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18) 교갱협 제19차 영성수련회 저녁집회

마가복음 12:13~17

저는 갈수록 심해지는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시작했던 내 목회의 삶이 육체로 끝나면 어떡하나?' 하는 고민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3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꾸중하면서 말하기를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저는 이것이 제 개인의 실존적인 고민입니다.

저는 모태신자입니다. 아버지는 장로님, 어머니는 권사님이셔서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기도와 찬송소리를 들었고 지금까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일찍 사업에 실패하시고 그 충격으로 병을 얻어 제 나이 12살 때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던 그때까지 저와 함께 하신 것도 아닙니다. 일찍부터 사업을 하시느라 객지 생활을 하셨기에 아버지 얼굴이 기억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어릴 때는 오랫동안 대구 신천동이라는 도시 빈민촌에서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초등학교도 제대로 갈 수 없을 만큼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았습니다. 물질적인 유산은 받지 못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영적 유산을 받고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며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은 명문학교를 가는 길밖에 없음을 알게 되고 대구에서 나름대로 인정받는 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 과정 가운데 중학교 3학년 때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처음으로 사무엘과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저의 이름을 직접 부르시면서 찾아오셨고 저와 대화하는 체험을 했습니다. 이후에 대학교 3학년 때 뜨거운 성령 체험을 했습니다. 저의 성령 체험은 내 안에 이미 계신 성령을 경험하는 체험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 지금까지 경제적 어려움도 있고, 사회적 곤고함은 계속 되었지만 지금까지 형통한 삶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대학을 마치고 군에 갔습니다. 저의 군 생활은 너무 편했습니다. 대대 군종병으로 제가 근무했던 교회는 부대 밖에 있어서 혼자 파견되어 언제나 열외병으로 군 생활을 마쳤습니다. 제대를 한 후에 제 아내가 저를 너무나 사랑해 줘서 결혼반지 하나 살 수 없는 형편에 결혼했습니다. 결혼 후 신대원에 갔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 담임목사님께서 저를 너무 아껴주셨고, 사랑해 주셔서 지금도 김덕신 목사님을 저의 믿음의 아버지이며, 영적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제가 신대원에 들어갈 때도 목사님께서 장학금을 주셔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신대원을 마치고는 그 교회에 전임 교역자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목사님께서 부르시더니 공부하고 오라고 하셔서 생각하지도 못했던 유학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4~5년 동안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서 바로 담임목회를 하게 됩니다. 경북 의성에서 80년 된 교회의 담임이 되었습니다. 당시 제 나이가 37세 였습니다. 그리고 2년 뒤에 지금 섬기는 범어교회로 39살에 청빙을 받고 올해로 20년째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제 자랑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하는 과정에서 필요하기에 드리는 말씀임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예수님을 만나고 지금까지 모태 신자이지만 예수님을 만났다는 실존적 고백을 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성령께서 일해 주셨고, 약점을 감추어 주셔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늘 찬송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갈수록 근심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면 어떡하나?' 라는 질문입니다.

담임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에는 지금보다 20kg이나 덜 나갔고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제가 성령에 의해 붙잡혀 주의 도구로 시작했는데, 갈수록 저도 모르게 육체로 전락해져 가는 모습 앞에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부터 애송했던 찬송이 있습니다. 바로 찬송가 314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이라는 찬양입니다. 그 가운데 3절을 부를 때마다 눈물이 많이 납니다. "이 세상 떠날 때 찬양하고 숨질 때 하는 말 이것일세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 세상 떠날 때 주님을 찬양하고 떠나야 할 텐데 목사가 그것을 근심해서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저의 근심이 됩니다.

이 세상 떠날 때 찬양하며 "내가 주님 사랑했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할 텐데,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주님 사랑하며 살았다고 말하며 생을 마감해야 할 텐데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지가 제 고민이며, 기도이고, 숙제입니다. 이 세상 떠날 때 수치와 부끄러움 앞에 숨질 때 주님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어딘가에서 객사하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다른 목사님들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제 안에 짐승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항상 이 짐승 한 마리가 저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것을 느낄 때마다 이 찬송가 가사가 저를 찌릅니다. 이 세상 떠날 때 정말 이 짐승을 이겨내고 찬송하며 숨질 때 주님 사랑했노라고 승리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제가 부목사 생활을 할 때에 심각한 영적 침체를 맞게 되었습니다. 신대원을 졸업하기 전에 1월부터 교구를 맡아서 사역했는데, 제가 섬겼던 교회 근처에는 빈민들이 많았습니다. 지금의 대구 수성구 방천시장 안쪽 지역인데 여름만 되면 홍수가 나고 수장되는 달동네 같은 곳이 제가 맡은 교구였습니다. 그때 저는 30대 초반이었고 심방을 가면서 자괴감을 많이 느꼈습니다. 기도해 주고 "예수 믿으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소망을 가지라는 설교를 한 후에 자괴감이 들었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제가 말뿐이고 여전히 그들의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병자는 여전히 아팠고, 작은 단칸방 들어가는 입구에 아궁이가 있어서 연탄가스를 마시며 들어가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증거하는 일을 하고 나오는데 '내가 이들을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내가 이렇게 드린 예배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될까?'라는 자괴감이 들면서 영적인 침체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무력한 존재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신대원을 마치고 처음으로 하는 사역지인데 영적 침체를 맛보았던 것입니다.

그 때 제가 책 한권을 발견하고 읽게 되었는데, 네덜란드 출신의 케냐 선교사로 오랫동안 사역하셨던 분이 쓴 책입니다. '예수 그 낯선 분'이라는 책입니다. '복음서의 새로운 묵상'이라는 부제를 가진 그 책에 '우리는 하나님의 돈입니다'라는 챕터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 잘 알기에 주해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십니다. '조셉 돈더즈'라는 분은 이 본문을 이렇게 풀어 갑니다. "그 데나리온 화폐에 누구의 화상이 새겨져 있고 누구의 글이 기록되어 있느냐?" "가이사의 화상이며 가이사의 글입니다." "그러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줘라 그 데나리온은 가이사의 것이다. 가이사의 얼굴이 있고 가이사의 글이 새겨져 있지 않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라."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곳이 어딥니까? 돈더즈는 말하기를 '바로 당신과 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령을 부어주시고, 성령이 우리 안에 말씀을 주시고,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겨져, 하나님의 말씀으로 너는 내 것이라고 새겨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은 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목을 '당신은 하나님의 돈입니다'라고 쓴 것입니다. 세상 돈과는 다른 돈, 하나님이 사용하는 돈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돈은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지만 하나님의 돈은 하나님이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돈이 낡았어도, 한 귀퉁이 떨어져도 그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하나님의 글이 있다면 하나님의 돈이요, 하나님이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묵상을 보며 영적 침체 속에서 거룩한 충격을 받고는 새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영적 침체를 벗어나서 성령으로 사명을 회복시켜 주시고, 떠날 때 붙잡아 주시고, 주저앉을 때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나는 또다시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전략해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을 지금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돈으로 해야 하는데 오늘 저와 교회가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의 돈으로 하지 않고 가이사의 돈으로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미문에 올라가다가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만나게 되고 그 앉은뱅이를 향하여 외친 유명한 사건을 아실 것입니다. 베드로가 뭐라고 외쳤습니까? "네가 구하는 네가 찾는 은과 금은 나에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준다. 나에게는 네가 구하는 가이사의 것은 없다. 네가 원하는 세상의 돈은 없지만 나는 하나님의 돈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앉은뱅이를 일으킨 기적이었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력인데, 오늘 우리는 왜 앉은뱅이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습니까?

오늘의 목사들이 신학교를 나온 하나님의 종들이 앉은뱅이와 같은 세상의 절망적인 사람들을 향하여 무엇을 주려고 하고 있는가? 오히려 교회가 은과 금으로 가득차 있어서 그것으로 나누어 주고, 그것으로 세워가고, 그것으로 목회를 하고, 그 대신에 우리에게 오히려 비워져 가는 것 나사렛 예수의 이름, 하나님의 돈은 점점 비워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교회 안에 유명인사는 많아지고, 오늘날 군대 4성 장군의 절반이 기독교인이고, 국회의원 2/3가 가톨릭을 포함하여 크리스천이고, 저명인사들이 교회를 가득 메우고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세상을 구원해 보겠다고 시장, 국회의원, 재벌이 있다고 목에 힘을 주고 있는 동안 교회 안에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새기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글을 새겨줘야 하는 성도들이 가이사의 것을 추구해 가는 것을 보며, 목회자들마저 예수를 믿어도 부자면 좋고, 권세 있으면 좋고, 영향력이 있는 것이 좋다는 청년운동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했던 그들이, 자신도 모르게 가이사의 사람이 되고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사람을 세웠는데 하나님의 것을 세우는 것에는 실패를 본 것이 아닙니까?

이러한 내용의 대표적인 인물이 모세라고 생각됩니다. 모세의 글은 출애굽기에 있지만 사도행전 7장을 보면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다 능하였습니다. 그의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게 되고 동족 한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입니다.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합니다.

자기 확신 속에 있는 모세의 모습을 그려놓고 있습니다. 이 결과는 우리가 잘 압니다. 실패였습니다. 여기 나오는 이 내용의 요약은, 애굽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일들이 능했고 형제 이스라엘을 돌아보며 형제애와 민족애가 불같이 타오르고 압제 당하는 자들을 위하여 정의감이 불타올랐고 사명감의 사람으로 나이 40에 하나님이 자기를 사용하여서 해방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착각한 모습, 결국 바로의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려고 한 것, 모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은 바로의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치면 가이사의 것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출애굽기의 원 텍스트 안에서도, 어느 한곳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 소명 사건, 만남 사건 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깨달아 일한 흔적이 없는 중에 스데반의 표현을 통하여 모세는 해방전쟁의 지도자로 스스로 자신을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이번 교갱협 영성수련회 주제가 "내 안에 사는 이가 그리스도니"입니다. 내 안에 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고 그 소원을 가지고 행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종이요, 여호와의 종이지요. 그럴 때에 우리는 가이사의 것, 바로의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돈으로 사용하시는 모습입니다.

목회자들이 새로운 교회에 들어가면 항상 목회의 꿈과 비전을 내세웁니다. 청년 운동하는 분들이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비전 메이커입니다. 목표를 정하고 해보자, 따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 안에서 자기비판을 해야 합니다. 이 꿈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이 사명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이 사명과 꿈을 이루어가는 방법과 도구는 어디서 구하는가? 나도 모르게 가이사의 것과 바로의 것으로 세상이 벌써 만들어 놓은 세상이 추구해 놓은 것에 옷을 종교화 하고 성경적인 것으로 덮어서 자기화 한 것은 아닌가?

우리는 모세의 실패를 통하여 엄밀하게 자신을 살펴봐야 합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여야 하는데, 내안에 그리스도는 온데 간데 없고 모세와 같은 세상의 지혜를 배워 말과 일하는데 능하며, 의협심이 불타고, 세상이 모순 속에 있는 것을 바라보며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빠져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간다는 착각 속에 빠져있다면, 당분간은 따라오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이유는 그 안에 그리스도가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역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전 교갱협 수련회 강사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다가 이찬수 목사님의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음악을 들으면 자신을 새롭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곡을 작곡한 사람이 누구고 연주한 사람이 누군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그 클래식 음악을 들었고 즐겼지만 누가 만들었는지, 누가 연주했는지는 자신에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적잖은 많은 사람들이 음악이 나오면 몇 년도 어느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했고 누가 지휘를 했는지를 아는데, 알기는 알지만 막상 그 음악을 즐기지도 못하고 듣는 자가 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 설교 준비와 연결이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모세는 동족을 알았고 일을 하려고 했다는 것은, 우리로 치면 신학적 교리적 지식이 있었으나 그는 하나님으로 기뻐한 적도 없고, 하나님으로 즐거워한 적도 없고, 오로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의 사람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비전 속에서 출애굽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도전합니다. 하나님으로 즐거워하십니까? 목회가 행복하십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시나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는 설교는 수없이 하면서, 목사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그것을 즐거워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가이사의 것을 가지고 흉내내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찬양을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시나요? 저도 마찬가지지만 찬양 시간을 찬양전문 전도사님께 맡깁니다. 교인들 마음이 열리도록 해라, 그리고는 30분 뒤에 나타나서 설교를 합니다. 제가 언젠가 제 모습을 깨닫고 미리 와서 찬양하려고 애를 씁니다. 설교자가 찬양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말씀 안에 생명을 느끼지 못하면 문제 아닐까요?

그런 중에 성령으로 시작했던 내가 육체로 전략해 가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미 교인들도 알고 있습니다. 토요일에 바쁘다고 하면 성도들이 와서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목회 20년 이상 하면 준비 안하고도 3,40분 설교할 수 있지 않습니까?"라는 말에 뼈가 있습니다. 목사 자기도 누리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하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교인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반전은 결국 모세를 찾아오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에 미디안 광야에 가서 40년이 지나 80살이 된 모세를 찾아온 하나님으로부터 출애굽의 해방전쟁은 성공하게 됩니다. 저는 이 사건을 통하여 모세의 반전은 결국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네 발에 신을 벗으라는 명령의 순종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모세야, 네 발의 신을 벗어라" 다른 사명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 여호와는 모세에게 신발을 벗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신발이 무엇입니까? 바로가 준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 신발을 신고 다닐 수 있는 사람들은 왕족이나 귀족이외에는 신발을 신을 수 없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이 지난 이후에도 아직도 신발을 신고 있었다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세상에 최고급 신발인 것입니다. 모세가 출애굽의 영도자가 될 수 있던 것은 이 신발을 벗음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바로의 것을 내어 던짐으로부터 하나님의 것이 되었고 가이사의 것을 포기함으로부터 비로소 하나님의 것이 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슨 신발을 신고 있습니까? 혹시 이 시간에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또 다른 표현으로 다가 오실지는 모르겠지만, 그 핵심은 신발을 벗으라고 하실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때 우리가 벗어야 할 신발이 무엇입니까? 노회장? 신학박사 학위? 수천 명의 담임목사? 목회 20,30년 성공적으로 했다는 이름? 아니면 명문대학을 나왔는데 사명을 가지고 신대원을 왔다는 신발인가요?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하늘과 땅처럼 다르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자신도 모르게 많은 스펙들을 가지고 목회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벗으라고 하는 신발을 두 겹, 세 겹 신으려고 합니다.

누군가 묻습니다. "목사님들 유학 갔다 오면 목회에 도움이 됩니까?" 저는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도움이 됩니다." 안 갔다 온 것보다 도움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세상의 것이 무가치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울대학교를 나온 스펙을 하나님이 전혀 사용하지 아니하는 헌신짝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무가치하다고 하기보다는, 그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당신의 형상을 다시 새겨주시고, 말씀을 분명히 새겨주셔서 하나님의 힘과 방법을 원하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습니다. 매스컴을 통하여 가난한 교황, 겸손한 교황으로 부각시켰습니다. 길거리에 나오면서 어린 아이를 안아주고 뽀뽀를 해줍니다. 세월호 사건 희생자 유가족들을 안아줍니다. 사회 속 힘든 자들의 자리에 찾아가 미사를 베푸는 것을 매스컴이 부각시켜 주었습니다. 우리 기독교 입장에서는 배가 아픕니다.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베푸는데 대통령이 신자로 뒷자리에 앉아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인기가 대단합니다.

'왜 일반 대중이 저 사람을 저렇게 연호할까?' 우리 입장에서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것으로 이단시비하는 것으로 끝낸다면 정말 졸장부라고 생각합니다. 교황이 아니라 불교의 최고 지도자들이 와서 연호를 받을 때에도 우리는 왜 일반대중들이 저렇게 연호할까를 숙고해야 한다고 봅니다. 끝까지 신학적 이단시비로 끝내면서 배 아프다는 모습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유익이 없습니다. 물론 신학자는 신학적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교회 지도자들도 차이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크게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프란치스코가 연호를 받는 것은 오늘 이 시대의 목마름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개신교 신학과 가톨릭 신학의 차이를 보고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 대중이 연호하고 있는 것은 '오늘 이 세상 사람들이, 교회 밖의 사람들이 무엇을 목말라하고 있는가?' 그것은 자기편을 목말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세야, 네가 바로의 것으로 너의 동족 노예들 앞에 섰을 때에 그들이 너를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예들 앞에 선 지도자가 바로의 공주가 신겨준 특제 신발을 신고 나섰을 때 노예 생활로 허덕이는 그 사람들이 우리 편이라고 느끼겠느냐? 이제는 신발 벗고 가거라. 너도 노예가 되어야지, 그들이 우리의 친구로 왔다는 동질감을 가질 수 있도록 옛 추억에 사로잡혀 그 신발을 신고 어떻게 히브리 노예들에게 가겠는냐? 너도 노예가 되어서 노예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인카네이션 성육신의 신비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교리적 신학적 성육신을 잘 압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임하셨다고 성탄절마다 설교하는데, 실존적인 문제 속에서 노예 속으로 갈 때 노예처럼 가지 않습니다. 서민들에게 갈 때에 서민의 모습으로 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바라보면서 보는 모습입니다. 윤복희 권사께서 부른 '여러분'이라는 노래를 아시지요? 30년 전에 발표한 노래인데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그 곡에 잠겨 눈물을 짓습니다. 저도 그 노래를 즐깁니다. 노랫말이 이렇습니다.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 줄게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내가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 할 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 나는 너의 친구야 나는 너의 영원한 노래여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 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형제야 나는 너의 친구야"

이 가사가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네가 외로울 때 내가 있어. 네가 힘들 때 내가 눈물이 되어 줄게." 이 노래가 찬송가도 아닌데 이 곡을 들으면 눈물이 흐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친구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돈을 주지 않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주지 않고, 세상의 돈 가이사의 돈을 가지고 그들 앞에 가슴을 펼치고 기도 한 번 멋있게 해주고 사진 찍고 우리 교회 이런 선한 일 한다고 홍보하지만, 밥 얻어먹는 노숙자는 그 밥을 나누어 주는 교인들과 목회자들을 얼마나 그들의 친구와 편으로 환영할까요?

이번에 교황이 환영받는 이 사건을 바라보면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방송작가 이재국이라는 분이 육아일기를 책으로 엮었습니다. '아빠 왔다'라는 책입니다. 자신이 일을 하고 들어오면 거실에서 TV 보고 게임하다가 엄마가 "아빠 왔다"라고 하면 아이들이 자신들의 방으로 다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아빠가 다가와서 유일하게 하는 말이 "요즘 학교 어때? 공부는 잘돼?" 이 말 밖에 안 묻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답해 주기가 귀찮다는 것입니다. 아빠가 자신의 삶을 공감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아빠가 다가오면 항상 힘든 질문과 거짓말을 해야 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아빠 왔다고 하면 다 자기 방으로 숨어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캠핑카를 대여해서 멋진 여행을 해야 하는 큰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 아빠들과는 달리 아이들은 그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희 집에 강아지를 얼마 동안 키웠습니다. 처음에는 저를 잘 따랐습니다. 집사람도 "강아지가 숫놈이라 당신을 좋아하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가지 않아서 강아지가 집사람의 편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일을 하고 집에 들어오면 강아지를 잠시 보고 방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집사람은 먹을 것도 주고, 목욕도 시키고, 산책도 시킵니다. 그것을 강아지는 너무 좋아합니다.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이해하시지요? 우리는 신발을 벗어야 합니다. 포장을 벗어야 합니다. 가이사의 것을 가지고 목회해서는 안됩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주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줄 것은 주고 정작 우리가 사용할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목회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 고민으로 이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이 세상 떠날 때 찬송할 수 있게 하옵소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숨질 때 "주님 사랑했습니다" 하며 인생을 마감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여 성령으로 진행되고, 성령으로 열매 맺기 위해서 제가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 저의 신발을 벗는 일입니다. 신발을 벗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모세의 경우로 치면 첫째, 내가 누구인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비로소 신발을 벗고 가라고 하실 때에 40년 전에는 자신이 간다고 했던 그가 이제는 내가 누구관대 가라고 하십니까?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속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진노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 무능력, 무가치한 먼지와 티끌이었던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발을 신고 있으면 안보입니다. 신발을 벗을 때에 비로소 내 존재가 보입니다.

두 번째 모세가 신발을 벗었을 때 나를 보내시는 이가 누구인지를 보게 됩니다. 40년 전에는 보내는 이 없이 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보내는 이를 알고 하나님에 대하여 궁금하게 됩니다. 가이사의 것을 내려놓자 하나님의 것이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의 글이 무엇인지 눈이 떠지게 됩니다.

세 번째는 출애굽기 4장을 보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증표가 보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신발을 벗을 때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신학하고 목회하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생각을 하며 살지만, 여리고 성 앞에서 도망치고 골리앗 앞에서 도망치는 배신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신발을 벗어야 하나님이 정작 내안에 계심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 앞에서 너는 칼과 창과 검으로 나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간다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혼자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보낼 자를 보내라는 말 속에 그의 형 아론이 동역자가 됩니다. 40년 전 히브리 민족 속에 들어갈 때에는 부모형제를 보지 못했습니다. 형이 있는지 부모가 있는지 관심도 없습니다. 신발을 벗자 비로소 형 아론을 만나고, 누이를 만나고, 그 때부터 동역자를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목회하면서 안하무인격의 이상한 목사들이 많습니다. 독불장군 같은 목사들이 많습니다. 목사 위에 목사 없는데 큰 교회 목사라고 작은 교회 목사를 무시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신발을 벗기 전에는 동역자들도 우습게 여기는 고약한 모습이 있지만 신발을 벗을 때에 비로소 함께 하는 동역자 아론을 얻게 되어 해방 전쟁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도 이 설교 이후에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신발을 다시 꺼내어 신을지도 모릅니다. 끝까지 불안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한 것이 성령으로 가게 해 주옵소서!" 그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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