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신은 영력이다

▲ 옥한흠 저, 국제제자훈련원, 2004-10-25, 290쪽, 10500원
몇 해 동안 교갱협 수련회에 참석하면서 유쾌한 기억들이 있다. 먼저는 거기서 몇 년 동안 소식을 알 길이 없었던 군대 시절의 전우요, 신학교 동기 목사와 몇몇 아는 목사들을 몇 년 만에 만난 일이다. 그들과의 만남은 지쳐있던 내게 큰 위로가 되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유쾌한 기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부르짖던 기억이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교갱협 수련회는 영적 충전소와 같았다.

이 책을 읽다보니 그 때의 감동이 고스란히 밀려오는 것 같았다. 현장에서 들었던 피 끓는 외침이 활자가 되어서 내 시야로 들어왔고, 내 시야로 들어온 그 외침은 이내 내 가슴을 뜨겁게 한다. 책장을 넘기면서 지나간 수련회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그 때 내가 기도하고 고민했던 과제들을 지금 얼마나 성취했는지도 돌아보게 되었다.

제일 첫 번째 설교인 ‘약한 데서 심히 큰 능력’은 몸집 부풀리기에 여념이 없는 이 시대 교회를 향한 선지자의 외침과 같았다. 얼마 전 같은 교단 모 노회에서 이단 시비가 있는 교회와 분쟁 중에 있는 타 교단 교회를 영입해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자세한 속사정은 잘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영입된 두 교회 모두가 엄청난 규모의 교회들이라는 것과 영입의 과정에서 거액이 오고 갔다는 사실에서 노회나 교단이나 몸집 부풀리기의 병폐가 반영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장자 교단임을 자처하는 교단에서 이러한 몰상식한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서 너무나 부끄러움을 느꼈다. 어느 후배 목사는 내게 이런 푸념을 했다. ‘지금 우리 교단은 어디로 가는 거예요?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니겠어요. 나 역시 마찬가지 심정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들만을 탓할 것도 아니다. 나는 과연 몸집 부풀리기에 정말 초연해 있는가? 안 되니까 못하는 것이지 정말 교회의 몸집 부풀리기에 완전히 초연해 있지 못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과연 누구를 위한 몸집 부풀리기인가? 하나님 영광을 빙자해서 내가 영광을 받으려는 속셈은 아닌가? 아마도 부패한 내 속 마음은 그럴 것이다.

저자는 하나님께서 작은 자를 주목하고 계시며, 작은 자를 통해서도 주님의 큰 능력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는 외친다. 여기서 나는 개척교회의 현실로 인한 고단함과 나의 작음에 대해 위로를 받았다. 하지만, 나의 작음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아니라, 작기 때문에 위대하신 하나님의 그 무한한 능력을 구하라는 외침으로 다가왔다.

두 번째 실린 설교에서 이런 부분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갱신은 교리적인 문제보다 교회의 질적인 문제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교회의 질적인 문제란 교회의 세속화입니다 … 세상으로부터 오는 유혹과 공격에서 성경과 하나님 백성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짝퉁’이라는 것이 있다. 소비자들이 착각하도록 너무나 비슷하게 만들어진 가짜 명품들이다. 이것들은 모양은 진품과 같지만 진품에 비해 그 질이 훨씬 떨어진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나 목회자, 성도들 가운데도 짝퉁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영적 혼란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드는 영적 짝퉁들, 영적 불량품들이 많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짝퉁 물건은 선호할지 몰라도 영적 짝퉁은 매력이 없다.

남이나 이 교계를 탓하기 전에 나 먼저 나는 짝퉁 목사가 아닌지 스스로 반문해 본다. 모양과 무늬만 목사이고, 그 질은 형편없는 존재는 아닌지 살펴보게 되었다. 이 세상의 세속적인 논리에 밀려서 온갖 세속적이고 인위적인 교회 성장 방법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나는 얼마나 그것들로부터 내 자신을 지켰는지, 그러한 것들이 교회의 질적 저하를 가져오게 될 것임을 모르고 만족해했었던 부끄러운 모습이 이 책에서 보이는 것 같다. 충만하시고 온전하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기보다 인위적이고 세속적인 방법에 매력을 느끼고 힘을 쏟기 좋아하는 나의 모습은 분명 질적으로 저하된 짝퉁 목사의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분명 갱신해야 될 모습이다. 그러나 나 자신부터도 갱신보다는 자기변명과 합리화, 그리고 안주하기에 급급함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기에 나는 ‘갱신은 곧 영력이다’고 말하고 싶다.

오늘날 ‘영력(靈力)’ 혹은 ‘영성’이 불치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내고, 썩은 이빨을 금이빨로 변하게 하는 능력쯤으로 오해하고 제한시키는 일들이 많은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을 돈을 주고 사려고 한 시몬처럼 서로 거래하는 일들도 있는 것 같다. 능력을 전수하는 자와 전수 받으려는 자 사이에 돈이 오고 간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능력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그러한 신비한 능력보다 자신의 영적인 질적 저하와 허물들을 자각하고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며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시켜 나가는 것이 진정한 영력이요 영성이라고 믿고 싶다. 물론 내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어서 스스로 합리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나는 이러한 자기 갱신의 영력(영성)이 충만할 때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그런 능력도 주시리라 믿는다.

이 갱신은 단순한 변신이나 변화가 아니라 질적으로 저하되지 않도록 부지런히 애쓰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기에 이 책에서 저자는 약한 데서 오는 심히 큰 능력을 구할 것이며, 성령으로 충만한 리더십으로 교회와 세상을 주도해 나가고, 실추된 영적 권위를 회복해야할 것이며, 오직 하나님과 그 은혜만 간절히 바라고 의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받은 소명을 회복하고 낙심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예수님을 표준으로 삼으라고 외친다. 험한 십자가를 붙잡으라고 한다. 십자가 없는 영성은 목회자를 변질시키고, 결국 짝퉁 목사로 전락시킨다고 말한다. 그리고 스데반처럼 주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서 일하다가 죽겠다는 필사의 각오가 있어야 한다고 외치면서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갱신시키고 새롭게 하실 것을 믿으며 책이 마무리 된다.

이 책의 책장을 한 장 두 장 넘기면서 내게는 누가복음의 탕자의 이야기가 자꾸만 떠올랐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탕자라고 아는 집을 뛰쳐나간 작은 아들 보다는 큰 아들의 모습이 더 강하게 떠오른다.

그 이야기를 잘 읽어보면 작은 아들의 잘못이 더 큰 것처럼 느껴진다. 대부분 그렇게 설교되어 왔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큰 아들을 주목하고 싶다. 왜냐하면 큰 아들의 모습이 이 책에서 말하는 한국 교회의 모습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아버지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큰 아들은 동생이 돌아와서 잔치가 벌어진 것에 대해서 아주 불쾌하게 생각하고 아버지께 따지고 들었다. 아버지도 물론 작은 아들이 그렇게 방탕했던 것에 대해 속이 상하고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가리켜 ‘죽었다가 다시 산 아들이며,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이라고 하면서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서 성대하게 잔치를 벌였다. 아버지는 오직 아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에 대해서 기뻐한 것이다. 그러나 모범생인 큰 아들은 그러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몰랐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서는 아버지가 염소 새끼라도 주어서 친구들과 즐기게 해 준 일이 없으면서 집안 망신시키고 방탕하다가 돌아온 동생을 위해서는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주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불만을 터트렸다. 물론 이해가 가는 태도이다. 그러나 큰 아들은 늘 집안에 머무는 모범생이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몰랐다. 아버지에게 있는 남다른 기쁨과 감격을 헤아리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달려들었다. 적어도 큰 아들이고, 아버지와 늘 함께 살아간다면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기에 그는 ‘모범생 탕자’이다.

내가 속한 교단은 한국의 장자 교단임을 자처하며 자부한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는가? 겉으로 보기에 보수 정통 신학으로 치장해 얌전해 보이고 위엄 있어 보이며, 그 수와 규모에 있어서도 장자라 일컬을 만큼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나는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버지께서 과연 지금 우리의 모습을 기뻐하고 계실까? 물론 나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자의 가정에서 자라 목회자가 된 나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작은 아들은 아니다. 그러나 모범생처럼 보인 큰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결국 아버지를 향하여 불만을 토로하는 모습은 나를 쏙 빼 닮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 한국 교회는 이 큰 아들이 범하는 잘못에서 속히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아버지의 마음을 올바로 헤아려 그 마음에 부응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시켜 나가는 올바른 영력을 회복해야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남에게 하라고 하기 전에나 자신에게서부터 시작되어야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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