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차]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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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차]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 남능현 목사
  • 승인 2014.08.20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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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0) 교갱협 제19차 영성수련회 폐회예배

로마서 5:1~11

어린 시절에 이런 놀이를 하곤 했습니다.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잠잔다. 잠꾸러기” 또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세수한다. 멋쟁이”라고 하며 노는 놀이입니다. 그런 모양으로 질문하고 답하다가 끝으로 가면 친구들이 술래에게 다가갔을 때 마지막 질문이 이어집니다.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라고 물으면 술래는 “밥 먹는다. 무슨 반찬? 개구리반찬.” 그리고 나서 “죽었니? 살았니?”라고 묻습니다. 2년여 전에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라는 드라마를 방영했습니다. 어렸을 때 그렇게 놀면서 불렀던 노래를 통해 잠만 자면 잠꾸러기이니 잠만 자면 안 된다는 지혜를 갖게 해주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 장성한 후 2년 전 쯤에 깨닫게 된 것입니다.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너무 일찍 나이 들어 버린 것입니다.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내 인생에서 굳이 필요없던 고통과 절망, 그 원인이 여기에 있었던 줄로 생각됩니다.

저는 자주 되뇌는 속담이 있습니다. “철들자 망령이라”는 속담입니다. 조영아 작가가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라는 작품을 냈습니다. 그 속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음속으로 여우를 불렀다.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여우는 대답이 없다. 죽었니? 살았니? 여전히 대답이 없다” 여러분, 죽었습니까? 살았습니까? 이 질문을 내 마음에 되새기면서 주님이 내게 묻는 것 같습니다. “능현아, 뭐하니? 죽었니? 살았니?” 막상 질문 앞에 서니 답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절에 사데 교회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초대 아시아의 대표적인 일곱 교회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너는 죽었다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내시기 위해서 어떤 사랑을 퍼부으셨는가? 요한복음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랑을 하면 바보가 됩니다. 어떤 친구들이 제게 SNS로 연락하는데 ‘딸 바보, 아들 바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 부모님이 딸을 너무 사랑하면 딸 바보가 됩니다. 부모님이 아들을 너무 사랑하면 아들 바보가 됩니다. 바보 중에 바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도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계산이 나오질 않습니다. 대책이 서지 않는 분입니다. 예측 불가능이십니다. ‘나 같은 자를 이렇게 사랑하셔서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주시다니.’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자격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속에서 이야기합니다. 그는 죽으셨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신데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하여 세 가지 때를 이야기합니다. 6절에 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라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심각하게 병이 들어서 살려낼 방법이 없을 때를 이야기합니다. 도덕적으로 비참합니다. 가치가 없고 연약합니다. 쓸모없는 인간이며 가능성도 없습니다. 그런 모습을 하고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8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라고 말씀하시고 10절에서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라고 이야기 합니다. 즉 연약하고, 죄인 되고, 원수가 되어 있는 그때, 연약하고 죄인 되고 원수가 되어있는 인간, 그리스도께서 나를 찾아 오셨는데, 내가 연약할 때 찾아 오셔서 나의 연약함에 대하여 죽으시고 강한 자로 더불어 살아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죄인 된 자리에 오셔서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더 이상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 살라고 주님께서 내 손 붙잡아 다시 살리셨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뿐 아니라 사람들과 더불어 원수 되어 있는데 원수 되는 짓을 뻔히 하는 그때에 원수 된 그 자리에 주님께서 찾아오시고 살려 내셨습니다. 그리고 화평 하는 자로,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 예수 생명을 누리는 자로. 이 생명을 기뻐하는 자로 나를 살려내셨습니다. 이 은혜를 바로 알 때에 더 이상 약하지 않습니다. 죄인도 아닙니다. 원수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구원에 대한 성경의 여러 표현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표현은 치료하셨다는 의미로 자유, 관계회복이라는 말로 설명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더 깊이 가면 나를 치료하셨고 자유를 주셨고 규례와 법도를 지켜가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로 인하여 생긴 화평을 성도들과 함께 누리며 세상을 향하여 전합니다.

말라기 4장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2절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치료받았습니다.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자유롭습니다. 나를 더 이상 고삐를 매어 가두지 못합니다. 자유롭게 기뻐하며 뜁니다. 그리고는 말라기 선지자는 그 치료가 무엇인가를 이어서 설명하면서 말라기서를 끝냅니다. 아비의 마음이 자식에게로 돌아오고 자식의 마음이 아비에게로 돌아옵니다. 바로 구원입니다. 온전한 치료받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고 하나님의 마음이 나를 향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내 육신의 아버지의 마음을 향하고 내 아버지의 마음이 또한 나를 향합니다. 내 마음이 선생님을 향하고 선생님이 나에게 마음을 향합니다. 성도와 성도가 서로 마음을 주고받습니다.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이것이 자유이며 치료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산자들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또 질문합니다. ‘왜 내가 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가?, 무엇에 묶여 살고 있고 무엇에 갇혀 살고 있는가?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세상이 주는 유혹에 끌려 다니고 있기 때문이구나.’ 탐심이 생깁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돋보이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중심으로 시대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노아 당시에 벌써 노아와 함께 구원받은 세 아들 가운데 둘째 아들 함이 아버지를 모욕합니다.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셈과 함과 야벳의 후손들이 각기 다르게 번성해 갑니다. 그리고는 함의 손자 노아의 증손자 중에 영웅이 태어납니다. 니므롯입니다. 그를 가리켜 최초의 영웅, 최초의 영걸이라고 표현합니다. 창세기 10장 8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래서인지 속담이 생깁니다. 9절입니다.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여호와 앞에서 영웅이 되었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재빠르게 삽니다. 여호와의 이름도 불렀던 것 같습니다. 함과 함의 후손들이 가지고 있던 정신. 여호와 앞에서 재빠르게 사는 것이 그들의 정신이었고 시대의 정신이 됩니다.

그들이 시날 평지에 정착을 합니다. 셈과 야벳의 후손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가 결국 시날 평지로 모여듭니다. 왜냐하면 시날 평지에 사는 형제들이 용감하고 재빠르며 그들의 사는 모습이 남달라 보입니다. 이 땅의 많은 것을 움켜졌습니다. 그렇기에 여기 우리가 모두 모여서 흩어지지 말고 유명한 이름을 만들자고 하여 바벨탑을 쌓습니다. 바벨도성을 건설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우리의 이름을 유명하게 하자는 니므롯 정신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흩어지게 만드십니다. 혼잡하게 만드십니다. 니므롯 정신이 도시를 건설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 세상을 보니 세상은 영웅적인 소유를 가진 사람, 영웅적 행동을 하는 사람을 높이고 두려워합니다. ‘나도 영웅적인 뭔가를 가지고 싶습니다. 나도 높은 탑을 쌓고 싶습니다.’ 그렇게 살며 우월감을 갖고 그렇게 살다보니 나의 무엇 때문에 열등감을 갖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여호와를 빙자하여 성공적 목회를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흩어 놓으실 분입니다. 무너뜨리십니다.

사도들이 살았던 모습을 묵상합니다. 여러 가지로 묵상하는데 사도들 가운데 감옥에 가신 분들이 많습니다.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소문을 들으니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냅니다. “오신 이가 당신이십니까?” 아마 세례 요한을 구해주시기를 바랬는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을 전합니다. 맹인이 눈을 떠 보고,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걷고, 병든 자가 낫고, 죽은 자가 살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전하라고 하시고 바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보냅니다.

세례 요한은 그 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말아라.” 너는 거기서 죽으라는 말씀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정의를 외치다가 이 땅에 약속한 교회가 생긴 지 얼마 안 되어 헤롯의 칼에 순교당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사랑하셨던 사도인데 주님의 특별한 훈련을 받은 사도인데 몇 가지 사역도 못하고 감옥에 갇혀 있다가 목 베임을 당하고 죽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헤롯에게 야고보가 죽고 곧이어 헤롯에 의해 잡혀서 투옥되었을 때 ‘이제 나는 죽었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병정들이 지키고 있고 결박당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감옥에서 잠이 들었고 홀연히 주의 사자가 오셨습니다.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그를 흔들어 깨웁니다. 그는 아직도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을 못한 채 천사의 이끌림을 받아 옥 밖으로 이끌려냄을 받습니다. 그렇게 살아나서 교회를 돌보고 말씀을 증거합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혔습니다. 거기서 찬송하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한밤중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문이 열리고 모든 죄수의 묶인 것이 풀립니다. 기도하고 찬송하는데 문이 열립니다. 묶인 것이 풀립니다. 간수는 깜짝 놀라서 죄수를 놓쳤으니 겁이 나서 차라리 죽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감옥에 여전히 있습니다. 크게 소리 질러 말합니다. “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 우리가 여기 있노라.” 그러면서 구원합니다. 감옥에 큰 기쁨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예루살렘에서 체포됩니다. 여기서 체포되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함에 있어 목숨도 아끼지 않을 것임을 생각하며 갇힐 줄 알고 죽음을 면치 못할지 알면서도 갑니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날 수도 있었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을 주장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시민권을 주장하면서 정식재판을 받겠다며 감옥에 남습니다.

이 사도들의 모습을 보며 생각해 봅니다. 누구는 감옥에서 풀려나고 싶었지만 죽습니다. 누구는 감옥에서 포기하고 잠이 듭니다. 그런데 천사가 그를 끌어냅니다. 누구는 감옥에서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전도하고 옥에 남겨 있다가 시간이 지난 후에 순교합니다. 이런 사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질문합니다. 여러 사도 가운데 누가 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더 큰 쓰임을 받은 사람일까요? 주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생각하며 주님은 나의 주인, 나의 왕입니다. 내가 기도하고 찬송하는데 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체험해도 내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았을 때에도 그곳에 남을 수 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내 사역의 길은 어떠해야 합니까?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을 위하여 실족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이며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말씀합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우리가 무엇으로 서 있어야 하는지를 알게 합니다. 전에는 내 뜻대로 인생을 살려고 했지만 이제는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의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도록 하나님께서는 바보같이 나 같은 자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이제는 내게 주신 은혜에 믿음으로 서있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나를 치료하시고 자유롭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 그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서 이제는 이 세상 것들과 하나님의 것에 대하여 자유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시기 직전에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의 권세는 나와 관계할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육신의 것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관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실족당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보고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얻었으니 주님의 뜻을 따라서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릅니다. 내 뜻, 내 계획이 아닌 은혜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합니다. 환란도 영광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안에서 역시 또한 즐거워합니다. 이 세상은 내게 관계할 것이 없습니다. 나는 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할 뿐입니다. 그것이 소원입니다.

제가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새겨둔 시가 있어 자주 읊조립니다. 그것은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입니다. 그의 작품 중 하나가 ‘벼랑 끝으로 오라’라는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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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으로 오라
(기욥 아폴리네르)

그가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들이 대답했다.
우린 두렵습니다.
그가 다시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들이 왔다.
그는 그들을 밀어 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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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그는 어미 독수리입니다. 그들은 새끼 독수리입니다. 그는 우리를 광야에서도 보호하시고 먹이시고 이끌어 가시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 된 하나님의 종 된 우리들입니다. 그가 말씀하십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가 또 말씀하십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리고 마지막에 왔더니 확 밀었습니다. 왜 밀어 떨어뜨리느냐고요? 네가 가지고 있는 독수리 날개를 펼치라는 것입니다. 네 날개를 펼쳐서 날아오르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떨어지느냐고요? 우리에게 날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 30년쯤 전에 이해할 수 없는 영화 제목이 있었습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라는 제목이었습니다. 그렇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고 독수리들에 대해서 풍랑도 뚫고 그 먹구름을 뚫고 폭풍우를 뚫어서 태양 빛 찬란한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불러내시고 훈련시키시는데 우리는 둥지가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두렵습니다. 여기 있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독수리가 참새만도 못하게 여기저기서 짹짹 울며 사는 것입니다. 추락해 봐야 압니다. 추락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모든 것들을 끊어 버리고 자유를 얻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날개를 펼쳐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날아오르게 하십니다. 날아가는 새에게는 방광이 없다고 합니다. 배설물이 생기면 그때그때 즉각적으로 내보냅니다. 배설물이 생기면 보관하지 않고 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생명을 아는 가장 고상한 것을 얻기 위하여 고상한 것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붙잡고 하나님이 부르신 상을 향하여 쫓아가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가진 것, 자랑을 배설물처럼 버린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주를 향해서 달려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게 묻는 것 같습니다. “너 뭐하니? 죽었니? 살았니?” 여전히 육신적입니까? 그렇다면 육의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으로라야 영의 생각을 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주님의 음성 듣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십시다. 나도 날개를 펴서 날아오르라고 하시는구나. 예수 생명을 가지고 내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 멋지게 활공하다가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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