제에 대한 답도 과거의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즉 “옛것을 익히고, 미루어 새것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I. 한국교회의 선교의 문제점과 그 해결방향

현재 한국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한국교회가 성장을 멈추고, 침체 내지는 감소의 상황에 들어섰다는 점이다. 한때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자랑하는 성장하는 교회였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시작된 이런 정체 현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현재로서는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면 왜 성장하던 교회들이 이렇게 침체 현상에 빠져 있을까?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주로 교회 내적인 신앙과 도덕에서 찾았다. 한국교회가 신앙적으로 쇠퇴했으며, 도덕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필자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하지만 이것과 함께 우리는 한국사회가 과거와 다른 사회가 되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과거와 같이 기독교에 호감을 갖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기독교에 마음을 열어 놓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독교에 마음을 닫고 있다. 이런 기독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 때문에 기독교는 침체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여기에서 위와 같은 교회 내적인 요인과 함께 교회 외적인 요인을 살펴보고 여기에 대한 대책을 살펴보려고 한다.

첫째, 한국사회에서 기독교의 역할이 점점 축소되어 가고 있다. 초기 한국 기독교는 한국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었다. 고종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고 미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기대했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문제에 개입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선교사들이 와서 교육, 의료 등을 담당해서 서구문화를 들여오게 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한국인들은 조선정부를 포함한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절박한 상황이 한국인들로 하여금 교회를 찾게 만들었다. 일제 강점기 한국인들이 독립운동을 하여, 세계를 향하여 나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가 기독교였다. 해방이후 한국은 한미동맹의 틀 안에서 발전하였고, 이것을 유지해 주는 것이 기독교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과거 기독교가 담당하던 거의 모든 것을 이제는 정부가 담당하고 있다. 현재 기독교의 교육과 복지는 정부의 보조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고, 기독교는 단지 종속적인 위치에 있을 뿐이다. 한국이 성장함에 따라서 더 이상 과거와 같이 미국을 맹목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또한 과거에 한미관계를 거의 독점하던 기독교가 이제는 한미관계에 있어서 매우 미미한 역할을 할 뿐이다. 교회 외에도 산업, 학술, 교육 등 수많은 분야에서 기독교가 없이도 한미관계가 잘 유지되고 있다. 과거에는 한국 기독교는 개화, 독립, 건국의 주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기독교가 없이도 이런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왔다. 따라서 현재 한국 기독교가 과거에 가졌던 위치를 갖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이런 새로운 상황에서 한국 기독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필자는 도덕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본다. 현재 한국사회는 외형적으로는 성장했지만 이런 성장에 맞는 내적인 성장을 이루지 못했다. 개인의 책임감의 결여, 공정한 경쟁의 룰의 부재, 왜곡된 성문화, 개인의 근면한 생활 등, 과거 기독교의 중요한 도덕적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최근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세월호사건, 성완종씨의 정치자금문제등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도덕적인 갱신에 앞장서야 한다.

둘째, 한국교회는 새롭게 등장하는 다종교상황에 직면해 있다. 현재 한국사회에는 전통종교 및 민족종교가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과거 기독교는 절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전통적인 유교는 힘을 잃고 있었고, 불교는 친일불교와 산중불교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 시대부터 전통문화의 보존이라는 명목으로 정부는 대대적으로 유교와 불교를 지원했고, 현재 이들은 기독교에 빼앗겼던 한국문화의 중심 위치를 회복하려고 하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과거 미신이라는 이름으로 폄하되었던 기독교는 미신이 민족문화라는 이름으로 재등장하고 있다. 현재 과거 미신으로 분류되던 무속은 전통종교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7대 종단에 들어와 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는 천주교와 이단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과거 조선정부에 엄청난 박해를 받은 천주교는 여러 부분에서 수동적이었다. 하지만 기독교의 분열과 문제점을 본 사람들이 천주교를 선택하고 있다. 특히 신앙을 갖지만 교회에 매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천주교를 찾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기독교가 형식화되고, 세속화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단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들은 기존교회에서 생동감있는 교제를 맛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기독교는 덜 열성적인 사람은 천주교에, 더 열성적인 사람은 이단에 뺏기는 구조가 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한국 기독교는 이슬람과 무신론의 강력한 도전 앞에 놓여있다. 지금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게 부상하는 종교는 이슬람이며, 특히 이슬람은 동아시아에서 한국을 타겟으로 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한국은 법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는 한국 기독교의 중요한 과제이다. 또한 무신론의 도전도 매우 심각하다.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서구사회에서 무신론은 점점 더 강력하게 등장하고 있으며, 매우 공격적이 되고 있다. 기독교는 무신론의 도전에 응답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한국 기독교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먼저 서구 기독교사회에서 형성된 신학이 이런 다종교상황에서는 별로 적응성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목회자들인 이런 다종교상황에서 신자들에게 기독교가 참 복음임을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은 복음의 능력 외엔 없다고 생각한다. 복음 자체에 능력이 있고, 이 복음을 전할 때 사회가 변화되는 현실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복음주의 신앙의 핵심이다. 단지 말이나, 교리나, 제도가 아닌 실질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셋째, 한국교회는 변화하는 사회, 특별히 민주화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적응력이 강한 집단이었다. 기독교는 전통에 사로잡힌 구습을 버리고 신문물을 받아들였고, 사농공상의 유교적인 가치에 맞서 노동과 상업을 장려했으며,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켰고, 산업화 시대에 부정적인 사고를 버리고 적극적인 사고를 받아들여 오늘의 대한민국을 건설하는데 앞장섰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는 시대를 앞서가는 존재였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민주적인 리더십을 갖는데 실패하였다. 아이러니하게 한국교회가 가장 큰 성장을 경험한 것은 박정희 시대였다. 60년대와 70년대 대규모의 도시화가 이루어졌고, 이때 인구의 도시유입이 진행되었다. 이와 함께 대형교회가 출현하기 시작했고, 이런 대형교회는 카리스마가 있는 특정 목회자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대형교회는 정치적으로는 박정희의 독재, 경제적으로는 이병철과 정주영으로 대표되는 재벌과 함께 한국사회의 주요한 특징이었다. 이들은 성장을 모토로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권력을 형성하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무시하며, 결국에 가서는 자신들의 업적으로 사유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에 성장에는 성공했지만 민주화에는 실패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나타나는 많은 문제점들은 민주화와 관련된 것이다. 한국사회에는 재정의 투명성, 인사의 투명성, 그리고 합의과정의 투명성이 강력하게 요청된다. 공직사회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회단체들이 이런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교회에는 이런 민주적인 훈련이 덜 되어 있는 것 같다. 과거에는 교회가 어떤 단체보다도 민주화되었지만 지금은 교회는 민주화에 있어서 국가단체나 사회단체에 뒤져있다. 이런 민주화의 실패는 이미 민주적으로 많은 진전을 보고 있는 한국사회의 기대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

넷째, 한국교회는 과거에 비해 선교의 제약을 받고 있으며, 새로운 선교의 패턴을 요구받고 있다. 과거 한국교회는 많은 선교의 채널을 갖고 있었다. 교회의 여름성경학교, 크리스마스행사, 미션스쿨, 기독교병원, 수많은 복지시설 등은 기독교선교의 중요한 채널이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노방전도나 축호전도와 같은 적극적인 전도를 할 수 있었으며, 직장이나 학교에서 신우회를 조직하여 선교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한국교회에 이같은 선교의 채널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교회마다 여름성경학교나 크리스마스 행사는 더 이상 불신자들에게 전도의 기회가 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미션스쿨이나 복지시설이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서 점점 특정종교를 전파하지 못하게 하는 법령이 만들어지고 있다. 노방전도나 축호전도도 여러 가지 사회적인 제약을 받아 거의 사라지고 있다. 특별히 공직자 종교차별금지법 때문에 많은 공무원들이 직장에서 종교활동을 하기 어렵게 되어 가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런 상황을 그냥 좌시해서는 않된다. 현재 불교나 유교는 전통문화의 이름으로 그 영역을 자꾸만 확대하고 있다. 그래서 정부의 예산을 받아서 자신들의 종교행사를 하고 있다. 여기에 비해서 기독교의 선교행위는 차별금지법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의 자유, 즉 선교의 자유를 상당히 침해당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런 현상을 바로잡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서 다종교상황에서, 그리고 개인의 사생활이 보호받는 시대에서 과거처럼 지나치게 공격적인 선교방법을 지향하고, 관계중심과 문화변혁의 방법 등으로 전도의 방법을 새롭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개교회주의에 빠져서 한국 기독교의 문제를 공동으로 대처하고 있지 못하다. 사실 한국교회는 위대한 연합운동의 전통을 갖고 있다. 네 개의 장로교회가 와서 하나의 장로교회를 만들었고, 두 개의 감리교회가 와서 하나의 감리교회를 만들었다. 학교, 병원, 신문, 출판, 전도집회, 대정부 분야에서 한국의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하나가 되어서 대처하였다.

해방 후 한국교회는 이런 연합정신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였다. 여기에 여러 작은 교단들이 경쟁적으로 들어와서 한국은 그야말로 교파의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교파주의 보다도 더욱 심각한 것은 개교회주의이다. 60년대 이후에 선교부나 교단의 지원이 없이 수많은 교회들이 독자적으로 선교했고, 따라서 이렇게 성장한 교회는 개교회주의를 지향했다. 현재 한국교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것은 교단이라기 보다는 대형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형교회는 인적, 재정적으로 한국교회를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개교회 중심적으로 나가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현안에 대해서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사회에는 다양한 반기독교적인 세력이 포진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는 정부와의 관계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다. 종교의 자유, 근대문화유산, 교회의 복지활동, 해외선교 등 많은 부분에서 정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하나로 묶어서 한국교회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기관이 없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가 빨리 개교회주의를 극복하고 연합하는 것이 시급하다.

여섯째, 한국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복음주의 전통에 서 있다는 것이다. 복음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체험적인 신앙이다.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은 이런 복음주의적인 체험이 확실한 사람이다. 원래 개혁교회에 다니던 언더우드는 구세군에서 은혜체험을 했고, 칼빈주의자이던 아펜젤러는 감리교에서 은혜를 받았으며, 호주장로교회의 데이비스, 카나다장로교회의 멕켄지도 다 복음주의자였다. 이런 한국교회 초기의 전통은 1907년 대부흥운동을 통해서 한국교회 신앙의 원형이 되었다. 초기 한국교회에서 신앙은 단지 교리교육이나 전례참여가 아니라 체험이었으며, 그 결과 삶으로 나타난 변화였다. 그래서 유교나 불교에 비해서 기독교는 살아있는 종교로 평가되었다.

현재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이와같은 생생한 체험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07년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는 1907년의 부흥을 재현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많은 교회들이 간절히 복음적인 체험을 갈망했다. 하지만 그와같은 부흥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기에 한국교회의 고민이 있는 것이다. 천주교는 체험이 없이도 예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 정통주의는 교리교육으로 교회를 지탱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복음주의적인 교회인 한국교회는 성령의 역사를 통한 체험과 이것으로 인한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II. 한국교회의 건국운동과 통일운동

올해는 해방 7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사실 대한민국은 제 2차 세계대전이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이다. 정치적으로 민주화를 이루고, 경제적으로 세계 10위권이며, 종교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맛보고 있다. 하지만 해방 7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가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것이 바로 해방 70년은 곧 분단 70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맛보고 있는 자유와 번영을 북한동포들은 맛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통일이다.

필자는 한국교회의 통일을 말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 남한이 어떻게 건국되었는가를 살펴보고, 여기에 근거해서 어떻게 통일해야 하며, 우리 기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려고 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해방은 곧 분단의 역사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해방정국에서 남북이 이데올로기 투쟁을 했기 때문에 나라가 둘로 나뉘어졌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탈 이데올로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일부 역사학자들은 해방정국에서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간파에 놓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국사를 서술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현재 대한민국 헌법이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다. 대한민국 헌법은 한반도가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통일을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통일논의는 대한민국의 헌법질서를 존중하는 범주 안에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첫째, 한국 기독교가 추구하는 통일은 일차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북한동포들을 돕고,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통일을 포기할 수 없고, 가능한 대로 빨리 통일이 되도록 노력하는 이유는 고통받고 있는 북한동포들을 돕고, 압제에서 해방시켜서 그들도 우리처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통받고 있는 북한 동포를 그냥 놔두어서는 안 되며, 동시에 통일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한국사회와 교회의 명제가 된다.

해방 당시 한국 기독교는 약 30만 명에 이르렀고, 이 중에 20만 명이 북한에 있었다. 그 중 상당한 숫자는 월남하여 남한에서 둥지를 틀고 신앙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상당수는 여전히 북한에 있었고, 일부 목회자들은 북한정권아래서 순교하였다. 평양 산정현교회의 조만식 장로는 북한 동포를 버릴 수 없다고 해서 평양에 있다가 결국 순교하였다. 따라서 남한의 기독교에 있어서 북한동포는 단지 동족일 뿐만이 아니라 많은 경우 가족이요, 신앙의 동지요, 생각만 하면 잠을 잘 수 없는 그리움의 대상인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통일을 이야기할 때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우리 동포들인 것이다. 따라서 통일은 단지 남북의 정권이 하나 되는 것보다, 국토가 하나가 되는 것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남북의 동포가 서로를 돕고,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물론 정부는 북한 정부를 상대로 하여 통일운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민간단체로서 한국교회는 가능한대로 북한 동포들과 직접 만나서 그들과 대화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은 가능한대로 북한당국에 북한동포를 직접 만날 수 있도록 요청하여 진정으로 남한의 동포와 북한의 동포가 만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북한은 항상 모든 점에서 국가가 통제하고, 남한은 개별적으로 민간인이 나선다면 결국에 가서 북한의 남한 분열정책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의 남북관계는 남한의 동포와 북한의 동포가 만날 수 있도록 요청해야 할 것이다.

둘째, 한국 기독교가 추구하는 통일은 개인의 인권과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통일이 되어야 한다. 해방 직후 공산주의는 인민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소유권과 인권, 그리고 종교의 자유를 박탈하였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월남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공산주의가 이같은 인간의 자유를 박탈했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의 보고에 의하면 북한 체재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이 기독교, 그것도 바로 장로교라고 되어 있다. 해방 직후 북한 기독교는 북한 체재 내에서 유일하게 집단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집단이었다. 그 후 북한은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기독교를 반동집단으로 규정하였고, 공식적으로 교회가 없다고 선언하게 되었다.

최근 북한의 인권문제는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되고 있다.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가 북한의 인권을 규탄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대한민국의 국회는 북한인권법을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것보다 못지않게 염려스러운 것은 한국교회가 북한의 종교의 자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는 여러 차원에서 북한을 돕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과 관련해서 북한당국에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기독교인들은 무엇보다도 신앙의 자유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특별히 각종 매체를 통하여 한국 기독교가 원하는 통일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통일이라는 것을 북한당국에 알려야 하고, 이것과 관련해서 북한지원을 해야 한다.

셋째, 한국 기독교는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사회가 아니라 개인의 소유권과 정당한 노동권이 보장되는 경제적인 정의가 실현되는 통일을 지향해야 한다. 북한은 기독교를 자본주의의 앞잡이로 선전하고 있다. 사실 건전한 자본주의는 나의 이익과 이웃의 이익이 조화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토크빌은 “바로 이해된 사적 이익”이 자본주의의 기초라고 했다. 이것은 진정한 개인의 이익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인정받을 때 안정될 수 있으며, 따라서 개인의 이익은 사회의 이익과 조화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는 새로운 나라는 빈자와 부자가 서로 도울 수 있는 상생하는 나라가 되도록 해야 한다.

현재 한국사회는 다시 빈부의 격차가 늘어나고 있고, 중산층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필자는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빈부의 격차가 커지고,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면 언제든지 다시 나타날 수 있는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통일을 지향하는 남한사회는 먼저 소위 천민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사회의 책임을 다하는 시민사회를 건설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울러서 민주주의의 원칙인 기회의 평등이 이루어져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사회의 상층부에 올라갈 수 있어야 한다.

넷째, 한국 기독교는 북한사회를 개혁/개방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현재 대한민국의 헌법은 자유민주주의적인 통일을 지향하고 있다. 동시에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무력에 의한 통일보다는 평화롭게 통일되기를 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원칙하게서 가능한 통일은 북한내에 민주적인 질서를 원하는 세력을 만들어서 그들로 하여금 통일의 주체가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우리는 먼저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유도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과거 조선말, 대원군의 쇄국정책에서 고종의 개방정책으로 이어진 과정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대원군은 쇄국에서 자신의 살 길을 찾았다면 고종은 개화에서 자신의 살 길을 찾았다. 그리고 고종의 개화정책을 뒷밭침하는 박규수를 비롯한 개화론자들이 있었다. 이와함께 주변의 나라들, 즉 중국이 조선으로 하여금 미국과 외교관계를 맺도록 강력하게 권유하였다. 미국이 결코 조선에 영토적인 야심이 없다는 것을 인식시켜 결국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만들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현재 북한의 상황은 조선말의 상황보다도 더욱 나쁘다. 북한 내부에 개방을 주장하는 강력한 세력이 없고, 아울러서 북한과 주변 국가들이 너무나 강하게 대립되어 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개혁/개방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 북한에는 북한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개방된 분야가 있다. 어느 정도 시장이 작동하고 있으며, 인터넷과 휴대폰과 같은 통신수단으로 바깥 세상의 소식이 들어갈 수 있으며, 남한의 영화나 드라마가 인기가 있다고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수단을 통해서 우리는 북한 내부에서 개혁/개방을 주장하는 세력이 일어나서 이들로 하여금 남북 통일의 주역이 되도록 해야 한다.

다섯째, 한국 기독교는 북한의 기독교로 하여금 통일운동의 주역이 될 수 있도록 다방면에서 지원해야 한다. 현재 북한에서는 세 종류의 기독교인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과거 기독교인과 그의 후예들이다. 원래 북한에는 신자가 많았고, 그들 중 일부는 모진 박해에도 여전히 신앙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북한 당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조선그리스도연맹과 그와 관련한 봉수교회와 칠골교회이다. 북한은 대외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남한 기독교의 지원을 받기 위하여 공식적으로 교회를 인정하고 있다. 셋째는 지하교회이다. 최근 중국을 통한 선교가 활발하고, 이런 영향으로 북한에 상당수의 지하교회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한의 교회는 이들을 지원해야 할 것이다.

우선 남한의 교회는 북한교회를 한국 기독교의 북한지원의 공식적인 창구로 삼아야 할 것이다. 남한교회는 북한에 효과적인 지원을 위해서 이북 각도에 공식적인 교회를 각각 하나씩 세워 줄 것을 요청하고, 여기를 중심으로 대북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대북지원 사업을 하면서 동시에 북한에 있는 지하교회의 상황을 파악하고, 비공식적으로라도 지하교회를 도와서 이곳이 한국교회의 북한지원의 비공식 창구가 되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서 북한 기독교인들의 후예를 찾아서 그들로 하여금 믿음의 뿌리를 찾도록 도와주는 것도 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이것은 남북교류를 통해서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남한에 와있는 탈북자교회를 선교의 중요한 거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일제 강점기 해외에 있던 우리 교회들이 바로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사실 탈북자들이야말로 북한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고, 통일과 북한선교를 위해서 목숨을 내 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한국교회는 이들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대북 선교전략과 통일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섯째, 한국 기독교는 북한 동포들에게 기독교의 역사를 올바르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현재 대한민국은 일종의 역사전쟁을 치루고 있다. 중국과 일본이 동아시아의 역사를 왜곡하려고 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남한 내에서도 좌우의 이념에 따라서 대한민국 역사를 달리 보고 있다. 하지만 더욱 더 큰 역사문제는 남북의 역사인식의 차이이다. 남북은 다같은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도 완전히 서로 다른 역사해석을 하고 있다. 우리는 세종대왕과 이순신을 역사의 위대한 인물이라고 보지만 북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홍경래를 영웅으로 강조한다. 남한은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일본을 항복시켰지만 북한은 소련이 했다고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현재 남북한은 서로 공유하는 역사가 없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북한은 기독교를 미제의 앞잡이로 설명한다. 한국 최초의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는 서구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설명된다. 일제 강점기 기독교의 실력양성론은 일제와 타협한 개량주의로 폄하된다. 기독교는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인 친일 집단으로 설명된다. 해방 후 기독교는 미제와 내통하는 단체로 설명되고, 6.25 전쟁에서 기독교는 북한 주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반동세력으로 서술된다.

한국 기독교는 이런 북한의 인식을 새롭게 수정해야 한다. 한국 기독교는 처음부터 가난한 백성들을 대상으로 한글을 매개로 해서 선교를 시작했고, 교육과 의료를 통해서 근대화를 이루는데 기여했고, 더 나아가서 국가가 할 수 없는 장애인, 고아 등을 위한 사회복지 사업을 했으며, 유교의 남존여비의 윤리 가운데서 여성해방을 이루었으며, 일제와 싸워 민족의 아픔에 동참했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따라서 진정한 통일과 북한선교가 이루어지려면 이런 역사의 재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

맺는 말

올해는 해방 70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우선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해방공간에서 남한사회와 기독교는 바른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했고, 그 결과 경제성장과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해방 70주년과 분단 70주년이 함께 오고 있다는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하지만 분단 70주년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루는 길은 과거를 부정하고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룩한 민주주의 사회를 북한에도 확산시키는 것이다.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의 통일은 자유통일이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못 밖고 있다. 그러나 이 통일은 평화적인 방법이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 내부에서 개혁개방 세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북한 기독교를 지원하여 북한을 민주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올해는 해방 70주년과 함께 선교 130주년이다. 한국교회는 유래가 없을 정도로 놀라운 발전을 했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는 한국교회사상 가장 어려운 시점을 지나가고 있다. 그것은 과거 기독교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던 한국사회가 기독교에 대해서 반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데에는 한국 기독교가 초기에 보여 준 것과 같은 사회의 희망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기득권을 가진 집단이 되어서 세상의 온갖 부패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 기독교는 철저한 자기 반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130년 점에 한국 기독교가 처한 상황과 오늘의 기독교가 처한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과거에 미국과 미국에서 온 기독교는 한국사회에 답을 가져다 주었지만 지금은 한국 기독교가 과거와 같은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과거 기독교가 해왔던 근대문화의 도입, 민족운동의 중심, 사회복지의 기능은 정부로 이관해지고, 여기에 덧붙여 불교는 새롭게 등장하고, 무속신앙은 민족종교의 이름으로, 이슬람은 오일머니를 갖고서, 무신론은 새로운 사도로서 등장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는 이와같은 새로운 상황을 해쳐나가야 한다.

결국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하고, 아울러서 통일한국의 미래를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복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복음으로 우리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삶의 변화를 이끌어 갈 때, 사람들은 기독교를 존경하고, 교회는 부흥할 것이며, 나아가서 통일의 주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기독교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을 잃어버린 과거의 전통종교와 비슷하다. 여기에서 벗어나서 진정으로 복음으로 돌아갈 때만이 새로운 역사가 나타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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