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130주년, 분단70년을 맞는 한국교회의 자화상과 미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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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130주년, 분단70년을 맞는 한국교회의 자화상과 미래상
  • 이은재 교수
  • 승인 2015.04.30 15: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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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30) 한목협 제29차 열린대화마당

1. 과거: 이 땅에 선교사들이 들어오던 시기 서구문명과 조우하던 당시의 세 양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배척-유교 정통성의 고수(華夷的 세계관)/ 수용-西器(서기)식 서구문명의 수용/ 토착화-東道西器(동도서기)식 변용. 이런 태도와 더불어 선교의 각축장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교파주의라는 씨앗이 뿌려지게 된 것은 한국교회의 장애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2. 현재: 승승장구하던 교회가 지금 낯선 세계의 이방인이 되고 말았다. 이 세계는 우리의 고향인가? 교회는 본래 순례자요, 독자요, 섬기는 이들이 아니었던가? 한국교회는 세속주의에 빠져 세상을 고향처럼 느끼고(자아도취) 있는지 모르겠다. 혹 어떤 이들은 여전히 세상을 배척하고 저 세상에 대한 동경을(세뇌) 그리워하고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닫힌 사람, 묻힌 사람,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변화와 갱신을 불러올 수 없다. 이제 집과 사무실의 문을 열고 목회자를 반기던 시대는 지나갔다. 우리들은 “문 밖에 서 계신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시대를 맞이하였다.

기독교신앙은 철저한 순례의 여행이다.(히11:8) 순례에는 균열과 출발이 따라온다. 어떠한 경우에도 거주나 정주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를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희망과 사랑의 깊이를 발견하게 된다.(고후5:1/ 빌3:20/ 히11:40/ 골3:1-4)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된다. 거기에는 위기가 뒤따른다.(마28:19/ 마10:16,26)

그런데 잠시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기독교가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삶의 기준과 원칙이 달라서 공격을 받는 것이라면 도리어 기독교가 자기 자리를 잘 지키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가 세상에서 더 이상 기대와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이다. 고립된 기독교, 무기력한 그리스도인들의 배경에는 그동안 교회가 세상과 사회에 등을 돌린 결과이다. 현실세계에 실질적으로 적용하지 못하면서 마치 그런 모습이 초연함이나 고상함, 심지어는 내세지향성이라는 이름아래 계속해서 도망쳤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의 위기를 불러온 원인에는 무엇이 있을까?

첫째, 인간이해의 편협함. 물질만능의 시대에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인간의 약함과 궁핍함이다. 비현실적인 낙관주의의 팽배가 불러온 정신의 고갈. 그 결과 불성실한 행위와 부정직한 진술, 개방적이고 참됨에 대한 부족, 오류와 거짓을 덮어버리려는 경향과 파괴와 범죄를 간과하거나 무시하려는 태도

둘째, 듣는 것보다 더 많이 말하고, 배우는 것보다 가르치고 지식과 정보를 수집하는데 급급한 성향이 있다. 신뢰의 위기는 경청의 부족에서 비롯한다. 문제의 인식보다 답안을 작성하는데 생각이 멈춰있다. 그래서 사실의 결핍보다 신뢰의 상실이 더 무거운 것이 되었다. 기도, 예배, 봉사, 선교 이전에 하나님이 교회 안에서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위기는 인간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양성론)은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과 동시에 교회의 행위가 신과 인간의 나뉠 수 없는 일치를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종교에 대한 지나친 요구, 인간의 과대평가, 교회에서 배움의 부족과 신의 투명성에 대한 결여가 결국 신뢰의 위기를 불러왔다. 현재 교회는 이 사회에서 보류와 거부의 상태에 놓여 있다.

셋째, 새로운 돌파는 곧 출발이다. 위기는 기회이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은총이다. 경청할 수 있다는 것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위대한 예술이다.”(베른하르트 벨테) 교회의 출발은 교회와 세계를 새롭게 구성하고 연결시키려는 시도이다. 지속적인 기록과 개방적인 성찰 그리고 섬김을 통한 나눔의 자세가 필요하다.(막10:45)

다행히 우리는 지금 빙점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공동체 안에 교회의 전통과 신자들 그리고 희망의 그루터기가 있다.(고전12:7/ 엡4:12)

2-1. (포스트모더니즘과 다문화) 세속화와 자율의 시대 그리고 교회

1)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종교는 다원주의적이다. 종교적 다원주의란 진리에 대한 진술의 다양성을 물어야 하는 동시에 세속적으로 각인된 사회에 대해 교회가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도록 묻는다.
2) 그렇다고 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종교에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 모더니즘에서 추구해왔던 개인주의와 자선주의를 넘어 종교영성의 에너지를 다시 충전해주어야 한다.
3) ‘종교영성의 에너지’란 사람다움을 회복하는 것인데, 변화된 세상에서 복음이 언제나 새롭게 선포되어야 한다. 여기에 교회의 선교적인 책임이 달려 있다.
4) ‘새롭다’는 새로운 시대에 맞춘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변화하는 세계에 종속되고 길들여진 자신을 깨닫고 뉘우치고 말씀과 복음의 빛으로 되돌아오는 것, 항상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더욱 귀하게 여기는 것, 그래서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짊어지려는 책임적인 응답이다.
5) ‘사람다움’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긍정인 동시에 사람다움을 느끼고 표현하고 즐기는 전 과정을 나타낸다. 따라서 사람다움은 얽매이지 않을 자유와 사랑을 받을 줄 알고 사랑할 줄 아는 성숙한 사랑이라는 가치를 공동체 안에서 배우고 나누게 된다.

3. 재발견 - 교회(공동체)의 가치

1) 교회는 결코 부수적인 대체물이 아니다.
2) 진심에서 우러난 개종자들의 모임에는 진리에 대한 열정과 올바른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된다.
3) 18세기 감리교의 경우, 산업민주주의에 대한 적절한 성격(자기통제/ 자율/ 근면/ 금욕)을 형성함으로써 개인의 구원을 넘어 이차적 덕목을 창출하였다.
4) 기독교적인 삶의 방식이 제자도를 이끌어낸다면 이는 교회가 세상의 일부가 아니라, 세상의 중심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다준다.
5) 교회다움: 맞섬과 초월 그리고 울타리를 거두고 경계를 허물기, 공공성의 문제에 관심하기.

4. 한국사회 안에서 교회와 신자들의 과제

1) 현재 한국사회에서 논의되는 병폐는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2) 출산율 세계 최저(1.18명), 고령화 속도 세계 최고, 사교육비 세계 최고(서울 일반고 1인당 월 42만원), 해외 이민율(국적 포기자) 아시아 최고(2013년 통계), 복지 지출 경제협력개발기구 최저규모(2011년). 그 밖에 자살률, 부패지수, 행복지수와 인권, 안전 불감증에 따른 위험사회가 제기되고 있다.
이런 현상에 더해 종교적으로 인구의 증가에 비해 성도의 감소는 1.6%로 미래학자 최윤식에 따르면 2060년 신자 수는 550만 명(이단과 사이비집단을 제하면 330만)으로 감소할 것이라고 한다. 특히 여성 신자의 감소에 주목해야 한다.
3) 이런 여러 증상들의 이면에는 빈부의 문제에 따른 계급갈등과 여전히 존재하는 분단을 비롯한 이데올로기갈등이 도사리고 있다.
4) 종교의 정치적 행위가 보편성을 갖기 위해서는 보편적 가치를 제시해야 한다.   
개화에서 독립으로, 분열과 갈등에서 통일과 화해로, 타율의 지배에서 책임적 공생으로, 맘몬의 철학에서 생명의 영성으로, 이는 각 시대마다 추구해왔던 가치들이다.
사례) 지난 1995년 한국 기독교가 조국의 통일을 위해서 희년(레25/눅4)을 선포한 적이 있었다. 그때보다 통일은 더 가까이 다가왔는가? 통일은 분단과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구축하는 진정한 발걸음이다. 정의와 평화/ 분단과 증오/ 평화통일의 과제. 해방이 곧 분단이었던 정황에서 마치 분단을 해방으로 읽게 만들었던 편견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제시해야 한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하기

기독교 신학은 언제나 두 가지 과제 앞에 서 있다. 즉, 신학이 교회의 삶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 학문의 세계에서 신학은 어떻게 관계하는가? 이 대목에서 우리는 매우 심각한 변화를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는 이런 상황이 오늘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가르쳐준다. 신학과 교회는 역사의 변화에 맞추어 항상 새로운 지도를 구성해왔다. 특히 중세 유럽이 이슬람 문명과 조우한 후 대학을 세움으로써 전혀 새로운 세계의 지평을 열었다는 점을 기억하자. 근대에 들어 이런 지평은 상호교류의 과정을 통해 더욱 친밀해졌고, 따라서 공통의 인식뿐만 아니라 다양하고 상이한 지평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 이상 교회와 신학은 세상과 격리되어 있지 않다.

광야 같은 오늘날 모든 문제가 마치 “영성”으로 해결가능한 양 뒤범벅이 되어버린 현실이 안타깝다. 사막교부, 수도영성으로 대표되는 영적현상이 광야를 불러올 수 없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근원적인 문제는 다음의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찾기 위해 광야가 필요하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종교(religio)라는 말 자체에 담겨진 연관성 때문이다. 참된 종교는 철저히 관계적이다. 영성이 고상한 자태를 드러내려는 한, 종교는 인격적이거나 일상적일 수 없다. 기독교의 광야는 결코 도피처가 아니다. 스콜라주의가 엘리트주의로 전락하고, 신비주의가 세상과 무관한 신의 탐닉(耽溺)으로 간주되었던 시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와 종교 그리고 경건이 섬이나 사막에서 단독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영성이란 세계도피나 자기만족이 아니라 현실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용기라고 말했다.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로 알려진 영성훈련의 마지막 단계는 하나님과의 합일(contemplatio 혹은 unio mystica)인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이런 방식에는 죽음이라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죽음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자기부인의 자리는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그것은 당연히 삶의 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이 걷는 길이 신앙의 발걸음인지 확인하려는 자가 세상과 사람이 없는 텅 빈 공간에서 확신에 이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된 영성의 자리는 영적시련(tentatio)을 겪게 되는 삶의 현장이어야 한다. 살아있는 공간, 삶이 공유되는 현실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되고,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때에야 긍휼과 자비란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야만 깨닫게 된다는 것과, 겸손과 온유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임과 오래 참음이란 주님의 뒤를 따를 때에만 입을 수 있는 옷(골3:12)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데도 여전히 영성을 내세워 세상과 차별화하는 것만이 생존방식이란 말인가?

기독교의 긴장(緊張)은 현실에 바탕을 두지만, 멈추거나 그대로 있지 않고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갈 때 일어난다. 전통의 가치와 크기는 단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전승을 서로 연관시킬 때 발생한다. 즉, 현실의 세계에 두 발을 내딛지 않으면 힘을 쓸 수 없다. 말씀이 삶의 자리에서 선포되지 않는 한 소통은 불가능하다. 사거리(射距離)가 제한된 범위를 벗어난 채 공포탄을 쏘아대는 종교는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래서 세상은 종교를 등지기로 마음먹었다. 기독교가 잘못 설정된 광야에 머무는 한 젖과 꿀이 없는 가나안 교인들만 양산하게 될 것이다. 

시인 李陸史는 “광야”라는 시(詩)의 4연에서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고 노래했다. 조국의 암울한 현실세계를 부정하지 않고 해방과 광복을 염원하며 씨앗을 뿌리노라는 시인의 노래는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의식이 되어야 한다. 광야는 현실의 부정이 아니라,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현실을 넘어서도록 하기에 광야의 상실은 곧 기독교의 죽음을 의미한다. 현실을 벗어나서는 결코 그 어떤 광야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여! 갈등과 분노와 폭력이 난무하는 위험사회로 돌아오라. 어떠한 종교도 현실세계를 벗어나서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제시할 수 없다. 복음의 자리는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는 곳이며, 상처와 고통이 수반된 현재이다. 아첨과 비겁, 기만과 술수로 쌓아올린 몰렉의 숭배, 음란과 색욕의 난장판이 된 바알과 아세라 찬양, 삶을 기꺼이 돈의 노예로 헌정한 맘몬의 세계에서 기독교는 더 이상 모르핀과 향수를 남용하지 않아야 한다. 십자가 없는 복음을 생각하지 않기. 그것이 광야를 살아가야 하는 동시에 회복하는 유일한 방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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