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새로남교회에 부임하기 전 당회 앞으로 목회자로서의 심경을 서신으로 표현한 적이 있다. 그 서신의 일부분을 소개해 본다.

"당회원 장로님 한 분 한 분의 일평생 소원이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장로”임과 동일하게 종의 소원 역시 “주님의 마음에 합한 목사,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종”입니다. 여러 장로님들과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와 새로남교회와 대전의 복음화를 위한 동역이야말로 은총중의 은총, 축복중의 축복이라 믿습니다.

영적인 팀웤과 동반자 의식을 최대한 발휘하여 진실되고, 충성스럽게 주님과 새로남교회 믿음의 가족들을 지성껏 섬길 때 주님께서는 말씀의 권능과 성령님의 은혜와 따뜻한 사랑이 넘쳐나는 예배의 공동체, 훈련의 공동체, 전도의 공동체, 선교의 공동체, 섬김의 공동체로 빚어주실 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주님 앞에 아뢰는 저의 심중의 소원은 새로남 믿음의 가족들 각인과 저의 인격과 삶이 주님의 인격과 사역에 푹 잠겨서 그 은혜와 사랑에 전생애가 점령당하며 사는 것입니다. 존귀하신 주님의 이름과 뜻과 나라만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목회자로서의 기대와 소망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은혜가 넘치는 당회를 이루는데 주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이미 당회원 장로님들께서 가지고 계시는 기도제목과 동일한 제목입니다. 모든 주님의 종들이 그러하듯, 장로님들과 부족한 저 역시 하나님의 은총과 복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확인되고 전달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1994. 9. 13)

이 서신을 부임하기 전 당회로 보낸 이후 목회의 여러 가지 아픔을 경험하였다. 우선 위임목사로 청빙되었지만, 노회에서 임시목사로 바꿔 부임자체를 무효화 시키려 했던 사건, 전임 목회자가 갑자기 임지를 서울로 옮기고 나서 후임자를 청빙하지 못하여 7개월 동안 강단이 비어 있었던 일, 후임자 청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안수집사 그룹에서 당회를 향하여 들고 일어났던 일, 당회안에서의 파당의 뿌리가 깊어 온 교회가 염려했던 일, 부임한 이 후 전임 목회자께서 대전으로 다시 내려와서 개척한 일, 제직회나 당회때에 사색당정처럼 갈등이 증폭되고 교회의 교회다움과 성도의 성도다움이 추락했던 일, 교회주변 이웃에게 싸우는 교회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전도의 문이 막힌 일, 필자가 부임하기전에 발생하거나 심화된 일이라 할지라도 모든 책임은 담임목회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 본 일이 없다. 지금 돌이켜 보면 아스라한 추억의 한 장이며, 입가에 미소를 띠고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여유가 있지만 그 때는 한 걸음 앞이 보이지 않는 암울하기 짝이 없는 때도 있었다. 갖가지 갈등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은혜로 이끌어주신 주님과, 끝까지 기도와 섬김의 자리를 지켜준 교우들께 감사드린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필자의 마음은 매우 곤비한 지경에 이른 것이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주의 종을 심부름을 시키실 때 결코 헛수고를 시키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슴에 품고 달려 왔고 사역의 현장을 통하여 이 사실을 확인하였다.’

목회의 굽이와 고비마다 도우심의 손길로 역사하신 주님께 심중 깊숙한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감사를 올려 드린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일은 목사를 목사답게

필자는 부임할 때 만남의 은총을 주시도록 주님께 간절하게 기도드렸다. 이 만남은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통한 만남을 의미한다. 아무리 장로교회라 할지라도 장로님들을 세우고 격려하고 독려하는 일은 담임목회자의 몫임에 틀림이 없다.

필자는 목회경험과 안목이 빈약하였지만 한 가지 원칙을 세웠다. 그 원칙은 ‘목양일념(牧羊一念), 정도목회(正道牧會), 은총무한(恩寵無限), 동역감사(同役感謝)’로 표현된다. 다른 사람을 탓하기 전에 나 자신이 먼저 주님께서 기뻐 쓰시는 목회자, 주님의 기쁨이 되는 목회자가 되기를 기도했다. 목회의 꼼수를 물리치고 정도를 걷기를 다짐하였다. 목사의 존경은 자리를 통하여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강단위에서의 모습과 강단아래에서의 모습의 하나됨 곧 메신저가 메시지가 될 때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주님께서는 지혜를 주셔서 부임한 이후에 수년 동안은 외부강사, 신학교 강의등의 활동을 자제하고 성도들의 마음을 돌아보아 하나로 엮는 일과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일에 집중하였다.

목사의 신뢰회복은 절대적인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신뢰 상실은 일순간에 올 수 있음을 마음에 간직하였다. 목사가 이러한 마음을 먹었다 할지라도 중직자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돌리기에는 시간과 열정과 협력하는 손길이 필수적이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목자장되시는 주님께서 연약한 종에게 목회의 뚝심을 주시도록 간구하였다. 사회에서도 말하듯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이다. 방향만 제대로 잡아놓으면 속도의 빠르고 느림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부임 20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초심에 금이 가지 않는가 걱정이 된다. 목양일념으로 나아가던 때에 우리 총회에 이단성이 있는 평강제일교회 박윤식 측이 정치적인 줄을 타고 호시탐탐 노리던 것을 알고 총회 사랑하는 마음으로 총회에 발을 디딘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지역교회 목회자로서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과연 어디인가 스스로 질문하고 있다. 어찌 되었건 목사가 가는 곳까지 교우들이 따르기 마련이다. 목자가 가는 곳까지 양떼가 따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필자는 부임 초기에 양떼를 탓하는 목자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에 지금도 그 결심이 흔들리지 않기를 기대하는 마음이다.

교우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당회원

장로교회에서 내려오는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만 사람이 일어나도 한 사람 장로를 감당할 수 없다.’ ‘장로의 수준이 당회의 수준이며 당회의 수준이 교회의 수준을 결정 짓는다.’ ‘당회는 한사람으로 인하여 상향평준화 되기보다 하향 평준화되기 쉬운 속성을 가지고 있다.’ ‘당회원이 도장 찍는 재미를 붙이면 사역의 종말을 가져 온다.’ ‘담임목사와 하나 된 당회는 세상이 범접할 수 없는 권위와 능력을 가지게 된다.’ ‘성도들은 말 장로보다, 일 장로를 원한다.’ ‘개인 기도를 오래하는 장로는 공예배 기도를 짧게 하고, 개인 기도를 짧게 하는 장로는 공예배 기도를 오래한다.’ ‘돈독이 오른 장로에게 더 기대할 것이 없다.’ ‘점잖은 장로가 막무가내 장로에게 밀린다.’

진짜 장로는 그의 장례를 집례 하는 목사의 눈에서 감동의 눈물을 흐르게 하는 장로이다. 한국교회는 장로로 선출되면 섬김은 종착역이 된다. 누가 뭐래도 한국교회 장로는 희생의 대명사이다. 교회성장과 부흥의 주역으로 쓰임 받았다.

장로의 아름다운 희생과 인격의 탁월성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교회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장로양산의 세대를 맞이하여 예기치한은 함량미달의 장로들이 출현하였다고 교회 안 밖에서 아우성이다.

장로직분의 생명력은 주님사랑과 교회 사랑과 직분사랑의 순전성(Integrity)에 있다. 만약 장로로서 순전성을 잃어버리면 마치 꺼진 등불과 같은 신세로 전락한다. 이러한 장로직분의 중차대함 때문에 진실로 좋은 제목을 일꾼으로 세워야 한다. 그의 인격과 사역, 가정생활과 대인관계를 검증해야 한다. 필자는 제자훈련과 사역훈련을 통하여 최소한의 인격을 검증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기에 진정 귀한 분들과 동역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 공적으로 간증 한 번 하지 않고 장로 직분을 받은 사람이 적지 않은 현실에서 정기적으로 말씀중심의 훈련 모임을 통하여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모습을 다듬었다. 한 번 은혜 받고 직분 받았다고 그 효력이 오래 가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동료그룹의 격려와 도전과 역할모범으로 상호 교제하는 유익을 가져 영적인 동반상승이 가능하다. 이런 면에서 디모데후서 2:22절 사도 바울이 목회자 디모데에게 권면한 말은 시의적절하다고 본다.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아름다운 동역을 이루는 당회원으로 서기 위해서는 섬기는 교회 담임목회자의 목회철학에 충실할지언정 장로는 목회철학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대신 섬김과 충성의 사역은 강하면 강할수록 좋다. 만약 담임목회자의 목회철학과 장로의 목회철학이 갈등을 일으키면 교회는 큰 소용돌이에 빠진다. 상처는 성도들이 받는다. 만약 장로가 철홍성 같은 자기 목회철학이 있다면 그러한 토양가운데서 목회하는 담임목사는 뿌리도 내리기 전에 갈등을 맛보아야 될 것이다.

마음과 마음의 소통

어떤 조직이든지 공식적인 모임과 비공식적인 모임이 있다. 정기당회는 공식모임이요, 상호친교를 위한 모임은 비공식적인 모임이다. 그런데 비공식적인 모임의 따뜻함과 훈훈함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이다. 담임목사는 자신과 당회원들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하여 마음을 쓸 뿐 아니라 당회원 상호간의 소통을 위해서도 당연히 마음을 써야 한다. 장로 부인들의 영적일체감이나 건강한 당회원 가족의식을 장려하여 내조의 기쁨을 공유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를 원했다. 정기적으로 한두차례라도 당회원 부부의 수련회형식의 모임이 있다. 또 당회원 가족의 경조사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교회사역에도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맡겨지는 일이 편중되지 아니하도록 마음을 썼다.

다음은 동역하는 장로님의 생일을 맞이하여 띄운 카드에 담은 필자의 글이다.

“사랑하는 장로님! 장로님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금년에는 서대전노회 부노회장님으로 섬기게 되셔서 저도 기쁩니다. 교회내에서는 새로남기독학교가 개교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장로님의 손자 귀염둥이 영우도 새로남기독학교에서 씩씩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며 성도들의 수고와 협력임을 감사드립니다. 장로님! 늘 목회자편에서 지지해 주시고, 모범을 보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장로님, 권사님 늘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당회의 따뜻함은 온 교회의 따뜻함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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