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gray)…, 즉 회색은 긍정과 부정의 의미가 있다. 전자는 밝은 회색(metalic color)으로서 도시적 세련미와 지성, 고급스러움과 낭만 등을 나타낸다. 후자는 짙은 회색으로서 침울함과 진지함, 회의(懷疑)와 퇴색 등을 나타낸다. 이 그레이 컬러가 사람을 지칭할 때는 중후한 낭만미가 물씬 풍기는 흰머리 중년의 신사를 의미하는 ‘로망그레이’가 있고, 사무원(화이트칼라)과 노동자(블루칼라)와 구별된 전문인(그레이칼라)이 있고, 정치적 사상적 경향을 뚜렷하게 나타내지 않는 사람을 지칭하는 회색분자를 나타내는데 쓰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회색에는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에다가 이도 저도 아닌 중립성을 가지고 있는 색이라고 할 수 있다.

설 연휴를 맞아 잠깐 찾은 강원도의 산과 도시와 바다는 회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거기에 회색머리칼인 나까지 한 몫 끼어 강원도를 더 회색으로 물들게 했다. 그러면서 회색의 설악산을 바라보며, 회색의 항구와 바다를 바라보며 회색의 미학을 음미하던 중 어울림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되었다.

색(色)…, 무엇보다 사람은 적절한 색(色)이 있어야 한다. 남자는 남자의 색이 있어야 하고, 여자는 여자의 색이 있어야 한다. 글쎄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난 남자가 여자스럽고 여자가 남자스러운 것은 딱 질색이다. 거두절미하고, 남자건 여자건 색이 있어야 한다는 건 자신만의 성적 매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매력은 자기가 자기를 보기에, 남이 자기를 보기에 보기에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빨간색으로 드러내건 흰색으로 드러내건 회색으로 드러내건 간에 자기가 보기에 아름다운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보기에도 아름다움이 느껴지게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기 혼자만의 아름다움에 빠지면 시체말로 ‘또라이’ 소리를 듣는다. 하기사 요즘은 ‘또라이’ 소리 듣는 걸 즐기는 부류들도 있더라만.

색(色)…, 한계령에서 본 푸른 소나무 잎에 흰눈이 쌓인 정경이 참 아름다웠다. 전체 배경은 그레이 컬러를 기반으로 하고 거기에 푸른 솔과 흰 눈이 빚어내는 오묘한 색, 거기에 한 점의 홍(紅)이 더하여진 풍경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이어서 본 대포항과 속초항의 정경…, 항구도 그레이 칼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레이로 물들어 있는, 다소 시크한 분위기를 내고 있는 그 거대한 도화지에 건물이 세워지고 배가 들어어고 등대가 세워지더니 홍(紅)이 더하여지고 백(白)이 더하여지고 청(靑)이 더하여지더니 한 폭의 멋진 그림이 되었다! 그 광경을 흰머리 소년이 지켜보며 서 있었으니, 분명 그 흰머리소년도 그림의 한 점이 되었을 터. 돌아오는 길엔 하나님께서 석양빛을 비추어주셔서 나를 금발머리 소년이 되게 하셨다. 허허허….

우리는 모두 밝고 아름다운 수채화같은 그런 세상을 꿈꾼다. 하지만, 짙은 회의가 가득한 다크 그레이(dark gray)의 세상에 직면해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서 우울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러던 중에 들려오는 마음의 소리, ‘너는 저 거대한 그레이 칼라 도화지에 무슨 색으로 존재하며, 무슨 색을 칠할 거니?’

미상불, 지성인은 지성인 나름대로, 종교인은 종교인 나름대로 다들 제딴엔 바른 소리 한다고 하지만 사회라는 그레이 칼라 도화지에 아름답게, 이만하면 충분하게 아름다운 색을 입히기 보다는 더 어둡게 채색하고 있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본인이 그레이 칼라 도화지를 더 칙칙한 그레이로 물들여 놓고 왜 그림이 이렇게 칙칙하냐고 하면 그건 누워서 침 뱉는 것과 같은 거 아닌가? 내가 청(靑)이건 홍(紅)이건 백(白)이건 간에, 내가 나의 색으로 그레이 칼라 도화지 한 켠을 물들여 그 시크한 사회라는 도화지를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것 이게 지성인의 사명이며 종교인의 사명이 아닌가 싶다.

기왕이면 내가 무지개색이라서 그때그때 도화지에 필요한 색을 입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만, 그러면 사람이 하나님이게? 문제는 하나님 되려고 별 짓 다하는 인간들도 있고, 하나님이 되어달라고 조르고 떼를 쓰는 인간들도 있다는 거. 그저 자기의 색 잃어버리지도 않고 낭비하지도 않고 필요할 때 자기 색을 물들여주고, 그래서 자기 색으로 인하여 그레이 칼라 도화지를 채우는 아름다운 그림의 한 점이 되면 족한 것을!

우리는 분명 아름다운 세상을 원하나 세상은 점점 추해져가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인본주의에 따라 자신이 신의 자리에 앉을만한 존재라고 강변하는 것과는 반대로 신의 품성과는 반대로 곤두박질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즉, 악한 인간이 세상을 악하게 만드는 것인게지.

그런 인식 하에 지금은 마인드 쉬프트(mind shift)가 필요한 것 같다. 지금의 그레이 칼라와 같은 세상 도화지가 더 짙어지고 탁하여지지 않고 이 정도의 회색에 머무르고 있는 것에 감사하며, 그 회색의 세상에 하늘로부터 선물로 받은 나의 색을 나의 영역에 물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다른 사람의 색가 다른 사람의 영역은 그 사람 몫으로 놔두고! 내가 다 하려고 하고, 그에게 다 하라고 요구하는 게 그레이를 더 짙고 탁하게 만드는게지! 자기 색을 잃지 않고 필요로 하는 그 곳에 자기 색을 입힐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지성인이자 신앙인이 아닐까 싶다.

돌아오는 길,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석양을 온 몸으로 받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우울한 그레이 세상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자연의 사물을 보며 오늘을 사는 나는 그레이 세상을 더 답답하게 칙칙한 그레이 세상이 되게 하고 있는지를….

주제넘게 레인보우 칼라가 되려고 하지 말고, 그런 요구에 끌려가지도 말고 요구하지도 말자. 그저 그저 나의 색을 잃지 않고, 나의 색을 드러내며, 필요로 할 때 부어지는 삶…, 그렇게 살아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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