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8/19) 교갱협 제19차 영성수련회 저녁집회

마태복음 23:1~8

저는 축구를 좋아합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골키퍼 이운재 선수가 스페인전에서 한 골을 막으면서 슬며시 두 손을 움켜쥐면서 미소 지었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이운재 선수가 어느 날 이러한 인터뷰를 했습니다. “삶은 어디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공을 막는 골키퍼와 같다. 항상 최선을 희망하면서 최악을 대비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목회도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목회를 하면 할수록 느낍니다. 불특정 다수가 있는 공동체 속에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공을 막아야 하는 골키퍼 같은 심정을 느낄 때가 자주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축구공 정도가 아니라 럭비공입니다.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 그러한 교인도 우리의 유일한 무기인 사랑과 인내로 이겨내야 하니 축구공, 럭비공 같은 분들과 함께 점점 목회 경력이 지나가게 되면 몇 십 년 된 찬양대 지휘자 성품이 엉망인 것처럼 이해할 수 없는 담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 사단과 이단 사이비가 들어와서 얼마나 큰 자리를 잡고 있는지요. 그렇다고 해서 교회는 시험치고 면접하고 새신자를 등록시킬 수가 없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 근처에 이단 사이비 장소가 있어서 부교역자에게 그곳에 가서 자료를 가져오라고 했는데 결국은 못 가지고 왔습니다. 그 교회 입구에 건장한 교인이 서있어서 교인인지 확인해서입니다. 교인이 아니고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목회하면서 이단 사이비처럼 교인을 분리해서 본당에 들여놓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봉사도 치열한 오디션을 통과한 사람만을 시킬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한 상황들을 보면서 우리는 마음이 힘들기도, 고독하기도 하고 내가 하는 목회의 길이 끝까지 가야될 길인가 고민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닌 사람들과의 관계와 나의 부정으로 말미암아 오는 고통 가운데서 어떤 때는 주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되는 것이, 대부분의 교회와 교인이 알고 있지만 그중에 가라지가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라고 했습니다. 마귀가 뿌린 가라지는 알곡보다 더 생명력이 있어서 공동체 내에서 지대하게 영향력을 끼치는 모습을 너희들이 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제 마음속에 목회하면서 너무 힘들 때에는 “아버지 하나님, 귀신은 저런 사람 안 잡아갑니까?”라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성령이 “쟤가 귀신이 보낸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하시는 듯합니다. 담임목회를 오래 한 분들은 공감될 것 같은데 그런 상황 속에서 목회한다는 것은 70 정년에 은퇴하든 그 전에 은퇴하는 분들이든 문제없이 은퇴하는 분들을 보면 부러울 수 없습니다. 

어제 장영일 목사님의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끝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이야기가 저에게는 비수로 꽂혔습니다. 과거에는 목사의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권위주의가 아닙니다. 권위는 상대방이 인정해 주는 것이 권위입니다. 초대교회 아니 3,40년 전만 해도 목사의 권위가 인정되었던 것에 비해 지금은 평신도가 목사인 것처럼 행동해도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저와 절친인 집사가 있는데 그 친구가 목사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학교 다녔냐고 물었더니 안다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목사가 되었는지 물어보니 평소에 친하게 지냈던 목사님들이 있는데 어느 날 오라고 하더니 6,7명이 목사감이라고 안수를 줬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목회자라는 하나님의 성령이 주신 직분은 굉장히 소중하고 귀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환경과 사람들과 때로는 자신의 판단과 생각과 이념과 맞지 않는다고 불특정 소수 혹은 다수가 우리 목회를 흔들고 있는 현장 속에서 목회한다는 자체는 서커스단에서 외줄 타는 사람을 넉넉히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목회 환경이 열악해진 것만큼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목회자인 우리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판단하는데 너무 무지하고 관심이 없고 아량이 많다는 것입니다. 저는 서서 이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고 여러분들은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내 자신 밖에서 유심히 바라보고 손가락질하며 판단하고 점검하는 시간이 언제쯤이었는가? 우리는 교인들이나 동역자들을 판단하는 데는 굉장히 지혜롭고 민감하고 정확합니다. 장로님들, 나를 괴롭히는 평신도 지도자들, 혹은 교단, 한국교회를 판단하고 분석하는 데는 엄청나게 예리한 내 자신을 발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존전에서 나를 밖에서 바라보면서 나를 향하여 손을 들고 ‘너는 지금 어떠한 사람이냐? 어떠한 목사냐? 어떠한 전도사냐? 어떠한 사모냐?’ 우리는 무지하기도 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고 때로는 자기에게 너무 아량이 많아서 ‘다른 교역자들은 몰라도 나는 하나님 앞에서 초심과 열심과 뒷심이 열렬한 교역자’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분이 문자를 보냈는데 문자 끝에 ‘작은 예수로부터’라고 쓰시는 것입니다. 충분히 그 뜻은, 그 겸손함은 이해합니다. 그런데 저는 한 번도 저를 ‘작은 예수’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작은 사도 바울이라도 된다고 하는 생각은 어쩌다 해본 적은 있습니다. 내 자신에 대해서 너무 너그러운 것을 성령님은 보시고 교회갱신협의회 수련회에 말씀과 성령 앞에서 자신을 조명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해 주신 2박 3일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나는 이미 경배와 찬양을 통하여 설교의 엑기스가 다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합심기도를 통해 우리의 마음속에 ‘아버지 하나님, 내가 이런 좋은 기회를 통하여 말씀 앞에서 기도하고 기대하고 기다리겠사오니 나를 향하여 변화시켜 주시는 기쁨과 기적을 베푸시고 홀로 영광을 받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길 바랍니다. 

우리는 영성수련회에서 목말라 죽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은혜의 곳간 안에서 굶어죽지 않도록 다른 사람 보지 않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평가하고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감사할 것은 감사하고, 서원할 것은 서원하여 보류된 하나님의 은총을 맛볼 수 있는 목회자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너를 너 밖에서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 무엇인지 아냐?’라고 하시며 본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바라보라는 것이지요. 바리새인은 원래 평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던 지도자입니다. 사두개인과 달리 지역 회당에서 평신도들과 함께 활동하고 자신이 말하는 율법을 지킴으로 엄청나게 존경받던 분들이 바리새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느 날 그들의 언행을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변질되었구나. 많은 짐을 싸서 저들의 어깨에 메게 하면서 너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구나. 네가 전하는 말과 행동이 일치되지 않는다. 너는 왜 이렇게 연수가 지나갈수록 더욱더 사람을 의식하고 평가를 의식하면서 너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눈은 녹내장이 꼈느냐?” 언행이 옛날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전하는 말과 행동이 일치가 되었는데 지금은 겸손을 선포하면서 잔치 자리에서 높은 자리, 회당의 윗자리에 올라가기 좋아하고 시장에서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즐겨하는 너의 모습을 볼 때에 초심을 잃었구나. 변질되었구나.” 변질된 바리새인의 모습이 혹시 여러분들에겐 계시는지요?

우리는 변질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목회 현장에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외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오신 모든 담임목사님, 부교역자님들 그 지역에서 그런대로 좋은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소문난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라든지 담임이라든지 부교역자라든지 내 나름대로 상대적인 박탈감을 동창회에 가서 느끼지 않을 만한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할 텐데 마음으로만 대답하십시오. “내가 시무교역자인데 교역자요, 남편이요, 자식으로서 내 아내에게 50,60만원밖에 줄 수 없어서 눈물 흘리는 극한 미자립 교회를 섬기는 분들이 몇 분 계십니까?” 저는 그리 많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모님은 시무교역자로 40만원을 가지고 한 달을 견뎌냅니다. 그래도 교회 부흥회를 위하여 강사를 모셨는데 그 강사가 얼마 되지 않는 사례비를 다시 주시며 “목사님께 주지 말고 아이들과 함께 쓰세요”라고 할 때에 눈물을 흘리며 “갚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평생 기도로 갚겠습니다”라고 대답할 사모님이나 여전도사님 있으면 마음으로 대답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래도 나름대로 아픔과 고통과 궁핍을 느끼고 있지만 우리는 최소한 각 지역에서 20% 혹은 10%에 속하는 교회를 섬기는 교역자요, 사역을 하는 특권층입니다. 바리새인입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현재 목회자로서의 삶이 자신을 자신 밖에서 바라보면서 ‘변질된 부분이 이거구나’라고 발견할 수 있다고 하면 오늘밤은 여러분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은혜와 회복의 밤이 될 수 있습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셨는데 미자립교회나 소형교회 교역자에게 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 줄로 생각하느냐 넘어질까 조심하라” 변질된 바리새인과 같이 행동한다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한다면 어떤 은사를 받는 것보다 소중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변화되지 아니하면 변질됩니다. 100% 진리입니다.

변질된 바리새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변질된 부자 공산주의자가 생각납니다. 원래 공산주의자들은 평민 속에서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본과 투쟁하면서 가난한 자들과 동고동락하는 것을 기뻐하고 사명으로 여겼던 귀한 공산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물질보다 이념에 자신의 목숨을 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등을 선포하면서 자신의 삶으로 평등을 실천하고 나누었습니다. 초기 공산주의자들은 그렇게 평민 속에서 추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명예가 부여되었습니다. 권세가 쥐어졌습니다. 완장을 찬 것입니다. 점점 썩어가더니 한여름 밤 생선 썩듯이 썩어가면서 향락과 사치에 찌들어 백성들을 빨아먹다가 변질되어 지금은 중국의 숙청 대상이 되어있지 않습니까?

저는 변질된 공산주의자들을 생각하면서 개그콘서트가 생각났습니다. 일주일 중에 유일한 낙이 개그콘서트 보는 것을 교인들이 다 압니다. 그래서 개그콘서트를 보고 있으면 어느 교인은 “보고 계세요? 저도 봅니다”라고 문자가 오기도 합니다. 그 한 코너에서 “뭐지? 뭐지?”라는 말을 합니다. 저는 변질된 공산주의자들을 보면서 “뭐지? 한국교회 냄새가 나네, 뭐지? 내 냄새가 나네? 뭐지?” 말씀과 성령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자신 밖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더 이상 변질되지 않기 위해서 물질보다는 소명을 다시 한 번 붙잡을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믿어지지 않겠지만 총회의 중요한 부분들은 돈으로 해결됩니다. 그분들도 다 소명을 받았던 분들입니다. 한때 제비뽑기를 계속할 것이냐, 직선제로 돌아갈 것이냐 하는 공청회 시간에 제가 “제비뽑기를 가로막거나 수정된 제비뽑기를 하는 것은 금권선거로 갈 위험이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총회에서 큰 역할을 하셨던 한 분이 “목사님들, 총회 선거는 돈입니다. 돈을 떠난 총회선거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도 돈 좋아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건과 일과 선거를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모습을 주제로 일반 TV 고발 프로그램이 파헤친다고 하면 우리 교단이나 한국 개신교회는 일어나지 못할 치명적인 상처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그분들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변질된 부분은 혹시 없는지요. 소명보다 물질에 끌려서 혹시 여러분 가운데 부자동네 교구가 선정되면 속으로 “할렐루야 아멘”이라고 하고 산동네 교구가 선정되면 “하필이면 왜 접니까?” 하면서 한탄했던 적은 없는지요. 일부 지도자들의 모습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내 자신을 한번 보고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책임져 줄 것이기 때문에 물질보다 소명 따라 살아갈 것이라고 교인에게 사모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있는가? 목회에 성공은 없습니다. 성공보다 사명이 더 중요한데 벌써 부교역자로서 목회 성공의 노하우에 대하여만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저는 이 세상에서 성공한 목사님은 한분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자신을 사용하시는 예수님께 성공을 바친 목사님, 전도사님은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직 한 가지가 있다고 한다면 악한 영과 악한 사람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증거를 구주께 보이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청지기입니다. 그런데 성공에 치우치고 거기에 내 마음과 몸과 시간을 빼앗기면서 사명을 잃어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물론 만약이라는 것은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지만 오늘까지 봤을 때에는 목회 성공보다는 사명 따라 자신을 내어 던지는 담임목사님 밑에서 목회를 배우는 것이 행복인 것을 나중은 알게 될 것입니다. 본대로 배우는데 본받고 싶어서 배우기도 하고 욕하면서도 배우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런데 좋은 의미가 아니라 좋지 않은 의미로 정치하는 목사님 밑에서 부교역자 생활했던 적잖은 분들이 더 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질보다 소명이요, 성공보다 사명이요, 인터넷 검색보다 하나님 존전 앞에서의 사색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구만리 목회가 남아 있는데 교역자 중에서 너무 하나님과의 사색과 묵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처럼 자상한 느낌을 갖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과 서먹한 관계를 지속해서 하나님 아저씨가 된 교역자도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밖에서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저씨입니까? 아버지입니까? 나는 부정하지만 설교 표절할 것들을 끄집어내서 30분 만에 설교를 완성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까? 다른 것의 역사입니까? 인터넷 검색보다 사색이,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벌써 아저씨가 되어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설교를 하는 이때에 “너는?”이라고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지금부터 하는 설교는 저에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건영아, 너는 일부 교인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있느냐? 건영아, 너는 설교 준비하기 위해서 성경 보는 것 외에 읽는 성경이 하루에 몇 장이냐? 건영아, 너는 금요심야기도회 인도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통성기도 인도하는 것 이외에 혼자 가지고 있는 기도시간 장소가 어디이고 얼마냐? 건영아, 대답 좀 해봐라. 너는 다른 교역자가 설교할 때 어디에 있느냐? 네가 네 입으로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다른 교역자 설교할 때 어디 있느냐? 다른 동역자가 설교할 때 깨닫고 은혜 받고 도전 받았던 때가 언제냐?”

저는 목회하면서 너무 이상한 부교역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친구는 저를 포함해서 모든 동역자들이 설교하면 그때 성경을 핍니다. 그리고 성경을 정독을 합니다. 그것도 교인들이 자주 왕래하는 자리에 앉아서 진지하게 성경을 정독하며 노란 펜으로 밑줄을 칩니다. 저는 굉장히 잘 참는 사람입니다. 설교 시간은 성경을 개인적으로 읽는 시간이 아닌데 1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아서 그 교역자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은 또라이입니다.” 물론 겉으로 한 게 아니라 속으로 했습니다.

‘건영아, 너는 그렇게 십자가를 통해서 가르쳐 주신 용서와 사랑과 화해와 인내에 대하여 얼마나 삶속에서 네 아내에게, 자식에게, 부모님께, 섬기는 교인들에게, 당회원들에게 하고 있느냐? 너는 단에서 설교할 때는 불의와 불법을 보면 피를 흘리면서까지라도 그것을 개혁시켜야 한다고 네 입으로 말을 했는데 말한 대로 행동하고 있느냐? 대답하라.’ 어쩌면 성령님이 이 시간 여러분에게도 질문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서 말씀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역자들이 받아야 할 은사 중에 제일 큰 은사가 자신을 바라보면서 깨닫는 은사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상 큰 은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씀드렸죠. 총회 일부 지도자, 총신대학교의 일부 지도자들, 그리고 연합단체의 목사와 장로 지도자들을 통해서 한국교회가 교회 안팎의 사람들에게 싸늘한 시선을 받고 있는데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그들은 드러난 변질된 바리새인, 공산주의자들이고 우리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보다는 제가 더 위험합니다. 감춰온 것이 밝혀질 때가 오고 숨겨온 것이 드러날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설교 시간보다 더 중요한 것이 기도회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제 장영일 목사님 말씀대로 한다면 제가 벗어야 할 신발이 무엇인지를 마지막 기회로 알고 확인하는 시간이 기도회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벗어야 할 신발이 있습니다. 기도회 시간을 통하여 신발 하나를 벗었습니다. 이제 심야기도회부터는 8시 정각에 들어갈 것을 헌신합니다. 여러분들에게 혹시 변질된 어떠한 불경건이 있다고 한다면 오늘 회개하시고 회개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시는 아름다운 목회가 되어서 여러분 자신이 강력한 무기가 되는 복스러운 목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담임목사님이든 부교역자든 랍비가 아닙니다. 형제 의식이 랍비 의식보다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우리 담임목사님들, 여러분들 너무 좋은 분들이죠. 최소한 저는 19년째 교갱협 수련회를 참석하고 있습니다. 19년 전에 옥 목사님이 “인천에서는 네가 왔으면 좋겠다. 갱신이 필요한데 네가 한 축이 되어라”라고 하셔서 19년째 동참하고 있지만 정말 만나서 교제해 보는 담임목사님들을 보면 귀한 분들입니다. 저들에게 십자가 정신이 목회에 녹아들어가고 교역자들을 인도하는 데에 녹아들어가는 것을 생생하게 보고 있습니다.

십자가 정신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은 딱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넉넉히 자신이 KO승 할 수 있는데 일부로 KO패 당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저는 목회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군중, 대제사장, 서기관들을 한 순간에 열두 영이나 되는 천사를 보내어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죽이고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제자들을 대동하여 예루살렘을 걸을 수 있는 권능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승리보다는 하나님 아버지와 죄 된 인간관계, 그리고 화목을 위하여 KO승 할 수 있는 분이 일부로 KO패 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우리 목회 속에서 역사한다는 최종적인 증표는 무엇입니까? 저는 목회는 종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철학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삶과의 관계요, 삶의 방식을 가르쳐 주는 귀한 것입니다. 관계입니다. 담임목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부교역자들과 교인들에게 일부로 KO패 당하고 KO패의 상처가 예수의 흔적인 줄 아는 목사님과 같이 목회할 수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동행이요, 그런 분들과 천국갈 수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일부러 KO패 당한 가운데에는 최소한 네 가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인내하고 배려함이 들어가 있습니다. 요즘 교황 이야기가 많이 돕니다. 지난 주일에 저는 전체 장로님들과 경건회를 하면서 장로님들께 말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교황에 대하여 이야기하네요. 저는 단에서 한마디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대표기도하는 장로님들도 절대로 교황에 대해 칭찬이나 비난하지 않게 하세요. 제가 2주가 지난 후에 기독교와 천주교에 대한 비교를 하고 판단은 교인들에게 맡길 것이니 미리 말하지 마십시오.”

지금도 교황에 대하여 말하지 않겠지만 그들의 전략은 너무나 치밀합니다. 교황을 통하여 무엇을 배웁니까? 사자 같은 지도력을 배웁니까? 교황을 통하여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막강한 독재자의 권력을 보고 있습니까? 신자든 불신자든 연호하는 것은 낮은 자와 함께하되 사랑하고 용서하고 인내하고 배려하는 지도력이 필요한 시대라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목회하는 인천제2교회는 제가 태어난 곳이고 영아부부터 청년 28살까지 평신도로 자랐습니다. 이후 소명을 받아서 장충교회에서 부교역자 생활을 하고 있는데 모(母)교회 목사님께서 교회가 어려우니 내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목사, 너는 본 교회 출신이니 배반하지 않지? 이런 문제가 있으니 좀 내려와 줘.” 저는 75회인데 한 달에 한 번씩 모입니다. 그때 당시 서울 중구 장충교회에서 부교역자 생활을 하는데 인천으로 내려가는 것을 다 반대했습니다. 예수님도 고향에 안 가셨는데 왜 가냐는 것입니다.

제가 정말 존경하는 목사님이셔서 2~3년을 생각하고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28년째가 되었습니다. 제 나이 63세인데 거의 55년을 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본교회 가서 권위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건영이가 왔거든요. 누런 코를 질질 흘리던 건영이가 왔는데 그때 부장 장로님 말씀이 우리 건영이는 유년주일학교 때 코를 흘리면 누런 코를 많이 흘렸는데 “건영아 코!”라고 하면 쑥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부끄럽기도 한 일이 있었지만 행복했습니다.

제가 본 교회에서 권위가 있었다면 이런 것입니다. 어느 날 주일 오전예배를 인도하는 중이었습니다. 정상이 아닌 미친 여자인 것 같은데 가운데 문이 열리더니 축지법을 하듯이 쭉 달려와서 설교하는 제 앞에서 합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목사님들이 우르르 튀어나와서 내쫓으려고 했습니다. 의도한 것은 전혀 아니고 제 마음속에 ‘왜 본당에 들어온 사람을 쫓아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놔두라고 하고는 앞에 가서 앉으라고 했더니 아주 순순하게 앉습니다. 맨 앞좌석에 앉아서 경청은 안하고 얼마나 산만한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설교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더니 10분 정도 지나니까 몸을 숙이고 조용히 나가더라고요. 그것을 교인들이 다 본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 교회 많은 교인들이 하는 말씀이 “나는 목사님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내쫓지 않고 앉으라고 해서 존경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때 건영이의 권위가 안정되고 고착화된 것은 사실입니다. 아주 막강하고 은사 충만하고 사자 같은 모습은 아니었으나 그것이 통한 것입니다. 교인들이 보는 시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한번은 8월 초순 엄청나게 더운 날 설교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전기가 나갔습니다. 얼마나 더운지 순식간에 몇 십초도 안 되었는데 엄청난 찜통이 되었습니다. 정말 부목사님들 예배 전에 정비하고 확인하고, 필요한 관계되는 집사님 대기하라고 할 수 있으나 ‘살다보면 꺼진 불 켜질 때도 있고 안 켜질 수도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건영아, 불 다 꺼졌으니 오랜만에 회중 속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듯했습니다.

일평생 저는 최선을 희망하면서 최악을 대비한 습관이 있는데 머리가 나쁘기 때문에 설교 원고를 외워버리는 것이 저의 목회 철칙이었습니다. 말씀 증거의 부족한 머리와 능력 없음으로 본 교회에서 생존하는 방법은 딱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어떠한 길이의 설교든 완벽하게 외운다는 것입니다. 주일 오전 설교와 목양칼럼은 1년 전에 미리 탈고한 상태에서 순교의 마음으로 바친다는 것입니다.

전기도 나가고 해서 짧게 15분 설교를 할 테니 모두 집중하라고 하고 육성으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얼마나 은혜가 되었는지 당시 선임 장로님이 저에게 오시더니 “목사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우리 한 달에 한번 씩 전기를 끕시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정색하시며 이야기하셨습니다. 만약에 제가 불이 나간 그 순간 설교단에 올라와서 불특정 다수나 부교역자들을 향하여 소리를 쳤다면 권위가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회중석 한 가운데 들어갈 때에 권위가 되었고 목양의 힘이 되었고, 어쩌면 그들에게서 십자가와 주님이 바닷가에서 말씀을 증거하는 한순간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몇 년간 목회하는데 큰 자료가 되었습니다.

저희 교회는 인천의 마지막 재개발 지역입니다. 예를 들면 청계천 한가운데 교회가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교회에 걸어오는 사람들은 5%도 되지 않습니다. 20년 동안 개척교회가 한교회도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개척할 만한 장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송도에 싱가포르 같은 신도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한참 진행되는데 차로 1,2분 거리에 있는 연수동에 수 만 채의 대단위 아파트가 있습니다. 이마트 앞 주거 지역에 3,000평 골프연습장이 들어왔는데 시민단체가 고소해서 경매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 교회 장로님들이 몽유병 환자처럼 그 3,000평 골프장을 빙글빙글 도시는 것입니다. 알면서도 왜 돌고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가면 인천에서 제일 큰 교회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2,3년 뒤에 신도시가 완성되고 연수동에 대단위 아파트 한가운데 최고의 건물을 짓고 주차시설을 만들고 최상의 교육시설을 갖춰 교회를 짓는다면 인천 최대의 교회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회에서 안건을 꺼내지 않으니 어느 장로님께서 가서 보기만이라고 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 정말 군침이 질질 흐릅니다. “인생의 기회가 몇 번 밖에 없을 텐데 목사님, 그 쪽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으세요? 당회 안건으로 안 내세요?” 제가 “글쎄요”라고 하니 “이주일간 기도하시고 여기 있자고 하면 있고요. 가자고 하면 갈께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대단위 아파트를 가 보았습니다. 제 눈으로 본 것만 한 건물에 개척교회, 미자립교회가 2개 이상인 곳이 50개가 넘었습니다. 1~2Km 이내에 70개 이상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성령님께서 ‘가면 안 된다. 네가 가면 이 70개 교회의 장년 주일학교가 네가 원치 않더라도 수평이동할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네 교회는 커질지 몰라도 인천교회에 누를 끼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니 가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는 듯했습니다.

아내와 많은 이야기를 하고 2주일이 지난 뒤에 당회에서 이야기했습니다. “그쪽 지역은 그쪽 교회에 맡깁시다. 여기까지 오겠다는 교인들만 양육해서 천국 보내도 아버지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37년이나 되어서 보수비가 몇 억씩 들어가는데 그냥 여기에 새로운 성전을 지어서 오시는 교인만 받읍시다.” 그 이후에 단 한명도 반대 발언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기도대로 그 다음 주에 발표하고 헌당하여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6개월 동안 골프연습장 근처는 심방가기가 싫었습니다. 사람인지라 그것을 보니 자꾸만 잘못 결정했나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다만 우리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의 교회는 형편과 사정에 따라 각각 다르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판정패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 나 같은 사람이 본 교회에서 지금까지 목회할 수 있는 전적 하나님 은혜 중에 한줄기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목회하면서 너무 KO승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저는 목회자들이 어떤 교회의 일이든 어떤 사람과의 관계든 KO나 판정승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단과 사이비에 대해서는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하며 반드시 이겨야 하겠으나 성도들과 장로들과 싸워서 끝까지 목회 잘한 분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도 넉넉히 이길 수 있었는데 KO패 당합니다. 예수님께서 KO패 당하셨다면 나도 교인들에게 KO패 당해야 합니다. 왜 죽지 못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인내하고 배려하면, 아버지 하나님이 앞서 가시며 목회를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다양한 목회 속에 제가 선택한 목회는 일보다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일보다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그것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은 나에게 훈장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사역합니다. 목사는 회장이 아닙니다. 같이 가는 것이 혼자 빨리 가는 것보다 좋습니다. 목회는 100미터 달리기가 아닙니다. 마라톤입니다. 저도 성령으로 시작한 것이 육체로 끝나지 않기 위하여 변질된 바리새인, 부자 된 공산주의자들의 모습이 있다면 철저히 회개하고 신발을 벗고 회개의 열매를 보여야 할 때가 되었기에 이 시간에 저를 향해 설교한 것이지 여러분들을 향하여 설교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목양하던 중 나도 모르게 십자가 바라보면서 일부러 KO패 했습니다.

‘주님은 날 위하여 죽으셨는데, 이 정도면 할렐루야 아멘!’ 하며 견디어 어느 날 여러분의 아내와 자녀들이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늦더라도 같이 가면서 십자가 정신을 실행하는 아름다운 목회의 열매를 보면서, 자신들도 하나님이 원하시면 그 길을 걷겠다는 고백을 듣는 목양의 앞날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교갱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