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산 도롱뇽 사건 혹은 소동의 주인공 지율 스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천성산 밑을 뚫는 KTX 터널 공사로 인하여 그 곳의 습지 생태계가 타격을 입을 것이라며 총 241일을 투쟁하듯 시위를 하였습니다. 24차례나 공사현장에 침입하여 공사를 중단시키거나 굴착기를 가로 막아 직접 피해액만 145억이었습니다. 추가 간접 피해는 그 액수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많은 국민들은 그 무엇인가 피해가 크기 때문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 스님의 행동에 무언적으로 동참하였습니다. 그러나 반전은 그 후 몇 년 후에 일어났습니다. 2010년 10월 한 일간지는 천성산 일대를 취재한 현장 르포를 실었습니다. “천성산 웅덩이에는 도롱뇽 알천지였다”라는 제목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천성산 생태계는 파괴되기는커녕 도롱뇽과 가재 및 습지 동식물 등이 번성하고 있다는 기사였습니다. 지율과 그의 동료들의 주장이 틀렸다는 증거와 함께 말입니다. 그 기사가 나간 후 당황한 지율 스님은 자신의 홈 페이지에 이런 글을 실었습니다. “슬프게도, 올 봄 천성산엔 도롱뇽 천지였다” “슬프게도..?!”

도대체 무엇이 슬프다는 것인가요? 그 터널 때문에 KTX 주행 시간이 22분 단축되고, 그렇게 걱정하고 목숨 걸고 지키려고 했던 도롱뇽이 엄청나게 살고 있는데 왜 슬프다는 것입니까? 기뻐해야 할입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전혀 죄송한 표현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지율 스님은 소송의 여왕으로 돌변하였습니다. 언론사, 전직 장관, 환경공단이사장, 판사, 전비서실장 등에게 명예훼손 줄 소송을 내었습니다. 지율 스님은 자기의 주장과 신념을 건드리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줄 소송 하였습니다. 물론 지금도 명백한 결과를 보았고 확인했는데 단 한 줄의 미안함의 글, 말씀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저를 또한 소송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추측이 드는 마음은 무슨 까닭일까요?

유명한 화가였던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심혈을 기울여 특별한 작품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화실을 찾아 온 어린아이들이 이리저리 뛰어 다니다가 그만 물감통을 넘어트리고 말았습니다. 다빈치는 너무 화가 나서 호통을 쳤더니 아이들은 겁먹고 울면서 그 화실을 뛰어났습니다.

다시 화실에는 조용함과 평온함이 흘렀습니다.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에 마음이 좀 차분해져 그림을 그리려 했으나 붓 한 번 까딱할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화를 내며 내보냈던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다빈치는 지체 없이 그 아이들을 다시 불렀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미안함을 전했습니다. “이 아저씨가 순간 화를 내어서 너희들을 놀라게 했던 것, 정말 미안해...!” 어리둥절했던 어린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의 꽃이 다시 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후 그는 그 작품을 편안한 마음과 즐거운 심정으로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었습니다.

인생의 산전, 수전, 공중전을 다 겪었던 다윗은 이런 고백적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141:3). 자신의 입에 파수꾼을 세운 사람, 자신의 입술의 문을 지키는 사람의 말의 특징은 무엇이겠습니까? 감사의 말, 이해의 말, 축복의 말, 특히 사과의 말 등입니다.

성도의 표준적인 기도라 할 수 있는 ‘주기도’에 이런 기도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자기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면 자신도 용서를 받는다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국민들은 지율 스님에게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천성산 도롱뇽 사건과 소동을 펼 때 대부분의 국민과 공직자들은 예의와 인내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명백히 나왔을 때에 지율 스님은 용서를 빌지 않았습니다.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없었습니다. 사과의 글 한 줄 없었습니다. 도리어 도롱뇽 알이 넘치는 것을 확인하고도 “슬프게도..!”라는 표현만 했을 뿐입니다. 국민들의 마음이 그에게서 떠났습니다. 그 반발인지 몰라도 그는 소송의 여왕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미안하다”, “사과한다”, “용서를 바란다”란 말 한 마디는 상대방 뿐 아니라 메아리 쳐 본인에게도 유익이요, 회복이 됩니다. 자신의 말은 자기 인생의 시금석입니다. 자신 인격의 됨됨이입니다. 혹 성도님은 지금 누구에게 미안함과 사과의 마음을 전해야 하는 상황인지 살펴보면 좋을 듯합니다.

없으면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애써 자신의 감정과 마음을 감추고 ‘왜, 내가 먼저...?!’한다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예수, 내가 먼저 찾아 왔고 내가 먼저 너를 위해 십자가를 졌는데..!”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며 예수님이 주시는 회복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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